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한 상속녀, 7년 만에 첫사랑의 전속 하우스키퍼가 되었다

몰락한 상속녀, 7년 만에 첫사랑의 전속 하우스키퍼가 되었다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8-05
Oleh:  花柳響Baru saja diperbarui
Bahasa: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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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아무 말도 없이 헤어진 첫사랑과 다시 만났다. 그런데 그는 이제 대기업 대표 강태윤이었고, 몰락한 상속녀 윤서린은 그의 집에 파견된 하우스키퍼였다. 태윤은 서린에게 단 하나의 조건을 건다. “내 전속이 돼.” 끝난 줄 알았던 첫사랑, 다시 시작된 계약. 그가 7년 동안 놓지 못한 건 사랑일까, 집착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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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 1

제1화 비에 묻힌 첫사랑

 거센 비가 시야를 하얗게 지워 버렸다.

 온몸이 젖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실크 원피스가 피부에 달라붙어 체온을 빼앗고, 신발 안으로 빗물이 흘러들었다. 손끝이 굳어 갔다. 떨림이 멎지 않는 건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눈앞의 남자가 보내는 시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 말했을 텐데.”

 빗소리에 묻힐 듯 낮은 목소리.

 우산도 쓰지 않은 강태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때는 미칠 만큼 좋아했고,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가슴 한가운데가 거칠게 짓눌렸다.

 매달리듯 뻗으려던 손은 허공에서 멈췄다. 비를 잔뜩 먹어 축 늘어진 그의 싸구려 티셔츠 자락조차 잡을 수 없었다.

 젖은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눈에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 온 정 같은 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부감뿐이었다.

“태윤아…… 미안해. 나…….”

“이름 부르지 마.”

 날이 선 목소리가 잘라 냈다.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잠시 그의 얼굴을 창백하게 밝혔다.

 햇볕처럼 따뜻했던 눈빛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모든 걸 태우고도 남을 만큼 차가운 분노가 있었다.

“너 같은 여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혀. ……꺼져.”

 낡고 녹슨 철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닫혔다.

 철컥. 차가운 금속음이 울리며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다.

 스물두 번째 생일 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방식으로, 나 윤서린의 첫사랑은 죽었다.

“윤서린 씨. 듣고 있어요?”

 짜증 섞인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사물함 거울과 가사서비스 업체의 낡은 휴게실 벽이 눈앞에 들어왔다.

“아, 죄송해요…….”

“정신 차려요. 오늘 현장은 갑자기 빠진 사람 대신 들어가는 거예요. 이용자가 굉장히 깔끔한 분이라니까.”

 코디네이터 김미정 씨가 코웃음 치듯 업무 지시서를 내밀었다.

 거울 속에는 더 이상 상류층 집안의 딸이 아니었다. 여러 번 빨아 색이 빠진 셔츠와 검은 바지, 실용성밖에 없는 베이지색 앞치마. 화장기 없는 얼굴은 창백했고 눈 밑에는 피로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주소는 여기. 특히 사적인 공간에는 절대 들어가면 안 돼요. 괜한 문제 생기면 곤란하니까.”

 종이에 적힌 주소를 확인한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성북동. 예전에 살았던 동네의 한복판, 그것도 우리 집이 있던 곳 바로 옆이었다.

“왜 그래요?”

 미정 씨가 눈치를 살피는 목소리로 묻자 얼른 앞치마 끈을 세게 쥐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심장이 불길하게 뛰었다.

 7년이나 지났어. 그 사람도 이제는 거기 살지 않을 거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윤성홀딩스가 무너지고, 어머니까지 중병으로 쓰러진 뒤 모든 것을 잃은 지도 7년. 살아남으려면 자존심을 버리고 손에 먼지를 묻히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까다로운 이용자라도 오늘 벌 돈과 내일 이어질 어머니의 치료비가 더 중요했다.

“그냥 없는 사람처럼 일하고, 먼지 하나 안 남기고 나오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뒤 청소도구가 가득 든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멨다.

 좁은 출입문을 나서자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쳤다.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성북동 언덕 위에 내렸을 때는 공기마저 달라진 듯했다. 잘 손질된 가로수, 쓰레기 하나 없는 도로, 높은 담 너머로 보이는 정원수.

 사람이 살아가는 냄새가 희미한 동네였다. 대신 조용하고 압도적인 부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가방 끈을 움켜쥐고 예전에 걷던 언덕길을 올랐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어린 시절의 장면이 떠올랐다. 하얀 개를 데리고 산책하던 보도, 등하교 차량을 기다리던 회차로. 그 끝에는 예전 우리 집, 윤성가 저택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옆.

 가난했던 태윤이 살던 낡은 다세대주택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주변을 압도하는 현대식 저택이 솟아 있었다.

“……여기라고?”

 걸음을 멈추고 올려다봤다.

 노출 콘크리트와 하늘을 그대로 비추는 거대한 유리창. 높게 둘러친 담은 안을 완전히 가리고 있어 요새처럼 보였다.

 예전, 바로 옆에 살던 가난한 소년을 떠올릴 뻔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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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비에 묻힌 첫사랑
 거센 비가 시야를 하얗게 지워 버렸다. 온몸이 젖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실크 원피스가 피부에 달라붙어 체온을 빼앗고, 신발 안으로 빗물이 흘러들었다. 손끝이 굳어 갔다. 떨림이 멎지 않는 건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눈앞의 남자가 보내는 시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분명 말했을 텐데.” 빗소리에 묻힐 듯 낮은 목소리. 우산도 쓰지 않은 강태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때는 미칠 만큼 좋아했고,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가슴 한가운데가 거칠게 짓눌렸다. 매달리듯 뻗으려던 손은 허공에서 멈췄다. 비를 잔뜩 먹어 축 늘어진 그의 싸구려 티셔츠 자락조차 잡을 수 없었다. 젖은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눈에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 온 정 같은 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부감뿐이었다.“태윤아…… 미안해. 나…….”“이름 부르지 마.” 날이 선 목소리가 잘라 냈다.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잠시 그의 얼굴을 창백하게 밝혔다. 햇볕처럼 따뜻했던 눈빛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모든 걸 태우고도 남을 만큼 차가운 분노가 있었다.“너 같은 여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혀. ……꺼져.” 낡고 녹슨 철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닫혔다. 철컥. 차가운 금속음이 울리며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다. 스물두 번째 생일 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방식으로, 나 윤서린의 첫사랑은 죽었다.◇“윤서린 씨. 듣고 있어요?” 짜증 섞인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사물함 거울과 가사서비스 업체의 낡은 휴게실 벽이 눈앞에 들어왔다.“아, 죄송해요…….”“정신 차려요. 오늘 현장은 갑자기 빠진 사람 대신 들어가는 거예요. 이용자가 굉장히 깔끔한 분이라니까.” 코디네이터 김미정 씨가 코웃음 치듯 업무 지시서를 내밀었다. 거울 속에는 더 이상 상류층 집안의 딸이 아니었다. 여러 번 빨아 색이 빠진 셔츠와 검은 바지, 실용성밖에 없는 베이지색 앞치마. 화장기 없는 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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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7년 만의 집
 상관없다. 과거에 젖어 있을 시간은 1초도 없었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 출입구 인터폰을 눌렀다.『……네.』 스피커 너머에서 낮게 가라앉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순간 뛰었지만 보안 담당자의 음성이겠거니 생각했다.“오늘 청소 업무로 방문한 윤서린입니다.”『……들어와요. 문 열어 뒀으니까.』 짧은 대답과 함께 통화가 끊겼다. 동시에 묵직한 잠금 해제음이 울렸다. 손바닥의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고 무거운 문을 밀었다. 서늘한 공기가 피부를 스쳤다. 미술관처럼 고요한 복도. 대리석 바닥에서 값싼 운동화 밑창이 끽, 하고 유난히 큰 소리를 냈다. 숨을 죽이고 안내받은 거실 문을 여는 순간 발이 멈췄다. 고급 가죽 냄새와 진하게 볶은 커피 향. 그 사이로 코끝을 스치는, 차가운 민트처럼 깨끗한 향기. 기억 속 깊은 곳이 아려 올 만큼 익숙했다. 방 한가운데에는 묵직한 소파가 놓여 있었고, 벽면에는 원서와 현대미술 작품이 정돈돼 있었다. 생활감 없이 날카로운 공간인데 이상하리만치 낯익었다. 소름 돋은 팔을 문지른 뒤 가방을 내려놓았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먼저 먼지를 털면 된다. 스스로를 다잡으며 먼지털이를 집어 드는 순간이었다. 사이드보드 위에 사진 액자가 하나 엎어져 있었다. 청소하려고 들어 올렸다가 별생각 없이 뒤집은 순간, 시간이 멈췄다. 달칵. 손에서 먼지털이가 떨어져 마른 소리를 냈다. 손끝이 떨려 액자를 제대로 받치기조차 힘들었다. 사진 속 남자는 내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조금 더 성숙해져 있었다. 강태윤. 조금 길어진 검은 머리, 사람을 꿰뚫는 듯한 눈, 못마땅한 듯 굳은 입술. 뒤로는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말도 안 돼…….” 목에서 쉰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얼굴의 피가 한꺼번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여기가 강태윤의 집이라고? 그렇게 가난했던 사람이, 이런 저택에 산다고?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는 순간 7년 전 기억이 거센 물살처럼 밀려왔다. 내가 그에게 했던 짓. 어릴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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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도망쳐야 하는 이유
“싫어……! 나 버리지 마. 내가 잘못했어, 사과할게. 그래도 그 사람은 너랑 안 어울려. 나를 봐. 나랑 있으면 아버지께 부탁해서 학비도, 취업도, 뭐든 다 해결해 줄 수 있잖아!” 최악의 말이었다. 자존심만 높은 집안 딸이 사랑을 돈으로 붙들어 두려 내뱉은 비겁한 소리. 태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말없이 내 팔을 떼어 내려 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뒤에도 학비와 생활비를 벌려고 육체노동까지 하던 사람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밀려나는 게 두려워 까치발을 들고 그의 입술을 막았다.“……!” 입안에 옅은 쇠 맛이 났다. 굳어 버린 태윤을 붙잡고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좋아해…… 태윤아, 진짜 좋아해. 그냥 나를 네 걸로 만들어. 그러면 나도 이제 너한테서 못 도망가잖아.” 남자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떨리는 손으로 그의 벨트에 손을 댔다. 딸깍, 버클이 풀리는 소리가 좁은 현관에 크게 울렸다. 그 직후 시야가 흔들렸다. 허리를 감싼 팔에 끌려가듯 당겨졌고, 다음 순간 등 뒤로 벽이 닿았다. 빠져나갈 곳이 없는 거리에서 태윤의 표정만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눈앞에는 이성을 놓칠 것처럼 분노한 남자가 있었다.“……장난하지 마.” 바닥을 긁는 듯 낮은 목소리와 함께 턱이 붙들렸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지만 절박하게 억누르는 그 손길만으로도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 가까이서 마주친 눈에는 경멸과 분노, 그리고 그 둘을 억지로 눌러 삼키는 듯한 어두운 열기가 뒤엉켜 있었다.“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 대체 나를 얼마나 모욕해야 속이 시원하겠어.”“괜찮아. 나, 네 것이 되고 싶어.” 도발하듯 올려다보자 그의 숨이 더 거칠어졌다. 뜨거운 숨결이 얼굴에 닿았다. 다음 순간 큰 손이 젖은 원피스 위로 거칠게 움켜쥐었다.“아……!” 다정함은 없었다. 옷 사이로 파고든 손가락은 내 손과 전혀 달랐다. 매일 일을 하며 생긴 상처로 거칠고 단단한 손이었다. 그 까슬한 피부가 연한 살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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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전속 지명
 상상만 해도 무릎에 힘이 빠졌다. 지금의 태윤은 낡은 원룸에서 살던 가난한 복학생이 아니다. 내 삶 같은 건 손가락 하나로 망가뜨릴 수 있는 위치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엄마.” 오늘 도망치면 다음 치료비를 감당할 길이 없다. 잘난 집 딸의 자존심 따위는 진작 진흙탕에 버렸다고 생각했다.“……해야 해.” 입술을 깨물고 먼지털이를 다시 움켜쥐었다. 나는 윤서린이 아니다. 그저 배정된 하우스키퍼 한 명, 업체 시스템 속 직원일 뿐이다. 그 뒤로 이어진 시간은 고문에 가까웠다. 넓은 거실 바닥을 닦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의 흔적을 찾았다. 소파 등받이에 떨어진 짧은 검은 머리카락. 집어 든 손끝이 데인 것처럼 뜨거워졌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생수병, 사이드테이블에 펼쳐진 채 놓인 원서. 그가 여기 앉고, 숨 쉬고, 이 풍경을 바라본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런데도 몸 안쪽이 자꾸만 술렁거렸다. 한심해. 그렇게 잔인하게 끝났는데도. 도망치듯 손을 움직였다. 주방, 게스트룸, 복도. 다행히 안방과 서재는 잠겨 있었다. 그 문을 열어 그의 냄새가 밴 침구라도 봤다면 정말 이상해졌을지도 모른다. 업무 종료 5분 전. 지문 하나,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고 마무리했다. 완벽했다. 보조 출입구 앞에서 떨리는 손가락으로 단말기에 퇴근 보고를 입력했다.“실례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공간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철문을 닫았다. 바깥 공기는 차가웠고 비가 그친 뒤의 흙냄새가 났다. 폐 깊숙이 들이마시고 나서야 겨우 살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밤 9시. 고요한 차고 안으로 낮은 엔진음이 스며들었다. 차에서 내린 태윤은 재킷을 손가락에 걸치고 느슨하게 넥타이를 풀며 거실로 들어왔다. 날카로운 시선이 방을 훑었다. 가구의 위치는 완벽했고 먼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공기가 달랐다. 무기질적인 쇼룸 같던 집 안에 아주 희미하게, 겁먹은 사람의 체온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소파에 재킷을 던지고 사이드테이블 위 업무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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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거절할 수 없는 배정
 전담 배정? 나를? 그렇게 겁에 질려 도망치듯 빠져나왔는데.『앞으로도 계속 서린 씨만 맡기고 싶대요. 이용 요금도 크게 올리겠다고 했고, 서린 씨 수당도 상당히 붙을 거예요. 이런 조건은 정말 드물어요.』“……거절하겠습니다.”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왔다.“죄송해요. 그 집은…… 지금 저한테 너무 버거워요. 정말 못 하겠어요.”『네? 왜요?』“다른 곳이면 어디든 갈게요.” 휴대전화를 쥔 손에 땀이 배었다.“힘든 현장이어도 괜찮아요. 어떤 청소든 할게요. 그러니까 거기만 빼고…… 다른 곳으로 배정해 주시면 안 될까요?” 필사적이었다. 얼굴을 마주치지 않아도 그 사람의 흔적이 가득한 공간에 있기만 하면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았다. 더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 본능이 계속 경고하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미정 씨 목소리에서 영업용 밝음이 사라졌다.『……서린 씨. 솔직히 말할게요. 이건 단순한 지명 요청 수준이 아니에요.』 종이를 넘기는 마른 소리가 들렸다.『그쪽에서 다른 사람은 안 된다고 아주 강하게 요구했어요. 전담 배정이 안 되면 업체와 맺은 서비스 계약 자체를 재검토하겠대요. 회사 입장에서도 그렇게 큰 이용처를 놓치면…… 앞으로 서린 씨에게 지금처럼 배정을 계속 주기 어려워질 수도 있어요. 무슨 말인지 알죠?』 숨이 막혔다. 거절하면 길이 끊긴다. 직접적인 해고 통보는 아니었지만, 말 뒤에 숨은 압박이 내 주변의 출구를 하나씩 닫았다. 태윤의 심기를 거스르면 가까스로 붙들고 있던 생계줄까지 놓칠 수 있었다.『그래도 조건은 정말 좋아요. 급여 산정도 다시 하고 특별수당도 붙일 거예요. 그리고……』 미정 씨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계약 기간에는 강 대표님 댁의 배정 요청을 최우선으로 처리하는 조건이에요. 사실상 전속 하우스키퍼처럼 운영하는 거죠. 업체와의 이용계약 변경 서류, 서린 씨 쪽 근무조건 확인서는 곧 보내 줄게요.』 도망갈 길을 막고 돈으로 붙잡는다. 예전에 내가 오만하게 휘둘렀던 힘을,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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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열지 말아야 할 방
 2층 복도는 죽은 듯 고요했다. 발소리를 삼키는 긴 파일 카펫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창문 하나 없는 공간에는 간접조명만 희미하게 켜져 있어, 바깥세상과 완전히 끊어진 곳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복도 끝에 묵직한 문이 보였다. 검게 윤이 나는 목재 표면에 잔잔한 나뭇결이 떠 있었다. 카드키를 대자 무표정한 전자음과 함께 잠금이 풀렸다. 차가운 손잡이를 돌리고 무게감 있는 문을 천천히 밀었다.“…….” 한 발 들어서는 순간 숨이 멎었다. 두꺼운 암막 커튼으로 닫힌 어두운 방. 살짝 벌어진 틈으로 회색 하늘빛이 실처럼 들어와 카펫 위에 가느다란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내가 사는 원룸이 몇 개는 들어갈 법한 공간 한가운데, 짙은 색 침구가 덮인 킹사이즈 침대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냄새. 차갑게 정돈된 거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방 안의 공기를 들이마신 순간, 선명한 태윤의 향이 가득하다는 걸 깨달았다. 고급스러운 코롱의 깨끗한 향, 희미하게 남은 담배 냄새. 거기에 남자 특유의 체온이 섞여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7년 전 그 비 오는 밤, 가까이 붙들렸을 때 맡았던 것과 같은 향이었다. 태윤아……. 아무도 없어야 하는데 어딘가에서 시선을 받는 것 같아 발이 굳었다. 벽의 추상화도 검은색으로 통일된 가구도 모두 그의 기척을 머금은 듯했다. 도망치듯 벽의 스위치를 눌렀다. 따뜻한 주황빛 조명이 켜지며 모델하우스처럼 정돈된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먼지 하나 없는 완벽한 공간. 다만 아름다운 나뭇결의 협탁 위에는 물방울이 맺힌 반쯤 남은 물잔과 무심하게 벗어 둔 은색 손목시계가 있었다. 여기서 그가 잠들고, 눈을 뜨고, 숨을 쉰다. 그 현실감에 명치가 조여 왔다.“빨리 끝내자…….” 카트에서 새하얀 시트를 꺼내 침대로 다가갔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내 호흡만 귀에 크게 들렸다. 누군가 누웠던 무게로 두꺼운 이불이 흐트러져 있었다. 걷어 내려고 손을 뻗다가 손끝이 베개에 닿았다. 서늘하고 매끄러운 실크 촉감. 순간 손끝부터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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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딸기 사탕의 벌
 울던 내 뺨을 태윤이 큰 손으로 닦아 주는 듯한, 너무도 제멋대로인 환상에 잠시 빠졌다.“……하나도 안 변했네.” 베개를 품에 안고 침대 옆에 쪼그려 앉았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이런 비참하고 욕심 많은 비밀을 어떻게 입 밖에 내겠어. 그때였다. 쏴아……. 정적을 가르는 희미한 물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번쩍 들었다. 소리는 방 안쪽, 문이 열린 드레스룸 너머의 욕실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샤워?“뭐……?” 순식간에 온몸의 피가 식었다. 말도 안 돼. 이 시간에는 회사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업무 안내에도 분명 ‘부재 중 청소’라고 적혀 있었다. 일정한 리듬으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계속됐다. 단단한 타일을 두드리는 물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서 유난히 크게 들렸다. 누군가 저 안에 있었다. 설마…… 태윤이야?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도망쳐야 한다. 샤워 중인 지금, 소리 없이 빠져나가면 아직 늦지 않을지도 모른다. 서둘러 일어나려던 순간. 물소리가 뚝 끊겼다. 방 안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내 거칠어진 숨만 불편할 정도로 선명했다. 끝났다. 나온다. 몸이 굳어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은 안쪽의 뿌연 유리문에 박혀 버렸다. 찰칵. 금속 손잡이가 돌아가고 문이 안에서 천천히 열렸다. 틈으로 쏟아져 나온 하얀 수증기와 함께 습기를 머금은 강한 기척이 방 안의 공기를 밀어냈다. 나타난 사람은 상의를 벗은 태윤이었다. 허리에는 흰 배스타월 한 장만 둘러져 있었다. 대충 쓸어 넘긴 젖은 검은 머리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넓은 이마와 곧은 콧날을 지나 깊은 쇄골로 흘렀다. 단단하게 잡힌 가슴과 선명한 복근. 예전의 마른 복학생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오랜 시간 스스로를 단련해 온 성인 남자의 몸이었다. 힘과 자신감이 남아도는 것처럼 보였다.“……!” 목이 막혀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품에 안고 있던 베개를 방패처럼 가슴에 눌러 붙이고 몸을 작게 웅크렸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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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돌아온 오만의 대가
 도망치듯 태윤의 집을 빠져나왔다. 발밑이 자꾸 흔들리는 것 같았다.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는 성북동은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귓속의 심장 소리가 크게 들렸다. 입술에는 아직 끈적한 딸기 맛과 태윤의 체온이 남아 떨어지지 않았다.“……하…….” 밀려오는 눈물을 앞치마 소매로 거칠게 훔쳤다. 최악이다. 내가 싫다고 했을 때는 멈췄다. 그런데도 그 뒤 한 번을 내가 선택했다는 사실이 더 비참했다. 7년 전 그렇게 잔인하게 버림받았으면서, 태윤이 내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반응했다.◇ 원룸으로 이어지는 익숙한 언덕길이 오늘만 유난히 길었다. 엄마를 무슨 얼굴로 봐야 할까. 태윤은 내 형편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의 병과 돈이 절실하다는 것까지. 우연히 마주친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나를 도망갈 수 없는 자리로 끌어들이려고 그 문을 열어 둔 것이다. 좁은 현관으로 들어와 낡은 철문을 닫았다. 그제야 폐에 산소가 다시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우편함에 두툼한 서류봉투가 꽂혀 있었다. 보낸 곳은 가사서비스 업체. 겉면에는 ‘본인 확인·긴급’이라고 붉은 글씨가 찍혀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었다. 안에는 전날 미정 씨가 말한 전담 배정 관련 서류가 들어 있었다. 가사서비스 이용계약 변경 안내, 상주 서비스 요청서 사본, 그리고 내 근무조건을 다시 확인하는 서류. 공식 문서는 분명 회사의 양식이었다. 현강홀딩스 측이 장기 이용계약을 맺고 별도 비용을 부담하는 대신 나를 우선 배정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내용도 있었다.“급여가…… 거의 10배?” 숫자를 보고 숨이 멎었다. 지금까지 이를 악물고 일해 온 시간이 우스워질 만큼 큰돈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어머니의 장기 치료와 간병비를 버틸 수 있다.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치료나 재활이 필요해져도 처음부터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공식 서류 밑에, 회사 양식과 전혀 다른 종이 한 장이 더 끼워져 있었다.『강태윤 대표 측 추가 요청사항』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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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서명하는 밤
 어두운 방 안에서 펜끝이 서류 위에 멈춘 채 움직이지 않았다. 서명하면 돌아갈 수 없다. 알고 있는데도 손가락이 떨렸다. 검은 잉크가 내 생활을 휘감는 덩굴처럼 보여 시야가 흔들렸다. 공식 서류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겼다. 회사가 정한 상주 근무시간, 휴게시간, 업무 범위, 긴급 연락 절차가 적혀 있었다. 정상적인 계약이라면 여기까지였다. 그런데 바로 옆에는 태윤의 ‘추가 요청사항’이 놓여 있었다. 특히 마지막에 직접 적힌 문장이 계속 눈에 걸렸다.『내가 부르면 와. 시간 핑계 대면서 또 사라지지 마.』 24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정식 조항은 아니었다. 회사 서류에도 분명히 업무시간과 휴식시간이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알 수 있었다. 태윤이 원하는 건 청소와 세탁만이 아니다. 내가 자기 시야 안에 머무는 것. 예전처럼 마음대로 등을 돌리고 사라지지 못하게 하는 것. 법률 문장보다 더 노골적인 독점욕이었다.“……정말 이상한 사람.” 쉰 목소리가 작은 원룸 벽에 흡수됐다. 뇌리에 낮의 태윤이 떠올랐다. 젖은 머리, 수건 한 장만 두른 몸, 내 턱을 들게 했던 손. 내가 고개를 돌리자 멈췄고, 그 다음 한 번은 내가 선택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그는 억지로 끌고 갈 수도 있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내가 한 발 내딛기를 기다렸다. 그 기다림마저 나를 시험하기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서류를 찢어 버릴 용기는 없었다. 가방 안에는 세명의료원에서 받아 온 진료비와 향후 치료 계획서가 들어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오래 치료가 이어질지 알 수 없었다. 간병과 재활까지 겹치면 지금 수입으로는 버틸 수 없다. 예전의 나는 돈의 힘으로 태윤을 내려다봤다.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걸 내가 쥐고 있다고 믿었고, 그 자존심을 밟았다.‘나한테 오면 해결해 줄 수 있어.’ 그 말을 사랑이라고 착각했다. 지금은 그때와 같은 무게의 절망이 반대편에서 돌아오는 듯했다. 떨리는 오른손으로 펜을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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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다른 삶의 시작
 다음 날 아침. 어제보다 훨씬 무거워진 발을 끌며 성북동 언덕 위 저택으로 향했다. 가방 안에는 봉투 하나가 들어 있었다. 방금 서명을 마친 근무조건 확인서. 종이 몇 장일 뿐인데, 이걸 건네는 순간 정말 다른 삶으로 넘어가는 것 같았다. 높은 담이 시야에 들어오자 걸음이 멈췄다.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것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하늘은 낮게 내려앉아 금방이라도 비를 쏟을 듯했고, 습기 어린 바람이 뺨을 스쳤다. 대문 앞에 서자 머리 위의 보안 카메라가 희미한 구동음을 내며 내 쪽으로 움직였다. 렌즈가 사람을 재보는 듯했다. 곧 묵직한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홀에 들어서자 서늘한 공기와 함께 태윤의 기척에 휩싸였다. 소파에 그가 앉아 있었다. 몸에 완벽하게 맞춘 스리피스 슈트. 어제처럼 맨살을 드러낸 거친 모습은 사라지고, 차가운 조각처럼 흐트러짐이 없었다. 신문을 넘기는 소리만 넓은 거실에 울렸다. 내 쪽은 보지도 않았다.“가져왔어?” 낮은 한마디에 폐가 움츠러들었다. 말없이 다가가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내밀었다. 그제야 신문에서 떨어진 시선이 내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어제보다 날카롭고 차가웠다. 그런데 그 깊은 곳에는 덫에 걸린 짐승이 달아날 곳을 찾는 모습을 지켜보는 듯한 빛이 있었다. 긴 손가락이 봉투 끝을 집었다. 내용은 이미 알고 있다는 태도였다. 서명란만 확인한 태윤은 낮게 숨을 내쉬고 서류를 사이드테이블에 내려놓았다.“현명한 선택이네. 내가 비싼 돈을 내고 네 일정을 전담으로 잡겠다고 했지.”‘비싼 돈.’ 그 말이 명치를 눌렀다. 결국 돈으로 내 시간을 묶어 둔 것이다.“오늘부터 여기 상주하는 동안 출퇴근과 업무 연락은 내가 정한 일정에 맞춰. 몸이 안 좋으면 숨기지 말고 업체에도 보고하고. 일하다 쓰러지는 건 사양이니까.” 태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두 굽이 바닥을 두드리는 마른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다가왔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등 뒤에는 차가운 벽뿐이었다. 그가 바로 앞에 멈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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