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온다연은 유강후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품에 파고들었다.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 무서워요. 할머님이 절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으로 보고 계셨어요.”유강후는 얼른 그녀를 안고 엘리베이터 벽으로 밀친 채 한참 키스하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제야 입술을 떼며 말했다.“앞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거나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전부 해. 설령 네가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있으니까.”온다연은 처음으로 유씨 집안사람들에게 화를 내어봤던지라 속이 조금 후련하기도 하여 미소를 지었다.“만약 그 사람들이 아저씨랑 제가 이런 사이라는 걸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요?”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와 유강후의 사이는 원래부터 떳떳한 사이가 아니었다.그녀는 대용품이자 놀이 상대였기에 유강후가 그녀와의 사이를 밝힐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유강후는 이런 그녀의 생각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쏙 들어간 그녀의 보조개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이때 또 한 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사람이 들어왔다. 온다연은 얼른 그의 허리에 올린 손을 내렸다.“누가 와요.”유강후는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그도 손을 내리며 그녀의 턱을 잡고 뽀뽀했다.“뭘 두려워하는 거지?”‘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어차피 내 일에 유씨 가문 사람들의 동의가 필요하지 않는데 말이야.'원래는 일단 먼저 한재민과 나은별 사이를 밝힐 생각이었지만 다소 마음이 급해진 그는 일찍 그녀와의 사이를 공개하고 싶었다.하지만 공개 후 온다연이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다는 생각을 하니 항상 거침없이 과단성 있게 행동하던 그는 다소 망설이게 되었다.그는 그녀를 꼭꼭 숨겨두어 평생 지켜주고 싶었다.이때 발걸음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며 온다연은 긴장한 얼굴로 한 걸음 물러났다. 얼굴이 다소 발그레해졌다.“여기서는 안 돼요. 사람이 있잖아요.”유강후는 그녀를 놓아줄 사람이 아니었다
방금 그 아이는 비록 장난꾸러기처럼 보였지만 얼굴도 동그랗고 눈도 동그랬을 뿐 아니라 피부도 뽀얘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아주 사람들의 귀염을 받는 아이가 되었을 것이다.유강후의 눈빛이 다소 어두워졌다.그는 아이를 싫어했기 때문이다.하지만 만약 온다연과 자신의 아이이고, 또는 온다연을 더 많이 닮은 아이라고 상상해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미묘하고 가슴이 몽글몽글해졌다.다만 유감스럽게도 온다연의 지금 상태론 몇 년간 아이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건강한 상태로 되돌리는 것부터 중요했던지라 의사의 당부를 그는 계속 기억하고 있었다.이때 온다연은 속이 울렁거리는 듯한 기분에 미간을 찌푸렸다.“우리 얼른 돌아가요. 속이 좀 안 좋네요.”차에 올라탔을 때 오늘따라 유난히 가죽 냄새가 심하게 나면서 더 속이 울렁거렸다.그녀는 그렇게 울렁거림을 참으며 호텔까지 왔다.들어오자마자 그녀는 바로 화장실로 달려들어 갔다.한의사가 처방해 준 위에 좋은 한약을 먹은 뒤로 그녀의 위장은 예전보다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이렇듯 속이 안 좋은 날은 이젠 손에 꼽을 정도였고 바로 화장실로 달려 들어가 토하는 횟수도 거의 없었다.유강후는 창백한 그녀의 안색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약 제때 먹은 거 맞아?”온다연은 고개를 저으며 다소 힘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오후에는 깜빡했어요.”유강후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얼른 그녀를 안아 올려 소파에 내려놓은 뒤 약을 그릇에 담아왔다. 그리곤 그녀가 먹는 걸 지켜보았다.하지만 먹자마자 온다연은 다시 울렁거리는 속에 화장실로 달려갔다.이번엔 조금 전보다 더 심하게 토했다. 마치 위에 있는 걸 전부 비워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모든 걸 게워내고 나니 온다연은 몸에 힘이 빠졌다.기운 없이 축 유강후의 품에 기댔다. 울렁거림은 여전했고 이마와 손엔 어느새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유강후는 가슴이 아파 휴지로 그녀의 땀을 조심히 닦아준 뒤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몰래 약을 버린 건 아니지
유강후의 어투는 유난히 차가워 주위의 공기마저 싸늘하게 만들었다.그의 모습은 화가 난 모습이었다.온다연은 다소 이해가 가지 않았다.분명 조금 전까지 분위기 좋았는데 왜 갑자기 화를 내는 것일까?그녀는 손에 든 귤차를 보았다. 순간 맛이 없게 느껴졌다.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장화연을 보았다.장화연은 그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유강후는 계속 차갑게 말했다.“앞으로 내 눈앞에 이딴 음식을 내놓지 마. 얼른 가져가!”장화연은 담담하게 온다연이 들고 있던 귤차마저 가져갔다.“다른 거로 만들어 드릴게요.”온다연은 여전히 무슨 일인지 몰랐지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유강후는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극히 드문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귤차를 보곤 화를 냈다. 이 귤차에 어떤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말하지 않아도 온다연은 대충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작게 말했다.“괜찮아요. 다른 거 만들지 않으셔도 돼요. 조금 피곤해서 쉬고 싶네요. 저 먼저 쉬러 갈게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방으로 들어갔다.장화연은 귤차를 든 채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커다란 거실엔 유강후 혼자 남았다.그는 가슴 언저리가 아팠다.평생 지우려고 애썼던 기억이 귤차를 보자마자 다시 떠올랐다.그와 유연서는 쌍둥이였다. 어릴 때 유연서가 아프면 그도 따라서 아프곤 했다.그는 사실 단 것을 싫어했지만 유연서가 좋아했기에 그도 매번 그 귤차를 먹었다.그랬기에 매번 장화연이 귤차를 들고 등장하면 그에겐 벌처럼 느껴졌다.그러나 유연서가 세상에서 사라진 뒤 그는 가끔 그 귤차를 그리워하게 되었다.다만 장화연이 그 뒤로 만든 적이 없었던지라 그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그때 그 맛을 떠올리기만 하면 가슴이 아파 잠도 쉽게 이루지 못했다.그는 가끔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와 그의 어머니가 경원을 떠나지 않았다면, 혹은 유연서도 함께 데리고 떠났다면 유연서가 그때 죽지 않았
그날 이후로 유강후는 해외로 떠났다.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조용히 그녀가 성인이 되길 기다리기 위함이었다.그렇게 생각한 유강후는 방으로 들어갔다.온다연은 이미 자고 있었다.그녀는 부드러운 잠옷을 갈아입은 상태였고 몸에서는 은은한 바디워시 향이 났다.상쾌하고도 깔끔한 향이었다.저도 모르게 그녀를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그는 그녀의 옆에 누우며 작게 말했다.“화났어?”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굳게 감은 두 눈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유강후는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보드라운 얼굴을 쓰다듬으며 작게 말했다.“그 차는 내가...”온다연은 눈을 뜬 후 말허리를 잘랐다.“아저씨, 저 너무 피곤해요. 자고 싶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몸을 돌렸다.유강후는 그녀의 등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억지로 그녀를 다시 돌렸다.“일어나서 뭐라도 먹고 자. 안 그러면 이따가 또 속이 안 좋아질 거야.”온다연은 그를 피곤한 눈빛으로 보았다.“저 정말로 자고 싶어요.”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너무도 피곤했고 잠이 몰려왔다. 게다가 입맛도 없었던지라 지금 이 순간 그저 잠을 자고 싶을 뿐이다.유강후는 기운이 하나도 없는 그녀를 보며 장화연에게 따듯한 우유를 가져오라고 했다.온다연은 조금만 마시고 바로 잠들어 버렸다.꿈을 꾸었다. 꿈속에 그녀는 새하얀 눈을 밟으며 주한과 함께 나란히 걷고 있었다.그런데 갑자기 유강후가 튀어나왔고 누군가 억지로 주한을 그녀의 곁에서 떼어내며 데려갔다.그녀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하지만 유강후가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었던지라 움직일 수가 없었고 그저 주한이 멀리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안돼, 주한, 돌아와!”하지만 주한의 모습은 점점 더 흐릿해지며 내리는 새하얀 눈 속에 사라졌다.꿈속에서 본 유강후의 눈빛은 짐승처럼 사나웠다.“온다연, 내 곁에서 떠날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죽기 전까지!”“넌 평생 내 곁에 있어야
온다연은 나직한 신음 소리를 내며 유강후에게 탐해졌다.빠르게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부드러운 잠옷이 사라졌다.나직한 목소리로 애원하며 내몰아 쉰 뜨거운 숨이 방 안 가득 퍼졌다.얼마나 지났을까, 집사가 아침을 들고 문을 노크하는 것은 세 번째였다. 유강후는 그제야 방에서 나왔다.장화연은 혼자 나오는 그의 모습에 방 안을 힐끗 보았다.“온다연 씨는 일어나지 않으셨나요?”유강후는 보기 드문 보조개가 들어가는 미소를 지으며 낮게 말했다.“자게 내버려 둬. 괜히 들어가서 깨우지 말고.”점심이 되어서야 온다연은 깨어났다.화장실에 갔을 때 옷에 묻은 피를 발견하곤 생리가 온 줄 알았다.하지만 오후가 지나서도 피는 계속 흐르지 않았고 다소 배가 아픈 기분만 들었다.그녀는 따듯한 핫팩을 들고 와 배에 가져다 댔다. 통증이 사라지자 그녀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처음 생리 왔을 때부터 그녀의 생리는 불규칙했다. 가끔 2, 3개월 지나서야 생리하거나 6개월 지나서야 한 번 할 때도 있었다.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 보았을 때 의사는 그녀에게 내분비 기관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했다.그 뒤로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장화연은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었지만, 입맛이 없었던 그녀는 대충 몇 입 먹고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티브이를 시청했다.영원시에 관한 뉴스였다.이틀간 영원에 있는 여러 개 가문이 조사를 받게 되었다. 탈세 혐의만 해도 그 금액이 엄청났다.소문에서 신씨 가문의 딸이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을 건드려 자살 시도하게 되었다고 했다.하지만 뛰어내렸을 때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식물인간이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영원히 의식을 되찾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이 소식이 퍼지자 신씨 가문과 친했던 나씨 가문이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나씨 가문에서는 신씨 가문을 도와주고 싶어 했지만, 정체 모를 배후에 협박을 당해 감히 나설 수가 없었고 그저 모른 척 가만히 있어야 했다.온다연은 한참 보다가 채널을 돌렸다.마침 새로 나온 임신테스트기를 광고
그러고 난 후 온다연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설명서엔 똑똑히 적혀 있었다. 임신테스트기가 두 줄을 가리킨다면 임신한 것이라고.그러니까 지금 그녀의 배 속에 작은 아이가 있다는 말이었다.아니, 지금은 아마 작은 콩알만 한 형태일 것이다.당황한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여러 감정이 휩싸이며 그녀는 제자리에 조각상처럼 우뚝 서서 멍하니 있었다.장화연이 노크하는 소리에 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황급히 대답을 하곤 전부 갈기갈기 찢어 변기에 버렸다.그녀는 두 줄을 나타내고 있는 그 종이를 한참을 보다가 물을 내렸다.머릿속이 복잡했다. 꼭 모든 계획이 망쳐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게다가 그녀는 자기가 사 온 임신테스트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그렇게 한참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그제야 화장실에서 나왔다.꼭 넋을 잃은 사람처럼 장화연이 물을 건네자 바로 마시고, 밥 먹으라고 하면 바로 얌전히 식탁으로 갔다.심지어 자신이 뭘 먹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밥을 먹은 후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역시나 멍하니 천장만 보고 있었다.장화연이 따듯한 우유를 가지고 들어왔을 때 혈색이라고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안색과 그녀의 멍한 눈빛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손을 뻗어 온다연의 이마에 올리며 열이 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이내 온다연에게 말을 걸었지만, 온다연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천장만 보았다.장화연은 하는 수 없이 유강후에게 연락했다.“도련님, 온다연 씨가 이상합니다. 혹시 바쁘신 게 아니라면 일찍 돌아오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유강후는 아주 중요한 회의를 열고 있었다. 그런데 장화연의 연락에 바로 회의를 중단했다.그가 급히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침 몽유병 환자처럼 거실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고 있는 온다연을 발견했다.그녀의 안색은 아주 창백했고 걸음걸이마저 다소 비틀거렸다.그를 발견한 온다연은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든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오셨어요?”유강후는 코
온다연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그녀는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정말로 싫어하는 거예요?”유강후는 혈색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녀의 안색을 보았다. 표정도 이상했다.손을 뻗어 다시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어디 아파?”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냥 조금 피곤해서 자고 싶어요.”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장화연을 보았다.장화연이 말했다.“오후에 한 번 외출하신 뒤로 쭉 이런 상태였습니다. 따라간 경호원에게 물었는데, 구월이가 뛰쳐나간 바람에 다연 씨가 찾으러 나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근처 약국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멀리 나간 것은 아니니 아마 다른 사람은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유강후의 두 눈에 분노가 점차 드리워졌다.“따라간 놈들은 대체 뭐 하고 있었기에 고양이 한 마리도 제대로 지켜보지 못하는 거지?”장화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강후는 차갑게 말했다.“행동이 빠른 놈으로 골라 당장 찾아오라고 해.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아직도 모르겠어?”장화연은 그저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네, 알겠습니다.”며칠 전 화분 사건 이후로 유강후는 전보다 더 온다연을 감시하고 있었다.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전부 유강후에게 자세하게 보고해야 했고 무슨 일이 생겨서도 안 되었다.예전에는 온다연이 혼자 집 근처쯤은 돌아다니게 했었다. 비록 그때는 멀리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자유로웠다.하지만 최근 며칠 동안 동네 산책하고 싶다고 해도 허락해주지 않았다.만약 나가고 싶다면 반드시 장화연이나 몇몇 경호원과 함께 나가야 했다.장화연은 여전히 넋을 잃은 상태인 온다연을 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도련님, 다연 씨는 이미 많이 얌전해졌습니다. 하루종일 집안에만 있다면 오히려 더 문제가 생길 겁니다.”유강후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안 돼. 지난번에 친구 사귀고 싶다고 해서 허락해줬더니 무슨 사달이 일어났는지 몰라서 그래? 장화연, 왜 점점 예전 모습 잃어가고 있는 거지?”이
온다연은 본능적으로 유강후를 보았다.유강후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그저 어둡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그의 눈빛에 놀란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두어 걸음 뒷걸음질 쳤다.“전, 전 잘못한 게 없어요. 의사한테 검사받기 싫다고 전 이미 말했어요. 약도 먹지 않을 거예요. 전 아프지 않아요. 다 아저씨가 억지로 먹이니까 먹은 거라고요!”말을 마친 그녀는 바로 밖으로 뛰쳐나갔다.‘반드시 여기서 도망쳐야 해!'‘여긴 너무 숨 막혀!'‘저 사람이랑 함께 있는 1분 1초가 숨 막혀서 살 수가 없어!'입구까지 뛰쳐나온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옷걸이에 있던 겉옷을 입었다.밖에 있던 경호원은 무슨 상황인지 몰랐던지라 온다연이 나오자 막지도 않고 그저 따라갈 뿐이다.온다연은 엘리베이터 입구까지 도착했을 때 갑자기 몸을 돌려 뒤에 있는 경호원을 노려보았다.“따라오지 마세요!”두 사람은 유강후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고 있었기에 그녀의 곁에서 한 시도 떨어질 수 없었다.하지만 눈앞에 있는 온다연이 유강후가 애지중지하고 있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고, 매번 온다연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만 하면 분위기부터 싸늘해졌기에 두 사람은 온다연에게 미움을 살 용기도 나지 않았다.연약한 온다연이 갑자기 노려보자 두 사람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대체 그녀의 말을 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이때 유강후가 나와 어둡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온다연을 보았다.“지금은 밤이야. 밖에 눈도 내리는데 어디를 가겠다고 그러는 거지?”온다연은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얼른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문이 곧 닫히자 유강후는 차갑게 말했다.“따라가. 멍하니 서서 뭐해?”두 경호원은 얼른 따라가려고 했다.그러나 엘리베이터 문은 이미 닫혀 버렸다. 두 사람은 얼른 계단으로 내려갔다.로비에 도착했을 때 온다연은 이미 밖으로 나가버렸다.두 사람은 깜짝 놀라 얼른 따라갔다.만약 온다연을 따라잡지 못한다면 두 사람의 밥줄도 끊기게 될 것이니까.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