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7년 전, 아무 말도 없이 헤어진 첫사랑과 다시 만났다. 그런데 그는 이제 대기업 대표 강태윤이었고, 몰락한 상속녀 윤서린은 그의 집에 파견된 하우스키퍼였다. 태윤은 서린에게 단 하나의 조건을 건다. “내 전속이 돼.” 끝난 줄 알았던 첫사랑, 다시 시작된 계약. 그가 7년 동안 놓지 못한 건 사랑일까, 집착일까.
View More거센 비가 시야를 하얗게 지워 버렸다.
온몸이 젖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실크 원피스가 피부에 달라붙어 체온을 빼앗고, 신발 안으로 빗물이 흘러들었다. 손끝이 굳어 갔다. 떨림이 멎지 않는 건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눈앞의 남자가 보내는 시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 말했을 텐데.” 빗소리에 묻힐 듯 낮은 목소리. 우산도 쓰지 않은 강태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때는 미칠 만큼 좋아했고,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가슴 한가운데가 거칠게 짓눌렸다. 매달리듯 뻗으려던 손은 허공에서 멈췄다. 비를 잔뜩 먹어 축 늘어진 그의 싸구려 티셔츠 자락조차 잡을 수 없었다. 젖은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눈에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 온 정 같은 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부감뿐이었다. “태윤아…… 미안해. 나…….” “이름 부르지 마.” 날이 선 목소리가 잘라 냈다.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잠시 그의 얼굴을 창백하게 밝혔다. 햇볕처럼 따뜻했던 눈빛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모든 걸 태우고도 남을 만큼 차가운 분노가 있었다. “너 같은 여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혀. ……꺼져.” 낡고 녹슨 철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닫혔다. 철컥. 차가운 금속음이 울리며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다. 스물두 번째 생일 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방식으로, 나 윤서린의 첫사랑은 죽었다.◇
“윤서린 씨. 듣고 있어요?”
짜증 섞인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사물함 거울과 가사서비스 업체의 낡은 휴게실 벽이 눈앞에 들어왔다. “아, 죄송해요…….” “정신 차려요. 오늘 현장은 갑자기 빠진 사람 대신 들어가는 거예요. 이용자가 굉장히 깔끔한 분이라니까.” 코디네이터 김미정 씨가 코웃음 치듯 업무 지시서를 내밀었다. 거울 속에는 더 이상 상류층 집안의 딸이 아니었다. 여러 번 빨아 색이 빠진 셔츠와 검은 바지, 실용성밖에 없는 베이지색 앞치마. 화장기 없는 얼굴은 창백했고 눈 밑에는 피로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주소는 여기. 특히 사적인 공간에는 절대 들어가면 안 돼요. 괜한 문제 생기면 곤란하니까.” 종이에 적힌 주소를 확인한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성북동. 예전에 살았던 동네의 한복판, 그것도 우리 집이 있던 곳 바로 옆이었다. “왜 그래요?” 미정 씨가 눈치를 살피는 목소리로 묻자 얼른 앞치마 끈을 세게 쥐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심장이 불길하게 뛰었다. 7년이나 지났어. 그 사람도 이제는 거기 살지 않을 거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윤성홀딩스가 무너지고, 어머니까지 중병으로 쓰러진 뒤 모든 것을 잃은 지도 7년. 살아남으려면 자존심을 버리고 손에 먼지를 묻히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까다로운 이용자라도 오늘 벌 돈과 내일 이어질 어머니의 치료비가 더 중요했다. “그냥 없는 사람처럼 일하고, 먼지 하나 안 남기고 나오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뒤 청소도구가 가득 든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멨다. 좁은 출입문을 나서자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쳤다.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성북동 언덕 위에 내렸을 때는 공기마저 달라진 듯했다. 잘 손질된 가로수, 쓰레기 하나 없는 도로, 높은 담 너머로 보이는 정원수. 사람이 살아가는 냄새가 희미한 동네였다. 대신 조용하고 압도적인 부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가방 끈을 움켜쥐고 예전에 걷던 언덕길을 올랐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어린 시절의 장면이 떠올랐다. 하얀 개를 데리고 산책하던 보도, 등하교 차량을 기다리던 회차로. 그 끝에는 예전 우리 집, 윤성가 저택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옆. 가난했던 태윤이 살던 낡은 다세대주택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주변을 압도하는 현대식 저택이 솟아 있었다. “……여기라고?” 걸음을 멈추고 올려다봤다. 노출 콘크리트와 하늘을 그대로 비추는 거대한 유리창. 높게 둘러친 담은 안을 완전히 가리고 있어 요새처럼 보였다. 예전, 바로 옆에 살던 가난한 소년을 떠올릴 뻔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결과가 화면에 뜬 순간, 숨을 참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숨을 내쉬었다. 강태윤 사내이사 해임안은 부결됐다. 잠시 뒤 여기저기서 박수가 시작됐다. 나는 휠체어에 앉은 채 그 소리를 들었다. 이겼다. 그 말을 마음속으로 떠올리기도 전에 온몸의 힘이 먼저 빠졌다. 구로구 원룸에서 관리비 고지서를 펼쳐 놓고 한참 계산하던 밤. 태윤이 아무 말 없이 편의점 도시락의 고기 반찬을 내 쪽으로 밀어 주던 모습. 예전에 함께 일했던 가사관리사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작은 협력업체들을 하나씩 찾아가던 날들. 그 모든 장면이 뒤늦게 가슴으로 돌아왔다.“서린.” 태윤이 내 앞에 섰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도 잊은 듯 무릎을 굽혀 내 손을 감쌌다.“몸은 괜찮아?” 처음 한 말이 그것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이제 와서?”“지금이니까.” 그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고마워.”“나 혼자 한 거 아니야.”“알아.” 태윤은 뒤쪽에 앉은 협력사 대표들과 베르트랑 측 인사, 법률자문단을 바라봤다.“그래도 네가 없었으면, 나는 중간에 다 부숴 버렸을지도 몰라.”“그러면 곤란하지.”“그래서 이제는 안 그러려고.” 놀랄 만큼 순순한 대답이었다. 태윤은 다시 일어나 마이크 앞으로 갔다.“오늘 의결 결과에 감사드립니다.” 회의장이 조용해졌다.“현강은 아직 정상화 과정에 있습니다. 자금 문제도, 내부조사도, 오늘 하
박수가 멈추자 한명 측 주주 대표가 마이크를 잡았다.“외부 조사자료의 진위와 법적 의미는 별도 확인이 필요합니다.”“동의합니다.” 태윤이 내 휠체어 옆에서 일어나 말했다.“그리고 오늘 안건도 그 조사 결과를 미리 단정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는 앞쪽 화면으로 돌아갔다.“오늘 판단해야 할 건 제 이사직 유지가 현강에 이익인지, 그리고 회사가 계속 운영될 수 있는지입니다.” 베르트랑 측 문서가 화면에 표시됐다.“단기 브리지 한도는 최종 계약조건 확인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중장기 지원은 텀시트 단계이고 추가 실사가 남아 있습니다.” 태윤은 일부러 ‘해결됐다’고 말하지 않았다.“하지만 적어도 내일 바로 유동성이 끊겨 회사가 멈춘다는 전제는 달라졌습니다.” 이어 협력사 목록이 나타났다. 거래를 유지하겠다고 회신한 회사들. 일부 발주에 선급금 조건을 검토하는 곳. 보유 지분은 작지만 직접 의결권을 행사하러 온 주주들. 태윤은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현강이 흔들리는 걸 알면서도 거래를 이어 가겠다고 해 주신 데 감사드립니다.” 한명 측에서 누군가 낮게 말했다.“소액 거래 몇 건으로 전체 유동성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압니다.” 태윤이 고개를 들었다.“액수만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회사가 어려울 때도 거래를 계속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그 신뢰를 숫자보다 작게 취급하지 않겠습니다.” 회의장은 다시
한명 측 주주 대표가 즉시 반박했다.“아직 계약도 체결되지 않은 텀시트입니다. 외국계 파트너의 지원 의사만으로 현강의 리스크가 사라진 건 아닙니다.”“맞습니다.” 베르트랑 이사는 담담했다.“그래서 승인 조건과 추가 절차를 명확히 말씀드린 겁니다. 제가 오늘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저희는 현강에서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회의장의 전제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당장 자금이 끊겨 회사가 멈춘다’는 단순한 그림으로 해임안을 밀어붙이기 어려워졌다. 그때 뒤쪽에서 휠체어 바퀴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났다. 태윤이 고개를 들었다.“……서린아.” 나는 검은 원피스를 입고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는 두꺼운 파일이 놓여 있었다. 최만호가 휠체어를 밀고, 정미숙과 세명의료원 간호사가 옆에 있었다. 태윤이 자리에서 내려왔다.“왔네.” 놀람과 걱정이 동시에 섞인 얼굴이었다.“메시지 봤어?”“회의 들어가기 직전에. 못 막을 거 알아서 박 실장한테 동선부터 확인했어.” 나는 작게 웃었다.“많이 배웠네.” 태윤은 간호사를 봤다.“조건이 어떻게 됩니까?”“90분 이내, 휠체어 유지, 증상 생기면 즉시 이동입니다.” 그제야 태윤이 숨을 내쉬었다. 내가 먼저 그의 손을 잡았다.“무리하러 온 거 아니야. 자료만 전달하고 앉아 있을게.”“알아.” 한명 측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해임 여부를 판단하시는 건 주주 여러분의 권리입니다.” 태윤의 목소리는 낮고 또렷했다.“저도 그 판단을 피할 생각 없습니다.” 그는 회의장을 천천히 둘러봤다.“다만 현강의 가치가 오늘 주가와 한명금융의 리스크 재검토 한 줄로만 결정되지는 않는다는 점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화면에 현강 계열사의 주요 기술과 수주잔고, 고용 현황이 표시됐다.“현강이 보유한 회사들 중 상당수는 처음 인수할 때부터 정상 기업이 아니었습니다. 자금이 말랐고, 기술은 있었지만 버틸 시간이 없었습니다.” 태윤은 다음 자료를 넘겼다.“그때 저는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공장을 닫지 않았습니다. 물론 모든 판단이 성공한 것도 아니고, 그 과정에서 반발도 샀습니다.” 한명 측에서 냉소적인 목소리가 나왔다.“미담을 들으려고 모인 자리가 아닙니다.”“맞습니다.” 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숫자를 같이 보여 드리는 겁니다.” 인수 뒤 매출 회복률, 핵심 고객 유지율, 기술인력 잔존율. 무리하게 포장할 수 없는 지표들이 화면에 나왔다.“한명금융과 계약상 분쟁이 있다면 법과 계약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금융사가 리스크를 줄이는 판단도 존중합니다.” 그의 시선이 한명 측 주주 대표에게 향했다.“하지만 그 판단이 시장 전체의 공포로 확대됐다는 이유만으로, 살아 있는 사업까지 급하게 잘라내는 선택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때 한 임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래도 현금이 없으면 사업은 멈춥니다.”“맞습니다.” 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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