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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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준 맞지 않는 결혼은 결국, 파국으로 흘러간다. 7년의 결혼 생활. 소유하에게 오승현은 단 한 번도 따뜻한 남편이 아니었다. 그는 늘 차가웠고, 변덕스러웠고, 가족이라는 틀 속에서도 유하만은 철저히 외면했다. 승현과 연애하던 시절, 유하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을 품에 안은 줄 알았다. 그녀는 이 남자와 함께라면, 앞으로의 삶이 찬란할 줄로만 믿었다. 그러나, 눈보라가 몰아치던 어느 날, 혼자 기억하는 결혼기념일에 유하는 깨달았다. 이 집에서 자신만 ‘외부인’이라는 걸. 남편은 첫사랑을 앗아간 대가라며 유하를 미워했고, 아들은 ‘아빠의 첫사랑인 이모'가 더 좋다며 유하를 무시했다. 가족 모두가 등을 돌린 날... 유하는 웃었다. 텅 빈 마음, 타들어간 심장으로 결국 이혼을 선언했다. “양육권도 재산도 다 줄게요. 그러니 나 좀 놓아줘요.” 그 후, 세상은 유하를 다르게 기억하기 시작했다. 버려진 아내, 소유하? 아니다. 세계적 디자이너, 그리고 천재 화가. 유하의 작품은 전 세계 유명 인사들이 수백억을 내고도 손에 넣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다 마음이 식어 돌아서니, 이번엔 남편과 아들이 오히려 유하를 놓아주질 않는다. “엄마는 내 엄마예요! 다른 애 만나지 마요!” “당신이 먼저 날 선택했잖아. 책임져. 이혼? 절대 못 해.” 배신으로 무너졌던 여자, 이제는 모든 걸 거머쥔 여자가 되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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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제1화

W시, 1월 15일.

깊은 겨울밤, 굵은 눈송이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거리에 벌써 소복이 쌓인 흰 눈은 오가는 차량과 사람들의 발에 밟혀 진창처럼 더럽게 변해가고 있었다.

도로 한편에는 남색 아우디가 조용히 서 있었다.

소유하는 눈처럼 새하얀 롱패딩 차림으로 꽃집에서 산 장미꽃다발을 안고 차 쪽으로 걸어가면서 남편 오승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유하와 승현의 결혼 8주년 기념일이다.

유하는 일을 서둘러 끝내고, 남편과 단둘이 식탁에 앉아 촛불을 켜고 조용히 저녁을 먹고 싶었다.

함께 버텨낸 7년을 기념하고, 여덟 번째 해를 함께 시작하고 싶었다.

첫 번째 통화 시도는 실패.

두 번째, 세 번째 통화도 역시 승현은 받지 않았다.

한참 동안 기다린 뒤에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유하의 얼굴에서 천천히 미소가 사라졌다. 그래도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오늘 우리... 밖에서 저녁 먹기로 했잖아요. 장소는...”

[업무 중이야. 바빠.]

더 말할 틈도 없이,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유하는 핸드폰을 꼭 쥔 채, 하얀 입김을 뿜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세찬 눈바람에 한기가 스미자 옷깃을 여미고 몸을 한 번 떨었다.

장미의 붉은 꽃봉오리가 눈 속에서 유독 쓸쓸해 보였다.

‘이 사람... 오늘이 무슨 날인지 기억이나 할까?’

‘우리 분명히 약속했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매번, 아무렇지 않게 미루고, 무시하고...’

‘저녁 한 끼 같이 먹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유하의 눈에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저 갑작스럽게 깊은 피로감이 밀려왔다.

그녀는 눈을 가만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떨리는 손끝으로 다시 연락처를 눌렀다.

이번엔 아들 오준서의 번호였다.

남편과 오랜만에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시어머니께 부탁해 준서를 본가로 보냈지만.

로맨틱한 저녁 식사 자리가 무산된 이상, 아이를 데리러 가야 했다.

...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레스토랑 한편.

고급스러운 분위기 속에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자 한 명과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마주 앉아 있었다.

아이는 새로 받은 게임기를 품에 안고 정신없이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테이블 위 핸드폰 화면이 반짝이며 ‘엄마’라는 이름이 떴지만, 준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 옆에 앉아 있던 하연우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화사한 복숭앗빛 눈매가 부드럽게 휘더니, 손끝으로 전화를 받아 조용히 무음으로 전환한 뒤, 핸드폰 화면이 보이지 않게 식탁에 엎어놓았다.

그녀는 아이를 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준서야, 이모가 사준 게임기 마음에 들어?”

그 시각, 전화가 연결된 유하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숨이 멎는 듯한 충격에 잠시 말을 잃었다.

그다음으로 밀려온 것은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싸늘한 냉기였다.

하연우였다.

승현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첫사랑이었던 여자.

‘하연우... 분명 박사 과정을 위해 해외에 있을 텐데...’

‘어떻게, 왜 지금, 준서와 함께 있는 거지?’

‘설마... 돌아왔어? 그리고... 왜 하필 준서랑 같이 있는 건데?’

...

레스토랑 안.

게임기에서 겨우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든 준서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연우 이모가 최고예요. 고마워요, 이모!”

연우는 붉은 입술을 부드럽게 올리며 물었다.

“이상하네? 집에서도 게임기 안 사줘?”

‘MB그룹 같은 대기업의 후계자라면, 이런 게임기 정도는 몇십 개도 살 수 있을 텐데...’

‘게임기를 넘어, 게임 회사를 통째로 사는 것도 가능할 텐데...’

준서는 뺨을 부풀리며 뾰로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에요. 아빠도 할머니 할아버지도 다 괜찮다고 했는데... 맨날 엄마가 뭐든 다 간섭하고, 어쩌고저쩌고 잔소리만 해요.”

“게임도 정해진 시간 지나면 꼭 뺏어가요. 진짜 짜증 나요. 게임을 하게 해 주는 연우 이모가 엄마보다 훨씬 좋아요.”

연우는 살짝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투는 여전히 따뜻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엄마는 네 눈 나빠질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잖아. 엄마가 들으면 속상하실 거야.”

“에이, 엄마는 속 안상해요.”

준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게임에 몰입하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우리 엄마는 성격 되게 좋아요. 난 한 번도 엄마가 화내는 거 본 적 없어요.”

연우는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테이블 위 음식으로 옮겼다.

잠시 고민하듯 쳐다보다가, 젓가락을 들어 매콤한 깐풍기를 하나 집어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는 준서 입에 살짝 넣어주었다.

“이모가 기억하기론... 준서 엄마가 매운 요리 잘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모도 매운 거 진짜 좋아하거든.”

준서는 눈을 반짝이며 입안의 고기를 오물오물 씹었다. 입가에 해사한 미소가 번졌다.

“맞아요! 우리 엄마 매운 요리 진짜 잘해요. 밖에서 파는 거보다 훨씬 맛있어요. 아빠도 나도 엄청나게 좋아해요. 연우 이모도 좋아하면, 나중에 우리 집 놀러 오면 엄마가 해줄 거예요!”

연우는 눈가에 웃음을 머금고, 일부러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 정말 그래도 돼?”

준서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나도 아빠도 연우 이모 좋아하니까, 당연히 우리 집에 와도 돼요.”

“그럼... 준서는 연우 이모를 정말 정말 좋아하는 거네?”

연우는 장난기 어린 손끝으로 준서의 말랑한 뺨을 콕 찔렀다.

준서는 그 손가락에 살짝 얼굴을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엄마도 연우 이모처럼만 해주면 좋을 텐데... 엄마는 맨날 간섭하고, 잔소리하니까 너무 피곤해요...”

‘이런 말을, 꼭 이렇게까지 직접 말하다니...’

연우는 속으로 조용히 웃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한 점 흐트러지지 않은 표정으로, 입술 끝에 여유로운 미소만 걸려 있었다.

...

몰아치는 찬바람 속, 흩날리는 눈송이가 세상을 집어삼키듯 퍼지고 있었다.

유하는 산 위의 소나무처럼 굵은 눈발 속에 홀로 서 있었다.

눈은 그녀의 눈썹 위와 머리카락 위에 하얗게 쌓이기 시작했다. 핸드폰 너머 들려오는 아들의 목소리에 유하의 눈가는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매운 음식이 맛있다니... 그 말이 왜 이렇게 뼈에 사무치게 박히는 걸까?’

남편과 아들이 매운 걸 좋아해서 유하는 짬짬이 시간을 내어 유명 셰프에게 요리를 배웠다.

그녀는 주말이면 꼭 정성껏 식탁을 차렸고, 요리 솜씨는 누구와도 견줄 만하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지금 준서의 한마디에, 가슴 한가운데가 쿡쿡 쑤셨다.

‘내가 그렇게 애지중지 기른 아들이 단 한마디 말로 날 귀찮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네.’

‘7년을 품에서 키웠는데... 돌아온 말이 ‘엄마는 잔소리 심해서 싫어, 연우 이모가 더 좋다’... 정말,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

유하는 전화기를 끊고 싶은 충동이 올라왔다.

하지만 손가락이 조심스레 통화 종료 버튼 위를 스치려던 그때, 낯설고도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미안, 방금 좀 일이 있어서...]

순간, 차갑게 굳어 있던 여자의 손끝이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이 남자 목소리의 주인공은... 승현이었다.

유하는 심장이 조여드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리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터져 나오는 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이게 당신이 말한 ‘바쁜 일’이야?’

‘결혼 7주년 되는 날, 아내는 눈 속에 서 있는데...’

‘당신은 첫사랑과 밥을 먹고 있었구나.’

‘게다가... 내 아들까지 함께.’

전화는 어느새 뚝 끊겨 있었다.

남겨진 건, 하얗게 내려앉은 침묵과 눈발뿐.

유하는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허탈한 웃음을 웃었다.

그 웃음 끝에, 붉게 충혈된 눈가엔 눈물방울이 맺혔다.

그러고는 품에 안고 있던 커다란 장미꽃다발을 차디찬 눈밭 위로 거칠게 내던졌다.

툭-

꽃은 바닥에 부딪히며 터졌고, 유하는 발로 꽃다발을 힘주어 밟았다.

장밋빛 꽃잎이 짓이겨져 눈 위에 흩어졌다. 하얀 세상 속, 붉은 파편들은 마치 터진 핏방울처럼 선명하고 잔인하게 번졌다.

유하는 느리게 차에 올라탔다.

차 안의 히터가 꽁꽁 얼었던 몸을 서서히 녹여주었지만, 얼어붙은 마음까지는 데우지 못했다.

‘사랑했던 날들, 믿었던 순간들...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지?’

창밖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유하는 알고 있었다.

승현이 자신과 결혼한 이유가 사랑이 아니라는 걸.

그날 밤의 혼란, 그리고 예기치 않은 임신, 시어머니의 강한 압박.

결혼은 결국 책임과 체면을 위한 선택일 뿐이었다.

승현은 유하를 사랑하지 않았다.

어쩌면 미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믿었다. 자신과 연우 사이, 아름다웠던 인연을 유하가 끊어버렸다고.

그리고 유하는 비열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워했고, 피했고, 차갑게 거리를 두었다.

‘그땐... 정말 몰랐어. 그 사람이 내게 이렇게 차가울 줄은...’

그때의 유하는, 너무도 어렸다.

달빛처럼 찬란한 사람을 보고 마음을 빼앗겼고, 그 눈부심에 취해 그저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었던 마음이 전부였다.

조금만 더 다가가면 닿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 사람한테 잘하면... 조용히, 얌전히 곁을 지키면...’

‘언젠가는 나에게 마음을 줄 거라고 믿었어. 내가 잘하면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믿으며 달려온 시간.

하지만 유하의 손에 받아 든 건... 복수처럼 차가운 침묵뿐이었다.

7년간의 결혼 생활은.

말 대신 건네진 건, 복수처럼 쌓여가는 냉담한 침묵과 외면.

그 차가움은 아들에게도 전염되어, 준서 역시 점점 유하를 밀어냈다.

준서는 엄마를 싫어했고, 거부했다.

이 집에서의 유하는... 그저 투명 인간 같은 ‘도구’에 불과했다.

아무도 유하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았고, 누구도 유하를 ‘가족’으로 보지 않았다.

존재감 없는 아내,

감정 없는 엄마,

불필요한 존재.

이제야 유하는 깨달았다. 승현의 마음은... 아무리 데워도 녹지 않는 얼음이라는 걸.

이제... 끝내야 할 때다.

...

차량 전조등의 따스한 노란빛이 유하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었다.

곧게 뻗은 콧대와 작고 단정한 입매, 그리고 차가운 공기에 살짝 언 벚꽃 빛 코끝이 돋보였다.

유하는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은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며, 고리대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변호사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 시간을 잡아서 이혼 상담과 재산 정리에 대한 논의를 위해 만나자고 했다.

그리고 결단을 내린 이 순간, 유하의 손끝은... 누구보다 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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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이런 사소한 일로 길거리에서 다투고 싶지 않았던 유하는 사진을 찍자마자 이솔을 끌고 반대편 주차장으로 향했다.이 순간 유하는 당장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하지만 칵테일바를 나서자마자 누군가 두 사람 앞을 막아섰다.둘을 막아선 사람은 무표정한 얼굴의 젊은 남자였다. 몸에 딱 맞는 검은색 양복 덕에 남자의 키는 더욱 훤칠해 보였다.상대는 유하도 아는 사람이다. 나태건, 승현의 비서. 어릴 때부터 MB그룹 지원을 받고 자라 고등학교 시절 능력을 인정받아 승현의 옆에서 일하게 된 충신 같은 존재다. 승현이 가장 믿는 사람이기도 하고.태건은 누구에게나 가식 없는 모습인 데다, 오직 승현의 명령만 따라 가까이하기 어려운 사람이다.유하 마음속 태건의 인상은 좋지 않다.승현의 조금 전 표정을 비추어 볼 때, 태건이 여기까지 온 건 결코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유하는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사모님, 핸드폰 이리 주세요.”태건은 무뚝뚝한 얼굴로 유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유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핸드폰을 내놓을 생각도 없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승현 쪽을 바라봤다.승현은 고개를 숙인 채 연우에게 꼭 붙어 다정하게 뭔가 얘기하느라 유하 쪽은 보지도 않았다. 승현의 얼굴에 저토록 다정한 미소가 걸린 모습을 유하는 그동안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더 이상 그 모습을 보기 싫어 유하는 다시 시선을 돌려 무표정한 태건과 눈을 마주했다.“내가 안 주면 어떻게 되는데요?”“저를 난감하게 하지 마세요, 사모님.”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한 태건은 마치 프로그램이 입력된 로봇처럼 감정 없는 말만 내뱉었다.“사모님도 난감한 상황 만들지 마세요.”그 말은 다름 아닌 위협이었다.“그게 무슨 뜻이야?”이솔은 유하 앞에 막아서서 버럭 화냈다.“안 주면 길가에서 대놓고 빼앗기라도 하려고? 그렇게 법을 무시해도 돼?”그때 태건이 대뜸 무덤덤한 표정으로 알고 있는 정보를 읊었다.“강은솔, 정식으로 변호사가 된 건 6년 5개월 하고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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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차로 돌아온 이솔은 아직도 화를 가라앉히지 못했다.고개를 돌렸더니 친구는 속상한지 고개를 숙인 채 온종일 핸드폰만 만지작대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이솔은 너무 마음 아파 유하를 와락 끌어안았다.“유하야. 괜찮아. 다 잘될 거야.”갑작스러운 포옹에 유하는 감동되는 동시에 이 상황이 우습기도 했다. 하지만 곧이어 어깨에 통증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왜? 왜 그래?”결혼한 이후로 유하가 우는 걸 본 적 없는 이솔은 이 순간 너무 놀라 심장이 철렁 내려 앉았다.그때 유하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괜찮아. 어깨가 아파서 그래.”흠칫 놀란 이솔은 그제야 태건이 손을 뻗어 유하를 막을 때 마침 어깨 부위에 손을 올렸다는 걸 떠올렸다.차 안에 히터가 켜져 있는지라 이솔은 곧바로 유하의 옷깃을 내렸다. 옷 안을 살핀 순간 이솔의 눈시울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유하의 어깨 부위는 자주색으로 멍이 들었다.태건은 운동하던 사람이라 힘이 워낙 세고, 유하 역시 그런 태건을 밀치느라 적잖이 힘을 썼다. 그 때문에 태건은 유하를 막으려고 힘 조절을 못 해 유하를 다치게 한 모양이었다.워낙 뽀얀 피부 때문에 살짝 힘줘서 잡아도 빨갛게 자국이 남는데, 이번에는 아예 멍이 들었으니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웠다.“나쁜 놈들! 개자식들!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대할 수가 있어?”이솔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유하가 반응할 새도 없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됐어. 나 괜찮아. 약 바르고 휴식하면 괜찮아져.”유하는 다정하게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여전히 슬퍼하는 이솔을 보더니 얼른 핸드폰을 흔들었다.“이것 봐. 이게 뭐게?”눈꼬리에 달린 눈물을 쓱 닦아낸 이솔은 단번에 눈을 반짝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아까 사진 지운 거 아니었어?”액정에 있는 건 다름 아닌, 방금 태건 앞에서 지운 승현과 연우의 다정한 사진이었다. 유하는 옷깃을 여미더니 싱긋 웃으며 말했다.“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잊었어?”비록 맨 처음 IT를 배운 게 승현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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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연우의 목소리에 준서의 눈은 순간 반작 빛났다.“이모! 연우 이모!”준서는 높은 소리로 연우의 이름을 부르며 화가 난 듯 말했다.“아빠는 거짓말쟁이예요. 약속도 안 지키고. 앞으로 아빠랑 말도 안 섞을 거예요. 연우 이모, 아빠는 거짓말쟁이예요!”심지어 마지막에는 연우한테 승현을 일러바쳤다.전화 건너편에 있던 연우는 준서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얼른 핸드폰을 건네받아 다정한 목소리로 준서를 달랬다. 심지어는 승현한테 화를 내는 듯 나무라더니 이번 주말에 만나 같이 게임도 하자고 약속했다.그제야 준서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역시 연우 이모가 말해야 통한다니까.’‘예전에 아빠한테 혼나거나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 엄마를 찾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는데. 아빠는 엄마 말 듣지도 않으니까.’얼마 뒤 준서는 아쉬운 듯 전화를 끊었다.‘그런데 아빠가 방금 엄마 오늘 출장 갔다 돌아왔다고 하지 않았나?’‘그럼 오늘 밤 돌아오겠네?’‘안돼. 싫어. 엄마가 오면 또 나 단속할 텐데.’‘그러면 게임도 못 놀 거고. 짜증 나!’‘아빠는 본인도 엄마랑 있는 걸 싫어하면서 왜 자꾸 나더러 엄마랑 같이 있으래? 아빠 나빠!’‘아빠 말 안 들을래. 할머니 집 갈래. 그럼 엄마가 돌아와도 같이 있을 필요 없겠지?’준서는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서툰 동작으로 옷을 껴입었다. 그러면서도 게임기는 잊지 않고 품에 안고는 1층으로 내려가 윤해월의 방문을 두드렸다.잠에서 깬 윤해월은 눈앞에 있는 귀한 도련님이 또 왜 갑자기 말썽을 피우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애써 졸음을 참으며 기사를 불러와 늦은 밤 준서를 오씨 가문 본가로 보냈다....그 시각 유하는 집에서 한밤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설령 안다고 해도 해를 거듭할수록 쌓인 실망감 때문에 이제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유하는 이제 이혼하기로 완전히 마음을 다잡았고 양육권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다음 날, 유하는 습관적으로 일찍 일어났다.컴퓨터에서 패션위크에 관한 최신 소식을 확인한 유하는 가는 길에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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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리아 작업실.유하는 또 다른 방으로 가 불을 켰다.그 방에는 또 다른 전통 스타일의 자수를 박은 짙은 보라색 남성 정장이 있었다. 이건 유하가 고객한테 주문 의뢰를 받은 옷이다.이번 고객은 아주 베일에 싸인 신비한 고객이었다. 비록 주문 제작을 맡긴 했지만, 유하도 지금껏 고객을 만난 적이 없다. 상대는 사람을 시켜 본인의 상세한 신체 사이즈와 정보를 보내왔는데... 프로필상으로 볼 때 몸매는 괜찮아 보였다. 스타일 역시 좋아 보였고.친구 소개만 아니라면 유하는 맨 처음 거절할까도 생각했었다.그런데 친구의 부탁도 있는 데다 무엇보다 상대가 제시한 금액이 너무 높았다.계약금만 해도 자그마치 2억이라 유하는 이번 주문을 각별히 신경 썼다. 솔직히 이건 유하가 받아본 금액 중의 최고였다.그 덕에 사업 역시 놀라운 발전을 가져왔다.양복의 납품 예정일이 며칠 안 남은 지금, 마무리 점검만 남은 상태라 유하는 이틀 동안 마무리 작업에만 신경 쓰기로 했다.심지어 그날 밤 작업실에서 잠들었다....다음 날, 유하는 작업실에서 양복의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작품집을 완성했다.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한 유하는 저녁에 함께 밥 먹자는 이솔의 전화를 받고 나서야 배고픔을 느꼈다. 온종일 배를 곯았던 탓인지 일어나자 눈앞이 핑 돌았다.유하는 늘 챙기고 다니던 사탕 한 알을 얼른 입에 넣고 이솔이 예약한 음식점으로 향했다. 다만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리려던 찰나, 유하는 그 자리에서 멈칫했다.건너편 멀지 않은 곳에 또 익숙한 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곧바로 연우와 승현이 차에서 내렸다. 잇따른 우연에 감탄할 새도 없이, 아들 준서가 차에서 내려 깡충깡충 뛰더니 연우 품에 폭 안겼다. 그 모습은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었다.그 장면을 목격한 순간 유하는 목이 메었고, 가슴에 큰 돌멩이가 내려앉은 기분이었다.직접 보는 것은 목소리로 듣는 것과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자꾸만 밀려오는 메스꺼움을 애써 참으며 떨리는 손으로 창문을 살짝 내렸더니 준서의 앳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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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유하와 이솔은 식사를 마치고 한참 얘기하다가 음식점을 나섰다.두 사람이 떠날 때까지도 맞은편 룸에서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중에 앳된 목소리를 띤 준서의 웃음소리가 가장 선명했다.선명한 웃음소리에 이솔은 유하를 조심스럽게 흘긋거렸다. 다행히 유하의 표정은 조금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이솔은 그제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걱정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이거 왠지 결혼만 문제 있는 건 아닌가 보네.’승현 일행이 3층으로 올라올 때 이솔은 정확히 목격했다. 자기 친구의 아들이 연우한테 얼마나 다정한지를.‘참 할 말이 없네.’‘어쩐지 이혼하겠다고 할 때 양육권은 바로 포기하더라니.’그때 이솔은 비록 묻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온갖 추측을 했었다. 그도 그럴 게, 유하는 결혼 초기 준서를 데리고 자주 놀러 왔었다. 심지어는 자기 아이를 양아들로 받아 달라고 진지하게 의논했던 적도 있다.최근 들어 유하는 1년 넘게 아이를 데리고 만나러 온 적이 없는 유하에게 이솔은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마다 유하는 아이의 학업이 바쁘다고 늘 핑계를 댔다.‘지금 생각해 보니 준서가 아마 그맘때부터 유하랑 멀어졌나 보네.’하지만 유하가 말하기 싫다면 이솔도 물을 생각이 없었다.아이의 일은 참 마음이 아팠다.솔직히 유하가 맨 처음 승현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부터 이솔은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결혼하기 전부터 승현은 유하가 친구들과 만날 때 단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놀라우리만치 유하의 인간관계에 무관심했다.이솔은 남자 친구가 생겼다 하면 가장 친한 친구들을 불러 모아 소개의 자리를 마련했었다. 하지만 유하와 결혼한 승현은 유하의 지인들과 도통 만나지 않았다.유하가 결혼한 지 7년 동안,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라 자부하는 이솔마저 사적인 자리에서 승현을 본 적이 없다.그래도 그건 그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찌 됐든, 그건 두 부부 사이의 일이니까.게다가 승현은 MB그룹의 차기 대표였고, 대학교 시절부터 캠퍼스 내 유명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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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동생?’그렇게 말하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연우와 승현은 동갑인데, 유하는 두 사람보다 한 살 어리고 대학교 때도 승현은 유하보다 1학년 선배였으니.‘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친근한 호칭을 부를 사이인가?’유하는 앞으로 내민 연우 손을 무시했다. 눈앞에 있는 사람들과는 할 말이 없었다.“나는 일해야 하니 편한 대로 있어요.”유하는 덤덤하게 말했지만 말투에는 거절의 의미가 선명했다.연우 역시 그걸 눈치챘지만 전혀 난감해하지 않았고 내민 손을 도로 거두어 가지도 않았다. 오히려 태연하게 손을 옆으로 뻗어 유하 앞에서 보란 듯이 준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우리 안 본 지 몇 년 됐죠? 준서한테서 들었는데, 매운 음식 엄청나게 잘한다면서요? 나도 마침 매운 음식 먹고 싶은데, 나중에 시간 되면 들를게요.”연우는 고개를 돌려 승현을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승현이도 동의했어요. 오늘 바로 시간 있는데 일 다 끝나면 같이 돌아갈래요?”‘돌아가자고? 어디를?’‘지금 누구 대신 결정하는 거야? 나 아직 안 죽었어! 왜 이래?’유하가 거절하려고 할 때 준서가 그녀 팔을 잡고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맞아요. 엄마가 한 매운 음식 엄청 맛있어요. 저도 먹고 싶어요. 연우 이모가 어렵게 시간 냈는데 오늘 저녁 바로 같이 먹어요.”유하는 숨이 턱 막혀 얼굴에 걸린 미소를 유지하기 힘들었다.유하는 준서에게 실망했지만, 어머니로서 아이가 원하는 걸 해줄 의무가 있었다.그렇다고 그게 자신을 희생하는 것까지는 아니었다.유하는 호흡을 가다듬고 맞은편에 쪼그려 앉은 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권우를 향해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권우 씨, 정말 미안해요. 내가 따로 일이 있어서 이만 돌아가 봐요. 나중에 연락할게요.”집안 흠은 남한테 보여주지 않는다고 뭐가 됐든 우선 사람을 돌려보내고 얘기하고 싶었다.권우는 순간 은혜라도 받은 표정이었다. 이곳 분위기는 너무 숨 막힐 지경이라 괴로웠던 참이었다. 비록 무슨 상황인지 알지는 못했지만 엄청난 일에 휘말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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