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주 누나는 숨을 크게 들이켜고는 말했다.“이혼하자면 맨몸으로 나갈게. 양육권도 당신이 가져. 당신 정말 좋은 사람이야. 아들도 당신과 함께 지내면 좋은 교육 받을 거야.”“나는 좋은 엄마 아니야. 좋은 아내도 아니고. 내가 아들 망치게 하지 마.”고정훈은 끝내 눈시울이 붉어졌다.“딴 놈의 유혹을 그렇게 못 뿌리치겠어? 나 하나로는 만족 못 하겠어?”“당신은 좋은 사람이야. 다정하고 젠틀해. 속궁합도 잘 맞고, 나와 내 친정에도 잘해줘.”“그런데 왜 그랬어?”고정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남주 누나는 또 한 번 숨을 크게 들이켰다.“내가 나쁜 여자라 그래. 천성이 노는 걸 좋아해서 사실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어.”고정훈은 마음이 아팠다. 아내는 그가 너무 정직하다고 재미없다고 탓하지 않고 모든 잘못을 자기한테로 돌렸다. 그 때문에 순간 해야 할 말을 잃었다.“난 이혼하기 싫어. 이혼은 생각도 안 해 봤어.”고정훈이 자기 생각을 말했다.하지만 남주 누나는 이혼을 고집했다.“나 안 변해. 모든 걸 알고도 나랑 예전처럼 지낼 수 있어? 우리는 점점 간극이 생길 거고, 자주 싸울 거고 모순은 날로 커져만 갈 거야. 난 그런 날이 오는 게 싫어. 아름다울 때 끝내는 게 좋잖아?”고정훈의 눈시울은 붉었다.“그런데 난 당신 사랑해. 헤어지기 싫어.”남주 누나는 고개를 돌린 채 상대의 눈을 피했다.그동안 부부로 지냈는데, 아무 감정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다.남주 누나도 사실 고정훈과 헤어지기 아쉬웠다. 하지만 본인이 앞으로 얌전히 지낼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누나는 본인한테 자신이 없었다.고정훈은 남주 누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우리 다시 시작하자. 당신도 노력하고, 나도 노력하면 돼. 행복한 가정 유지하는 거 어렵잖아. 이대로 무너지는 거 싫어.”“그런데 내가 한 일 정말 신경 안 쓸 수 있어?”고정훈은 도리질했다.“난 알아. 당신은 그저 놀기 좋아하는 거지, 그 남자들을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 그냥 재미 좀 본 거라고 생각하고
“수호 씨, 정말 뛰어갈 거예요? 몸도 아직...”애교 누나는 걱정스러운 눈빛에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누나, 저 결심했어요. 이제부터 바뀔 거예요.”“그럼 나도 같이 뛰어요. 수호 씨 혼자 두고 가는 건 마음 놓이지 않아요.”“아니에요. 운전해서 돌아가요. 전 혼자서도 괜찮아요.”애교 누나는 내 고집을 꺽지 못해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그 길로 뛰기 시작했다.사실 뛴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조깅에 지나지 않았으니까.몸이 아직 낫지 않아 도저히 달릴 수가 없었다.나는 밤거리를 걸으며 바람을 쐬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이네.’임천호는 절대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고, 정태곤도 또 나타날 건데.그렇다고 양동준 형님더러 계속 지켜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나는 반드시 강해져야 한다.하지만 강해지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얼음이 삼척 깊이까지 얼려면 하루 이틀 춥다고 되는 게 아닌 것처럼, 양동준 형님처럼 강해지는 건 절대 며칠 만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마사지숍으로 출근하는 것 외에 매일 시간 내서 운동해야겠네.’우선 체력부터 끌어올려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그리고 나는 싸우는 기술도 배우고 싶었다.설령 상대를 이기지 못하더라도 도망칠 기회를 만들 정도는 되고 싶었다. 아니면 또 용천 호텔에서처럼 상대한테 꼼짝도 못 할 테니까.내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취객 여러 명이 싸우고 있었다.4명이서 한 사람을 때리고 있었는데, 그걸 본 순간 가운데서 맞고 있는 사람이 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맞고 있는 사람이 반항하는 건 의외였다.그리고 비법을 하나 발견했는데, 상대의 사타구니를 발로 차는 거였다.그 방법은 백발백중이었다.사타구니를 걷어차인 사람은 순간 전투력을 잃게 된다.나는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처럼 그 기술을 기억했다. 나한테는 그게 참 유용한 기술 같았으니까.특히 여러 명한테 맞고 있거나 상대가 나보다 강할 때, 위기에서 빨리 벗어날 수
민우도 거친 숨을 몰아쉬었지만 이를 악물고 말했다.“4명이 나 한 명 때리는 건 매너 있고?”“그러게 누가 우리 흥을 깨?”민우는 손을 휘휘 저으며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헛소리 그만해. 여기가 너네 구역도 아니고, 나도 엄연히 돈 내고 소비한 건데 안 될 거 뭐 있어?”여기서 잠깐 설명하자면 이 다섯 명이 싸운 곳은 바비큐 가게다.아마도 식사를 하다가 모순이 생긴 모양이었다.4명 중에 꽃부리 셔츠를 입은 놈이 가장 험악하게 생겼는데, 동시에 민우한테 가장 처참하게 맞은 놈이기도 했다.놈들은 모두 가랑이를 맞아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그 꽃부리 셔츠의 표정이 가장 괴로워 보였다.“젠장, 4명이 너 하나 못 이기면 앞으로 얼굴 들고 못 다니지. 이렇게 하자, 우라도 한 명씩 네 가랑이 차게 해주면 오늘 일은 그냥 넘어갈게.”민우는 음산한 표정을 지었다.“누굴 바보로 아나? 한 사람이 한 번씩 차면 앞으로 남자구실을 어떻게 해? 먼저 시비 건 사람은 네놈들이잖아. 맞아도 싸지. 졌으면 나보다 실력 부족한 걸 인정해야지.”그때 키 작은 놈이 말했다.“너보다 실력이 부족한 거 아니거든. 너보다 비겁하지 못한 거지. 집요하게 거시기만 노리는 놈이 어디 있어? 넌 없냐?”“풉...”나는 참다못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그 웃음소리에 네 놈이 동시에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순간 아차 싶었다.키 작은 놈이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봤다.“너 웃었어? 네 거시기 터뜨린다?”‘젠장. 난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설마 나로 화풀이하는 건 아니겠지?’‘아하, 민우한테는 상대가 안 되니까 만만한 나를 노리는 거네.’‘내가 만만해?’‘정태곤이 나를 무시하는 것도 분한데, 같잖은 것들까지 나를 무시해?’“그래? 어디 해 봐.”나는 순간 욱해서 이대로 약하게 보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정말 여기저기서 무시당할 테니까.게다가 내 옆에 민우도 있고, 꽤 강한 것 같으니 겁날 것도 없었다.이 상황에서 겁내면 너무 쪽팔리잖아?키 작은 놈
민우는 여전히 용맹했다. 혼자서 셋을 상대하는 데도 세 놈만 연신 비명을 질러댔디.그러다 결국 네 놈은 함께 줄행랑쳤다.나는 몸 이곳저곳이 아프고 쑤셔 눈물이 찔끔 나왔다. 하지만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민우를 바라봤다.“친구야, 너 싸움 진짜 잘한다. 그동안 어떻게 숨겼대?”‘대학 때는 전혀 몰랐는데.’민우는 나를 부축했다. 하지만 그도 몸 여기저기 아픈 모양이었다.아무리 그 기술이 강하다지만 상대는 4명이다.서로 치고받고 싸우다 보면 쪽수에 밀릴 때도 당연히 있었을 거다.하지만 나보다 몇 배는 강하다는 건 사실이었다.우리는 서로를 부축하며 길가에 앉았다.내 팔에 두르고 있던 붕대는 끊어져서 면처럼 대충 감겨 있었다.게다가 뼈도 또 부러진 모양이었다.민우는 상처투성이인 내 모습을 보더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수호야, 미안해. 너까지 끌어들여서.”“친구끼리 뭘 이런 일로 사과해?”“어제 같이 밥 먹자고 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난 김에 같이 먹을래?”민우는 내 팔을 보더니 말했다.“우선 상처부터 치료하자. 제때 치료하지 않다가 장애라도 남으면 어떡해? 난 너 평생 책임 못 져.”“별거 아니야. 그냥 팔 조금 부러진 거야. 병원 가서 치료하면 돼.”“그래, 병원부터 가자.”민우는 나를 부축해 작은 진료소에서 상처를 치료했다.그 우리는 작은 식당을 찾아 음식과 술을 주문해 먹으면서 얘기했다.나는 민우가 왜 이 지경이 됐는지 물어봤다.그러자 민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말도 마. 되는 일이 없어. 난 정말 재수 없는 놈인 것 같아.”“너 졸업하자마자 병원에 인턴으로 들어갔잖아?”“맞아, 하지만 내가 좀 직설적이라 우리 과 상사한테 미움을 샀거든. 그 뒤로 나를 어찌나 괴롭히는데, 결국 참지 못해서 나왔어. 그 일이 있고 나서 다른 병원도 가보고, 약국도 가보고, 심지어 진료소도 갔었는데 내 성격 때문에 다 오래 버티지는 못했어.”“설아 부모님은 나에게 미래고 없다면서, 서아한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으니 헤어지라고 하더라
아직 너무 늦은 때는 아니라 사장님이 잠들지 않았을 거라는 걸 알았기에, 나는 얼른 문자를 보냈다.사장님은 곧바로 답장을 했다.[그래요. 내일 하루 일해보라고 해요.]나는 핸드폰을 민우 쪽으로 들이밀었다.“우리 사장님이 내일 하루 일해보라는데?”민우는 흥분하면서 나에게 술을 따라주었다.“수호야, 넌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해준 부모님이나 다름없어. 자, 받아.”“야, 뭐 오버하고 그래?”민우는 한꺼번에 술 한 잔을 비우더니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오버 아니야. 넌 몰라서 그래 내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일도 마음대로 안 되지, 연애도 안 되지, 설아 부모님한테 무시나 당하지. 가끔은 사는 게 공기 낭비라는 생각도 들더라.”나는 다급히 말했다.“누구나 다 가치 있어. 절대 허튼 생각 하지 마.”“그런데 난 가치 있을까? 부모님 속 뒤집어 놓고, 설아 슬프게 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줄 아는 게 뭐 있어?”“네 가치는 네 존재 자체야. 그것 자체가 희망이야.”이건 내가 책에서 본 구절이다. 그때 참 마음이 힐링 되는 느낌이었는데.민우는 내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내 어깨를 툭툭 토닥였다.“그런 말 해줘서 고마워. 절망 속에 있는 나를 꺼내줘서 고마워. 솔직히 너 만나기 전에는 사는 게 희망이 없었어. 그런데 다시 희망이 생긴 것 같아.”나도 따라서 웃었다.“그럼 다행이고. 뭐가 됐든 목숨은 하나야. 절대 바보 같은 짓 하지 마.”우리가 한창 얘기하고 있을 때 민우의 핸드폰이 진동했다.민우는 전화를 받지도 끊지도 않았다.액정을 보니 설아 이름이 적혀 있었다.나는 문득 의아했다.“임설아 전화인데 왜 안 받아?”“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민우는 고민스러운 듯 말했다.“너 내일 일자리 면접 보러 가잖아. 좋은 소식을 알려줘야지.”“될지 말지도 모르는데, 뭘 말해?”“무조건 합격할 거야. 나 믿어 봐. 우리 사장님 엄청 좋은 분이셔. 게다가 요즘 연달아 두 명이 그만둬서 마침 일손이 모자라. 너도 한의학
“나도 피하고 싶지 않아. 그런데 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헛소리 그만해. 나 지금 너 보고 싶어. 만날 거야 말 거야?”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라는 사인을 보냈다.하지만 민우는 여전히 망설였다.“나... 우리 내일 만날까? 내일 면접 성공하면 만나자. 실패하면... 다른 사람 찾아.”“다른 사람 찾으라니,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야? 신민우, 너도 내가 맨 처음 좋아한 사람이 너 아니라는 거 알지? 그런데도 결국은 너랑 만났어. 나 임설아는 한 입으로 두말 안 해. 너랑 같이 있기로 했으면 절대 다른 사람 안 만나.”“우리가 몇 년을 만났는데, 다른 사람 찾아가라고? 너 죽고 싶어?”임설아는 울면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옆에서 그걸 듣고 있는 내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임설아가 이렇게 당돌할 줄이야.민우는 된통 욕을 먹고는 쩔쩔맸다.“나, 나도 이러기 싫어. 내가 너무 쓸모없는 놈이라서 그래.”“그래, 너 쓸모없는 놈 맞아. 어떻게 3년을 만났는데 털끝 하나도 안 건드려? 내가 뭐 조선시대 종갓집 규수라도 되는 줄 알아? 내 의견은 물어봤어? 난 너랑 결혼하고 싶고 백년해로하고 싶은데, 딴 놈 만나라고? 신민우, 우리 만나. 내가 너 죽여버릴 테니까...”임설아는 더 펑펑 울었다.민우 역시 눈물을 흘렸다. 사내놈이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설아야, 미안해...”“미안하다는 소리 듣기 싫어. 애초에 나한테 했던 약속이나 지켜. 평생 나 아니면 결혼도 안 하겠다고 했잖아. 나 그거 진담으로 받아들였으니까 말한 대로 약속 지켜.”나는 얼른 민우 어깨를 두드리며 정신 차리라고 귀띔했다.임설아처럼 좋은 여자애를 놓치면 민우는 분명 후회할 거다.민우는 내 격려를 받고 심호흡했다.“좋아. 임수거리에서 기다릴게, 마침 옆에 수호도 있어.”“수호? 어떤 수호?”“정수호. 우리 대학 동기. 네가 좋아했던 애.”“네가 말 안 하면 잊을 뻔했네. 둘이 어떻게 만났어?”나는 멍하니 둘의 대화를 들었다.
두 사람은 조금 뒤 보기로 약속했다.민우는 신이 나서 말했다.“수호야, 여기서 기다려. 나 설아 데려올게.”“난 됐어. 둘이 만나는데 내가 왜 끼어?”민우는 다급히 말했다.“안돼, 넌 내 은인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난 지금까지 설아를 피하고 있었을 거야. 나 설아 앞에서 너한테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어. 내 말 들어. 기다려.”말을 마친 민우는 신이 나서 전기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버렸다.민우가 떠난 뒤, 나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설아와 대화했던 내용을 뒤져봤다.특히 어제 받았던 음성 메시지를. 지금까지도 그 목소리를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것만 같았다.나는 모든 대화 내용을 삭제했다. 이러면 증거가 없어질 테니.그때 임설아가 내 카톡으로 문자를 보냈다.[안녕하세요. 나 임설아 엄마예요. 어젯밤 설아 핸드폰으로 대화한 건 그쪽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어요. 우리 설아랑 뭐 있죠?]‘귀신을 속여라.’‘아주 본인이었다고 광고를 해!’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협조했다.[어머님이셨군요. 저와 임설아는 그저 평범한 친구입니다. 아무 관계도 아니니 오해하지 마세요.]임설아는 나에게 또 문자를 보냈다.[믿어요. 어제 보낸 음성 메시지 역시 테스트 일종이니 다른 사람과 말하지 말아요.]나는 웃으며 임설아의 문자에 답장했다.[네, 그럼요. 하지만 좀 궁금하네요. 혹시 어제 저를 테스트하려고 스스로 한 거예요?]임설아는 화가 난 이모티콘을 보내왔다.[어른한테 못하는 말이 없군.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나? 당연히 인터넷에서 찾았지.][그렇군요. 알겠어요. 부모님 마음은 다 똑같잖아요. 이해해요. 그러면 그 사진은요? 어떻게 딸 사생활이 담긴 사진을 폭로하는 사진은 마구 배포할 수 있어요?][사진으로 유혹하지 않으면 속았겠어요?][네, 참 촐명하시네요.]‘얼마나 똑똑했으면 낯선 남자를 시험하려고 자기 딸의 사생활이 담긴 사진을 보내지?’‘이런 말은 귀신도 안 믿겠어.’대화를 하면 할수록 어이없는 일의 연속이었다.심지어 임설
“수호야, 너 그게 무슨 말이야?”민우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나는 솔직히 대답했다.“남자가 그립다던데?”“어, 정말이야?”신민우의 표정은 더욱 이상해졌다.“설아 어머니 남편 있는데?”“남편이 있는데 뭐? 남편이 있다면 만족시켜 주지 못하나 보지. 임설아 아버지도 중년이라서 기능이 많이 약해졌나 보지, 반대로 어머니는 오히려 욕구가 많을 나이고.”나는 덤덤한 얼굴로 헛소리했다. 그러다가 임설아를 바라봤다.“임설아, 안 그래?”“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임설아는 나를 향해 소리쳤다.그 모습을 보니 왠지 헛웃음이 나왔다.‘그러게 왜 자기 어머니를 방패막이로 사용해? 내가 바보인 줄 아나?’‘네가 놀겠다니 같이 어울려주는 거야.’“임설아, 네 어머니 병원에 좀 데려가 봐. 안 그러면 참다가 병 나.”사실 이 말은 임설아에게 하는 충고였다. 병원에 한번 가보라고.왜냐하면 임설아 낯빛을 보니 확실히 정상은 아니라는 게 티가 났으니까.임설아는 나를 휙 째려봤다.“너나 잘해. 민우야, 나 오늘 집에 가기 싫어. 네 자취방 가고 싶어.”퉁명스럽게 나를 쏘아붙인 임설아는 얼른 민우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그 말을 들은 민우는 안색이 변했다.“뭐? 내 자취방에?”민우는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얼른 테이블 아래로 그를 걷어찼다.‘아까 말한 걸 모두 잊었나?’사실 민우는 걱정이 있었다. 지금 그가 사는 곳은 환경이 안 좋아 임설아가 자기와 함께 고생하는 걸 원치 않았다.하지만 내가 자꾸만 발로 툭툭 차며 임설아를 집에 데려가라고 일깨워 주니 갈등이 생긴 모양이었다.옆에서 그 모습을 보는 나만 조급해 났다.‘나였으면 진작 동의했을 텐데. 이러니까 임설아가 불만이 많지.’“설아야, 아니면 내일 내 일자리가 확정되고 다른 자취방을 알아보면...”그 말을 들은 설아의 낯빛은 이내 어두워졌다.“또 변명이야? 매번 왜 변명이 그렇게 많아? 난 그저 너랑 하룻밤 같이 있고 싶을 뿐인데, 왜? 그게 그렇게
“서 사장님, 괜찮습니까?”“서 사장님...”룸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잇달아 서윤기를 부축했다.서윤기는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지만 코에서 이미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모두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젠장. 누군데 서 사장님을 때려?”사람들은 나를 보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서윤기가 손을 뻗자 사람들은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서윤기는 휴지로 피를 닦더니 나를 싸늘하게 바라봤다.“정수호, 이런 우연이 다 있네. 이렇게 큰 Y시에서 다 만나고.”나는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정 사장님이 여기로 인도해 주셨어. 네놈이 여기 있는 줄 알고 너 처리하라고 여기로 이끌어 주셨어.”서윤기는 그 말에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정호섭 말이야? 그렇다면 좋겠지만 정호섭이 그럴 수 있어? 그렇게 신통하다면 왜 자기 죽음도 못 막았겠어?”정 사장님이 불상사를 당한 뒤 모든 사람이 비통했는데, 서윤기는 오히려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는 울화가 치밀어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룸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나를 막아섰다.그때 이동민이 굳은 얼굴로 나에게 걸어왔다.“젠장. 감히 내 앞에서 서 사장님께 폭력을 써?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이동민은 키가 크고 덩치가 산만 했다. 듣기로 이동민은 예전에 백정이라서 아주 포악했었다는 말도 있다.나 역시 그의 몸에서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도살업자는 설령 그 일을 그만두더라도 피부와 핏속까지 스며든 피비린내를 지우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이동민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커다란 주먹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두 주먹이 부딪히는 순간 나와 이동민의 표정은 동시에 일그러졌다.이동민은 내 주먹이 그렇게 단단할 걸 몰랐는지, 아니면 내가 자기 주먹을 받아낼 줄 몰랐는지 살짝 당황했다.나 역시 꽤 센 이동민의 주먹에 흠칫 놀랐다.싸움을 배운 뒤로 나는 이 정도 상대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주먹끼리 부딪힌 뒤 한동안 팔이 저리더니 잠
버섯전골은 Y시 명물이라 다른 곳에서는 먹을 수 없다. 어느새 냄비 안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방안 전체에 퍼져 버섯 냄새가 가득했다.윤지은은 사모님한테 음식을 집어주며 말했다.“유미야, 너 요즘 밥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많이 먹어.”“그만 집어 줘. 내가 직접 먹을 수 있어. 두 사람도 먹어.”우리는 묵묵히 전골을 먹었다. 그동안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 분위기는 다소 조용했다.나는 몇 번이나 분위기를 띄워주려고 했지만 사모님이 별 반응이 없고, 윤지은도 협조하지 않아 혼자 원맨쇼를 하는 느낌이 들어 포기했다.“차 마시고 싶어...”사모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제가 물어볼게요.”무엇보다 나는 어렵게 말을 꺼낸 사모님의 요구를 얼른 만족시켜 주고 싶은 생각뿐이었다.나는 얼른 밖으로 나가 큰 방을 지나다가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걸 보고 무의식적으로 안을 들여다봤다.그랬더니 내 눈에 익숙한 실루엣, 서윤기가 들어왔다.‘서윤기가 Y시에 왔다고?’나는 얼른 몸을 숨긴 채 안대성에게 전화했다.“서윤기를 감사하라고 했잖아. Y시에 온 건 왜 말 안 했어?”[네? 서윤기가 Y시에 갔다고요? 몰랐는데요? 형님, 제가 부하들한테 서윤기 잘 감시하라고 시켰는데...]안대성은 자기가 말실수했다는 걸 인지하고 얼른 입을 막았다. 그 순간 나는 당장 놈을 발로 걷어차고 싶었다.나는 얼른 전화를 끊고 룸 안을 훔쳐봤다.룸 안에는 서윤기 외에 Y시 현지인으로 보이는 남자 몇 명이 있었다. 그중 한 중년 남성은 왠지 낯이 익었다.나는 몰래 중년 남자의 사진을 찍어 판자촌 노랑머리에게 보냈다.[이 사람 알아요?]노랑머리는 곧바로 답장했다.[그 사람은 이연화의 아버지 판자촌 터줏대감 이동민이에요.]‘젠장.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이연화와 닮았잖아.’‘이동민이 여기 나타난 데다 서윤기와 웃고 떠드는 걸 보니 설마 정 사장님 교통사고가 서윤기 짓인가?’나는 그럴 가능성이 무척 크다고 생각했다.서윤기가 강북 시장
“한 번에 천만 원? 여기가 뭔 금은방인 줄 알아요?”나도 이제는 돈 좀 있지만 한 번에 음식점에 천만 원을 충전하는 건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북에서 최고급 호텔 멤버십에 가입하는 것도 고작 몇백만 원인데, 길가에 널리고 널린 버섯전골 집이 멤버십 카드만 천만 원이라니?매니저는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돈 없으면 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얼른 나가요.”“잠깐!”나는 언성을 높였다.그러자 매니저가 나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왜요? 또 무슨 일이죠?”나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난 이 가게가 악의적으로 손님들에게 소비를 강요한다고 의심되거든. 그래서 지금 신고할 생각이야.”내가 신고하겠다는 말에 매니저는 얼굴색이 싹 바뀌더니 나를 삿대질하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당신 미쳤어? 본인이 밥 먹을 돈 없으면서 왜 남의 가게를 신고해?”“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더니, 왜? 내가 신고할까 봐 두려워? 불법 경영한 거 걸릴까 봐 걱정돼? 그렇다면 더 신고해야겠네. 이렇게 부도덕한 가게는 문 닫아야 하니까.”윤지은은 네 행동을 지지했다. 심지어 사모님 역시 이 일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나는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이 없었는데 매니저의 태도가 너무 괘씸해 밥을 먹지 못하더라도 이분을 풀 생각이었다.내가 정말 전화하자 매니저는 이내 태도를 누그러뜨렸다.“알았어요. 오늘 일은 저희 측 책임이니 사과드리죠. 지금 당장 자리 내어드릴게요. 됐죠?”“어디? 홀? 아니면 구석?”내가 따져 물었다.그러자 매니저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당연히 룸을 내드려야죠. 하지만 큰 룸은 이미 손님이 꽉 차 작은 룸밖에 남지 않았어요. 비용은 사과하는 의미에서 받지 않겠습니다.”나는 손을 뻗어 매니저의 말을 잘랐다.“됐어. 값은 원래대로 받아요. 안 그러면 음식에 또 뭔 짓 할지도 모르니까.”매니저는 내 말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은 매니저가 비열한 소인배라고 공개 처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나는 윤지은과
결국 어쩔 수 없었던 나는 할 수 없이 내려가 가게를 찾기 시작했다.Y시에 버섯전골 맛집은 꽤 많았다. 하지만 사모님 기분이 안 좋은 지금 작은 가게를 가면 보는 눈이 많고 시끄러워 기분이 더 안 좋아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때문에 나는 한적한 가게를 찾으려고 한참을 더 걸었다. 다행히 그런 가게를 찾는데 겨우 성공했다.“안녕하세요. 프라이빗룸 하나 예약하게요.”이 가게는 환경도 좋고 손님도 많은 걸 보니 맛도 괜찮은 듯 시었다.“큰 룸 하나가 남아 있는데 괜찮으신가요?”“큰 룸은 얼마인데요?”“큰 룸은 기본 소비가 60만 원 이상입니다.”“좋아요. 그걸로 주세요.”60만 원이면 괜찮았다.룸을 예약한 뒤 나는 또 운전해서 윤지은과 사모님을 픽업하러 호텔로 돌아갔다.두 사람은 어느새 현지 특색이 담겨 있는 꽃무늬 옷으로 갈아입었다. 역시 절세 미녀들이라 그런지 뭘 입어도 예뻤다.물론 나는 칭찬의 말을 아꼈다. 지금 장소와 분위기에 그런 칭찬은 맞지 않았으니까.잘못했다가 또 윤지은의 욕지거리를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나는 일부러 맞을 짓을 골라 할 이유가 없었다.30분 뒤, 우리는 버섯전골 가게에 도착했다. 하지만 나하테 큰 룸 예약을 도와줬던 종업원이 충격적인 얘기를 했다.“손님, 죄송하지만 큰 룸은 이미 다른 분이 예약하셨습니다.”“방금 분명 내가 먼저 예약했잖아요. 왜 남의 방을 함부로 다른 손님한테 내줘요?”나는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하지만 종업원은 터무니없는 변명을 늘어놓았다.“저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인터넷 오류가 났는지 그 방은 이미 예약한 분이 있어요.”이미 이곳에 왔는데 그대로 갈 수 없었기에 나는 차선책을 제시했다.“그럼 작은 방이라도 줘요.”“죄송하지만 오늘 가게에 있는 모든 룸은 이미 예약돼서 남은 룸이 없어요. 괜찮으시면 홀에 있는 자리를 내어줄게요. 동남쪽에 한 테이블이 비어 있어요.”나는 순간 화가 치밀어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당신들 장사 이따위로 할 거야? 내가 예약한 자리가
요즘 겪은 일이 너무 많은 탓인지 나도 가끔 감회가 새로울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다.특히 사장님처럼 좋은 분이 유골이 된 걸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우리는 한동안 돌아갈 수 없기에 사모님은 부모님을 불러 사장님의 유골함을 강북으로 가져가 매장했다.두 어르신은 충격이 너무 컸는지 순식간에 더 늙어진 것 같았다. 항상 친아들처럼 생각했던 사위가 그렇게 됐으니. 간암인 줄 알았을 때도 그렇게 믿기 어려웠는데 또 이런 불상사를 겪었으니 당연히 충격이 컸을 거다.하지만 임민수는 딸이 더 걱정됐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미야, 너 정말 강북에 안 돌아갈 거니?”사모님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진실을 파헤치기 전에 절대 안 돌아가요. 엄마, 아빠, 호섭 씨는 두 분께 맡길게요.”사모님은 무척 아쉬워하며 사장님의 유골함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그 순간 사모님의 눈빛은 매우 복잡했다. 아쉬움과 슬픔, 괴로움 그리고 아름다운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도 한데 섞여 있었다.나는 절친한 사람을 잃어본 적 없어 사모님의 심정을 깊이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족을 잃은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지는 알고 있었다.나와 윤지은은 사모님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사모님은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아무 말도 하지 마.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아니까.”사모님은 매우 침착했고 엉엉 울지도 않았다.그런 사모님의 모습이 나와 윤지은은 모두 걱정되었다.하지만 사모님이 말했다.“걱정할 거 없어. 내 상태는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비록 슬프고 안타깝지만 이대로 주저앉아 있지 않을 거야. 호섭 씨도 내가 이러는 모습 원하지 않을 거야.”“유미야,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야.”윤지은은 감개무량하듯 말했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다가가려 하자 이내 나를 째려봤다.‘벌써 하루가 지났는데 아직도 화가 안 풀렸나?’무엇보다 난 아직도 내가 대체 언제 무엇 때문에 윤지은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결국 나는 할 수 없이 묵묵히 두 사람을 따라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
우리는 희망을 이연화에게 거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때문에 그 백수들이 소식을 전하기 전에 우리는 호텔에서 기다리기만 했다.하지만 윤지은은 호텔에 갇혀만 있으면 사모님이 답답해할까 봐 한가할 때면 사모님과 함께 산책하곤 했다.사모님이 자기 컨디션을 끌어 올리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었다.하지만 동력과 희망이 없는 탓에 사모님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Y시에 온 지 사흘 만에 강한나는 다시 강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떠나기 전 우리와 함께 시사 자리를 가졌다.“정말 여기 남아서 조사할 거야?”나와 윤지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강한나가 말했다.“알았어. 나도 도와줄 건 없으니 성공하길 빌게.”나와 윤지은은 곧바로 강한나가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아니나 다를까, 사모님이 화장실 간 틈에 강한나는 얼른 우리에게 말했다.“호섭 씨 시신 어느 때 화장할 거야?”나와 윤지은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몰라. 유미가 아직 동의하지 않았어.”그 말에 강한나가 말했다.“시체를 화장하지 않아도 시체에서 단서를 찾는 건 어려울 거야. 난 고인 편히 쉬게 해주는 게 좋다고 봐.”“하. 그런데 문제는 유미가...”사모님이 아쉬워하는 게 문제다.화장하지 않으면 그래도 보러 갈 수 있지만 화장하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사실 나도 강한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우리도 그 말 이해해요. 사모님은 저희가 설득해 볼게요.”식사를 마친 뒤 강한나는 그 길로 떠났다.나와 윤지은은 호텔로 돌아가는 내내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했다.“두 사람 먼저 돌아가. 난 장례식장에 가볼 거니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리는 사모님이 또 사장님 보러 간다는 걸 알았다.하지만 장례식장도 규정이 있는데, 아무 때나 들여보낼 수 있을 리가 없다.그건 다른 것도 아닌 시신이니까.그때 윤지은이 입을 열었다.“유미야, 이번에 보고 난 뒤 호섭 씨 편히 자게 해주자.”“안 돼!”사모
“왕정민 이 파렴치한 놈. 어떻게 이럴 수 있지?”분명 자기가 잘못했으면서 뻔뻔하게 애교 누나한테 집착하다니.“애교 누나는 그럼 어떻게 처리했어요? 신고는 했어요?”[애교가 예전보다 많이 강해졌더라고요. 그걸 다시 왕정민한테 보냈어요. 심지어 안에 뭔갈 더 추가해서.]“네? 하하. 애교 누나가 정말 변했네요.”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그러니까요. 그것도 다 왕정민 때문에 할 수 없이 변한 거긴 하지만요. 애교가 만만한 줄 알고 애교만 괴롭히다니. 그렇게 대단하면 그 여자를 그렇게 괴롭히지...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못 할 걸요.][그런 사람들은 원래 그래요. 여자들은 뭐 드세고 화를 자주 내는 여자가 되고 싶어서 되겠어요? 다 남자들이 행복한 줄 모르고 기어오르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변한 거죠.][특히 우리 여자들은 가끔 독해질 필요가 있어요. 독하지 않으면 남들이 괴롭혀도 되는 줄 알아요...]나는 형수의 말에 백 번 동의한다.애교 누나가 이토록 강해졌다니 나는 많은 걱정을 덜 수 있었다. 형수도 마찬가지고.두 사람이 다른 사람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내가 마음 놓고 할 일을 할 수 있다.형수와 한참 얘기한 뒤 나는 곧바로 애교 누나에게 전화했다.“누나, 왕정민 일은 왜 말 안 했어요?”애교 누나 목소리는 여전히 간질거리고 듣기 좋았다.[수호 씨가 Y시에 있는데 얘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어요? 수호 씨 가 나 때문에 와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나 이제 많이 변했어요. 다른 사람의 보호만 받으면서 살 수는 없어요.][그동안 아빠한테 반항하면서 독립적인 여자가 될 거라고 큰소리쳤는데, 지금껏 한 번도 그렇게 산 적이 없어요.][예전에 결혼에 묶여 나를 잃었고, 행복한 결혼만 있으면 모두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알았어요. 여자는 자기 마음이 강해져야 진짜 강한 거예요.]애교 누나의 말을 들으니 나는 순간 누나를 다시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이 사람이 아직도 내가 알던 나약하기만 하고, 무
“내가 방 하나 더 잡을게요.”나는 말하면서 방을 나가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갑자기 사모님 목소리가 들렸다.“수호 씨, 먼저 내 침대에서 눈 붙여요.”고개를 돌아보니 사모님은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 내가 누울 공간을 내주었다.나는 속으로 거절했다.비록 사모님이 다른 마음 없이 그저 나를 휴식하라고 호의를 베푸는 거라는 걸 알지만, 사장님이 그런 일을 당했는데 내가 사모님과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 건 말도 안 됐다.게다가 윤지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데, 내가 동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나는 결국 거절했다.“아니에요. 가서 다른 방 구하면 돼요.”나는 다급히 방을 나가 프런트 데스크로 달려갔다.처음 온 날 우리는 사실 싱글룸 세 개를 잡았다. 하지만 나중에 사모님 상태가 걱정되어 나와 윤지은이 사모님 방에 들어와 지내게 되면서 나머지 싱글룸 두 개를 취소했다.확인 결과 더블룸 하나가 나왔다는 말에 나는 얼른 그 방을 잡았다. 그러면 사모님과 윤지은이 더블룸에서 함께 지내고 내가 싱글룸에서 지내면 되니까.나는 카드키를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이 방은 조용한 데다 환경도 좋아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내가 침대에 눕기 바쁘게 핸드폰이 징징 울렸다. 전화한 사람은 다름 아닌 형수였다.요즘 사장님 일 때문에 여기저기 달려 다니느라 형수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때문에 마침 조용한 틈을 타 나는 형수와 얘기하려고 여상 통화를 받았다.형수는 사모님 상태를 걱정하며 일의 진전을 물어봤다.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쉽지 않아요. 조사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어 한동안 여기서 지내야 할 것 같아요.”[수호 씨 사장님 내외가 수호 씨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이번 기회에 유미 씨 옆에서 많이 도와줘요.]형수가 말했다.그 말에 나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네, 저도 알아요. 형수는 요즘 어때요?”[좋아요. 잘 먹고 잘 자고 이제 천천히 걸을 수도 있어요.]“진짜예요? 사진 찍어 보내 봐요.”나는 너무 기뻐 흥
내가 노랑머리한테 준 것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족히 10만 원 가까이는 됐으니까. 백수들한테는 이것도 큰돈이나 다름없다.노랑머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결국 입을 다물었다.아직 대답을 못한 사람들은 얼른 다른 질문을 하라고 나를 재촉했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두 번째 질문을 했다.“그럼 혹시 이연화 혹은 조금희가 요즘 낯선 사람과 만난 걸 본 사람이 있어요?”그 물음에 모든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나는 실망했다.“세 번째 질문, 혹시 누가 나 대신 이연화를 감시할래요?”모든 사람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그럼 다 같이 해요.”“그럼 돈은 어떻게 계산하는 거예요?”노랑머리가 물었다.나는 가방에서 또 돈 두 뭉치를 꺼냈다.“세 명이 감시해요. 한 사람당 200씩 줄게요.”세 사람의 눈은 커다래지더니 급기야 반짝반짝 빛이 났다.나는 세 사람에게 귀띔했다.“이 돈은 수고비예요. 누가 만약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면 이 외에도 큰 보상을 받게 될 거예요.”‘역시 돈이 있으니 뭐든 쉽게 되네.’이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게 하려면 이 사람들 마음을 매수하는 게 우선이다.몇백만 원은 지금의 나한테 큰돈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장님과 사모님을 도울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모든 일을 마친 뒤 나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의 말을 들어보니 사모님은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모님 정서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기분이 다운된 사람은 쉽게 졸리고 무기력해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나는 방금 전 일을 윤지은에게 말했다.“이번 일 조사하기 엄청 어려울 거예요. 언제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르겠고. 장기전을 할 준비는 됐어요?나는 윤지은을 보며 말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째려봤다.“그걸 말이라고 해? 유미는 내 베스트 프렌드야. 유미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데 내가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누가 같이 있어 줘? 그러는 너야말로,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데?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