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후는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이 사건 진술은 무조건 해야 하는 거야. 오늘 안 한다 해도 내일에 해야 하는 거라 어쩔 수 없어.”온다연은 입술을 꽉 깨물었고 이마에는 작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그녀는 경찰서에 가서 이런 진술을 하는 것이 제일 두려웠다. 전에 경찰서에 가서 진술을 두 번 했었는데 한 번은 어머니의 죽음 때문이었고 다른 한 번은 주한의 죽음 때문이었다.온다연은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의 죽음을 모두 목격하였는데 하필 두 사람의 사인도 똑같았다. 안 그래도 현실을 감당하기 힘든 그녀는 경찰관의 핍박 하에 그들의 죽음을 반복적으로 진술해야 했었다.그녀는 그때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더군다나 상처를 다시 한번 들추어내어 꼭두각시처럼 가장 중요한 사람의 죽음을 진술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뼈에 사무치는 아픔을 그녀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또 진술을 작성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온다연은 기나긴 침묵에 빠졌다.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온다연의 곁을 한 발짝도 떠나지 않고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기도 하고 심지어 그녀를 재워보기도 했다.유강후는 원래 과묵한 사람이었고 냉철하고 감정 표현이 적은 사람이었다.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환경에서, 줄곧 다른 사람이 유강후에게 애원하고 그를 달래주었다. 유강후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사람들은 앞다투어 그의 눈앞에 가져다 바쳤다. 지금처럼 유강후가 인내심을 갖고 한 사람 곁을 지키는 모습은 그에게 있어서 난생처음이었다.또한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한 번이기도 했다.게다가, 유강후가 볼 때, 한 사람 곁을 지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비록 온다연은 진술이 그토록 싫었지만, 저녁이 되어서 전서후는 여전히 찾아왔다.경찰복을 입은 전서후는 동료 두 명을 데리고 왔다. 그들은 휴게실의 의자에 앉아 느리지만 엄숙한 말투로 진술을 땄다. 마치 맞은 쪽에 앉아 있는 여자애의 반응을 예상하고 미리 준비를 해온 듯했다.온다연은 거의 절반 동안은
“제가 동영상을 조금 봤는데 애가 참 안 됐더라고요. 일반적으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사람한테 괴롭힘을 당했다면 아마 진작에 목숨을 끊었을 거예요.”“그러니까요. 10여 년 동안 학폭을 어떻게 버텨왔는지 상상이 안 가요.”“근데 저 애 유씨 가문의 사람이 맞아요? 왜 저는 유씨 가문에 아가씨 한 분이 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죠?”“유씨 가문의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고 오히려 유강후 대표님의 애인 같아요.”“쯧쯧. 고등학생 같아 보이는 여자애가 유강후 대표님을 아저씨라고 부르던데 역시 돈 많은 사람들이 잘 놀아요...”“근데 그 사건들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 진짜 다시 수사할 수 있나요?”“최선을 다해서 수사해 봐야죠. 어쩌겠어요. 근데 유강후 대표님은 그냥 여자애를 달래려고 이 일을 맡겼을 것 같아요. 그 사건들 다 엄청 골칫거리인 데다가 너무 많은 사람이 연관되어 있어요. 게다가 저 여자애가 다니는 학교에 잘사는 집안 자녀들이 대부분이어서 분명 여러 사람한테 밉보일 거예요. 그래서 그냥 여자애를 달래 주려고 겉치레만 하는 것 같아요.”“그나저나 그 동영상 속의 가해자들 정말 사람도 아니던데요. 그게 어디 사람이 할 짓이에요!”“누가 내 딸을 그렇게 건드렸다면 그놈들을 바로 죽여버렸을 거예요!”...비록 두 사람은 아주 낮은 소리로 대화했지만 온다연은 그들의 대화를 한 글자도 빠지지 않고 다 들었다.그 끔찍한 기억들, 애써 지워버렸던 기억들,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개처럼 비천한 순간들, 알고 보니 유강후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온다연은 다른 사람이 자기 일을 모르길 바랐고 더욱이는 유강후가 모르길 바랐다. 그녀는 유강후 앞에서 이미 자신의 자세를 바닥까지 낮추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불쌍하기 그지없는 마지막 한 가닥의 자존심도 잃게 되었다.그녀는 복수하고 싶었었다. 그러나 자신의 과거를 다시 한번 사람들에게 펼쳐 보이는 이런 방법으로 복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온다연의 얼굴은 무서울 정
“나쁜 사람! 다 나쁜 사람이에요!”온다연은 울부짖었다. 어디서 힘이 생겨났는지 그녀는 유강후의 손을 뿌리치고 몸을 돌려 도망쳤다.그러나 도망친 지 몇 발짝 안 되어 다시 유강후에게 끌어당겨 그의 품속에 갇혔다. 그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다연아, 괜찮아. 이 사람들 나쁜 사람 아니야.”온다연은 이상할 정도로 흥분되어 있었다. 허공에서 손을 마구 흔들면서 유강후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이번에 유강후는 펜치처럼 그녀를 꼭 껴안고 있어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었다.분노가 확 솟구쳐 그녀는 울부짖었다.“아니에요! 다 나쁜 사람이에요! 아저씨도 똑같아요! 날 놓아줘요! 나쁜 사람들, 저를 그만 괴롭히세요! 벌받아야 할 사람을 처벌하지 않고 경찰복을 입고 이리저리 빈둥대기만 하는 나쁜 사람들, 나빠요!”유강후의 품을 벗어나지 못하자 그녀는 마음이 급해져 그의 손을 힘껏 물었다.물린 손목에서 곧 피가 흘러나왔다.그러나 유강후는 여전히 온다연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무서울 정도로 차가워졌고 가슴도 기복을 이루었는데 딱 봐도 아픔을 꾹 참고 있는 모습이었다.경찰관은 온다연이 폭주한 걸 보고, 나서서 도와주려고 했다. 그러나 유강후는 두 눈을 부릅뜨고 경찰관을 쳐다보며 말했다.“저리 가 있어요!”경찰관은 그저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 두 사람, 한 사람은 앞이 보이지 않지만, 필사적으로 도망치려고 하고, 한 사람은 꼭 끌어안은 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몸에는 마치 천만 개의 끈이 얼기설기 엉켜 있는 것 같았고 다른 사람이 감히 끼어들 수 없는 분위기였다.온다연은 피 맛을 느꼈지만,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오히려 증상이 더욱 심해졌다.그녀는 끊임없이 유강후에게 발길질했다. 그러나 두 손은 곧 유강후에게 잡혀 몸 뒤로 가져갔고 두 다리도 책상 밑에 깔리게 되었다.유강후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다연아, 겁먹지 마. 아저씨 여기 있잖아. 진정해.”유강후가 말을 안 하면 모를까, 이 말을 하자 온다연의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유리문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바깥쪽으로 튀어나와 있었는데 마침 달려오는 온다연을 향해 있었다.“다연아!”유강후는 눈빛이 세게 흔들렸다. 막을 겨를도 없이 그녀는 이미 유리문에 부딪히고 말았다.온다연은 훅 튕겨 나가 바닥에 내동댕이쳤다.유리문은 세게 튕기면서 다시 닫혔다. 펑 하고 큰 소리가 나더니 유리문에는 거미줄 같은 균열이 가득 생겨났다. 방금의 부딪힘이 얼마나 셌는지 보아낼 수 있었다.온다연은 부딪힘 때문에 온몸이 저려났다. 바닥에서 몇 초 동안 멍해 있다가 막 일어나려고 할 때 유강후는 그녀를 안아 들었다.유강후의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쌀쌀해졌다.“온다연, 너 뭐 하려는 거야?”목소리는 매우 엄숙했다.온다연은 발버둥 치면서 또 유강후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다.“놔요. 날 내버려두세요! 유강후, 당신도 날 상관하지 말아요! 당신도 그 사람들과 똑같아요!”...유강후는 온다연이 다시 도망치지 못하도록 그녀의 손목과 종아리를 꽉 잡고 그녀를 안고 다른 문으로 방을 나갔다.유강후는 바로 온다연을 병실로 데려갔다.온다연의 폭주 상태는 지속되었고 몸부림이 심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유강후의 곁에서 도망쳤다.하필 그녀는 앞이 보이지 않아 잠깐 사이에 또 온몸에 상처를 가득 입었다.유강후는 온다연이 방금 넘어져서 피 흘리는 무릎을 지켜보았다. 그의 눈빛이 어둡고 냉랭해지더니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화연아, 의사 불러. 진정제를 놓아줘야겠어.”온다연은 또 몸부림쳤다. 그녀는 많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싫어요. 안 맞을 거예요. 당신들이나 맞아요. 이 나쁜 사람들!”이렇게 말하면서 온다연은 또 유강후의 팔을 잡고 꽉 물었다.유강후 팔뚝의 옷은 이미 핏자국이 얼룩져 있었고 손가락은 세게 물려서 아직도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집사는 한 번 보더니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도련님의 손도 처치해야 합니다.”곧 의사가 왔고 온다연에게 강제로 진정제를 주사했다.온다연은 조금씩 힘이 풀렸고 눈동자도
유강후는 아무 표정 없이 온다연의 상처를 간단히 소독해 주고는 자신의 손가락을 보았다.그의 손가락은 뼈가 보일 정도로 세게 물어뜯겼다.집사는 드디어 표정에 작은 변화가 생기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의사 선생님을 불러오겠습니다. 봉합해야 할 것 같습니다.”유강후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고 말투도 매우 냉랭했다.“괜찮아. 흉터가 남게 내버려둘 거야.”집사는 입을 열어 뭐라고 말하려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참 지난 후 집사는 깊이 잠든 온다연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도련님께서 하령 아가씨의 모든 카드를 정지시켰더니 아가씨께서 계속 도련님을 만나겠다고 난리입니다. 도련님을 만나겠다고 요 며칠 호텔에도 여러 번 찾아가셨고 회사에도 여러 번 찾아가셨습니다. 방금 호텔 쪽에서 전화가 왔는데 아가씨께서 또 호텔에서 소란을 피웠다고 합니다.”유강후의 눈빛에는 매서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깊이 잠든 온다연의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지더니 한참 지나서야 손을 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안 그래도 차갑던 그의 눈빛은 더욱 냉랭하고 어두워졌고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우울해졌다.유강후의 곁을 오랫동안 따르던 집사는 자연스럽게 그의 뜻을 이해하고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내쫓을까요?”유경후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카드 정지를 풀어줘.”그는 지금 유하령을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 온다연은 안정을 취해야 하기에 두 사람을 마주치지 않게 하는 것이 좋다.집사는 멈칫하더니 곧바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알겠습니다.”두 사람은 모두 깊이 잠든 온다연이 눈초리를 가볍게 떨었고 손도 살며시 몸 밑의 침대보를 잡은 걸 보지 못했다. 집사가 또 말했다.“온다연 씨의 연수 절차도 다 끝마쳤습니다. 그쪽에서 졸업증도 이미 보내왔습니다.”유강후의 말투는 조금 쌀쌀했다.“내 금고에 넣어둬.”유강후는 지금 온다연을 계속 공부하게 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기에 공부 따위는 뒤로 미뤄졌
위 사람한테서 압박감이 전해졌다. 온다연은 그 기운에 눌려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주먹을 꽉 거머쥐었다.그녀는 눈을 절반 드리우고 천천히 말했다.“구월이 싫어졌어요. 다른 곳에 보내주세요.”말소리는 여전히 작았지만, 굳센 의지가 보였다.유강후의 몸에서 무서운 기운이 새어 나왔고 눈빛은 놀라울 정도로 냉랭하고 어두워졌다.그는 꼼짝하지 않고 서서 그녀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말했다.“이유가 뭔데!”이렇게 강한 압박감을 받으면서 긴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손바닥에서 이미 땀이 나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입을 열었다.“구월이 저랑 같아지는 게 싫어요.”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위험한 기운이 공기 속에서 퍼졌다.“너랑 같아져?”이 말은 어찌나 차가운지 매 글자에 서리가 한층 내려진 것 같았고 듣는 사람을 몸서리치게 했다.그러나 온다연은 느끼지 못한 듯 나지막하면서도 아주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케이지에 갇혀 주인이 기분 좋을 때는 놀아주고 기분 나쁠 때는 내다 버리는... 어느 날 주인과 주인의 가족에게 구타당해 다리가 부러질지도 모르고요...”“온다연!”유강후는 성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가슴은 심하게 출렁이었고 손등의 핏줄도 어렴풋이 보였다.그는 이번 생에 이렇게 인내심을 갖고 누군가를 달랜 적도, 이렇게 자세를 낮춰가면서 누군가를 방임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의 모든 노력을 전혀 고마워하지 않을 줄이야.유강후는 손을 뻗어 온다연의 턱을 잡고 그녀의 고개를 쳐들게 하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내가 널 너무 버릇 들였구나!”온다연은 초점 잃은 눈으로 유강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가슴이 살짝 내려앉아 중얼거렸다.“그래서 유 대표님은 또 저의 목숨을 쥐락펴락하실 건가요? 이번에는 저를 가둬놓을 건가요? 아니면 죽여버릴 건가요?”유강후는 화가 잔뜩 나서 가슴이 심하게 출렁이었고 손의 핏대도 선명해졌다.그는 여전히 애써 참았다!만약 다른 사람이 유강후를 이렇게 조롱하고 거역했다면, 그는
이 고양이는 유강후가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서 얻어온 것인데. 며칠 전에 다리가 부러져서 하마터면 죽을 뻔한 걸 외국에서 제일 유명한 수의사를 불러들여 수술을 해주었다. 고양이를 지금까지 애지중지 키워온 것은 단지 그녀가 고양이를 많이 보고 좀 더 기뻐할 수 있기 위해서였다.이제 그녀는 감히 고양이가 싫어졌다는 말을 하고 심지어 그 고양이가 자기처럼 자유롭지 못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까지 했다.‘날 따르는 게 그렇게 괴로울까?’유강후는 더 힘을 주어 온다연의 턱을 꼬집으며 말했다.“다연아, 너 참 좋은 줄 모르네!”그는 실눈을 뜨고 말했다.“이 고양이가 싫어졌다고? 그래. 바로 다른 곳에 보내 버릴게! 쓰레기장으로 보내면 이렇게 작은 고양이는 바로 죽겠지.”그의 말투는 아주 잔인했다.“그런 곳은 들개와 들고양이가 얼마나 많겠어. 근데 이렇게 젖 먹던 새끼 고양이가 버려진다? 몇 분 안 되어서 갈기갈기 찢기고 말 거야.”유강후가 한 글자 말할 때마다 온다연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유강후는 온다연의 이런 미세한 동작을 다 지켜보고는 냉혹하고 잔인한 말투로 말했다.“근데 그건 다 네가 원해서 그런 거야. 다연이 네가 원해서!”온다연은 몸을 떨었고 가슴도 기복을 이루었다.그러나 그녀는 말없이 입술을 꼭 깨물었고 손은 침대보를 세게 움켜쥐었다.유강후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을 한 번 훑어보더니 마침내 그녀의 굳센 입술에 내려앉았고 냉정하게 말했다.“화연아, 고양이를 보내 버려. 당장!”집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서서 방금 들여온 고양이를 다시 케이지 속에 넣었다.아마 충분한 어루만짐을 받지 못해서인지 고양이는 계속 울어댔다. 그 소리는 귀엽고 말랑하여 온다연의 마음을 흔들었다.그러나 그녀는 말하지 않았다. 손힘은 침대보를 거의 찢을 것 같았다.유강후는 꼼짝하지 않고 그녀가 끝까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았다.고양이는 밖으로 이송되었다. 고양이 울음소리가 점점 들리지 않았지만 온다연은 여전히 입을 열고 용서를 빌지 않았
유강후는 점점 멀어져가는 차의 후미등을 노려보면서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회사로 가줘!”이권은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더니 애틋하게 말했다.“도련님, 그래도 꼬박 이틀 동안 밤을 새우셨는데 회사도 중요하지만, 휴식하는 것도 주의하셔야 합니다. 온다연 씨도 돌아가셨는데 도련님도 돌아가서 좀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말이 너무 많다!”유강후는 조금 엄숙한 말투로 말했다.이권은 앞차의 후미등이 빨간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그는 비록 유강후와 온다연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이 이틀 동안 유강후는 한 시각도 좋은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고 업무 강도로 놀라울 정도로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회사 총무팀의 분위기는 한시도 늦춰지지 않았고 거의 모든 사람은 다 전전긍긍하며 유강후와 함께 이틀 동안 꼬박 밤을 지새웠다. 심지어 그 누구도 감히 퇴근하지 못했다.근데 지금 또다시 돌아가서 야근해야 한다니,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도련님, 저는 비록 도련님과 온다연 아가씨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지만, 온다연 씨께서 겪은 일들은 정말 일반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삶을 포기했을 겁니다. 그리고 온다연 씨 심리도 좀 문제가 있어서 말과 행동이 어떨 때 보면 일반인과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다연 씨를 대할 때 이해심과 인내심을 조금 더 가져주셔야 합니다.”말을 마친 후 이권은 핸들을 잡고 입을 꾹 다물었다.차 안에는 다시금 침묵이 흘렀고 분위기는 조금 다운되어 있었다.비록 이권은 유강후의 곁에서 몇 년 동안 지냈지만, 여전히 경원시 황태자 유강후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종래로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며 심지어 웃는 얼굴을 한 적도 별로 없다. 침묵할 때는 엄숙하고 쓸쓸한 느낌이 있었으며, 지금의 경우에 비록 차 안은 히터가 충분했지만, 이권은 어딘가 등 뒤에서 쌀쌀한 한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이렇게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