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우미가 세상을 떠난 지 한 달쯤 지났을 때, 옆집 별장에는 새로운 여주인이 들어왔다.성유리는 하늘이의 입을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 무렵, 그녀는 늘 하늘이를 데려오면서 남현호까지 함께 집에 데려오곤 했다.하지만 어느 날, 학교에서 나온 건 하늘이뿐이었다.“현호가 이번 주말은 집에 안 간다고 했어.”하늘이가 태연하게 말하자 성유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아빠랑 싸웠대?”“아니, 아빠가 결혼한다고 해서 집에 가기 싫대.”하늘이의 목소리는 담담했다지만 아이의 말이 끝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성유리는 뜻을 알아들었다.그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하늘이를 바라보았다.“누가 결혼한다고?”“남현호 아빠.”하늘이는 다시 한번 또박또박 대답하고는 말을 이었다.“결혼할 여자가 벌써 집으로 들어왔다고 들었어. 게다가 현호 할아버지랑 할머니도 같이 살게 된대. 현호는... 그 모습이 보고 싶지 않아서 집에 안 갈 거래.”성유리는 말문이 막혀버렸다.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녀는 한참 뒤에야 겨우 목소리를 찾았다.“그럼 우리는 먼저 집에 가자.”하늘이는 짧게 대답했다.“응.”그게 우연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하늘이가 그런 이야기를 꺼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성유리는 실제로 백지환의 별장 앞에서 새로운 여주인을 보게 되었다.그 여자는 스무 살을 갓 넘긴 듯 앳된 얼굴에 머리를 질끈 묶고 있었다.이목구비는 또렷했지만 코와 턱선이 다소 부자연스러워 어딘가 매끄럽지 못한 날카로움이 묻어났다.게다가 배가 아주 살짝 불러 있었다.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췄다.여자 역시 그녀의 시선을 눈치챘다.곧 여자는 성유리를 훑어보더니 턱을 치켜들었다.“아이고, 아가. 내가 뭐라고 했어. 연못가 근처는 미끄러워서 안 된다니까. 산책하려면 다른 데를 가야지.”성유리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그리고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할머니 한 분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여자를 부축했다.할머니의 눈매는 백지
실버 포레스트에 돌아온 뒤, 성유리는 제일 먼저 하늘이에게 검은색 원피스를 입혔다.금성의 날씨는 여전히 차가웠기에 위에 긴 검은색 캐시미어 코트를 입혀 주고 귀 옆에는 작은 흰 꽃 한 송이를 꽂아 주었다.박한빈은 이미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처음엔 성노을도 따라가겠다고 나섰지만 성유리가 집에 남는 걸 보고는 곧 마음을 접더니 오히려 기꺼이 그녀와 함께 집에 남기로 했다.성유리는 하늘이의 옷차림을 마지막으로 점검한 후, 박한빈 곁으로 다가가 넥타이를 가만히 매만졌다.“우리 금방 다녀올게.”박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서두르지 않으셔도 돼요.”잠시 망설이던 성유리가 이런 말을 덧붙였다.“조심히 다녀오세요.”“알았어.”박한빈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고 이윽고 하늘이에게 시선을 돌렸다.“가자.”그 말에 하늘이는 바로 아빠를 따라 걸음을 옮겼고 그는 아이의 손을 잡고 차에 올랐다.하늘이는 이미 할머니의 장례를 겪어 본 적이 있었다.그때도 박한빈은 최대한 조용히 치르려 했지만 조문객은 끝이 없었다.그래서 이번에 눈앞에 펼쳐진 초라한 영정과 썰렁한 장례식장은 아이의 눈에도 낯설게 느껴졌다.곧, 검은색 어린이 정장을 입은 남현호가 눈에 들어왔다.너무 커서 소매가 손끝을 덮고 어깨도 헐렁해 보였다.아이는 고개를 떨군 채, 온몸에서 깊은 무력감과 상실감을 뿜고 있었다.그런데 하늘이가 들어서는 순간, 마치 뭔가를 감지한 듯 고개를 번쩍 들더니 하늘이에게 곧장 시선을 고정했다.그리고 그보다 먼저 백지환이 다가와 박한빈에게 인사를 건넸다.“박 대표님, 오랜만입니다.”“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박한빈은 그가 진심으로 애도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짧게 대답했다.“수고 많습니다.”백지환은 그 말에 맞춰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하늘이는 어른들의 형식적인 대화를 개의치 않고 단숨에 남현호에게 다가갔다.잠시 아이를 바라보던 남현호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어색하게 웃었다.“왔어
성유리 일행이 다시 금성에 돌아온 날, 그녀는 남우미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출발하기 전, 성유리는 남우미를 찾아가 약속까지 했다.돌아올 때 꼭 남우미와 남현호에게 선물을 사 오겠다고.그 약속대로 여행지에서 이미 선물을 준비해 두었고 하늘이에게는 직접 조개껍데기로 바람개비를 만들어 남현호에게 주라고 했다.그래서 남우미의 죽음이 전해졌을 때, 성유리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박한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치 그녀의 심정을 이미 다 아는 듯 손을 꼭 쥐여 주었다.“장례식... 가고 싶어요.”성유리가 나지막하게 말했고 박한빈은 반대하지 않았다.“같이 가자.”그녀는 다시 무심코 하늘이를 바라보았다.아이는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 성노을과 나란히 걸으며 들떠서 얘기하고 있었다.“하늘이한테는 당분간 말하지 말까요?”성유리가 조심스레 물었지만 박한빈은 고개를 저었다.“하늘이는 현호랑 친구잖아. 이런 때는 오히려 하늘이가 옆에 있어 주는 게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하늘이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약하지 않아.”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성유리의 마음은 복잡했다.순간, 휴가의 따뜻한 기운이 싹 사라지고 현실의 무게가 그녀를 끌어내렸다.남우미의 창백한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고 자신이 늘 꾸었던, 끝없이 깨어나지 못하던 그 꿈이 겹쳤다.“성유리.”성유리는 박한빈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괜찮아? 무슨 일 있어?”“아니요. 그냥... 잠깐 생각이 많아졌어요.”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불쑥 말했다.“됐어. 나 혼자 다녀올게.”“왜요?”“너를 다시 그런 일들에 얽히게 하고 싶지 않아.”지난번 성유리가 아팠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듯했다.박한빈은 비록 빌려온 ‘운’ 같은 이야기를 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갈 수도 없었다.그리고 방금 전 성유리의 반응은 그의 불안감을 더욱 키웠다.사실 박한빈은 그녀가 강하게 우길 거라 생각했는데 성유리는 의외로
성노을은 재빨리 몸을 비켜 도망쳤다.“도망가지 마!”하늘이가 소리쳤다.어느새 성노을은 누나 뒤로 숨어들었고 하늘이는 잽싸게 손을 뻗어 아이를 잡으려 했다.순식간에 둘은 침대 위에서 굴러다니며 엉겨 붙었다.성유리가 손을 뻗어 막자 하늘이는 곧장 외쳤다.“엄마, 빨리 잡아 줘!”“엄마, 살려줘!”그러자 성노을도 드물게 큰소리로 외쳤다.두 남매가 정신없이 뛰노는 사이 아래에서는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문 앞에 박한빈이 서 있는 걸 본 성노을은 금세 웃음을 거두고는 허겁지겁 옷매무새를 고쳤다.그러고는 고개를 떨군 채 얌전히 옆에 섰다.그 모습을 본 성유리는 하늘이와 눈빛을 주고받았고 아이는 금세 눈치를 채고는 외쳤다.“잡았다, 성노을!”이내 하늘이가 노을이에게 달려들자 아이는 본능적으로 엄마 쪽으로 도망쳤다.하지만 이번엔 성유리가 막아섰다.“좋았어, 하늘아! 엄마가 붙잡아놨어!”“악! 살려줘!”성노을은 금세 아빠의 존재조차 잊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그때, 박한빈도 성유리의 신호를 눈치채고는 천천히 다가왔다.이런 장난에 익숙지 않은 탓인지 발걸음마저 어색했다.“아빠! 빨리 잡아 줘!”하늘이가 외쳤다.당황한 박한빈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결국 성노을 쪽으로 손을 뻗었다.“누나 반칙이야! 엄마가 벌써 잡았잖아!”억울하다는 듯 소리를 지르는 성노을의 모습에 성유리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그럼 너도 아빠 불러서 도와달라 그래.”성노을은 순간 아빠 쪽을 힐끔 돌아봤다.평소 같았으면 바로 불렀겠지만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그러자 박한빈이 먼저 앞으로 나서더니 노을이를 자기 뒤로 감쌌다.그의 커다란 어깨가 마치 거대한 산이 되어 두 아이의 장난스러운 ‘공격’을 가로막았다.“아빠, 나 좀 도와달라고!”하늘이가 다시 외쳤다.“엄마 불러.”그러나 박한빈이 태연히 대답했다.“그럼 됐어! 나는 아빠랑 한 팀 할래!”하늘이가 재빠르게 선언했다.“싫어! 나도 아빠랑 한 팀 할 거야!”성노을이 다급히
낮잠을 푹 잔 성유리가 다시 눈을 뜨니 이미 창밖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그리고 잠에서 막 깨어난 탓에 시간 감각도 어딘가 흐릿했다.그때, 문이 살짝 열렸다.“엄마.”성노을이 조심스럽게 불렀다.“응?”곧 성유리가 고개를 돌리자 아이는 더는 망설이지 않고 다가와 그녀를 꼭 껴안았다.“왜 그래? 아빠가 우리 노을이 안 달래줬어?”“달래줬어.”“그런데 왜 아직 속상해하는데? 아빠가 노을이 혼냈어?”“아니.”성노을은 부정했지만 더욱 세게 성유리를 끌어안았다.“그럼 엄마한테 말해줄래? 뭐가 그렇게 속상한지?”성노을은 잠시 머뭇거리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내가 너무 바보 같아.”성유리는 피식 웃으며 아이의 볼을 꼬집었다.“말도 안 돼. 누가 우리 노을이 바보라고 했어? 엄마가 당장 가서 따져야겠다.”성노을은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누나는 똑똑하잖아. 아빠한테 질문도 잘하고 누가 거짓말하는지도 알 수 있는데... 난 아무것도 못 해.”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성유리는 아들을 꼭 안아주었다.“그런 생각 하지 마. 누나는 너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당연히 아는 게 더 많지. 우리 노을이는 엄마를 위해서 그런 거지? 엄만 다 알아.”성노을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그럼 됐지. 엄마는 그거 하나만으로도 너무 고마운걸.”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넌 아직 어린아이잖아. 나중에 더 커서 힘이 생기면 그땐 훨씬 더 엄마를 잘 지켜줄 수 있어. 그렇지?”“나는 언제 클까?”“금방 클 거야.”성유리는 성노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어 보였다.“누나도 네 나이 땐 아무것도 몰랐어.”“정말? 누나 어릴 땐 어땠어?”“잠깐만. 엄마가 영상 찾아줄게.”성유리이 휴대폰을 꺼내자 아이는 금세 고개를 내밀며 옆으로 바짝 붙었다.휴대폰 안에 다른 건 거의 없었지만 두 남매의 사진과 영상은 너무 많았다.그리고 성노을은 평소에 잘 못 보던 모습들이라 너무 신기했다.두 사람은 금세 영상에 푹 빠져 시
하늘이는 박한빈의 표정을 보며 표정이 더 굳어버렸다.아직도 박한빈이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가볍게 웃어넘기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그래서 아이는 다시 입을 열었다.“우린 절대로 엄마가 아빠를 용서하게 두지 않을 거야.”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박한빈의 미소도 사라졌고 비로소 아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진짜 깨달았다.그는 멍하니 성노을을 바라보았고 아이의 눈빛 역시 단단하고 진지했다.이내 박한빈은 깊은숨을 내쉬고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엄마도 이미 아빠를 믿고 용서했어.”“그건 아빠가 엄마를 속인 거지.”하늘이의 목소리엔 단호함이 가득했고 눈빛에는 아빠에 대한 경계와 혐오로 가득 차 있었다.급기야 하늘이는 성노을의 손을 잡아 자기 뒤로 숨기기까지 했다.박한빈은 결국 무릎을 굽혀 하늘이와 눈높이를 맞췄다.“네 눈에 아빠라는 사람이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으로 보여?”그 질문에 하늘이는 잠시 멈칫했다.“그리고 엄마와 아빠 사이가 그런 작은 오해들로 무너질 거라 생각해?”박한빈의 말에 하늘이는 조금씩 숨을 고르며 차분해지더니 곧 성노을을 돌아보았다.하지만 성노을은 그저 눈을 깜빡이며 아버지와 누나를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한참을 생각하던 하늘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솔직히 나도 아빠를 믿었어. 내가 아빠한테 알리고 싶었던 건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린 엄마 편에 설 거라는 거야. 세상 사람들이 아빠가 더 나은 선택이라고 말해도 우린 그럴 생각 없어.”그 말에 박한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처음에 하늘이는 아버지가 화를 낼 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응?”“엄마는 목숨 걸고 너희를 낳았고 그 뒤로도 온 힘을 다해 키우고 지켜줬지.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든, 두말할 것 없이 엄마 편에 서. 그 반대편에 서는 사람이 나일지라도.”그 말에 하늘이의 얼굴이 환해졌고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됐어. 이제야 아빠를 믿을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