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떠나려 했다.소한의 뒷모습을 본 소하는 한숨을 쉬고 잠시 생각하다 그를 따라갔다.“부상이 심하다, 억지로 버티지 말거라!”이번에 소한은 소하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낭자가 또 뭐라고 했습니까?”소하는 그제야 자신의 손이 차갑다는 말을 떠올렸지만, 개의치 않고 말했다. “별거 없었다.”“정말입니까?”“네 갈 길이나 가거라.”“…확실히 많은 말을 한 것 같군요.”하지만 소한이 아무리 물어도 소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다음 날.김단은 진산군 댁 대문 밖에 서서 높이 걸린 현판을 바라보았고,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분명 과거 떠날 때 그녀는 그 현판을 보며 평생 이곳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하지만 지금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가?그녀는 애써 심호흡을 했지만, 가슴속의 묘한 감정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하지만 김단은 이번에 소 오라버니를 위해서, 그리고 의원을 보호하기 위해 온 것이니 할머니께서도 아시게 된다면 이번만은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다.숙희는 김단의 뒤에 서서 그녀가 긴장한 것을 느끼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씨, 두려워하지 마세요. 만약 대감께서 아씨를 괴롭히려 하시면, 제가 가장 먼저 나서서 막을 겁니다!”이 말을 들은 김단은 고개를 돌려 숙희를 향해 따듯하게 웃어 보였다.그때 진산군 댁 대문이 열리고, 방금 전 들어가 보고를 올린 하인이 나와 김단에게 공손히 인사하며 웃었다. “아씨, 들어오시지요.”김단은 숙희를 데리고 저택 안으로 향했다.그들은 하인을 따라 대청까지 들어갔다.도착하니 진산군이 대청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였다.김단이 오는 것을 본 하인이 그에게 보고하기도 전에 진산군이 서둘러 그녀를 맞이하러 나왔다.그는 김단 앞에 다다라서야 자신이 좀 경솔했다는 것을 깨달은 듯 뒷짐을 지며 어색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왔느냐!”김단은 공손히 예를 올리고 나서 진산군을 보며 말했다. “임씨 부인을 뵈러 왔습니다.”
매화당의 문을 천천히 밀고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몇 그루의 굵직한 매화나무였다.아직 초가을이라 매화는 피지 않았다.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심어놓은 나무들은 저마다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있었기에 이곳에는 꽃향기가 은은하게 퍼져있었다.그리고 지금은 목부용이 한창 피어나는 계절이었다.크고 화려한 꽃들이 피어나니 매화당은 선명하고 아름다운 색으로 칠해진 한 폭의 그림 같았다.김단은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섰다.마지막으로 이 매화당을 찾았던 게 언제였더라?과거의 기억들을 곰곰이 되짚어보니 검을 들고 임원을 찾아갔던 그날로 돌아가 있었다.아마 그날이 매화당에 온 마지막 날이었을 것이다.그날 그녀는 이곳을 둘러볼 여유조차 없었다.오직 할머니의 복수만을 위해 움직였고 가슴에는 증오만을 품고 있었다.그러나 지금은 달랐다.이제야 겨우 이 아름다운 매화당을 제대로 눈에 담을 수 있었다.하지만 모든 것이 그때와 같지는 않았다.담벼락 옆에 세워져 있던 석상은 화분으로 바뀌었고 동쪽 담장 아래에 있던 그네는 정자로 대체되어 있었다.이 모든 것들은 아마도 임원이 바꿔놓은 거겠지.그래서일까?이 매화당은 이제 더 이상 그녀가 기억하던 모습이 아니었다.“마님, 조심하세요!”멀지 않은 곳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김단이 소리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한 유모가 임씨 부인의 뒤를 조심스레 따라가고 있었다.임씨 부인은 무언가를 품에 소중히 안은 채 행복이 가득한 얼굴로 걸어가고 있었다.“얼른 가자. 곧 단이가 돌아올 시간이야!”“마님, 조심하세요! 그러다 넘어지십니다!”나이가 많은 유모는 발걸음이 둔해 임씨 부인을 따라가기 버거워 보였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씩씩하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그러다 김단 앞에 다다르자 임씨 부인은 발걸음을 멈추었다.“낭자는...”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이 낭자는 누구일까?임씨 부인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정체를 떠올리려 노력했다.김단은 조용히 웃음을 머금고 허리를 숙였다.“마님께
그때는 매번 그물만 던지면 몇 마리는 손쉽게 건져 올렸다.그러던 어느 날, 엄청 길고 큰 놈 하나를 낚았는데 그 녀석이 어찌나 날뛰던지 어린 김단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았다.물고기는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꼬리로 김단의 팔과 뺨을 여러 차례 내리쳤다.그러다 결국 김단의 품에서 벗어나 강물 속으로 도망쳐버렸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하던 그녀는 진정이 되지 않자 결국 울부짖으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눈물범벅인 얼굴을 본 진산군은 마치 전장에 나가는 맹수처럼 허세 가득한 얼굴로 복수해 주겠다고 호언장담하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물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나타났다.그리고 그의 손에는 크고 싱싱한 물고기 한 마리가 들려 있었다.어린 김단은 그것이 정말 자기가 놓쳤던 바로 그 물고기라 믿었고 자신의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그 날뛰던 물고기가 그렇게 쉽게 다시 잡힐 리가 없었다.진산군은 그저 시중에서 커다란 생선 한 마리를 사 온 뒤 자신의 몸을 물로 흠뻑 적신 후 돌아왔을 것이다.그 시절 김단은 분명 그들의 보물이었고 사랑스러운 딸이었다.김단이 아무 말 없이 그저 조용히 서 있자 임씨 부인은 아까 그 지렁이 꾸러미를 들어 보이며 신이 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우리 단이가 이걸로 뭘 하려는 줄 아느냐? 물고기를 잡으려고 한단다. 참 기특하지? 아직 어린데 벌써 그런 재주를 다 부리다니. 이게 다 효심이라는 것이다. 내가 그냥 스쳐 지나가듯이 생선국을 먹고 싶다 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지 뭐냐.”말을 하던 임씨 부인은 다시금 박장대소를 터뜨렸다.“그런데 어제 말이다. 단이가 울면서 돌아왔지 뭐니? 큰 물고기를 잡았는데 그걸 못 붙잡고 놓쳐버렸다더구나. 물고기가 자기를 마구 때리고 도망갔다나? 그 말을 듣고 나와 대감님 모두 얼마나 크게 웃었는지 모른다. 우리 딸아이가 어찌나 귀엽던지.”임씨 부인의 웃음이 커질수록 김단의 마음 한구석은 불편하기만 했다.정말로 묻고 싶었
김단은 거의 도망가다시피 매화당에서 빠져나왔다.무언가로부터 쫓기듯 정신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바람이 그녀의 뺨을 스쳤고 옷자락은 허공을 가르며 바쁘게 흩날렸다.꽤나 먼 거리까지 달리고 나서야 김단은 발걸음을 멈추었다.심장이 마구 요동치고 숨은 턱 끝까지 차올라 가쁜 숨을 토해내야 했다.그녀는 주저앉을 듯 휘청거리며 한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댔다.뒤이어 헐떡이며 달려온 숙희도 이내 그녀 곁에 멈춰 섰다.그녀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김단을 걱정했다.“아가씨… 괜찮으세요?”그 말에 김단은 허리를 곧게 펴고 억지로 숨을 고르려 애썼다.겨우 입꼬리를 올려 굳은 미소를 짓던 그녀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그래. 괜찮다.”자신을 속여가며 거짓말을 내뱉었다.앞으로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마음을 다잡은 김단은 발걸음을 돌려 의원의 거처로 향했다.오늘 이곳에 온 목적은 분명했다.소 도련님의 안부를 묻기 위해서였다.방금 전의 모든 감정은 가슴속 어딘가로 밀어 넣은 채 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향 한 자루가 다 타들어갈 무렵에 김단은 어원의 작은 뜰 앞에 다다랐다.작고 조용한 공간에는 세 칸 남짓한 집 한 채가 서있었다.문을 열고 들어서자 은은한 약초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마당 한가운데엔 대나무 선반이 여러 개 놓여 있었고 그 선반 위에는 널어놓은 약재들이 바람결에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서쪽 방 창문 너머로 연기 한 줄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의원은 지금 그 방에 있는 모양이었다.김단은 조용히 그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문가에 그녀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안에서 약재를 손질하던 의원이 고개를 들었다.문턱 너머로 들어온 익숙한 얼굴에 의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아가씨?”놀라움과 반가움이 동시에 얽힌 그 목소리.의원은 김단을 진산군 댁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는 손에 쥔 약초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부리나케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를 뵙습니다.”
의원은 조심스레 김단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이런 형식은 필요 없습니다. 그저 제대로 의술을 익히세요. 그게 스승에게는 가장 좋은 예물입니다.”둘은 서로 눈을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스승과 제자, 이제 막 맺어진 이 인연은 조용하고 따스한 빛으로 서로의 마음을 감쌌다.그러나 곧 김단은 마음속 깊은 곳에 품어두었던 본래의 목적이 떠올랐다.“스승님. 제가 오늘 뵙고자 했던 건 소가의 큰 도련님 때문입니다.”그 말을 들은 의원은 곧장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왜 그러십니까? 혹시 또다시 다리에 문제가 생긴 겁니까?”김단은 고개를 저으며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건 아닙니다. 다만 어젯밤 제가 그분의 손을 만져보았는데 너무 차가웠습니다. 마치 사람의 온기라고는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맥을 짚어보니 정상이더군요. 진맥으로 판단하기는 무리였습니다. 혹시 몸속의 독이 아직 다 빠져나가지 않은 걸까요?”의원의 얼굴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맥으로 증상을 읽을 수 없다라... 저 역시 단언하기 어렵습니다.”김단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정확히 말하자면 맥은 보통 사람과 흡사하긴 한데 뭔가 조금 다릅니다. 아주 미세하게 어딘가 어긋나 있어요.”하지만 그걸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려웠다.의서에 적힌 증상은 대응할 수 있었지만 그 외의 병에 대해서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의원은 그런 김단의 고민을 단번에 알아차렸다.배운지 얼마 되지 않은 제자의 불완전함을 메워주고 싶은 것이 스승의 마음이었기에 그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자, 내 맥을 짚어보세요.”김단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맥박은 일정하고 안정되었다. 의원답게 기혈이 고르고 건강했다.잠시 후 의원은 말도 없이 은침 하나를 꺼내더니 자신의 팔에 찔러 넣었다.그 순간 김단의 손끝으로 전해지던 맥이 달라졌다.그녀는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방금 전까지 또렷하던 맥이 순간적으로 흐려졌다.한 가닥의
김단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바람이 옷자락을 스치고 저녁노을이 그녀의 어깨 위에 조용히 내려앉았다.그녀는 마치 이 시간 속에 홀로 고립된 사람처럼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아마도 오늘 너무 많은 기억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고 갔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등 뒤에서 들려온 그 목소리를 차마 모른 척할 수 없었다.“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밥 한 끼 대접하는 게 예의 아니더냐?”오늘 하루 김단이 자신의 부모와 나눈 대화는 고작 몇 마디뿐이었다.그녀는 오히려 의원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요즘 세간에서 사람들은 김단을 그리 칭했다.명의의 제자, 중전의 독을 해독한 인재.이 모든 명칭의 이면에는 이 집에 살고 있는 의원이 있었다.진산군은 그 사실에 조금도 불만이 없었다.의원은 평생 이 저택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김단을 그의 제자로 받아들인다면 그녀가 언젠가는 이곳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물론 이 모든 것은 진산군의 아름다운 망상이겠지만 그렇게라도 그녀를 한 번 더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그의 뒤에는 겸인 한 명이 조용히 서 있었다.그 역시 김단을 어린 시절부터 지켜봐온 사람이었다.비록 신분 차이로 인해 자신의 주장을 펼쳐 보이지는 못했지만 진산군과 같은 마음이었다.그 또한 지금의 쓸쓸하고 텅 빈 방을 볼 때면 마음이 쓰라렸다.그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마님께서 아가씨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잔뜩 준비해두셨습니다. 한 끼만이라도 함께 하시지요. 대감님과 마님 모두 아가씨와 함께 식사하길 고대하고 계십니다.”진산군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고여 있었다.지금 이 순간 그들은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임원은 죽었고 임학은 전쟁터에 나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아무도 없는 이 집에 남겨진 두 노인은 자신들 손으로 내친 딸에게 다시 돌아와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어 먼저 돌아가야 합니다.”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묘
설령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자신을 낳고 길러준 은정만으로 그를 용서할 수는 없는 걸까?정말로 그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아버지라는 단어를 다시 입에 올릴 수 있을까?김단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켜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그녀의 눈앞에는 눈물로 범벅이 된 채 힘겹게 서 있는 진산군이 있었다.김단은 차분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마님께서는 지금 누군가의 보살핌이 절실한 때입니다. 부디 몸 건강 챙기십시오. 저는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그녀는 다시 한번 조용히 인사한 후 떠나버렸다.이번에는 정말로 뒤돌아보지 않았다.진산군은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이번에는 진산군도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곁에 서 있던 겸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감님,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아가씨께서 언젠가는 마음을 여실 겁니다.”그러나 진산군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웃음을 지었다.“상심은 무슨… 방금 전 그 애가 나에게 몸조심하라 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다음에 또 오겠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냐?”그녀의 입에서 어렵게 꺼낸 그 짧은 말들이 진산군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김단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마차 안, 김단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창밖으로 저물어가는 풍경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그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숙희는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아가씨… 정말 괜찮으세요?”그녀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임씨 부인을 만난 후 김단의 기분이 눈에 띄게 저조해 보였다.의원을 만난 뒤 기운을 차린 듯했지만 진산군의 등장으로 인해 다시 무너져 내렸다.한참이 지나서야 김단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숙희를 바라보았다.그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었다.“숙희야, 내가… 너무 매정한 것이냐?”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바람처럼 스쳤다.고작 밥 한 끼였을 뿐인데...눈물까지 흘리며 붙잡는 아버지
새벽의 찬 공기가 아직 채 걷히지 않은 시간.부드러운 햇살이 정교하게 조각된 창살 사이로 스며들었다.고요한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진 그 안으로 화려한 옷차림에 정갈하게 단장을 한 후궁들이 우아하고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들어섰다.입가에 머금은 미소는 공손하면서도 은근히 빛났다. “신첩들, 중전마마께 문안인사드립니다.”맑고 고운 목소리가 일제히 울려 퍼졌다.중전은 부드러운 비단 이불에 반쯤 몸을 기대고 있었다.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가에는 피로의 흔적이 드리워져 있었다.한 달 남짓한 침 치료 끝에 그녀의 몸속에 퍼져 있던 독은 간신히 사라졌다.하지만 그녀의 몸은 아직 회복되지 못한 듯했다.숨소리조차 얇게 떨릴 만큼 기운이 없었고 손을 들어 보일 힘조차 없었다.“모두 일어나거라.”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너무나 쇠약했다.후궁들 중 가장 먼저 나선 이는 혜비였다.한 걸음 앞으로 다가온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마마, 안색이 영 좋지 않으십니다. 혹시 잠을 설치신 건 아닌지요? 신첩이 며칠 전 좋은 보양 약재를 손에 넣었는데 곧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중전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해 주어 고맙소. 그저 고뿔에 걸린 것이니 걱정 마시오.”그 순간 덕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고뿔에 걸렸다고 보기에는 너무 쇠약해 보이십니다.”곁에 있던 현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거들었다.“맞습니다 마마.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꼭 의원을 불러보시지요. 혹시 진맥은 받아보셨습니까?”중전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혼란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받아보았소. 김 의원이 수시로 들러 내 상태를 살펴보고 있소.”그 말을 들은 후궁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덕빈의 얼굴에는 여전히 의문이 서려 있었다.“요즘 저희들도 김 의원 덕분에 많이 회복되었지요. 그런데 어찌 중전마마께서는 오히려 전보다 더 기운이 없어 보이시는 겁니까? 혹시 그 의원이 마마께만 소홀한 건 아니겠지요?”덕빈의 말에 다른 후궁들도 수긍하며 한
이튿날 아침, 김단은 궁무를 맡지 않았기에 평양관저에 머물며 맹영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탓인지 맹영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김단의 곁에 있을 때만큼은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조용한 정원, 김단은 맹영지와 함께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계수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숙희가 건네준 과자가 들려 있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맹영지는 고개를 들어 만개한 계화를 바라보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소하가 평양관저를 찾아왔으나 그는 맹영지와의 만남을 최대한 피하려 애썼다. 아마도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김단은 맹영지를 바라보며 과거 소하가 왜 그리도 그녀를 칭찬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때 소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답게 그녀는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가까웠던 두 사람이었는데 맹영지는 어쩌다 소하에게 독을 먹이려 했던 것일까?김단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맹영지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면 그때 자연스럽게 그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김단이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평양관저의 겸인이 급히 달려와 말했다.“아가씨, 맹가 사람들이 도착했습니다.”이런 큰일이 발생했으니 맹씨 집안에서 그녀를 보러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겸인에게 말했다.“알겠소. 이리로 모셔오시오.”잠시 후, 맹씨 부인이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김단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한 뒤 슬픈 눈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김 의원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의원님이 아니었다면 제 딸이 그 짐승 같은 자에게 학대받으며 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말을 마친 맹씨 부인의 눈동자가 붉어졌다.김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과찬이십니다, 맹씨 부인. 민태훈, 그 자의 말에 따르면 맹영지 아가씨의 병은 이미 4~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완전히 회
소한은 코웃음을 치며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소하의 조용한 목소리가 방안의 침묵을 깨뜨렸다.“이번에는 정말 잘했어.”영의정 저택에서 벌어진 일은 소한이 형벌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소하의 귀에 들어갔다. 만약 소한이 과감하게 영의정 저택에 침입하지 않았다면 김단은 쉽게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비록 민씨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김단을 해치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가 겪었을 모욕과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소하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소한은 많이 당황한 듯했다.“제가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때로는 그 충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소한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김단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에 그녀도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듯했지만 곧 냉랭한 표정으로 일관하였다. 김단은 마차에 오를 때까지 자신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과거의 그녀였다면 그가 나타나자마자 바로 그의 품에 안기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도 차갑게 변해버렸다. 자신을 외면하는 그녀가 소한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그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며 굳게 결심했다.그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이미 어떤 대가든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반 시진 후, 김단은 방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러자 숙희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아가씨?”김단은 정신을 차리고 숙희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이냐?”“두 도련님께서는 모두 돌아가셨습니다.”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전 발생한 일을 되새겨 보았다. 그녀는 소한이 오랫동안 계획해 온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에도 그는 소가를 위해, 전하를 위해 심지어 임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그녀만은 제외였다.그녀는 소한이 자신의 어머니를 걱정하는 척하며 평양관저로 따라온 것도 단지 자신의 동정심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상처
김단은 아무 말 없이 소한을 부축하며 걸었다. 궐에서 나오는 길은 유난히 길고 고요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고 느렸으며 말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궐문에 도착했을 때 소한의 마차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마도 말을 타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상태로 다시 말을 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된 김단은 곁에 있던 경씨에게 부탁했다.“도령님, 장군님을 먼저 집으로 모셔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소한이 놀란 듯 김단을 바라보며 물었다.“내게 약을 발라주지 않겠다는 것이오?”김단도 당황해하며 되물어 보았다.“소가에는 의원이 없습니까?”소한은 김단의 물음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어머니께서 내가 또 다쳤다는 걸 아시면 얼마나 걱정하겠소? 그러니 그냥 근처에서 치료받을 것이오. 낭자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돌아가시오.”김단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먼저 평양관저로 함께 가서 약을 바르시죠.”소한은 그녀의 제안에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불편하지 않겠소?”김단은 그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괜찮습니다.”그렇게 소한은 김단과 함께 평양관저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김단의 몸종 숙희였다.소한을 발견한 그녀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러자 김단이 숙희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숙희야, 장군님을 객실로 안내해 주거라. 나는 약을 준비하러 가야겠구나.”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김단의 지시를 따랐다.객실에 혼자 남은 소한은 조심스럽게 상의를 벗고 등을 드러냈다. 그의 등에는 형벌로 인한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등을 바라보며 오늘의 형벌이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음을 깨달았다.하지만 그는 김단이 이 상처를 보면 마음 아파할 것이라 생각하며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잠시 후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약을 들고
긴장감이 맴도는 분위기 속에서 전하는 이해 안 되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조선의 장군인 네가, 수많은 전공을 세운 네가, 원하는 여인 하나 얻는 것이 그리 어렵단 말이냐? 어찌 김단 하나 때문에 수년간 공들여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이야? 그 낭자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전하의 말투는 엄중했지만 그 속에는 실망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그러자 소한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그렇습니다.”전하는 눈썹을 찌푸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김 의원, 들었소?”그 순간 소한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조용히 서있는 김단이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소한은 그녀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이 모든 대화를 들었다는 사실에 당황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소한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김단, 왜 이곳에 있는 것이오?”그녀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전하에게 예를 올렸다.“소녀 김단, 전하를 뵙습니다.”전하는 손짓으로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일어나거라. 오늘 발생한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해 보거라.”김단은 소한을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차분하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제가 직접 목격한 바는 없습니다. 하지만 민대부를 제외하고는 영의정 댁 장남의 부인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전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맹 낭자의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두 명의 궁녀를 보내겠다. 평양관저에서 확인해 보도록 하거라.”학대의 이유가 무엇이든 맹영지는 필시 중전의 친척이었다. 만약 폭력을 가한 사람이 민대부라고 할지라도 이는 중전의 가문을 모욕하는 행위와 다름없었기에 결코 그를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전하는 소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어쩌면 네 죄가 묻힐 수도 있겠구나.”민씨 가문의 잘못이 드러나게 된다면
소한은 곧바로 병사들과 함께 어서재에서 물러났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향 한 자루가 탈 정도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소한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본 전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냉랭하게 물었다.“영의정이 너를 더 때리라고 명하지 않았느냐?”소한은 조용히 전하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세운 채 대답했다.“전하의 깊은 뜻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니 더 심한 처벌을 요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전하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물었다.“그렇다면, 내 뜻이 무엇이더냐?”소한은 고개를 들어 전하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전하께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영의정을 불러 제가 벌을 받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게 하셨죠. 그리고 동시에 제가 전하의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영의정이 이 사실을 눈치채기 바라신 것 아니었습니까?”전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붓을 책상에 내던지며 소리쳤다.“이 불경한 자식아! 내 너를 아낀다고 해서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영의정 저택 외에 또 어디에 첩자를 심어두었느냐?”소한은 눈을 내리깔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3품 이상의 모든 관료의 집에 첩자를 두었습니다.”그 말을 들은 전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한을 가리켰지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였다.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참 동안 방안을 서성이었다.잠시 후 그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네가 감히! 그렇게 많은 곳에 첩자를 심어두고 무슨 일을 꾸미려는 것이냐? 이렇게 행동하면 내가 소씨 집안을 멸문시켜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소한은 여전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조용히 말했다.“저도 위험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다섯 해 전, 저희 소가는 거의 멸문 당할 뻔했습니다.”그 해 소하가 지닌 병권은 다른 집안의 탐욕스러운 먹잇감이 되었고 그로 인해 조정의 문
김단은 그제야 잊고 있었던 민태훈을 떠올렸다.그녀는 맹영지를 몸종에게 맡기고 민태훈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허벅지에 박힌 은침을 뽑아냈다.침이 빠져나가자마자 민태훈은 마치 고통에서 해방되기라도 한 듯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한 가닥의 은침이 이토록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큰 마님은 김단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그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말이다.그때 경씨가 마차를 몰고 도착했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걸어 나오자 경씨는 놀란 얼굴로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낭자, 괜찮소?”방금 전 김단이 영의정 저택에서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소한은 급히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덕분에 한발 늦게 도착한 경씨는 자신이 더 일찍 김단을 챙기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말했다.“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소.“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저는 괜찮습니다. 먼저 맹 아가씨를 평양관저로 모시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그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마차에 오르자 경씨는 바로 마차를 출발 시켰다.김단은 마차에 오르기 전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조용히 서 있는 소한에게로 향했다. 소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김단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소한은 그런 김단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 후 소한은 곧장 궁으로 향했다.어서재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앉아 오늘 영의정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에게 보고했다.그의 말을 들은 전하는 노여움을 감추지 못하며 소한을 꾸짖었다.“네가 감히 허락도 없이 영의정 저택을 침입했단 말이냐? 정말 대담하구나! 내가 너를 벌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느냐?”그러나 소한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벌을 달게 받겠습니다.“전하는 그의 담담한 태도에 더 분노하며 외쳤다.“민가
김단은 민씨 부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보내서는 안 된다라...오늘 이 자리에서 맹영지뿐만 아니라 김단 자신도 민가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김단은 민씨 부인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릴 줄 몰랐다.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선택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김단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롭게 변해갔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분노와 실망이 교차했다.큰 마님은 민씨 부인의 표정을 보고 심각한 상황임을 직감했다.맹영지의 몸에는 증거가 남아있었고 그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면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하지만 지금 김단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녀는 분명 궐로 들어가 이 일을 고발할 게 뻔했다.지금 김단을 적으로 돌린다면 그에 따른 후과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큰 마님은 사랑하는 손자를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김단을 보내면 민태훈의 입지가 위험해질 것이고 보내지 않는다면 민가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그때, 한 하인이 급히 달려와 외쳤다.“큰 마님! 소 장군님께서 오셨습니다!”소 장군? 소한을 말하는 것인가?그의 이름이 언급되자 큰 마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소한이 이렇게 빨리 이곳에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김단도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녀가 생각에 잠긴 사이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큰 마님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어 송구합니다.”모두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당당하게 정원으로 걸어 들어오는 소한의 모습이었다.“소한, 주인의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대체 영의정 저택을 무엇으로 보시는 것이오? 이곳은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오.”소한은 그 말을 한 사람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이런 무례를 범한 것은 제 잘못입니다. 곧 전하 앞에서 사죄드리지요.”그는 정원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큰 마님에게 다가가 정중히 인사했다.
머뭇거리는 그들의 모습에 김단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마님,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막으신다면 저는 곧장 궐로 가 이 모든 일을 고할 것입니다.”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그 안에는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김단의 말이 끝나자 민가의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큰 마님은 눈썹을 찌푸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그녀는 김단이 단순한 의원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김단은 진산군 댁의 적녀이자 평양원군의 의남매이다. 그리고 그녀는 소가의 두 형제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지금 그녀를 적대시하는 것은 곧 여러 권세 있는 가문을 적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었다.큰 마님은 민태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통에 찬 얼굴로 땀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그러나 동시에 마음속에는 김단에 대한 의심도 피어올랐다. 만약 그녀의 말이 과장된 것이라면 민씨 가문은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한참을 고민하던 큰 마님은 굳게 결심한 듯 민씨 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네가 직접 확인해 보거라. 만약 낭자의 말이 거짓이라면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민씨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단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김단은 조심스럽게 맹영지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녀의 팔 안쪽에는 선명한 멍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민씨 부인은 숨을 들이켰다.“이런 상처가… 정말로…”그녀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자 김단은 차분하게 말했다.“다리 쪽은 더 심각합니다. 보시겠습니까?”민씨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이 상처, 정말로 태훈이의 짓입니까?”김단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그 말에 민씨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태훈이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착하고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었단 말입니다.”김단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공주의 이름이 거론되자 민씨 일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스쳤다. 그러나 큰 마님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낭자가 공주의 명을 받고 우리 영의정 저택에 들어와 병자를 돌보는 것은 알겠소. 허나 공주의 허락 없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무엄한 일이오. 공주라 할지라도 국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함부로 공주의 이름을 빌어 협박하지 마시오.”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단은 박수를 치며 말했다.“참으로 옳은 말씀이십니다.”민가의 큰 마님은 김단이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을 치켜세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단의 입가에는 더욱 짙은 미소가 떠올랐고 눈빛에는 경멸이 스쳤다.“공주님께서도 국법을 지키셔야 하는데 민가의 사람들은 더욱 그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민가의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높이며 반박했다.“그게 무슨 뜻이오? 우리 민씨 일가는 예로부터 법을 준수하며 국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소!”“김 의원께서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우리 민가에 누명을 씌우려는 것 아니오?” 김단은 그저 조용히 서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김단의 이런 차분한 태도가 큰 마님의 신경을 건드렸다.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큰 며늘 아씨는 중전마마의 친조카이시며 공주자가의 사촌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의 치료를 맡게 되었지요. 원래는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으나 오늘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누군가가 큰 며늘 아씨의 회복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의원으로서 제 환자가 이곳에서 고통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으니 제가 데려가야겠습니다. 만약 제 앞을 가로막으신다면 다음번에는 민대부님의 다리에 은침을 꽂아 버릴 것입니다.”이에 큰 마님은 지팡이를 바닥에 세게 내리치며 외쳤다.“허튼소리 마시오! 낭자의 의술이 부족해서 생긴 일을 왜 우리한테 덮어씌우려는 것이오?”“맞소! 무슨 명의의 제자라더니... 다 헛소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