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석은 왕청여가 친정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최 씨에게 전할 일이 있어 찾아온 것이었고 밤에 방문한 이유는 낮에 사건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평서백부와 공주부는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기에 대낮에 경위대를 이끌고 오는 대신, 밤에 혼자 방문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대낮에 움직였다면 여느 가문들처럼 경위대를 동원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차별 대우가 될 수 있었다.관복이 아닌 여성복을 입고 있는 송석석의 모습에 최 씨는 살짝 안심하며 말했다. "왕비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시아가씨도 그간 무탈하였습니까?" 시만자는 웃으며 답했다. "부인덕분에 무탈하였습니다." 시만자는 최 씨에게 특별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오늘 많이 피곤했지만, 송석석이 평서백부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그녀도 동행했다.최 씨는 환하게 웃으며 손님을 맞았다. "어서 편히 앉으세요." 그녀는 하인들에게 차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자리에 앉은 최 씨가 입을 열었다."용건이 있으시다면 사람을 보내 제가 찾아가면 될 것을, 어찌 이렇게 몸소 오신 것입니까?" 송석석은 고개를 저었다."그리 격식을 차리실 필요 없습니다. 오늘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몇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 입니다." 송석석은 주변에 있는 하인들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조용히 이야기 나눌 수 있겠습니까?" 최 씨가 금숙에게 눈짓을 보내자 금숙이 즉시 하인들에게 명했다. "모두 나가거라. 더 이상 시중들 필요 없다." 하인들이 자리를 뜨자 최 씨는 송석석을 보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송석석이 물었다. "부인은 만씨 가문의 만가다장인 만옥이란 여인에 대해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최 씨는 즉시 왕청여의 작은 도련님이 만두를 사던 그날 바므 만옥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때도 이상하게 여겼던 최 씨는 그 만옥이라는 여인이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순간 긴장한 최씨는 숨기지 않
최 씨는 의자 손잡이를 꼭 쥐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심경이 복잡해졌다. '남편을 아는 사람은 아내뿐이니깐...'최 씨의 남편은 남강으로 향하면서 두 명의 첩을 데려갔고, 그곳에서 또 두 명을 들였다. 비록 아직 명분은 없었지만, 이미 그들을 들인 이상 첩으로 삼는 것은 시간문제였다.최 씨는 집안을 엄하게 다스렸기에, 평서백부의 첩들은 항상 그녀를 공경해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하지만, 고청우가 남편에게 접근한다면, 취향에 맞추는 수고조차 필요 없어질 것이다. 그저 꽃다운 기녀의 미모만 드러내도, 남편은 충분히 마음을 빼앗길 것이다.시만자는 최 씨를 조용히 응시했다. 보아하니 그녀도 남편이 고청우의 미모를 쉽게 넘어갈 것임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시만자는 이 상황이 매우 안타까웠다.최 씨는 훌륭한 여성이지만, 그녀는 좋은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왕표가 아무리 남강을 지키는 장수라고는 하지만 최 씨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최 씨는 온 마음을 다해 집안을 돌보며, 시어머니를 섬기고, 시누이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평서백부를 위협하는 모든 일들을 막아내고 있지만, 그녀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이내 평정심을 되찾은 최 씨는 송석석에게 감사를 표했다. "귀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곧 편지를 보내 주의시키겠습니다." 송석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청우는 이미 이름을 바꾸었고, 사온도 그녀의 정체를 공개한 적이 없기에, 그녀가 평서백부에 어떤 목적으로 접근할지는 아직 불분명합니다." 최 씨는 송석석의 말뜻을 곧바로 이해했다. 고청우는 더 이상 기녀가 아니었고, 장공주도 이미 몰락했으니 이제 자유의 몸이었다. 그녀가 의지할 사람을 찾고자 한다면, 왕표는 그녀에게 훌륭한 보호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고작 그런 이유라면, 최 씨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청우는 공주부의 서녀이고 이 사실을 대리사와 송 지휘사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만약 왕표가 그녀와 얽히게 된다면, 사건은 복잡해질 것이다.그
그때 재빨리 앞으로 나선 금숙이 홍이와 함께 왕청여를 부축이며 말했다. "의원님이 말씀하시기를 아가씨께서는 너무 많이 걸어 다니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어서 돌아가 쉬시지요. 부인께서 왕비님을 배웅하시면 되오니 아가씨는 몸부터 돌보는 것이 좋은 듯합니다." 금숙이 "왕비님"이라고 연신 부르자, 왕청여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려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형님이 그녀의 일을 이야기하려고 했다면, 어찌 송석석을 직접 초대했겠는가? 틀림없이 장공주의 반역 사건에 관련된 일일 것이다. 극도로 당황한 왕청여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녀는 엉성하게 몸을 숙여 송석석에게 인사한 후,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서로 눈을 마주친 송석석과 시만자는 의아해했다. 또 왜 저러는 거지..?시만자는 최 씨가 그들을 배웅하는 틈을 타 조용히 물었다. "청여아가씨는 이 밤중에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또 친정으로 돌아온 건가요? 남편과 다투었습니까?" 시만자는 호기심 때문이라기보다는 왕청여의 행동이 너무 이상했기 때문에 물어본 것이었다. 게다가 굳이 이 타이밍에 전북망과의 일을 거론하는 걸 보면 분명 송석석과도 관련이 있어 보였다. 집안의 수치스러운 일들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지만 왕청여가 저지른 짓들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말했다. "왕비님과 시 아가씨를 볼 면목이 없습니다. 아가씨는 남편과 말다툼을 하고 친정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다 태기가 불안해서 잠시 머물고 있는 중입니다." 시만자는 얼굴을 찡그렸다."전북망이 승진했고 부상으로 요양 중인데도 다투었단 말입니까? 혹시 또 송석석을 엮을 것입니까?" 그러자 최 씨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저 제가 혼자 설친 것 뿐이니.. 왕비님과 시 아가씨께서는 부디 마음에 두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시만자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체면을 위해 낮은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드디어.. 미쳤구나?”이미 이
며칠 동안 장공주부의 사람들도 어느 정도 심문하였으니 이제는 사온을 심문할 때가 되었다. 오늘, 송석석은 평양후부로 가서 가의 군주를 만날 예정이었고, 사여묵은 사온을 심문하여 두 쪽에서 동시에 움직일 계획이었다.사온은 지하 감옥에 갇힌 지 이제 여섯 날째였다. 처음에는 미친 척하며 피하려 했지만, 효과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로는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고 자신의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다.심문실, 사여묵과 사온은 마주 앉았고, 사온은 한의절 밤에 입었던 흰옷 그대로였다. 며칠 동안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탓에 옷은 구겨졌고,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다.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고, 눈 밑에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심지어 몇 일 사이에 살이 급격히 빠져 수척해진 얼굴 때문에 실제 나이보다 다섯, 여섯 살은 더 들어 보였다. 중년의 여인이 갑자기 살이 빠지면, 더욱 비참해 보이기 마련이다. 특히, 본성이 모진 사온이었기에, 그 모습은 더욱 표독스러워 보였다.사여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첩들을 지하 감옥에 가두더니 이제 그곳에 살게 되었군요. 지낼 만합니까?" 갑자기 고개를 든 사온은 웃음을 지었다."공주부보다는 형편없구나." "전하께서 공주 직위를 박탈하라고 명하셨으니 오늘 경조부의 공양이 공주부를 조사하러 갈 것입니다." 그 말에 사온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냉소적으로 말했다."직위를 박탈하면 어떻고 공주가 아니면 어떠냐? 나는 여전히 황실 출신이고 내 부친은 문엄 황제에, 내 모친은 의귀비다. 이는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사실이다." 그녀의 말속에는 냉소뿐만 아니라 원망도 섞여 있었다. 마치 문제의 딸로 태어난 것이 불행이라는 듯이 말이다.사여묵은 절차를 밟듯 차분하게 물었다. "그 무기들은 어디서 난 것입니까? 왜 반역을 꾸민 것입니까? 배후에 대체 누가 있는 것입니까?" 사온은 입가를 비틀며 말했다. "이미 반역죄로 확정된 마당에 더 물어볼 필요 있겠느냐
고개를 돌린 사온은 웃음을 멈추고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항상 네 부중의 염 선생이 나와 연락을 하지 않았더냐? 벌써 잊은 것이냐? 너는 직접 나서지 못한다며 약점을 잡힐 수 없다고 처음 나에게 반역을 제안한 후, 모든 일은 염 선생이 담당했지. 그자를 데려다가 엄하게 심문하면, 모든 것이 명백해지지 않겠느냐? 아, 그리고 네가 전장에서 돌아온 뒤에는, 그자뿐만 아니라 송석석도 나와 연락을 했었지. 그 무기들은 모두 그녀가 무림 사람들에게 시켜 보낸 것이 아니더냐? 그녀를 데려다가 고문하거라. 그러면 진실을 자백할 것이다." 사온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들을 고문하지 않는다면, 나에게도 형을 내릴 수 없겠지. 그건 명백한 차별 대우가 될 테니까. 또 하나 더, 내가 너를 배후로 지목했으니, 너는 이 사건을 담당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을 보내거라." 하지만 사여묵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건 당신이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당신 진술을 보시고 필요하다고 판단하시면 다른 사람이 나설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번에 저를 보지 않을 수 있겠지요." 웃고 있는 사온은 눈빛에 악의로 가득 찼다. "정말 다시는 널 보고 싶지 않구나. 이처럼 역겨울 수도 없느니라. 전장에서 공을 세운 친왕이 이미 시집갔던 여인을 아내로 맞다니. 우리 황실의 체면을 네가 다 망쳐버렸구나." 사여묵은 이전 기억을 상기시키듯 말했다. "당신은 더 이상 황실의 사람이 아니니, 그 체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자 사온이 비웃었다. "넌 정말로 부끄러움을 모르는구나. 내가 이리 욕을 해도 화를 내지 않다니. 너의 그 뻔뻔한 모습이 사람을 화나게 하는구나. 네게 약점을 잡히지 않았더라면, 이용당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쓸모없는 자식, 자신의 저택에는 감히 무기를 두지 못하고 전부 공주부에 숨겨 두었지. 그 무기들 중 많은 것은 네가 남강 전장에서 몰래 운반해 온 것들이지 않느냐? 갑옷도 있었지 아마?" 보좌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사여묵은 미소를 지으며 하얀 이를 드러냈다. "오늘의 심문은 여기까지다." 그러자 사온이 비웃으며 말했다."벌써 끝인 것이냐? 겨우 이 정도냐?!" 하지만 사여묵은 여전히 차분했다."제가 묻지 않더라도, 다른 이가 심문할 터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늘 밤은 아미 밤새 심문이 이어질 테니 마음의 준비는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사온은 사여묵을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두려워할 것 같으냐? 누가 와서 심문하든 내 답은 변함없을 것이다. 사여묵, 네가 무슨 수작인지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죄는 벗을 수 없을 것이다. 무슨 수단이든 다 써보거라." 사여묵은 조용히 답했다. "별로 특별한 수단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그저 법에 따라 처리될 뿐이지요." 말을 마친 그는 성큼성큼 심문실을 나섰다. 그렇게 사여묵이 나가고 곧바로 진이가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사온, 나는 그대의 반역 사건을 묻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공주부의 오래된 우물에서 여러 구의 시체와 수십 명의 영아 해골을 찾아냈다. 이미 하인들을 심문했고 그들은 모두 그대가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그대는 이를 인정하느냐?" 차갑게 진이를 한 번 쳐다보던 사온은 아무 말 없이 경멸 어린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그 모습에 진이는 몸을 뒤로 기대며 느긋하게 덧붙였다."괜찮다. 천천히 생각해보거라." 한편, 평양후부에서는 가의 군주가 매서운 눈빛으로 송석석을 노려보고 있었고 평양후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오늘 송석석은 이들 부부를 심문하러 왔고, 다른 이들은 자리에 없었다.평양후의 노부인은 장공주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들은 친족이었지만 서로 왕래가 거의 없었다. 가의 군주는 조금만 화가 나면 친정으로 돌아가려 했고 대장공도 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평양후의 노부인은 장공주와 왕래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평양후는 답답한듯 한숨을 내쉬었다."저흰 정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 지하 감옥에 대해선
송석석은 가의 군주를 앞으로 밀쳐내고는 냉정한 목소리로 경고했다."묻는 대로만 답하면 됩니다. 협조하지 않으면 이제 더 이상 기회는 없을 것이고 바로 대리사로 끌고 갈 것입니다. 당신 어머니는 이미 서민으로 강등되었지만, 전하께서는 옛정을 생각해 당신의 군주 자리는 건드리지 않았지요. 그러나 이대로 협조하지 않으면, 황춘연을 죽인 일은 오늘 바로 천청에 올라갈 것입니다. 군주가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면 어느 누가 당신을 지키려 하겠습니까?" 가의 군주는 왼팔이 탈구되어 너무 아픈 나머지 눈물이 흘러 내렸다. 송석석이 죽일 듯이 미웠지만, 그녀가 한다면 하는 여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저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그 광경에 평양후는 급히 가의 군주를 부축해 자리에 않히더니 차갑게 말했다. "송 대감께서 일을 처리하는 중이니 묻는 것만 대답하도록 하오." 그는 가의 군주가 어떻게 되든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그녀가 잡혀간다면 반드시 자신이 이혼장을 써준 후에야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절대 평양후 부인의 신분으로 관청에 끌려가는 것은 허용할 수 없었다. "난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 가의 군주는 분노에 차 소리를 질렀다. "그저 몇 대 때리라고만 지시했을 뿐인데 스스로 벽에 머리를 박은 것이다." 그녀는 오른손을 들어 넓은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벽에 머리를 박을 거라는 걸 내가 어찌 알았겠느냐? 예전에도 얼굴이 퉁퉁 부풀어 오르도록 맞았지만 자살하지는 않았다. 단지 화풀이하려고 고작 따귀 몇 대만 때리라고 한 것뿐이다. 다투고 화가 난 나머지 공주부로 돌아갔으니까." 평양후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뭐라고 했소? 나와 다툴 때마다 친정에 간 이유가 하인들에게 화풀이하기 위함이었소? 심지어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단 말이오?" "그렇게 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녀가 나쁜 마음을 먹은 것이 저와 무슨 상관이냔 말입니다!" 가의 군주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왼쪽 팔은 여전히 아팠고, 눈물은 계속해서 흘러내렸
문밖에 서 있던 평양후의 임 집사가 안으로 들어와 몸을 굽히며 말했다. "이 일은 걱정하실 필요 없사옵니다. 사온의 반역은 이미 거의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대리사에서 심문하는 것도 배후를 밝혀내기 위함일 뿐이고 설령 배후를 밝혀내지 못하더라도 대리사는 절차를 밟아야 할 것입니다. 평양후부가 공주부와 혼인으로 맺어진 이상 연루되는 것은 피할 수 없으나, 오늘 나리와 가의 군주만 불러 문초하신 것을 보니 큰일을 벌이실 의도는 아니옵니다. 만약 그렇게 하실 뜻이 있었다면, 군주 주변 사람들까지 모두 불러들였을 것이옵니다." 미란은 이해가 안 가는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알 수가 없구나. 장공주께서는 이미 그토록 존귀하신데, 왜 굳이 반역을 도모하셨단 말이냐? 게다가 저택의 첩들은 백 명이 넘는다고 들었고 대부분 죽임을 당했고 태어난 사내아이들은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니, 어찌 그리도 악독할 수 있는 것이냐?" 그녀는 가의 군주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너무 가혹하다 생각하여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그저 내심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악행은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법이니까 말이다. 평양후 노부인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너무도 잔혹하다는 생각에 오금마저 저려왔다."임 집사, 그녀 주변 사람들을 불러들여 학대를 당한 적은 없는지 물어보거라." 잠시 머뭇거리던 임 집사는 노부인의 눈빛이 깊어지자 어쩔 수 없이 말했다. "그녀의 시중을 들던 시녀들 중 상당수가 이미 사라졌사옵니다. 그들이 팔려버렷다고는 하나, 결코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가서 조사해 보거라. 그녀 방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우리가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리도 악독할 줄은 몰랐네. 팔려 갔든 죽임을 당했든, 누군가는 이를 처리했을 테니, 그자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노부인 곁에서 효성을 다했던 미란은 노부인에 대해 잘 알았다. 노부인이 깊이 조사하려는 것은 아마도 이혼을 염두에 둔 것이다."전숙은 항상 군주
소씨 가문의 반응을 보니, 진성의 다른 가문들이 평소에 그들과 친밀하지 않아 이 일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시만자는 소 부인이 놀란 틈을 타 말을 이었다.“우리 부군이 가장 아끼는 조카가 바로 지아인데, 큰 억울함을 당해서 태후마마께 아뢰려던 걸 내가 간신히 말렸소. 지아를 때린 자가 스스로 나서서 벌을 받으면 그만인 것을!”왕이장은 진성에서 여러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시만자의 부군, 만종문의 제자, 병부 효고사, 그리고 진성 내 만종문 산업의 주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와 왕씨 가문의 관계는 일부러 밝히지 않았지만, 이럴 때 활용해도 괜찮을 만큼 중요했다. 태후마마가 만종문의 임 사부를 존경하는 점을 생각하면, 이 관계를 의심하는 이는 없을 터였다.시만자는 말을 마치고 혼자 의자에 앉았는데, 그 표정은 송석석과 다를 바 없었다. 이때 소씨 가문은 비로소 섭정왕비가 직접 소 세자를 데려온 것도 왕지아를 위한 조치임을 깨달았다. 소 부인은 왕지아에게 이토록 강력한 배경이 있는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아이고, 제가 소인의 말만 믿고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네요…”소 부인이 급히 사죄했다.“반드시 뒤에서 함부로 지껄이던 자들을 찾아내 왕씨 아가씨에게 사과하겠습니다. 당장 사람을 데리고 가서…”그러자 시만자가 차분히 말을 끊었다.“처벌할 마음이 있는데, 왕지아의 눈을 더럽힐 필요까지 있겠소? 백작부에서 처벌하지 못한다면, 마침 섭정왕비께서 사람을 데리고 오셨으니 소 세자를 처벌할 때 함께 처리하면 되겠소.”소 백작은 급히 수긍하며 하녀와 종들을 불러내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넘겼다. 송석석이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소 세자가 덕행에 흠이 있는 탓에 작위 수여는 불가능할 것이오. 그리고 오늘 누군가 경위부에 고소한 이상 내가 방관할 수도 없소. 대충 몇 대 맞고 넘어가려 한다면 법이 왜 있겠소?”시만자는 속으로 생각했다.‘화풀이하러 온 게 아니었나? 소씨 가문 때문에 지아와 소민이를 갈라놓을 순 없는데…’소 부인은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시만자는 어이가 없었다. 고작 소씨 가문이라는 작은 백작부가 감히 이렇게 날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평생동안 막돼먹은 여자를 많이 보았지만, 귀족 가문의 막돼먹은 여자는 처음이었다.왕지아가 끌려 나가 뺨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 시만자는 소씨 가문의 대문을 박차고 사람들을 끌어내고는 한바탕 때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화가 나더라도 참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왕지아와 왕청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 모르니 그들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그렇게 시만자가 급히 왕씨 가문으로 달려갔을 때, 왕지아가 손목을 그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또 왕청여가 하녀들을 모두 내보냈다는 말을 듣고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곧장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왕청여가 목을 매려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 또한 화가 나서 그의 뺨을 때렸다.최근 몇 년간 자신의 성격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왕청여의 극단적인 선택을 보자 공방에서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 없었다.왕청여를 때린 후, 시만자는 즉시 소씨 저택으로 향했다. 소씨 저택에 도착하자 석석이 현갑군을 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의심이 앞섰다.‘석석이는 관직이라 복수 같은 걸 할 수 없는데…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송석석은 관복을 입고 정좌에 단정히 앉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필명이 그의 곁을 따르고 있었고, 몇 명의 현갑군이 소민의 형인 소 세자를 붙잡고 있었다.백작부의 모든 어르신과 도련님들이 모여 있었고, 가문을 책임지고 있는 주모인 소 부인도 나와 있었다. 상황을 보니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시만자는 옆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미리 말이라도 해줄 것이지. 이러니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백작과 소 부인이 송석석에게 굽실거리며 사정하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알고 보니 소 세자가 부유한 상인의 양첩과 결탁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걸렸고, 자신의
왕청여에게 자신이 틀렸음을 깨닫게 한 것은 방시원이 돌아올 때도, 전북망과 이혼했을 때도, 왕씨 가문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후회한 것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였다.왕씨 가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왕청여는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니 자신에게 잘못이 많음을 깨닫고 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고, 고생한 자신을 비난할 자격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형수님이 자신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고생했음을 알면서도, 과거를 들추며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다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뼈저리게 후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왕지아는 안백작부의 도련님 소민과 정이 들었다. 비록 평서백 작위는 없어졌지만, 형수가 선제의 찬사를 받아 고명을 얻었고 가업 경영에도 능숙했으며, 셋째 동생이 시씨 가문의 딸 시만자와 결혼해 왕씨 가문은 여전히 병부에서 중용되고 있었다. 두 가문의 위상은 비슷했다.그러나 소민이 어머니에게 왕지아와의 혼인을 청하자, 소 부인은 강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만나는 것조차 금지했다. 비록 소민은 세상에 없는 효자이지만 왕지아에 대한 애정이 깊어 그녀 외에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하겠다고까지 하며 반항했다. 이에 소 부인은 그를 감금해버린 것이다.왕청여는 아마 소 부인이 방문하던 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소 부인은 하인들을 대동하고 왕씨 저택에 난입해 최씨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감히 우리 아들을 넘보다니! 윗사람이 바르지 못하니 아랫사람도 바르지 못한 건가? 당신 시누이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뻔뻔하게 굴더니, 이제는 딸까지 그 꼴이로군! 어린 나이에 남자를 유혹하고, 우리 아들에게 부모를 협박하는 법까지 가르치다니! 이 가문에는 악랄한 자들밖에 없는 것이냐?!”말을 마치자 하인들에게 저택을 부수게 했고, 왕지아를 끌어내 사람들 앞에서 뺨을 때리며 머리와 얼굴에 침을 뱉었다. 왕청여와 최씨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