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딸 보미가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었다. 살리기 위해선 아빠 하남우의 조혈모세포가 필요했다. 혈연 반일치 이식이라도 당장 진행하지 않으면, 아이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고은희는 수도 없이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로 돌아온 건, 싸늘하게 식은 한마디뿐이었다. [바빠.] 그 한마디를 끝으로 전화는 끊겼다. 보미가 하루도 빠짐없이 그리워하던 아빠는 그 시각, 첫사랑 여자가 낳은 딸을 위해 유리 궁전처럼 반짝이는 파티장을 꾸미고 있었다. 강변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쇼까지 준비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생일을 선물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미의 작은 손이 차갑게 식어 갈 때까지, 하남우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고은희가 장례식장을 나와 유골함을 품에 안았을 때, 번화가의 모든 전광판에서는 생일 축하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딸의 목숨을 외면한 남자. 그 남자의 첫사랑. 그리고 딸의 죽음 위에서 마음껏 환하게 웃는 아이. 세 사람은 행복하게 생일 노래를 부르며, 눈부신 내일을 꿈꾸고 있었다. 한때 고은희는 하남우를 목숨처럼 사랑했다. 이제는 그 사랑보다 더 깊이... 그를 증오하게 되었다.
View More남우는 감시실 의자에 앉아 펜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앞의 화면에는 효찬과 세준이 비공개 라운지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선명하게 잡혀 있었다....“하진그룹의 주도권은 결국 내가 가져야 해.” 세준이 잔을 흔들며 말했다. “어른들 쪽도 이미 정리해 뒀고.”효찬은 공손하게 세준에게 자료를 내밀었다. “하진그룹 최신 지분 현황입니다. 지시하신 대로 시장에 풀린 주식 5%도 조용히 확보했습니다.”...남우가 쥐고 있던 펜이 뚝 부러졌다. 검은 잉크가 흰 셔츠에 튀었다.남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으로 콘솔을 세게 내리쳤다. 손등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효찬아... 난 널 친형제처럼 믿었어.”쉰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목 안쪽으로 피비린내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화면 속 효찬의 비굴한 미소가 유독 선명하게 보였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남우 그 멍청한 인간은 아직도 제가 제일 가까운 사람인 줄 압니다.]효찬이 비웃었다. [이제 죽었을 테니 이사회도 자연스럽게 대표님 쪽으로 넘어올 겁니다.]“윽...”남우가 갑자기 피를 토했다. 붉은 핏방울이 모니터 아래쪽으로 튀었다.두 걸음 비틀린 남우는 벽을 짚고서야 겨우 서 있었다.10년이었다. 무려 10년 동안 가장 믿었던 친구가 세준이 심어 둔 사람이었다.화면 너머로 세준의 웃음이 크게 들렸다. [집안 어른들이 알면 볼만하겠지. 그렇게 아끼던 후계자가 자기 심복한테 뒤통수 맞았다는 걸 알면 쓰러지는 거 아냐?]남우는 입가의 피를 닦았다. 흔들리던 눈이 서서히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통신 장치를 눌러 명령했다. “매 사냥 작전 시작해. 누가 하진그룹을 움직이는 사람인지 확실하게 보여 주지.”창밖에는 번개가 치고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남우는 유리창 앞에서 비에 흐릿해진 도시를 바라보며 차갑게 웃었다.“여기까지 왔으면 끝을 봐야지.”...은희는 거센 비를 뚫고 약속된 폐부두에 도착했다. 머리끝에서 빗물이 계속 흘러내렸다.컨테이너 옆에 서 있는 사람을 알아본
은희는 남우를 미워했다. 그런데 그제야 알았다.미움이 남아 있다는 건, 어쩌면 사랑도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일지 모른다는 걸.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걸.그때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모르는 번호로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하남우를 보고 싶으면 오늘 밤 12시, 혼자 남쪽 부두로 와.]은희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벌떡 일어섰다.‘안 죽은 거야?’은희의 표정이 달라지자 노레드가 곧바로 가까이 다가왔다. “무슨 메시지예요?”은희는 반사적으로 화면을 껐다. 손끝이 떨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회사 일이에요.”노레드는 믿지 않는 눈이었다. 늘 냉정한 은희를 저렇게 흔들 수 있는 건 남우와 관련된 일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은희 씨.” 노레드가 어깨를 잡고 낮게 말했다. “무슨 연락을 받았든 충동적으로 움직이면 안 됩니다.”은희는 시선을 피했다. “알아요.”노레드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남우 사고는 단순한 일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하남우가 일부러 만든 판이라면 지금 섣불리 움직이는 게 계획을 망칠 수도 있어요.”“그게 아니라면요?” 은희가 눈을 붉히며 고개를 들었다. “정말 하남우에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면요?”노레드는 잠깐 침묵하다 결국 타협했다. “적어도 먼저 사람을 보내 확인하게 해 주세요.”은희는 고개를 저었다. “혼자 오라고 했어요.”“그 말 자체가 함정이라는 뜻이잖아요.” 노레드가 드물게 목소리를 높였다. “하남우의 ‘죽음’이 누군가를 끌어내기 위한 계획일 수도 있다는 걸 은희 씨도 알잖아요. 혼자 갔다가 위험해지면 하남우의 계획까지 망칠 수 있습니다.”은희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물론 알고 있었다.하지만 정말로 남우가 위험에 빠졌을지도 모른다는 단 하나의 가능성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다.“박사님.” 은희가 힘없이 웃었다. “맞아요. 함정일 가능성이 훨씬 크겠죠.”은희는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주차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그래도 그 아주 작은 가능성까지
은희는 사무실에서 서류를 검토하던 중 핸드폰에 뜬 속보 알림을 보게 됐다.[하진그룹 하남우 대표, 대형 교통사고... 차량 추락 후 폭발, 현장 사망 추정]은희의 손가락이 굳었다. 눈이 크게 흔들리며 몸까지 멈춰 버렸다.‘하남우가 죽었다고?’떨리는 손으로 기사를 열자 불에 탄 차량 잔해와 흐릿한 현장 사진이 화면에 나타났다. 기사에는 탑승자의 생존 가능성이 사실상 없다는 문장이 반복됐다.“말도 안 돼.”은희는 낮게 중얼거렸다. 손끝이 차갑게 식고 가슴이 꽉 눌린 듯 숨쉬기조차 어려웠다.남우를 미워했다. 과거의 냉정함도, 자신에게 남긴 상처도 여전히 미웠다. 하지만 죽기를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었다.은희는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다가 심한 어지럼증을 느끼고 책상을 짚었다.“은희 씨?” 노레드가 문을 열고 들어오다 창백한 은희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일이에요?”은희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뉴스에 하남우가 죽었다고 나왔어요. 사실이에요?”노레드는 잠시 말이 없었다. 최대한 은희에게 알려지지 않게 하려 했지만 결국 기사를 본 모양이었다.“현재 공식적으로 나온 내용은 그렇습니다. 차량 잔해는 확인됐지만 DNA 확인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쾅!은희의 손에서 핸드폰이 떨어져 바닥에 부딪혔다. 화면이 깨지면서 거미줄처럼 갈라졌다.입술이 움직였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시야가 갑자기 뒤집히는 듯 흔들리더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은희 씨!” 노레드가 빠르게 받아 안았지만 은희는 이미 의식을 잃은 뒤였다....은희는 아주 긴 꿈을 꿨다.꿈속에서 몇 년 전으로 돌아간 은희 앞에 남우가 햇빛 아래 서 있었다. 남우는 손을 내밀며 다정하게 웃었다. “은희야, 나랑 가자.”은희가 그 손을 잡으려 하자 장면이 바뀌었다.남우는 차갑게 은희를 밀어내며 싫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고은희, 넌 정말 사람을 질리게 해.”은희는 숨을 크게 들이켜며 눈을 떴다. 이마는 식은땀으로 젖었고 호흡이 거칠었다.“깼어요?” 노레드가 침대
“어떤 상처는 사과 한마디로 지울 수 없어요. 더구나 지금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죠?”남우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눈에 아픔이 스쳤다. “용서해 달라고 할 자격이 없다는 건 알아. 그래도 난 포기하지 않을 거야.”“뭘 포기하지 않겠다는 건데?” 은희가 비웃듯 물었다. “나를 괴롭히는 걸? 아니면 죄책감에 매달리는 걸?”남우는 가슴을 찔린 듯 숨이 막혔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은희는 더는 남우를 보지 않고 병실 밖으로 걸어갔다.남우는 그 자리에 선 채 한참을 바라봤지만 끝내 은희를 따라가지 못했다.이제 은희는 예전처럼 남우만 바라보던 사람이 아니었다.창가에 선 남우는 은희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핸드폰 화면을 무의식적으로 문질렀다.잠시 뒤 효찬에게 전화를 걸었다.“병원으로 와. 부탁할 일이 있어.”30분쯤 뒤 효찬이 급히 도착했다.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무슨 일이야?”효찬은 맑음이나 민영순의 상태와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했다.남우는 돌아서며 낮게 말했다. “소영은의 흔적을 찾았어.”효찬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정말? 어디 있는데?”영은 이야기일 줄은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외곽에 버려진 화학 공장이 하나 있어.” 남우는 주머니에서 메모를 꺼내 건넸다. “오늘 밤에 직접 갈 거야. 대신 사람을 붙여서 내 뒤를 봐 줘.”효찬은 종이를 받아 들고 미간을 좁혔다. “너무 위험해. 내가 먼저 사람들 데리고 확인해 볼까?”“괜찮아.” 남우가 고개를 저었다. “영은은 낌새만 느끼면 바로 도망갈 사람이야. 이번엔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해.”남우는 잠깐 말을 멈추고 효찬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 일은 몇 사람에게 이미 말해 뒀어. 다 믿을 만한 사람들이야.”실제로는 효찬에게만 알려준 정보였다. 효찬이 의심하지 않도록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효찬의 경계하던 표정이 조금 풀렸다.“알았어.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 붙여 둘게.”남우는 효찬의 어깨를 두드리며 피곤하게 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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