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여정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알아요. 그래서 이해해요. 아내가 집에서 기다릴 텐데 얼른 돌아가요.”임천호는 미간을 더 찌푸렸다.“네가 지금 말하는 말투가 마음에 안 들어.”말을 마친 뒤, 임천호는 마치 자신이 이 세상에 군림하는 상위자인 듯 소파에 앉았다. 그는 소여정이 자기 말을 잘 듣고 자신을 무서워하고 뭐든 순종하던 모습을 좋아한다. 자기 이익을 위해 희생까지 해준다면 더 좋고.임천호는 왕처럼 항상 남들 위에 있는 느낌을 좋아하지 소여정이 자신을 이렇게 괴상야릇한 태도로 대하는 걸 싫어한다.그리고 소여정도 예전 같았으면 눈앞의 남자에게 순종하고, 어떻게든 그의 비위를 맞추고 기쁘게 해주려고 했을 거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소여정은 마음도 힘들고 몸도 힘들어 임천호가 빨리 떠나기만을 바랐다. 때문에 말투가 부드러워지지 않았고, 태도 또한 다정해질 수 없었다.소여정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그렇다면 미안하네요. 저는 앞으로 계속 이런 태도와 말투일 거거든요.”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임천호는 소여정의 목을 움켜잡았다.소여정은 갑자기 목이 졸렸다. 임천호 뒤에 서 있던 정태곤이 앞으로 다가가려고 했지만 옆에 있던 강용재가 그를 막아섰다.임천호는 차가운 얼굴로 소여정을 바라보며 짜증스러운 듯 말했다.“나 요즘 기분 안 좋거든. 너까지 건드리지 마. 안 그러면 가만 안 둘 거니까.”소여정은 눈물이 핑 돌더니 끊어진 구슬처럼 볼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속상해서도 슬퍼서도 고통스러워서도 아니었다. 단지 자신의 인생이 너무 비참해서였다.소여정의 눈물에 임천호는 끝내 마음이 약해졌다. 그는 소여정의 목을 놓아주더니 새하얀 볼에 맺힌 반짝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미안해... 아팠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임천호는 소여정을 품에 끌어안았다.하지만 소여정은 마치 목석처럼 반항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호응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임천호가 나중에 뭐라고 말했는지 들리지도 않았다.이 순간 소여정은 한 가지 도리를 알아차렸다
임천호는 연시우 명의로 된 산업이 얼마나 있는지 모른다. 게다가 현재 본인의 사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기에 예전처럼 연시우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여자 하나 때문에 연시우의 심기를 거스를 가치는 없으니까.심사숙고 끝에 임천호는 끝내 입을 열었다.“고작 여자 하나가 뭐라고. 그렇게 갖고 싶으면 그냥 줄게.”임천호의 말을 들은 순간 소여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소여정은 자신이 임천호 곁에 이렇게 오랫동안 있었는데 상대가 자신을 고작 물건 취급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임천호는 자기 이익에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 소여정을 남에게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하하.’소여정은 이 순간 정부의 운명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소여정은 워낙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지만 임천호가 이렇게 말한 걸 들은 순간 마음이 쥐어뜯기는 것처럼 미어졌다.다만 임천호의 말에 연시우의 차갑던 얼굴에 비웃음이 섞였다.“뭐라고? 소여정을 나한테 주겠다고? 내가 좋아할 것 같아?”“내가 원하는 건... 소여정을 빼앗아 오는 것이지 네가 장난감 양보하듯 주는 걸 받는 게 아니었어. 임천호, 예전에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그 기세는 다 어디 갔어?”“계속 나 무시하고 협박해. 이러는 거 재미없어.”연시우는 미친 사람처럼 임천호의 인내심을 건드렸다.임천호가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게, 그가 타협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항상 늙은 여우처럼 머리를 쓰는 사람이라 절대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을 거다.지난 몇 년 동안 쌓은 경험과 경력 덕에 임천호는 늘 주도면밀하게 행동해 왔다. 그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을지 저울질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현재, 연시우의 실력을 알아내기 전에 그와의 사이가 틀어지는 건 임천호한테 수지가 맞지 않는 선택이다.나중에 프로젝트를 따내고 사업 운영 자금이 충분해지면 더 이상 연시우를 무서워하지 않으면 된다. 그전에는 연시우와 사이가 틀어질 필요는 없다.여우 같은 임천호는 덤덤하게 웃었다.“연 대표, 다 말했나? 할
연시우는 갑자기 소여정을 품에 안고 강하게 입맞춤했다.소여정은 힘껏 몸부림치며 필사적으로 연시우를 밀어냈다.“연시우, 너 미쳤어?”연시우는 냉소를 흘렸다.“아니, 나 정신 아주 또렷해. 너 남의 정부로 살기 좋아하잖아. 남자를 만족시키고 남자 손에 놀아나는 거 좋아하잖아. 내가 만족시켜 줄게.”소여정은 믿기 힘든 눈빛으로 연시우를 바라봤다. 누구든 이런 말을 할 수 있어도 연시우만은 안 된다. 그가 아무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탓하더라도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모욕할 수는 없었다. 그건 자신을 모욕하는 것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추억마저 모독하는 것이니까.소여정한테 그때의 기억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순수한 추억이다. 때문에 그때의 감정이 더럽혀지기를 원치 않았고, 그 사람이 자신을 사랑했던 남자이길 원치 않았다.소여정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투명한 눈물이 새하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소여정은 순간 가슴이 식어 내렸다. 이건 그녀가 가장 바라지 않던 장면이지만, 벌어졌다고 해도 어찌할 수 없는 장면이다.“연시우, 제발 이거 놔줘.”늘 고고하기만 하던 소여정은 처음으로 연시우한테 애원했다.다만 그 애원은 연시우의 동정과 연민을 불러일으킨 게 아니라 오히려 그를 더 흥분하고 미치게 했다.“뭐라고? 제발? 소여정, 너도 나한테 애원하는 날이 오네? 이날이 오기까지 참 어려웠어. 난 또 네가 얼마나 잘났나 했지. 이렇게 쉽게 굴복할 줄 몰랐네.”“재미없어. 그래도 예전처럼 고고한 태도로 나를 무시하길 바랐는데. 하지만 그런다고 내가 놔줄 것 같아? 꿈 깨!”차갑고 날카로운 연시우의 눈빛에는 아무 감정도 없었다.소여정은 그제야 연시우가 자기한테 더 이상 아무 애정도 남지 않고, 단지 혐오만 남았다는 걸 알았다.연시우가 소여정의 몸을 원하는 건 그녀에게 마음이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즐거움을 느끼려는 것뿐이었다.소여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연시우의 뺨을 후려치더니 갈라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꺼져!”하지만 그 뺨도 연시우의
“왜? 왜 그래야 했는데? 왜 나를 배신했어?”미친 척 구는 연시우 때문에 소여정은 손목에서 심한 통증이 느껴져 필사적으로 버둥대며 소리쳤다.“내 일에 상관하지 마. 너한테 할 말 없어. 연시우, 우리 이미 헤어졌어. 이거 놔.”연시우는 짜증 나는 듯 소여정을 놓아주고는 휴지로 손을 닦았다. 마치 소여정이 더럽다는 듯.그 모습에 소여정의 가슴은 찢기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늘 자신만의 갑옷으로 자신을 꽁꽁 싸매고 보호해 왔기에, 자기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차가운 얼굴로 연시우를 바라봤다.“이제 됐어? 됐으면 나가. 여기는 너 안 반기니까.”연시우는 갈 생각이 없는 듯 아예 소파에 앉았다.소여정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뭐 하려는 거야?”연시우가 피식 웃었다.“뭐 하긴? 임천호를 죽이고 너도 비참하게 해주려고 그러지. 임천호가 이 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걸 볼 수 있다고 했지? 그러니 여기서 기다리려고.”소여정은 그제야 연시우가 온 목적을 알아챘다. 다만 연시우가 이렇게까지 변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지금의 연시우는 마치 미치광이 같았다.연시우는 임천호를 무너뜨리려는 것도 모자라 이런 방식으로 임천호를 모욕했다.소여정은 심호흡했다.“임천호한테 복수하는 건 상관 안 해. 하지만 나한테까지 피해주지 마.”“피해? 하하... 너 임천호 여자 아니야? 임천호 사랑하잖아? 이럴 때 임천호랑 같이 어려움을 나눠줘야 하는 거 아니야?”연시우의 말투는 왠지 이상야릇했다.소여정은 차갑게 말했다.“날 가르치려 들지 마. 연시우, 당장 나가.”연시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소여정은 결국 화가 나서 소리쳤다.“안 가겠다 이거야? 그래, 내가 갈게.”소여정은 외투를 챙겨 뒤돌아섰다.그때, 연시우가 소여정의 팔을 잡아당겨 그녀를 소파에 내동댕이쳤다.소여정은 결국 폭발했다.“연시우, 뭐 하자는 거야?”연시우가 차갑게 말했다.“똑똑히 봐. 내가 어떻게 임천호를 짓밟는지. 너도 내 앞에 무릎 꿇고 빌어야 할 거야.”“소여정, 내
나와 소여정은 동시에 굳은 채로 서로 시선을 교환한 뒤 연시를 바라봤다.연시우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로 다가왔다.“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여기서 다 만나고.”소여정은 의아한 듯 물었다.“전에 만난 적 있어?”나는 사실대로 말했다.“제가 연 대표님 진찰 도와준 적이 있어요. 그때 한번 봤어요.”“어디 봤다 뿐인가? 내가 질문도 엄청 많이 했는데. 호기 뭘 물었던지 기억해요?”연시우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신사다운 모습으로 물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나를 꿰뚫을 것처럼 날카로웠다.그 모습을 보니 왠지 연시우라는 사람도 남 앞에서 연기를 참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바보 같았다.나는 연시우의 말에 대답하기 싫어 대충 얼버무렸다.“잊었어요.”“하하.”연시우는 이상한 웃음소리를 냈다.‘뭘 웃어? 돈 좀 많고 지위 좀 있다고 다야? 어디서 내 앞에서 잘난 척이야?’‘그런 거 나한테 안 통하거든? 무섭지도 않아.’“혹시 다른 용건 있나요? 없으면 전 이만 가볼게요.”나는 살짝 귀찮은 투로 말했다.연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두 눈빛은 무척 차가웠다.내가 연시우를 막 대하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때문에 내가 이토록 무례한 게 자신을 경멸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듯싶었다.연시우는 내 태도에 자존심이 긁혀 화가 나 있었다.J시에서 가장 젊고 우수한 기업가로서, 거물급 인사들마저 자기를 연 대표님이라 부르며 예를 갖추는데, 내가 건방지게 행동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연시우 생각에 나 같은 사람은 이런 태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처럼 자기 앞에서 전전긍긍해야 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게 맞다.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약상자를 들고 떠났다.그러다가 문밖으로 나가기 전 일부러 문 앞에 잠깐 머물렀다. 왜냐하면 복도에 카메라가 있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임천호가 나를 볼 수 있었다.내가 오늘 이곳에 온 진정한 목적은 이거였다.나는 문 앞에 잠시 서 있다가 떠나갔다.임천호가 나를 봤을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내가 애정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돈 부족한 것도 아닌데, 왜 남의 정부 노릇을 하겠어?”“그리고, 정부가 되면 남몰래 만나야 할 텐데, 상대가 우리 그이처럼 나를 잘해주겠어?”이영미는 화가 난 듯 반박했다.이영미가 이런 태도로 반박하니 나는 오히려 시름이 놓였다.“그렇다면 다행이고요.”“됐어. 나 이제 가볼게.”이영미는 허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떠나갔다.비록 이영미가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한 의도를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더 이상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모두 떠난 뒤 나는 임천호의 일을 생각했다.낮에 바로 임천호를 거절했는데, 이제는 오히려 도와주겠다고 해야 한다니. 게다가 소여정을 통해 다리를 놓아야 한다니.나는 형수에게 전화해 오늘 밤에는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형수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전화를 끊은 뒤 나는 곧장 소여정한테로 갔다.다만 놀라운 건, 그곳에 임천호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연시우였다.연시우가 소여정이 사는 곳에 나타난 걸 본 순간, 나는 순간 멍해졌다.그도 그럴 게, 연시우가 이곳에 나타날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으니까.소여정은 연시우가 뒤끝 있는 사람이라고 했었다. 두 사람이 헤어지고 연락을 끊은 지도 이제 10년이 넘고.게다가 소여정이 말하길, 연시우가 이번에 강북에 온 건 순전히 임천호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고 했다.하지만 연시우가 여기 나타난 건 대체 무슨 뜻이지?내가 연시우를 보고 있을 때 연시우 역시 나를 보고 있었다.그 차가운 눈빛에 나는 온몸이 불편해졌다.하지마 나는 이내 적응하고는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갔다.“소여정 씨.”주방에서 나와 나를 본 소여정은 흠칫 놀라더니 이내 내 앞으로 걸어왔다.“여긴 어쩐 일이야?”“몸이 안 좋잖아요. 진찰하러 왔어요.”내 말에 소여정은 ‘아’라고 짤막하게 감탄하더니 이내 원래 모습대로 회복했다.“나 아직도 머리 아파. 감기가 아직 안 나았나 봐. 정 선생이 좀 봐줘.”소여정은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