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는 저를 가두고 재미로 삼았어요. 저는 그저 아저씨가 기르는 작은 애완동물일 뿐이죠. 아저씨가 기분 좋으면 먹을 것을 주고 가끔은 장난감을 가져와서 놀아주고요. 기분이 나쁘면 저를 가두고 죽도록 괴롭혔어요. 아저씨와 저 사람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어요!”‘유씨 가문의 모든 사람이 끔찍해!’말을 마친 온다연은 분노에 찬 눈으로 유강후를 계속 노려보았고 그 모습은 유강후의 눈에 그대로 들어왔다.유강후의 얼굴은 유난히 어두웠고 눈빛은 차갑고 냉랭했으며 폭설이 내리기 전의 추위와 냉랭함이 섞여 있었다.유강후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욕은 충분히 했어?”“더 욕하고 싶으면 3분 줄게. 계속해!”유강후는 태어났을 때부터 자기 앞에서 이렇게 대놓고 방자한 사람은 없었다. 온다연이 첫 번째였다.다른 사람이 유강후의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면 뼛조각 하나 남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유강후의 앞에 있는 것은 유강후가 손가락 하나로도 죽일 수 있는 작은 존재이기에 유강후는 정말로 온다연을 다루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그러나 온다연은 자신과 함께하는 것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은 유강후의 가슴에 가시처럼 박혔다.유강후는 가슴이 아프다는 느낌을 받으며 온다연을 2, 3분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욕은 그만하고 이제 대답해. 나와 함께하는 것이 너를 괴롭히는 거라고? 나와 함께하는 게 그렇게 괴로워?”온다연의 머리는 혼란스럽게 돌아가며 거침없이 말을 뱉었다. 온다연은 유강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여전히 유강후가 두려웠지만 눈에는 두려움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네!”단순한 한마디였지만 목소리는 매우 작고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비수처럼 유강후를 향해 내리꽂혔다.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떴고 눈 속에 악의가 일었다.장화연은 상황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여 온다연을 끌어당기며 말했다.“셋째 도련님, 다연 아가씨가 구월이를 너무 걱정해서 생각 없이 말하는 것 같아요. 마음에 두지 마세요!”그때 수술실의 문이 열리며 의사가 나왔다.
유강후는 온다연을 잡으려 돌아섰지만 겨우 옷자락에 손이 닿을 뿐이었다. 온다연은 어디서 힘이 생겼는지 유강후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온다연의 모습은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마음이 어지럽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유강후는 빠르게 온다연을 따라갔지만 문을 나서는 온다연의 뒷모습만 보였다. 유강후는 깊은 눈빛으로 밖을 응시하며 큰 걸음으로 쫓아갔다.길가에 초록색 택시가 정차되어 있었고 온다연은 비틀거리며 문을 열고 택시에 탑승했다.온다연의 모습은 여전히 매우 연약하고 언제 쓰러질지 모를 정도였다. 유강후의 마음은 쿡쿡 아파왔다.“다연아!”온다연은 유강후를 돌아보지 않고 운전사에게 재촉했다.“가장 가까운 애완동물 병원으로 가주세요!”운전사는 다소 의아해하며 돌아보며 말했다.“여기가 이미 병원인데요?”온다연은 보온 상자를 꼭 껴안고 눈물을 한 방울씩 흘렀다.“기사님, 제발 여기서 가장 좋은 애완동물 병원으로 데려다주세요.”운전사는 온다연의 손에 쥔 애완동물 보온 상자를 보고 상황을 이해한 듯 고개를 저으며 차량을 빠르게 몰았다.조금 지나자 운전사는 다시 돌아보며 말했다.“아가씨, 밖에 누군가가 우리를 쫓고 있는 것 같은데 아가씨를 부르는 것 같아요!”온다연의 눈은 심하게 빨갛게 변했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 아니에요, 빨리 가주세요”운전사는 본지방 사람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더 큰 애완동물 병원 앞에 도착했다. “여기가 가장 큰 애완동물 병원입니다.”온다연은 곧장 안으로 달려갔다.병원은 확실히 더 컸지만 직원은 구월이를 보고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저희도 방법이 없습니다. 이렇게 작은 상태로 이렇게 다치면 거의 살아날 가능성이 없습니다!”“돌아가서 며칠간 잘 지켜보세요. 보온 상자에 넣어두고 꺼내지 마세요!”온다연은 거의 서 있을 수 없었고 병원의 복도에서 잠시 서 있었다가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갔다.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온다연은 작은 상자를 안고 세상에 버림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작은 상자를 들어 아기 고양이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이 작은 녀석도 마찬가지네. 왜 이렇게 둘 다 까다로운 거야?”“자기 몸도 작은 주제에 맨날 조그맣고 불쌍한 애들만 키워... 보기만 해도 신경 쓰이잖아!”말을 마치고 염지훈은 상자를 조수석에 내려놓았다.얼마 후 정신을 차린 온다연은 자신이 병원 휴게실 같은 방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 몸 위에는 염지훈의 검은색 외투가 덮여 있었다.고개를 들어 보니 염지훈이 창가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이렇게 추운 날씨에 그는 검은색 스웨터 하나만 입고 있었다.창문이 반쯤 열려있어 바람이 들어오면서 염지훈의 앞머리가 흩날렸다. 그 덕분에 이마가 더욱 넓어 보였고 이목구비는 더욱 진해 보였다.그의 체격은 유강후와 비슷하게 큰 정도였다. 비록 유강후처럼 강한 위압감은 없었지만 풍기는 기운이 상당했다.몸이 곧고 탄탄해 보였으며 나이에 맞지 않는 무게감과 안정감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온다연의 시선을 느낀 염지훈이 뒤를 돌아보았다.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자 염지훈은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고 온다연에게 다가왔다.“깼어?”그러자 온다연은 가볍게 ‘네' 하고 대답하며 그의 외투를 돌려주었다.“제 고양이는요?”하지만 염지훈은 혀를 끌끌 차며 거친 손으로 온다연의 이마에 손을 댈 뿐이었다.“너도 그 고양이랑 똑같다니까. 아까 열이 나더라. 해열 주사 맞았는데 넌 그것도 몰랐지?”온다연은 구월이를 보러 가야 한다며 그의 손목을 잡았다.“내 고양이!”목소리는 다급했고 창백한 얼굴 덕에 커다란 눈이 더욱 또렷해 보였다. 그렇게 온다연이 염지훈을 바라볼 때, 그는 잠시 정신을 놓을 뻔했다.염지훈은 그녀의 머리를 한 손으로 헝클이며 웃었다.“그렇게 급해? 네 몸은 생각 안 하고 고양이만 챙기는 거야?”온다연은 더 급하게 말했다.“우리 고양이, 우리 고양이 어디 있어요?”염지훈은 그녀가 너무 초조해하는 걸 보고 살짝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살릴
눈빛에 잠시 혼란스러움이 스쳐 지나갔으나 온다연은 곧 다시 정신을 차리며 염지훈을 바라보았다.“잘 모르겠어요.”그러고는 다시 그의 손목을 잡으며 물었다.“제 고양이는요?”염지훈은 그녀의 머리를 살짝 누르며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나한테 말해봐 봐. 너랑 유강후 씨 대체 무슨 관계야? 왜 그 사람이 너한테 그렇게 신경을 쓰는 거지?”온다연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약간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그 사람은 제 아저씨예요.”그러자 염지훈이 그녀를 바라보며 약간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사람 혈연관계인 것도 아니잖아. 근데 너를 이렇게 간섭하는 건 좀 지나치지 않나?”이 말에 온다연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요?”염지훈은 얇은 입술을 단단히 다물고 눈에 차가운 빛을 띠며 그녀의 턱을 잡았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거짓말하는 사람 싫어해. 내 앞에서 거짓말하지 마.”온다연은 조용히 대답했다.“제가 무슨 거짓말을 했는데요? 지훈 씨가 나랑 무슨 사이라고 내가 지훈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잠시 침묵한 뒤, 그녀는 말을 이었다.“지훈 씨도 말했잖아요. 나랑 그 사람은 혈연관계가 없다고. 아니, 우리 두 사람이 무슨 사이라고 한들 그게 또 뭐 어때서요? 그저 평범한 남녀 사이일 뿐인데.”염지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두 사람이 어떤 관계든 상관없지만 하나 충고해줄게. 유강후 씨한테 정말 그런 마음이 있는 거면 빨리 접어. 그런 집안은 언제나 이익이 최우선이니까.”그러고는 거친 손가락으로 온다연의 부드러운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그 집안은 오로지 결혼을 통해 이익을 극대화할 뿐이야. 유강후 씨는 유씨 가문의 가장 큰 자산이니까. 나은별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가문의 여자와 결혼해서 이익을 얻으려고 할 거야.”이어 그는 말했다.“그리고 너도 알겠지만 나씨 가문은 유강후를 묶어두고 싶어 해. 나은별 뒤에 있는 건 나씨 가문 전체야. 나씨 가문은 예전만큼은
그 남자는 혀를 차며 염지훈의 어깨를 한 번 툭 쳤다.“이제 키 크고 허리 잘록한 애들은 안 좋아하는 거야? 이렇게 작은 애들이 좋아지기라도 한 거냐?”그러자 염지훈은 그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헛소리 그만해!”남자는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이제 와서 순진한 척하기엔 좀 늦은 거 아니냐?”곧 염지훈은 그를 밀어내고 온다연의 손을 잡아 밖으로 이끌었다.“가자. 이 사람 있으니까 고양이는 괜찮을 거야. 밖에 나가서 뭐 좀 먹자.”키가 크고 다리도 길어서인지 그는 걸음이 빨랐다. 그래서 온다연은 종종걸음으로 염지훈의 뒤를 간신히 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 옆에 도착했고 염지훈은 온다연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차 문을 열어 그녀를 조수석에 태웠다.“밥 먹으러 가자!”시간은 이미 새벽이었고 평진이 크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식당은 문을 닫은 상태였다. 결국 그들은 24시간 영업하는 상가에서 겨우 한 군데를 찾았다.염지훈은 음식을 잔뜩 시켰다.하지만 온다연은 구월이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 식욕이 없었는지 두어 입만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기분이 상한 염지훈은 담배를 한 대 피우며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내 체면이 이것밖에 안 돼? 어제 내 생일에 네 고양이 치료해 주러 평진까지 달려왔는데 밥 한 끼 먹자고 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온다연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어제 지훈 씨 생일이었어요?”염지훈은 씩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어떻게 생각해? 내가 영원시에 있던 사람들 다 놔두고 평진까지 와서 네 고양이 치료해 줬는데... 너는 나랑 제대로 밥도 안 먹어주잖아. 좀 심하지 않냐?”그러자 온다연은 입술을 깨물고 조용히 일어섰다.“잠깐만 기다려요.”그녀는 상가 입구에 케이크 가게가 있던 걸 기억해냈다. 다만 이 시간에 케이크가 남아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다행히 가게는 아직 열려 있었고 물어보니 다른 사람이 주문 취소한 케이크가 하나 있다는 것이다.문제는 핑크색에 작은 공주 인형이 올라가 있는 케이크였다.지금
유강후는 장화연의 핸드폰을 낚아챘다.화면에는 새벽 12시에 서민로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했다는 뉴스 알림이 떠 있었다.한 젊은 여성이 애완동물을 안고 길을 건너다 버스와 충돌해 중상을 입었으며 현재 시내 병원에서 응급 치료 중이라는 내용이었다.그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유강후의 가슴이 요동쳤다.사진 속 여성은 그가 직접 고른 흰색 캐시미어 코트를 입고 있었고 그 옷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이내 머릿속이 하얗게 텅 빈 유강후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그를 따라가던 장화연은 유강후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몇 시간 동안 그는 영원시에 있는 모든 애완동물 가게를 뒤졌지만 온다연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경찰력을 동원해 영원시의 호텔까지 뒤졌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이쯤 되자 유강후는 점점 초조해지고 분노가 치밀었다.이 낯선 도시에 온다연이 어디에 있을지 알 수 없었고 무엇보다 그녀가 그 고양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잘 알고 있었다.온다연이 지금 어디에서 고통받고 있을지 생각만 해도 유강후의 마음은 찢어질 것 같았다.그러나 그가 듣게 된 소식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시내 응급센터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그는 몇 개의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질주했다.병원에 도착했을 때, 유강후에게 전해진 소식은 충격적이었다.사고를 당한 젊은 여성이 이미 사망했으며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어 시신은 이미 영안실로 옮겨졌다는 것이었다.이 부분이 온다연의 상황과 딱 들어맞았다.온다연의 신분증은 유강후의 금고에 보관되어 있었고 그녀에게는 핸드폰 하나밖에 없었다.얼굴이 점점 창백해지고 유강후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영안실은 병원 가장 뒤쪽, 한적한 곳에 있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시신은 이미 냉동 보관함에 들어가 있었다.병원장도 통보를 받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급히 달려왔다.유강후는 냉동 보관함 앞에서 한 치의 감정도 없는 차가운 얼굴로 서 있었다.그의 권력을 이미 경험한 병원 사람들은 모
그러자 유강후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앞으로 다가갔다.냉동 보관함 안에는 낯선 여자의 얼굴이 있었다. 이미 죽음에 이르러 몸은 싸늘했지만 그녀의 이목구비는 온다연과 전혀 닮지 않았다.그제야 유강후의 온몸은 힘이 빠지며 얼어붙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심장에서 피가 사지로 퍼지는 소리조차 들리는 것 같았다.처음 이 사고 소식을 접했을 때, 그는 온다연이라고 거의 확신했었다. 그녀가 입고 있던 옷 때문이었다.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유강후의 모든 감각과 감정이 마비된 상태였지만 이 여자가 온다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자 모든 것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몸에 다시 온기가 돌아오는 동시에, 유강후의 마음속에는 깊은 분노가 서서히 피어올랐다.‘온다연, 너 정말 대단한 배짱이구나?!’그는 이를 갈며 생각했다.‘감히 이렇게 자꾸 도망치고 전화도 받지 않고 심지어 핸드폰은 꺼놓고...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유강후는 차갑게 명령했다.“계속 찾아!”그 시각 평진.온다연은 쇼핑몰에서 돌아온 후, 동물 병원을 떠나지 않고 구월이 곁을 지켰다.하지만 너무 피곤해서였는지 아니면 구월이가 살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그녀는 휴게실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깊이 잠들었다.눈을 떴을 때는 이미 정오가 다 되어 있었고 온다연은 작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몸 위에는 여전히 남성의 외투가 덮여 있었다.창가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염지훈은 몸을 돌려 온다연을 바라보았다.“깼어?”너무 깊이 잔 탓에 머리가 어지러워 온다연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물었다.“제 고양이는요? 좀 나아졌나요?”염지훈은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를 바라보며 웃음을 참지 못하고 혀를 찼다.“죽진 않을 거야. 근데 문제야 생겼어. 이거 어떡하면 좋지?”온다연은 염지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그를 쳐다보았다.그러자 염지훈은 그녀의 머리를 헝클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유강후 씨가 펫샵 CCTV에서 네가 내 차에 타는 걸 본 것 같아. 내 차 번호를 조회해서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온다연은 본능적으로 몸을 떨기 시작했다.유강후에 대한 공포는 마치 그녀의 유전자에 새겨진 것처럼 결코 떨쳐낼 수 없는 것이었다.더 이상 그를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두려웠다.온다연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며 유강후를 돌아보지 않았다.아니, 애초에 돌아보고 싶지가 않았다.다음 순간, 염지훈이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 진짜 하루종일 문제만 일으키네. 잠시만 조용히 있어. 내가 처리할게!”친밀해 보이는 듯한 두 사람의 행동을 보자 이미 붉어진 유강후의 눈은 분노로 가득 찼다.그는 온다연을 차갑게 응시했다. 그 눈빛은 마치 얼음 칼처럼 그녀의 살과 뼈를 벗겨내려는 듯했다.뒤이어 유강후가 입을 열기 전에, 그 뒤에 있던 염지훈가 빠르게 앞으로 나서서 염지훈을 붙잡으며 말했다.“너 이 녀석 뭐 하려는 거야? 당장 나랑 돌아가. 하루 종일 문제만 일으키고 있어.”하지만 염지훈은 형의 손을 뿌리치고 도발적인 시선으로 유강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랑 다연 씨는 서로 호감을 갖고 있습니다. 뭘 하든 우리 자유예요. 왜요? 유 대표님은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유강후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져 갔다. 그는 염지훈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한 걸음씩 온다연에게 다가갔다.그의 강렬한 위압감에 온다연은 몸을 본능적으로 뒤로 피하려 했지만 그 작은 공간에서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다.곧 유강후의 냉혹한 기운이 온다연을 감싸기 시작했다.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는 온다연을 바라보며 무섭게 말했다.“온다연, 하루 종일 찾았잖아.”온다연은 그 말에 몸을 떨었지만 고개를 들지 않고 침대 시트를 손에 꼭 쥔 채 바라보지 못했다.그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어두운 눈빛의 유강후는 온다연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살짝 만졌다.그의 손은 천천히 머리카락을 타고 내려갔고 움직임은 부드러웠지만 목소리는 차갑고 위협적이었다.“난 네가 교통사고 당한 줄 알고 시신 찾으러 영안실까지 갔었어.”그의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