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여사가 한마디 했다."이 여사, 말수가 적으면 그만큼 실수가 줄어드는 법이에요."그러고는 이 여사의 말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려 인파와 함께 멀어졌다.----휴게실에 도착한 강한서는 유현진을 소파 위에 눕혔다.힘없이 소파에 누워있는 유현진은 안색이 전보다 더 창백해져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강한서는 소파에 앉아 티슈로 유현진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이때 주강운이 따듯한 물 한 컵을 받아왔다. 그는 잠깐 멈칫하다가 강한서에게 다가가 컵을 건넸다."한서야, 우선 물 좀 마시게 해."컵을 받아 쥔 강한서는 유현진을 힐끔 보더니 오히려 자기가 한 모금 마시고는 유현진의 입술을 향해 다가갔다.이때 유현진이 손바닥으로 강한서를 확 밀치고는 앉아서 그를 노려보았다. "뭐 하는 거야? 더럽게!"'로맨스 드라마도 아니고, 입으로 물 먹여주는 게 말이 돼?'유현진의 반응 속도와 동작을 보아서는 허약한 상태가 전혀 아니다.강한서는 입 안에 넣은 물을 삼키고는 담담하게 물었다. "연기 끝났어?"유현진은 순간 목이 메었다. 그는 눈이 휘둥그레진 주강운을 힐끗 쳐다보더니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입을 열었다."음, 완전 연기는 아니야."그녀는 궁금해서 강한서에게 물었다."내가 그렇게 감쪽같이 연기했는데, 어떻게 안 거야?"강한서가 컵을 옆에 놓고 유현진을 힐끗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그만한 재주로 남은 속여도 난 못 속이지."유현진......강한서는 조롱이 섞인 말투로 말했다."연기해도 하필 임신 연기를 해? 의사가 오면 바로 들통나게 될 텐데."유현진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대꾸했다."내가 임신인 척하고 싶어서 했어? 그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따로 없었으니까 그렇지. 그렇다고 쓰러지는 척해서 할머니를 놀라게 할 수는 없잖아."강한서는 유현진을 노려보면서 말했다."그럼 임신인 척한 것에 대해서는 효심이 하늘을 찌른다고 칭찬해야겠네."유현진은 다시 대꾸했다."그럴 말 할 자격 있어? 누가 제 마음대로 나 대신 대
"할아버지가 아직 작은 고모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모부와는 말할 기회도 거의 없어요. 그러다 보니 잘 알지도 못하고요."이제 와 보니 주강운의 작은 고모부는 가족의 인정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더 알아낼 수 있는 정보도 없었다."이 상황에 지금 그런 거 물을 때야?"주강운에 대한 유현진의 부드러운 태도를 보자 강한서는 열받았다. "조금 있다가 의사 선생님이 도착할 텐데, 어떻게 대처할 거야?"그러자 유현진이 말했다."뭘 어떻게 대처해? 내가 임신했다고 말한 것도 아니고, 다 사람들의 상상이잖아. 의사 선생님이 오면 그냥 음식 잘못 먹어서 탈 났다고 하면 되지.""의사 선생님이 바본 줄 알아?""안 되면 돈으로라도 입막음하면 되지."강한서는 어이가 없었다. '이건 어디서 튀어나온 가치관이지?'그러자 주강운이 웃으면서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조금 있다가 오게 될 의사는 제 친구예요. 제가 미리 말하면 알아서 입을 맞출 거예요."유현진은 환하게 눈웃음을 보이면서 말했다."강운 씨는 참 좋은 사람이에요."강한서가 노기등등한 눈빛으로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정인월과 그 일행은 휴게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가 휴게실에서 나왔다.유상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의사 선생님, 어떻게 됐어요?"의사가 답했다."큰 문제 아니에요. 식중독 증상인 것 같은데, 그렇게 심한 거 아니에요."의사의 말이 떨어지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저마다 수상한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정인월은 멍해졌다. 정인월이 입을 열기도 전에 옆에 있던 유상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식중독이요? 임신 아니고요?""임신이 아니에요. 맥을 짚어 보았는데 임신은 아니었어요. 만약 믿기 어려우시면 병원에 가셔서 한번 검사해 보세요."주씨 가문의 전문의가 이걸 잘못 진단할 리가 없다.정인월은 실망에 찬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안부를 묻는 걸 잊지 않았다."식중독은 괜찮은 거예요? 건강에는 크게 영향이 없고요?""큰 문제는 아
----여러 사람이 휴게실에 들어섰을 때, 유현진은 창백한 얼굴로 소파에 누워있었다. 유현진은 인기척에 몸을 일으켜 앉으려고 애썼다.그러자 정인월이 얼른 말렸다."얘야, 앉을 필요 없으니까 누워 있어.""할머니~"정인월은 한없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물었다."어때? 지금 좀 괜찮아졌어?""여전히 구역질이 나기는 하는데, 아까보다는 좋아졌어요.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괜찮아. 난 또......"정인월은 하려던 말을 끊고 잠깐 멈칫하다가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됐다. 우선 몸부터 잘 추스르렴."정인월이 유현진과 작은 소리고 대화하고 있을 때, 신미정의 휴대폰에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문자를 읽던 신미정은 눈썹을 찌푸리더니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휴대폰 화면을 끄고 정인월에게 다가가 말했다."어머님, 우리 우선 현진이를 집에 바래다줄까요? 여기 행사도 거의 끝날 시간이고 어머님도 너무 오래 서 계셨잖아요. 집에 돌아가 푹 쉬셔야죠."정인월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강한서에게 분부했다."현진이를 내 차에 태워. 차에 침대가 있으니 누워 가면 조금 편할 거야."주시윤은 행사 주체자로서 안부를 몇 마디 묻고는 주강운에게 자신을 대신해 사람들을 배웅하라고 하였다.정인월은 연세가 있는 데다가 다리가 안 좋아서 그의 전용차는 엄청 편하게 설계되었다. 하지만 유현진은 이를 편히 누릴 수가 없었다.정인월이 다정한 어투로 관심을 해줄 때마다 유현진의 죄책감은 더해졌다. 그래서 그는 정인월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으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그가 입을 열려는 순간에 정인월이 그에게 사탕을 건네주면서 물었다."현진아,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 사탕 한 알 먹어보렴. 그럼, 덜 힘들 수도 있어. 이 맛이 별로면 여기 매실이랑 진피 맛도 있어. 어떤 맛으로 줄까?"이때 진씨가 운전석에서 말을 건넸다."큰 사모님, 작은 사모님께서 임신하신 게 아니라서 신맛 나는 사탕은 큰 도움이 안 될 거예요. 그 앞에 박하맛 사탕이 있을 텐데, 그거 먹으면
강민서는 어제 그가 먹고 휴지통에 버렸던 피임약 통을 들고 있었다.'어제 아줌마가 청소했을 텐데, 어째서 약통이 아직도 쓰레기통에 있는 거지?'유현진이 곰곰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신미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강민서의 손에서 약통을 건네받은 후 설명서를 훑어보는 신미정의 안색은 점점 더 굳어졌다."현진아, 이게 뭐니? 왜 이런 게 네 방에 있어?"유현진은 이번에 연기가 아니라 너무 놀라서 안색이 창백해졌다.정인월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 다가가서 물었다."왜? 이게 뭔데?"신미정이 심각한 표정으로 답했다."어머님, 이거 피임약이에요. 어째서 여태껏 소식이 없나 했더니 얘네 피임하고 있었어요."정인월이 깜짝 놀랐다."피임?"정인월은 약통을 보다가 다시 유현진한테 시선을 돌리더니 결국은 강한서를 향해 물었다."한서야, 네가 현진이한테 이 약을 먹으라고 한 거냐?"이 말에 강민서는 불만을 터뜨렸다."일이 이렇게 됐는데도 할머니는 여전히 새언니 편만 드네요. 새언니가 거절했으면 오빠가 어떻게 억지로 먹여요?"정인월은 지팡이로 바닥을 몇 번 두드리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넌 입 닥쳐! 누가 너더러 말하라고 했어?"강민서는 화가 났지만 더는 아무 말도 못했다.유현진의 죄책감은 한층 더 깊어졌다. 이 순간에도 할머니는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을 꽉 잡고 강한서가 대답하기 전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요. 한서 씨는 몰라요. 제가 먹은 거예요."이 말에 정인월은 끝내 실망하고 말았다. 정인월은 애써 화를 참으면서 물었다."왜 그랬어?""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요."유현진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정인월과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그녀는 자신을 향해 실망으로 가득 찬 눈길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하지만 정인월은 유현진을 혼내지 않았다. 그저 복잡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그녀를 지켜보다가 가볍게 한마디 하고 돌아섰다."다들 집에 돌아가자."신미정은 유현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한마디 뱉었다. "너희들 정
"그래도 완전히 피임된다는 보장이 없어. 어쨌든 이혼할 사인데, 생명을 희생시킬 수는 없어. 만약에 임신이라도 하면 또 병원 가서 지워야 하는데 나 아픈 거 무서워."강한서는 불편한 마음에 침을 꼴깍 삼키고는 말했다. "아무도 지우라고 안 해. 임신하면 낳아야지."유현진은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진지하게 말했다. "강한서, 내 아이는 절대 다른 누구와 아빠를 공유할 수 없어. 진짜 임신하더라도 그 아이를 이 세상에 데려오지 않을 거야." 유현진은 자기가 낳은 아이가 자기와 같은 상황에 놓이는 걸 원하지 않았다.강한서의 마음이 조여왔다. 그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러길 바라. 나도 당신이랑 이혼할 때 짐이 생기는 건 원하지 않아."말을 끝낸 강한서는 굳은 얼굴로 뒤돌아서 발걸음을 옮겼다. 이때 프리지아 화분이 강한서의 팔 끝에 맞히더니 바닥에 떨어지면서 산산조각이 났다.유현진은 강한서가 나가는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허리를 굽혀 깨진 화분을 정리했다.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행동을 멈췄다.강한서가 지나간 자리에 몇 방울의 피가 떨어져 있었다.강한서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의 연기를 돕기 위해 다친 팔로 그녀를 들다 보니 아마도 상처가 다시 찢어진 듯했다.유현진은 마음이 조여와 이내 강한서를 찾아 내려가려 했지만, 밖에서 차 시동 소리가 들려왔다.강한서는 차를 몰고 가버렸다.유현진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결국 따라나서지 않았다.이날 밤, 강한서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유현진도 밤새 뒤척였다. 다음 날 아침, 인기척에 그녀는 잠에서 깼다.집에 들어 온 강한서는 유현진을 보더니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녀를 지나쳐 냉장고로 가 생수 한 병을 꺼냈다.유현진은 강한서의 옷차림을 보았다. 어제 나갈 때의 옷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호텔에서 잔 건 아닌 듯싶었다.유현진은 낮은 소리로 물었다. "밥은 먹었어? 먹고 싶은 건 없어? 다친 데는 어때? 약은 바른 거야?"강한서는 병뚜껑을 닫으며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남도
이 여자가 바로 차미주가 추천해 준 매니저이다.유현진은 손을 내밀며 악수를 건넸다. "반가워요."진희연은 평온한 말투로 유현진의 손을 맞잡았다. "반가워요, 유현진 씨. 제 상황은 미주한테 들으셨죠?"유현진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들이 있어 주말에는 애를 봐야 한다고 들었어요."진희연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조금은 걱정 섞인 말투로 말했다. "혹시 불편하시면 주말에 아이를 다른 곳에 맡길게요. 집도 가깝고 저 이 일이 꼭 필요해요."유현진은 대답 대신 간단한 질문을 했다.확실히 매니저를 해 본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그녀는 유현진의 질문에 물 흐르듯 대답했다. 더군다나 그녀는 잘 나가는 연예인의 매니저였다.그녀는 열아홉의 나이에 이 바닥에 들어온 뒤로 스물일곱에 퇴사하며 8년 동안 커리어를 쌓았다.퇴사 사유는 결혼과 출산이었다. 매니저라는 직업은 항상 몸을 움직이는 직업이기에 집에 있는 시간이 적었다. 전남편도 지방 사람이라 누구 손을 빌릴 수 없다 보니 아이를 돌봐줄 사람도 없고 시터를 고용하려니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두 사람은 이 일로 자주 다투게 되었다. 그러다 결국 아이의 성장과 교육을 위해 진희연은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그러다 그녀는 집과 가까운 곳에서 사무직을 찾아 출근하게 되었다. 월급은 높지 않았지만 일도 쉽고 시간도 자유로웠으며 속박이 없었다. 그러니 아이를 데리고 출근할 수도 있어 아주 편리했다.그렇게 몇 년을 버티다 보니 전남편도 승진하고 월급도 많이 인상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것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전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었다.그녀는 깔끔하게 바로 이혼을 제기했다.경제적인 부분에서 밀리다 보니 결국 전남편에게 양육권을 빼앗기고 그녀는 매주 주말에만 아이를 데려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그녀의 가족들은 그녀의 이혼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지금은 아예 그녀와의 연락 자체를 거부하기 시작했다.그녀는 하루라도 빨리 취직에 성공해 돈을 벌고 싶었다. 아이의 양육권을 빼앗기
그녀는 속으로는 흥분했지만, 겉으로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렇게 하죠. 지금 바로 계약할게요."유현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계약서는 아직 준비 안 됐어요. 준비해서 미주한테 보내면 사인하세요. 오늘 스케줄있으니 바로 출근하셔야겠어요."차미주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뭔 스케줄인데?"이동하는 길에서 유현진은 그녀에게 어제 고여정이 부탁한 일을 말해주었다."공익 숏폼이라 페이는 없어."유현진의 말을 들은 차미주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은 일이네. 숏폼은 워낙에 페이가 높지 않은 것도 있지만 이런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 건데. 너 이제 유명해지면 사람들이 네 과거를 캐다가 이런 영상을 봤을 때는 너한테도 플러스 요인이 된다고. 머 이미지 메이킹은 아니지만 이 바닥에 들어오면 이 바닥 룰을 따라야지, 어쩌겠어. 다른 사람을 밟지 않아도 밟히면 안 되니까 항상 정신 바짝 차려야 해."유명해지는 순간 과거가 털리는 것은 늘 있는 일이다. 심지어 아주 사소한 일도 소문에 소문을 타고 결국 근거 없는 새로운 이야기로 탄생된다. 이런 루머는 한창 상승세를 타는 연예인들에게는 치명적이다.진희연도 말했다. "그러고 또 한 가지는, 공중파 방송은 대본의 질량과 가치도 중요하지만, 배우도 중요하게 생각하죠. 이렇게 공익 방송에 출연했던 배우들은 방송국에서도 인기가 많기에 앞으로 상관 된 방송이 있다면 공익 방송에 출연했던, 즉 이미지가 깨끗한 배우들을 우선순위에 놓겠죠."'도와준다고 하길 잘했어.'"그럼 '보이스'라는 예능은 나갈거야?""안 나가. 차이현 씨와 계약한 거 잊었어? 촬영 기간에는 선셋 스타라는 타이틀로 다른 상업성을 띤 방송은 출연 못 해."더군다나 이 예능 방송의 대본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연기에 가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차미주는 아쉬웠지만 그녀의 선택을 존중했다.그러다가 차미주는 회사로 가고 진희연은 유현진과 함께 촬영장으로 향했다.도착한 뒤에야 그녀는 촬영 예산이 생각보다 더 적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작진은 한 아파트
유현진은 외투를 걸치더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 두 주일 정도는 시간 괜찮아요. 필요하실 때 연락하시면 돼요."고여정은 고마운 마음에 오늘 일정이 끝난 뒤 유현진에게 식사 대접을 하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현진은 거절했다.비록 도와주러 온 건 맞지만 자기를 위해서 온 것도 사실이다. 더군다나 두 사람 사이는 친한 사이가 아니다 보니 마주 앉아 식사하는 것 자체가 어색할 게 뻔했다.유현진은 진희연을 집까지 태워준 뒤, 차를 몰고 강씨 저택으로 갔다.강씨 저택에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쌓였다두 사람이 결혼하고 몇 년 동안, 정인월의 보호가 없었더라면 강씨 가문에서 유현진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하지만 자기를 제일 아껴주는 사람에게 제일 큰 실망을 안겨드렸으니, 유현진은 사과할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신미정이 그들의 아이 소식을 기다리는 것은 자기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함이지만 정인월은 그저 아이를 예뻐하는 단순한 마음이었다. 그러니 이런 거짓말은 그녀의 마음을 가장 괴롭게 했다.유현진의 차는 강씨 저택의 부근에서 한참을 맴돌다가 결국 뒤돌아섰다.강씨 저택.진씨가 노크했다. "큰 사모님, 작은 사모님 가셨어요."정인월은 바둑을 두던 손을 멈추고 말했다. "꾀병을 부릴 담력은 되고 인정할 용기는 없는 거로구나."진씨는 웃으며 말했다. "다 알고 계셨으면서 보고만 있었네요. 안 뽑으려 하니 큰 사모님 얼굴이 깎일 테고 뽑으려니 사모님의 기분이 언짢으실 테니 양측 누구도 건드릴 수 없어 작은 사모님은 어쩔 수 없이 연기를 하신 거죠. 큰 사모님도 깜짝 놀라셨잖아요?"정인월은 피식했다. "난 그 아이가 임신한 것도 모르고 그럴까 봐 걱정됐던 걸세. 그런데 피임까지 해가며 나까지 속일 줄 생각도 못 했어! 내가 그 아이와 함께 그 장소에 간 건 모두에게 그 아이의 뒤에는 내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지."진씨 아주머니는 간식을 들고 들어오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는 웃음을 보였다. "사모님에게는 며느리니 무서운 것 없잖아요. 그런
진윤: ...진윤이 흥, 콧방귀를 꼈다. “네가 얘기 안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아? 한성 그룹 대표지?”진윤이 머리가 떨어질세라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엄마, 형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언변이 장난이 아녜요. 게다가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니까요. 전엔 우리 형이 세상에서 제일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형도 그 형님 앞에선 꼬마에 불과한 것 같아요.”진윤의 뒤통수를 툭 치려던 홍혜림은 그의 머리에 감싸진 붕대를 보고는 시선을 내려 엉덩이를 차버렸다. “형이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팔이 밖으로 굽어?”진윤이 바지의 먼지를 털며 말했다. “좋은 건 당연히 형이 더 좋죠. 하지만 능력으로 따지면 형님이 더 뛰어난 것 같아요..”강한서를 향한 콩깍지가 두껍게 쓰인 진윤의 모습에 홍혜림은 괜히 질투가 났다. 하지만 상대방이 강한서라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정인월이 직접 교육한 아이였으니 성품이 우수하고 능력이 뛰어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진수 그룹과 한성 그룹은 같은 업계에 종사하지 않은 탓에 협업하는 일이 거의 없어 연계가 잦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윤은 한성 그룹이 종사하고 있는 업계와 관련된 전공을 하고 있었고 강한서는 IT 업계의 정상급 인물이었다. 그러니 강한서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진윤에겐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홍혜림은 강한서가 아무 이유 없이 진윤을 도울 리가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강한서가 여자친구 대신 자신에게서 서해금의 일을 알아내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홍혜림은 그 일엔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세를 지고도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강한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자신의 요구를 이야기한 적도 없어 오히려 홍혜림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서 대표에게 우리가 신고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은근슬쩍 오 교수님을 귀띔하게 한 것도 너의 그 스승님 생각인 거야?”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도와주겠다고
입가를 파르르 떨던 홍혜림이 진윤의 손을 툭, 쳐냈다. “저리 가. 엄마한테 그런 농담하지 마.”진윤이 웃는 얼굴로 다가가 홍혜림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자 홍혜림이 진윤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얌전히 앉아있기나 해. 넌 애가 다치고도 얌전히 있지를 못 해.”잠시 말이 없던 홍혜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엄마한테 얘기도 안 하고 신고했어? 오 교수님께도 비밀로 하라고 하면서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인데 이렇게 수상하게 구는 거야.”“엄마, 만약 학교 측에서 빨리 결과를 발표할 생각이었다면 진위 여부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얼른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을 거예요. 저희가 오 교수님께 부탁할 시간 같은 건 주지도 않았을 거라고요.”“그럴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학교 명예가 걸린 일인데, 누가 그 책임을 지려고 하겠어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학교에서 너한테 처분을 내렸다는 말이 가짜라는 얘기야?”진윤이 말했다. “엄마, 서화 대학은 엄마와 아빠가 수많은 인맥과 돈을 들여 고르고 고른 대학이에요. 업계에서의 명성도, 학교 분위기도 말 할 것 없이 좋고요. 오랜 세월을 지내며 명성을 쌓아온 학교예요. 그만큼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는 얘기잖아요.”“그런 학교가 고작 이런 여론에 궁지로 몰려 학생에게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세요?”“지금은 예전과 달라요. 요즘은 순식간이면 소문이 퍼진다고요. 이런 일은 조금만 미숙하게 처리해도 오히려 힘들게 쌓아온 명성에 금이 가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봐도 학교 측에서는 함부로 저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어요.”“오히려 진실을 파헤치는 편이 학교의 명성을 지키는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잠시 조용하던 진윤이 말을 이었다. “엄마, 만약 엄마가 학교 이사진이라면 부정행위가 사실이었다는 결론과 부정행위가 루머였다는 걸론 중 어떤 게 신입생 모집에 더 큰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홍혜림이 미간을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