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씨 유모는 사람을 시켜 조사하라고 명했고, 그날 전 씨 노부인이 장남과 맏며느리를 국공부로 데려가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일은 당시로서는 꽤 큰 소동이었기에 알아보는 것은 매우 쉬웠으며, 구경꾼들은 장군부가 너무 기만적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고 씨 유모는 사람을 보내 알아본 결과 백성들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을 들었고, 혜 태비에게 보고하자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송석석이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지 못했다면, 왜 전씨 가문이 찾아가 소란을 피웠겠는가? 그럼 단신의가 그녀를 치료하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인가?""사실입니다. 약왕당도 해명을 했고, 전 씨 노부인의 덕행에 흠이 있는 탓에 그녀를 치료해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이 말을 들은 혜 태비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의사가 언제 병을 고칠 때 환자의 인품을 보았다고? 게다가 외부인인 그는 장군부의 일을 어떻게 알게 된 거지? 분명히 송석석이 시댁 식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그에게 말한 것이고, 단신의는 그녀 때문에 노부인을 치료하지 않은 게 분명해."고 씨 유모가 대답했다."태비마마, 아마도 전북망이 성릉에서 돌아온 후 그의 전공으로 이방을 평처로 삼았고, 이 일을 노부인께서도 지지했기 때문에 단신의는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겁니다. 어쨌든 송씨 가문과 그의 관계는 좋지 않습니까."그러자 혜 태비가 혐오감이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어쨌든 사람의 목숨을 끊을 수는 없다. 장군부의 노부인께서 막다른 골목에 내몰리지 않은 거라면, 왜 국공부 앞에서 소란이 일어난 것이지? 그들 가문의 일이 충분히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가?"혜 태비는 어려서부터 보살핌을 받았고, 궁에 들어가서도 어떤 암투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어쨌든 황태후의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생각은 매우 단순하며, 사람이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것은 소란을 피운 사람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물론 그녀는 선입견에 치우쳐 송석석이 하는 모든 일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고, 그녀는 송석석을 좋
사여묵은 장춘궁을 나와 바로 태후에게 문안을 올리러 와서 송석석과 혼인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태후는 그의 말을 듣고 무척 흐뭇해하며 말했다.“녀석, 조용히 신붓감 알아보러 다녔나 보구나. 안 그래도 얼마전에 네 어미는 네가 언제 혼인하나 걱정하더니 전쟁터에서 만난 석석이와 마음이 맞았나 보구나. 참하고 착한 아이이니 잘 대해주거라.”사여묵이 말했다.“저야 당연히 잘해줄 것입니다. 다만 어머니께서 석석이를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셔서 걱정이네요. 아마 곧 석석이를 궁으로 불러 군기를 잡으려 하실 것 같습니다.”태후는 그가 지원을 요청하러 왔다는 것을 눈치채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 말거라. 이 몸이 있는 한, 절대 그 아이가 서러운 일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다.”사여묵은 정중히 큰절을 올리며 감사를 표했다.“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마마.”태후의 얼굴에 잠시 착잡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수습하고 사여묵에게 전쟁터에서 있었던 일과 다친 곳은 다 나았는지 물어보았다.사여묵은 정중하게 대답했고 황태후는 태의를 불러 진맥을 하고 몸에 좋은 보약을 처방하게 했다.태의원에서 적지 않은 보약을 처방받은 사여묵은 약재를 한아름 안고 출궁했다.가끔 그는 자신이 대체 누구의 아들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절대 그에게 이런 사소한 것들을 묻지 않았다.축하연이 있던 날, 술 취해서 장춘궁에 온 그에게 잔뜩 흥분한 얼굴로 남강을 수복하여 큰공을 세웠다며 그들 모자의 이름이 역사에 길이 남을 거라고 기뻐하던 분이었다.하지만 한 번도 그에게 전쟁터에서 힘들지는 않았는지, 다치지는 않았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결과에만 관심이 있는 듯했다.하지만 그렇다고 어머니에게 서운한 감정은 없었다. 그분은 항상 모두가 자신의 뜻을 따르기를 바라는 분이셨다.아들에게 애정이 없다기보다는 모자 사이에 딱 서운하지 않을 정도로만 정을 주는 분이었기에 사여묵 역시 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다.사여묵이 떠난 뒤, 태후
다음 날, 송석석은 보주와 함께 입궁했다.그녀는 가장 먼저 태후에게 문안을 올리러 갔다. 그녀를 본 태후는 기분 좋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와 사여묵에 관한 일을 물었다.그녀는 미리 준비했던 대로 전장에서 서로 정을 나누게 되었고 귀경한 뒤에 혼인을 하자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고 말했다.태후는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굳이 거짓말을 까발릴 이유도 없었기에 흐뭇하게 웃으며 이것도 인연이라 말해주었다.그렇게 한참 대화를 나누다가 태후는 혜 태비를 불러들이려 했다.송석석은 태후의 마음은 알지만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혜 태비께서는 저에게 장춘궁으로 문안 올리러 오라고 하셨습니다. 소녀가 태후 마마의 총애를 등에 업고 그분의 말씀을 거역한다면 나중에 혼인하더라도 저를 곱게 보지 않을 겁니다. 나중에는 가족이 되에 함께 생활해야 하는데 태후께서 매번 저를 도와주실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태후는 흐뭇한 얼굴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네가 이렇게 참하고 심성이 바르니 내가 안쓰러워서 그러는 거다. 내 동생은 어릴 때부터 친정 식구들의 총애를 받고 자라서 성격이 모난 구석이 많아. 앞으로 같은 저택에서 생활하게 되면 마찰은 피할 수 없을 거다. 오늘은 혜 태비가 뭐라고 하는지 들어보고 너무 선을 넘으면 내가 잘 타이르마.”송석석은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마마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마마가 계시니 소녀는 든든하옵니다.”태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어서 가보거라. 난 좀 있다가 가보마.”“예, 그럼 소녀 물러가겠사옵니다.”송석석은 예를 올린 뒤에 태후궁을 나왔다.한창 햇볕이 강하게 내리 쬐는 정오, 송석석은 보주와 함께 태감을 따라 화원을 걷고 있었다.길을 안내하는 태감은 장춘궁 출신이었는데 그녀가 태후궁에 있을 때부터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늘진 곳으로 가도 되는데 그는 더운 곳만 골라서 인도하고 있었다. 게다가 같은 곳을 두 번이나 지나쳤는데도 아직도 길을 돌아가고 있었다.무공을 연마한
보주를 밖에 남겨 두고, 송석석은 고개를 숙인 채 전에 들어갔다. 발밑에 보이는 백옥 바닥은 사람이 보일 정도로 빛나고 있었고 곳곳에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물건이 놓인 것을 여광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그녀는 눈을 올려 재빨리 힐긋 보았다. 정중앙에 놓인 의자에는 보라색 궁복을 입은 귀인이 앉아 있었다. 가체는 구름과도 같았고 머리에는 화려한 장신구들을 하고 있었다. 이목구비는 원수와 조금 비슷했다.이분이 바로 혜 태비라는 것을 그녀는 알 수 있었다.그녀는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었다."신녀 송석석, 태비마마를 뵙사옵니다."그녀는 가지런히 무릎을 꿇고 눈을 내리깔았다. 옷과 치마도 가지런하고 무릎을 꿇을 때 비녀와 장신구도 살짝만 움직여 예의에 맞아 사람으로 하여금 잘못을 골라낼 수 없게 했다. 매산에서 1년간 궁중 마마에게 예의를 배웠기 때문이다.혜 태비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들어 보거라. 얼마나 여우 같은 여인인지 봐야겠다."송석석은 그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혜 태비를 마주했다. 눈동자는 마주치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싸늘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그래, 역시나 고운 얼굴이구나. 어쩐지 내 아들이 홀렸다 했더니."혜 태비가 손을 내밀자, 옆에 있던 고 마마가 내려오는 것을 부축하였다.그녀는 송석석의 앞에 서서 긴 손을 내밀며 송석석의 뺨을 때리려 했다."천한 계집애, 감히 내 아들을 꼬드겨?"따귀를 때리기도 전 송석석은 바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노여워하는 혜 태비가 입을 열기도 전 송석석이 먼저 말했다."태비 마마께서 신녀를 훈계하시려면 옆에 있는 궁녀에게 시키면 되옵니다. 신녀는 어려서부터 무예를 연마하고 내공을 닦아, 누군가 신녀를 해치면 체내의 내공이 몸을 보호하옵니다. 신녀의 얼굴에 가한 힘이 어느 정도면 내공이 몇 배로 반격할 것이 옵니다. 신녀, 마마를 다치게 할 수 없사옵니다. 마마께서 계속 때리시려거든 신녀의 죄를 용서해시옵소서."혜 태비는 멈칫하다 사여묵이 한 말이 생각났다. 그녀가 전
송석석은 갸름한 턱을 들어 올려 정중하고 엄숙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용서해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그러나 신녀가 어떤 신분인지, 왕에게 어울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가 결정할 것이 옵니다. 만약 혼약을 얘기하러 온다면 저도 시집가는 것을 허락할 것이 옵니다."화가 치솟아 오른 혜 태비가 답했다."잠시 넋을 잃어 정신을 못 차리는 것뿐이니 언젠가는 정신을 차릴 것이다. 넌 장군부에서 버려진 여인일 뿐, 잠깐의 호기심이지 시간이 지나면 널 버릴 것이다. 결국 손해를 볼 사람은 네가 아니더냐? 나도 너를 위해 생각하는 것인데 어찌 이리 주제를 모르는 것이냐?"송석석이 답했다."신녀는 전북망과 화리한 것이지 버려진 게 아니옵니다. 게다가 화리는 신녀의 뜻이니, 버린다고 해도 신녀가 그를 버린 것이 옵니다. 결코 장군부의 버림을 받지 않았사옵니다. 신녀를 위해 생각해 주셔서 참 고맙사옵니다, 태비 마마."혜 태비가 노발대발했다."누가 누구를 버렸든 너는 두 번 시집을 가는 것이다. 좋은 아가씨가 어찌 두 번을 시집간단 말이냐? 기왕 화리를 선택한 이상 조용히 지내야지. 높은 집안 자제와 엮여 여인의 명성을 해치지 말거라."송석석이 정색하고 답했다."남자는 부인을 버리고도 다시 장가를 갈 수 있고 처첩까지 여럿인데, 어찌 여인은 다시 시집을 못 간단 말입니까? 신녀에게 여인의 명성을 해쳤다고 하셨사옵니까? 천하의 여인들은 모두 신녀를 본보기로 삼고 있고, 폐하께서도 피로연에서 천하의 여인은 저와 같아야 한다고 하셨사옵니다."혜 태비가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입만 살았구나. 만약 천하의 여인들이 모두 너와 같다면 대란이 생길 것이다. 여인은 마땅히 삼종 사덕을 지키고 부덕, 부언, 부용, 부공을 따라야 하거늘.""너는 고작 군공을 좀 세운 것뿐인데 어찌 여인의 본보기라 할 수 있느냐? 전쟁터에 나갈 수 없는 여인들은 그럼 살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이 말은 아주 익숙하다. 송석석은 과거 이방에게 이렇게 물은 적 있다.송석석은 침착하게 반박했다
혜 태비는 그녀를 쉽게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왕가에 시집오려는 생각을 버리기 전까지는 놓아주지 말아야 한다.송석석은 상관없는 듯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과거 매산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 적지 않아 익숙해졌다.그녀는 혜 태비의 비위를 맞추지 않을 것이다. 혜 태비의 곁에는 비위를 맞추는 사람이 많은 데다, 원수와의 혼사는 원래 각자 필요한 것을 취하는 것이니 잘 보일 필요가 없다.사실 혜 태비와 같은 성격은 오히려 대처하기 쉽다. 모든 것이 쉬이 드러나고 꿍꿍이가 없어 뒤에서 몰래 수작을 부리는 자들보다 낫다.그녀는 혜 태비를 괴롭히지 않을 테지만 혜 태비의 괴롭힘을 당하고만 있지도 않을 것이다. 과거 장군부의 노부인도 전북망이 돌아오기 전 흠집을 잡지 않고 온화하게 대해줬기에 그녀도 노부인에게 효도했다.다만 공을 세우고 돌아온 전북망이 이방과 혼사를 치르려 하자 노부인은 온화하지 않았고 그녀도 참지 않았다.팽팽히 맞서고 있을 무렵, 어마마마라고 부르는 소리와 함께 한녕 공주가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한녕 공주는 올해 15살이고 금방 계례를 넘겼다. 예쁘게 생겼으며 귀여움에 왕실의 귀티가 배어 있었다. 살구색 저고리에 동색 치마를 입고 들어와 몰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송석석을 살펴보며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송 장군이 장춘궁에 왔다는 궁인의 말을 듣고 급히 찾아온 것이다.그러나 모비와 사이가 좋지 않은 듯 이곳에 무릎을 꿇고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송석석은 고개를 들었고 마침 한녕 공주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이미 꿇고 있는 터라 바로 입을 열었다."공주를 뵙사옵니다.""송 장군? 정녕 송 장군입니까?"한녕 공주는 신나게 소리를 지르며 바로 다가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어서 일어나시지요.""원이야!"혜 태비는 한녕 공주의 아명을 부르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누가 오라고 한 것이냐?""송 장군이 왔다는 것을 듣고 이리 찾아왔습니다."한녕 공주는 송석석을 부축하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어찌 송 장군에
어수룩하고 예쁜 공주를 보면서 송석석은 그녀의 통통하고 귀여운 어릴 적 모습이 떠올랐다.지금은 살이 좀 빠졌지만, 볼은 여전히 통통하다. 아주 예쁘고 귀여울 뿐만 아니라 웃을 때 보조개도 있고, 눈웃음도 예뻐서 보는 이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송석석은 웃으며 말했다."만약 문제가 없다면 황 언니가 될 것입니다."한녕 공주는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그녀의 팔을 흔들었다."정말 송 장군을 존경합니다. 어마마마와 아바마마, 그리고 오라버니까지 모두 장군께서 상조에서 가장 뛰어난 여 무장이라 하셨습니다. 전에 그 이방은,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한 번 본 적 있는데, 쌀쌀맞고 행동도 거칠었습니다. 언니는 무장의 위엄도 있고 여인의 아름다움도 잃지 않았습니다."그녀는 말하다 장난스럽게 혀를 내둘렀다."어마마마께서 여인으로서 함부로 여인을 의논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오해로 인해 여인의 명성을 실추시킬 수 있다 하셨으니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그녀가 웃는 것을 보고 송석석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 발랄한 여자아이는 늘 사람을 기쁘게 한다.한녕 공주는 계속 그녀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바깥에 있는 상궁이 그녀를 불렀다."공주마마, 태비 마마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니, 궁으로 돌아오라 하시옵니다."한녕 공주는 대답하고 난 뒤 아쉬운 마음으로 송석석을 보며 말했다."언니, 어마마마께서 찾으십니다. 어마마마는 무서우신 분이 아니니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예. 태비마마는 아주 상냥하고 유쾌하십니다."송석석이 웃으며 말했다.만나기만 하면 뺨을 때리려는 상냥함과 비틀거리며 도망가는 유쾌함이랄까?한녕 공주는 연이어 고개를 끄덕였다."맞습니다. 아주 상냥하고 재밌으신 분입니다. 언니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공주마마!"상궁이 계속 재촉했다."가고 있습니다."한녕 공주는 아쉬워하며 송석석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언니, 언제 다시 궁에 들어오십니까? 전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송석석이 답했
다 마시고 나서야 송석석이 입을 열었다."태후마마, 사실 태비마마와 지내기 쉬울 듯하옵니다."적어도 지내기 어렵진 않다."잘 지낼 수 있다니. 내 동생을 말하는 게 아닌 것 같구나."태후는 웃음을 멈췄지만, 여전히 눈웃음을 지으며 송석석을 바라보았다."내 동생은 궁 안 모든 사람이 무서워하고 황후조차 피해 다니지."송석석은 생각했다.‘그 교만하고 사나운 성격에 누가 피하지 않을까? 무릇 정상이라면 걸어가다 개에게 물리고 싶지 않겠지.’그러나 그녀에게 황후나 혜 태비와 지내라고 한다면 혜 태비를 선택할 것이다. 사납긴 하지만 그래도 상대하기 쉽다.황후의 말은 겉으로 듣기에 별것 아니어도 자세히 생각해 보면 모두 가시 돋친 말이었다.송석석은 한 그릇 더 마시고 싶었지만, 보주가 다급히 말렸다."아가씨, 많이 마시면 안 됩니다. 신의께서 몸을 조리해야 한다고 하셨으니 시원한 물도 차가운 물도 많이 마시면 안 됩니다."태후는 그 말을 듣고 따뜻한 차를 올리라 명했다."날이 이렇게 더우니 차를 마시는 것이 갈증 해소에 좋을 것이다. 의사의 말을 듣고 몸을 잘 조리해야 혼사를 치르고 하루빨리 왕부의 아이를 낳을 게 아니냐?"송석석은 얼굴을 붉히고 다급히 고개를 돌려 차를 마셨다.태후가 웃으며 야유했다."쑥스러워하지 말거라. 조만간 있을 일 아니냐?""조만간 있을 일이 무엇입니까? 어마마마."전문에서 황제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밝은 노란색 옷차림이 번쩍이더니 황제가 문으로 들어섰다. 늘씬한 몸매에 궁전 중앙에 멈추어 서더니 웃음을 띠었다."소자, 어마마마께 인사 올립니다!"송석석은 재빨리 일어섰다."신녀, 폐하를 뵙사옵니다."황제의 눈빛이 송석석의 얼굴에 떨어졌고 담담히 스쳐 지나갔다."그래. 송 장군도 여기 있었네?"송석석이 눈을 내리깔고 답했다."예, 폐하. 신녀 태후와 태비 마마께 문안을 드리려 궁으로 왔사옵니다."황제는 자리에 앉아 웃음을 머금고 송석석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 어마마마께서 송 장군을 아끼시니
소씨 가문의 반응을 보니, 진성의 다른 가문들이 평소에 그들과 친밀하지 않아 이 일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시만자는 소 부인이 놀란 틈을 타 말을 이었다.“우리 부군이 가장 아끼는 조카가 바로 지아인데, 큰 억울함을 당해서 태후마마께 아뢰려던 걸 내가 간신히 말렸소. 지아를 때린 자가 스스로 나서서 벌을 받으면 그만인 것을!”왕이장은 진성에서 여러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시만자의 부군, 만종문의 제자, 병부 효고사, 그리고 진성 내 만종문 산업의 주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와 왕씨 가문의 관계는 일부러 밝히지 않았지만, 이럴 때 활용해도 괜찮을 만큼 중요했다. 태후마마가 만종문의 임 사부를 존경하는 점을 생각하면, 이 관계를 의심하는 이는 없을 터였다.시만자는 말을 마치고 혼자 의자에 앉았는데, 그 표정은 송석석과 다를 바 없었다. 이때 소씨 가문은 비로소 섭정왕비가 직접 소 세자를 데려온 것도 왕지아를 위한 조치임을 깨달았다. 소 부인은 왕지아에게 이토록 강력한 배경이 있는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아이고, 제가 소인의 말만 믿고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네요…”소 부인이 급히 사죄했다.“반드시 뒤에서 함부로 지껄이던 자들을 찾아내 왕씨 아가씨에게 사과하겠습니다. 당장 사람을 데리고 가서…”그러자 시만자가 차분히 말을 끊었다.“처벌할 마음이 있는데, 왕지아의 눈을 더럽힐 필요까지 있겠소? 백작부에서 처벌하지 못한다면, 마침 섭정왕비께서 사람을 데리고 오셨으니 소 세자를 처벌할 때 함께 처리하면 되겠소.”소 백작은 급히 수긍하며 하녀와 종들을 불러내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넘겼다. 송석석이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소 세자가 덕행에 흠이 있는 탓에 작위 수여는 불가능할 것이오. 그리고 오늘 누군가 경위부에 고소한 이상 내가 방관할 수도 없소. 대충 몇 대 맞고 넘어가려 한다면 법이 왜 있겠소?”시만자는 속으로 생각했다.‘화풀이하러 온 게 아니었나? 소씨 가문 때문에 지아와 소민이를 갈라놓을 순 없는데…’소 부인은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시만자는 어이가 없었다. 고작 소씨 가문이라는 작은 백작부가 감히 이렇게 날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평생동안 막돼먹은 여자를 많이 보았지만, 귀족 가문의 막돼먹은 여자는 처음이었다.왕지아가 끌려 나가 뺨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 시만자는 소씨 가문의 대문을 박차고 사람들을 끌어내고는 한바탕 때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화가 나더라도 참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왕지아와 왕청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 모르니 그들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그렇게 시만자가 급히 왕씨 가문으로 달려갔을 때, 왕지아가 손목을 그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또 왕청여가 하녀들을 모두 내보냈다는 말을 듣고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곧장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왕청여가 목을 매려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 또한 화가 나서 그의 뺨을 때렸다.최근 몇 년간 자신의 성격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왕청여의 극단적인 선택을 보자 공방에서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 없었다.왕청여를 때린 후, 시만자는 즉시 소씨 저택으로 향했다. 소씨 저택에 도착하자 석석이 현갑군을 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의심이 앞섰다.‘석석이는 관직이라 복수 같은 걸 할 수 없는데…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송석석은 관복을 입고 정좌에 단정히 앉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필명이 그의 곁을 따르고 있었고, 몇 명의 현갑군이 소민의 형인 소 세자를 붙잡고 있었다.백작부의 모든 어르신과 도련님들이 모여 있었고, 가문을 책임지고 있는 주모인 소 부인도 나와 있었다. 상황을 보니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시만자는 옆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미리 말이라도 해줄 것이지. 이러니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백작과 소 부인이 송석석에게 굽실거리며 사정하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알고 보니 소 세자가 부유한 상인의 양첩과 결탁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걸렸고, 자신의
왕청여에게 자신이 틀렸음을 깨닫게 한 것은 방시원이 돌아올 때도, 전북망과 이혼했을 때도, 왕씨 가문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후회한 것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였다.왕씨 가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왕청여는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니 자신에게 잘못이 많음을 깨닫고 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고, 고생한 자신을 비난할 자격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형수님이 자신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고생했음을 알면서도, 과거를 들추며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다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뼈저리게 후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왕지아는 안백작부의 도련님 소민과 정이 들었다. 비록 평서백 작위는 없어졌지만, 형수가 선제의 찬사를 받아 고명을 얻었고 가업 경영에도 능숙했으며, 셋째 동생이 시씨 가문의 딸 시만자와 결혼해 왕씨 가문은 여전히 병부에서 중용되고 있었다. 두 가문의 위상은 비슷했다.그러나 소민이 어머니에게 왕지아와의 혼인을 청하자, 소 부인은 강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만나는 것조차 금지했다. 비록 소민은 세상에 없는 효자이지만 왕지아에 대한 애정이 깊어 그녀 외에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하겠다고까지 하며 반항했다. 이에 소 부인은 그를 감금해버린 것이다.왕청여는 아마 소 부인이 방문하던 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소 부인은 하인들을 대동하고 왕씨 저택에 난입해 최씨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감히 우리 아들을 넘보다니! 윗사람이 바르지 못하니 아랫사람도 바르지 못한 건가? 당신 시누이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뻔뻔하게 굴더니, 이제는 딸까지 그 꼴이로군! 어린 나이에 남자를 유혹하고, 우리 아들에게 부모를 협박하는 법까지 가르치다니! 이 가문에는 악랄한 자들밖에 없는 것이냐?!”말을 마치자 하인들에게 저택을 부수게 했고, 왕지아를 끌어내 사람들 앞에서 뺨을 때리며 머리와 얼굴에 침을 뱉었다. 왕청여와 최씨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