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집사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모시고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이곳의 주인은 유강후이고 온다연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순순히 집사를 따라 다시 돌아갔다.도착해보니 언제 배달을 해온 것인지 흰색 장미가 거실과 침실 그리고 정원 테이블, 심지어는 온천 풀 안에도 놓여있었다.평소라면 꽃향기를 즐겼겠지만 지금은 속이 안 좋아 집사가 건네주는 약도 얼마 안 가 또다시 토해내고야 말았다.또한 간단한 디저트도 입에 넘기지 못한 채 그대로 뱉어냈다.저녁 식사 전에 맞춰 유강후가 돌아왔다.밖은 붉은 노을이 지고 있어 아직 밝았다.유강후는 정원 의자에 앉아 있는 온다연의 앞에 나타났다.흰색 스트라이프 셔츠에 검은색 바지, 그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아주 깔끔한 차림이었다.다만 겉은 이렇게 깔끔하고 고고하면서 잔인한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다닌다.유시 가문 사람들은 하나같이 차갑고 매정하다. 유강후를 시작으로 유하령 그리고 유민준까지 모두 똑같은 인간들이다.찬 바람이 불어오자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유강후는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표정이 어두운 것이 아까의 분노가 아직 가시지 않은 것 같았다.어색한 적막만 흐르고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그러다 유강준이 발걸음을 옮겨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몇 분 후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갈아입은 옷은 역시 흰색 셔츠였고 다만 스트라이프가 아닐 뿐이었다. 옷에서는 유강후 특유의 시원한 우디향이 풍겼고 지금 있는 정원과 절묘하게 어우러졌다.온다연은 시선을 내려 바닥을 바라보며 드디어 작은 입을 열었다.“이번에는 어떤 벌을 줄 생각이에요?”유강후는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다.“내가 더러워?”온다연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내가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무려 유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인데, 재력도 있고 권력도 있는 남자인데, 경원시의 여자들이 원해 마지않는 남자를 어떻게 감히 더럽다고 생각할
온다연은 느껴지는 통증에 눈을 질끈 감았다. 입술은 여전히 앙다문 상태이다.유강후는 고집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다만 그녀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저 고통만 주는 것으로는 그의 성이 풀리지 않았다.눈을 가늘게 접었다. 두 눈에 담긴 음산한 한기는 더욱 짙어져 갔다.몸집도 아담한 온다연은 자꾸만 그의 곁에서 도망칠 뿐 아니라 성격도 앙칼진 고양이처럼 사나웠다.게다가 사람이 있을 수 있는 장소와 아닌 장소도 구분하지 못했다. 만약 오늘 그런 혼란스러운 곳에서 만난 사람이 그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무슨 짓을 당했는지도 모른다.그녀는 정말로 분별력이라곤 하나도 없는 걸까?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었으면서 이번에는 죽어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말로 고집스러웠다.보아하니 그 방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그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온다연을 보며 쌀쌀맞게 말했다.“이건 다 네가 자초한 일이야. 온다연.”손에 힘을 주자 메추리를 잡는 것처럼 그녀의 팔을 대롱대롱 들어 올려 우유를 가득 풀어둔 욕조가 있는 방 입구까지 왔다.집사가 뒤에서 나직하게 말했다.“도련님, 다연 씨는 아직 저녁을 먹지 않은 상태입니다. 벌을 주더라도 뭐라도 먹고 주는 것이 어떨까요.”유강후의 손이 멈추었다. 온다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온다연은 유강후의 손에서 벗어나 도망가버렸다.그러나 고작 두 걸음 만에 다시 유강후에게 옷깃 잡혀버렸다.유강후의 분노는 더 심해져 갔다. 강아지를 들어 올리듯 그녀의 옷깃을 잡아 올렸다.싸늘하게 굳어버린 그의 얼굴은 꼭 얼음 동굴에서 금방 나오기라도 한 듯했고 목소리엔 짙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문 열어!”집사는 고집이 센 두 사람을 보더니 살짝 고개를 저으며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안에는 크기가 조금 작은 온천탕이 있었다. 당시 유강후의 요구에 따라 임시로 만든 것이었기에 설비는 완벽히 갖춰지었지만 크기가 조금 작을 뿐이었고 아직 물을 틀어두지 않았다.유강후는 온다
유강후와 그녀는 처음부터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다른 것을 바라서는 안 되었다.아무것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멍을 때린 지 한참 지났을까, 어느새 그녀는 몸을 웅크린 자세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온다연은 온천방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유강후도 방 밖의 의자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그는 온다연이 있는 방을 한참이나 빤히 보고 있었다. 날씨가 변하고 바람이 불 때까지도 온다연은 문을 열어달라거나 잘못을 비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점점 더 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바깥의 나무들은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집사는 열쇠를 들고 유강후에게 다가갔다.“도련님, 문을 열까요? 이미 4시간이나 지났습니다. 약도 안 드셨고요.”유강후는 검은색 문을 보았다. 그 순간 인내심이 거의 바닥을 보이는 것 같았고 어두운 기운을 내뿜으며 말했다.“약 한번 거른다고 해서 안 죽어. 언제까지 고집을 부리나 지켜봐야겠어!”집사도 고개를 돌려 온천방을 보다가 조용히 열쇠를 다시 주머니 속에 넣었다.이때 유강후의 핸드폰이 울렸다. 꺼내 보던 그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한참 지나고 통화를 마친 그는 핸드폰을 넣고 다시 방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의 눈빛엔 냉기가 돌았다.“난 잠시 나갔다 올 테니까 잘 지켜봐. 만약 잘못을 인정하면 꺼내주고 계속 고집을 부리면 계속 방안에 내버려 둬. 내 허락 없이 마음대로 문을 열었다간 너도 안에 가둬버릴 테니까!”말을 마친 그는 바로 거실로 몸을 돌렸다.집사는 굳게 닫힌 문을 보곤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내 방으로 돌아가 핸드폰을 꺼냈다.“사모님, 강후 도련님의 병세가 다시 발작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네, 나중에 오시겠습니까?”“네, 알겠습니다.”...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엔 갑자기 먹구름이 가득해지더니 번쩍 번개를 치면서 비가 쏟아져 내렸다.의자에 웅크리고 있었던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추위에 몸을 떨었다.주한의 장례식을 치르던 날도 이런 날씨였다.습한 공기에 비 냄새가 섞여 환풍기 틈
놀란 온다연은 온 힘을 다해 버둥거렸다.그러나 이미 늦은 후였다. 방문이 달칵 소리를 내며 닫히고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꽉 막고 있었다.“조용히 해!”온다연은 자신의 입을 막아버린 그 손을 꽉 깨물었다. 남자는 고통에 바로 그녀의 턱을 확 움켜쥐더니 벽으로 밀쳤다.“움직이지 마. 난 널 해치러 온 게 아니니까.”낮게 깔린 남자의 목소리는 조금 허약하게 들려왔고 공기 중에는 짙은 피비린내가 섞여 있었다.피 냄새가 나든 말든 온다연은 발을 들어 마구잡이로 그를 차버렸다.남자는 다리로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게 압박하고는 차가운 흉기를 그녀의 허리춤에 가져다 댔다.“자꾸 움직이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남자가 들이댄 흉기에 온다연은 등골이 서늘해져 바로 행동을 멈추었다.얌전해진 그녀의 모습에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안으로 데리고 갔다.어둠 속에서 남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번개가 내리칠 때 언뜻 보게 된 남자의 덩치와 생김새, 그리고 까만 착장까지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겁을 먹은 그녀는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최선을 다해 진정하려고 애를 썼다. 그녀가 만난 납치범은 심지어 도망자 신세였다.이런 고급 호텔에 머무는 사람들은 대부분 부자였기에 그녀는 납치범이 돈을 노리고 자신을 납치한 것으로 생각했다. 정말로 그렇다면 사람을 잘 못 잡은 것이다.“전 돈도 없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절 잡아도 아무런 소용도 없다고요.”남자는 작게 목소리를 내면서 그녀를 다시 벽으로 밀었다.“핸드폰은 어디에 있지?”날카로운 칼이 목으로 다가오자 온다연은 함부로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했다.“핸드폰 안 가지고 나왔어요.”남자는 믿지 않았다. 그녀의 몸을 더듬으며 핸드폰을 찾아보았지만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그는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은 뒤 다시 말했다.“난 널 해치지 않아. 하지만 네 도움이 필요해.”남자의 커다란 덩치에 온다연은 두려움을 느꼈다. 이 순간 절망을 느끼며 만약 남자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면 그도 함께 저승으로 끌고
온다연은 반항도, 거절도 하지 않았다. 그가 끌고 가는 대로 얌전히 욕실로 들어갔다.들어가자마자 염지훈을 옷을 벗었다. 피 묻은 옷은 그대로 욕조 안에 대충 던졌다.“왼쪽 어깨 뒤에 있어. 난 팔이 안 닿으니까 네가 이 칼로 틈을 만들어서 손으로 빼내 줘.”말을 마친 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칼을 온다연의 손에 쥐여주며 욕조 안으로 들어가 온다연을 등졌다.온다연은 이런 것을 할 줄 몰랐다. 그저 학생 시절 실험실에서 개구리를 해부해본 게 전부였다.비록 대학 시절 응급처치 수업을 듣긴 했었지만, 이론만 배웠을 뿐 실탄에 맞은 환자를 어떻게 처치해야 한다는 것은 배우지 못했다.그녀의 손과 목소리가 같이 덜덜 떨렸다.“전 할 줄 몰라요.”염지훈은 이를 빠득 갈며 다소 다그쳤다.“빨리해. 시간 없으니까.”온다연은 덜덜 떨리는 손을 가져다 대며 칼로 염지훈의 어깨 상처 쪽을 그었다. 그러자 피가 흘러나왔다.“빨리하라고. 대체 뭘 꾸물대는 거야? 만약 온몸에 독이 퍼져 내가 죽게 되면 너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반드시 널 죽여버리고 눈 감을 테니까!”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사나워졌다.“빨리하라고!”상처에 피가 말라붙어 어느 것이 탄알인지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온다연의 손은 여전히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전, 전 정말로 할 줄 몰라요...”염지훈은 몸을 확 돌렸다.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사납게 온다연을 노려보았다.“지금 당장 빼내지 않으면 널 절대 이곳에서 내보내지 않을 거야. 그렇게 되면 나랑 이곳에서 죽는 건 물론이고 내가 죽기 전에 네 몸을 갈기갈기 찢어서 장기까지 전부 빼낼 테니 각오해!”온다연의 손은 더 심하게 떨려왔다. 쨍그랑, 결국 손에 있던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염지훈은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이를 빠득 갈았다.“유씨 집안 사람이라고 했지? 유하령은 내 친구야. 네가 날 도와준다면 유하령을 도와준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좀 도와줄래?”온다연은 빠르게 진정했다.“당신과 유하령은 대체
유강후는 다급하게 문을 쾅쾅 두드리고 있었다.온다연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고개를 돌려 염지훈을 보았다.“제가 방금 살려주었으니까 이젠 저를 살려주셔야겠죠?”염지훈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문 쪽을 힐끗 보곤 다소 어두워진 눈빛으로 혀를 찼다.“바깥에 있는 저 사람은 누군데?”온다연은 아랫입술을 틀어 물었다.“유강후에요.”염지훈은 다소 의외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온다연을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그는 잘 감아둔 붕대를 다시 풀었다. 욕조에 담가두었던 옷도 건져내어 축축한 그대로 몸에 걸쳤다.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또다시 방 안에 울려 펴졌다. 염지훈을 짜증스레 혀를 찬 뒤 욕조 커튼 뒤로 숨은 온다연의 두 발을 보며 수건으로 가렸다.“소리 내지 마.”그는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문을 열자마자 염지훈은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과 부딪쳐 비틀댔다.유강후와 몇몇 경호원이 문밖에 서 있었다. 다른 방도 하나씩 열어보는 중이었다.몇몇 경호원들은 염지훈을 밀치고 들어와 안을 대충 살펴보았다. 욕실로 들어가려 하자 염지훈이 막아섰다.염지훈은 욕실 앞에 서서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유강후를 보았다.“이러시면 안 되죠. 저도 체면이라는 게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막 들어와서 수색하면 예의가 아니지 않나요?”하얀 셔츠에 까만 바지를 입고만 있어도 유강후는 담담하고도 고귀한 태가 났다.하지만 염지훈의 눈에는 그의 분노와 자신을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 죽여버리고 싶은 듯한 잔인함만 보였다.유강후는 가만히 서서 염지훈을 보았다.“온다연은 어디에 있지?”차가운 목소리엔 분노가 가득 느껴졌다.염지훈은 혀를 차곤 자신의 몸을 가리켰다.“만약 사람을 찾고 있는 거라면 다른 방에 가서 찾아보세요. 보다시피 지금 제 상태가 말이 아니라서요. 유강후 씨를 상대할 힘도 없네요.”그의 어깨에선 다시 피가 흘러내려 팔을 타고 그대로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방안에는 온통 피 냄새뿐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흉기도 챙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유강후는 그를 빤히 보았다.
염지훈이 말을 이었다.“넌 대체 누구지? 유강후랑 대체 무슨 사이인 거냐?”온다연은 시선을 내리깐 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삼촌 겸 아저씨예요.”염지훈은 다소 의외라는 듯 몸을 돌려 온다연을 보았다.“정말로 유씨 집안 사람이었어?”온다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를 보았다.불빛 아래 그녀의 얼굴 윤곽은 더 선명해졌다. 검은 두 눈동자엔 꼭 깊은 애정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염지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넋을 잃고 보다가 몸을 돌려 피식 웃었다.“유씨 집안 사람들은 역시 미모가 뛰어나네.”온다연은 시선을 내리깐 채 계속 약을 발라주었다.염지훈도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담뱃불은 어느새 꽁초까지 내려왔고 이내 새로운 담배를 꺼냈다. 그러나 입에 물며 불을 붙이기도 전에 온다연이 확 빼앗아 재떨이에 구겨버렸다.“몸에 안 좋아요.”염지훈은 웃는 둥 마는 둥 미묘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날 이렇게나 걱정해 주는 거야?”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 탓에 그녀의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한참 지난 후 그녀는 하얀 손을 내밀며 그의 어깨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다.“얼른 병원에 가 봐요. 세균에 감염되면 엄청 귀찮아지거든요.”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다. 꼭 갓 태어난 고양이 같은 목소리였다.두 사람의 거리는 너무도 가까워 염지훈은 그녀의 체향마저 맡을 수 있었다. 그녀의 체향은 달콤한 우유 사탕 같은 향이었다.그는 눈썹을 움찔거렸다. 온다연은 피를 닦은 티슈를 던지곤 염지훈을 보았다.“염지훈 씨 맞죠? 유하령이 새로 사귄 남자친구라고 들었는데 맞아요?”염지훈은 어깨를 으쓱였다. 대답하지 않았다.온다연의 눈빛에선 막막함이 느껴졌다.“두 사람 약혼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럼 저흰 친구가 될 수 없겠네요.”염지훈의 얼굴에 잠깐 흥미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왜 될 수 없는데?”온다연은 고개를 떨구었다. 하얀 손을 꼼지락대며 부드럽고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확 당겨진 온다연은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그의 품에 안겨버렸다.피부가 맞닿은 순간 그녀는 위장 속에서부터 울렁거리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염지훈을 밀어냈다.그녀는 시선을 내리깔았다.“전 이제 정말로 가야 해요.”염지훈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한참 보다가 다소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날 이렇게 밀어낸 사람은 네가 처음이네.”온다연은 두어 걸음 물러나면서 옷자락을 꽉 쥐었다.“염지훈 씨, 전 다른 일이 있어 먼저 가볼게요.”하지만 몇 걸음 못가 염지훈에게 옷을 잡혀버렸다.“창문으로 가!”온다연은 의아한 눈길로 그를 보았다.염지현은 그녀를 창문 쪽으로 끌고 왔다.“유강후가 아직 복도에 남아 있어. 네가 문으로 나간다면 그건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을 거야. 창문으로 나가서 앞에 있는 작은 정원을 지나면 바로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는 길이 나올 거야.”말을 마친 그는 온다연을 한쪽 팔로 안아 올려 창턱에 앉혔다.“이젠 알아서 내려가.”온다연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바로 뛰어내렸다.바깥의 화단은 아주 축축했다. 온다연은 몇 걸음 못가 신발이 벗겨졌다. 허리를 굽혀 신발을 주우면서 뽀얀 속살이 드러나는 맨발로 젖은 잔디 위를 걸어 다녔다. 피부가 너무 하얀 나머지 눈에 튀었다.염지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2초간 빤히 보다가 목울대를 굴렸다.“혹시라도 갈 곳이 없으면 날 찾아와도 돼.”온다연은 감사 인사를 한 뒤 빠르게 신발을 들고 달렸다.호텔은 비록 아주 컸지만, 그녀가 갈 곳은 없었고 커다란 대문 밖도 나가지 못했다. 게다가 혼자의 힘으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결국엔 아주 조용한 구석을 찾아 숨어 들어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번쩍이는 번개와 요란한 우렛소리에 덜덜 떨면서도 숨어 있었다.비는 계속 내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머리가 점차 어질거렸고 추위에 몸이 달달 떨려왔다.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 버렸다.한 손으로 벽을 짚으면서 천천히 더 깊은 구석으로 들어갔다.또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