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약혼식 날 밤, 이졸드 라벨린의 세상은 무너진다. 블랙손 저택에 들어선 그녀는 위험한 세 명의 후계자와 금지된 욕망, 모든 것을 뒤흔들 충격적인 혈통의 비밀에 맞서야 한다.
View More제1장
"젠장… 당신들 몸이 그 통통한 여자보다 훨씬 더 뜨겁잖아."
스위트룸 문 너머에서 개빈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솔데 라벨린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손에 쥔 벨벳 상자가 미세하게 떨렸고, 가슴이 갑자기 조여왔다.
"아래층에서 약혼녀가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한 여자의 장난스러운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그냥 거기 두라고 해." 개빈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 지루한 여우 같은 년은 그냥 기다리라지."
"그나저나 개빈 씨… 정말 저런 과체중인 여자랑 결혼하려는 건 아니죠? 부끄럽지도 않아요?"
방 안에서 즉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솔데의 귀에 요란한 이명이 울렸다. 개빈, 그 이름. 5년 동안 그녀의 곁을 지키며 늘 "외모는 전부가 아니다"라고 그녀를 안심시켰던 남자였다.
이솔데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밀어 열었다. 방 안의 광경을 본 순간, 그녀의 마지막 이성의 끈이 완전히 끊어졌다. 사방에 옷가지가 널려 있었고, 침대 위에는 개빈이 상의를 탈의한 채 두 여자와 함께 있었다.
개빈의 눈이 크게 번뜩였다.
"이솔데—"
이솔데의 손에서 반지 상자가 미끄러졌다. 침대 위의 두 여자는 서둘러 이불을 끌어올렸고, 개빈은 당황하여 즉시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자기야, 일단 내 말부터 들어봐—"
"그렇게 부르지 마. 역겨우니까." 이솔데가 그를 가로막았다. 가슴이 압박감으로 짓눌려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의 시선이 개빈의 목에 남은 립스틱 자국에 닿았다.
침대 위의 여자 중 한 명이 코방귀를 뀌며 경멸 어린 표정으로 이솔데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덩치가 크네. 진짜 코끼리 같잖아!"
이솔데의 얼굴이 순간 굴욕감으로 화끈거렸다. 압도적인 수치심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둘 다 조용히 해!" 개빈이 좌절감에 휩싸여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다른 여자는 그저 비웃을 뿐이었다.
"뭐, 본인 잘못이죠. 자기 몸매 하나 관리할 줄 모르는 여자랑 어떤 남자가 기꺼이 같이 있겠어요? 개빈 씨 옆에 서 있으니까 너무 안 어울려요. 꼭 숫자 1이랑 0 같잖아요."
그 말들이 이솔데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10대 시절부터 외모에 대한 잔인한 말들을 들어왔지만, 약혼자의 정부에게서 듣는 말은 훨씬 더 파괴적인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솔데…" 개빈이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 "내가 설명할 수 있어."
"무슨 설명을?"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한 눈으로 이솔데가 나직하게 물었다. "나 같은 약혼녀를 둔 게 부끄러웠다고? 사실은 내가 역겨웠다고?"
"그런 게 아니야!"
"그럼 뭔데?!" 이솔데는 마침내 이성을 잃고 울부짖었다. "왜 하필 우리 약혼식 밤에 이런 추잡한 짓을 저지른 건데?!"
개빈은 침묵했다. 그의 턱이 단단히 굳어졌다. 그 침묵이야말로 이솔데가 받을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답변이었다.
이솔데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씁쓸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알아? 난 오늘 밤 이 드레스를 입으려고 아파서 쓰러질 때까지 3주 동안 밥을 굶었어. 그냥 네 옆에 서기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하지만 그래도 아무 소용 없었네요, 안 그래요? 노력한 보람이 없네." 침대 위의 여자가 빈정거렸다.
그날 밤 이솔데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부서져 내렸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뒤돌아서서 그 저주받은 방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도망치듯 달려 나갔다.
호텔 연회장은 이솔데가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들어섰을 때도 여전히 하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녀의 드레스는 구겨져 있었고, 화장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등장은 순식간에 객석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개빈의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머나, 이솔데. 무슨 일인 거니?"
이솔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옆문으로 연회장에 막 들어선 개빈에게 고정되었다. 그의 얼굴은 잿빛으로 질려 있었고,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는 듯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개빈은 자신의 입지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난 5년 동안 그는 오직 죄책감과 부채감 때문에 억지로 이솔데의 남자친구로 남아 있었다. 몇 년 전, 이솔데의 부모님은 개빈의 어머니를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그 목숨의 빚이 개빈을 보답이라는 굴레에 가두었고, 그를 남몰래 좌절하게 만들었던 도덕적 부담감은 결국 가장 추잡한 방식으로 터져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솔데는 그의 애원하는 눈빛을 외면했다.
그녀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메인 무대를 향해 걸어가 마이크를 잡았다.
"이 약혼은 취소되었습니다." 이솔데가 큰 소리로 선언했다.
연회장이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이솔데, 여기서 싸구려 드라마 찍지 마." 개빈이 상황을 수습하려 다급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읊조렸다.
"드라마?" 이솔데는 혐오스럽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불과 몇 분 전 호텔 방에서 여자 두 명이랑 바람을 피워놓고, 이제 와서 나보고 드라마를 찍는다고 하는 거야?"
하객들 사이에서 즉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개빈의 어머니는 너무 충격을 받아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고, 아버지는 가문의 명예가 진흙탕에 구르는 모습에 분노로 얼굴이 어둡게 굳어졌다.
"이솔데,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는 거냐?!" 개빈의 아버지가 위협적으로 다그쳤다.
"거짓말이에요! 이솔데가 다 오해한 거라고요!" 개빈은 가문의 사업 파트너들 앞에서 서둘러 자신을 변호했다.
"거짓말?" 이솔데가 한 걸음 더 다가서며 개빈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네 목이나 봐, 개빈. 그 여자들이 남긴 흔적이 사방에 널렸잖아. 정말 역겨워."
개빈은 얼어붙어 본능적으로 목을 만졌다. 그의 하얗게 질린 얼굴과 명백한 당황 기색은 연회장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부인할 수 없는 확증이 되었다.
짝!
아직 켜져 있던 마이크를 타고 날카로운 뺨 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이솔데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분노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개빈의 아버지의 손이었다.
"이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라고! 우리 비즈니스 파트너들 앞에서 가문의 명예를 다 날려 먹었구나!" 아버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포효했다.
이전에 연약한 척했던 개빈의 어머니는 지켜보는 수백 명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개빈의 가슴을 반복해서 내리치기 시작했다.
"개빈!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내가 널 이런 싸구려 인간으로 키운 줄 아니! 이제 내 체면은 어디 가서 세우란 말이야?!"
화려했던 약혼식 무대는 순식간에 한 가문의 몰락을 보여주는 공개 구경거리로 전락했다.
개빈은 오직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부모에 의해 대중 앞에서 자존심이 찢겨 나가는 모욕과 분노를 삭이며 턱을 단단히 짓씹을 뿐이었다.
말다툼과 비난이 계속해서 오갔지만, 이솔데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았다.
눈앞의 혼란이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그녀의 사랑은 이미 죽었고, 그 자리에는 허무한 빈자리만이 남았다.
이솔데는 가문의 막장 드라마에서 벗어나 무대를 내려가기 위해 발걸음을 뒤로 옮겼다.
그러나 무대 위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아래에 있던 하객들의 시선은 점차 그녀에게로 향했다. 앞줄에서 들려오는 잔인한 속삭임이 그녀의 귀에 또렷하게 꽂혔다.
"근데 솔직히 말해서… 개빈 씨가 왜 딴눈을 팔았는지 이해는 가네. 저렇게 잘생기고 능력 있는 남자가 이솔데처럼 뚱뚱하고 평범하게 생긴 여자랑 억지로 결혼해야 했다니? 둘이 너무 안 어울렸어."
"내 말이. 몸매 좀 봐. 개빈 씨가 왜 다른 여자를 찾았겠어."
그녀의 외모를 품평하는 잔인한 속삭임들이 사방에서 윙윙거리며 날아들었다.
이솔데의 가슴이 더욱 조여왔고, 새로 차오른 눈물이 시야를 흐렸다.
그 비난 어린 시선들을 피해 다급히 무대 계단을 내려가던 순간, 긴 드레스 자락이 구두 굽에 걸렸다.
그녀의 몸이 중심을 잃었다.
그리고 이솔데는 무대 계단 바로 아래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거칠게 넘어졌다.
주변의 몇몇 하객들은 마치 그녀가 자신들에게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본능적으로 뒤걸음질 쳤고, 다른 이들—특히 젊은 사교계 명사들—은 입을 가린 채 비웃으며 수군거렸다. 심지어 은밀하게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대는 이들도 있었다.
이솔데의 얼굴이 굴욕감으로 타올랐다.
무릎에서 느껴지는 통통한 통증은 수백 명의 사람들 앞에서 짓밟힌 존엄성의 상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누구도 그녀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개빈과 그의 부모는 무대 위에서 여전히 소리를 지르며 싸우느라 바빠 그녀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이솔데는 남은 마지막 힘과 자존심을 쥐어짜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찢어진 드레스 자락이나 헝클어진 머리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그녀는 자신을 서커스 구경거리처럼 바라보는 모든 시선을 뒤로하고 연회장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려 나갔다.
호텔 밖으로 나오자마자 밤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이솔데는 어두운 기둥 옆에 멈춰 섰다.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마침내 왈칵 터져 나오며 그녀의 어깨가 격렬하게 떨렸다.
그녀는 물집이 잡혀 욱신거리는 발의 통통한 통증을 무시한 채, 거칠게 하이힐을 벗어 던졌다.
흐느낌 속에서 가방 안의 휴대폰이 모르는 번호로 집요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솔데는 심호흡을 한 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쉰 소리가 났다.
"이솔데 라벨린 양이 맞으십니까?" 수화기 너머에서 중년 남성의 격식 있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맞아요. 누구시죠?"
"저는 고(故) 베를리아나 블랙스론 회장님의 개인 변호사, 레이먼드 헤일입니다."
이솔데는 미간을 찌푸렸다.
베를리아나 회장님은 남다른 베풂으로 유명한 노년의 여성 대재벌이었다. 이솔데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그 노부인은 이솔데에게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은 채 그녀의 모든 생활비와 대학 등록금을 남몰래 지원해 주었던 은인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레이먼드 변호사님?"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흐르고,
"베를리아나 회장님께서 한 시간 전 병원에서 타계하셨습니다."
오늘 밤 두 번째로 이솔데의 세상이 멈춰 서는 듯했다.
그녀를 진심으로 아껴주었던 유일한 사람을 잃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더욱 미어졌다.
"네…? 베를리아나 회장님이요…"
"이해관계자 중 한 분이신 라벨린 양에게 즉시 낭독되어야 하는 긴급하고 매우 중요한 유언장이 있습니다." 변호사가 말을 이었다. "저희 사무실에서 보낸 특수 차량이 곧 도착해 귀하를 블랙스론 가문의 본가로 직접 모실 예정입니다."
"유언장이요? 하지만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솔데가 혼란스러워하며 속삭였다.
레이먼드는 잠시 말을 멈춘 뒤, 마지막 문
장에 힘을 주어 말했다.
"도착하시면 모든 것이 상세히 설명될 겁니다, 이솔데 양. 왜냐하면 오늘 밤부터 귀하는 공식적으로 블랙스론 저택에서 거주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152장블랙쏜 저택 본관 서재의 두꺼운 벨벳 커튼 틈새로 아침 햇살이 게으르게 비쳐 들며, 자욱한 공기 중에 떠다니는 고운 먼지 입자들을 반사했다. 평소 절대적인 권력의 아우라를 내뿜던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 뒤에 루시엔이 곧으면서도 경직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억수같이 쏟아지던 빗속에서의 맹세를 지키고자 밤새 내린 과감한 결단—블랙쏜 그룹 대표이사직 사임서가 담긴 두꺼운 검은색 가죽 서류 봉투가 펼쳐져 있었다.정중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없이 서재 문이 컥 하고 열렸다. 에반더와 에즈리엘이 험악한 적의와 불신의 아우라를 뿜어내며 가쁜 숨을 내쉬며 동시에 걸어 들어왔다.에반더는 즉시 양 손바닥으로 책상을 쾅 소리 나게 짚고는, 분노로 타오르는 눈빛으로 가문의 수장을 매섭게 노려보았다."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루시엔?!" 에반더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미친 듯이 떨리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삼촌 앞에 놓인 서류 봉투를 지목했다. "대표이사직 사임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어?!"에즈리엘은 에반더의 옆에 서서 지팡이에 한 손을 얹은 채, 차가운 시선으로 루시엔을 뜯어보았다."우리한테 연극할 생각 마, 루시엔." 에즈리엘의 바리톤 목소리는 낮았지만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왔다. "블랙쏜 그룹의 최고 자리를 내놓겠다고?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결정이지? 차갑고 무자비하며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는 가문의 수장이, 납득할 만한 설명도 없이 갑자기 왕좌를 포기할 리가 없잖아!"루시엔은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원숙한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두 청년을 매 같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에는 평소 그를 지배하던 야망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깊은 피로와 허무함만이 가득했다."너희한테 연극 따위 할 생각 없다." 루시엔이 지극히 쉰 듯 무거운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검은색 가죽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어젯밤 절대적인 결정을 내렸다. 나는 대
제151장새벽녘 내린 비로 여전히 젖어 있는 도시의 도로를 검은색 세단의 엔진음이 가르고 지나갔다. 따뜻한 차 안은 가슴을 중하게 짓누르는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졸데는 보조석에 가만히 앉아, 빗방울로 번진 창밖의 아스팔트 도로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옷은 흠뻑 젖어 있었으며, 밧줄에 묶였던 손목의 찰과상이 찌릿찌릿한 통증을 유발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폭풍처럼 몰아치는 감정에 비하면 육체적인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비 내리는 곳에서 루시엔이 던진 마지막 말이 그녀의 귓가에 끝없이 맴돌았다.'대표 자리에서 물러나겠어... 널 너무나 사랑하니까.'그 말은 명치를 후려치는 저주처럼 느껴졌고, 낯설고 혼란스러운 통증을 남겼다. 그녀는 옆에서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루시엔을 슬쩍 흘깃거렸다. 원숙한 멋을 풍기는 남자는 겉으로는 매우 의연해 보였지만, 굳게 다문 턱과 운전대를 쥐어뜯듯 잡고 있는 손가락은 블랙쏜 가문의 수장이 가진 내면의 방어선이 얼마나 깨져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남은 여정 동안 두 사람 사이에 단 한마디의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마침내 고급 승용차는 블랙쏜 저택의 정문을 통과해 본관 로비 현관 바로 앞에 멈춰 섰다.밤새 자리를 지키던 경비원이 차 문을 열어주자마자, 루시엔이 서둘러 내려 이졸데 쪽의 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남자의 손이 닿기도 전에, 이졸데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스스로 차에서 내리며 어떠한 신체적 도움도 거부했다.저택 로비의 대리석 바닥을 밟는 이졸데의 발걸음 따라, 젖은 부츠 밑창이 희미한 마찰음을 냈다. 거실을 막 지나치려던 순간, 두 남자의 그림자가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향해 내달렸다.에반더와 에즈리엘이었다.두 청년은 밤을 꼴딱 지새운 참이었다. 초췌해진 얼굴과 피로로 충혈된 눈은, 지난날 오후 이졸데가 사라진 직후부터 시작된 극심한 패닉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흠뻑 젖은 채로 자신들 앞에 서 있는, 그토록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던 소녀를
제150장축축한 콘크리트 바닥을 두드리는 무거운 발소리가 느릿한 박자로 다가오며 이솔데의 관자놀이 쪽 혈관을 거세게 요동치게 만들었다. 머리 위 노란 전구가 위태롭게 껌벅거렸고, 이끼 낀 콘크리트 벽면 위로 그림자가 기괴하게 춤을 췄다. 방의 유일한 출입구인 허름한 나무문이 바깥에서 밀리며 삐걱거리는 커다란 소리를 냈다.이솔데는 숨을 참은 채 나무 의자 위에 기력 없이 늘어져 있었다. 누구든 들어오는 자의 경계심을 허물기 위한 연기였다. 먼지와 차가운 밤공기 냄새가 매캐하게 스며들었고, 그 뒤를 이어 어두컴컴한 방 안으로 어깨가 넓은 남자의 그림자가 걸어 들어왔다.아라벨라가 아니었다. 검은 가죽 재킷을 입은 험상맞은 남자가 한 손에 생수병을 든 채 다가왔다. 고용된 범죄자는 헐떡이며 기진맥진해 보이는 이솔데의 상태를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어이, 거품 물고 죽지 마라, 꼬맹아. 우리 두목님이 내일 아침에 너랑 재밌게 놀고 싶어 하시니까." 그 사내는 이솔데 바로 앞의 허름한 탁자 위에 생수병을 얹어 놓으며 걸걸한 목소리로 빈정거렸다.사내는 이솔데의 손을 묶고 있는 밧줄 상태를 확인하려는 듯 다가왔다. 남자의 방심이 최고조에 달하고 몸이 가장 가까운 거리까지 들어온 바로 그 순간, 이솔데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온몸을 찌르는 통증에도 불구하고 한데 모아둔 마지막 힘을 모아, 그녀는 묶인 두 다리를 들어 올려 남자의 무릎 관절을 향해 온 힘을 다해 찍어 눌렀다.쿵!"악!" 사내는 억눌린 비명을 지르며 슬개골에 가해진 강한 타격 탓에 균형을 잃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단 찰나의 순간도 낭비하지 않고 이솔데는 탈출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그녀는 피로 얼룩진 손목을 묶인 나무 의자 뒤편에 튀어나와 있던 녹슨 못 끝에 거칠게 비벼댔다. 살가죽이 찢어지고 화끈거리는 극심한 통증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나는 것.툭... 파르르!오래된 밧줄 섬유가 마침내 끊어졌다. 이솔데는 다리에 심한
제149장블랙쏜 저택 메인 서재에 걸린 고풍스러운 쾌종시계의 바늘이 새벽 2시를 향해 느릿느릿 돌아갔다. 초침 소리가 귀를 찢을 듯 울리며, 테니스장만큼이나 넓은 방 안을 덮친 숨 막히는 침묵을 깨뜨렸다. 유리창 너머로 내리던 옅은 보슬비는 이제 거센 소형 폭풍으로 변해 있었고, 요란한 바람 소리와 함께 유리창을 세차게 두들겨댔다.숯빛깔의 두꺼운 양모 양탄자 위에 루시엔 블랙쏜이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이 성숙한 남자는 실제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 보였다. 정장 재킷은 벗겨져 있었고, 상의 버튼이 풀린 하얀 셔츠는 흐트러져 있었으며 소매는 팔꿈치까지 말아 올려져 있었다. 그의 단단한 손가락은 이미 절반쯤 타들어 간 담배를 움켜쥐고 있었고, 담뱃재는 바닥으로 무심하게 떨어졌다.방 구석에서 이반더는 호흡을 가쁘고 불규칙하게 내쉬며 대리석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한편 아즈리엘은 장소파 위에 뻣뻣하게 앉아, 탁자 위에서 식어버린 지 오래인 찻잔을 차가운 눈빛으로 멍하니 바라보았다.여전히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사태 이후 동원했던 사설 정보망, 신뢰하는 심복들, 심지어 정치적 인맥까지 모조리 동원했음에도 얻어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솔데는 캠퍼스 지하 주차장을 나선 그 순간 공기 중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만약에... 만약에 그아이가 정말로 다시 도망친 거라면요?" 이반더의 목소리가 갑자기 침묵을 깨뜨렸다. 쉰 목소리에는 그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절박함과 떨림이 가득했다. 젊은이는 고개를 들어 루시엔과 아즈리엘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은 수면 부족과 참아낸 눈물로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두 분 다 어제 캠퍼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잖아요. 그아이는 위협받고, 압박당하고, 우리가 계속 구속하니까 우리를 지독하게 미워했어요... 우리가 절대로 다시 자신을 찾지 못하도록 일부러 흔적을 지워버린 걸 수도 있다고요!"그 가설을 듣는 순간, 루시엔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의 바리톤 목소리가 절대적인 부정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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