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새하얀 페르시안 고양이 한 마리가 3층 창문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2층 난간을 밟고 한 번 더 도약한 뒤, 부드럽게 정원으로 내려섰다.오사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했다.“세상에! 정말 예쁜 고양이다. 네가 키우는 거야?”구은서는 애옹이를 바라보며 냉소적으로 웃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구은정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 고양이까지 데리고 왔다.은정은 이 고양이를 보물처럼 여기며 전담 관리인을 붙여 돌보게 했고,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인지 은서는 이 고양이가 마치 은정을 떠올리게 해서 더욱 눈에 거슬렸다.하지만 은서가 은정을 싫어하는 진짜 이유는 집안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소희와 연관된 사람들은 모두 싫었다.사라는 애옹이가 너무 마음에 들어먹을 것을 이용해 유인했다. 이윽고 그녀는 가볍게 애옹이를 품에 안았다. 그런데 애옹이는 사람을 경계할 줄도 몰랐다. 항상 은정에게 보호받아 왔기에, 쉽게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얼떨결에 품에 안긴 애옹이는 당황하며 불안한 듯 울어댔다.사라는 원래 고양이를 키우던 사람이었기에, 고양이를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애옹이를 품에 안고 쓰다듬었다. 그러자 애옹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이 눈 색깔 좀 봐! 맑은 갈색이야. 게다가 완전 새하얀 털이라니, 정말 보기 드문 고양이야!”사라는 감탄하며 애옹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을 본 은서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에 들면 너한테 줄게.”그 말에 사라는 깜짝 놀라며 은서를 바라보았다.“이거 너무 갑작스러운데? 주인이 있는 고양이를 내가 어떻게 데려가?”은서는 냉랭한 시선으로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난 촬영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도 적고, 돌볼 여유도 없어. 사실 예전부터 누군가에게 맡기고 싶었어. 네가 키우면 고양이한테도 행운이겠지.”사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정말이야? 농담하는 거 아니지?”“진심이야.”은서는 애옹이를 다
오사라도 거들며 말했다.“이 고양이가 누구 것이든 난 상관없어요. 어쨌든 은서가 나한테 준 거니까, 불만이 있으면 은서한테 가서 따져요.”“아가씨!”도우미는 간절한 표정으로 구은서를 바라보았다.“이 고양이는 도련님이 제게 맡긴 거예요. 아가씨가 함부로 보내버리면 도련님께서 저를 탓하실 거예요!”애옹이는 더욱 애처롭게 울어댔다. 불안한 듯 좁은 철창 안을 이리저리 맴돌며 탈출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은서는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뭐죠? 이 집에서 이제 내가 고작 고양이 한 마리도 마음대로 못 한다는 건가요?”은서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도우미를 노려보았다.“당신들 같은 도우미들은 상황을 봐가면서 행동할 줄 안다더니, 결국은 내 오빠한테 붙겠다는 거네요?”“좋아요, 그렇다 쳐도 나한테 대놓고 대들 생각은 하지 마요. 안 그러면 너 후회하게 될 거니까.”도우미는 눈앞의 은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그저 조금 도도한 성격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그녀는 점점 더 극단적이고 날카롭게 변하고 있었다.자신은 단지 맡은 바 책임을 다하려 했을 뿐이었다. 고양이를 돌보는 것은 그저 일일 뿐, 누구에게 붙고, 누구를 거스르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은서의 위협적인 태도를 보고, 도우미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사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두어 번 헛기침했다. 그녀는 이 상황이 단순한 고양이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이건 구씨 남매의 힘겨루기다. 사라는 고양이 이동장을 번쩍 들고, 마치 승리자처럼 손을 흔들었다.“그럼 난 간다, 은서야!”은서는 냉정하게 말했다.“가. 누가 감히 막나 보자.”사라는 자신만만하게 걸어 나갔다.한편, 고양이를 돌보던 도우미는 걱정스럽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녀는 조용히 퇴장한 뒤, 바로 은정에게 연락을 취하려 했다.‘이건 반드시 알려야 해!’도우미는 조용한 곳으로 가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전화번호를 누르기도 전에,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순식간에 누군가 그녀의 손을 쳐버렸다.탁!
은정은 차가운 분노를 내뿜으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곧장 은서의 방 앞에 도착한 그는, 문을 세게 두드렸다.잠시 후, 문이 열렸다. 은서는 실크 잠옷 차림으로 문을 열고,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물었다.“이 밤중에 무슨 일이지? 오빠?”마침 도우미가 은서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려다가, 문 앞에 선 은정을 보고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몰래 숨을 죽이며 이복남매의 대치를 지켜보았다.두 사람이 사이가 안 좋은 건 집안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심상치 않은데? 싸움이라도 벌어지려나?’은정의 눈빛은 싸늘했고, 낮게 깔린 목소리는 살기를 띠고 있었다.“내 고양이는 어디 있어?”은서는 이미 은정이 왜 온 건지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문틀에 기대며 태연하게 웃었다.“내 친구가 그 고양이를 너무 좋아하길래, 그냥 선물로 줬어요.”은정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그건 내 고양이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멋대로 남한테 줘?”은서는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고작 고양이 한 마리잖아요. 내가 결정하면 안 되나? 게다가 이건 오빠를 위해서이기도 해요.”“이제 막 회사를 맡았으면, 일에 집중해야죠. 고양이 키우는 게 뭐 그리 중요해요?”은정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마치 칼날처럼 구은서를 꿰뚫었다.“네가 누구한테 고양이를 줬든 상관없어. 당장 전화해서 무사히 돌려놓으라고 해.”그러나 은서는 시선을 살짝 돌리며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아마 못 돌려줄걸요? 내 친구가 오늘 저녁 8시 비행기로 BL시에 갔어요. 야외 촬영이 있어서 말이죠. 고양이도 같이 데려갔겠지.”은정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다시 한번 말할게. 지금 당장 고양이를 데려와.”“진짜로 못 데려와... 으악!”은서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은정이 그녀의 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은서는 본능적으로 몸부림치며 버둥거렸다.“놔, 놔줘요!”은정의 팔 근육이 단단하게 수축하며, 손가락이 서서히 조여졌다. 그의 목소리는 살기가 서
서선영이 다급하게 물었다.“주사 맞았어? 고양이 몸에도 광견병 바이러스가 있을 수 있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구은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늦었어. 원래는 내일 아침에 맞으러 가려고 했어.”서선영은 안타까운 나머지 목소리가 쉬어버렸다.“여보, 사람을 문 고양이는 절대 키우면 안 돼요! 한 번 사람을 물면 또 물게 돼요. 물어대는 개랑 똑같아요. 재앙이라구요!”구은태가 고개를 끄덕였다.“이 일은 은서가 잘한 거다. 고양이는 그냥 남에게 주면 돼.”은정은 아무 말 없이 은서를 향해 걸어갔다. 은서는 차가운 살기를 내뿜는 남자를 보자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밀려와 한 발짝 물러섰다.“오빠, 어쩌려고요?”구은정은 냉랭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고양이, 반드시 되찾아와야 해. 누가 뭐라고 해도 소용없어. 내 물건은 다른 사람이 결정할 수 없어.”“오늘 밤 고양이가 돌아오지 않으면, 너랑 너희 어머니 둘 다 이 집에서 나가!”은서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며, 그녀는 고통스럽게 고개를 돌려 구은태를 바라보았다.“아빠, 저랑 엄마는 이 집안사람이 아니에요? 고작 고양이 한 마리 때문에 오빠가 저희를 내쫓겠다고요?”서선영은 더 심하게 흐느껴 울었다.“나는 알고 있었어요. 내가 이 집을 위해 아무리 희생해도 결국은 남이에요. 내가 낳은 딸도 마찬가지죠. 성이 서씨라도 이 집에서 제 자리는 없는 거예요.”“은정아, 은서를 겁주지 마라.”구은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은정의 표정은 냉혹하기만 했다.“겁주는지 아닌지, 직접 확인해 봐.”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은정은 은서의 잠옷 깃을 움켜쥐고 그대로 그녀를 질질 끌고 나갔다.은서는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평소의 단정하고 오만한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고, 은정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완전히 무력해졌다.“은서야!” 서선영이 울며 따라붙으며 필사적으로 애원했다.“은정아, 제발 놔줘! 부탁이야!”하지만 은정은 그 말을 생각도 없었다. 서선영은 다
말을 마치고, 은서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곁눈질로 은정을 바라보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됐어요?”은정은 차갑게 대꾸했다.“내 허락도 없이 내 고양이를 함부로 남에게 줘놓고, 이제야 되찾아오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근데 나보고 만족하냐고? 당연히 아니지.”“다음번에도 이런 짓 하면, 넌 짐짝처럼 내다 버릴 거야!”은서의 눈에는 분노와 원망이 서렸다. 그녀는 깊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았다.구은태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딸을 보며 안쓰러워했다.“은정아, 이제 고양이를 돌려받았으니 됐다. 은서는 네 여동생이야. 고작 고양이 한 마리 때문에 네 동생한테 이러는 게 말이 되냐?”은정은 비웃으며 말했다.“내 고양이와 이 여자를 같은 선에 놓고 비교하지 마요. 그럴 자격도 없으니까!”구은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한편, 서선영은 옆에서 흐느끼며 울었다.“여보, 보셨죠? 은정이 눈에는 우리 모녀가 고양이만도 못한 존재예요!”구은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일단 은서부터 일으켜 세우고, 손 다친 데는 괜찮은지 확인해 보자.”서선영은 서둘러 은서를 부축했다.“은서야, 그냥 참고 견뎌. 네가 은정의 물건을 건드렸으니 당한 것도 네 잘못이야. 너도 네가 이 집에서 어떤 위치인지 좀 깨달아야지!”은정은 서선영의 그런 가식적인 태도가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는 거대한 창문 너머로 깊어진 밤을 바라보았다.약 반 시간쯤 지나 도우미가 다가와 보고했다.“오사라 씨가 고양이를 데려왔어요!”이때, 구씨 집안사람들은 이미 거실에 모여 기다리고 있었고, 은서는 차분하게 말했다.“들어오게 해요.”사라는 고양이 이동장을 들고 들어오며 불만스럽게 말했다.“은서야, 이렇게까지 서두를 일이야?”그러나 말을 끝맺기도 전에, 방 안의 긴장된 분위기와 모든 구씨 집안 식구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도우미가 고양이가 있는 케이지를 받아 들고 은정에게 건넸다.애옹이는 케이지 안에서 눈을
서선영은 구은태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억울한 듯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구은정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애옹이가 가볍게 은정의 어깨 위로 뛰어 올라가 몸을 웅크렸다.새하얗고 부드러운 털을 가진 고양이는 한껏 나른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지만, 커다란 눈동자는 또르르 굴러가며 서선영과 구은태를 바라보고 있었다.은정은 차가운 시선으로 서선영을 향해 쏘아붙였다.“딸 단속 잘하세요. 이런 일, 두 번 다시 없도록 하시고요.”은정은 말을 마치고 곧장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모습이 계단 끝에서 사라진 후에야, 서선영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여보, 은서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구은태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어찌 됐든, 은정의 물건을 당사자의 허락 없이 남에게 준 건 잘못된 일이야.”서선영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여보 말씀이 맞아요. 은서가 돌아오면 잘 타일러 놓을게요.”“그건 나중에 얘기하지. 오늘은 많이 힘들었을 거야.”구은태는 아들을 아끼면서도 딸도 걱정이 됐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사이가 나쁜 건 골치 아픈 일이었다. 서선영은 고개를 숙였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차가운 기운이 스쳤다.“여보, 은정이가 너무 과격한 거 아닌가요? 조금 전에 여보가 말리지 않았으면, 은서를 정말로 목 졸라 죽일 수도 있었어요!”구은태는 미간을 찌푸렸다.“그럴 리 없어. 은정이는 그런 애가 아니야.”“하지만 듣자 하니 바깥에서 은정이가 사람을 죽인 적도 있다고 하던데요!”서선영은 겁에 질린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헛소리!”구은태는 크게 노했다.“도대체 누가 그런 헛소문을 퍼뜨렸어? 감히 우리 은정을 모함하다니!”서선영은 황급히 변명했다.“그냥 사람들이 하는 말이에요. 누가 시작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어요.”“저도 몇 번 들었지만, 그런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한테 단단히 혼내줬어요. 물론 저는 믿지 않아요!”구은태는 단호하게 말했다.“우리 가족끼리 믿어주면 그만이야. 은정이는 성격이 거칠긴
유진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왜 그래요?]구은정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아무것도 아니야.”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은저이 다시 입을 열었다.“얼마나 더 해야 해?”[한 시간 정도 남았어요.]유진은 두툼한 서류 뭉치를 휙 넘겨보자, 은정이 물었다.“입찰 회의는 오후야? 아니면 오전?”[오후요.]“그러면 지금 자. 내일 오전에 마저 해.”유진은 나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내일 오전에 다른 일정도 있어요. 그리고 오늘 밤에 다 끝내고, 아침에 늦잠 좀 자고 싶거든요.]은정의 목소리가 조금 단호해졌다.“말 들어.”이에 유진은 한 박자 늦게 반응하며 말했다.[알겠어요. 사실 조금 피곤하긴 하니까 내일 오전에 하게 할게요.”“응, 얼른 자.”유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굿나잇.]“굿나잇.”유진이 전화를 끊자, 은정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왠지 모르게 허전했던 마음이 조금은 채워지는 듯했다.예전 같았으면, 누군가 자신이 한 여자 때문에 감정이 휘둘린다고 말하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하지만 막상 그런 감정을 직접 겪고 보니,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마치 오래도록 억눌러 왔던 감정들이 임유진이 교통사고를 당한 그 순간부터 쏟아져 나와, 더 이상 제어할 수 없게 되어버린 듯했다.어쩌면 이건 하늘이 자신에게 내리는 벌이 아니라, 자신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알려주기 위한 기회일지도 모른다.다음 날, 유진과 팀원들은 입찰 회의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왔고, 벌써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여진구는 팀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오후 티타임을 준비했고, 저녁에는 노래방까지 예약해 놓았다.직원들은 다 같이 탁자 주변에 모여 앉아 간식을 먹으며 입찰 회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지만 분위기는 한결 가벼웠다.이번 프로젝트는 철저한 준비 덕분에 경쟁사보다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에, 결과에 대한 불안감도 거의 없었다.“유진 씨!”누군가 유진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진구가 건넨 타로 크림 롤케이크를 받아 들고 떠나려 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진구가 곁에 있던 진소혜를 향해 말했다.“잠깐 비켜줄래요?”소혜는 순간 당황한 듯 뒷걸음질 쳤다. 그런데 진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임유진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 자기 옆으로 이끌었다.진구는 직접 유진에게 롤케이크를 건네며 말했다.“도망가지 말고, 먼저 먹어. 너를 위해서 일부러 산 거야.”유진은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소혜의 표정이 썩 좋지 않을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보는 시선이 싸늘하고 매서웠다.유진은 조용히 롤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오늘 뭐 잘못했어요? 뭔가 부족했어요?”그러자 진구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아니, 왜 그래?”“그러면 왜 날 곤란하게 하는 건데요? 소혜 씨가 겨우 선배 옆에 서볼 기회를 잡았는데, 또 나를 불러서 데려가 버리잖아요.”“지금 나한테 쏘는 눈빛이 장난이 아닌데.”진구는 옆에서 소혜를 힐끗 보더니,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내가 너한테 잘해주는 게 왜 다른 사람 눈치를 봐야 해? 그리고 너도 알잖아. 난 관심 없어.”“오히려 네가 자꾸 날 소혜 씨한테 밀어 넣는 게 더 이상해. 너라면 당연히 알 줄 알았는데?”유진은 진구의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은정이 떠올랐다. 그도 예전에 비슷한 말을 했었다. 이에 유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결국 욕먹는 건 나잖아요.”진구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보상해 줄게. 저녁에 먹고 싶은 거 말해. 네가 고르면 다 따라줄게.”유진은 무덤덤하게 말했다.“뭐든 상관없으니까, 다른 사람들 의견 들어봐요.”하지만 진구는 단호했다.“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네가 뭘 좋아하는지 난 다 아니까.”유진은 크림 롤케이크를 크게 한입 베어 물며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진구와 함께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한편, 소혜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소혜는 평소에도 여진구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