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그것 때문인지, 박한빈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오늘 날씨 참 좋네요.”아침 식사를 하는 와중,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저 오늘 사씨 가문에 가고 싶어요. 가도 괜찮을까요?”박한빈은 처음에 성유리가 자신에게 말을 걸자 기뻐했지만 이어진 그녀의 말에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그러나 성유리는 진지한 눈빛으로 박한빈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전에 약속했잖아요. 아니면 저한테 거짓말한 거예요?”“거짓말한 적 없어.”박한빈은 대답하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사씨 가문에 가려는 이유가 뭐지?”“그분들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해야 해요.”성유리가 대답했다.“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게 꼭 사과일까?”박한빈은 최근 그녀가 겨우 안정을 되찾은 상황에서, 어떠한 돌발 상황도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다.더구나 지금의 사씨 가문은 분명 성유리를 미워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마치 박한빈의 이런 생각을 읽은 듯, 성유리가 말을 덧붙였다.“물론 그분들이 저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저도 제 마음의 짐을 조금 덜어내고 싶어요.”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그동안... 진심으로 감사했어요.”그 말에 박한빈은 입술을 오므리다 천천히 대답했다.“생각해 볼게.”그러자 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다.“저는 오늘 꼭 가야겠어요. 만약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오늘 바로 이곳에서 나갈래요. 원래... 여기에 머물 이유도 없으니까요.”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이를 악물었다.“지금... 협박하는 건가?”“그렇게 느끼신다면 협박 맞아요.”성유리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대답했다.그녀의 태도에 박한빈은 깊게 숨을 들이쉰 뒤 말했다.“좋아. 하지만 지금 바로는 안 돼. 적어도 사씨 가문에 미리 연락은 해야 하니까.”“전 오늘 꼭 가야겠어요.”성유리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박한빈은 그녀가 자신이 동의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결국 어쩔 수 없이 성유리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그는 더 이상 말
성유리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햇빛을 본 날이 언제였는지도 잊어버렸다.거리의 빨간 장식들과 설렘이 가득한 분위기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새해가 다가오고 있었다는 것을.그렇다면 사하나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은 셈이었다.성유리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사씨 가문 저택은 너무 조용했다.성유리는 이곳에 몇 번 와본 적이 있었다.가끔 사하나가 하늘이를 데리고 이곳에서 놀 때면, 성유리는 직접 하늘이를 데리러 오곤 했다.그럴 때마다 성유리가 문밖에 도착하기도 전에 하늘이가 안에서 즐겁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류수미는 그런 하늘이를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사하나에게 빨리 결혼하라고 재촉하곤 했다.그리고 사하나는 항상 못마땅하다는 듯 엄마인 류수미의 말에 반박했다.류수미는 겉으로는 꾸짖는 말을 했지만 진심으로 딸을 나무라는 적은 없었다.성유리는 그녀가 사하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고 있었다.그래서 나중에 사하나가 결혼하기 싫다고 고집했을 때도 류수미는 끝내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하지만 그 깊은 사랑은 사하나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성유리.”박한빈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그러면서 그는 성유리의 손을 꼭 잡았다.갑작스러운 행동에 성유리는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고 박한빈은 얼굴을 찌푸린 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저 괜찮아요.”성유리가 금세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뒤, 차 문을 열고 내리자 박한빈도 곧 따라 내렸다.박한빈이 미리 사씨 가문의 가족들에게 방문을 알렸기에 집안의 도우미들이 매우 공손하게 그들을 맞아주었다.류수미와 달리 사민혁은 비교적 침착하고 이성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그럼에도 그는 웃지 않았다.단지 고개를 살짝 끄덕일 뿐이었다.그의 옷차림은 여전히 깔끔하고 단정했지만 나이가 훨씬 더 들어 보였다.소파에 앉아 있을 때, 사민혁의 등이 다소 굽어 있는 것이 눈에 확 띨 정도였다.“사모님은 어디에 계세요?”성유리가 조용히 물었다.“위층에 있다. 몸 상태가
분명히 사민혁은 자기 아내 상태를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그는 이내 박한빈을 쳐다보며 물었다.“성유리 씨가 제 아내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겁니까?”박한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저도 잘 모릅니다.”아무도 그 답을 알지 못했기에, 두 사람은 그저 조용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박한빈은 수없이 많은 상황을 상상했다.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이곳이 어디든 상관없이 바로 방 안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하지만 의외로 방 안은 계속 조용했다.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차분하게 이루어지는 평범한 대화처럼 느껴졌다.그런데도 박한빈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이 조용함이 폭풍 전야 같은 불길한 신호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곧 큰일이 벌어질 것처럼 느껴졌다.그러나 예상과는 다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유리가 방에서 걸어 나왔다.놀랍게도 그녀의 얼굴은 이전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말이다.사민혁을 마주한 성유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사민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성유리는 그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박한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저희 이제 그만 가요.”박한빈의 머릿속은 여전히 의문투성이였다.하지만 성유리에게 직접 묻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성유리는 그의 따뜻하고 건조한 손을 잠시 내려다보았지만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은 채 함께 앞으로 걸어갔다.박한빈이 사민혁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 후, 두 사람은 그 집을 나섰다.가는 길에 박한빈이 먼저 성유리에게 물었다.“방금 류수미 씨에게 무슨 말을 했어?”“별거 아니에요.”성유리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하자 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며칠 전에 하나 씨가 꿈에 나왔어요. 저와 작별 인사를 나누면서 어머니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하나 씨는 어머니를 직접 만나러 가지 못했죠. 아마 어머니가 상
박한빈은 원래 성유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전에 하늘이한테 선물 주고 싶다고 하시지 않았어요?”성유리가 물었다.“지금 사면 되잖아요.”“하늘이가 좋아할까?”박한빈은 망설이며 되물었다.그러자 성유리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좋아할 거예요. 하늘이는 정말 단순한 아이거든요. 누가 자기를 좋아하는지 또 누가 그렇지 않은지 잘 느끼죠. 또 그렇게 오래 마음에 담아두지도 않아요. 박한빈 씨가 진심으로 다가가면 금방 받아들일 거예요.”성유리는 박한빈을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박한빈 씨도 하늘이를 사랑하잖아요. 맞죠?”박한빈은 이런 직접적인 질문에 익숙하지 않았다.잠시 멈칫한 그는 천천히, 그러나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렇다면 하늘이도 느낄 거예요.”“뭘 사면 좋을까?”결국 성유리의 추천으로 박한빈은 하늘이에게 새 그림 도구 세트와 만화책 세트를 선물로 사기로 했다.두 사람이 엔젤 월드로 돌아갔을 때, 하늘이는 무척 신이 나 있었다.그리고 박한빈이 선물을 건네자 놀란 표정으로 멈칫하더니 이내 성유리를 바라보았다.그 눈빛은 마치 그녀의 허락을 구하는 듯했다.성유리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하늘이는 입술을 깨물며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뒤 선물을 건네받았다.성유리는 하늘이를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이것이 하늘이가 박한빈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신호임을 알았다.잠시 후, 김서영이 성유리에게 다가왔고 그녀의 눈에는 연민의 감정과 안도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김서영은 아무 말 없이 성유리를 꼭 끌어안고는 등을 토닥여줬다.성유리는 그녀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다가 김서영이 그녀를 놓아주자 미소 지으며 말했다.“고맙습니다. 그동안 많이 신세를 졌어요.”“신세라니? 하늘이는 원래 내 손녀야. 이렇게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쁜데.”김서영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표정이 살짝 바뀌었지만 성유리를 쳐다보니
밤이 깊어지자 거리에 있는 붉은 색의 등불들이 더욱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붉게 물든 풍경은 기쁨을 상징했지만 성유리의 눈에는 마치 선명한 피처럼 보였다.실버 포레스트로 돌아온 뒤, 박한빈은 곧장 서재로 향했다.요즘 그는 서재에서 잠을 자곤 했다.가끔 성유리가 깨어나 박한빈을 볼 때면 그는 침대 옆에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박한빈은 절대 선을 넘지 않았고 오늘 밤도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원래대로라면 성유리는 씻고 나서 바로 침대로 돌아가 쉬어야 했다.하지만 갑자기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고 서재의 불빛은 여전히 환하게 켜져 있었다.문틈으로 보이는 박한빈은 전화 통화를 하며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리고 있었다.그의 속도는 평소보다 더 빨랐고 행동은 더욱 단호했다.그러다 인기척이 들리자 박한빈의 시선이 곧장 문 쪽으로 향했다.그는 아직 업무 모드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눈빛에 날카로움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방문한 사람이 성유리임을 알아차리자 박한빈의 표정은 빠르게 바뀌었다.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모습에 멈췄다.난방이 잘 돼 있는 실내이긴 하지만, 그녀의 옷차림은 다소 “가볍게” 느껴졌다.성유리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박한빈이 미리 준비해 둔 옷이었다.그는 성유리와 함께 이곳에서 지낼 것을 예상하고 사계절 옷을 마련해 두었다.하얀 슬립 원피스에 헐렁한 가운을 걸친 그녀는 방금 머리를 감은 듯 젖은 머리칼이 어깨를 따라 내려왔고 그중 몇 가닥은 가슴 위로 흘러내렸다.그리고 성유리의 손에는 물이 담긴 컵이 들려 있었다.“박 대표님?”수화기 너머에서 조심스럽게 박한빈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그제야 박한빈은 어렵사리 시선을 거두고 몇 마디 대화를 마친 후 통화를 끊어버렸다.그 사이 성유리는 물컵을 박한빈 앞에 내려놓으며 물었다.“일하시는 데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야.”박한빈이 재빨리 대답했다.그러나 말을 내뱉고 나서야 자신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약간 쉰 것을 깨달았다.그는 무심결에 헛기침을 하고 자세
성유리는 자연스럽게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이런 행동은 과거에도 수없이 반복했던 일이었다.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까. 지금의 상황과 곧 다가올 순간을 떠올리자 성유리는 갑자기 긴장되기 시작했다.그래서 자연스럽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지만 어쩔 수 없었다.박한빈은 이내 그녀를 조심스레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성유리는 이미 눈을 질끈 감고 있었지만 예상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자 혼란스러워하며 눈을 살며시 떴다.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있었다.그 행동에 성유리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러자 박한빈은 살짝 미소를 짓더니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됐어. 이제 푹 자. 나 여기 있으니까.”성유리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원했던 건 이게 아니었으니까.박한빈의 시선과 행동에서 성유리를 향한 감정이 드러나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박한빈 씨는 하고 싶지 않아요?”결국 의아함을 참지 못한 성유리가 물었다.그 물음에 박한빈은 잠시 멈칫하더니 성유리의 손을 잡아줬다.“너는 이제 막 회복된 상태잖아. 좀 더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런 일은... 서두를 필요 없어. 앞으로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으니까.”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설명해 주는 것 같았지만 사실 자기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 같았다.그리고 그의 손에는 약간의 힘이 더해졌다. 하지만 이내 성유리가 아플까 봐 겁이 난 듯 서둘러 힘을 풀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할 말이 더 있었지만 이내 하려던 말을 삼켰다.어차피 이건 박한빈이 선택한 일이었다.‘난 충분히 노력했어.’박한빈이 원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강요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 이상 미안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성유리는 조용히 눈을 감았고 그저 이렇게 끝내기로 했다.그러나 박한빈의 마음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그는 속으로 다짐했다.만약 그녀가 한 번 더 요청한다면 이번엔 자신을 억누르지 않겠다고.하
‘곧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야.’박한빈은 이런 생각을 했다.그렇게 되면 이제부터 두 사람은 행복하게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다.어떤 사람도, 어떤 일도 더 이상 그들을 방해할 수 없을 것이다....성유리는 새벽녘에 눈을 떴다.이 방에 머문 지도 꽤 되었지만 깨어날 때마다 여전히 낯설고 혼란스러웠다.이곳이 경운시가 아니라는 걸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공간이었다.그러니 한빛시에서 벌어진 일도 단순한 악몽이 아니라는 뜻이었다.그건... 실제로 존재하는 일이었다.하지만 이번엔 성유리 혼자가 아니었다.성유리가 고개를 돌리자 바로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그의 손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얼굴은 그녀의 목덜미에 파묻혀 있었다.따뜻한 숨결이 목을 스치며 약간의 간지러움을 주었다.성유리는 그 손길을 떼어내지 않고 조용히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그러나 그는 꿈속에서도 철저히 경계심을 유지하는 듯했다.성유리가 잠시 박한빈을 바라보고 있자 그는 눈을 번쩍 떴다.그렇게 둘의 시선이 정확히 마주쳤다.성유리는 순간 멈칫하더니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너...”박한빈이 뭔가 말하려 했지만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성유리가 갑자기 몸을 기울여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밖은 여전히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고 창문 너머로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하지만 방 안은 난방이 켜져 있어 춥지 않았고 오히려 체온이 점점 더 높아졌다.박한빈의 힘은 강했다. 자신의 허리를 꽉 쥐고 있는 박한빈의 힘에 성유리는 아프기까지 했다.사실 그는 더 부드럽게 하려 했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버렸기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처럼 보였다.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처럼 말이다. 박한빈은 신혼 첫날 밤보다도 더 서툴렀다.그는 예전과 달리 자신의 힘을 조절하지 못했고 성유리가 손톱으로 그의 팔뚝을 꽉 눌렀을 때에야 그는 자신의 행동을 자각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아프게 했어?”성유리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박한빈은 성유리가 화가 난
성유리가 다시 깨어났을 때, 이미 바깥은 날이 밝아 있었다.그녀는 박한빈이 회사에 갔을 거라 생각했지만 몸을 돌리자 뜻밖에도 그는 여전히 그녀 옆에 있었다.박한빈은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댄 채 노트북으로 일을 하고 있었고 화면 밝기를 최저로 낮추고 키보드 소리도 최소화한 상태였다.성유리는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멈칫했다.그때, 박한빈은 금방 성유리의 반응을 알아채고 말했다.“깼어?”그는 노트북을 닫으며 미소를 지었다.“피곤해? 어디 아픈 데는 없어?”그제야 성유리는 몸이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다는 걸 뒤늦게 느꼈다.하지만 고통은 이제 그녀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그래서 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배고프면 말해. 먹을 걸 가져오라고 할게.”박한빈이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서 내려가려 하자 성유리가 갑자기 물었다.“오늘 회사 안 가셔도 돼요?”“응. 안 가도 돼.”“사실... 굳이 매일 여기 있으실 필요는 없어요. 저 이제 괜찮아졌으니까요. 대표님께서 매일 출근 안 하시면 정말 괜찮겠어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되물었다.“왜? 내가 회사 말아먹을까 봐 걱정돼?”“걱정 마. 집에서도 다 처리하고 있으니까.”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군 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그녀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박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누군가에게 죽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그리고 한편, 성유리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세면대 앞으로 갔다.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박한빈은 이미 음식을 테이블 위에 차려두고 있었다.“왜 식탁까지 내려가서 안 먹어요?”성유리의 질문에 박한빈은 잠시 멈칫하다가 웃으며 대답했다.“글쎄, 그냥 방에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박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성유리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넓은 테이블과 소파가 있었음에도 박한빈은 굳이 그녀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성유리는 약간 불편해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성유리는 옆에 있는 난간을 붙잡으려 했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굴러떨어졌다.20개의 계단.그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그녀의 이마는 다섯 번이나 모서리에 부딪혔다.이 숫자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성유리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성유리는 두 손으로 배를 꽉 끌어안았다.뱃속에 있는 아이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본능처럼 움직였지만 바닥에 내리꽂히는 순간, 아랫배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격렬한 통증이 몰려왔다.곧이어 도우미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그리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다급하게 몰려왔다.성유정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녀는 울먹이며 소리쳤다.“언니! 언니 왜 그래? 언니 제발 나 놀라게 하지 마.”성유정의 얼굴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기억하고 있었다.계단에서 굴러떨어지던 바로 그 순간, 성유정을 올려다봤을 때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는 사실을.그리고 성유정의 입꼬리가 분명히 움직였다.소리는 없었지만 그 입 모양은 너무나 선명했다.“성유리, 그냥 죽어버려.”“뭐 하고 있어? 빨리 구급차 불러.”윤청하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그렇지만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그녀가 걱정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뱃속에 있던 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아니, 아이마저도 진심으로 아끼지는 않았다.그녀가 바랐던 건 그 아이가 가져다줄 이익뿐이었다.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게 없어졌다.성유리는 눈을 꽉 감았다.그리고 자신 아래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핏물을 느꼈다.작은 시냇물처럼 바닥을 타고 번져가는 붉은 피....아이를 임신한 주 수는 벌써 3개월이 넘었다.그래서 의사는 유도 분만 수술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성유리는 마취를 했음에도 모든 감각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그들이 자신의 몸에서 아이를 끄집어낼 때의 그 느낌, 살을 찢고 뼈를 뜯어내는 고통.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다.성유리의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절망 그 자체였다.“내 아이 데려가지 말라고.”
“하지만 그것도 이해는 돼.”성유정이 말을 이어갔다.“형부처럼 훌륭한 사람을 노리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언니가 이렇게 일찍 결혼한 것도 잘한 선택이야.”“근데 결혼을 했다고 해도 형부를 넘보는 여자들은 아직도 많을걸? 그러니까 언니, 진짜 조심해야 돼. 형부 잘 지키고!”성유정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리고 성유리는 한참 동안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건 내가 조심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언니 그게... 무슨 뜻이야?”“다리는 결국 박한빈 씨 몸에 붙어 있어. 그 사람이 어디를 가고 싶은지,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는 내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성유리의 말에 성유정은 조용해졌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성유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평온한 눈빛이 성유리의 가슴을 순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성유리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정이 입을 열었다.“언니가 지금 그렇게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 나는 알아.”“그건 언니가 자신감이 넘쳐서도 아니고 형부가 언니한테 잘해서도 아니야. 그저... 언니가 임신했으니 그래서 이제는 뭐든 다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러니까 마음 놓고 있는 거지?”“언니도 알아? 아까 할머니가 그러셨거든. 엄마가 지화의 일부를 언니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넘기려고 한다고.”“말로는 아이에게 준다지만 지금은 겨우 조그만 태아일 뿐이다. 결국은 언니 손에 들어가는 거지. 안 그래?”“언니는 정말... 운도 좋다.”성유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조금 전까지 보였던 그 해맑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녀의 눈빛에는 차가운 음침함이 서려 있었다.그 시선에 성유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돌아서서 가려 했다.그러자 성유정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언니, 왜 그렇
말을 끝낸 뒤,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박한빈은 그녀가 떠나는 발소리를 들었고 순간, 넘기던 서류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방 입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그가 차에 올라 떠날 준비를 할 때도 성유리는 배웅하러 나오지 않았다.뭐 이상할 것도 없었다.사실 예전부터 자신이 출장을 갈 때 성유리가 배웅을 한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방금 성유리가 자기를 불렀던 그 한마디 때문인지 박한빈은 은근히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그리고는 그 기대를 스스로 짓밟았다.생각해 보면 별로 큰 일도 아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이런 건 익숙한 일이었으니까.결혼을 했다고 해도 결혼하지 않은 것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며 박한빈은 시선을 거두고 앞좌석에 있는 기사에게 말했다.“출발하죠.”...박한빈이 출장을 간 사이, 매달 열리는 박씨 가문의 가족 식사는 여전히 계속되었다.성유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안은 꽤 떠들썩했다.그제야 성유리는 알게 되었다.성유정뿐 아니라 윤청하까지 오늘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유정이 생일은 큰 행사니까.”김난희가 집안 어르신으로서 먼저 포문을 열었다.“올해는 막 대학도 졸업했잖아. 이제 어엿한 성인인데 당연히 성대하게 해야지!”그 말을 듣던 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예전에 유정이 16살 생일, 18살 생일 때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때마다 이번 생일은 꼭 잘 챙겨야 한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러니 유정이 생일은 단 한 해도 대충 넘어간 적이 없네요.”“그야 당연하지.”김난희는 윤청하의 장난기 섞인 말을 전혀 개의치 않고 도리어 맞장구쳤다.“여자애는 보석 같은 존재야. 해마다 생일은 정성껏 챙겨줘야 해.”“그럼 오늘도 잘 따라야죠.”그들은 다 함께 웃으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성유정도 중간중간 장난스럽게 말을 끼워 넣었고 거실 안은 유쾌하고 활기찼다.성유리가 다가가 인사를 했을 때조차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이런 일에 익숙했던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성유리는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성유정과 박한빈이 함께 전시회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도우미가 박한빈의 외투 주머니에서 티켓 한 장을 발견하고 성유리에게 이걸 보관할지 물어본 게 알게 된 계기였다.성유리는 입장권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고 표 뒷면에는 이번 전시회의 작품이 인쇄되어 있었다.형형색색으로 물든 유화였고 위에는 선명한 장미꽃에 꽃잎 위에는 이슬이 맺혀 있는 듯했다.이슬이 아래로 떨어질 때쯤이면 그림 배경은 어느새 한 여자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그리고 그 이슬은 자연스레 그녀의 눈물이 되어 있었다.이 작품은 온라인에서도 꽤 유명했다.만약 전시회에 초대한 사람이 성유정이 아니었다면 성유리는 정말 가보고 싶었을 것이다.하지만 박한빈 주머니에서 그 티켓을 발견한 순간, 모든 흥미는 사라져 버렸다.성유리는 그 티켓을 더는 들여다보지도 않고 조용히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그날 저녁, 박한빈은 집에 돌아왔지만 성유리와 식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짐을 싸기 시작했고 성유리는 박한빈이 또 출장을 나가는 거라는 걸 알았다.성유리는 복도에 서서 멍한 표정으로 박한빈을 바라봤다.‘어디로 가는 걸까? 언제 돌아오는 거지?’사실 그녀는 박한빈에게 묻고 싶었다.그렇지만 그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였다.임신하고 처음 병원에 갔을 때만 박한빈이 함께했고 그 이후 모든 산부인과 검진은 혼자 갔다.담당 의사는 그들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아이 아버지가 왜 안 왔냐고 묻지 않았다.그러나 초음파 검사를 맡은 다른 의사는 사정을 몰랐기에 지난번 초음파 검사 중,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기회가 되면 다음 검진에는 아이 아버지도 같이 오시면 좋겠네요.”왜냐하면 다음번 검진에는 4D 컬러 초음파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기술을 통해 그들은 미리 아이의 윤곽과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그건 부모가 아이를 처음 ‘만나는’ 순간이기도 했다.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돌아오는지 알고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