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하는 대답하지 않았다.소한이 이 야심한 밤에 이곳에 온 이유가 바로 이것을 따지기 위함 임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이미 알고 있는데 굳이 물을 필요가 있을까?소하가 묵묵히 인정하는 걸 본 소한은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하를 마주 보고 섰다. “형님께서 공정한 경쟁을 하자고 하지 않으셨습니까?”공정한 경쟁이 한밤중에 여자의 침소에 몰래 들어가는 것을 뜻했단 말인가?소하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낭자와 상의할 일이 있어서 그랬다. 그런 것이 아니고 서야 평양원군 저택이 그렇게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느냐?”최지습은 군대를 이끌고 출정을 떠나기 했지만, 김단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남겨두었다.그는 야밤에 두 차례 담을 넘어 들어가려 했으나, 두 번 모두 현장에서 붙잡혔다.하지만 소하를 본 사람들은 최지습의 명령이라며 그에게 언제든 김단을 만나러 가도 상관없다고 말하며 그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았다.하지만 김단의 명성이 있었기에 소하는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해야 했다.소하의 말을 들은 소한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다.그 빌어먹을 평양원군이라는 놈을 떠올리며 몇 마디 중얼거렸다. “형님께선 그 자와 옛날부터 아는 사이였기에 들어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저에게는 악감정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이렇게 종종 보이는 소한의 아이 같은 모습에 소하는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네 부상이 아직 낫지 않았으니 일찍부터 쉬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께서 또 걱정하실 것이다.”소한은 소하를 흘끗 보고 나서 말했다. “지금 형님이 걱정해야 할 사람은 형님 자신입니다. 단이 낭자가 말하기를 공주가 형님을 해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형님께선...”“방금 전에 낭자가 말해줬다.”소하는 소한의 말을 끊고 궁금해하며 물었다. “너는 이를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냐? 언제 또 낭자를 만난 것이냐?”“제가 언제 낭자를 만났든 형님이 상관할 바 아닙니다!” 소한은 감정을 가다듬고 물었다. “공주의
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떠나려 했다.소한의 뒷모습을 본 소하는 한숨을 쉬고 잠시 생각하다 그를 따라갔다.“부상이 심하다, 억지로 버티지 말거라!”이번에 소한은 소하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낭자가 또 뭐라고 했습니까?”소하는 그제야 자신의 손이 차갑다는 말을 떠올렸지만, 개의치 않고 말했다. “별거 없었다.”“정말입니까?”“네 갈 길이나 가거라.”“…확실히 많은 말을 한 것 같군요.”하지만 소한이 아무리 물어도 소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다음 날.김단은 진산군 댁 대문 밖에 서서 높이 걸린 현판을 바라보았고,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분명 과거 떠날 때 그녀는 그 현판을 보며 평생 이곳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하지만 지금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가?그녀는 애써 심호흡을 했지만, 가슴속의 묘한 감정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하지만 김단은 이번에 소 오라버니를 위해서, 그리고 의원을 보호하기 위해 온 것이니 할머니께서도 아시게 된다면 이번만은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다.숙희는 김단의 뒤에 서서 그녀가 긴장한 것을 느끼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씨, 두려워하지 마세요. 만약 대감께서 아씨를 괴롭히려 하시면, 제가 가장 먼저 나서서 막을 겁니다!”이 말을 들은 김단은 고개를 돌려 숙희를 향해 따듯하게 웃어 보였다.그때 진산군 댁 대문이 열리고, 방금 전 들어가 보고를 올린 하인이 나와 김단에게 공손히 인사하며 웃었다. “아씨, 들어오시지요.”김단은 숙희를 데리고 저택 안으로 향했다.그들은 하인을 따라 대청까지 들어갔다.도착하니 진산군이 대청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였다.김단이 오는 것을 본 하인이 그에게 보고하기도 전에 진산군이 서둘러 그녀를 맞이하러 나왔다.그는 김단 앞에 다다라서야 자신이 좀 경솔했다는 것을 깨달은 듯 뒷짐을 지며 어색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왔느냐!”김단은 공손히 예를 올리고 나서 진산군을 보며 말했다. “임씨 부인을 뵈러 왔습니다.”
매화당의 문을 천천히 밀고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몇 그루의 굵직한 매화나무였다.아직 초가을이라 매화는 피지 않았다.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심어놓은 나무들은 저마다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있었기에 이곳에는 꽃향기가 은은하게 퍼져있었다.그리고 지금은 목부용이 한창 피어나는 계절이었다.크고 화려한 꽃들이 피어나니 매화당은 선명하고 아름다운 색으로 칠해진 한 폭의 그림 같았다.김단은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섰다.마지막으로 이 매화당을 찾았던 게 언제였더라?과거의 기억들을 곰곰이 되짚어보니 검을 들고 임원을 찾아갔던 그날로 돌아가 있었다.아마 그날이 매화당에 온 마지막 날이었을 것이다.그날 그녀는 이곳을 둘러볼 여유조차 없었다.오직 할머니의 복수만을 위해 움직였고 가슴에는 증오만을 품고 있었다.그러나 지금은 달랐다.이제야 겨우 이 아름다운 매화당을 제대로 눈에 담을 수 있었다.하지만 모든 것이 그때와 같지는 않았다.담벼락 옆에 세워져 있던 석상은 화분으로 바뀌었고 동쪽 담장 아래에 있던 그네는 정자로 대체되어 있었다.이 모든 것들은 아마도 임원이 바꿔놓은 거겠지.그래서일까?이 매화당은 이제 더 이상 그녀가 기억하던 모습이 아니었다.“마님, 조심하세요!”멀지 않은 곳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김단이 소리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한 유모가 임씨 부인의 뒤를 조심스레 따라가고 있었다.임씨 부인은 무언가를 품에 소중히 안은 채 행복이 가득한 얼굴로 걸어가고 있었다.“얼른 가자. 곧 단이가 돌아올 시간이야!”“마님, 조심하세요! 그러다 넘어지십니다!”나이가 많은 유모는 발걸음이 둔해 임씨 부인을 따라가기 버거워 보였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씩씩하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그러다 김단 앞에 다다르자 임씨 부인은 발걸음을 멈추었다.“낭자는...”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이 낭자는 누구일까?임씨 부인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정체를 떠올리려 노력했다.김단은 조용히 웃음을 머금고 허리를 숙였다.“마님께
그때는 매번 그물만 던지면 몇 마리는 손쉽게 건져 올렸다.그러던 어느 날, 엄청 길고 큰 놈 하나를 낚았는데 그 녀석이 어찌나 날뛰던지 어린 김단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았다.물고기는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꼬리로 김단의 팔과 뺨을 여러 차례 내리쳤다.그러다 결국 김단의 품에서 벗어나 강물 속으로 도망쳐버렸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하던 그녀는 진정이 되지 않자 결국 울부짖으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눈물범벅인 얼굴을 본 진산군은 마치 전장에 나가는 맹수처럼 허세 가득한 얼굴로 복수해 주겠다고 호언장담하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물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나타났다.그리고 그의 손에는 크고 싱싱한 물고기 한 마리가 들려 있었다.어린 김단은 그것이 정말 자기가 놓쳤던 바로 그 물고기라 믿었고 자신의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그 날뛰던 물고기가 그렇게 쉽게 다시 잡힐 리가 없었다.진산군은 그저 시중에서 커다란 생선 한 마리를 사 온 뒤 자신의 몸을 물로 흠뻑 적신 후 돌아왔을 것이다.그 시절 김단은 분명 그들의 보물이었고 사랑스러운 딸이었다.김단이 아무 말 없이 그저 조용히 서 있자 임씨 부인은 아까 그 지렁이 꾸러미를 들어 보이며 신이 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우리 단이가 이걸로 뭘 하려는 줄 아느냐? 물고기를 잡으려고 한단다. 참 기특하지? 아직 어린데 벌써 그런 재주를 다 부리다니. 이게 다 효심이라는 것이다. 내가 그냥 스쳐 지나가듯이 생선국을 먹고 싶다 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지 뭐냐.”말을 하던 임씨 부인은 다시금 박장대소를 터뜨렸다.“그런데 어제 말이다. 단이가 울면서 돌아왔지 뭐니? 큰 물고기를 잡았는데 그걸 못 붙잡고 놓쳐버렸다더구나. 물고기가 자기를 마구 때리고 도망갔다나? 그 말을 듣고 나와 대감님 모두 얼마나 크게 웃었는지 모른다. 우리 딸아이가 어찌나 귀엽던지.”임씨 부인의 웃음이 커질수록 김단의 마음 한구석은 불편하기만 했다.정말로 묻고 싶었
김단은 거의 도망가다시피 매화당에서 빠져나왔다.무언가로부터 쫓기듯 정신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바람이 그녀의 뺨을 스쳤고 옷자락은 허공을 가르며 바쁘게 흩날렸다.꽤나 먼 거리까지 달리고 나서야 김단은 발걸음을 멈추었다.심장이 마구 요동치고 숨은 턱 끝까지 차올라 가쁜 숨을 토해내야 했다.그녀는 주저앉을 듯 휘청거리며 한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댔다.뒤이어 헐떡이며 달려온 숙희도 이내 그녀 곁에 멈춰 섰다.그녀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김단을 걱정했다.“아가씨… 괜찮으세요?”그 말에 김단은 허리를 곧게 펴고 억지로 숨을 고르려 애썼다.겨우 입꼬리를 올려 굳은 미소를 짓던 그녀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그래. 괜찮다.”자신을 속여가며 거짓말을 내뱉었다.앞으로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마음을 다잡은 김단은 발걸음을 돌려 의원의 거처로 향했다.오늘 이곳에 온 목적은 분명했다.소 도련님의 안부를 묻기 위해서였다.방금 전의 모든 감정은 가슴속 어딘가로 밀어 넣은 채 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향 한 자루가 다 타들어갈 무렵에 김단은 어원의 작은 뜰 앞에 다다랐다.작고 조용한 공간에는 세 칸 남짓한 집 한 채가 서있었다.문을 열고 들어서자 은은한 약초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마당 한가운데엔 대나무 선반이 여러 개 놓여 있었고 그 선반 위에는 널어놓은 약재들이 바람결에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서쪽 방 창문 너머로 연기 한 줄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의원은 지금 그 방에 있는 모양이었다.김단은 조용히 그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문가에 그녀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안에서 약재를 손질하던 의원이 고개를 들었다.문턱 너머로 들어온 익숙한 얼굴에 의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아가씨?”놀라움과 반가움이 동시에 얽힌 그 목소리.의원은 김단을 진산군 댁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는 손에 쥔 약초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부리나케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를 뵙습니다.”
의원은 조심스레 김단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이런 형식은 필요 없습니다. 그저 제대로 의술을 익히세요. 그게 스승에게는 가장 좋은 예물입니다.”둘은 서로 눈을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스승과 제자, 이제 막 맺어진 이 인연은 조용하고 따스한 빛으로 서로의 마음을 감쌌다.그러나 곧 김단은 마음속 깊은 곳에 품어두었던 본래의 목적이 떠올랐다.“스승님. 제가 오늘 뵙고자 했던 건 소가의 큰 도련님 때문입니다.”그 말을 들은 의원은 곧장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왜 그러십니까? 혹시 또다시 다리에 문제가 생긴 겁니까?”김단은 고개를 저으며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건 아닙니다. 다만 어젯밤 제가 그분의 손을 만져보았는데 너무 차가웠습니다. 마치 사람의 온기라고는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맥을 짚어보니 정상이더군요. 진맥으로 판단하기는 무리였습니다. 혹시 몸속의 독이 아직 다 빠져나가지 않은 걸까요?”의원의 얼굴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맥으로 증상을 읽을 수 없다라... 저 역시 단언하기 어렵습니다.”김단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정확히 말하자면 맥은 보통 사람과 흡사하긴 한데 뭔가 조금 다릅니다. 아주 미세하게 어딘가 어긋나 있어요.”하지만 그걸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려웠다.의서에 적힌 증상은 대응할 수 있었지만 그 외의 병에 대해서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의원은 그런 김단의 고민을 단번에 알아차렸다.배운지 얼마 되지 않은 제자의 불완전함을 메워주고 싶은 것이 스승의 마음이었기에 그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자, 내 맥을 짚어보세요.”김단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맥박은 일정하고 안정되었다. 의원답게 기혈이 고르고 건강했다.잠시 후 의원은 말도 없이 은침 하나를 꺼내더니 자신의 팔에 찔러 넣었다.그 순간 김단의 손끝으로 전해지던 맥이 달라졌다.그녀는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방금 전까지 또렷하던 맥이 순간적으로 흐려졌다.한 가닥의
김단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바람이 옷자락을 스치고 저녁노을이 그녀의 어깨 위에 조용히 내려앉았다.그녀는 마치 이 시간 속에 홀로 고립된 사람처럼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아마도 오늘 너무 많은 기억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고 갔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등 뒤에서 들려온 그 목소리를 차마 모른 척할 수 없었다.“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밥 한 끼 대접하는 게 예의 아니더냐?”오늘 하루 김단이 자신의 부모와 나눈 대화는 고작 몇 마디뿐이었다.그녀는 오히려 의원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요즘 세간에서 사람들은 김단을 그리 칭했다.명의의 제자, 중전의 독을 해독한 인재.이 모든 명칭의 이면에는 이 집에 살고 있는 의원이 있었다.진산군은 그 사실에 조금도 불만이 없었다.의원은 평생 이 저택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김단을 그의 제자로 받아들인다면 그녀가 언젠가는 이곳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물론 이 모든 것은 진산군의 아름다운 망상이겠지만 그렇게라도 그녀를 한 번 더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그의 뒤에는 겸인 한 명이 조용히 서 있었다.그 역시 김단을 어린 시절부터 지켜봐온 사람이었다.비록 신분 차이로 인해 자신의 주장을 펼쳐 보이지는 못했지만 진산군과 같은 마음이었다.그 또한 지금의 쓸쓸하고 텅 빈 방을 볼 때면 마음이 쓰라렸다.그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마님께서 아가씨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잔뜩 준비해두셨습니다. 한 끼만이라도 함께 하시지요. 대감님과 마님 모두 아가씨와 함께 식사하길 고대하고 계십니다.”진산군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고여 있었다.지금 이 순간 그들은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임원은 죽었고 임학은 전쟁터에 나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아무도 없는 이 집에 남겨진 두 노인은 자신들 손으로 내친 딸에게 다시 돌아와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어 먼저 돌아가야 합니다.”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묘
설령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자신을 낳고 길러준 은정만으로 그를 용서할 수는 없는 걸까?정말로 그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아버지라는 단어를 다시 입에 올릴 수 있을까?김단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켜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그녀의 눈앞에는 눈물로 범벅이 된 채 힘겹게 서 있는 진산군이 있었다.김단은 차분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마님께서는 지금 누군가의 보살핌이 절실한 때입니다. 부디 몸 건강 챙기십시오. 저는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그녀는 다시 한번 조용히 인사한 후 떠나버렸다.이번에는 정말로 뒤돌아보지 않았다.진산군은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이번에는 진산군도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곁에 서 있던 겸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감님,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아가씨께서 언젠가는 마음을 여실 겁니다.”그러나 진산군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웃음을 지었다.“상심은 무슨… 방금 전 그 애가 나에게 몸조심하라 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다음에 또 오겠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냐?”그녀의 입에서 어렵게 꺼낸 그 짧은 말들이 진산군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김단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마차 안, 김단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창밖으로 저물어가는 풍경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그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숙희는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아가씨… 정말 괜찮으세요?”그녀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임씨 부인을 만난 후 김단의 기분이 눈에 띄게 저조해 보였다.의원을 만난 뒤 기운을 차린 듯했지만 진산군의 등장으로 인해 다시 무너져 내렸다.한참이 지나서야 김단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숙희를 바라보았다.그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었다.“숙희야, 내가… 너무 매정한 것이냐?”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바람처럼 스쳤다.고작 밥 한 끼였을 뿐인데...눈물까지 흘리며 붙잡는 아버지
김단은 맹영지를 소하가 있는 곳으로 보게 하였다.허나 맹영지는 반응이 느리고,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에 소하를 바라보지 않았다.“소하라고 하는 사내입니다. 기억하십니까?”김단은 여전히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허나 소하의 이름을 들어도, 맹영지는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이러한 그녀의 모습에 소하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이리 상황이 좋지 않을 줄은 몰랐소.”김단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소하 오라버니께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옵니다. 제가 최선을 다하여 낭자를 보살 피겠나이다.”곧이어 소하의 시선이 김단을 향했다.찌푸린 미간은 펴질 줄 몰랐다.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인가.사실 그는 맹영지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눈앞의 감회는 그저 오늘날과 이전의 다름에서 온 것이라 말할까,마음에는 김단의 안위만 생각하고 있으니, 다른 생각 하지 말라고 말할까.헌데 만일 그녀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면, 할 말이 없지 않은가.소하는 여러 생각에 휘잡혔다.허나 생각했던 말은 내뱉지 않았다.“중전 마마께서 낭자와 맹 낭자를 처소로 들이시는 것은, 분명 다른 생각이 있으실 것이오. 그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소?”김단이 고개를 저었다.“사실 저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였나이다.어쩌면 맹 씨 집안 때문이 아니겠습니까?”“어찌 되었든 간에, 낭자가 중전의 처소로 들어갔으니 호랑이 굴에 들어간 것과 같소. 항상 조심해야 하오.”“소하 오라버니, 염려하지 마시옵소서.제게는 오라버니께서 가르쳐 주신 방도가 있지 않사옵니까.”그녀의 말에 소하가 고개를 숙이고 미소를 지었다.“돌을 은침으로 대신하여, 민대부를 반나절 동안 아우성치게 하지 않았소.”“반나절이라니요, 반 시진도 가지 못했나이다!”김단은 소문이란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소하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그래도 큰 인물이 되지 않았는 가.”“스승이 잘 가르쳐 준 덕분입니다.”김단은 서로 치켜세우는 상황에 웃음을 터트렸다.“중전 마마께서 기다리
해가 서쪽 하늘에 기울 무렵, 김단이 맹영지를 데리고 궁으로 들어갔다. 경씨가 옆에 서있었다.그의 얼굴에는 염려가 가득했다. 허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전하가 김단에게 맹영지와 함께 궁으로 들라는 명을 내리지 않았는 가.만일 대군께서 한양에 계셨다면 막을 수 있었을 터, 한낱 마부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궁궐은 워낙 넓고, 궐 안의 금군 중에는 무예가 뛰어난 자들이 넘쳐 난다.더하여 내각에는 임금을 지키는 호위들이 따로 존재한다.자신이 몰래 궁에 들어가 낭자를 지키려 든다면, 날이 밝기도 전에 역적이라 오해를 받아 온몸이 찢길지도 모른다.김단은 경씨의 표정을 보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경씨 도령, 염려하지 마시 옵소서. 제 몸 하나는 제가 잘 챙길 수 있사옵니다.하물며 소하 오라버니는 금군의 총령이니, 만일 무슨 일이 생기게 되어도 도움을 청할 수 있나이다.”경씨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부디 조심하시오.”경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숙희가 붉은 눈가를 한 채로 입을 열었다.“아씨, 노비는 궁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옵니까?”숙희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그저 김단과 함께 궁으로 들어가고 싶었다.혹여 무슨 일이 생기면, 도움을 줄 수 없다 하여도 자신이 뒤집어쓸 수 있지 않은가.허나 김단은 만일 하나 일이 생겨도, 숙희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저 작은 의녀에 불과해.중궁전에 거처하면서 내 몸종까지 데려간다 하면, 중전의 사람을 꺼려 한다면서 입을 놀릴 것이야.”숙희는 어렴풋이 그저 둘러대는 것일 뿐이라 느껴졌다.허나 반박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궁 안의 규칙이 수도 없이 많은 탓에,진정 구설수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은 가.혹여 자신이 아씨를 해할 수도 있지 않은가.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숙희는 참을 수 밖에 없었다.뜬 눈으로 김단이 맹영지와 함께 궁궐 문으로 다가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양쪽으로 큰 성벽이 둘러쌓여 있어,알 수 없는 압박감에 맹영지가 긴장을 했다.그녀의 두 손은 김단의 팔을 꼭
“황공하옵니다, 마마.”향 하나를 다 피우고 나서야, 김단은 중전의 처소를 떠났다.그리고 서아름을 살피기 위해, 복화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서아름은 처음 만났을 때 보다 많이 말라 있었다.안색도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다.허나 자신의 나인 앞에서는 이따금 지친 기색을 보였다.마치 나인에게 곧 죽을 사람처럼 행실 하곤 했다.다행히도 나인은 눈치가 없었다.하루 종일 놀기만 하고, 서아름을 살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그 덕에 서아름도 마음이 편했다.김단을 보자 서아름이 서둘러 그녀를 배웅했다.“의녀께서 오셨나이까! 어서, 안으로 들이시옵소서!”김단은 서아름에 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그녀는 물을 따라 주었다.“다 의녀의 덕분이옵니다. 근래에 걸음걸이도 훨씬 가벼워졌나이다!”사람의 몸은 아프지 않아야, 건강하다는 것을 인지 할 수 있다.낮에는 정신이 또렷하고, 밤에는 편히 잘 수 있었다.허나, 김단의 안색이 그녀와 반대로 어두웠다.“오늘 날, 전하께서 중전 마마를 옆에 두시고 숙원 마마의 상태에 대해 여쭈셨나이다.소신은 전하께 마마의 몸이 연약하지만,아이는 무탈하다 아뢰었사옵니다.”서아름이 움찔했다.그녀는 덕빈을 오랜 시간 시중을 든 사람이다.어찌 김단의 뜻을 모를 수 있는 가.자신은 살지 못하지만, 아이는 살 수 있다는 뜻이다.서아름은 한참을 움직이지 않다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이만 무탈하면 돼옵니다. 소인은 그저 덕빈께 아이 하나만 남겨두는 것만으로 족합니다. 아이만 무탈하면, 제 미천한 목숨 하나가 중요하겠나이까.”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그녀는 서아름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아이와 그녀의 목숨은 똑같은 것이라고.사람의 목숨에는 신분이 없듯이, 미천한 목숨이라는 것은 없다.더하여 귀식환 제조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제조에 성공만 하면, 서아름을 궁에서 떠나 새로운 삶을 보낼 수 있었다.허나 김단은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귀식환 제조를 성공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실패로 돌아간다
김단은 중전의 뜻을 금방 알아챘다.중전이 서아름을 해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그녀 뱃속의 아이 때문이었다.만일 김단이 아이가 무탈하다 말했다가, 훗날 서아름이 아이와 함께 목숨을 잃게 되면, 임금이 그녀를 의심할 것이 뻔하다.중전은 김단에게 눈치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김단은 시선을 거두었다.고개를 숙인채, 자신의 발만 쳐다보며 말했다.“중전 마마께서 내려주신 귀한 보약 덕에, 숙원 마마의 태아는 무탈 하옵니다. 숙원 마마께서 끝까지 버텨내신다면, 태중의 용태는 무사히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이옵니다!”김단의 말에도 중전의 살기 서린 눈빛은 여전했다.허나 임금은 만족한 듯, 미소가 짙어졌다.그는 뒤를 돌아 중전을 바라보았다.그녀의 손을 잡고는 다정하게 말했다.“다 중전 덕분이오.”중전은 살기 서린 눈빛은 온데간데 없고,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임금의 칭찬에 그저 미소를 지어 보였다.“주상께서 후궁의 일을 신첩에게 맡기셨으니, 어찌 주상의 근심을 덜어드리지 않겠사옵니까.”“잘하셨소!”곧이어 임금은 몸을 뒤로 옮기더니, 중전의 귓가에 속삭거렸다.중전이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기다리고 있겠나이다.”“하하하, 알겠소.”임금은 그제야 손을 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짐은 아직 정사가 남았소, 자네는 중전 곁에서 말동무를 해주시오.”뒷부분은 김단을 향한 말이었다.김단은 예, 라 대답하며 임금을 배웅했다.임금이 자리를 떠나자마자, 중전이 김단을 바라보았다.쌀쌀한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보아하니, 의녀는 주상의 총애를 받아 자신의 주관이 뚜렷 해지셨소.”중전의 말투에 김단의 심장이 철렁했다.김단은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부디 중전 마마께서 노여움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소신은 마마를 위함이었나이다.”그녀의 말에 중전이 코웃음을 쳤다.그제야 천천히 물어보았다.“말해 보시오.”“부디 마마께서 깊이 헤아려 보시옵소서. 전하께서 후손을 이토록 중히 여기시거늘, 만일 소신이 숙원 마마의 태중이 위태롭다 아뢰
임금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수고가 많았다.”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중전이 입을 열었다.“전하, 신첩 또한 의녀가 수고가 많다 생각하옵니다. 영지를 돌보시는 것도 벅차신데, 궁중의 후궁들까지 살펴야 하시니 말이옵니다. 차라리 영지를 신첩의 처소로 옮겨 이곳에서 돌보게 하는것이 어떠하옵니까? 의녀는 본디 평양 대군의 관저에 임시로 거처 중이시고, 그런 곳에 사람을 데려가는 것이, 체면상 온당치 않은듯하여 감히 아뢰옵니다.”평양 대군 관저에 김단은 손님에 불과하다.어찌 손님이 손님을 데려갈 수 있단 말인 가.하물며 맹 씨 집안의 자녀가 평양 대군 관저에 머무는 것에 대해 소문이 퍼질지도 모른다.임금도 같은 생각이다.맹영지를 중전의 처소에 머물게 하는 것이, 평양 대군의 관저에 머무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중전은 맹영지의 친 고모이며, 처소에서 병을 돌보는 것이 수월하지 않은가.허나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허나 맹 가의 계집은 이 자만 알아본다 하지 않았소? 만일 이곳으로 옮겨,소란을 피우게 된다면 중전의 병세를 더욱 악화 시킬지도 모르오.”임금은 중전을 걱정하고 있었다.다정한 말투에 중전의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염려하지 마시 옵소서. 의녀도 처소로 옮겨와 머물면 되지 않겠나이까.”맹영지가 알아보는 사람이 김단 뿐 이라면, 김단을 중전의 처소에 머무르게 하면 되지 않는가.그녀의 말에 김단의 얼굴이 굳어졌다.중전의 자신의 제안이 마음에 들은 모양이다.“그리하면 의녀도 수고를 덜 하겠지 않나이까.”임금도 중전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곧이어 김단을 향해 물었다.“자네는 어찌 생각하는 가?”김단은 내키지 않았다.궁중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허나 김단은 공주의 사람이다.공주와 중전이 같은 편이니, 중전의 제안을 감히 거스를 수는 없었다.곧이어 절을 하고 말했다.“중전마마의 각별한 보살핌에 몸둘바를 모르겠나이다.”그녀의 대답은 다른 자가 듣기에는,중전의 제안에 만족한 것처럼 보였다.옆에
김단의 미소를 보아도, 맹 씨 부인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맹 씨 집안의 안주인이 되어서, 어찌 김단의 속과 겉이 다르다는 것을 모를 수 있겠는 가.비록 미소를 짓는 모습이 온화하기 그지없지만, 자칫하면 그들을 물어 집안을 피바다로 만들 수 있었다.또한 김단의 뒤를 봐주는 자들은, 감히 그들이 거들떠도 보지 못하는 인물들이 아닌가.오늘 김단은 말리려고 하지도 않았다.오히려 맹 씨 집안의 체면을 고려하여, 그녀가 맹영지를 데려가지 않은 것이다.이러한 생각에 맹 씨 부인은 답답함을 느꼈다.허나 김단을 향해 미소를 짓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맹 씨 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김단의 미소가 점차 사라졌다.곧이어 숙희가 김단의 곁으로 다가갔다.목소리를 낮추고는 물었다.“맹 아씨의 친 모친이옵니다. 어찌 친 딸을 해하겠나이까, 혹여 아씨께서 너무 깊게 염려를 하신 것이 아니옵니까.”“내가 그 생생한 본보기가 아니더냐.조금만 생각하면 알게 되는 법이지.”김단은 말하면서 맹영지에게 시선을 돌렸다.맹영지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금색의 계화 꽃잎이 떨어지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고개를 숙여 자신의 치마를 바라보았다.만일 맹 씨 부인이 ‘맹영지의 상황이 이리 심각할 줄 몰랐다’ 라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김단이 직접 맹영지를 맹 씨 집안의 마차로 올려 보냈을 지도 모른다.자신의 피가 흐르는 친 자식을, 어찌 사, 오 년 동안 상황을 몰랐던 것일까.마치 그녀가 세답방에 버려지고, 삼 년 동안 어떠한 안부도 묻지 않는 그 자들과 같은 모습과 같았다.허나, 정승댁은 세답방이 아니다.맹영지는 노비가 아닌 그저 댁의 맏며느리가 되기 위해 정승댁으로 향한 것이다.어찌 친부모가 되어 아무것도 모를 수 있겠는 가.더하여 중전이 독이 맹 씨 집안의 소행이라 의심을 품고 있는 중이다.오히려 정승댁이 맹 씨 집안보다 더 안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겉으로는 물러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한 수 앞을 보아 맹영지를 이곳에 머무르게 한
맹 부인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손을 거두고 두려운 표정으로 맹영지를 바라보았다.“어찌 이럴 수 있으십니까?”무언가 떠오른 것 마냥 김단을 향해 바라보았다.“의녀, 영지가..”김단은 그제야 미소를 지어 보였다.곧이어 맹영지의 곁으로 다가갔다.“다 나았나이다.”그녀의 한 마디에 맹영지는 천천히 진정을 되찾았다.두려운 눈빛이 점차 평온해졌다.맹 씨 부인은 이러한 모습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곧이어 김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낭자께서는 소인만 알아볼 수 있으십니다. 다른 이들이 다가간다 하여도,밀쳐 내실 겁니다. 부인도 똑같이 밀쳐 내실 것이옵니다. 제 몸종도 낭자에게 긁혀 손에 상처를 입었나이다.”김단의 말이 끝나자마자, 숙희가 맹 씨 부인에게 손을 보여 주었다.어제 맹영지에게 긁혀 생긴 상처였다.다행히도 김단의 설득 아래,맹영지는 드디어 숙희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그제야 그녀의 시중을 들게 해 주었다.김단의 말에 맹 씨 부인의 얼굴이 굳어졌다.“오늘 데려 가지 못한다는 뜻이옵니까?”“아니옵니다.”김단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소인은 그저 맹 낭자께서 이곳에 계시는 게 나을 듯 하옵니다. 허나, 낭자께서는 맹 씨 집안의 자식이 아니 옵니까. 부인의 뜻을 따르겠나이다.”데려 가는 것이 결코 좋지 않다는 뜻이다.현재의 맹영지의 상황으로 보아, 억지로 데려 가는 수 밖에 없었다.부모가 되어 어찌 자식에게 좋지 않은 선택을 한단 말인 가.맹 씨 부인은 어찌 할 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대감이 맹영지를 데려오라고 신신당부했었다.허나 이 상황에 평양 대군 관저의 문을 나갈 수 있다 한들,맹영지가 소리치는 모습에 다른 이들이 소문을 퍼트릴 수 있다.잠시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의녀께서는 높은 의술을 가지고 계시라 믿나이다. 혹여 영지를 잠재울 수 있는 수가 있사옵니까?”‘잠’ 이라 했지만, 사실 기절을 시킬 수 있는지 물어본 것이다.그리해야 조용히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김단이 고개를 끄덕였다.“소인에게 약은
이튿날 아침, 김단은 궁무를 맡지 않았기에 평양관저에 머물며 맹영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탓인지 맹영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김단의 곁에 있을 때만큼은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조용한 정원, 김단은 맹영지와 함께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계수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숙희가 건네준 과자가 들려 있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맹영지는 고개를 들어 만개한 계화를 바라보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소하가 평양관저를 찾아왔으나 그는 맹영지와의 만남을 최대한 피하려 애썼다. 아마도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김단은 맹영지를 바라보며 과거 소하가 왜 그리도 그녀를 칭찬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때 소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답게 그녀는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가까웠던 두 사람이었는데 맹영지는 어쩌다 소하에게 독을 먹이려 했던 것일까?김단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맹영지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면 그때 자연스럽게 그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김단이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평양관저의 겸인이 급히 달려와 말했다.“아가씨, 맹가 사람들이 도착했습니다.”이런 큰일이 발생했으니 맹씨 집안에서 그녀를 보러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겸인에게 말했다.“알겠소. 이리로 모셔오시오.”잠시 후, 맹씨 부인이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김단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한 뒤 슬픈 눈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김 의원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의원님이 아니었다면 제 딸이 그 짐승 같은 자에게 학대받으며 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말을 마친 맹씨 부인의 눈동자가 붉어졌다.김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과찬이십니다, 맹씨 부인. 민태훈, 그 자의 말에 따르면 맹영지 아가씨의 병은 이미 4~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완전히 회
소한은 코웃음을 치며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소하의 조용한 목소리가 방안의 침묵을 깨뜨렸다.“이번에는 정말 잘했어.”영의정 저택에서 벌어진 일은 소한이 형벌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소하의 귀에 들어갔다. 만약 소한이 과감하게 영의정 저택에 침입하지 않았다면 김단은 쉽게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비록 민씨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김단을 해치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가 겪었을 모욕과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소하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소한은 많이 당황한 듯했다.“제가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때로는 그 충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소한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김단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에 그녀도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듯했지만 곧 냉랭한 표정으로 일관하였다. 김단은 마차에 오를 때까지 자신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과거의 그녀였다면 그가 나타나자마자 바로 그의 품에 안기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도 차갑게 변해버렸다. 자신을 외면하는 그녀가 소한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그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며 굳게 결심했다.그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이미 어떤 대가든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반 시진 후, 김단은 방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러자 숙희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아가씨?”김단은 정신을 차리고 숙희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이냐?”“두 도련님께서는 모두 돌아가셨습니다.”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전 발생한 일을 되새겨 보았다. 그녀는 소한이 오랫동안 계획해 온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에도 그는 소가를 위해, 전하를 위해 심지어 임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그녀만은 제외였다.그녀는 소한이 자신의 어머니를 걱정하는 척하며 평양관저로 따라온 것도 단지 자신의 동정심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상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