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의 계약, 당신을 모른채 사랑에 빠지다.

3년의 계약, 당신을 모른채 사랑에 빠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By:  안나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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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아내를 알아보지 못한다." 클럽에서 벌어진 사고로 망나니 재벌가에 시집가는 위기에 처한 이주연. 딸을 지키려던 아버지 이창수는 자신이 오랫동안 후원해 온 청년 CEO 최재혁에게 사업 자금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단 3년간의 계약결혼을 부탁한다. 주연은 돈 때문에 결혼까지 하는 냉혈한이라 오해하고, 재혁은 사고만 치는 철없는 재벌가 딸이라 오해한 채 결혼한다. 결혼식 직후 주연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2년 뒤 보육원을 살리기 위해 잠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남편 재혁은 변장했던 아내의 얼굴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주연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그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로 결심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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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스물셋, 최악의 생일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스물 세 번째 생일 아침.

이주연이 오빠에게 받은 첫 번째 선물은 축하도, 꽃다발도 아니었다.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잔인한 한마디였다.

이진성.

서른세 살.

태산건설의 전무이사이자, 그리고 호적상 주연의 이복 오빠이자, 그녀의 숨통을 조이는 가장 잔인한 감시자.

또각. 또각.

복합한 감정을 깨부수는 서늘하고 정제된 구두 소리가 계단 위에서부터 무겁게 떨어졌다.

집 안의 공기가 단숨에 얼어붙었다.

"아침부터 아주 가관이네."

냉소와 경멸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 검은 셔츠에 완벽한 핏의 슬랙스를 차려입은 남자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조각처럼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언제나 한겨울의 빙하처럼 차갑고 매몰찼다.

진성은 계단 중간에 멈춰 서서 품에 안겨 있는 주연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스물셋이나 처먹고 아직도 엄마 품에 파고들어 애교를 떨고 있나? 유치해서 원."

"오빠……."

주연은 떨리는 심장을 숨기며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오늘…… 내 생일이야."

진성은 손목시계를 힐끗 눈으로 훑더니, 끔찍할 정도로 무심하게 뱉었다.

"그래서?" "……."

"뭐, 케이크라도 사다 달라고 징징대는 거야?"

순간, 거실을 채우던 공기가 찢어질 듯 팽팽해졌다. 진성은 한 걸음씩 다가오며 주연의 숨을 조여왔다.

"스물셋이면 다 컸잖아. 어린애 취급받는 건 그만해라."

진성의 시선이 주연의 스케치북이 놓인 책상 쪽으로 흘렀다.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그깟 건축이니 뭐니 하는 쓸데없는 취미생활은 당장 집어치워. 대학 졸업하면 적당한 가문 골라서 시집이나 가."

"오빠!"

"그게 이 집에 네가 유일하게 쓸모를 증명하고, 눈칫밥 안 얻어먹는 유일한 길일테니까."

주연의 얼굴이 종이장처럼 하얗게 질려갔다.

건축을 시작한 이후로, 그가 자신에게 던진 수많은 폭언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여자는 결국 남의 집 대문이나 지키다 죽는 게 숙명이다.’

‘네가 꿈꾸는 그 모든 건 부질없는 허영이야.’

참다못한 고미혜가 소리를 질렀다.

"진성아! 말이 그게 무슨 소리니! 오늘 기쁜 날이야!"

진성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주연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박혀 있었다.

"틀린 말 했습니까?"

차갑게 반문한 진성은 마침내 주연 코앞에 멈춰 섰다. 그의 입술 사이로, 주연의 23년 인생을 가두는 가장 잔인하고 흉포한 선고가 떨어졌다.

"생일 축하한다, 이주연."

축하라는 단어가 이토록 뼛속까지 저릴 수 있을까. 진성은 가장 낮고, 가장 잔인한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이었지만."

세상의 시간이 완전히 박살 났다. 주연의 숨이 멎었고,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이진성! 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미혜가 기가 막힌다는 듯 가슴을 치며 소리쳤지만, 진성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헝클어진 재킷을 툭툭 털어 입으며 무심하게 돌아섰다.

"먼저 회사 갑니다."

—쾅!

현관문이 지진처럼 울리며 닫혔다. 집 안에는 진성이 남기고 간 서늘한 한기만이 가득 고여 있었다.

주연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돌부처처럼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어릴 적부터 귀에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었다. 존재 자체가 죄악인 것처럼 취급받던 그늘.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그 누구보다 축복받고 싶었던, 단 하루뿐인 그녀의 스물세 번째 생일이었다.

더 이상 미소를 지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긴 생머리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툭, 바닥으로 떨어져 부서졌다.

불과 한 시간 전.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5월의 햇살이 커다란 통유리창을 깨뜨릴 듯 밀려들어 하얀 침대 위를 뒹굴었었다.

이주연.

허리까지 비단처럼 흘러내린 검은 생머리, 화장기 하나 없어도 투명한 우윳빛 피부와 오뚝한 콧날. 어릴 적부터 누구나 그녀를 보며 예쁘다고 했다..

하지만 주연에게 그 완벽한 외모는 축복이 아니라 숨이 막히는 족쇄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늘 껍데기만 보았다. 그 안에 깃든 영혼이 무엇을 아파하고, 어떤 꿈을 꾸며 가슴 뛰는지는 단 한 사람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주연은 침대 옆 작은 달력을 바라보았다.

5월 20일.

오늘은 그녀의 스물세 번째 생일이었다.

"……벌써 스물셋이네."

작게 읊조린 목소리 뒤로 가슴 한구석이 휑하게 뚫린 것처럼 허전했다.

축복받아야 마땅한 기쁜 날, 그러나 뼛속까지 스며드는 이 불길한 예감

그때, 조용한 방 문이 살며시 열렸다.

"우리 주연이, 눈 떴니? 아침 먹자."

따스한 미소를 머금은 고미혜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엄마의 얼굴을 본 순간, 주연은 환하게 웃으며 그 품으로 와락 안겼다.

"엄마."

"우리 딸, 스물세 번째 생일 진심으로 축하해."

"엄마…… 너무 빨리 어른이 되는거 같아"

"왜?"

"아직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 건축 공부도 더 깊게 하고 싶고……."

주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서글픈 웃음을 지었다.

"어른이 되는 게 너무 무서워, 엄마."

미혜는 피식 웃으며 딸의 등을 다독였었다.

그런데 오빠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주연의 가슴을 후벼 팠다.

"……나 먼저 방에 들어갈게, 엄마."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작은 목소리를 남긴 채, 주연은 제 방으로 걸어 들어가 문을 쾅 닫아걸었다.

문이 닫히는 순간,

꾹꾹 눌러 담았던 숨죽인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방 문 너머로 새어 나오는 딸의 처절한 흐느낌을 들으며, 고미혜는 그 자리에 멍하니 주저앉아 눈물만 삼켰다.

당장이라도 품에 안아 다독여주고 싶었지만, 그 어떤 위로도 이 잔인한 상처를 덮을 수 없음을 알기에 가슴이 찢어졌다.

창밖으로는 눈이 멀 정도로 눈부신 5월의 햇살이 온 세상을 태울 듯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주연에게 스물세 번째 생일은, 지옥의 문이 열린 날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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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s

바리스타곰돌
바리스타곰돌
설마 또 잠수는 아니겠지요 연재 부탁드려요
2026-09-30 15:23:35
0
1
뚠뚠잉
뚠뚠잉
주연이랑 재혁이 설렘폭팔 달달 기다리고있어요!!! 작가님 빠른 업뎃 해주세요ㅠㅠㅠㅠ 응원해요...
2026-09-10 17:46:00
1
0
김현숙
김현숙
연재 안하나요? 몇일째 안올라오는데요.ㅜ.ㅜ 재미 있는데 얼른 올려주세요.
2026-08-31 21:42:29
2
1
바리스타곰돌
바리스타곰돌
재미있네요 내일 이 기다려 지네요
2026-08-24 21:11:28
1
0
235 Chapters
2화. 친구들의 생일 파티
저녁 여섯 시.붉게 물든 노을이 커다란 통유리창 너머로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이주연은 침대 끝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오늘은 스물세 번째 생일.하지만 축하받고 있다는 기분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오히려 아침부터 이진성이 내뱉은 한마디가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주연은 두 무릎을 끌어안았다.언제쯤이면 오빠가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들여 줄까.열 살 때는 중학생이 되면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다.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고등학생이 되면 달라질 거라고 믿었다.그리고 어느새 스물셋.하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진성은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때.부르르르.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진동했다.화면에는 익숙한 이름이 떠 있었다.김지혜.주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친구.그리고 가장 오래된 편이었다."응, 지혜야.""너 울었지?"다짜고짜 날아온 한마디.주연은 얼른 눈가를 문질렀다."아닌데.""이주연."지혜가 한숨을 쉬었다."고등학교 때부터 널 봤는데 내가 네 목소리도 구분 못 할 것 같아?""...""또 오빠 때문이지?"주연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잠시 이어진 침묵.이내 지혜가 단호하게 말했다."삼십 분 줄게.""뭐?""씻고 나와.""나 오늘 나가기 싫어.""싫기는.""오늘 네 생일이잖아.""생일이 뭐가 좋아..."주연이 힘없이 웃었다."그냥 오늘은 자고 싶어.""안 돼."지혜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오늘 하루까지 그 인간 때문에 망치게 둘 순 없어.""...""대학교 마지막 생일이잖아."그 말에 주연은 잠시 눈을 감았다.대학교 마지막 생일.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스물세 살."어디 가는데?"잠시 후 들려온 지혜의 대답."클럽.""...뭐?""요즘 제일 핫한 데.""나 클럽 안 가.""술도 못 마시잖아.""오늘은 마셔.""싫어.""준비하고 나와."잠시 뜸을 들이던 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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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불길한 시선
쿵―.쿵―.강렬한 비트가 바닥을 울리며 발끝까지 진동처럼 전해졌다.붉은빛과 푸른빛이 교차하는 조명 아래, 사람들은 음악에 몸을 맡긴 채 웃고 떠들었다. 술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환호성이 뒤섞이며 클럽 안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하지만 그 한가운데에서도 이주연은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손에 들린 칵테일 잔을 빤히 바라보며 작은 숨을 내쉬었다."어때?"김지혜가 옆에서 웃으며 물었다."생각보다 괜찮지?"주연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응.""생각보다 나쁘진 않아."지혜가 씨익 웃었다."그러니까 내가 나오랬잖아.""맨날 학교, 집, 학교, 집.""가끔은 이렇게 놀아도 돼."주연은 처음 보는 화려한 풍경을 천천히 둘러봤다."아직 조금 어색해.""금방 익숙해질걸."지혜는 새로운 칵테일을 건네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오늘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마.""오늘 주인공은 너야."주연은 잔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달콤한 오렌지 향이 입안을 감싸며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갔다.'생각보다 쓰지 않네.'하지만 그녀는 몰랐다.술을 거의 마셔본 적 없는 자신에게 그 달콤한 칵테일이 얼마나 독한지.한 잔.그리고 또 한 잔.조금씩 몸이 뜨거워졌다.희고 맑던 볼에는 붉은 홍조가 번졌고, 눈동자는 평소보다 촉촉하게 젖어들었다.긴 검은 머리가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며 가느다란 목선을 드러냈다.술기운 때문인지 평소보다 한층 더 무방비한 분위기가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친구들이 감탄을 터뜨렸다."주연아.""너 진짜 너무 예쁘다.""오늘 남자들 시선은 다 네가 가져가겠다."주연은 얼굴을 붉히며 손을 내저었다."놀리지 마.""민망하잖아."친구 하나가 장난스럽게 물었다."근데 진짜 연애 안 할 거야?""이렇게 예쁜데 스물셋까지 남자친구가 한 번도 없다는 게 더 신기해."주연은 씁쓸하게 웃었다."혼자가 편해.""아직은 누군가에게 맞춰가며 사는 게 부담스러워."그 말을 들은 지혜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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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사라진 그녀
쿵―, 쿵―.강렬한 비트가 여전히 클럽 안의 공기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주연의 귀에는 음악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아득하게 들렸다.“…어지러워.”주연은 한 손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평소 술을 거의 마시지 않던 그녀에게 달콤한 칵테일 몇 잔은 생각보다 강했다. 하얀 뺨은 복숭아처럼 붉게 달아올랐고, 맑던 눈동자에는 술기운이 어렸다. 시야는 조금씩 흔들렸고, 몸은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주연아, 진짜 괜찮아?”김지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얼굴이 너무 빨개.”주연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응. 괜찮아. 잠깐 바람만 쐬고 오면 될 것 같아.”“내가 같이 갈까?”“아니야. 금방 다녀올게.”“정말 괜찮겠어?”“응. 여기서 기다려.”주연은 친구들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바닥을 울리는 음악과 번쩍이는 조명,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한꺼번에 뒤섞였다. 향수 냄새와 독한 술 냄새가 코끝을 찔렀고, 사람들 사이를 지나갈 때마다 어깨가 부딪쳤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낯설지만 신기하게 느껴졌던 풍경이 이제는 유리벽 너머의 장면처럼 흐릿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였다.주연은 벽을 짚으며 간신히 화장실에 도착했다.수도꼭지를 틀어 찬물에 손을 적신 뒤 뜨거운 뺨을 여러 번 눌렀다. 차가운 물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머릿속의 열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하.”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던 주연의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았다.붉게 상기된 얼굴 위로 아침의 기억이 겹쳐졌다.차갑게 내려다보던 이진성의 눈빛.그리고 잔인하게 내뱉었던 한마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주연은 세면대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오늘만큼은 잊고 싶었다.오빠의 미움도, 집 안의 숨 막히는 공기도, 자신이 그 가족 안에서 언제나 환영받지 못한 존재라는 사실도.하지만 아무리 웃고 술을 마셔도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바보.”주연은 거울 속 자신에게 작게 중얼거렸다.스물셋이 된 지금까지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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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사라진 주연
쿵―. 쿵―. 강렬한 음악은 여전히 클럽 안을 뒤흔들고 있었다. 붉은 조명과 푸른 조명이 사람들의 얼굴 위를 스쳐 지나갔고, 누군가는 환호성을 지르며 춤을 췄고, 누군가는 술잔을 부딪치며 크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김지혜는 더 이상 그 분위기에 섞여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다시 확인했다. 오후 11시 32분. 주연이 화장실에 간다고 자리를 떠난 지 벌써 20분이 넘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 불안감이 점점 커졌다. "지혜야." 옆자리 친구가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주연이가 아직 안 돌아와." "화장실 줄이 긴 거 아닐까?" "아니..." 지혜는 고개를 저었다. "주연이는 절대 말없이 오래 사라지는 애가 아니야."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나 잠깐 찾고 올게." "같이 갈까?" "아니, 금방 보고 올게." 지혜는 사람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클럽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음악 소리는 조금씩 작아졌다. 복도에는 은은한 조명만 켜져 있었고, 두꺼운 카펫이 발소리마저 삼켜버렸다. "...주연아?" 여자 화장실 문을 열었다. "이주연!" 대답은 없었다. 빈 세면대와 거울만이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지혜는 복도를 둘러보다 테라스로 이어지는 유리문을 발견했다. 급히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시원한 밤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하지만 테라스는 텅 비어 있었다. 벤치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뒤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지혜가 뒤를 돌아봤다. 클럽 직원이었다. "긴 생머리에 흰 블라우스 입으신 분 찾으세요?" 지혜가 급히 다가갔다. "네! 어디 계세요?" 직원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어떤 남성분과 함께 계시는 건 봤습니다." "...남자요?" "검은 셔츠를 입은 분이었는데...." 지혜의 표정이 굳었다. "...최진태?" 직원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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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VIP 룸에서 벌어진 사고
띠링―.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길고 적막한 복도가 나타났다.최진태는 비틀거리는 이주연의 팔을 붙든 채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주연은 몇 번이나 멈춰 서려 했지만, 술기운이 오른 몸에는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저… 집에 가야 해요.”“알았어. 잠깐 쉬었다가 보내줄게.”“싫어요. 친구한테 돌아갈 거예요.”주연은 분명하게 거절했지만, 진태는 듣지 못한 사람처럼 계속 걸었다.복도 끝에 도착한 그가 카드키를 가져다 대자 짧은 전자음이 울렸다.삑―.문이 열리는 순간, 주연은 남은 힘을 모아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쿵,육중한 문이 닫히자 복도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던 클럽 음악마저 완전히 끊겼다.방 안은 숨 막힐 만큼 고요했다.낮게 깔린 조명 아래로 고급스러운 가죽 소파와 유리 테이블, 술병이 가득한 장식장이 보였다. 그러나 주연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흐릿하게 흔들렸다.진태는 그녀를 소파에 앉혔다.주연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살폈다. 머릿속은 여전히 어지러웠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이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그리고 눈앞의 남자는 위험하다.“물… 물 좀 주세요.”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진태는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러나 물을 건네는 대신 주연의 바로 옆에 앉았다.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였다.그는 소파 등받이에 팔을 올려 주연의 퇴로를 막았다.주연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물보다는 이게 낫지 않을까."진태는 테이블 위에 놓인 위스키병을 들어 보였다.주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하지만 발을 디디는 순간 바닥이 기울어지는 듯한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그녀는 간신히 소파 끝을 붙잡아 넘어지지 않았다.진태가 낮게 웃었다.“이 상태로 어떻게 집에 가겠다는 거야?”“친구들이 기다려요.”주연은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 믿음만큼은 확고했다.진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그전에 조금 쉬면 되잖아.”그가 손을 뻗어 주연의 얼굴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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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경찰서의 밤
차가운 형광등 불빛 아래, 이주연은 창백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손에 묻었던 피는 이미 깨끗이 닦아냈지만, 손끝의 떨림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몇 시간 전 호텔 VIP 룸에서 벌어진 일이 머릿속에서 계속 반복되었다.닫힌 문.자신을 붙잡던 손.그리고 필사적으로 휘두른 크리스털 장식품.주연은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으려 했지만, 손가락은 계속 미세하게 흔들렸다.그 옆에는 김지혜가 바짝 붙어 앉아 있었다. 지혜는 주연의 어깨를 감싸며 맞은편 경찰관에게 거듭 설명했다.“정당방위예요.”지혜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주연이는 술에 취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최진태가 억지로 호텔 VIP 룸까지 데려갔다고요. 주연이가 싫다고 했는데도 계속 붙잡았고요.”경찰관은 난처한 표정으로 진술서를 내려다봤다.“김지혜 씨가 객실 안에서 직접 목격한 건 아니죠?”“제가 들어갔을 때 주연이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떨고 있었어요. 옷도 흐트러져 있었고, 최진태는 바로 옆에 쓰러져 있었어요. 그것만 봐도 모르겠어요?”“저희도 정황은 확인하고 있습니다. 다만 객실 안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양측 진술이 엇갈리고 있어서요.”“엇갈리다니요?”지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주연이가 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때리겠어요?”“지혜야.”주연이 힘없는 목소리로 그녀의 소매를 붙잡았다.“그만해.”“어떻게 그만해? 저 사람들이 지금 널 가해자로 몰고 있잖아.”주연은 대답하지 못했다.맞은편 조사실에서는 최진태가 진술을 받고 있었다.병원 응급실에서 간단한 치료를 받은 그는 이마에 하얀 붕대를 감고 있었다. 상처는 크지 않았지만, 그는 마치 중대한 피해를 입은 사람처럼 침착하고 억울한 표정을 유지했다.그의 옆에는 이미 대형 로펌 소속 변호사 두 명이 자리하고 있었다.진태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주연 씨가 술에 많이 취해 있었습니다.”“저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주연 씨를 잠시 쉬게 해주려고 객실로 데려갔을 뿐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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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딸을 지키려는 아버지
같은 시각.태산건설 본사.늦은 밤이었지만 회장실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사방이 적막에 잠긴 집무실. 넓은 공간을 밝히는 것은 책상 위 스탠드 하나뿐이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 법무팀이 긴급히 올린 사건 보고서가 펼쳐져 있었다.사건 경위호텔 VIP 객실로 강제 이동피해자의 반복적인 거부 의사위협을 느낀 피해자의 정당방위기물을 이용한 반격이창수는 보고서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한 줄.또 한 줄.읽을수록 그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주연아."낮게 새어 나온 목소리에는 아버지의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햇살처럼 밝게 웃던 아이였다.어릴 적에는 길가에 다친 새를 품에 안고 울던 아이였고, 작은 강아지가 다칠까 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던 아이였다.그런 아이가...오늘 밤 얼마나 무서웠을까.이창수는 떨리는 손으로 보고서의 모서리를 힘껏 움켜쥐었다.가슴이 조여 왔다.그때.책상 위 휴대전화가 진동했다.발신인.최명진 대표.창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말씀하십시오."수화기 너머에서는 지나칠 만큼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생겼군.""젊은 친구들이 혈기가 넘치다 보니 이런 일도 생기는 모양이야."창수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사고가 아닙니다.""제 딸은 피해자입니다."잠시 침묵이 흘렀다.이내 최명진이 피식 웃었다."법정에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걸세.""우리 진태도 머리를 꿰맸어.""피해자는 오히려 우리 쪽이 될 수도 있지."창수는 이를 악물었다."객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제 딸이 모두 진술했습니다."최명진은 그의 말을 가볍게 잘랐다."하지만 객실 안에는 CCTV가 없잖나.""...""세상은 진실보다 증거를 믿고.""증거보다 소문을 더 빨리 믿지."그 말이 창수의 가슴을 깊이 파고들었다.최명진은 더욱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언론이 움직이면 어떻게 되겠나.""태산건설.""주가.""기업 이미지.""그리고...""이주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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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얼굴도 모르는 약혼자
다음 날 오전.태산건설 본사 회장실.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듯 이창수의 눈가에는 짙은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다.책상 위에는 아직도 경찰서 사건 보고서와 AI 스타트업 투자 제안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잠시 후.똑똑.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실례하겠습니다."검은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젊은 남자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최재혁.국내 AI 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스타트업 **'뉴럴링크'**의 대표였다.화려한 배경도, 든든한 집안도 없었다.보육원에서 자라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남았고, 오직 자신의 실력만으로 회사를 일으켜 세운 청년이었다.그 누구보다 성실했고,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하지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지난 10여 년 동안, 그의 곁에는 언제나 조용히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있었다.바로 태산건설 회장 이창수였다.학비가 부족했던 대학 시절도.창업 자금이 없어 좌절했던 순간도.이창수는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재혁을 도왔다.재혁에게 이창수는 투자자가 아니라,인생의 은인이었다."부르셨습니까, 사장님."재혁은 공손히 인사했다.창수는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재혁아.""...오늘은 사장으로서가 아니라.""한 아이의 아버지로 부탁을 하나 하려고 너를 불렀다."재혁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창수는 어젯밤 경찰서에서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이야기했다.호텔.VIP 룸.딸이 당한 공포.그리고 최명진의 결혼 제안까지.긴 이야기가 끝났지만 집무실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재혁은 아무 말 없이 창수를 바라봤다.잠시 후 낮게 입을 열었다."...많이 놀라셨겠습니다."창수는 씁쓸하게 웃었다."놀란 정도가 아니다.""아버지라는 사람이...""...딸 하나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다."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창수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그래서 염치없는 부탁을 하려고 한다."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 재혁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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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3년의 계약
태산건설 회장 저택.며칠 전 클럽에서 벌어진 사건 이후, 집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이주연은 거의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억울함.수치심.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그 모든 것이 그녀를 방 안에 가둬 두고 있었다.방문 밖에서는 여전히 오빠 이진성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집에 얌전히 있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밖으로 돌아다니다 사고나 치고, 결국 집안 망신만 시켰군."주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아무리 귀를 막아도 그 말들은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문 앞에는 어머니 고미혜가 따뜻한 국을 내려놓고 한참을 서 있었다."주연아... 엄마가 여기 둘게."하지만 주연은 끝내 문을 열지 않았다.---며칠 후."아가씨."집사 박 실장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회장님께서 서재로 오시랍니다."주연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이내 무거운 발걸음으로 방문을 열었다.창백한 얼굴.붓기가 채 가라앉지 않은 눈.며칠 사이 그녀는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이창수의 서재.커다란 창밖으로 늦은 오후 햇살이 비치고 있었지만 방 안의 공기는 차갑기만 했다.책상 위에는 사건 관련 서류들이 아직도 수북이 쌓여 있었다.이창수는 며칠 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한 사람처럼 피곤한 얼굴이었다.딸이 들어오자 조용히 말했다."앉아라."주연은 말없이 소파 끝에 앉았다.두 사람 사이에는 긴 침묵이 흘렀다.먼저 입을 연 사람은 창수였다."최진태 쪽과는 일단 시간을 벌었다."주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건 합의금이 아니다.""...""결혼이다."순간 주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싫어요."작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그 사람과는 절대로 결혼 안 해요.""나도 안다."창수는 곧바로 대답했다."그래서 다른 방법을 준비했다."그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서류 한 장을 주연 앞으로 밀었다.주연은 천천히 서류를 집어 들었다.맨 위에는 굵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계약결혼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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