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바로 손보미였다.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고 있는 여자는 두 눈에서 빛이 반짝반짝 났다.이때, 댓글 창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내용이 떴다.[네가 나오는 드라마는 안 볼 거야. 연기도 못하는 게!]상대방은 곧바로 강퇴당했다.[포토샵 전문 여배우 주제에 눈꼴 사납게 하지 말고 얼른 은퇴해.]또 한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졌다.축하 메시지를 제외하고 나머지 부정적인 내용은 전부 차단되었다.도아린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연예계는 역시나 복잡했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칭찬과 욕이 섞여 있기 마련이다.손보미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자신을 비하하는 댓글 창은 애써 무시하고 김지민이 사전에 준비한 멘트를 달달 외워서 읊어댔다.공유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몰라도 라이브를 시청하는 인원수는 천 명대에서 금세 만 명을 넘어섰다.그러나 부정적인 내용도 갈수록 많아졌다.[뻔뻔스럽게 공공 자원이나 무단 점용하고!][길 걸을 때 잘 보고 다녀. 고작 발목 삐끗했다고 구급차 부르지 말고. 아리산은 안 그래도 진입하기 힘든데 구급차가 도착했을 때 이미 다 나았을지도 모르니까.]도아린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아리산? 그녀가 현재 있는 곳이지 않은가?곧이어 테라스로 나가자 저 멀리 모닥불과 촬영 중인 스태프들이 보였다.“부정적인 댓글이 너무 많아. 얼른 배 대표님한테 연락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돌려.”김지민은 이어폰을 통해 손보미에게 알렸다.“시간이 거의 다 됐네요. 미스터리 게스트에게 전화해서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해볼게요.”손보미는 휴대폰을 꺼내면서 말했다.그리고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꿀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로 물었다.“일 끝났어?”“왜?”그녀는 남자의 쌀쌀맞은 말투는 가뿐히 무시한 채 말을 이어갔다.“지금 생일 축하해주는 팬들이 엄청 많아서 너무 행복해. 항상 잘 챙겨줘서 감사하다는 말 꼭 전하고 싶었어.”배건후는 볼펜을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카메라에 못마땅한 표정이 잡히지 않도록 손보미는 미소를 지은 채 뒤를 돌아섰다.
손보미는 댓글 알바를 고용했을뿐더러 마케팅 계정도 새로 팠다.그동안 배건후와 스캔들은 생일 축하 라방 이후로 대중의 마음속에 기정사실로 자리 잡았다.게다가 인스타에 올린 게시물의 댓글은 전부 축하하는 내용으로 도배되었다.배건후가 받은 메시지는 바로 불꽃이 터지는 순간 촉촉한 눈망울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여자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었다.우정윤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이내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쾅 하고 내려놓는 상사를 보자 즉시 진상을 파악하러 자리를 떴다.10분 뒤, 그는 마지못해 다시 들어와서 보고했다.“불꽃놀이 판매사에서 김지민이 생일 축하 문구를 백년해로로 바꿔 달라고 했다네요. 그리고 검색어에 관해서는...”비록 손보미는 그다지 유명한 편이 아니지만 배건후는 연성에서 명성이 자자한 황태자이지 않은가?그의 인기에 힘입어 손보미의 팔로워는 금세 10만 명에 육박했다.라이브 방송을 지켜본 사람 중에서 누군가 클립으로 편집해서 인터넷에 업로드했는데 댓글로 손보미를 축하해주는 팬들이 있는가 하면 남자에게 빌붙는 그녀를 무시하는 배건후 추종자들도 있었다.두 세력이 서로 팽팽하게 맞서면서 곧바로 실검 1위를 장악했다....다음 날.유민정의 연락을 받은 도아린은 주현정의 주치의가 가족들을 호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우연의 일치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배건후와 거의 동시에 진료실에 도착했다.어두운 안색의 남자는 의자에 앉자마자 강한 위압감을 뿜어냈고, 의사는 저도 모르게 몸을 틀어 그나마 상냥한 태도의 도아린을 마주 보았다.“사실...”주현정의 병은 콕 집어 정의하기 어려웠다. 기준치에 부합되지 않은 항목이 하나도 없지만 그렇다고 또 치명적인 건 아니었다.현재로서 의사의 소견은 아이를 낳고 면역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면역력을 가볍게 여겼다가 큰코다칠지 몰라요. 유행성 바이러스에 한 번 걸리면 장기 부전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죠.”듣는 내내 조마조마하던 도아린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퇴원하고 나서 주의
이내 엘리베이터 층수가 빠르게 변했다.도아린이 버럭 외쳤다.“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면 그냥 집에서 썩게 놔둬요. 어쩌면 백 년 뒤에 문화재 답사할 때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배건후가 담배를 두 동강 냈다.“다시 한번 얘기해 봐.”말하라고 해서 고분고분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꿈도 참 야무지군.도아린은 지금처럼 마음이 확고한 적이 없었다. 즉,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남자한테서 도망치는 것이다.그리고 배건후가 엘리베이터에 발을 들이는 순간 잽싸게 비상구로 뛰어가 택시를 타고 집까지 갔다.주얼리를 직접 처분하는 것쯤이야! 물건을 정리하고 나서 다시 이혼을 언급했을 때 무슨 핑계를 댈지 두고 볼 작정이었다.그러나 집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비밀번호를 바꾼 사실이 떠올라 밖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다행히 가정부 아주머니가 계셨고, 안미자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얼른 문을 열어주었다.“사모님, 오셨어요? 정말 다행이에요. 그동안 사장님 음식을 준비해주다가 계속 꾸중만 들어서 월급이 곧 바닥날 것 같아요.”도아린이 까탈스럽지 않고 성격도 착한 편이라 가정부도 그녀를 편하게 대했다.“부부는 항상 티격태격하기 마련이죠. 사실 사장님께서도 속으로는 사모님 생각을 많이 하세요...”이때, 뒤에서 자동차 엔진음이 들려왔고 배건후가 집에 도착했다.도아린은 신발을 갈아신으며 너스레를 떨었다.“아줌마는 자녀가 두 명이라고 했죠? 아들 하나 딸 하나?”안미자는 어리둥절하더니 활짝 웃었다.“맞아요. 첫째는 딸, 둘째는 아들인데 장난기가 어찌나 많은지. 아빠를 제일 무서워하죠.”“이제 일하신 지도 3년이 다 되어 가는데 제가 왜 아이가 없는지 알아요? 왜냐하면 남편이 내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기 때문이죠.”입구에 서 있는 남자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고,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갔다.정작 도아린은 당황한 표정의 안미자를 뒤로 하고 유유히 2층으로 올라갔다.그녀가 집에 있는 날이면 배건후는 늘 외박했고, 혹시라도 집을
혹시 어젯밤에 불꽃놀이 한 사람이 배건후는 아닐까?머리에 불똥이라도 튀어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나?어떻게 앞뒤가 전혀 안 맞는 말도 뻔뻔스럽게 내뱉을 수 있지?자기가 그까짓 물질적인 보상에 질투가 나서 이혼을 운운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공부도 잘했다는 사람이 이해력이 이렇게 떨어져서야 원.도아린은 분노로 가득한 남자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어머님에게 비밀로 하고 거동이 불편하실 때 돌봐줄 수도 있지만 전제는 나랑 이혼한다는 것이죠.”주현정이 그녀에게 베풀어준 은혜는 최선을 다해 보답할 생각이다.반면, 배건후는 국물도 없었다.남자의 시선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손등에 핏줄이 튀어나올 만큼 그녀를 꽉 잡고 있었다.도아린은 그의 소매를 붙잡고 나지막이 말했다.“내가 스토킹할 때 건후 씨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네요. 정말 짜증 나는군.”배건후는 피라미드 꼭대기에 서 있는 사람으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기에 모든 이가 우러러보는 존재였다.자존심이 워낙 강하고 매사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는 남자가 어찌 이런 조롱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이내 옷장에서 셔츠를 꺼내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문이 닫히기 전에 쌀쌀맞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변호사한테 연락하라고 해. 그리고 넌 꺼져!”도아린은 어리둥절하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옷더미에서 휴대폰을 찾은 다음 그나마 무난하고 자주 입을 것 같은 옷을 몇 개 골라 짐을 쌌다.캐리어를 끌고 1층으로 내려온 그녀는 큰 소리로 외쳤다.“또 번복하기만 해봐요!”‘쾅’하는 소리와 함께 안방 문이 닫혔다....도아린이 서둘러 떠난 이유는 나리 병원에서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몸을 닦아주는데 손가락이 움직였어요.”간호사가 도아린에게 말했고, 두 사람은 검사 중인 의사에게 시선을 돌렸다.의사는 청진기를 목에 걸고 무덤덤한 얼굴로 설명했다.“아직 뚜렷한 징후는 없네요. 식물인간이 손가락이나 눈동자를 움직이는 건 극히 드문 현상이지만 곧 깨어난다는 뜻은 아니에요. 어쩌면 신경계
마치 자신도 피해자라는 듯이 말하다니.도정국이 그녀의 어머니와 기꺼이 결혼하기로 했던 이유도 따지고 보면 연성 사람인 배우자 덕을 봐서 대도시에서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신혼 초에는 그나마 얌전하더니 나중에 디저트 가게가 잘 되기 시작하면서 접대를 핑계로 밖에서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 심지어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오면 아들을 낳지 못한 탓에 본가에서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비난까지 했었다.“저 여자랑 결혼할 거예요?”도아린이 무심하게 말했다.도정국의 말투에 짜증이 묻어났다.“네가 진작 동의했으면 결혼하고도 남았겠지.”말을 마치고 나서 실언했다는 생각에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엠파이어 빌딩에 공실이 거의 없다고 하니 서둘러.”도아린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려는 순간 도정국이 문을 덥석 잡았다.“너도 얼른 남편이랑 애 낳고. 그 배는 어쩌면 네 엄마보다 못하냐? 결혼한 지 3년이 지났는데 감감무소식이라니. 만에 하나 밖에 있는 여자가 임신이라도 했으면 땅을 치고 후회해도 늦을 거야.”도아린은 헛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딸의 결혼이 고작 본인이 재벌 가문에 발을 들이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건가?만약 배건후와 이혼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면 당장 그녀를 목을 졸라 죽여버릴지도 모른다.이내 차 문을 힘껏 당기자 도정국의 손이 자칫 끼일 뻔했다....다음 날.도아린은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장수현의 연락을 받았고, 배건후가 보낸 대리인의 면담 신청이 있다고 했다.이내 서둘러 씻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그리고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배건후 측 대리인은 무려 툭하면 억대 소송을 진행하는 모건 그룹의 법률 고문 남궁유민이다.고작 이혼 분쟁 때문에 이렇게 대단한 변호사까지 출동시켜 으름장을 놓다니!도아린은 옆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두 변호사가 주고받는 말을 들었는데 재능 낭비는 아닌 듯싶었다.“결혼하기 전에 대표님께서 240억이라는 빚을 대신 상환해주셨고, 지난 3년간 도아린 씨 남동생의 병원비와
남궁유민은 초소형 카메라에 담긴 도아린과 협의했던 장면을 배건후에게 보내주었다.분노와 걱정이 뒤섞인 여자의 표정을 보며 배건후는 손으로 볼펜을 리드미컬하게 돌렸다.쓴맛을 좀 봐야지 정신 차리지, 아니면 시도 때도 없이 이혼을 운운하면 골치가 아팠다.배건후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미팅하러 갔다. 그리고 회의가 끝나자 우정윤이 나지막이 말했다.“남궁 변호사님이 연락이 왔어요.”남자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고, 차분한 걸음걸이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머릿속은 프로젝트의 다음 단계 진행 방향을 고민하고 있었기에 이혼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어쨌거나 바보가 아닌 이상 실수는 범하지 않을 테니까.“내가 제시한 요구는 우 비서도 알고 있으니 그대로 전달해.”즉, 에이트 맨션에 돌아가서 앞으로 이혼 얘기는 입 밖에 꺼내지도 않으면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준다는 것이다.우정윤은 침을 꼴깍 삼키고 사무실에 따라 들어서더니 문을 닫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변호사님께서 말하길 사모님이 사인했다고 하네요.”물론 나쁜 놈이라는 둥, 인간 말종이라는 둥, 비열하다는 둥, 업보를 받는다는 둥 배건후에 대한 욕설과 비방은 건너뛰고 결론만 전달해주었다.의자를 끌어당기던 배건후가 멈칫하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도아린이 동의했다니?혹시 머리가 잘못되었나?칼날처럼 날카로운 상사의 시선에도 우정윤은 고개를 끄덕였다.눈을 살짝 내리깐 배건후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고, 남자다운 턱선이 금세 팽팽하게 당겨졌다. 우정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조마조마한 얼굴로 물었다.“구청에는 언제 가면 좋을까요?”벌컥!남자는 테라스 문을 열고 싸늘한 기운을 내뿜은 채 걸어 나갔다.이내 차단을 해제하고 전화를 걸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감히 그를 차단하다니?도아린이 병원에서 주현정의 퇴원 수속을 처리하던 중 휴대폰이 문득 울렸다.“사인했어?”얼음장처럼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네.”그리고 휴대폰을 볼과 어깨 사이에 끼고 맨 뒤로 가서 줄을 섰다
입구를 지나 사라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배지유는 등골이 오싹했다.그럴 리가 없었다. 워낙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일이라 도아린은 절대 모를 것이다.주현정을 보자마자 날이 잔뜩 서 있던 도아린도 금세 표정을 바꾸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어머님, 약이랑 주의사항은 민정 아줌마한테 전달했어요.”주현정이 옆자리를 두드리며 앉으라고 손짓했다.“오늘 친구들이 내가 퇴원한다는 걸 알고 보러 오겠대. 지유는 약속이 있다고 나갔으니까 네가 남아서 같이 도와줘.”비록 손님 접대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성치 않은 몸으로 주현정 혼자서 사람을 맞이하면 힘들기 마련이다.결국 그녀는 마지못해 대답했다.어차피 재벌가 여사님의 대화에 끼어들 수 없었기에 기껏해야 과일을 자르고 차를 준비할 뿐이었다.주현정은 일반 부잣집 사모님과 달리 본인의 커리어를 갖고 있다. 비록 공개 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었지만 그녀가 설립한 JS 픽처스는 연예계에서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따라서 어떤 일은 대놓고 부탁하기 어려웠고, 사적으로 찾아와서 해결하는 게 대다수였다.과일이 준비되자 손님도 속속 도착했다. 그중에서 도아린은 성대호의 어머니 연장미만 알아보았다.여사님들은 하나같이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했지만 주현정 앞에서는 어딘가 초라해 보였다. 그리고 도아린이 내린 차를 마시며 신기한 듯 훑어보았다.“며느리가 참 예쁘게 생겼네요. 회사에서 새로 영입한 배우인 줄 알았어요.”주현정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네, 사람도 어찌나 똑똑한지.”겉모습만 그럴싸하고 머리는 텅 비었다고 비꼬려는 걸 마냥 지켜볼 그녀가 아니었다.도아린이 주방에 간 틈을 타서 한 사람이 말했다.“안색이 훨씬 좋아 보이는데 한약이 효과가 있었나 봐요?”“그러게요.”“아주 용한 한의사라고 하던데 왜 현정 씨 며느리는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죠? 설마...”“요즘 애들은 다 자기 생각이 있기 마련이에요.”사실 주현정도 손주가 간절했지만, 외부인들이 도아린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드디어 반응을 보이자 우정윤은 이때다 싶어 필살기를 날렸다.“여사님을 뵈러 손님들이 찾아와서 사모님이 접대하는 중이에요.”배건후가 문득 콧방귀를 뀌었다.“고슴도치처럼 가시 돋친 말만 골라서 하는데 누가 좋아하겠어?”우정윤은 사실 대표님한테만 날이 잔뜩 서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아니면 또 심기가 불편해지기 마련일 테니까.“사모님은 워낙 사교 모임에 익숙하지 않아 억울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겠지만 혹시라도 말실수해서 여사님까지 곤란하게 하는 건 아닌지 싶네요.”배건후는 서류를 탁 덮었다.“능력도 없으면서 설치기는! 당해도 싸.”우정윤은 즉시 입을 꾹 닫았다....그나마 주현정과 사이가 좋은 연장미가 화제를 바꾼 덕분에 분위기도 서서히 화기애애해졌다.도아린은 가끔 과일이나 차를 가져다주었고, 유민정을 도와 점심을 준비했는데 오히려 마음이 훨씬 더 편했다.식사를 마치고 여사님들은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고, 누군가 경마를 언급하자 TV를 켜고 경기를 시청했다.그녀는 이내 구석에 앉아 소유정과 문자를 주고받았다.소유정은 도성 경찰서에 가서 진행 상황을 물었지만 증거가 없다는 핑계로 처리해주기 싫어하는 눈치라고 했다.한편, 불꽃놀이 영상은 이제 실검 순위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손보미의 팬들은 여전히 공유하느라 바빴고 소유정이 [배건후는 유부남, 손보미는 내연녀]라는 댓글을 달자 금세 욕설로 도배되었다.자칭 내막을 알고 있다는 네티즌이 배건후와 손보미가 소꿉친구라는 증거를 제시하더니 배건후에게 질척이며 둘 사이를 훼방 놓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비록 실명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나열한 사건에서 유추해보면 전부 도아린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글쓴이가 누구인지는 뻔했다.손보미는 이번 화제에 힘입어 여주인공 캐스팅 확정 소식까지 발표했다. 어쨌거나 안티팬이 많으면 인기가 높다는 반증이기도 했으니까.게다가 함예진을 태그하고 앞으로 최고의 여배우한테서 열심히 연기를 배우겠다고 선언했다.물론 함예진은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