남사친의 유효기간

남사친의 유효기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5
By:  6jayOngoing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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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웹소설 PD 이주아는 정작 자신의 연애에는 아주 형편없다. 제대로 된 연애를 위해 15년 지기 권지혁에게 소개팅 코칭을 부탁한 데다, 갑작스러운 누수로 그의 집에 얹혀살게 된다. 시선 맞추기부터 손잡기, 키스 직전의 거리까지. 친구라서 가능한 연습이라 믿었는데, 지혁의 시선도 자신의 마음도 자꾸만 선을 넘는다. 15년 우정의 유효기간이 끝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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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01화. 외로움의 이름

“남주가 이 타이밍에 고백하면 안 돼요.”

화상 회의 화면 너머로 작가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이주아는 공유 문서의 73화를 띄운 채 형광색으로 표시한 문단을 가리켰다.

“독자는 지금 남주의 마음을 알아요. 여주만 모르죠. 그런데 남주까지 전부 말해 버리면 두 사람 사이에 남은 긴장이 없어져요. 고백보다 행동을 먼저 쌓아 주세요. 여주가 아플 때 약을 사 오는 것, 다른 남자 이야기에 대답이 짧아지는 것. 독자가 ‘쟤 좋아하네’ 하고 먼저 알아채게요.”

“그럼 고백은 80화쯤으로 미룰까요?”

“네. 대신 77화에 손 한 번 잡죠. 별것 아닌 접촉인데 둘 다 예전으로 못 돌아가는 느낌으로.”

작가는 금세 납득했고, 회의는 예정보다 일찍 끝났다. 주아는 수정 방향을 정리한 메일을 보내고 다음 작품의 지표를 열었다. 전날 공개된 신작은 초반 이탈이 예상보다 컸다. 유입 경로를 다시 확인하고 프로모션팀에 배너 문구 교체를 요청하고 나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로맨스팀 6년 차 PD 이주아는 남의 연애가 어디서 막혔는지 찾아내는 데 능했다. 고백이 성급한지, 이별이 억지스러운지, 독자가 어느 대목에서 설레야 하는지까지 숫자와 문장 양쪽으로 짚었다.

정작 자기 연애 이력은 신입 작가의 빈 기획서만큼 단출했다.

마음이 갔던 사람은 몇 있었다. 점심을 두어 번 먹거나 영화를 보자는 약속까지 잡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자신의 일상 안에 새로 들이는 단계가 되면 늘 멈췄다. 바쁘다는 핑계가 가장 쉬웠다.

“이 PD, 밥 안 먹어?”

한서영 팀장이 파티션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주아는 모니터 구석의 시간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어야죠. 오늘 메뉴 뭐예요?”

“구내식당. 그리고 오늘은 도망 못 가. 다들 너한테 할 말 있대.”

“불길하게 왜 그래요.”

불길한 예감은 정확했다.

식판을 들고 앉자마자 맞은편의 막내 PD가 왼손을 내밀었다. 약지에 낀 작은 다이아몬드가 형광등 아래서 반짝였다. 테이블에 축하가 쏟아졌다. 지난달에는 동갑인 마케팅팀 직원이 결혼했고, 지난주에는 대학 동기가 임신 소식을 알렸다. 오늘은 2년 사귄 애인과 내년 봄에 결혼한다는 후배였다.

주아도 진심으로 축하했다. 다만 축하가 끝난 뒤 예상대로 질문의 방향이 자신에게 돌아왔다.

“이 PD님은 만나는 분 없어요?”

“없어.”

“소개팅도 안 하시잖아요. 눈이 너무 높은 거 아니에요?”

“눈 안 높아. 사람 볼 시간이 없지.”

서영이 콩나물국을 한 숟갈 뜨며 끼어들었다.

“지난번 소개팅에서 상대방한테 이직 사유랑 앞으로의 계획을 캐물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닌데.”

“대화가 끊겨서 물은 거예요.”

“면접도 아니고 왜 그걸 물어.”

“중요하잖아요. 삶의 방향.”

후배 둘이 동시에 웃었다. 주아는 억울했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지난 소개팅 남자는 성실했고 말끔했지만, 서로의 취미를 다 말한 뒤 찾아온 정적을 견디지 못해 주아가 질문을 쏟아 냈다. 남자는 최종 면접을 마친 표정으로 카페를 나갔다.

연애를 꼭 해야 한다는 조급함은 없었다. 혼자서도 잘 살았고, 외롭다고 느낄 틈은 더더욱 없었다. 퇴근길에 전화할 사람이 있었고 주말에 밥 먹자고 부를 사람도 있었다. 아프면 죽을 사 들고 와 약을 먹였으며, 취업에 연달아 실패했을 때 강변을 말없이 오래 걸어 준 친구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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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화. 외로움의 이름
“남주가 이 타이밍에 고백하면 안 돼요.”화상 회의 화면 너머로 작가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이주아는 공유 문서의 73화를 띄운 채 형광색으로 표시한 문단을 가리켰다.“독자는 지금 남주의 마음을 알아요. 여주만 모르죠. 그런데 남주까지 전부 말해 버리면 두 사람 사이에 남은 긴장이 없어져요. 고백보다 행동을 먼저 쌓아 주세요. 여주가 아플 때 약을 사 오는 것, 다른 남자 이야기에 대답이 짧아지는 것. 독자가 ‘쟤 좋아하네’ 하고 먼저 알아채게요.”“그럼 고백은 80화쯤으로 미룰까요?”“네. 대신 77화에 손 한 번 잡죠. 별것 아닌 접촉인데 둘 다 예전으로 못 돌아가는 느낌으로.”작가는 금세 납득했고, 회의는 예정보다 일찍 끝났다. 주아는 수정 방향을 정리한 메일을 보내고 다음 작품의 지표를 열었다. 전날 공개된 신작은 초반 이탈이 예상보다 컸다. 유입 경로를 다시 확인하고 프로모션팀에 배너 문구 교체를 요청하고 나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로맨스팀 6년 차 PD 이주아는 남의 연애가 어디서 막혔는지 찾아내는 데 능했다. 고백이 성급한지, 이별이 억지스러운지, 독자가 어느 대목에서 설레야 하는지까지 숫자와 문장 양쪽으로 짚었다.정작 자기 연애 이력은 신입 작가의 빈 기획서만큼 단출했다.마음이 갔던 사람은 몇 있었다. 점심을 두어 번 먹거나 영화를 보자는 약속까지 잡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자신의 일상 안에 새로 들이는 단계가 되면 늘 멈췄다. 바쁘다는 핑계가 가장 쉬웠다.“이 PD, 밥 안 먹어?”한서영 팀장이 파티션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주아는 모니터 구석의 시간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먹어야죠. 오늘 메뉴 뭐예요?”“구내식당. 그리고 오늘은 도망 못 가. 다들 너한테 할 말 있대.”“불길하게 왜 그래요.”불길한 예감은 정확했다.식판을 들고 앉자마자 맞은편의 막내 PD가 왼손을 내밀었다. 약지에 낀 작은 다이아몬드가 형광등 아래서 반짝였다. 테이블에 축하가 쏟아졌다. 지난달에는 동갑인 마케팅팀 직원이 결혼했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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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화. 이번에는 연애를
권지혁.15년 동안 주아의 일상에 너무 당연하게 들어와 있어서, 그가 채우는 자리를 외로움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그런데 후배의 반지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반짝이는 보석보다 옆자리 동료가 결혼 날짜를 묻자 환해지던 후배의 얼굴이 오래 남았다.주아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나도 해 볼까.”“뭘?”“연애.”서영이 눈썹을 들었다.“이번엔 진짜로. 조건표만 보다가 끝내지 말고, 괜찮은 사람 있으면 제대로 만나 보려고요.”“좋아. 그 말 취소하기 없기다.”서영은 기다렸다는 듯 휴대전화를 꺼냈다. 대학 선배의 회사에 있는 사람이라며 사진과 간단한 소개가 든 메시지를 넘겨줬다.최민석, 32살. IT 스타트업 전략기획 이사. 등산과 전시 관람을 좋아하고 비흡연자. 검은 셔츠 차림의 남자는 과하게 꾸미지 않은 인상이었고, 웃을 때 눈가가 부드러웠다.“사람 괜찮다는 평은 확실해. 지난번에 선배 결혼식에서 잠깐 봤는데 말도 잘 통했고.”주아는 화면을 확대하지 않았다. 사진 한 장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싶지는 않았다.“저 좋다고 하면 만나 볼게요.”“웬일이야. 바로 거절 안 하고.”“선언했잖아요. 이번에는 제대로 해 본다고.”말하고 나니 정말 약속이 된 기분이었다. 서영이 그 자리에서 연락을 넣었고, 오후 회의가 끝날 무렵 토요일 저녁 약속이 잡혔다.프로필을 다시 읽자 그제야 긴장이 밀려왔다. 타인의 감정선은 회차별로 쪼개 볼 수 있어도 자신의 첫 만남에는 수정 회의가 없었다.주아는 대화창 목록을 내리다가 가장 익숙한 이름을 눌렀다.[오늘 저녁 시간 돼?]답장은 거의 바로 왔다.[8시 이후.][센터로 갈게. 밥 먹자.][너 또 점심 대충 먹었지.]주아는 구내식당 식판 사진을 보내고 대화를 닫았다. 묻지도 않았는데 식사부터 확인하는 건 중학생 때부터 변하지 않은 권지혁의 습관이었다.***밤 8시가 넘은 트레이닝 센터는 조용했다. 마지막 회원이 샤워실로 들어갔고, 직원들이 기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주아는 카운터에 가방을 내려놓은 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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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화. 제대로 가르쳐 줄게
현우는 웃으면서도 순순히 나갔다. 주아는 지혁이 던져 준 운동화를 신고 근처 순댓국집으로 향했다. 회사에서 바로 오는 날을 대비해 지혁이 센터에 갖다 둔 주아 전용 신발이었다.“그래서 무슨 일인데.”국밥집에 앉자 지혁이 물었다.“일 없으면 밥도 못 먹냐?”“네가 먼저 저녁 먹자고 하는 날은 일 있지.”주아는 깍두기를 베어 물며 그를 봤다.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는 얼굴. 자신의 흑역사를 중학교 때부터 대부분 알고 있고, 민낯이나 취중 실수쯤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남자.아무리 생각해도 적임자였다.“남자 좀 소개해 줘.”지혁이 물컵을 들다 말았다.“갑자기?”“네 센터에 괜찮은 사람 많잖아. 운동도 꾸준히 하고 직업 멀쩡한 사람.”“회원 개인 정보를 네 소개팅에 쓰라고?”“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범죄자 같네. 됐어. 사실 소개는 이미 받았어.”멈췄던 물컵이 식탁에 놓였다. 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컸다.“누구.”“서영 팀장님 아는 사람. 최민석이라고, 스타트업 다녀.”“뭐 하는 사람인데.”“전략기획 이사. 32살. 토요일에 보기로 했어.”지혁은 국밥에 손도 대지 않고 주아를 바라봤다. 주아는 그 표정을 15년치 기억 속에서 적당한 이름으로 분류했다. 걱정. 못 미더움. 사고 치기 직전인 자신을 볼 때마다 나오는 얼굴.“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해.”“내가 왜.”“남자 입장에서 조언 좀 해 줘. 내가 소개팅만 하면 인터뷰처럼 군대. 눈 마주치는 것도 어색하고, 상대가 조금만 가까이 앉으면 굳는대.”“누가 그래.”“지난번 소개팅 주선자가.”“그걸 또 전달했어?”“객관적인 피드백이지. 아무튼 이번엔 고치려고. 너 사람 자세 교정하는 게 직업이잖아. 대화 자세도 좀 교정해 줘.”“억지도 정도가 있지.”“권 대표님 실력 좋다며. 회원 맞춤형으로 가르쳐 주세요.”주아가 숟가락을 마이크처럼 내밀자 지혁이 밀어냈다. 평소 같으면 못 이기는 척 한숨을 쉬고 끝났을 대화였다. 그런데 그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그 사람 마음에 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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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화. 눈을 피하지 마
제대로 가르쳐 주겠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다음 날 저녁, 주아는 지혁의 집 식탁 앞에 앉아 한참째 모의 소개팅을 당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배달 음식과 맥주가 올라오던 자리에 물 두 잔만 놓여 있었다. 지혁은 맞은편에서 팔짱을 낀 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주말에는 주로 뭐 하세요?”주아가 최대한 다정하게 물었다.“운동합니다.”“어떤 운동 좋아하세요?”“다 합니다.”“최근에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는 어디예요?”“없습니다.”주아가 결국 탁자를 쳤다.“야, 너처럼 대답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상대가 단답하면 다음 질문지 넘길 거냐?”“대화를 이어 가야지.”“지금은 조사 중이고.”지혁이 주아 앞에 놓인 메모지를 손가락으로 끌어왔다. 취미, 직업, 가족 관계, 결혼관 아래에 질문이 빼곡했다. 그는 종이를 한 번 훑더니 뒤집어 놓았다.“이거 보지 마.”“머리가 하얘지면 어떡해.”“대답을 듣고 궁금한 걸 물어. 다음 항목 체크하지 말고.”“그 정도는 나도 알아.”“아는 애가 남의 연봉 전망을 왜 물어.”“그건 안 물을 거야.”주아는 종이를 되찾으려다 지혁이 들고 있는 손을 툭 쳤다. 그가 팔을 높이 들자 닿지 않았다. 187센티미터와 다툴 때마다 겪는 비겁한 전술이었다.“내놔.”“안 돼.”“권지혁.”“대신 날 봐.”주아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사람이 말하는데 자꾸 컵이나 메뉴판 보지 말고.”“내가 언제.”“방금도 그랬어.”그는 들었던 팔을 내리고 몸을 바로 세웠다.“이번에는 먼저 눈 피하지 마.”“그게 무슨 도움이 돼?”그 말에 괜한 승부욕이 생겼다. 주아는 턱을 당기고 지혁을 똑바로 봤다.15년 동안 수도 없이 본 얼굴이었다. 중학교 2학년, 전학 온 첫날 체육관 구석에서 혼자 신발 끈을 묶던 무뚝뚝한 아이. 수영장 관중석에서 주아가 목이 터져라 이름을 불러도 경기 전에는 아는 척 한 번 안 하던 선수. 지금은 회원 예약을 몇 달씩 기다려야 한다는 센터 대표.왼쪽 눈썹 끝에 희미한 흉터가 있다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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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화. 손을 잡는 연습
주아가 답장을 쓰자 지혁이 화면에 찍힌 이름을 봤다.“벌써 연락해?”“약속이 나흘 뒤인데 연락하지. 고수 못 먹는다고 말해도 되겠지?”“생양파도 못 먹잖아.”“첫 연락부터 편식 목록을 다 보내면 피곤해 보이지 않을까?”“먹지도 못하는 거 앞에 두고 괜찮은 척하는 게 더 피곤해.”말은 맞았다. 주아가 생양파까지 덧붙이자 민석은 바로 식당에 전달하겠다고 답했다. 주아는 응답 속도와 문장의 인상을 습관처럼 분석했다.“답이 빠르지만 재촉하는 말은 없고, 필요한 정보만 정확히 주네. 커뮤니케이션 점수는 일단 합격.”“사람한테 점수 매기지 말라니까.”“직업병이야.”“그 버릇부터 고쳐.”지혁이 잘라 말했지만 시선은 한동안 꺼진 휴대전화 위에 남아 있었다. 주아는 친구가 소개팅 상대를 검증해 주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학창 시절에도 주아가 좋아한다는 남학생 이름만 나오면 지혁은 성적과 교우 관계까지 물었다.“걱정 마. 서영 팀장님이 성격은 보증했어.”“그 사람이 연애할 때 어떤지는 팀장도 모르잖아.”“그래서 만나서 알아보는 거야. 넌 코칭만 해.”지혁은 입술 안쪽을 한 번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지혁은 소파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센터에서 하듯 주아를 일으켜 세우고 어깨를 확인했다.“그리고 너 긴장하면 여기부터 올라가.”손가락이 양쪽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얇은 블라우스 너머로 정확히 굳은 부위를 찾았다.“아파.”“힘 빼.”“빼고 있어.”“하나도 안 뺐어.”그가 뒤에서 팔꿈치 위치를 조정했다. 센터에서 자세를 봐 줄 때도 몇 번 받아 본 교정이었다. 지혁의 손은 필요한 곳에만 닿았고 힘은 일정했다. 그런데 조금 전 눈을 마주친 탓인지 목 가까이에 놓인 손바닥이 유난히 선명했다.주아는 몸을 한 걸음 앞으로 뺐다.“이 정도면 됐어. 소개팅 가서 체력 측정할 것도 아니고.”지혁의 손이 곧바로 떨어졌다. 그는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가까이 오는 것도 불편하다며.”“갑자기 그러면 그렇지.”“지금처럼 피할 거야?”“처음 보는 사람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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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화. 같은 집의 밤
“상대가 갑자기 잡으면?”“싫으면 빼.”“괜찮은 사람이면?”“네가 잡고 싶으면 잡아.”“너 지금 가르치는 거 맞아? 다 내 마음대로 하라는 소리뿐인데.”“그게 정답이니까.”지혁의 엄지가 손등을 한 번 천천히 쓸었다. 설명을 위한 동작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전에 초인종이 울렸다.둘 다 현관을 보았지만 손은 그대로였다.초인종이 한 번 더 울리고서야 지혁이 손을 놓았다. 주아는 손바닥을 바지 위에 한 번 문지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이 시간에 누구야?”“배달시켰어. 너 저녁 안 먹었잖아.”현관으로 가다 지혁이 돌아봤다.“그리고 불편하면 바로 빼. 상대 기분 봐주지 말고.”주아는 장난으로 넘기려다 그의 표정이 진지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혁은 그제야 문을 열었다.현관으로 향하는 지혁의 뒷모습을 보며 주아는 여전히 따뜻한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냥 친구 손을 잡은 것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데 설명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했다.***식사를 마칠 무렵 관리사무소에서 전화가 왔다.주아는 처음에는 단순한 누수 확인인 줄 알았다. 그러나 자신의 오피스텔 현관을 열자 바닥까지 번진 물과 들뜬 벽지가 보였다. 위층 공용 배관이 터지면서 천장 안쪽으로 물이 샜고, 주아가 외출한 사이 주방과 작은방까지 흘러든 상태였다.“세입자분 짐은 최대한 빼셔야겠습니다.”관리소 직원이 젖은 천장을 올려다봤다.“배관 교체만 하면 며칠인데 단열재가 다 젖었어요. 건조하고 천장, 벽지 다시 하는 데 3주에서 한 달은 잡으셔야 해요.”“한 달이요?”주아는 망가진 바닥보다 다음 주 출근부터 걱정했다. 부모님 댁은 회사에서 왕복 3시간이 넘었고, 회사 근처 레지던스는 검색할 때마다 예약 마감이었다. 마침 행사 시즌까지 겹쳐 단기 숙소 가격은 월세의 몇 배였다.당황한 건 잠깐이었다. 주아는 관리소 직원에게 누수 원인과 공사 책임 주체를 다시 확인하고, 젖은 가구와 천장을 차례로 촬영했다. 보험 접수 번호를 받아 메모한 뒤 서영에게 아침 회의는 원격으로 참여하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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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화. 낯선 천장
주아는 낯선 천장을 보자마자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알아차렸다.문밖에서 칼과 도마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일정한 간격으로 두 번, 잠시 뒤 세 번. 지혁이 아침마다 사과를 자르는 소리였다. 가끔 자고 간 날에도 들었으니 낯설지 않아야 했다.다만 오늘은 소파에서 숙취를 달래다 눈을 뜬 것도, 밤늦게 영화를 보다 귀가가 귀찮아 눌러앉은 것도 아니었다. 앞으로 짧으면 3주, 길면 한 달을 이 집에서 살아야 했다.주아는 침대 옆에 놓인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알람이 울리기 전이었다.방문을 열자 고소한 냄새가 먼저 들어왔다. 지혁은 회색 반소매 티셔츠와 검은 트레이닝 바지 차림으로 프라이팬 앞에 서 있었다. 식탁에는 달걀, 사과, 구운 토마토와 주아가 좋아하는 소금빵이 놓여 있었다.“너 매일 아침부터 이렇게 먹어?”“너 매일 아침도 안 먹어?”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방식도 평소와 같았다. 주아는 의자를 빼고 앉으며 큰 티셔츠 소매에 손을 넣었다. 어젯밤 급하게 챙긴 잠옷은 대학 때 체육대회에서 받은 단체 티셔츠였다. 지혁 앞에서 목 늘어난 티셔츠를 입는 건 아무렇지 않았다.“난 커피가 아침인데.”“그래서 오후 4시에 속 쓰리다고 약 찾잖아.”지혁은 접시를 주아 앞에 밀고 커피는 제 쪽에 뒀다. 달걀을 반쯤 먹어야 주겠다는 뜻이었다.“여기 교도소야?”“교도소도 밥은 먹여.”“권지혁, 동거 첫날부터 너무한 거 아니냐.”달걀을 자르던 칼끝이 접시 위에서 멈췄다.주아는 아무 생각 없이 나온 단어를 되짚었다.“왜. 같이 사니까 동거 맞잖아.”“맞지.”지혁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욕실 수납장 오른쪽 비워 놨어. 수건은 아래 칸 쓰면 되고.”“칫솔 사야 하는데.”“새것 넣어 뒀어.”“이 집은 없는 게 없네.”“네가 자꾸 놓고 가니까 쌓인 거야.”욕실에는 정말 주아 몫의 자리가 생겨 있었다. 새 칫솔과 미개봉 화장솜, 전에 두고 간 세안제까지 가지런히 놓였다. 낯선 집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건 지혁의 집 곳곳에 원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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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화. 너 같은 옷
“어깨 또 굳었더라. 내일 스트레칭 해.”그는 그 말만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런 일은 예전에도 많았다. 회사에서 첫 작품을 크게 실패하고 지혁의 집 소파에서 울다 잠든 날에도 그는 말없이 담요를 덮어 줬다.달라진 게 있다면 다음 날 아침 다시 이 집에서 마주친다는 사실이었다.그리고 토요일, 예상하지 못한 쪽에서 더 큰 차이가 생겼다.소개팅은 오후 6시였다. 주아는 오전 내내 미뤄 둔 원고를 읽고 3시쯤 샤워를 마쳤다. 손님방에 옷을 늘어놓고 고민하다 거실로 나왔는데, 마침 지혁도 운동을 끝내고 욕실에서 나오는 중이었다.젖은 머리에서 떨어진 물이 흰 티셔츠 어깨를 군데군데 적셨다. 얇은 천이 등에 붙었다가 그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 때마다 떨어졌다. 수영으로 만들어진 넓은 어깨와 길게 뻗은 팔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경기장에서 수영복 차림도 수없이 봤다.그런데 같은 집 복도에서 마주친 지혁은 경기 사진 속 선수와 달랐다. 막 씻고 나온 비누 향이 닿을 만큼 가까웠고, 목 아래 젖은 천이 움직이는 것까지 보였다.주아는 들고 있던 옷걸이를 가슴 앞에 세웠다.“뭐야.”지혁이 수건을 목에 걸며 물었다.“아니. 바닥에 물 떨어져.”그가 뒤를 돌아봤다. 마른 마룻바닥에는 물방울 하나 없었다.“어디.”“앞으로 떨어뜨리지 말라고.”주아는 괜히 먼저 거실로 가서 옷걸이를 소파에 펼쳤다. 지혁이 다가오자 조금 전까지 제대로 작동하던 판단력이 흐려졌다. 업무 회의에서는 수많은 표지 시안도 거침없이 추리면서, 소개팅 옷 몇 벌을 앞에 두고는 결정을 못 했다.“골라 줘.”“내가?”“코치가 끝까지 책임져야지. 검은 원피스, 셔츠에 슬랙스, 아니면 이거.”지혁은 소파 등받이에 한 팔을 얹고 옷을 살폈다. 가장 먼저 검은 원피스를 들었다가 주아의 어깨에 대 봤다.“이건 아니야.”“왜? 제일 비싼 건데.”“얼굴이 죽어.”그는 셔츠와 슬랙스도 옆으로 치웠다.“이건 회사 사람이랑 저녁 먹는 것 같고.”마지막으로 연한 청록색 원피스를 골라 주아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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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화. 보내기 싫어서
지혁은 저녁에 호텔에서 스포츠 브랜드와 미팅이 있다고 했다. 소개팅 장소가 같은 동네라 주아를 데려다준 뒤 바로 갈 예정이었다.“30분이면 돼.”그 말대로 지혁은 오래 걸리지 않아 방에서 나왔다.짙은 남색 정장에 흰 셔츠, 장식 없는 검은 타이였다. 평소 센터에서 보던 티셔츠와 트레이닝복이 사라지자 어깨와 허리의 비율이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젖었던 머리는 이마가 드러나도록 정리돼 있었다.주아는 귀걸이를 끼다 말고 거울 속 지혁을 봤다.정장을 처음 본 것도 아닌데, 같은 집에서 외출 준비를 하며 거울에 나란히 비친 모습은 낯설었다. 평소처럼 잘생겼다고 놀리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왜.”지혁이 넥타이를 매만지며 물었다.“정장도 있구나 싶어서.”“날 뭘로 보는 거냐.”“365일 트레이닝복 입는 사람.”주아는 서둘러 화장대로 시선을 내렸다. 목걸이 고리가 좀처럼 잠기지 않았다. 손톱 끝이 자꾸 미끄러졌다.“야, 이것 좀 해 줘.”평소처럼 목걸이를 내밀고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겼다. 지혁은 바로 받지 않았다.“내가?”“여기 너 말고 누가 있는데.”그가 뒤로 다가오자 거울 속에 두 사람이 겹쳤다. 지혁의 손등이 목덜미에 닿지 않도록 조심스레 움직였다. 작은 고리가 한 번 빗나갔고, 손끝이 머리카락 아래 피부를 스쳤다.주아는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가만있어.”“가만있는데.”“또 굳었어.”지혁의 말과 함께 목 가까이로 따뜻한 숨이 닿았다. 목걸이를 잠그는 데 걸린 시간은 몇 초뿐이었다. 그가 한 걸음 물러났는데도 주아는 바로 머리카락을 내리지 못했다.“됐어.”거울 속 지혁이 말했다.“예쁘네.”목걸이를 말한 건지, 자신을 말한 건지 물을 수 없었다. 주아는 괜히 펜던트 위치만 바로잡았다.***차 안에서는 업무 전화가 이어져 다행이었다. 지혁은 브랜드 담당자와 센터의 재활 프로그램 협업 범위를 논의했다. 촬영용으로 이름만 빌려 달라는 제안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실제 코치가 참여해 운동 데이터를 검수해야 한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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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첫 만남의 기준
최민석은 사진보다 인상이 부드러웠다.“이주아 님 맞으시죠? 최민석입니다.”“네. 제가 늦진 않았죠?”“제가 조금 일찍 왔습니다.”그는 의자를 빼 주거나 외투를 받아 들려 하지 않았다. 편한 자리를 고르게 했고, 주아가 가방 둘 곳을 찾자 빈 의자만 당겨 줬다. 과하지 않게 세심한 사람이었다.주아는 자리에 앉으며 어깨를 내렸다. 긴장하면 어깨부터 올라간다는 지혁의 지적이 떠올라서였다.“한서영 씨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로맨스 웹소설 만드신다고요.”“네, 직접 쓰는 건 아니고 작품을 기획하고 편집해요. 작가님이 글에 집중할 수 있게 일정이나 공개 전략도 같이 잡고요.”“그럼 독자로서 재미있다는 판단과 성과가 나겠다는 판단이 다를 때도 있겠네요.”“많죠.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꼭 많은 독자에게 쉽게 발견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도 둘 중 하나를 포기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작품의 장점을 가장 잘 알아볼 독자에게 닿게 만드는 게 제 일이거든요.”“좋은 전략 담당자네요.”“그쪽도 전략기획 하신다고 들었어요.”“저는 그렇게 낭만적으로 말하진 못합니다. 대표가 벌여 놓은 일을 숫자로 말리거나, 말려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방법을 찾는 쪽입니다.”주아가 웃자 민석도 따라 웃었다.대화는 예상보다 수월했다. 민석은 스타트업의 화려한 성장담만 늘어놓지 않았다. 계획이 자주 바뀌는 조직에서 사람을 설득하는 방식, 성과가 나지 않는 사업을 접을 때의 책임 같은 이야기를 솔직하게 했다. 주아가 작품 하나를 중단했던 경험을 말하자 섣불리 위로하지 않고 어떤 기준으로 결정했는지 물었다.주아는 그를 제대로 보기 위해 눈을 마주쳤다. 민석의 시선은 편안했고, 부담을 느끼면 먼저 음식 쪽으로 시선을 돌릴 여유도 줬다.그런데 시선을 오래 유지할수록 전날 식탁 맞은편에 앉았던 지혁이 떠올랐다. 아무 말 없이 자신만 보고 있다가, 먼저 피했다고 지적하던 무심한 목소리.주아는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음식은 괜찮으세요?”민석이 물었다.“네. 아, 제가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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