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남편이 아내를 알아보지 못한다." 클럽에서 벌어진 사고로 망나니 재벌가에 시집가는 위기에 처한 이주연. 딸을 지키려던 아버지 이창수는 자신이 오랫동안 후원해 온 청년 CEO 최재혁에게 사업 자금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단 3년간의 계약결혼을 부탁한다. 주연은 돈 때문에 결혼까지 하는 냉혈한이라 오해하고, 재혁은 사고만 치는 철없는 재벌가 딸이라 오해한 채 결혼한다. 결혼식 직후 주연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2년 뒤 보육원을 살리기 위해 잠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남편 재혁은 변장했던 아내의 얼굴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주연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그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로 결심하는데….
View More따스한 아침 햇살이 커다란 통유리창을 지나 하얀 침대 위로 쏟아졌다.
눈을 뜬 이주연은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생머리가 어깨를 타고 비단처럼 흘러내렸다. 창가에 앉은 그녀는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맑고 투명한 눈동자. 우윳빛 피부. 짙지 않지만 또렷한 눈썹과 오뚝한 콧날.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었지만, 오히려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늘 같은 말을 들으며 자랐다. "정말 예쁘다." "인형 같아." "커서 연예인이 되겠네." 하지만 주연은 그런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녀의 얼굴만 바라봤다. 정작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꿈을 꾸는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아름다움은 축복이 아니라, 때로는 족쇄였다. 주연은 침대 옆 달력을 바라보았다. 5월 20일. 오늘은 그녀의 스물세 번째 생일이었다. "...벌써 스물셋이네." 작게 웃었지만 가슴 한편은 이상하리만큼 허전했다. 기쁜 날이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좋은 예감보다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먼저 밀려왔다. 그때 방문이 살며시 열렸다. "주연아, 일어났니? 아침 먹자." 따뜻한 미소를 머금은 고미혜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엄마." 주연은 환하게 웃으며 엄마 품에 안겼다. 미혜는 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우리 딸, 스물세 번째 생일 축하해." "엄마... 나 아직 스물셋 하기 싫어." "왜?" "아직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 건축도 더 공부하고 싶고...." 잠시 망설이던 주연이 작게 웃었다. "아직 어른이 되는 게 무서워." 미혜는 피식 웃으며 등을 토닥였다. "우리 딸은 아직도 아기네." 잠시 흐르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또각. 또각. 복도 끝에서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운 목소리가 집 안을 가르며 울렸다. "아침부터 보기 좋네." 주연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검은 셔츠에 슬랙스를 입은 남자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이진성. 서른세 살. 창수건설 전무이사. 그리고 그녀의 이복오빠.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언제나 얼음처럼 차가웠다. 진성은 계단에 멈춰 선 채 주연을 내려다봤다. "스물셋이나 됐는데 아직도 엄마 품에 안겨 있어?"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유치하지도 않냐?" 주연은 애써 웃어 보였다. "오빠." "왜." "...오늘 내 생일이야." 진성은 손목시계를 힐끗 보더니 무심하게 말했다. "그래서?" "..." "케이크라도 사다 달라는 거야?" 순간 거실 공기가 얼어붙었다. 진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스물셋이면 다 컸잖아." "건축 같은 취미 생활은 이제 그만하고 졸업하면 적당한 집안에 시집이나 가." "그게 집안에 도움이 되는 길이니까." 주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건축을 선택한 이후 그는 늘 같은 말을 했다. '여자는 결국 결혼하면 된다.' '쓸데없는 꿈이다.' 고미혜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진성아." "말이 너무 심하잖니." "틀린 말 했습니까?" 차갑게 대꾸한 진성은 다시 주연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애정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생일 축하한다." 축하라는 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 그리고 그는 가장 잔인한 한마디를 던졌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순간. 시간이 멈췄다. 주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진성아!" 미혜가 다급히 소리쳤지만 진성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재킷을 집어 들었다. "먼저 출근합니다." 쾅.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주연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어릴 적부터 수도 없이 들었던 말.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누구보다 행복해야 할 생일이었다. 주연은 끝내 미소를 지키지 못했다. 긴 머리카락 사이로 눈물 한 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 씻고 내려올게." 작은 목소리를 남긴 채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문 너머에서는 숨죽인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고미혜는 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딸을 안아주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창밖에서는 눈부신 햇살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주연에게 스물세 번째 생일은 시작부터 최악이었다.아파트 단지 앞 골목.희미한 가로등 아래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나란히 길게 늘어졌다.지혜는 하얀 비닐봉지에서 군고구마 하나를 꺼냈다. 뜨거운 껍질을 조심스럽게 벗기자 노란 속살 위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군고구마를 호호 불던 지혜가 주연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슬쩍 찔렀다.“그래서?”주연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돌아보았다.“뭐가?”“모르는 척하기는.”지혜가 눈을 반짝이며 주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최재혁 대표랑 단둘이 저녁까지 먹었다며. 그것도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단둘이 먹으려고 한 건 아니야. 성 팀장님에게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신 거라고 했잖아.”“결과적으로는 둘이 먹었잖아.”지혜가 군고구마를 한입 베어 물며 짓궂게 웃었다.“어땠어?”“뭐가 어때.”“분위기 말이야, 분위기.”“그냥 회의의 연장이었어. 낮에 다 끝내지 못한 보육원 설계 변경안도 이야기하고, 공사 일정도 다시 확인하고.”“정말 그게 전부야?”“그게 전부지. 그럼 뭐가 더 있어?”주연은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말끝이 조금 흐려졌다.오늘 밤 재혁과 나누었던 대화들이 차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왜 건축가가 되었느냐고 묻던 진지한 목소리.누군가에게 받은 빚을 갚는 것이라고 말하던 의미심장한 눈빛.그리고 늦은 밤, 자신을 집까지 데려다주며 했던 말.걱정돼서 그렇습니다.그 한마디를 떠올리는 순간, 주연의 심장이 다시 작게 흔들렸다.지혜는 주연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미묘한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레스토랑의 묵직한 문이 천천히 열렸다.두 사람은 나란히 밤거리로 걸어 나왔다.화려한 가로등 불빛이 젖은 아스팔트 위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고, 12월 중순의 차가운 겨울바람이 두 사람의 옷깃을 스쳐 지나갔다.분명 날씨는 차가웠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에는 식지 않는 온기가 남아 있었다.재혁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세단이 주차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걸음을 멈췄다.그리고 주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모셔다드리겠습니다."주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가볍게 저었다."괜찮습니다, 대표님. 여기서 택시 타면 금방이에요.""시간이 늦었습니다.""이 동네는 익숙해서 정말 괜찮아요."재혁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눈빛만큼은 달랐다."...걱정돼서 그렇습니다."짧은 한마디였다.하지만 그 말에는 억지로 권하는 사람의 강압도, 대표의 명령도 담겨 있지 않았다.그저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었다.주연은 잠시 망설였다.회사 대표가 직접 데려다주겠다고 하는데 계속 사양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무엇보다...그의 걱정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럼."그녀가 작은 미소를 지었다."근처까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재혁도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나란히 차에 올랐다.문이 닫히는 순간, 도심의 소음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재혁은 시동을 걸었고, 세단은 부드럽게 도로 위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라디오에서는 잔잔한 재즈가 흘러나왔다.
"...대표님은 왜 직접 사회공헌 프로젝트를 챙기시는 건가요?"주연의 질문이 조용한 룸 안에 머물렀다.재혁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손에 들고 있던 물잔을 천천히 내려놓은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반짝이고 있었다.잠시 후.그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누군가에게..."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받은 빚을 갚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주연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그 한마디는 짧았지만 이상하게도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빚이요?"재혁은 희미하게 웃었다."돈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살다 보면...""도저히 혼자서는 일어설 수 없던 순간이 있지 않습니까."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하지만 그 짧은 문장만으로도 주연은 알 수 있었다.그에게도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과거가 있다는 것을.재혁은 화제를 돌리듯 잔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그래서 회사가 조금 더 성장하면...""그만큼 더 돌려주자는 것이 제 원칙입니다."주연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좋은 원칙이네요."재혁은 그녀를 바라보았다."이주연 씨를 만나기 전까지는.""...?""사회공헌도 결국 회사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잠시 시선을 내린 그가 다시 말했다."그런데 오늘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주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제가요?"재혁은 고개를 끄덕였다."회사는 돈으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하지만...""사람의 시간과 진심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주연은 잠시 말을 잃었다.그는 칭찬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오히려 필요한 말만 하는 사람
재혁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아주 천천히 미소 지었다.그 미소는 주연이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차갑지 않은 미소였다."사람이 행복해질 공간을 만드는 건축가가 되고 싶었습니다."그녀의 마지막 말이 룸 안에 조용히 머물렀다.재혁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사업을 하면서 수많은 건축가를 만나 봤다.누군가는 독창적인 디자인을 이야기했고,누군가는 랜드마크가 될 건물을 꿈꿨다.하지만 사람의 행복을 먼저 이야기하는 건축가는 처음이었다.잠시 후 재혁이 조용히 물었다."그래서 행복나무 보육원 설계도 그렇게 나온 거군요."주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아이들이 하루 중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이잖아요.""공간 하나가 아이들의 기억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재혁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회의 때도 느꼈지만...""행복나무 이야기가 나오면 이주연 씨는 다른 사람 같았습니다."잠시 말을 멈춘 그가 물었다."왜 그렇게까지 행복나무를 아끼시는 겁니까?"주연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하지만 그것은 당황이 아니라 오래된 추억을 떠올리는 눈빛이었다.그녀는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행복나무는...""제가 고등학생 때 처음 인연을 맺은 곳이에요."재혁은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친한 친구가 그곳에서 자랐어요.""친구를 따라 봉사를 시작했는데..."그녀는 옅게 웃었다."처음에는 제가 아이들을 도와주러 간 줄 알았어요."잠시 숨을 고른 주연이 말을 이었다."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오히려 제가 더 많은 위로를 받고 있더라고요."재혁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주연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살다 보면...""누구에게나 마음이 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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