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우는 여자가 우는 걸 싫어했다. 특히 연다인이 매번 우는 것을 볼 때면 더욱 짜증이 났다.하지만 임슬기는 달랐다. 배정우는 그녀가 울면 이상하게도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고 그녀에게 수없이 속아 넘어가면서도 결국엔 마음이 약해졌다.연다인은 배정우가 점점 짜증을 내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더 이상 매달리지 않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았어. 그럼 난 집에서 기다릴게.”“그래.”문을 나서는 순간 연다인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빌어먹을 임슬기. 죽을 날이 코앞인데도 정우의 마음을 붙잡고 있다니, 진짜 끈질기네!’원래
버스에서 내리자 싸늘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고 임슬기는 몸을 웅크리며 옷깃을 여몄다. 비에 젖은 옷이 축축하게 달라붙어 바람이 스칠 때마다 몸이 떨렸다.이곳은 오정태의 고향이었다. 임슬기는 이곳에 한 번 와본 적이 있었지만 밤이 되니 길이 낯설었다.홀로 빗속을 헤매던 끝에 겨우 오정태의 집을 찾아냈다.창문 너머로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걸 본 임슬기는 한참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그 순간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아주머니, 저 슬기예요.”잠시 정적이 흐르고 십여 초가 지
임슬기는 순간 얼어붙었다.“집사님이 뭔가 남기셨다고요? 아주머니, 그거 혹시 아빠가 남긴 거예요?”“그래. 가시기 전에 불안하다고 일부러 따로 보관해 두셨어.”주인화는 한숨을 내쉬었다.“슬기야, 넌 자책할 필요 없어. 그이가 떠나기 전에 직접 점을 쳐 봤는데 이번에 가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더니, 결국 그대로 됐잖아.”“집사님... 집사님은 살해당했어요. 저를 찾으러 명인시에 오지만 않았어도...”“이건 다 운명이야. 연다인 같은 배은망덕한 애는 반드시 천벌을 받을 거야. 그이도 예전에 그 애는 믿을 게 못 된다
가장 먼저 임슬기를 발견한 사람은 연다인이었다. 그녀는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배정우의 팔을 잡아당기며 그의 품에 고개를 기대고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정우야, 사람들이 다 오기 전에 우리 정원에서 잠깐 산책할래? 같이 별 보고 싶어.”어젯밤 크게 다툰 탓인지 배정우는 마뜩잖은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임슬기는 문 앞에 서서 두 사람이 정원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슴 한쪽이 저릿했지만 이내 감정을 다잡고 송재현 쪽으로 향했다.“재현아.”송재현은 그녀를 본 순간 귀신이라도 본 듯 뒷
“그래요?”배정우가 코웃음을 쳤다.“하지만 앞으로는 제 아내와 거리를 두셨으면 좋겠네요. 안 그러면 제가 무슨 일을 벌일지 장담 못 합니다.”“배정우, 재현이는 그저 내가 일자리 찾는 걸 도와줬을 뿐이야. 이게 그렇게 심각하게 나올 일이야?”“임슬기, 네 신분을 잊지 마.”그러자 임슬기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내 신분이 뭔데? 넌 애인까지 대동하고 연회에 참석했잖아. 넌 내 입장을 생각해 줬어?”그때 연다인이 다급히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슬기야, 이러지 마. 네가 사라졌으니까 정우가 날 찾은 거잖아
“배 대표님, 한마디만 해주시죠. 현재 사모님과 이혼할 계획입니까?”기자들이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두 사람을 다시 포위했다.임슬기는 배정우에게 팔이 잡힌 채 휘청거렸고 결국 그의 품속으로 그대로 넘어졌다.그 순간 배정우는 큰 손으로 임슬기의 허리를 감쌌고 그의 목소리가 임슬기의 머리 위로 들려왔다.“제 아내는 저를 17년 동안이나 사랑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바람을 필 리가 없죠.”“하지만 방금 송재현 씨께서 직접 인정하셨잖아요. 게다가 2년 전에도 사모님이 외도를 했다는 소문이 돌지 않았습니까?”2년 전의 그 기사들은 배정
“나 때문에 네 체면이 깎일까 봐 그랬어?”임슬기는 수없이 자신을 설득하려 했다. 배정우가 기자들 앞에서 그녀를 감싼 건 그만큼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배정우가 지키고 싶은 건 그녀가 아니라 그 자신의 체면이란 것을. 한 남자의 자존심일 뿐이었다.“넌 아직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야. 그러니 신분에 맞게 행동해. 그런 천박한 짓은 하지 말고!”“내가 무슨 천박한 짓을 했는데? 어제 내가 왜 도망쳤는지 정말 몰라?”만약 그가 아이를 없애려고 하지 않았다면 도망칠 이유도 없었다.임슬기의 말에 배정
임슬기는 침대에 누운 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오늘 하루는 너무나도 길었다. 아버지의 유서를 읽었고 어머니의 부검 보고서를 받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또다시 누명을 썼다.마치 모든 게 어제 일처럼 생생했고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손에 쥔 증거로 연다인을 법정에 세우기엔 턱없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순 없었다.그런데 이때 문득 진승윤이 떠오른 임슬기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휴대폰을 찾으려 방안을 한참 뒤지다가 겨우 침대와 벽 사이의 틈에서 폰을 발견하고는 조심스럽게
‘진성한?’임슬기는 얼떨떨했다.“그게 어떻게 너희 아버지랑 관련 있어?”진승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파티장에서 우리 아버지 널 따로 불러냈었지?”“응.”“그 사람, 절대 신사 같은 인물 아니야.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전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넌 그 사람 눈에 발목 잡는 존재였을 뿐이야.”진승윤의 눈빛 속에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이 스쳤다.“방해가 된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버려.”이미 직접 전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그 위선적인 인간을 진승윤은 끝내 믿을 수 없었다.임슬기도 진
육문주의 발걸음이 멈췄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날 밤, 연다인이 김현정이 마시던 술에 약을 탔어요.”말을 끝낸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배정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그건 그 여자가 직접 인정한 말이에요.”그렇게 말한 육문주는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갔다.여러 해를 함께한 사이였기에, 그는 이 일에 배정우가 직접 관련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임슬기가 그렇게까지 의심하고 원망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그래서 그 역시 배정우를 위해 변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배정우의
배정우는 권민에게 임종현을 병원에 데려다주라고 지시한 뒤 자리에 남았다.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있는 남자를 바라보던 그는 곁에 놓인 양동이를 들었다.차가운 물 한 통을 그대로 퍼부었다.남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들자마자 배정우의 핏기 어린 눈빛과 마주쳤다. 그 순간 겁에 질려 온몸을 떨며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뭔가 말하려 입을 벌렸지만, 끝내 단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배정우는 이 남자와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일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칼을 꺼내 남자의 목에 갖다 댔다.“말해. 누가 시킨 거야? 목적이
임종현은 그 남자가 당장이라도 끔찍한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아 목이 터질 듯한 절규가 가슴 깊은 데서부터 쏟아져 나왔다.“누나! 임슬기, 정신 차려. 제발 눈 좀 뜨라고!”도저히 버틸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임슬기는 마지막 남은 기운을 다해 오른손을 겨우 들어 임종현에게 신호를 보냈다.무언의 손짓이었다. 마치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리고 임슬기는 힘겹게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입 모양으로 말했다.‘기회 봐서 너라도 도망쳐’임종현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굳어버렸다.연다인이 했던 말. 임슬기는 임씨 가문의 죄인이라는
연다인은 임슬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걸 보곤 그녀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는 걸 단숨에 눈치챘다.“임슬기, 너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 배정우도 꼭 봤어야 하는데.”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을 외면했지만 눈물은 마치 연다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듯 흘러내렸다.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임슬기는 울지 않았다.하지만 배정우가 자신의 죽음을 원했다는 걸 들은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애써 괜찮은 척해봤지만 17년을 사랑한 그 남자가 자신의 원수에게 자길 죽여달라고 했다는 걸 들었을 땐 결국 무너져버리고 말았다.임슬기는 자
“혼자 와. 한 시간 줄게. 안 오면 지금 당장 임종현 한쪽 팔부터 박살 낸다.”속으론 수상하다고 느꼈지만 종현이를 걸고 도박을 할 순 없었다.임슬기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임종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슬기는 열 번도 넘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 너머에서는 계속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뿐이었다.이쯤 되자 임슬기는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결국 임슬기는 어쩔 수 없이 강재호를 불러 김현정 곁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강재호는 도착하자마자 급히 나가려는 임슬기를 덥석 붙잡았다.“임슬기 씨, 어디 가세요?”강재호가 보기에도 어딘가
“슬기 언니, 매일 내 곁에 있지 않아도 돼요. 주말엔 종현이 데리고 잠깐 놀러 다녀와요.”임슬기는 김현정을 흘낏 쳐다보며 말했다.“네가 자꾸 나 보내려고 하니까 더 마음이 쓰여. 종현이도 이제 중3이라 주말에도 공부하느라 바쁠 거야.”김현정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정말이예요. 슬기 언니, 나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짓 안 해요.”“밥 먹자, 반찬 다 식겠다.”그 말에 김현정은 고개를 숙이고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임슬기는 몰래 그녀를 흘낏 바라보곤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최근 들어 밤마다 피투성이가 된 김현정이 욕조에
아파트.연다인이 막 집에 들어서자마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들뜬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그런데 문 앞에 선 얼굴을 본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어버렸다.“배정우, 너 여기 왜 왔어?”“내 집인데, 내가 오면 안 돼?”연다인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네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정우는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네가 김현정한테 그런 짓을 한 거야?”“무슨 짓?”연다인은 잽싸게 그의 팔을 감싸며 새침하게 말했다.“배정우, 설마 너도 날 의심해? 날 믿는다고
배정우는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뜨며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지금 질투하는 거야?”...질투?임슬기는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예전 같았으면 분명 질투하고 속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차분했다.굳이 말하자면 남은 감정이라곤 혐오뿐이었다.“배정우 씨, 참 재밌네요. 다른 건 몰라도 세상에 두 다리 달린 남자는 널렸어요. 내가 연다인이 남자를 가졌다고 부러워할 이유라도 있어요?”배정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손을 뻗어 임슬기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