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스무 살의 여름, 한 번의 비극으로 첫사랑은 끝났다. 그리고 10년 뒤— 베일에 싸인 스타 작가'강지음'과 출판사 에이스'마서현'으로 다시 만난 두 사람. 우연, 실수 혹은 질긴 악연이 만든 재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음은 서현에게 믿기 힘든 계약을 제안했다. “나랑 계약하자, 마서현” “…계약?” “나랑 계약해. 대신, 조건이 있어.” “…?” “내가 원할 때, 나랑 자자.” “…뭐? 뭘 해?” “뭘 하자는 건 아니고, 나랑 자자고. 네가 날 좀 재워줘야겠어.” 출판사의 위기를 막기 위해. 불면 없이 글을 쓰기 위해. 그리고 잃어버린 우리의 시간을 위해. 불면 계약으로 다시 시작된 첫사랑의 뜨거운 재회로맨스. [첫사랑과 불면 계약을 했다]
Lihat lebih banyak10년 전, 그러니까―
스무 살.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그를 만났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아버지와 그 여자의 싸움을 견디지 못하고 집에서 뛰쳐나온 날이었다.
분명 좀 전까지 시퍼런 하늘에 쨍쨍하게 빛나던 해가 시커먼 구름 뒤로 자취를 감추었고, 잿빛 하늘의 대찬 빗줄기가 땅을 뚫을 기세로 쏟아지고 있었다.
서현은 입술을 잘근 씹어 물고는 그대로 폭포수 같은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빗줄기가 얼마나 세차던지 대문을 나서는 그 짧은 순간에도 벌써 머리통이 얼얼했다. 게다가 신발도 신지 못한 발바닥은 이미 깨질 듯이 시려왔다.
얼마 못 가 내달리던 온몸은 깊은 물 속에 뛰어든 듯, 가득한 물기로 무거워졌다. 그럼에도 메마른 가슴은 조금도 젖지 않고 텁텁하기만 했다.
우렁찬 빗소리에도 집안에서 나던 굉음이 고막 가까이 진동하는 듯했다.
‘그냥 이대로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으면.’
수없이 되뇌던 말인데 오늘은 좀 더 축축하고 퀴퀴하게 느껴졌다.
서현은 아득해진 시야를 닦고 또 닦으며 계속 달렸다.
하지만 제아무리 지독한 오기라도, 하늘에서 뿜어대는 세찬 빗줄기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서현의 몸은 달리면 달릴수록 심하게 떨려왔고, 발바닥은 얼어붙어 깨질 듯이 아팠다.
한여름의 비가 이렇게 서늘할 일인가. 불규칙하게 터지는 숨결마다 차가운 쇠 맛이 목젖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점점 비릿해지더니 숨구멍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렇게 서서히 눈앞은 캄캄해져 갔고, 더 이상 팔다리에는 어떤 감각도 느껴지지 않을, 딱 그즈음이었다.
‘퍽-!’
시린 물기에 단단한 온기가 세게 맞닿았다.
“야!”
제 몸 안으로 와락 달려든 여린 몸을 한 품에 끌어안은 남자의 가슴팍이 놀란 듯 크게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놀란 가슴께에서 여자의 엷은 숨결이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숨소리에 여자의 허리를 감싼 남자의 팔에는 본능적으로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 작은 힘에도 바스러질 듯 파르르 떨리는 몸….
혹시라도 이 작은 숨소리가 정말 꺼져버릴까, 이 작은 몸이 제힘에 바스러질까 봐 무서워진 남자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너, 너 미쳤어? 비는 죄다 맞고…이런 날 왜 앞도 안 보고 뛰어다녀?!”
그런 제 목소리에 여자애의 눈꺼풀이 사르륵 진동했다. 그러더니 이내 힘겹게 벌어지는 애처로운 입 모양.
“……말…이…야.”
무슨 말인지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여자가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남자의 놀란 가슴이 잠시 진정됐다.
“그래, 말해 봐. 말. 정신 좀 차려보라고!”
“…너 뭔데…반말이냐고…”
여자의 새파란 입술 새로 나온 말이 제법 까칠해서 남자가 당황해 입을 뻐끔거렸다. 그 찰나에 여자의 고개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야!”
고함과 함께 남자는 서현을 번쩍 안아 들었다. 온몸이 빗물에 흠뻑 젖었는데도, 제 몸이 아닌 양 힘없이 축 늘어졌는데도, 남자에게 서현은 너무나도 가벼웠다.
* * *
“…으, 으.”
온몸이 뜨겁고 얼얼했다. 가늘게 뜬 서현의 눈이 두어 차례 슴벅였다.
이내 서현의 초점이 낯선 공간을 인식했는지 또렷해질 즈음, 불쑥 시야를 가득 메운 낯선 살색에 눈이 번쩍 뜨였다.
번쩍 뜬 눈으로 다시 본 그것은 분명 남자의 몸이었다.
“으아아아악!”
“악!”
제 비명에 살색의 주인도 덩달아 비명을 질렀다. 남자는 가려지지도 않는 커다란 몸을 가리며 소리를 질렀다. 이윽고 저보다 더 사색이 된 남자가 서현을 바라보았다.
눈썹께까지 구불구불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 쌍꺼풀 없이 길게 뻗은 눈매는 매서워 보였지만, 왼쪽 눈 아래 작은 점과 말간 눈동자 때문인지 이상하게 무섭지는 않았다.
아…여긴 어디고, 저 남자는 누굴까.
그래, 둘 중 하나겠지.
“납치범이세요? 아니면 생명의 은인?”
뻐근한 몸을 일으켜 앉은 서현은 질문을 하고 나니, 집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오피스텔이었다. 딱히 인테리어랄 것도 없는 심플하고 단순한 이 공간은 침대에서 부엌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뭐? 납치범?!”
남자는 빨래 건조대에서 티셔츠 한 장을 휙 집어 입었다. 탄탄한 몸이 커다란 옷에 가려진 그에게서는 소년미가 물씬 풍겼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못마땅한 얼굴로 되묻는 남자에게 서현은 깔깔해진 목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뭐든 상관없어요.”
“어쭈? 상관이 없어?”
서현의 고개가 푹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포근한 이불 위로 눈물이 떨어지며 툭, 툭 소리를 냈다.
“…야. 상관없다면서…왜 우냐?”
그러게. 나 왜 울지.
남자의 물음과 자신의 반문 이후 눈물은 더 거세게 쏟아져 내렸다. 어깨가 들썩이고 몸이 떨려왔다.
아까부터 느껴진 이 집의 온기 때문일까?
이 별거 없는 집에는 온기가 가득했다. 낯선 남자의 집인데도, 처음으로 안심이 됐다. 뛰쳐나온 그 집에서는 느껴본 적 없는 묘한 안도감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야, 야…”
당황한 남자가 말을 더듬으며 가까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납…치 그런 거 아니야. 나 그런 놈 아니야…아, 진짜 아닌데.”
서현이 고개를 들어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희뿌연 시야 속 그 남자는 우는 저 때문인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커다란 키를 한창 구부리고 있었다.
끅끅거리는 숨을 간신히 삼킨 서현이 입을 열었다.
“…끅. 흐윽, 끅. 근데…끅. 근데 왜 자꾸…반말이…세요?”
“어…? 아, 미안…근데 나 진짜 나쁜 놈 아니야…요.”
남자는 서현을 안심시키려는 의도인지 자세를 더욱 낮추며 침대 가까이로 다가왔다. 서현은 그런 그가 여전히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이 선명해질수록 안심되었다.
나 혹시 외모지상주의였나.
그때, 남자가 조심스럽게 침대에 등을 기대며 바닥에 살포시 앉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서현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다 울었냐?”
어느새 진정된 서현은 눈과 코를 벅벅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돌려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현은 그의 뒤통수를 보며 겨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름, 나이…말해줘요.”
“강지음. 스물셋.”
강지음…오빠였네.
서현은 얕게 헛기침하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마서현. 난 스무 살…”
순간 지음의 뒤통수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곧 저를 슥 올려다보는 지음에게 서현은 입술을 삐쭉이면서 말했다.
“반말해…나도 할게.”
서현의 말에 지음은 금세 픽 웃더니 침대에 머리를 젖혀 기대었다. 그러자 지음의 옆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날렵한 턱선 아래로 두껍게 움직이는 그의 목젖을 보며 서현은 저도 모르게 침을 크게 삼켰다. 때마침 지음의 시선이 서현을 향했다. 서현은 순간 달아오르는 얼굴을 얼른 감췄다.
곧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밥 먹을래?”
몇 년 후,내리쬐는 햇볕이 아스팔트를 뜨겁게 달구는 한여름이었다. 쨍쨍 울어대는 매미 소리 위로 해맑은 아이의 웃음소리가 겹쳐 들렸다.“맴!맴! 까하하항”“맴맴이가 그렇게 재밌어?”횡단보도 앞에 선 작은 아이가 엄마의 손을 꼭 잡고 나무 위를 올려다보며 연신 까르륵거렸다.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삐져나온 햇빛이 아이의 얼굴 위로 드리우자, 엄마의 손이 얼른 아이의 눈가에 그늘을 만들어주었다.“눈부시다, 그치?”“반짝반짝 예뻐!”“우리 아들은 여름을 많~이 좋아하네.”“아빠!”“응?”“아빠야!”아이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으로 엄마의 시선이 향했다.횡단보도 건너편.유난히 키가 큰 남자가 긴 팔을 휘휘 젓고 있었다.“그러게, 아빠네.”곧, 신호등의 색깔이 바뀌었다.남자를 바라보던 여자의 얼굴 위로 환한 미소가 번졌다.“아빠한테 빨리 갈까?”“응!”여자는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아이의 작은 보폭에 맞춰 총총 뛰기 시작했다.“꺄아하하하하”아이가 좋은지 소리 내어 웃어댔고, 그런 아이의 모습에 여자도 웃음이 터졌다.
지음의 책 《마음의 자리》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했다. 그 이후 국내에서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멜로 영화의 부활을 알리듯 영화화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다.덕분에 서현의 하루하루는 늘 바쁘게 흘러갔다.작고 소중한 출판사 ‘마음의 숲’은 이제 대작을 만들어낸 출판사가 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아…또다…”서현은 코 밑을 적시는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에에? 팀장님 또!!”프린터기에서 서류를 받아오던 채연이 서현을 보며 소리쳤다.모니터에 고정되어 있던 서현의 고개가 그제야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얼른 코에 휴지를 가져다 대는 서현의 손. 흰 휴지는 금세 빨갛게 물들었다.요즘 들어 몸이 조금 무거웠다. 코피도 잦아졌고, 심한 날에는 눈앞이 핑 돌기도 했다.하지만 서현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일이 워낙 많아서 그런가 보다 했고, 무엇보다 일에 재미가 붙은 지금의 생활이 싫지 않았다.“팀장님, 진짜…그러다 쓰러지시면 큰일 나요. 강 작가님이 우리 가만 안 둘걸요.”채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서현에게 다가와 휴지를 더 뽑아 건넸다.“뭐야? 마서현 또 야? 코피?!”2층에서 내려오던 권지혁 실장이 서현을 발견하곤 익숙하게 놀라며 물었다.&ldq
다시 1년 뒤, 마음의 숲 출판사 안.“팀장님! 퇴근 안 하세요?”오늘의 야근 동지였던 주승이 먼저 일어서며 서현에게 물었다. 서현은 대답 없이 손만 뻗어 휘휘 흔들었다.“정말 불편하게 하시네…저녁 드실 거 사다 드릴까요?”“아니. 지금 참았다가 야식 먹을 거야. 얼른 가.”주승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저 인사를 마치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곧 서현의 비명이 들렸다.“아아아아악!”비명과 함께 벌떡 일어난 서현은 서둘러서 짐을 챙겼다. 그녀는 엉터리로 묶은 머리를 덜렁이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문을 열고 나오자, 툭.툭……툭툭툭.난데없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서현의 잔발은 잠시 멈칫거렸지만, 이내 굵어지는 빗줄기 속으로 뛰어들었다.그러다 마당을 가로지르던 서현의 발걸음이 문득 멈췄다.출판사 마당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는 서현의 눈에는 어느새 햇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1년 전, 봄.지음과 강원도에서 웨딩 촬영을 마친 후, 두 사람은 바로 이곳 ‘마음의 숲’에서 결혼식을 올렸었다. 출판사 직원들과 함께 작은 파티처럼 치른 결혼식이었다.새파란 하늘과 반짝이는 햇빛 사이로 달큰한 바람이 불어오는 날.이토록 아름다운 날, 초대
그리고 그날 새벽.엎드려 잠든 서현의 머리 위로 익숙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서현의 눈꺼풀이 스르륵 열렸다.“우리 서현이, 깼어?”그녀의 미몽을 틔우는 지음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서현의 고개가 불쑥 올라왔다.등을 기댄 채 비스듬히 앉아 있던 지음이 말간 얼굴로 빙글 웃어 보였다.“강지음!!”“쉬잇. 병원 사람들 다 깨우려고?”1인실이라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서현은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고 주위를 살폈다. 지음은 그런 그녀를 보며 키득거렸다.서현은 목소리를 조금 낮춰 다급하게 물었다.“다 잔 거야? 몸은 어때. 응? 사람이 무슨 일주일을 넘게 자…! 진짜…,”“그러게…미안해.”“아니야. 아니야. 진짜 잘했어. 잘했어, 강지음….”서현은 문득 지난날을 떠올렸다.아빠를 피해 있는 힘껏 달아나 경찰서 앞에 주저 앉아 있던 날. 바보처럼 도망친 자신을 바라보며, 지음은 잘했다고 말해주었다.이번에는 서현도 그 말을 돌려주고 싶었다.“…서현아.”“응. 말해. 다 얘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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