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친의 유효기간

남사친의 유효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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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6jay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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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웹소설 PD 이주아는 정작 자신의 연애에는 아주 형편없다. 제대로 된 연애를 위해 15년 지기 권지혁에게 소개팅 코칭을 부탁한 데다, 갑작스러운 누수로 그의 집에 얹혀살게 된다. 시선 맞추기부터 손잡기, 키스 직전의 거리까지. 친구라서 가능한 연습이라 믿었는데, 지혁의 시선도 자신의 마음도 자꾸만 선을 넘는다. 15년 우정의 유효기간이 끝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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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01화 · 남자 좀 소개해 줘

“남주가 이 타이밍에 고백하면 안 돼요.”

화상 회의 화면 너머로 작가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이주아는 공유 문서의 73화를 띄운 채 형광색으로 표시한 문단을 가리켰다.

“독자는 지금 남주의 마음을 알아요. 여주만 모르죠. 그런데 남주까지 전부 말해 버리면 두 사람 사이에 남은 긴장이 없어져요. 고백보다 행동을 먼저 쌓아 주세요. 여주가 아플 때 약을 사 오는 것, 다른 남자 이야기에 대답이 짧아지는 것. 독자가 ‘쟤 좋아하네’ 하고 먼저 알아채게요.”

“그럼 고백은 80화쯤으로 미룰까요?”

“네. 대신 77화에 손 한 번 잡죠. 별것 아닌 접촉인데 둘 다 예전으로 못 돌아가는 느낌으로.”

작가는 금세 납득했고, 회의는 예정보다 일찍 끝났다. 주아는 수정 방향을 정리한 메일을 보내고 다음 작품의 지표를 열었다. 전날 공개된 신작은 초반 이탈이 예상보다 컸다. 유입 경로를 다시 확인하고 프로모션팀에 배너 문구 교체를 요청하고 나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로맨스팀 6년 차 PD 이주아는 남의 연애가 어디서 막혔는지 찾아내는 데 능했다. 고백이 성급한지, 이별이 억지스러운지, 독자가 어느 대목에서 설레야 하는지까지 숫자와 문장 양쪽으로 짚었다.

정작 자기 연애 이력은 신입 작가의 빈 기획서만큼 단출했다.

마음이 갔던 사람은 몇 있었다. 점심을 두어 번 먹거나 영화를 보자는 약속까지 잡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자신의 일상 안에 새로 들이는 단계가 되면 늘 멈췄다. 바쁘다는 핑계가 가장 쉬웠다.

“이 PD, 밥 안 먹어?”

한서영 팀장이 파티션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주아는 모니터 구석의 시간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어야죠. 오늘 메뉴 뭐예요?”

“구내식당. 그리고 오늘은 도망 못 가. 다들 너한테 할 말 있대.”

“불길하게 왜 그래요.”

불길한 예감은 정확했다.

식판을 들고 앉자마자 맞은편의 막내 PD가 왼손을 내밀었다. 약지에 낀 작은 다이아몬드가 형광등 아래서 반짝였다. 테이블에 축하가 쏟아졌다. 지난달에는 동갑인 마케팅팀 직원이 결혼했고, 지난주에는 대학 동기가 임신 소식을 알렸다. 오늘은 2년 사귄 애인과 내년 봄에 결혼한다는 후배였다.

주아도 진심으로 축하했다. 다만 축하가 끝난 뒤 예상대로 질문의 방향이 자신에게 돌아왔다.

“이 PD님은 만나는 분 없어요?”

“없어.”

“소개팅도 안 하시잖아요. 눈이 너무 높은 거 아니에요?”

“눈 안 높아. 사람 볼 시간이 없지.”

서영이 콩나물국을 한 숟갈 뜨며 끼어들었다.

“지난번 소개팅에서 상대방한테 이직 사유랑 앞으로의 계획을 캐물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닌데.”

“대화가 끊겨서 물은 거예요.”

“면접도 아니고 왜 그걸 물어.”

“중요하잖아요. 삶의 방향.”

후배 둘이 동시에 웃었다. 주아는 억울했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지난 소개팅 남자는 성실했고 말끔했지만, 서로의 취미를 다 말한 뒤 찾아온 정적을 견디지 못해 주아가 질문을 쏟아 냈다. 남자는 최종 면접을 마친 표정으로 카페를 나갔다.

연애를 꼭 해야 한다는 조급함은 없었다. 혼자서도 잘 살았고, 외롭다고 느낄 틈은 더더욱 없었다. 퇴근길에 전화할 사람이 있었고 주말에 밥 먹자고 부를 사람도 있었다. 아프면 죽을 사 들고 와 약을 먹였으며, 취업에 연달아 실패했을 때 강변을 말없이 오래 걸어 준 친구도 있었다.

권지혁.

15년 동안 주아의 일상에 너무 당연하게 들어와 있어서, 그가 채우는 자리를 외로움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후배의 반지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반짝이는 보석보다 옆자리 동료가 결혼 날짜를 묻자 환해지던 후배의 얼굴이 오래 남았다.

주아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나도 해 볼까.”

“뭘?”

“연애.”

서영이 눈썹을 들었다.

“이번엔 진짜로. 조건표만 보다가 끝내지 말고, 괜찮은 사람 있으면 제대로 만나 보려고요.”

“좋아. 그 말 취소하기 없기다.”

서영은 기다렸다는 듯 휴대전화를 꺼냈다. 대학 선배의 회사에 있는 사람이라며 사진과 간단한 소개가 든 메시지를 넘겨줬다.

최민석, 32살. IT 스타트업 전략기획 이사. 등산과 전시 관람을 좋아하고 비흡연자. 검은 셔츠 차림의 남자는 과하게 꾸미지 않은 인상이었고, 웃을 때 눈가가 부드러웠다.

“사람 괜찮다는 평은 확실해. 지난번에 선배 결혼식에서 잠깐 봤는데 말도 잘 통했고.”

주아는 화면을 확대하지 않았다. 사진 한 장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 좋다고 하면 만나 볼게요.”

“웬일이야. 바로 거절 안 하고.”

“선언했잖아요. 이번에는 제대로 해 본다고.”

말하고 나니 정말 약속이 된 기분이었다. 서영이 그 자리에서 연락을 넣었고, 오후 회의가 끝날 무렵 토요일 저녁 약속이 잡혔다.

프로필을 다시 읽자 그제야 긴장이 밀려왔다. 타인의 감정선은 회차별로 쪼개 볼 수 있어도 자신의 첫 만남에는 수정 회의가 없었다.

주아는 대화창 목록을 내리다가 가장 익숙한 이름을 눌렀다.

[오늘 저녁 시간 돼?]

답장은 거의 바로 왔다.

[8시 이후.]

[센터로 갈게. 밥 먹자.]

[너 또 점심 대충 먹었지.]

주아는 구내식당 식판 사진을 보내고 대화를 닫았다. 묻지도 않았는데 식사부터 확인하는 건 중학생 때부터 변하지 않은 권지혁의 습관이었다.

***

밤 8시가 넘은 트레이닝 센터는 조용했다. 마지막 회원이 샤워실로 들어갔고, 직원들이 기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주아는 카운터에 가방을 내려놓은 뒤 안쪽 스트레칭 존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지혁은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댄 채 회원의 자세를 봐 주고 있었다. 검은 티셔츠 소매 아래로 팔의 선이 움직였다. 무릎 각도와 허리 위치를 짚는 말투는 차분했고 정확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죠. 통증 올라오면 참지 말고 바로 연락 주세요.”

회원이 돌아간 뒤에야 지혁이 주아에게 왔다. 젖은 수건을 목에 걸친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보다 익숙한 잔소리가 먼저 떠올랐다.

“구두 신고 여기까지 뛰어왔냐?”

“엘리베이터에서 잠깐 뛴 걸 어떻게 알아?”

“발 끌잖아.”

그는 주아의 가방을 자연스럽게 들어 카운터 안에 넣었다. 15년 동안 수도 없이 반복된 동작이라 주아도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공동대표 박현우가 사무실 문을 잠그며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또 주아 왔냐? 냉장고에 샐러드 있는데 가져가.”

“그거 지혁이 내일 아침 아니야?”

“네가 먹으면 얘가 또 만들겠지.”

지혁이 현우의 등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퇴근해.”

“친구 왔다고 대표를 쫓아내네. 서럽다, 서러워.”

현우는 웃으면서도 순순히 나갔다. 주아는 지혁이 던져 준 운동화를 신고 근처 순댓국집으로 향했다. 회사에서 바로 오는 날을 대비해 지혁이 센터에 갖다 둔 주아 전용 신발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국밥집에 앉자 지혁이 물었다.

“일 없으면 밥도 못 먹냐?”

“네가 먼저 저녁 먹자고 하는 날은 일 있지.”

주아는 깍두기를 베어 물며 그를 봤다.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는 얼굴. 자신의 흑역사를 중학교 때부터 대부분 알고 있고, 민낯이나 취중 실수쯤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남자.

아무리 생각해도 적임자였다.

“남자 좀 소개해 줘.”

지혁이 물컵을 들다 말았다.

“갑자기?”

“네 센터에 괜찮은 사람 많잖아. 운동도 꾸준히 하고 직업 멀쩡한 사람.”

“회원 개인 정보를 네 소개팅에 쓰라고?”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범죄자 같네. 됐어. 사실 소개는 이미 받았어.”

멈췄던 물컵이 식탁에 놓였다. 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컸다.

“누구.”

“서영 팀장님 아는 사람. 최민석이라고, 스타트업 다녀.”

“뭐 하는 사람인데.”

“전략기획 이사. 32살. 토요일에 보기로 했어.”

지혁은 국밥에 손도 대지 않고 주아를 바라봤다. 주아는 그 표정을 15년치 기억 속에서 적당한 이름으로 분류했다. 걱정. 못 미더움. 사고 치기 직전인 자신을 볼 때마다 나오는 얼굴.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해.”

“내가 왜.”

“남자 입장에서 조언 좀 해 줘. 내가 소개팅만 하면 인터뷰처럼 군대. 눈 마주치는 것도 어색하고, 상대가 조금만 가까이 앉으면 굳는대.”

“누가 그래.”

“지난번 소개팅 주선자가.”

“그걸 또 전달했어?”

“객관적인 피드백이지. 아무튼 이번엔 고치려고. 너 사람 자세 교정하는 게 직업이잖아. 대화 자세도 좀 교정해 줘.”

“억지도 정도가 있지.”

“권 대표님 실력 좋다며. 회원 맞춤형으로 가르쳐 주세요.”

주아가 숟가락을 마이크처럼 내밀자 지혁이 밀어냈다. 평소 같으면 못 이기는 척 한숨을 쉬고 끝났을 대화였다. 그런데 그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사람 마음에 들어?”

“아직 만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

“그럼 대충 보고 아니면 그만둬.”

“이번에는 그렇게 안 하려고.”

“왜.”

짧은 한마디가 이상할 만큼 단단했다. 주아는 웃음을 거두고 솔직히 말했다.

“나도 이제 연애다운 연애 해 보고 싶어. 괜찮은 사람이면 알아 가려고 노력도 하고. 이번에 잘되면 진지하게 만나 볼 거야.”

지혁의 손가락이 물기 맺힌 컵을 천천히 돌렸다. 고개를 숙인 탓에 눈은 보이지 않았다. 주아는 자신이 말을 너무 거창하게 했나 싶어 깍두기 하나를 그의 그릇에 던져 넣었다.

“부담 갖진 말고. 네가 아는 만큼만 알려 줘.”

“내가 아는 만큼?”

그가 고개를 들었다.

주아를 보는 눈에서 익숙한 무심함이 빠져 있었다. 경기 전 출발대 위에 섰을 때도 저렇게 집중했었다. 주변 소리를 전부 밀어내고 정해 둔 한 지점만 보는 얼굴.

그 시선이 불편해야 하는데 주아는 숟가락만 만지작거렸다. 먼저 눈을 피하면 부탁을 철회해야 할 것 같았다.

지혁이 마침내 등을 의자에 기대었다.

“그래.”

그는 여전히 주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제대로 가르쳐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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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화 · 남자 좀 소개해 줘
“남주가 이 타이밍에 고백하면 안 돼요.”화상 회의 화면 너머로 작가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이주아는 공유 문서의 73화를 띄운 채 형광색으로 표시한 문단을 가리켰다.“독자는 지금 남주의 마음을 알아요. 여주만 모르죠. 그런데 남주까지 전부 말해 버리면 두 사람 사이에 남은 긴장이 없어져요. 고백보다 행동을 먼저 쌓아 주세요. 여주가 아플 때 약을 사 오는 것, 다른 남자 이야기에 대답이 짧아지는 것. 독자가 ‘쟤 좋아하네’ 하고 먼저 알아채게요.”“그럼 고백은 80화쯤으로 미룰까요?”“네. 대신 77화에 손 한 번 잡죠. 별것 아닌 접촉인데 둘 다 예전으로 못 돌아가는 느낌으로.”작가는 금세 납득했고, 회의는 예정보다 일찍 끝났다. 주아는 수정 방향을 정리한 메일을 보내고 다음 작품의 지표를 열었다. 전날 공개된 신작은 초반 이탈이 예상보다 컸다. 유입 경로를 다시 확인하고 프로모션팀에 배너 문구 교체를 요청하고 나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로맨스팀 6년 차 PD 이주아는 남의 연애가 어디서 막혔는지 찾아내는 데 능했다. 고백이 성급한지, 이별이 억지스러운지, 독자가 어느 대목에서 설레야 하는지까지 숫자와 문장 양쪽으로 짚었다.정작 자기 연애 이력은 신입 작가의 빈 기획서만큼 단출했다.마음이 갔던 사람은 몇 있었다. 점심을 두어 번 먹거나 영화를 보자는 약속까지 잡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자신의 일상 안에 새로 들이는 단계가 되면 늘 멈췄다. 바쁘다는 핑계가 가장 쉬웠다.“이 PD, 밥 안 먹어?”한서영 팀장이 파티션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주아는 모니터 구석의 시간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먹어야죠. 오늘 메뉴 뭐예요?”“구내식당. 그리고 오늘은 도망 못 가. 다들 너한테 할 말 있대.”“불길하게 왜 그래요.”불길한 예감은 정확했다.식판을 들고 앉자마자 맞은편의 막내 PD가 왼손을 내밀었다. 약지에 낀 작은 다이아몬드가 형광등 아래서 반짝였다. 테이블에 축하가 쏟아졌다. 지난달에는 동갑인 마케팅팀 직원이 결혼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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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화 · 친구니까 가능한 연습
제대로 가르쳐 주겠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다음 날 저녁, 주아는 지혁의 집 식탁 앞에 앉아 한참째 모의 소개팅을 당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배달 음식과 맥주가 올라오던 자리에 물 두 잔만 놓여 있었다. 지혁은 맞은편에서 팔짱을 낀 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주말에는 주로 뭐 하세요?”주아가 최대한 다정하게 물었다.“운동합니다.”“어떤 운동 좋아하세요?”“다 합니다.”“최근에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는 어디예요?”“없습니다.”주아가 결국 탁자를 쳤다.“야, 너처럼 대답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상대가 단답하면 다음 질문지 넘길 거냐?”“대화를 이어 가야지.”“지금은 조사 중이고.”지혁이 주아 앞에 놓인 메모지를 손가락으로 끌어왔다. 취미, 직업, 가족 관계, 결혼관 아래에 질문이 빼곡했다. 그는 종이를 한 번 훑더니 뒤집어 놓았다.“이거 보지 마.”“머리가 하얘지면 어떡해.”“대답을 듣고 궁금한 걸 물어. 다음 항목 체크하지 말고.”“그 정도는 나도 알아.”“아는 애가 남의 연봉 전망을 왜 물어.”“그건 안 물을 거야.”주아는 종이를 되찾으려다 지혁이 들고 있는 손을 툭 쳤다. 그가 팔을 높이 들자 닿지 않았다. 187센티미터와 다툴 때마다 겪는 비겁한 전술이었다.“내놔.”“안 돼.”“권지혁.”“대신 날 봐.”주아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사람이 말하는데 자꾸 컵이나 메뉴판 보지 말고.”“내가 언제.”“방금도 그랬어.”그는 들었던 팔을 내리고 몸을 바로 세웠다.“이번에는 먼저 눈 피하지 마.”“그게 무슨 도움이 돼?”그 말에 괜한 승부욕이 생겼다. 주아는 턱을 당기고 지혁을 똑바로 봤다.15년 동안 수도 없이 본 얼굴이었다. 중학교 2학년, 전학 온 첫날 체육관 구석에서 혼자 신발 끈을 묶던 무뚝뚝한 아이. 수영장 관중석에서 주아가 목이 터져라 이름을 불러도 경기 전에는 아는 척 한 번 안 하던 선수. 지금은 회원 예약을 몇 달씩 기다려야 한다는 센터 대표.왼쪽 눈썹 끝에 희미한 흉터가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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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화 · 내 남사친과 동거 중입니다
주아는 낯선 천장을 보자마자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알아차렸다.문밖에서 칼과 도마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일정한 간격으로 두 번, 잠시 뒤 세 번. 지혁이 아침마다 사과를 자르는 소리였다. 가끔 자고 간 날에도 들었으니 낯설지 않아야 했다.다만 오늘은 소파에서 숙취를 달래다 눈을 뜬 것도, 밤늦게 영화를 보다 귀가가 귀찮아 눌러앉은 것도 아니었다. 앞으로 짧으면 3주, 길면 한 달을 이 집에서 살아야 했다.주아는 침대 옆에 놓인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알람이 울리기 전이었다.방문을 열자 고소한 냄새가 먼저 들어왔다. 지혁은 회색 반소매 티셔츠와 검은 트레이닝 바지 차림으로 프라이팬 앞에 서 있었다. 식탁에는 달걀, 사과, 구운 토마토와 주아가 좋아하는 소금빵이 놓여 있었다.“너 매일 아침부터 이렇게 먹어?”“너 매일 아침도 안 먹어?”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방식도 평소와 같았다. 주아는 의자를 빼고 앉으며 큰 티셔츠 소매에 손을 넣었다. 어젯밤 급하게 챙긴 잠옷은 대학 때 체육대회에서 받은 단체 티셔츠였다. 지혁 앞에서 목 늘어난 티셔츠를 입는 건 아무렇지 않았다.“난 커피가 아침인데.”“그래서 오후 4시에 속 쓰리다고 약 찾잖아.”지혁은 접시를 주아 앞에 밀고 커피는 제 쪽에 뒀다. 달걀을 반쯤 먹어야 주겠다는 뜻이었다.“여기 교도소야?”“교도소도 밥은 먹여.”“권지혁, 동거 첫날부터 너무한 거 아니냐.”달걀을 자르던 칼끝이 접시 위에서 멈췄다.주아는 아무 생각 없이 나온 단어를 되짚었다.“왜. 같이 사니까 동거 맞잖아.”“맞지.”지혁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욕실 수납장 오른쪽 비워 놨어. 수건은 아래 칸 쓰면 되고.”“칫솔 사야 하는데.”“새것 넣어 뒀어.”“이 집은 없는 게 없네.”“네가 자꾸 놓고 가니까 쌓인 거야.”욕실에는 정말 주아 몫의 자리가 생겨 있었다. 새 칫솔과 미개봉 화장솜, 전에 두고 간 세안제까지 가지런히 놓였다. 낯선 집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건 지혁의 집 곳곳에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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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화 · 소개팅 후 남사친의 표정
최민석은 사진보다 인상이 부드러웠다.“이주아 님 맞으시죠? 최민석입니다.”“네. 제가 늦진 않았죠?”“제가 조금 일찍 왔습니다.”그는 의자를 빼 주거나 외투를 받아 들려 하지 않았다. 편한 자리를 고르게 했고, 주아가 가방 둘 곳을 찾자 빈 의자만 당겨 줬다. 과하지 않게 세심한 사람이었다.주아는 자리에 앉으며 어깨를 내렸다. 긴장하면 어깨부터 올라간다는 지혁의 지적이 떠올라서였다.“한서영 씨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로맨스 웹소설 만드신다고요.”“네, 직접 쓰는 건 아니고 작품을 기획하고 편집해요. 작가님이 글에 집중할 수 있게 일정이나 공개 전략도 같이 잡고요.”“그럼 독자로서 재미있다는 판단과 성과가 나겠다는 판단이 다를 때도 있겠네요.”“많죠.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꼭 많은 독자에게 쉽게 발견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도 둘 중 하나를 포기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작품의 장점을 가장 잘 알아볼 독자에게 닿게 만드는 게 제 일이거든요.”“좋은 전략 담당자네요.”“그쪽도 전략기획 하신다고 들었어요.”“저는 그렇게 낭만적으로 말하진 못합니다. 대표가 벌여 놓은 일을 숫자로 말리거나, 말려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방법을 찾는 쪽입니다.”주아가 웃자 민석도 따라 웃었다.대화는 예상보다 수월했다. 민석은 스타트업의 화려한 성장담만 늘어놓지 않았다. 계획이 자주 바뀌는 조직에서 사람을 설득하는 방식, 성과가 나지 않는 사업을 접을 때의 책임 같은 이야기를 솔직하게 했다. 주아가 작품 하나를 중단했던 경험을 말하자 섣불리 위로하지 않고 어떤 기준으로 결정했는지 물었다.주아는 그를 제대로 보기 위해 눈을 마주쳤다. 민석의 시선은 편안했고, 부담을 느끼면 먼저 음식 쪽으로 시선을 돌릴 여유도 줬다.그런데 시선을 오래 유지할수록 전날 식탁 맞은편에 앉았던 지혁이 떠올랐다. 아무 말 없이 자신만 보고 있다가, 먼저 피했다고 지적하던 무심한 목소리.주아는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음식은 괜찮으세요?”민석이 물었다.“네. 아,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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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화 · 실전 연습
“남자가 여기까지 오면?”지혁의 목소리가 가까운 거리에서 떨어졌다.주아는 대답 대신 맞잡힌 손에 힘을 줬다. 소파 등받이에 닿은 어깨는 더 물러날 데가 없었다. 지혁은 그녀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몸을 기울인 채 기다릴 뿐이었다.늘 무심하게 마주치던 눈이 오늘은 끈질겼다. 주아가 고개를 돌리면 따라올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한 치도 더 다가오지 않았다.“왜 대답 안 해.”“생각 중이잖아.”“소개팅 자리에서도 그렇게 오래 생각하게?”“야, 그때는 네가 아니니까…….”말이 끊겼다.그때는 네가 아니니까 무엇이 다르다는 건지, 주아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민석이라면 덜 긴장할 거라는 뜻인지, 지금 이 거리가 이상한 건 지혁이라서인지.지혁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에 머물렀다가 다시 올라왔다.“피하고 싶으면 피해.”농담기가 전혀 없는 말이었다.“지금 네가 고개 돌리면 여기서 끝낼게.”주아는 그제야 지혁이 기다리는 것이 대답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이라는 걸 알아들었다. 친구끼리 하는 연습이라는 말로 덮기에는 둘 사이가 너무 가까웠다. 입술이 닿으면 아무 일 없던 때로 돌아가기 어려울지도 몰랐다.그런데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지혁이 재촉하지 않는 동안 주아는 맞잡은 손을 내려다봤다. 긴 손가락이 제 손을 감싸고 있었다. 경기 전이면 차갑게 식고, 수영을 끝낸 뒤에는 늘 뜨거웠던 손. 15년 동안 수없이 붙잡았던 손인데 오늘은 손가락 사이가 맞닿은 자리까지 선명했다.주아가 고개를 들었다.“안 피할게.”지혁의 턱이 아주 조금 굳었다.“무슨 뜻인지 알고 말해.”“알아.”이번에는 주아가 먼저 거리를 줄였다. 크지 않은 움직임이었지만 충분한 대답이었다.지혁의 입술이 닿았다.처음은 확인에 가까웠다. 짧게 닿았다가 떨어진 입술이 다시 내려오기 전까지, 지혁은 주아의 표정을 살폈다. 주아는 눈을 뜬 채 그를 봤다. 당황해서 밀어내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너무 빨리 끝났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 스스로도 놀랐다.그녀가 잡힌 손을 빼는 대신 지혁의 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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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화 · 친구 사이에는 안 하는 것
주아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키스.두 글자만 말하면 됐다. 그런데 식탁을 사이에 두고 지혁과 눈을 맞추자 그 단어가 목에 걸렸다. 업무 회의에서는 수위 높은 원고도 아무렇지 않게 논의하는데, 자신이 한 키스는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웠다.“네가 가르쳐 준 거.”“내가 뭘 가르쳤는데.”“손 잡는 법. 눈 피하지 말라는 거. 그런 거 다.”“그게 다였어?”지혁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주아가 먼저 의자에서 일어났다.“사람이 피곤하다는데 취조하냐? 씻을 거야.”“이주아.”“내일 얘기해.”도망치듯 방문을 닫고 나서야 주아는 제 행동이 우스워졌다. 평소라면 지혁이 말을 피할 때 끝까지 따라다니며 대답을 받아 냈다. 지금은 역할이 반대였다.문밖에서 발소리가 잠깐 멈췄다가 멀어졌다.주아는 침대 끝에 앉아 민석과 잡았던 손을 내려다봤다. 손에는 아무 흔적도 없는데 지혁에게 들킨 기분이었다.더 곤란한 건, 지혁이 질투하는 것처럼 보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다음 날부터 지혁은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굴었다.아침마다 주아 몫의 샌드위치를 싸 놓고, 밤에는 냉장고에 있는 반찬부터 먹으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주아가 야근한 날에는 거실 불을 켜 둔 채 먼저 잤고, 구부정하게 노트북을 보는 모습을 발견하면 뒤에서 어깨를 펴게 했다.달라진 건 접촉 직전마다 지혁의 손이 잠깐씩 망설인다는 점이었다.목에 붙은 먼지를 발견하고도 손가락으로 먼저 가리켰고, 후드 끈이 가방에 걸리면 주아가 돌아볼 때까지 기다렸다.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손부터 뻗던 사람이었다.주아는 그 망설임이 불편했다. 자신이 괜히 경계를 의식하게 만든 것 같으면서도, 막상 손이 닿지 않으면 아쉬웠다.친구 사이가 이렇게 번거로웠던 적은 없었다.***“허리 꺾지 말고 배에 힘.”지혁이 한 말은 아니었다.주아는 러닝머신 위에서 걷다가 고개를 돌렸다. 센터 안쪽 매트에서 지혁이 여성 회원의 자세를 잡아 주고 있었다. 낯이 익다 했더니 최근 주말 드라마에 나오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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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화 · 15년의 착각
지혁이 질투했다.그 가능성을 인정하자 지난 며칠이 다르게 보였다.소개팅에 입을 원피스를 고르던 손, 목걸이를 채워 주다 멈춘 호흡, 민석이 괜찮다는 말에 굳었던 얼굴. 친구가 걱정한 것이라고 해석하면 간단했던 행동들이 더는 한쪽으로 정리되지 않았다.주아는 다음 날 아침 지혁과 마주치기 전에 집을 나섰다.도망치는 건 답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어젯밤 지혁의 얼굴을 떠올리면 준비한 질문이 전부 엉켰다. 한 번 입 밖에 낸 말은 원고처럼 이전 상태로 되돌릴 수 없었다.질문 하나로 15년을 망가뜨릴 수도 있었다.그날 저녁, 주아는 민석과 세 번째로 만났다.민석은 조용한 한식당을 예약했다. 주아가 양식보다 한식을 좋아한다고 한 말을 기억한 선택이었다. 그는 지난번처럼 편안했고, 대화가 끊겨도 억지로 채우지 않았다.“요즘 일은 좀 어떠세요?”“바빠요. 다음 분기 공개작 편성이 한꺼번에 겹쳤거든요. 로맨스만 계속 보다 보니까 이제 사람 얼굴을 봐도 기승전결부터 찾게 돼요.”“저도 전략 보고서를 오래 보다 보면 식당 메뉴에서도 성장률을 찾습니다.”“그 정도면 저랑 비슷한 중증이네요.”둘은 동시에 웃었다.민석에게 호감이 없지는 않았다. 일 이야기의 속도를 알아듣고, 주아의 판단을 가볍게 취급하지 않는 점이 좋았다. 결혼을 염두에 둔 소개팅 상대라는 조건을 빼고 봐도 괜찮은 사람이었다.그래서 더 미안했다. 민석이 말을 할 때마다 머릿속 한쪽에는 지혁이 앉아 있었다.“수영을 오래 하셨나 봐요.”“제가요?”“아까 턴 동작이 어떻다고 하셔서.”주아는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되짚었다. 회사 체육대회 이야기를 하다가 수영장 레인 폭과 턴 자세까지 설명한 모양이었다.“아, 저는 거의 못해요. 제 친구가 선수였어요. 국가대표 상비군까지 했고요.”“권지혁 씨요?”“이름 기억하세요?”“첫날부터 여러 번 들었습니다.”민석은 웃었지만 주아는 웃지 못했다.생각해 보니 첫 만남에서는 지혁에게 배운 대화법을 말했고, 두 번째에는 연습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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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화 · 친구의 유효기간
너무 담백한 대답이라 주아는 오히려 알아듣지 못한 사람처럼 지혁을 바라봤다.주방에는 파 냄새가 남아 있었고, 불을 끈 인덕션 위에서는 냄비가 식고 있었다. 저녁을 먹기 전과 달라진 것은 지혁이 방금 내놓은 한마디뿐이었다.“언제부터.”“좋아한다는 걸 안 건 고1.”주아의 눈이 흔들렸다. 고등학교 1학년이면 자신이 실팔찌를 만들어 준 해였다.“그 전에도 네가 다른 애랑 있으면 싫었고, 하루라도 연락 안 되면 찾았어. 그게 뭔지 정확히 안 게 그때였어.”“우리가 친구였던 내내잖아.”“그래.”너무 짧은 대답이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주아는 기억 속 장면을 되는대로 꺼냈다. 지혁이 자신의 첫 짝사랑 편지를 고쳐 줬던 날, 첫 소개팅에 입을 코트를 골라 줬던 겨울, 회사 동료 때문에 속상해 술집 화장실에서 울다가 그를 불렀던 밤.그 모든 시간에 지혁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있었다.“내가 다른 남자 좋아한다고 말할 때도?”“응.”“소개팅 망쳤다고 울었을 때도?”“그때도.”“넌 그걸 다 듣고 있었어?”“네가 말하고 싶어 했으니까.”주아는 웃음도 아닌 소리를 냈다.“난 아무것도 몰랐는데.”“모르게 했으니까.”“왜?”지혁이 입술을 꾹 눌렀다. 그의 시선이 잠깐 바닥으로 떨어졌다가 돌아왔다.“말하면 널 잃을 것 같았어.”“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넌 항상 나를 제일 편한 친구라고 했으니까. 연애하다 헤어진 애들 얘기할 때마다 그래도 우리는 안 헤어져서 좋다고 했고.”주아가 했던 말이었다. 고백했다가 서먹해진 친구들을 보며 지혁에게 몇 번이나 떠들었다. 우리는 평생 친구라서 다행이라고.그때마다 지혁이 웃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주아는 기억을 더듬다 멈췄다. 지금 들은 답에 맞춰 과거의 표정까지 함부로 고쳐 읽고 싶지는 않았다.“그래서 계속 속였어?”“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은 건 맞아.”“그게 속인 거잖아.”“그래.”지혁이 변명하지 않자 오히려 화를 붙들 곳이 없었다.주아는 팔짱을 끼려다 손을 내렸다. 떨리는 손을 숨기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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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화 · 남사친이 사라진 자리
알람이 울리기 전, 주아는 낯선 천장을 보며 눈을 떴다.침대라고 부르기 민망할 만큼 얇은 매트리스와 한쪽 벽을 다 차지한 회색 커튼. 급하게 구한 단기 숙소는 사진보다 좁았고, 보일러가 돌아갈 때마다 바닥에서 작은 진동이 올라왔다. a 잠깐 머무는 데는 충분했다. 주아는 그렇게 판단했다. 불편한 점은 참을 만했고 출근하기에도 나쁘지 않았다.그런데 아침마다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휴대전화를 찾았다.권지혁에게서 온 메시지는 없었다.주아가 집을 나오며 시간을 달라고 했고, 지혁은 알겠다고 했다. 도착했다는 한 줄에 돌아온 답도 짧았다.잘 자.그 뒤로 며칠이 흘렀다.연락하지 않는 것은 지혁이 약속을 지키는 방식이었다. 주아는 그걸 알면서도 화면을 한 번 더 내렸다 올렸다.첫날 밤에는 퇴근했다는 전화를 걸려다 통화 버튼 바로 앞에서 손을 멈췄다. 재미없는 예능을 틀어 놓고는 지혁이라면 저 장면에서 분명 졸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야식을 주문할 때는 습관처럼 두 사람 몫을 담았다가 하나를 지웠다.지혁이 특별히 무언가를 해 주지 않는 시간에도 주아의 생활은 그를 기준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떨어져 지내며 확인한 것은 도움의 빈자리가 아니라, 매일 같은 것을 보고 말하고 싶어 했던 자신의 습관이었다.평소라면 짧은 메시지가 연달아 와 있었을 시간이었다. 일어났냐. 아침 먹어. 우산 챙겨.15년 동안 귀찮다고 흘려보낸 문장들이 사라지자 하루의 시작이 자꾸 늦었다.주아는 편의점에서 산 삼각김밥 포장을 뜯다가 한 입도 먹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지혁이 봤다면 염분부터 확인했을 것이다. 그러고는 냉장고에 넣어 둔 달걀과 과일을 꺼내 식탁에 늘어놨겠지.그 장면이 너무 또렷해서 기분이 상했다.자신에게.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뒤에야 그 다정함의 이름을 바꿔 붙이는 건 비겁했다. 지혁이 15년을 좋아했다는 이유로, 함께 쌓은 모든 시간을 사랑이었다고 고쳐 읽고 싶지도 않았다.그래서 집을 나왔다. 지혁의 대답이 들리지 않는 곳에서 제 마음부터 확인하고 싶었다.주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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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 연습은 끝났어
지혁의 손이 문손잡이에서 천천히 떨어졌다.“물건 가지러 온 거면 내가 챙겨 줄게.”며칠 동안 준비한 사람처럼 말이 빨랐다. 주아는 대답 대신 신발을 벗었다. 지혁이 막지는 않았지만, 예전처럼 슬리퍼를 꺼내 주지도 않았다.현관에 나란히 놓인 운동화 사이로 주아가 신던 실내화가 보였다. 그대로였다. 욕실 앞의 머리끈도, 거실 소파에 두고 간 쿠션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집만 보면 주아가 잠깐 외출했다 돌아온 것 같았다.두 사람만 그렇게 행동하지 못했다.“차 마실래?”“아니.”“그럼 앉아.”“지혁아.”그가 돌아봤다.15년 동안 수없이 부른 이름인데 지혁의 어깨가 굳었다. 주아도 그 변화를 모른 척하지 않았다.“그날 키스, 너한텐 뭐였어?”뜸을 들일 거라 생각했다. 지혁은 바로 답했다.“연습 아니었어.”“처음부터?”“한 번도.”“그럼 왜 그렇게 말했어.”“내 마음을 들키지 않고 네게 다가갈 핑계가 필요했으니까.”지혁의 얼굴에는 변명할 마음이 없었다.“네가 싫다고 했으면 안 했을 거야. 그래도 내가 친구라는 걸 이용한 건 맞아. 미안해.”주아는 며칠 전부터 품고 있던 말을 골라 꺼냈다.“나, 그게 제일 화났어. 너라서 허락한 건데. 세상에서 제일 안전하다고 믿는 친구가 연습이라고 하니까 받아들인 건데, 넌 나랑 다른 곳에 서 있었잖아.”“알아.”“모르면서 안다고 하지 마.”“알려고 하는 중이야.”지혁은 한 발도 다가오지 않았다.“그래서 네가 나간 뒤에 안 잡았고, 연락도 안 했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네가 정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니까.”현관에서 비켜서며 선택을 돌려주던 지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안하다는 한마디 뒤에 변명도, 붙잡는 손도 없었다. 주아는 그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말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잘못한 뒤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까지 보고 왔다.주아는 거실 한가운데 선 지혁을 오래 바라봤다.“나는 네가 날 오래 좋아했다는 이유로 온 거 아니야.”“알아.”“아직 다 이해한 것도 아니고, 속인 게 안 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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