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안에는 히터를 빵빵하게 틀었다. 추운 곳에서 따듯한 곳에 들어온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염지훈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미리 준비해 놓은 우유를 건네줬다.“뜨거운 거야.”그녀가 우유를 받아서 들기 바쁘게 뒤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네가 왜 이 시간에 줄까지 서서 우유를 산다고 했어. 넌 다 계획이 있었구나.”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돌렸다. 뒷좌석에는 한눈에 봐도 화려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새빨간 입술을 제외하고는 염지훈과 아주 비슷한 인상의 여자였다.그녀가 정신 차리기도 전에 여자가 손을 뻗어 볼을 꼬집었다.“귀여워! 볼도 탱글탱글해!”온다연은 깜짝 놀라면서 뒤로 피했다. 우유도 자칫 떨어뜨릴 뻔했다.여자는 아직도 만족하지 못한 듯 더 만지려고 했다. 그러나 염지훈이 그녀의 손목을 확 낚아챘다.“염지현, 시끄럽게 굴지 말고 가만히 있어.”염지훈이 정말 힘을 줬는지, 염지현은 아프다고 아우성쳤다.“아파! 아파! 이거 놔! 염지훈, 누나한테 이러기야?”“내 차에서 내려.”염지현은 욕설을 중얼거리다가 말했다.“앞에 사거리에서 내려줘. 그러면 알아서 돌아갈게.”“안 돼. 당장 내려. 그러게 누가 애 볼을 꼬집으래?”염지현은 조수석 의자를 툭툭 치며 온다연에게 말했다.“이름이 다연이라고 했죠? 이 자식 3일 밤을 새웠어요. 어디 나무에 들이받지 않게 조수석 역할 잘해요.”온다연은 어색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불편하면... 그냥 저 혼자 갈게요.”염지훈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염지현은 재빨리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어휴, 험한 말 하지 마. 네가 떠나면 난 오빠한테 죽었어. 저 자식이 다 꼰질러 버릴 거야.”말을 마친 그녀는 문을 닫았다. 염지훈은 빠르게 엑셀을 밟아 출발했다.온다연은 고개를 돌려 얇은 외투 한 장만 걸친 염지현을 바라봤다.“저 사람 지훈 씨 누나예요?”“응.”“이 시간에 혼자 길거리에서 위험하지 않을까요?”염지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위험
온다연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염지훈과는 별로 친하지 않아서 말을 길게 늘어놓기 불편했다. 그녀는 그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밤에 마시면 살찔까 봐서요.”“뭐? 얼굴이 내 손바닥보다도 작으면서, 유강후 씨 참 사람 보살필 줄 모르네. 나였으면 적어도 70kg은 만들었을 거야.”“70kg요? 그러면 저 정방형 되는 거 아니에요?”“하하, 건강하면 됐지.”염지훈은 우유를 빼앗아 들더니 직접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한 입만 마셔봐. 달콤해서 맛있을 거야.”온다연은 속는 셈 치고 조금만 마셔봤다. 그러고는 금방 눈을 반짝이며 한 모금 더 마셨다. 상상하던 우유 맛과 달리 훨씬 고소하고 달콤했다.이때 염지훈이 컵을 다시 가져가서 온다연이 썼던 빨대로 한 모금 마셨다.“괜찮네. 다들 좋아할 만해.”말을 마친 그는 다시 우유를 온다연에게 건네줬다. 하지만 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받아서 들지 않았다.그는 불쾌한 듯 말했다.“왜, 내가 입 댄 거라 싫어?”“조금요.”“입 댄 건 어쩔 수 없으니까 알아서 해. 만약 버리면 너도 같이 버릴 줄 알아.”온다연은 그를 바라보지 않고 빨대를 빼냈다. 그리고 뚜껑을 열고 그 채로 마셨다.“정말 맛있어요. 이렇게 맛있는 우유를 어떻게 버리겠어요.”그녀는 우유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홀짝대는 걸 보니, 이런 우유는 처음 먹어보는 듯했다.염지훈은 손을 뻗어 그녀의 입술에 묻은 거품을 닦아내 혀끝으로 스쳤다.“이렇게 하면 더 맛있지.”온다연은 귀 끝이 빨개졌다. 그녀는 컵을 꽉 잡으며 말했다.“마시고 싶으면 가져가서 마셔요. 왜 이러는 거예요...”염지훈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헝클었다.“처음 마셔보는 것처럼 구는 게 귀여워서.”염지훈이 보기에 너무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온다연은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이런 우유가 처음이긴 해요.”“유강후가 이런 것도 안 먹여? 설마 몸에 안 좋다고?”온다연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컵을 꽉
낯설고도 가벼운 감정이지만, 염지훈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온다연을 가엾게 여긴다는 것을 말이다.이 연약해 보이는 소녀는 재벌가에서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보다 못한 삶을 겪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귀 뒤로 넘겨주며 물었다.“너 혹시 유씨 집안에서 구박받았어?”이 말을 들은 온다연은 몸을 흠칫 떨다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니요.”관찰력이 뛰어난 염지훈은 그녀의 작은 몸짓과 표정 변화를 전부 보고 있었다. 그녀의 부정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유강후는 꽤 잘해주는 것 같던데? 네가 사는 그 집도 아끼는 곳이라며. 평소에는 아무도 들여보내지 않는다고 들었어. 널 그곳에 머물게 한 걸 보면 신경 쓴다는 뜻 아닐까?”유강후가 언급되자, 온다연은 또다시 마음이 아팠다. 차 안에는 바람이 불지 않았고 난방도 빵빵한 데 한기가 느껴져서 몸을 떨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이제 산에 가서 눈을 볼 수 있을까요?”염지훈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다가 손도 대지 않은 가방에 신경이 쏠렸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또다시 알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왠지 모르겠지만, 그는 온다연을 볼 때마다 불쌍하다고 느꼈다. 진정으로 마음이 아픈 불쌍함이었다.그는 그녀가 유씨 집안에서 이토록 힘들게 살고 있을 줄 몰랐다. 그래서 괜히 간식을 담은 가방을 그녀의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편의점에 있는 건 이런 것들뿐이야. 먹거리랑 손난로는 꼭 챙겨. 필요할 거야.”말을 마친 그는 차를 출발시켰다.가는 길 동안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서로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산기슭에 도착했을 때, 온다연이 물었다.“영운산 정상에 별 보이는 지붕이 있는 별장이 있나요?”염지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대답했다.“이제 막 지어진 그 집? 아직 공식적으로 판매되지 않았을걸? 하지만 팔리기 시작해도 쉽게 살 수 없을
온다연은 어둠 속에서 보이는 발코니 위의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순간, 그녀는 여러 해 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은 열등감이 다시금 되살아났다.그녀는 수많은 밤을 이렇듯 어둠 속에 몰래 서서,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미물과 같은 자세로 마음속 태양을 바라보곤 했다.그 시절의 그녀는 언젠가 유강후의 품에 안겨 입술을 맞출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꿈에서도 해본 적 없는 상상이었다.하지만 그날이 실제로 찾아왔을 때, 그녀는 어쩐지 슬픈 기분이 들었다. 잠시 거리가 가까워졌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그녀는 비참한 장난감일 뿐이고, 여전히 어둠 속에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존재일 뿐이었다.온다연은 유강후가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담배를 몹시 힘겹게 피우는 것처럼 보였다. 주황빛 불꽃은 희미하게 빛나다가 금세 사라졌다.한 개비를 다 피울 즈음, 나은별이 뒤에서 나타나 그를 껴안았다. 그러다가 나은별이 먼저 그를 놓아주었고, 두 사람은 무언가를 이야기하다가 곧 집 안으로 들어갔다.온다연은 멍하니 서서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산 정상의 바람은 거세었고 눈도 많이 내렸다. 마치 이 눈이 그녀 마음속의 상처로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그녀는 점점 그 상처가 아프게 느껴졌다. 이 고통은 어린 시절 심미진이 그녀를 버렸을 때보다 더 심했다.온다연은 밝게 빛나는 창문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유강후가 전화를 받았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부드러웠다.“왜 이 시간까지 안 자고 있었어?”눈보라 속에서 온다연은 추위에 몸을 떨며 휴대폰을 꽉 쥐었다.“아저씨 어디예요? 저 잠이 안 나와요. 아저씨 보고 싶어요.”유강후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갑지 않았다.“볼 일이 있어서 나왔어. 오늘은 못 돌아가. 얼른 자고 내일 아침에 보자. 네가 깨어날 때 쯤에는 집에 있을 거야.”온다연은 가슴이 답답했다. 휴대폰을 쥔 손은 관절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주었다.‘
염지훈은 눈썹을 튕기며 온다연의 어깨를 감쌌다.“이런 집 좋아해?”“별 보이는 지붕이 엄청 예쁠 것 같아요. 사랑하는 사람이랑 누워서 별 보면 로맨틱할 것 같지 않아요? 가을의 노을도, 겨울의 눈도 예쁠 거예요.”“안목 좋네. 우리 형한테 부탁하면 여기 집 알아보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닌데, 말해줄까?”온다연은 시선을 거두며 담담하게 말했다.“아니에요. 저한테 무슨 자격이 있다고...”이런 곳은 나은별처럼 재벌가 출신의 사람만 지낼 자격 있었다. 어둠 속에서 피어난 잡초 같은 그녀는 당연히 자격이 없었다.염지훈은 미소를 거두고 그녀의 이마를 작게 튕겼다.“무슨 소리를 아는 거야? 별걸 다 자격으로 나누고 있어.”온다연은 말없이 손난로를 얼굴에 댔다.“지훈 씨 술 좋아해요? 제가 술 사줄까요?”“나한테 뭐 해줄 돈 없다며?”온다연은 시선을 숙이며 담담하게 말했다.“술 살 돈은 있어요. 갈래요?”염지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눈은?”지금 내리는 눈은 전부 심장에 떨어지는 것 같아서 아프던 참이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차에 올라타며 말했다.“안 봐요. 이만 돌아가요.”염지훈도 당연히 그녀의 이상을 보아냈다.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 온다연은 항상 이상한 여자였기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차는 금방 돌아서 산기슭에 도착했다. 그리고 온다연 집 근처에 있는 거리로 향했다.눈 오는 날에도 이곳은 사람 냄새를 물씬 풍겼다. 그들은 자그마한 야장에 들어가 술안주를 주문했다.어두컴컴한 조명 속에서 사장은 온다연에게 친절하게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그러게요. 오랜만이에요.”사장은 빠르게 움직이면서 온다연의 곁에 있는 남자를 힐끗 봤다.“이쪽은 남자친구예요? 잘 생겼네요.”온다연은 싱긋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염지훈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주변을 빙 둘러보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나한테 사준다는 게 이런 거였어?”온다연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며 말했다.“안 먹겠으면 구경이나 해요. 저는
그는 키가 헌칠하고 몸집도 큰 편이어서 작은 소파가 그에게는 너무 비좁아 한 쪽 다리를 구부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이러니 시각적으로는 다리가 더 길어 보였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온다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 속 담겨있는 깊은 뜻은 점점 짙어만 갔다.한참 뒤 온다연이 유리잔 두 개를 찾아내 끓인 맥주를 따라주자, 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여기가 네 집이야?”따뜻한 수증기가 피어오르자 온다연의 눈이 스르르 풀렸다. 그녀는 산에서 내려온 후 지금까지 정신이 매우 혼란스러웠고, 머릿속은 생각들이 마구 엉켜있어 끊임없이 윙윙거리며 두통에 시달렸고 그녀가 한 말과 행동은 모두 본능에 맡겨있었다.그런데 지금 따스한 술기운에 취해 눈가가 촉촉해졌고 가슴이 답답하며 무디게 아팠다.그녀는 뜨거운 맥주를 한 모금 크게 마신 후 가슴이 점차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지훈 씨는 이렇게 초라한 곳은 처음이죠?”그녀는 한 층의 얇은 스웨터만 입고 있었고, 베이지색은 그녀의 우유 같은 피부색을 더 희게, 칠흑 같은 머릿결을 더 검게 받침 해 주었고, 빨갛고 도톰한 입술은 마치 키스를 유도하는 것처럼 매혹적으로 느껴졌다.그녀가 현재 입고 있는 옷은 모두 유강후가 직접 골라준 것이었고, 품질과 디자인 모두 최상급이었으며 딱 봐도 가격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이런 차림을 한 온다연이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주변의 낡고 허름한 환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이제 술을 좀 마시더니 손바닥만 한 얼굴이 보기 좋게 홍조를 띠고 또렷하고 촉촉한 눈망울도 너무나 사랑스러웠다.염지훈의 노골적인 시선에도 그녀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술잔을 들고 한 모금 더 마셨다.“와서 드셔보세요. 맥주를 이런 방법으로 끓이니까 또 다른 별미에요.”염지훈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온다연은 무언가가 생각난 듯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 깜빡했네요, 지훈 씨도 명문 가문에서 나온 도련님이니깐 이렇게 싼 음식은 먹어본 적이 없으시죠? 하지만 가끔 드
염지훈은 가슴이 약간 뭉클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유씨 가문에 얼마나 있었어?”온다연은 손을 빼내고 술을 한 모금 더 마시며 담담하게 말했다.“기억 안 나요,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거의 돌아가지 않았어요.”염지훈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녀를 보며 가슴이 깊게 아파졌다.“네 친이모는 널 상관 안 해?”온다연은 멈칫하더니 가슴이 욱신거렸고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아마 나의 존재가 그녀를 힘들게 했을걸요. 내가 없었더라면 그녀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겠죠.”염지훈은 또 물었다.“이 셋집을 구한지 얼마 됐어?”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염지훈은 그녀를 꼿꼿이 쳐다보며 말했다.“4, 5년 됐니?”다른 건 말할 것도 없고, 이 작은 전기 히터만 해도 꽤 오래된 것이었다. 다른 가구들은 전에 살던 주민이 남긴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전기 히터는 틀림없이 그녀가 산 것이었다.이렇게 낡을 때까지 썼으니 최소 4, 5년은 되었다.즉, 온다연은 열다섯 살 무렵부터 밖에서 혼자 살아왔다.온다연은 대답 대신 술잔을 들고 천천히 한 모금을 다 마신 후 입을 열었다.“염지훈 씨, 만약 저의 처지가 초라하다고 느껴지시면 앞으로 저를 상대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곳은 확실히 좀 작고 형편없으니깐요.”염지훈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그녀를 한참 바라본 후에야 말했다.“유씨 가문이 널 신경 쓰지 않는데, 그럼 유강후는 왜 또 널 그렇게까지 신경 쓰고 있는 거지?”유강후라는 세 글자에 온다연은 시선을 내리깔며 침착하게 말했다.“제가 밖에서 죽어버리면 유씨 가문의 체면에 손상될까 봐 그랬나 보네요.”염지훈은 그녀의 술잔을 가져가고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나랑 사귀자, 다연아. 내가 널 잘 돌볼 수 있어.”온다연은 그가 이런 말을 꺼낸 사실이 전혀 놀랍지 않다는 듯 그를 한 눈 가볍게 쳐다보고는 조용히 말했다.“그럼 유하령 씨와의 결혼은요? 그녀를 실망하게 할 건가요?”염지훈은
잠시 어리둥절해진 온다연은 상황 파악이 되자 등골이 오싹했다.‘망했어!’그녀는 원래 날이 밝기 전에 돌아가려고 했는데 고작 맥주를 조금 마시고 잠이 들것은 예상하지 못했다.그건 그렇다 치고, 지금 그녀는 염지훈과 하룻밤을 같이 보낸 셈이니,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유강후라면 충분히 그녀를 토막 낼 수 있었다.유강후는 소유욕이 매우 강한 편이라 그가 자신의 물건이라고 생각되면, 좋아하지 않는 물건이라도 그의 태그를 붙이는 순간부터 절대 다른 사람이 손을 대도록 허락하지 않는 사람이었다.특히 지금은 그녀에게 조금 관심 있는 상태여서, 그녀가 다른 남자와 밤새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홧김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랐다.또 밤새 함께 있는 남자의 신분은 그의 친조카의 남자 친구인 염지훈이어서 사태는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그는 아마 그녀를 목 졸라 죽일 것이었다.염지훈도 문 두드리는 소리에 부스스 깨어났고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어느 버릇없는 놈이 아침부터 문을 두드리고 난리야.”온다연은 목소리를 낮추어 경고했다.“목소릴 낮춰요, 제 아저씨예요!”염지훈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웃긴 상황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온다연을 쳐다보았다.“너 쫄았어? 너도나도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하룻밤 같이 지내면 뭐 어때? 기껏해야 나보고 너에게 책임지라고 하겠지. 뭐가 그렇게 당황스러워?”그때, 입구에서 또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무겁게 문을 두드려댔다.온다연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골치가 아파 일어나 여기저기 둘러보고 창밖도 내다보았다.염지훈은 웃는 듯 마는 듯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나보고 여기서 뛰어내리라고? 네 아저씨가 그렇게 무서워?”온다연은 눈이 번쩍 뜨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뛰어도 돼요?”하지만 그녀는 여기가 4층이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안돼, 안돼...”이때 문을 더 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성난 남성의 목소리와 함께 들려왔다.“야, 온다연!”유강후의 목소리에는 이미 노기가 서려 있었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