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태가 경운기 뒷좌석의 난간을 붙잡고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도현을 향해 외쳤다.“사 대표님, 꽉 잡지 않으면 튕겨 나갈 수도 있어요! 길이 험해서 잘 잡고 있으세요.”사도현은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릿결 때문인지 오늘따라 사도현이 더 멋져 보였다. 깔끔하던 회사 대표가 아닌 야생적인 남자의 모습이었다.“진찬영이 누구죠?”사도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장윤태한테 물었다.“사 대표님, 진찬영은 연예계에서 유명한 남자 배우예요. 연기 실력이 뛰어난 데다가 겸손하거든요. 예능에 출연하는 배우는 아니라서 잘 모를 수도 있어요.”장윤태는 거칠게 부는 바람을 견뎌내면서 사도현을 향해 외쳤다.“남자 배우라고요?”사도현은 남자라는 말에 표정이 잔뜩 일그러지더니 계속해서 물었다.“몇 살인데요? 어떻게 생겼어요? 어떤 스타일인데요?”“아마 사 대표님보다 세 살 정도 어릴 거예요. 너무 잘생겨서 어릴 때부터 연예인 할 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대요. 언뜻 보기에는 차갑지만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에요. 진찬영이 겸손하기도 하고 조용하게 지냈지만 진찬영한테 푹 빠진 사람이 엄청 많아요. 배경윤 씨도 진찬영의 팬이라기에 제가 섭외했거든요. 그럼 배경윤 씨도 고정 멤버로 몇 회차 출연하겠다고 했어요.”장윤태는 점점 어두워지는 사도현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계속 말했다. 배경윤은 운전에 집중했고 경운기 특유의 소리 때문에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못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차에서 내렸다. 장윤태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배경윤 씨, 어디 가세요?”“들꽃이 너무 예뻐서 따다가 우리 진찬영 씨한테 주려고요.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인데 어떻게 선물도 없이 만나러 가겠어요.”배경윤은 말하면서 허리를 굽혀 길가에 예쁘게 핀 들꽃을 하나둘 꺾기 시작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들꽃은 햇볕 아래에서 유난히 빛났다. 이때 사도현이 입을 삐죽 내밀더니 차갑게 말했다.“꽃을 마음대로 꺾으면 안 된다는 거 몰라? 이렇게 생각이 없
진찬영은 배경윤 앞으로 걸어가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혹시 장 감독님이 얘기하신 배경윤 씨인가요? 독특해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아, 네! 저 맞아요.”배경윤은 고개를 들고 맑은 호숫가를 담은 듯한 진찬영의 두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고는 멍하니 바라보면서 넋을 잃었다.‘역시 찬영 오빠는 잘생겼어. 어떻게 사람이 조각보다 더 각진 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 영상에서 보던 것보다 더 잘생겼다고! 신이 공을 들여 만든 사람이 바로 찬영 오빠일까?’배경윤이 진찬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진찬영은 먼저 손을 내밀면서 입을 열었다.“그럼 앞으로 잘 부탁할게요.”배경윤은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겨우 진찬영의 손을 잡았다. 진찬영의 손은 차가웠지만 배경윤의 손에 땀이 흥건해서 어쩐지 낯부끄러웠다. 손을 잡는 순간, 배경윤은 이곳이 천국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앞으로 일주일 동안 손을 씻지 말아야겠어!’“잘, 잘 부탁드려요!”배경윤은 잔뜩 긴장한 채 말하더니 들꽃으로 만든 꽃다발을 조심스럽게 건넸다.“이건 제가 길가에서 꺾은 들꽃인데 찬영 오빠한테 드릴게요. 들꽃처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저의 마음을 담았어요.”“들꽃이라고요?”진찬영은 꽃다발을 건네받고 천천히 냄새를 맡아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 주인공을 본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빛이 났다.“많은 꽃다발을 선물 받았었지만 이런 들꽃은 처음이라 기뻐요. 이렇게 예쁜 들꽃을 선물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 마음 소중히 간직할게요.”“괜, 괜찮아요! 마음에 든다면 매일 산에 올라가서 들꽃을 따다 줄게요!”배경윤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헤프게 웃었다. 경운기 뒤에 앉은 사도현은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모습을 째려보더니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화가 난 사도현은 곁에 앉아 있는 장윤태를 향해 말했다.“진찬영인지 진천영인지 겸손하다면서요? 그런 놈이 나처럼 여자를 많이 만나본 사람보다 더 능숙하게 여자를 유
배경윤은 고개를 돌려 사도현을 노려보더니 입을 열었다.“비가 와서 바닥에 물이 고였던데 그거나 핥아먹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사도현은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는 강아지보다 더 못한 취급을 받았다. 화가 난 사도현은 경운기에서 뛰어내렸고 배경윤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두 사람은 함께 매점으로 들어갔고 배경윤은 진찬영을 위해 비싼 생수를 찾고 있었다.“제일 좋고 비싼 물로 주세요. 제일 좋은 걸로요!”배경윤은 진찬영이 평소에 절제된 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기름과 설탕이 들어간 음식을 적게 먹고 깨끗하고 고급 브랜드에서 판매하는 물만 마셨다. 하지만 마을 매점에는 일반 생수밖에 없었기에 비싼 생수를 살 수 없었다.배경윤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5만 원짜리를 여러 장 꺼내면서 말했다.“이 돈으로 비싼 생수를 주문해 주세요. 저의 오빠가 그런 생수만 마시거든요.”사도현은 매점의 진열대에 기대고는 팔짱을 낀 채 차갑게 말했다.“입으로 들어가면 다 똑같은데 비싸고 말고 할 게 뭐 있다고 그래? 다 같은 거 아니야?”“네가 뭘 안다고 그래!”배경윤은 사도현을 힐끗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생수라고 다 똑같은 건 아니야. 어떤 생수는 살짝 단맛이 맴돌아서 마실 때마다 기분이 좋지만 어떤 생수는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악취만 나서 입도 대기 싫거든.”배경윤은 분명 생수에 대해 말하고 있었지만 얼핏 들으면 나쁜 남자를 악취 나는 생수에 비유해서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사도현이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넌 아직도 참 순진하구나? 물도 겉면만 보면 안 되지만 사람은 더더욱 그래. 아까 그 진춘영인지 진찬영인지 하는 놈도 말이야! 겸손하고 차가워 보이지만 따뜻한 사람이라고? 내가 보기에는 돈을 벌기 위해 너처럼 재벌가에서 자란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를 유혹해서 사기 치려는 거야. 넌 또 바보처럼 웃으면서 좋아하더라. 그럴 거면 차라리 네 재산을 아예 다 주지 그래?”“사도현, 찬영 오빠는 내가 제일 존경하고 좋아하는 연예인이야. 그러니까 함부로 찬영
차에 오른 배경윤은 경운기에 시동을 걸었다. 뒷좌석에는 두 사람이 앉을만한 자리가 남아있었고 운전석에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있었다.배경윤은 조심스럽게 진찬영한테 말을 걸었다.“찬영 오빠, 혹시 괜찮다면 제 옆에 앉을래요? 저 운전 잘해서 차가 뒤집어질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 오늘 아침에 씻어서 머리에서 냄새도 안 나요!”진찬영은 배경윤의 말에 웃더니 배경윤이 사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햇볕 아래 진찬영은 더욱 빛났고 머리를 뒤로 넘기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차가 뒤집어져도 괜찮으니 편하게 운전해요.”“차가 뒤집어지면 안 되죠!”사도현은 진찬영을 뒤로 하고 운전석에 앉으면서 말했다.“진찬영 씨는 얼굴로 밥 먹고 사는 사람인데 위험한 자리에 앉으면 안 되지. 난 얼굴이 아니어도 먹고 살 수 있으니까 여기 앉아도 돼.”배경윤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내 옆에 앉았다는 건 각오했다는 뜻이지?”진찬영은 배경윤과 사도현을 번갈아 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사도현 씨가 그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요? 저는 뒤에 앉을게요.”“진찬영 씨는 눈치도 빠르네요.”사도현은 진찬영을 째려보면서 차갑게 말했다. 진찬영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사도현을 쳐다보더니 도발했다.“어차피 앞으로 배경윤 씨랑 계속 같이 앉을 텐데요.”장윤태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눈치를 보았다.“경, 경운기 조수석에 제가 타도 될 것 같은데요. 바람도 쐬고 좋죠!”한 사람은 연예계를 주름잡고 있는 회사 대표이고 한 사람은 연예계 톱스타였기에 일개 예능 감독인 장윤태는 두 사람한테 밉보이고 싶지 않았다.“난 허락한 적 없는데요?”사도현은 장윤태를 째려보면서 조수석이 아닌 황위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예민하게 굴었다. 진찬영은 장윤태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말했다.“윤태 형, 왜 사서 고생이에요?”“그러게 말이야. 괜히 나섰다가 눈치만 보게 되었네.”장윤태는 뒷좌석에 올라타고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이럴 때는 가만히 있는
“진찬영이 온다는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같이 녹화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어요. 이참에 진찬영한테 잘 보여서...”“잘 보여도 소용없어요. 진찬영이 얼마나 차갑게 구는지 몰라서 그래요? 가까이 다가갔다가 기세에 눌려서 말도 못 꺼낸다니까요.”게스트들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진찬영과 장윤태가 경운기에서 내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역시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은 사람이라 그런지 정말 멋지네요. 어떻게 경운기에서 내리는 모습까지 멋있을 수 있죠? 너무 완벽하잖아요.”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걸그룹 리더 민지가 먼저 다가가 인사했다.“진찬영 씨, 이곳에 온 걸 환영해요! 먼 길 오시느라 수고했어요. 제가 짐을 들어드릴게요!”민지가 진찬영의 가방을 들어주려고 하자 진찬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차갑게 말했다.“죄송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이 저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게 싫어서요.”“아, 죄송해요...”민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얼음 왕자 같은 사람이라더니,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거절하는 모습도 멋져!’배경윤은 경운기를 주차하고는 차에서 내렸고 진찬영이 가방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달려갔다.“찬영 오빠, 손님으로 오셨는데 가방까지 들게 할 수는 없죠. 이리 줘요! 저 보기보다 힘세거든요.”“고마워요. 가방이 무거워서 괜히 미안하네요.”진찬영이 부드럽게 말하면서 배경윤에게 가방을 건넸다. 그러고는 미소를 짓더니 배경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모습을 본 여자 연예인들은 질투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다른 사람이 자신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게 싫다면서 왜 저 여자한테는 가방을 주는 거야!”민지는 씩씩거리면서 배경윤을 노려보았다. 이때 사도현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다가오더니 입을 열었다.“저런 컨셉인 걸 어떡해요?”“아, 사 대표님. 안녕하세요.”민지는 사도현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환하게 웃었다.‘진찬영은 날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사 대표님이 먼저 말을 걸어주었으니
배경윤은 깜짝 놀라더니 고개를 들어 진찬영을 바라보았다. 진찬영과 시선이 마주치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찬영 오빠가 그걸 어떻게...”배경윤은 처음 만난 진찬영이 어떻게 자신의 속내를 꿰뚫어 보았는지 궁금했다.“내가 어떻게 배경윤 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냐고 묻고 싶은 거죠?”진찬영이 미소를 짓고는 말을 이었다.“이래 봬도 배우인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배경윤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찬영 오빠한테 계속 못난 모습만 보이는 것 같네요. 오빠가 보기에도 제가 참 바보 같죠?”“그렇지 않아요.”진찬영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배경윤 씨는 내가 여태껏 봐왔던 연예인들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에요. 착하고 배려심 깊은 배경윤 씨가 연예인들보다 더 멋져요. 그러니까 자신을 더 소중히 여기고 아껴주세요.”배경윤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한테 위로받자 기분이 순식간에 좋아졌고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찬영 오빠, 정말 고마워요. 집구경을 시켜줄 테니 잘 따라와요.”배경윤은 이 집의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앞장서서 진찬영에게 집구경을 시켜주었다. “여기가 주방이에요. 주로 이곳에서 요리하거든요. 그리고 이 문을 열고 나가면 외양간인데 이 암소 콩순이가 출산을 앞두고 있어서 가까이 가면 안 돼요. 아, 이곳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곳인데 심심하면 해먹에 누워서 책을 볼 수도 있어요. 맞은 편에 있는 연못 안에 미꾸라지가 많다고 들었어요. 다음에 제가 가득 잡아서 맛있는 요리를 해드릴게요.”진찬영은 배경윤의 뒤를 따라가면서 두리번거렸다. 그저 은인인 장윤태한테 보답하기 위해 출연하려고 했지만 정작 촬영 장소에 와보니 흥미가 생겼다.“미꾸라지를 잡는다고요?”진찬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지금 잡을래요?”“지금요?”“네!”“찬영 오빠, 미꾸라지 잡을 줄 알아요? 진흙이 오빠의 옷이거나 머리에 묻을 수도 있거든요. 정말 괜찮겠어요?”“여기까지 온 마당에 못할 게 뭐 있겠어요. 추어탕을 만들어 먹어도 좋겠네요. 그래요! 오
사도현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는 연못 안에서 재밌게 떠들고 있는 사람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표정이 점점 굳어졌고 눈빛에 살기가 돌았다.“다들 재밌어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배경윤 씨랑 진찬영 씨는 분명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고 했지만 오래 사귄 커플처럼 죽이 척척 맞네요. 진찬영 씨가 생각보다 털털하고 친절해서 신기해요. 남자들이 배경윤 씨만 유독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네요.”윤설은 사도현이 노려보는 쪽을 쳐다보면서 일부러 부채질했다.“경윤이가 매력 있는 여자라서 그래.”침묵하던 사도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윤설을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그렇지 않으면 네가 이렇게 주시하고 있지 않았겠지.”윤설은 당황하더니 말을 버벅거렸다.“그, 그게 무슨...”“내 말이 틀렸어? 입만 열면 배경윤이 누구랑 어울리고 누구랑 친하게 지낸다는 말뿐이었잖아. 결국 네 입으로 네가 배경윤을 감시한다는 것을 밝힌 셈이지. 아니면 너도 배경윤한테 반해서 관심받고 싶은 거야? 이제는 여자랑 만날 생각인가 봐?”“도현 씨, 설마 방금 제가 장난 좀 친 것 갖고 이러는 건가요?”윤설은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저는 사실만 말했을 뿐이에요. 배경윤 씨랑 진찬영 씨를 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요. 두 사람이 커플 같다는 말에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는데 저한테 화풀이하지 마세요. 계속 저를 따라올 필요도 없고요.”“내가 언제 너를 따라왔다고 그래?”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난 처음부터 널 따라온 게 아니야. 진흙이 싫어서 들어가지 않은 거니까 네 멋대로 생각하지 마.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너랑 상관없거든.”“도현 씨!”윤설은 사도현이 쌀쌀맞게 대답하자 화가 솟구쳐 올랐지만 곧바로 무기력해졌다. 아무리 속이고 유혹해도 사도현은 예전처럼 윤설을 애틋하게 바라보지 않았다.연못 안에서 미꾸라지를 잡던 게스트들은 사도현과 윤설을 쳐다보면서 수군거렸다.“사 대표님은 어쩜 이렇게 다정할까요? 윤설 씨를 지켜주는 수호
배경윤을 안은 사람은 연못을 빠져나와 마당을 들어섰고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서 천천히 의자에 내려놓았다.“찬영 오빠, 혹시 방으로 들어온 거예요? 우리를 오해하고 누군가가 소문을 내면 어떡해요? 그럼 오빠한테 민폐 끼치는 것 같아서 미안해질 것 같아요.”배경윤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의자에 앉아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간신히 웃음을 참는 듯싶더니 입을 틀어막으면서 어깨를 들썩였다. ‘주여, 찬영 오빠를 사랑하게 된 지 몇 년 만에 결국 만나게 되었어요. 게다가 지금 단둘이 한 방에 있다니,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고요! 찬영 오빠는 역시 얼음 왕자가 맞나봐요. 날 안고 한참을 걸었는데도 힘들다고 투덜거리지도 않았어요. 눈을 감고 있어도 차가운 기운은 잘 느껴지더라고요.’몇 분 후,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배경윤 앞에서 멈추었다. 누군가가 젖은 수건으로 배경윤의 눈과 이마를 세심하게 닦아주었다. 배경윤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찬영 오빠, 이렇게까지 안 해줘도 괜찮아요. 우리 둘이 한 방에 있었다는 걸 팬들이 알게 되면 난리 날 거라고요.”“하, 이 와중에 할 말은 다 하면서 그놈한테 안기고 싶어서 쓰러진 척한 거야?”익숙한 목소리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깜짝 놀란 배경윤은 눈을 떴고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저절로 나는 진찬영이 아닌 사도현이 눈앞에 서 있었다.배경윤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눈에 살기가 돌았다.“네가 왜 여기에 있어?”“내가 여기에 있으면 안 돼?”사도현이 코웃음치고는 말을 이었다.“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널 여기까지 안고 올 것 같아? 도와줘도 욕만 먹는데 나 말고 누가 너를 이렇게 보살펴주겠어!”“찬영 오빠는 어디에 있어? 오빠한테 수작질한 건 아니지?”배경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이곳에 온 첫 번째 날에 묵었던 방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문은 굳게 닫혔고 이 방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미꾸라지를 신나게 잡는 사람한테 내가 뭘 어쨌다는 거야? 진찬영은 여우 같은 놈이라고!”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