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로맨스 웹소설 PD 이주아는 정작 자신의 연애에는 아주 형편없다. 제대로 된 연애를 위해 15년 지기 권지혁에게 소개팅 코칭을 부탁한 데다, 갑작스러운 누수로 그의 집에 얹혀살게 된다. 시선 맞추기부터 손잡기, 키스 직전의 거리까지. 친구라서 가능한 연습이라 믿었는데, 지혁의 시선도 자신의 마음도 자꾸만 선을 넘는다. 15년 우정의 유효기간이 끝나기 시작했다.
View More“남주가 이 타이밍에 고백하면 안 돼요.”
화상 회의 화면 너머로 작가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이주아는 공유 문서의 73화를 띄운 채 형광색으로 표시한 문단을 가리켰다.
“독자는 지금 남주의 마음을 알아요. 여주만 모르죠. 그런데 남주까지 전부 말해 버리면 두 사람 사이에 남은 긴장이 없어져요. 고백보다 행동을 먼저 쌓아 주세요. 여주가 아플 때 약을 사 오는 것, 다른 남자 이야기에 대답이 짧아지는 것. 독자가 ‘쟤 좋아하네’ 하고 먼저 알아채게요.”
“그럼 고백은 80화쯤으로 미룰까요?”
“네. 대신 77화에 손 한 번 잡죠. 별것 아닌 접촉인데 둘 다 예전으로 못 돌아가는 느낌으로.”
작가는 금세 납득했고, 회의는 예정보다 일찍 끝났다. 주아는 수정 방향을 정리한 메일을 보내고 다음 작품의 지표를 열었다. 전날 공개된 신작은 초반 이탈이 예상보다 컸다. 유입 경로를 다시 확인하고 프로모션팀에 배너 문구 교체를 요청하고 나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로맨스팀 6년 차 PD 이주아는 남의 연애가 어디서 막혔는지 찾아내는 데 능했다. 고백이 성급한지, 이별이 억지스러운지, 독자가 어느 대목에서 설레야 하는지까지 숫자와 문장 양쪽으로 짚었다.
정작 자기 연애 이력은 신입 작가의 빈 기획서만큼 단출했다.
마음이 갔던 사람은 몇 있었다. 점심을 두어 번 먹거나 영화를 보자는 약속까지 잡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자신의 일상 안에 새로 들이는 단계가 되면 늘 멈췄다. 바쁘다는 핑계가 가장 쉬웠다.
“이 PD, 밥 안 먹어?”
한서영 팀장이 파티션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주아는 모니터 구석의 시간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어야죠. 오늘 메뉴 뭐예요?”
“구내식당. 그리고 오늘은 도망 못 가. 다들 너한테 할 말 있대.”
“불길하게 왜 그래요.”
불길한 예감은 정확했다.
식판을 들고 앉자마자 맞은편의 막내 PD가 왼손을 내밀었다. 약지에 낀 작은 다이아몬드가 형광등 아래서 반짝였다. 테이블에 축하가 쏟아졌다. 지난달에는 동갑인 마케팅팀 직원이 결혼했고, 지난주에는 대학 동기가 임신 소식을 알렸다. 오늘은 2년 사귄 애인과 내년 봄에 결혼한다는 후배였다.
주아도 진심으로 축하했다. 다만 축하가 끝난 뒤 예상대로 질문의 방향이 자신에게 돌아왔다.
“이 PD님은 만나는 분 없어요?”
“없어.”
“소개팅도 안 하시잖아요. 눈이 너무 높은 거 아니에요?”
“눈 안 높아. 사람 볼 시간이 없지.”
서영이 콩나물국을 한 숟갈 뜨며 끼어들었다.
“지난번 소개팅에서 상대방한테 이직 사유랑 앞으로의 계획을 캐물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닌데.”
“대화가 끊겨서 물은 거예요.”
“면접도 아니고 왜 그걸 물어.”
“중요하잖아요. 삶의 방향.”
후배 둘이 동시에 웃었다. 주아는 억울했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지난 소개팅 남자는 성실했고 말끔했지만, 서로의 취미를 다 말한 뒤 찾아온 정적을 견디지 못해 주아가 질문을 쏟아 냈다. 남자는 최종 면접을 마친 표정으로 카페를 나갔다.
연애를 꼭 해야 한다는 조급함은 없었다. 혼자서도 잘 살았고, 외롭다고 느낄 틈은 더더욱 없었다. 퇴근길에 전화할 사람이 있었고 주말에 밥 먹자고 부를 사람도 있었다. 아프면 죽을 사 들고 와 약을 먹였으며, 취업에 연달아 실패했을 때 강변을 말없이 오래 걸어 준 친구도 있었다.
권지혁.
15년 동안 주아의 일상에 너무 당연하게 들어와 있어서, 그가 채우는 자리를 외로움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후배의 반지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반짝이는 보석보다 옆자리 동료가 결혼 날짜를 묻자 환해지던 후배의 얼굴이 오래 남았다.
주아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나도 해 볼까.”
“뭘?”
“연애.”
서영이 눈썹을 들었다.
“이번엔 진짜로. 조건표만 보다가 끝내지 말고, 괜찮은 사람 있으면 제대로 만나 보려고요.”
“좋아. 그 말 취소하기 없기다.”
서영은 기다렸다는 듯 휴대전화를 꺼냈다. 대학 선배의 회사에 있는 사람이라며 사진과 간단한 소개가 든 메시지를 넘겨줬다.
최민석, 32살. IT 스타트업 전략기획 이사. 등산과 전시 관람을 좋아하고 비흡연자. 검은 셔츠 차림의 남자는 과하게 꾸미지 않은 인상이었고, 웃을 때 눈가가 부드러웠다.
“사람 괜찮다는 평은 확실해. 지난번에 선배 결혼식에서 잠깐 봤는데 말도 잘 통했고.”
주아는 화면을 확대하지 않았다. 사진 한 장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 좋다고 하면 만나 볼게요.”
“웬일이야. 바로 거절 안 하고.”
“선언했잖아요. 이번에는 제대로 해 본다고.”
말하고 나니 정말 약속이 된 기분이었다. 서영이 그 자리에서 연락을 넣었고, 오후 회의가 끝날 무렵 토요일 저녁 약속이 잡혔다.
프로필을 다시 읽자 그제야 긴장이 밀려왔다. 타인의 감정선은 회차별로 쪼개 볼 수 있어도 자신의 첫 만남에는 수정 회의가 없었다.
주아는 대화창 목록을 내리다가 가장 익숙한 이름을 눌렀다.
[오늘 저녁 시간 돼?]
답장은 거의 바로 왔다.
[8시 이후.]
[센터로 갈게. 밥 먹자.]
[너 또 점심 대충 먹었지.]
주아는 구내식당 식판 사진을 보내고 대화를 닫았다. 묻지도 않았는데 식사부터 확인하는 건 중학생 때부터 변하지 않은 권지혁의 습관이었다.
***
밤 8시가 넘은 트레이닝 센터는 조용했다. 마지막 회원이 샤워실로 들어갔고, 직원들이 기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주아는 카운터에 가방을 내려놓은 뒤 안쪽 스트레칭 존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지혁은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댄 채 회원의 자세를 봐 주고 있었다. 검은 티셔츠 소매 아래로 팔의 선이 움직였다. 무릎 각도와 허리 위치를 짚는 말투는 차분했고 정확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죠. 통증 올라오면 참지 말고 바로 연락 주세요.”
회원이 돌아간 뒤에야 지혁이 주아에게 왔다. 젖은 수건을 목에 걸친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보다 익숙한 잔소리가 먼저 떠올랐다.
“구두 신고 여기까지 뛰어왔냐?”
“엘리베이터에서 잠깐 뛴 걸 어떻게 알아?”
“발 끌잖아.”
그는 주아의 가방을 자연스럽게 들어 카운터 안에 넣었다. 15년 동안 수도 없이 반복된 동작이라 주아도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공동대표 박현우가 사무실 문을 잠그며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또 주아 왔냐? 냉장고에 샐러드 있는데 가져가.”
“그거 지혁이 내일 아침 아니야?”
“네가 먹으면 얘가 또 만들겠지.”
지혁이 현우의 등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퇴근해.”
“친구 왔다고 대표를 쫓아내네. 서럽다, 서러워.”
현우는 웃으면서도 순순히 나갔다. 주아는 지혁이 던져 준 운동화를 신고 근처 순댓국집으로 향했다. 회사에서 바로 오는 날을 대비해 지혁이 센터에 갖다 둔 주아 전용 신발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국밥집에 앉자 지혁이 물었다.
“일 없으면 밥도 못 먹냐?”
“네가 먼저 저녁 먹자고 하는 날은 일 있지.”
주아는 깍두기를 베어 물며 그를 봤다.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는 얼굴. 자신의 흑역사를 중학교 때부터 대부분 알고 있고, 민낯이나 취중 실수쯤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남자.
아무리 생각해도 적임자였다.
“남자 좀 소개해 줘.”
지혁이 물컵을 들다 말았다.
“갑자기?”
“네 센터에 괜찮은 사람 많잖아. 운동도 꾸준히 하고 직업 멀쩡한 사람.”
“회원 개인 정보를 네 소개팅에 쓰라고?”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범죄자 같네. 됐어. 사실 소개는 이미 받았어.”
멈췄던 물컵이 식탁에 놓였다. 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컸다.
“누구.”
“서영 팀장님 아는 사람. 최민석이라고, 스타트업 다녀.”
“뭐 하는 사람인데.”
“전략기획 이사. 32살. 토요일에 보기로 했어.”
지혁은 국밥에 손도 대지 않고 주아를 바라봤다. 주아는 그 표정을 15년치 기억 속에서 적당한 이름으로 분류했다. 걱정. 못 미더움. 사고 치기 직전인 자신을 볼 때마다 나오는 얼굴.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해.”
“내가 왜.”
“남자 입장에서 조언 좀 해 줘. 내가 소개팅만 하면 인터뷰처럼 군대. 눈 마주치는 것도 어색하고, 상대가 조금만 가까이 앉으면 굳는대.”
“누가 그래.”
“지난번 소개팅 주선자가.”
“그걸 또 전달했어?”
“객관적인 피드백이지. 아무튼 이번엔 고치려고. 너 사람 자세 교정하는 게 직업이잖아. 대화 자세도 좀 교정해 줘.”
“억지도 정도가 있지.”
“권 대표님 실력 좋다며. 회원 맞춤형으로 가르쳐 주세요.”
주아가 숟가락을 마이크처럼 내밀자 지혁이 밀어냈다. 평소 같으면 못 이기는 척 한숨을 쉬고 끝났을 대화였다. 그런데 그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사람 마음에 들어?”
“아직 만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
“그럼 대충 보고 아니면 그만둬.”
“이번에는 그렇게 안 하려고.”
“왜.”
짧은 한마디가 이상할 만큼 단단했다. 주아는 웃음을 거두고 솔직히 말했다.
“나도 이제 연애다운 연애 해 보고 싶어. 괜찮은 사람이면 알아 가려고 노력도 하고. 이번에 잘되면 진지하게 만나 볼 거야.”
지혁의 손가락이 물기 맺힌 컵을 천천히 돌렸다. 고개를 숙인 탓에 눈은 보이지 않았다. 주아는 자신이 말을 너무 거창하게 했나 싶어 깍두기 하나를 그의 그릇에 던져 넣었다.
“부담 갖진 말고. 네가 아는 만큼만 알려 줘.”
“내가 아는 만큼?”
그가 고개를 들었다.
주아를 보는 눈에서 익숙한 무심함이 빠져 있었다. 경기 전 출발대 위에 섰을 때도 저렇게 집중했었다. 주변 소리를 전부 밀어내고 정해 둔 한 지점만 보는 얼굴.
그 시선이 불편해야 하는데 주아는 숟가락만 만지작거렸다. 먼저 눈을 피하면 부탁을 철회해야 할 것 같았다.
지혁이 마침내 등을 의자에 기대었다.
“그래.”
그는 여전히 주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제대로 가르쳐 줄게.”
대기실의 조명은 너무 밝았다.흰색 생화가 가득 채워진 대기실 안쪽, 거울 앞에 주아가 앉아 있었다. 오프숄더 디자인의 실크 드레스는 가녀린 쇄골 라인과 목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단정하게 묶어 올린 머리 아래로 가느다란 목덜미가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주아는 거울 속 제 모습이 어색해 자꾸만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늘 모니터 앞에서 편한 후드티나 셔츠를 걸치고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자판을 두드리던 일상에서 가장 멀리 도망쳐 온 옷이었다.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대기실 문이 열렸다.짙은 남색 예복을 차려입은 지혁이 들어섰다. 평소 센터에서 회원들을 지도할 때 입던 티셔츠도, 외근 나갈 때 입던 세미 정장도 아니었다. 단단한 어깨와 곧은 등판의 실루엣을 정교하게 살려낸 턱시도가 지혁에게 맞춤옷처럼 어울렸다.지혁은 문손잡이를 잡은 채 한동안 걸음을 떼지 못했다.“야. 뭘 그렇게 넋을 놓고 봐.”주아가 긴장감을 감추려 일부러 퉁명스레 말을 건넸다. 그제야 지혁의 긴 다리가 움직였다. 주아의 의자 옆에 멈춰 선 그의 시선은 여전히 드레스의 목선과 주아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잘 어울려서.”1년 전, 소개팅 옷을 골라주던 소파 앞에서의 대답과 똑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무심한 척 삼키던 눈빛과 달리, 지금 지혁의 눈에는 소유욕과 깊은 애정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귀걸이가 자꾸 고개가 비뚤어지네.”주아가 거울을 보며 귓불에 걸린 작은 다이아몬드 장식을 만지려 하자, 지혁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뒤로 다가왔다.거울 속에 두 사람의 실루엣이 겹쳤다. 187센티미터의 커다란 지혁이 몸을 굽혀 주아와 눈높이를 맞추자, 주아의 작은 어깨가 그의 넓은 품 안으로 고스란히 들어갔다.“가만있어.”“가만있는데.”“또 굳었어.”익숙한 대화법이었다. 지혁의 뜨거운 숨결이 주아의 귓가와 가녀린 어깨 위로 여과 없이 흩어졌다. 지혁의 큰 손가락 끝이 주아의 귓불에 닿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주아의 숨소리가 지혁의 손끝에 닿자, 그의 아래턱이 굳었다.“수선
사무실의 공기는 언제나 건조하고 미지근했다.오후 2시, 론칭을 앞둔 신작의 예약 배너 이미지 시안을 검수하는 이주아의 눈이 모니터 안쪽을 사섭게 파고들었다.웹소설 PD의 하루는 독자들의 아주 미세한 피드백 하나, 배너 글자체의 각도 하나를 잡아내는 사소하고 피곤한 조율의 연속이었다.“선배님, 시안 3번으로 결정하면 마케팅팀이랑 조율은 제가 할까요?”옆자리 신입 PD가 의자를 당기며 조심스레 묻자 주아가 마우스를 가볍게 딸각였다.“아니, 디자인팀이랑 시안 확정은 내가 직접 할게. 대신 예약 배너 문구 수정한 것만 마케팅팀에 바로 공유해 줘.”“네, 알겠습니다!”신입이 의자를 뒤로 밀며 대답하는 순간, 파티션 너머로 단정한 단발머리의 한서영 팀장이 고개를 내밀었다.“이 PD, 로비 안내 데스크에서 연락 왔던데. 어떤 잘생긴 분이 너 앞으로 종이 봉투 하나 맡겨 놨다고.”주아는 키보드 위에 올렸던 손가락을 일순간 멈췄다. 물어보지 않아도 그 ‘잘생긴 분’이 누구인지 뻔했다.로비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주아의 입가가 미세하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지하 1층 안내 데스크 옆, 커다란 통유리창을 등지고 서 있는 권지혁은 멀리서도 튀었다. 짙은 회색 반소매 티셔츠에 편안한 트레이닝 바지 차림이었지만, 수영으로 다져진 넓은 어깨와 반듯한 체격은 로비를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바쁘다면서 직접 온 거야?”주아가 다가가자 지혁이 들고 있던 하얀 종이 봉투를 건넸다.봉투 안에는 따뜻한 기운이 남은 소금빵 두 개와 투명한 용기에 정성스럽게 깎아 담은 사과가 들어 있었다.“근처 스포츠 브랜드 미팅하러 가는 길이야. 네가 아침에 사과 남기고 갔길래.”지혁의 어조는 늘 그렇듯 무심하고 건조했다. “나 밥 잘 챙겨 먹는다고 몇 번을 말해. 이렇게 매번 사다 주면 사내에 소문 다 나, 권 대표님.”“책임지려고 온 거 아니야. 그냥 보고 싶어서 온 거지.”지혁이 주아의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매만지며 낮게 속삭였다.
수영장의 온도는 늘 미지근했다.락스 냄새가 밴 공기와 끊임없이 철퍽이는 물소리.권지혁의 십 대는 그 단조로운 소음 속에 잠겨 있었다.물속에 들어가면 세상의 모든 시끄러운 것들이 단번에 지워졌다.숨을 참는 동안 들리는 건 제 심장박동뿐이었다.지혁은 그 서늘한 고요가 좋았다.중학교 2학년, 그 시끄러운 여자애가 제 궤도에 침입하기 전까지는 그랬다.“야, 너 수영 진짜 잘한다!”체육관 구석에서 홀로 흙이 묻은 신발 끈을 묶고 있던 지혁에게 다짜고짜 말을 걸어온 것은 이주아였다.낯가림이 심하고 무뚝뚝하던 소년의 세계에서 주아는 지나치게 선명했다.남들은 무서워하는 지혁의 서늘한 눈빛에도 주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날 이후로 주아는 매일 방과 후 수영장 관중석 맨 앞줄에 턱을 괸 채 앉아 지혁의 훈련을 구경했다.수영모를 눌러쓰고 수영복 한 장만 걸친 채 숨을 헐떡이는 지혁을 보며 주아는 잘도 웃었다.“야, 너 수영복 진짜 작아 보인다. 엉덩이 안 껴?”“……대회용이야, 바보야.”귀가 벌개져서 물속으로 다시 뛰어드는 소년을 보며 주아는 관중석을 뛰어다녔다.소년에게 수영 레인 너머의 다른 것을 보게 만든 첫 번째 균열이었다.고등학교 1학년, 첫 전국대회를 앞둔 여름날이었다.경기장에 함께 갈 수 없게 된 주아는 지혁을 찾아와 엉성한 실팔찌를 내밀었다.문구점에서 산 파란 실과 구슬로 서툰 솜씨로 꼰 물건이었다.자세히 보니 가운데 하얀 플라스틱 구슬 하나가 한 칸 툭 튀어나와 있었다.지혁은 제 손바닥 위에 놓인 엉성한 실뭉치를 내려다보았다.“이게 뭔데.”“부적이야, 부적. 너 또 혼자 덜덜 떨면서 속 썩이고 있을까 봐 만들었지.”“유치하게 이런 걸 왜 차고 뛰어. 물에 들어갈 때 방해되잖아.”“그럼 왜 줘.”지혁이 툴툴거리자 주아가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가방에 넣어 둬. 네가 또 혼자 긴장할까 봐 주는 거야.”지혁은 잠시 주아의 손길이 닿은 손목을 내려다보다가, 낡은 수영 가방 안쪽에 실팔찌를 밀어 넣었다.주아가
1년 뒤, 주아는 원고 중반에서 커서를 멈췄다.여자 주인공이 10년 된 남자 사람 친구의 고백을 받고 곧장 사랑을 깨닫는 장면이었다. 예전의 주아라면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코멘트부터 남겼을 것이다.주아는 문장 옆에 메모를 달았다.남주의 오래된 마음이 여주의 대답까지 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고백 전부터 여주가 이 사람을 특별하게 대했던 장면과, 고백 뒤 혼자 선택하는 시간을 보강해 주세요.저장 버튼을 누르자 옆자리의 신입 PD가 의자를 밀고 다가왔다.“선배님, 진짜 오래된 친구끼리 갑자기 키스하면 안 어색할까요?”“어색하지.”“그럼 어떻게 연애해요?”“어색한 채로 하는 거야. 친구였던 시간이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역시 로맨스는 어렵네요.”“남의 로맨스는 쉬워.”주아가 무심코 대답하자 지나가던 서영이 웃었다.“본인 것도 이제 꽤 잘하던데?”신입의 눈이 반짝이자 주아는 원고로 그 시선을 가렸다.“팀장님, 쓸데없는 정보 주지 마세요.”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권지혁이었다.오늘 7시. 잊지 마.주아는 달력을 확인했다. 아무 일정도 적혀 있지 않은 날이었다.뭘?답장은 금세 왔다.1년.주아는 날짜를 다시 봤다.정말로 연애를 시작한 지 정확히 1년 되는 날이었다. 작년 이맘때 옷장을 비우던 지혁에게 최소 1년은 만나고 결혼을 이야기하자고 했었다.설마.주아가 화면을 보고 있자 서영이 옆에서 슬쩍 물었다.“왜, 프러포즈한대?”“누가요.”“표정이 계약서 사인 직전인데.”“그냥 저녁 먹자는 거예요.”주아는 휴대전화를 엎어 놨다. 얼마 못 가 다시 들어 확인했지만 추가 메시지는 없었다.그 무뚝뚝함까지 평소의 지혁과 같았다.***지혁의 운동센터는 지난 1년 동안 한 층을 더 넓혔다.일반 회원 수업과 선수 재활 공간을 분리했고, 은퇴를 준비하는 선수들의 진로 프로그램도 시작했다.주아가 6시 반쯤 센터에 도착했을 때 지혁은 신입 트레이너의 수업 기록을 검토하고 있었다.“통증 있다고 했으면 중량부터 낮추고 가동 범
굿노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굿노벨에 등록하시면 우수한 웹소설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완벽한 세상을 모색하는 작가도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로맨스, 도시와 현실, 판타지, 현판 등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읽거나 창작할 수 있습니다. 독자로서 질이 좋은 작품을 볼 수 있고 작가로서 색다른 장르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어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성한 작품들은 굿노벨에서 더욱 많은 관심과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