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여섯 시, 시연은 마지막 환자를 진료하고 진료실을 정리했다.양석현 교수의 진료는 정해진 수량이 있었고, 하루에 볼 수 있는 환자 수도 한정되어 있었다.시연이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기환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생 많았어요. 이제 가면 될까요?” 기환이 말했다.“형수님, 서두를 필요 없어요. 형님이 금방 온다고 하셨거든요.”“네?”시연은 순간 멈칫했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유건 씨가 온다고요?”말하면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목소리는 부드럽고 가벼웠다.“그럼 좀 기다려야겠네요.”20분 뒤, 유건이 도착했다.“형님.”유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시연에게 다가왔다.시연은 책을 내려놓으며 환하게 웃었다.“왔어요?”“어디 다쳤어?”유건은 시연 앞에 반쯤 무릎을 꿇으며 다급하게 물었다.그리고 손을 뻗어 여자의 다리를 살피며 다시 한번 물었다.“어느 쪽이지?”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려 했다.시연은 깜짝 놀라 유건의 손을 막았다.“유건 씨!”“응?”유건은 태연하게 눈썹을 올렸다.“걱정하지 마, 우리밖에 없어.”이미 기환과 다른 직원들은 조용히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오른쪽 다리예요.”시연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며 손을 풀었다.“별거 아니에요. 살짝 긁힌 정도예요. 내가 부주의해서 그런 거고요.”유건은 꼼꼼하게 살펴본 후, 더 심각한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했다.“이제 곧 엄마가 될 사람이니까, 더 조심해야 해.”“그래요...”시연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유건 씨가 또 아이에 대한 이야기했어.’ ‘그렇다면... 이 기회에 다음 출산 검사 일정에 대해 말해도 될까?’시연이 고민하는 사이, 유건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오늘은 특별히 집 말고 밖에서 먹자.”시연은 유건의 행동에 놀라면서도 웃었다.“좋아요. 당신이 결정해요.”차를 몰아 향한 곳은 ‘영복루’였다.시연의 취향을 고려한 유건은 꼼꼼하게 메뉴를 주문했다.“음식
순간, 유건은 기쁨과 놀라움에 휩싸였다.심지어 무의식적으로 되물었다.“진짜?”시연은 오히려 긴장이 풀린 듯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진짜예요. 뭐 하러 거짓말하겠어요? 당신은 내 남편이잖아요.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게 잘못된 일이에요? 아니면, 하면 안 되는 일이에요?”맞는 말이었지만, 유건은 여전히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잠시 생각한 후, 그는 조용히 물었다.“그럼... 노은범보다도?”유건은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 전, 술에 취했던 밤. 시연이 자신을 데리러 왔을 때 했던 말을.그녀는 노은범을 사랑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했다. ‘지금도 같은 생각인 걸까?’시연은 대답하지 못했다.사실, 유건과 은범을 같은 기준으로 비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고 대표님, 사모님. 음식을 준비해도 될까요?”그 순간, 시연은 눈에 띄게 안도하며 답했다.“네, 들어오세요. 배가 고프네요.”“네, 사모님.”직원이 음식을 들고 들어오자, 유건은 살짝 눈썹을 올렸다. 그는 시연이 일부러 화제를 피하는 게 뻔히 보였지만, 굳이 들추진 않았다.‘노은범은 과거일 뿐이니, 시간이 지나면 더 깊이 묻혀 사라질 거야.’...두 사람은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자기 전, 시연은 유건의 품속에서 나지막이 물었다.“혹시... 내일 바빠요?”“응?”유건은 생각하다가 답했다.“그렇게 바쁘진 않을 거야.”그는 결혼 준비로 한동안 정신이 없었으니, 최근 일부러 여유를 두고 있었다.그리고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매일 늦게 들어오는 것도 좋지 않았다.시연은 기분이 좋아졌다.“그럼 내일 날 데리러 올 수 있어요?”그녀는 퇴근 후 산부인과 검진을 예약해 두었다. 만약 유건이 데리러 온다면, 자연스럽게 검진을 함께할 수 있을 터였다.“좋지.”유건은 별다른 고민 없이 수락했다.“내가 데리러 갈게.”시연의 눈빛이 반짝였다.여자의 사소한 기쁨이 유건에게도 전해진 것 같아서
[소미야, 이건 양호천 감독님이 직접 부탁하신 거야. 넌 아직도 감독님의 영화에 출연하고 있잖아. 앞으로도 신경 써야 한다고!]조애린은 소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유건도 다 듣고 있을 테니, 차라리 확실하게 말하는 게 나았다.[고 대표님, 처음에 소미를 양호천 감독님의 작품에 넣어주신 것도 대표님이셨잖아요. 이 바닥이 원래 그렇게 돌아가는 거, 잘 아시죠? 언제나 강자에게 붙고, 약자를 밀려나는 곳이라는 걸요...][지금 대표님이 결혼한 이후로 소미가 기댈 곳이 없어졌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오늘 양호천 감독님의 영화가 개봉하는 자리에, 감독님이 대표님을 초대한 것도 그걸 확인하려는 의도인 거라고요. 만약 대표님이 안 오시면...]조애린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섞였다.[그럼 소미의 입장이 난처해지는 거예요.][그만해!]소미가 조애린의 핸드폰을 빼앗으려 했다.하지만 조애린은 개의치 않았다.[고 대표님, 소미는 더 이상 대표님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해요. 그런데... 대표님은요? 이 정도 배려도 못 해주시는 건가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가 끊겼다.아마도, 소미가 전화를 끊어버린 모양이었다....유건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한참을 고민한 후, 다시 핸드폰을 들고 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원래 그는 병원에 있는 시연을 데리러 가기로 했지만, 이제는 약속을 어길 수밖에 없었다.[여보세요.]시연이 전화를 받았다.[벌써 도착한 거예요? 생각보다 빠르네요.]유건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여보, 갑자기 일이 생겼어. 오늘은 당신을 데리러 갈 수 없을 것 같아.”잠시 정적이 흘렀다.시연의 목소리가 처음보다 조금 가라앉았다.[아,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일도 중요하니까... 난 퇴근하면 혼자 갈게요.]기환이 함께 있으니, 유건이 크게 걱정할 건 없었다.“최대한 일찍 돌아갈게.”그는 영화 시사회에 잠깐 얼굴만 비추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네, 그럼 끊을게요.]전화
때가 되면 상황을 보고 결정할 일이었다. 어쩌면 더 이상 수액을 맞을 필요가 없을지도 몰랐다.“그래.”오선화는 다소 누그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부부끼리 상의한 거네? 좋아, 일단 세 번 처방할 테니까 맞아 보고 결정하자.”“감사합니다.”오선화는 처방전을 적으면서도 잔소리를 놓치지 않았다.“다음번엔 꼭 고 대표님이랑 같이 와. 아기가 배 속에 있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를 거라 생각하면 안 돼. 부모가 다정해야 건강하게 자란다니까.”“네, 교수님 말씀대로 할게요.”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오늘 밤, 유건에게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번에는 분명 함께 올 수 있을 것이다.출산 검진이 끝난 후, 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진아야, 우리 밖에서 저녁 먹자. 오늘따라 훠궈가 당기네.”“좋지!”진아는 흔쾌히 동의했다.“먹고 나서 영화 한 편도 보고 갈까?”“완전 찬성!”두 사람은 곧장 시내로 향했다.훠궈집에 자리를 잡고 앉자, 진아가 두리번거렸다.시연이 웃으며 물었다.“뭐 찾아?”“네 보디가드.”진아가 투덜거렸다.“어? 아까까지 따라왔잖아. 어디 갔어? 설마 가버린 거야?”“아니.”시연은 미소 지으며 설명했다.“기환 씨는 원래 이런 거 전문이야. 평소엔 안 보이지만 필요하면 바로 나타나지. 신경 쓰지 마. 우린 그냥 맛있게 먹자.”“오... 완전 프로네. 신기하다.”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식사했고, 시연은 영화 티켓을 예매했다. “무슨 영화야?”“양호천 감독님의 신작. 오늘 개봉했어.”양호천은 업계에서 실력파 감독으로 유명했다. 그의 작품이라면 기본적으로 믿고 볼 수 있었다.“기대되는데?”영화관은 같은 건물 13층에 있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극장으로 올라갔다.하지만 진아와 시연이 도착하자마자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뭐야? 사람 엄청 많네.”진아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지나가는 관객에게 물었다.“저기요, 오늘 무슨 날이에요?”“몰랐어요? 오늘이
“어? 고유건이잖아.”진아가 중얼거렸다.“이 영화, 네 남편이 투자한 거야? 그래서 오늘 산부인과도 못 온 거야?”“아마... 그렇겠지?”시연은 모호하게 답했다. 사실, 유건의 사업에 대해 그녀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그가 오늘 ‘일이 생겼다'고 한 것도, 이 영화 투자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잠시 후, 예상치 못한 현실이 시연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유건의 바로 뒤를 따르는 사람은 바로 장소미였다.진아는 본능적으로 시연을 쳐다보았다.“장소미? 이 영화에 출연했어?”“나도 몰랐어.”시연의 입가에 만연했던 미소가 굳어졌다. 그녀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예매한 영화였기에, 출연진을 확인해 보지도 않았다. 그럼 유건이 오늘 이곳에 온 진짜 이유는?“잠깐, 검색해 볼게.”진아는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검색했다.[화도...]주연 배우 명단에는 장소미의 이름이 없었다.다만, 특이하게도 ‘특별 출연’이라는 항목이 있었다.“특별 출연?”진아가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이 영화 촬영한 지 꽤 됐는데, 언제 들어갔대? 이런 특별 출연은 그냥 ‘백' 아니야?”시연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인맥을 이용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무대 위, 소미는 유건과 나란히 서 있었다.두 사람은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유건은 살짝 몸을 숙이며 신사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그러다가, 유건이 미소를 지었다.소미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더 크게 웃었다.그 모습을 본 진아는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이게 뭐야, 진짜!”시연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를 바라봤다.“이 영화, 계속 볼 거야?”진아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시연의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나도 같이 가!”“죄송해요, 지나갈게요.”상영관 안에는 사람들이 많아 빠져나가기 쉽지 않았다.마침, 무대 위에서 시선을 돌린 유건이 그 모습을 포착했다.관중 속에서도 단번에 시연을 찾아냈다.남자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시연이가 여기 있었다
“유건 씨.”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소미가 뒤쫓아 와 유건의 곁에 나란히 섰다. 언뜻 보기엔 오히려 둘이 더 잘 어울리는 한 쌍 같았다. “지 선생님.” 소미는 뛰어왔는지 숨이 약간 가빴고, 미안하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영화 보러 오셨어요? 진작 알았으면 제가 미리 표라도 챙겨둘 걸 그랬네요...” 하지만 소미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시연은 마치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진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진아야, 가자.” “어, 응...” 완전히 무시당한 소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민망하게 웃으며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 씨, 지 선생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요. 제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요?” “아니.” 유건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동시에 손을 뻗어 시연의 손목을 잡았다. 시연은 곁눈질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놔요.” 하지만 유건은 당연히 놓을 생각이 없었다. 깊은 주름이 잡힌 미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끝났어. 같이 가자.” “그래요?” 시연은 비웃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 시선엔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누가 저렇게 애타게 보고 있는데요? 나 때문에 오늘 밤 계획을 망칠 필요 없어요. 난 이만 가볼 테니까, 두 사람은 하던 거나 계속해요.”그 말속엔 분명한 비꼼과 조롱이 섞여 있었다. “여보...” “지 선생님.” 소미는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렇게 말할 필요 있어요? 제가 지 선생님한테 미운털 박힌 거 알아요. 하지만 유건 씨는 지 선생님 남편이에요.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는 거 아닌가요?” “소미 씨.” 유건이 소미를 말리려 했다. “그만해.” “아니, 말하게 둬요.” 시연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더 듣고 싶으니까요.” “흥...” 소미는 코웃음을 쳤다. “오늘은 제가 출연한 영화의 시사회가 있는 날이에요. 유건 씨는 저를 응원해 주러 온 거고요.
시연의 목소리는 한층 더 차가워졌다. “아니, ‘만약’이 아니에요. 지금 여기서 분명하게 말할게요. 난 사과하지 않을 거예요, 절대!!” 시연은 유건의 손을 뿌리치고 돌아섰다. “진아야, 가자.” “그래!” 그 순간, 유건은 얼어붙었다. “유건 씨, 이게 다... 미안해요. 저 때문이에요...” “소미 씨 잘못 아니야.” 유건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시연이가 소미 씨한테 너무 심한 말을 했어. 내가 대신 사과할게. 오늘 밤엔 정말 미안했어. 난 먼저 가볼게.” “유건 씨!” 남자를 더 이상 붙잡을 수도 없어서 소미는 그저 유건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는 쓸쓸한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 속엔 어쩔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스쳤다. ‘둘이, 싸웠네.’ ...주차장에서 유건은 시연을 따라잡고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기환아, 진아 씨를 데려다줘.” “네, 형님.” 시연은 순식간에 다른 차에 태워졌다. 그리고 남자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화를 내려고 하는 건가?’ ‘...’“오늘 일은 내 잘못이야.” 뜻밖에도, 유건이 먼저 사과했다. “당신이 알면 기분 나빠할 거 같아서 숨겼어. 그런데도 결국 들켜버렸네.” 시연은 창밖을 바라보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여보.” 유건은 여자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웠다. “숨긴 건 내 잘못이야. 하지만 당신은 오해하고 있어. 장소미한테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고. 오늘 밤, 나랑 그 사람은 단둘이 있는 시간조차 없었어.” 그는 계속 설명하려고 했지만, 시연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유건 씨, 내가 장소미한테 한 말, 당신한테도 그대로 돌려줄게요.” “친구라는 명목으로 미련을 남길 행동은 하지 마요.” 이 날카로운 일침 때문에 유건의 표정이 굳어졌다. “너무 심하게 말하는 거 아니야?” 그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나랑 장소미가 한때 결혼까
유건은 혼자 남아 있는 것이 지루했고, 아까 일도 계속 신경 쓰였다. 결국 시연을 달래야겠다고 생각하며 서재로 향했다. 그는 여자의 뒤로 다가가 허리를 감싸 안았다. “또 책 보고 있어? 아까 깜빡했는데, 저녁은 제대로 먹었어?” 가까이 다가가자, 시연은 남자에게서 은은한 여성 향수를 맡을 수 있었다. ‘난 향수 안 쓰는데...’ 그렇다면 이건 장소미한테서 묻어온 향기였다. “먹었어요. 진아랑 같이.” 시연은 태연하게 유건을 밀어내고, 다시 펜을 들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간간이 필기를 이어갔다. 너무나 성의 없는 대답. 시연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유건은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할 말은 다 했으니까.하지만 어떤 것들은 그가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함부로 약속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늦었어.” 유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슬슬 잘 준비해야 하지 않아?” “먼저 자요. 이 두 장만 보고 들어갈게요.” 시연은 여전히 남자를 보지 않은 채, 담담하게 대답했다. 더 이상 말을 걸어도 반응이 없을 것 같았다. 그녀를 몇 초간 지켜보던 유건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어서 조용히 방으로 돌아갔다. 유건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시연은 이미 침대에 기대어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그는 시연 옆에 누우며 팔을 뻗어 그녀를 안으려 했다. 그러나 시연은 조용히 몸을 틀어 피하며, 핸드폰을 침대 옆 탁자에 올려놓고, 그 자세 그대로 누워 잠을 청했다. 여자의 등을 바라보며, 유건의 미간은 더욱 깊게 주름졌다. 결국 그날 밤, 유건은 쉽게 잠들지 못했고, 한참 뒤에야 간신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다음 날, 그가 눈을 떴을 때 시연은 먼저 일어나 있었다. 시연은 이미 아침 식사까지 마치고, 서재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유건은 식사를 끝낸 후, 그녀를 찾아갔다. “여보, 같이 나갈까? 오늘은 몇 시에 끝나? 그 시간에 맞춰
시연은 진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비웃듯 웃어 보였다. “고 대표는 항상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번엔 미안하지만... 실망 좀 해야 할걸?’ ‘우주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그날 밤,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G시에 아예 안 온 건지, 왔지만 시연을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시연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병가 탓에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서류며 자료가 다 사물함에 있어서, 후임에게 전달하려면 직접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려던 때, 외래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지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 병환 이후로 지동성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했고, 눈빛도 많이 흐려진 듯했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먼저 알아챈 건 지동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연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시연아.” 시연은 입술을 꾹 눌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오늘 퇴원이에요?” “응.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집이 그리워지더라.” 지동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는 입원해도 큰 효과 없는 보존 치료. 그는 이제 집에서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동성의 시선이 시연의 배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나왔네.” “네.” 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동성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 대표랑은... 잘 지내고 있어?” ‘잘?’ 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마도... 잘 지내는 편이겠죠.”
시연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그냥 책 몇 권 봤을 뿐인데, 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표정은 좀 아니잖아요?” “지시연.” 유건이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렀고, 단추를 잠그던 손이 잠시 멈췄다. “너 지금 몇 살이지? 이 상황이 장난 같아? 너 출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기나 해?” 시연은 물론 알고 있었다.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내 배 속애를 걱정하는 거예요?” “그럼 안 되니?”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하...”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기네요. 내 배 속의 아이... 당신의 아기도 아니고, 당신이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버예요? 드라마 찍고 싶어요?” “지.시.연.” 시연의 무심하고 조롱 섞인 말투는 유건을 제대로 자극했다. 그는 시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눈빛은 싸늘했지만, 뭔가 폭발하기엔 또 너무 절제된 감정이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결국 그는 손을 놓았다. “밥 먹자.” 시연은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이래도 화를 안 낸다고?’ 아침은 유명한 맛집인 ‘가을’에서 배달 온 것이었다. 둘은 마주 앉아, 마치 조금 전 싸움은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시연이 한입에 모닝빵을 먹자, 볼이 빵빵하게 부풀렸다. “천천히 좀 먹어.” 유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두 입으로 나눠 먹는 게 그렇게 힘들어?” 시연은 생각도 없이 유건에게 맞받아쳤다. “두 입으로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장소미? 혹시 그것 때문에 걔를 좋아한 거예요?”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찔리지? 그래, 찔려야 해.’유건은 순간 움찔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결국 가볍게 한숨만 내쉬었다. “너 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별걱정 다 하게 해 놓고선.” 시연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인 채
식탁 위엔 여러 가지 반찬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종류는 많은데, 양은 조금씩. 시연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세심하게 준비된 상차림이었다.한 입 떠먹자마자 익숙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왕성애 이모님 손맛이다.’한동안 못 먹었던 그리운 맛. 시연은 괜히 마음마저 편안해진 듯,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유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기분이 어떻든, 먹을 건 잘 먹는 건 참 다행이지.’‘이런 건... 늘 본받고 싶을 만큼 좋은 거야.’식사가 끝나자 시연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 순간, 유건이 물 한 잔을 건넸다.“배불러?”“네.”물컵을 받아 두어 모금 넘긴 시연은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아까 말한 거, 단 한 글자도 안 믿어요.”“시연아...”“그게 장소미 때문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이제...”시연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 하나하나가 단단했다.“오늘 밤부로 이 집에서 나가줘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요.”“나 씻고 잘 거니까 나갈 때 문 잘 잠가줘요.”말을 마친 시연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유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시연은 매끄럽게 피했다.‘이젠... 이런 접촉도 무의미해.’유건이 설거지하고 조금 늦게 침실에 들어섰을 때, 시연은 이미 욕실에 들어가 있었다.샤워기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유건은 욕실 유리문 가까이 다가가 살짝 두드렸다.“시연아.”대답은 없었다.“씻고 나서 푹 쉬어. 난 할아버지 뵈러 가야 해서 먼저 간다.”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유건은 이마를 조용히 문지르며 한숨처럼 속삭였다.“잘 자, 시연아.”그리곤 조용히 돌아섰다.욕실 안.따뜻한 물줄기 아래, 시연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면서 속으로 중얼댔다.‘이런다고 씻기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를 지우고 싶어.’‘오늘 밤, 잠은커녕 눈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시연아, 넌 날 신고 못 해.”유건은 느릿하게 다가와 시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괜히 흥분하지 마.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야. 내 아내 집에 오는 게 어떻게 불법 침입이야?”시연은 벼락 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진짜... 이 인간, 제정신이야?’“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시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유건을 노려봤다.“왜긴?”유건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조용히 손을 들어 시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손끝이 스치자, 시연의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사람?’“쉬는 거 나쁘지 않잖아. 병가도 유급이고, 배도 이렇게 불러왔는데, 나는 그냥... 너랑 아이 둘 다 무사했으면 해서 그래.”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러섰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강하게 말해도 안 되니까, 이제 부드럽게 회유하는 거예요?”“너, 내가 진짜 그렇게밖에 안 보여?”“그럼 뭔데요?”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비웃음 섞인 미소.“고 대표님, 기억력이 정말 안 좋으시네요. 며칠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었죠? 남을 위해 나한테 아주 ‘좋은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시연의 입에서 나온 건, 장미리가 시연이 있는 과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던 그날의 일이었다.그날, 유건은 시연에게 몇 마디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넸었다.그 일이 떠오르자, 유건의 턱선이 살짝 굳었다.‘그래... 그땐 확실히 선을 넘었지.’‘그때부터 지금의 이 상황은 이미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어.’“넌 말이야...”유건은 이를 앙다물고 한숨을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무력감이 밀려왔다.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다시 물었다.“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로 할래?”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고 대표님 뜻대로 하세요. 제 의견 따윈 애초에 안 중요하잖아요.”유건은 시연을 조용히 바라봤다.그 말에는, 섣불리 반박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그럼 내가 정할게. 밖에 나가기 싫어 보이니까, 집에서 먹자.”그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