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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화

Author: 류한나
평소에 온화한 성격의 주인혁이 진심으로 화를 낸 것을 보고 그의 친구들은 서둘러 말을 멈췄다.

...

차 안에서 고은서는 곽승재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 등지고 앉았다.

곽승재도 아무 말 없이 있었지만 그의 얼굴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참으려고 애쓰는 듯이 말이다.

아마도 주인혁과 함께 밥을 먹은 이유에 대해 그녀가 설명하길 바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곧 이혼할 예정이기도 하고 정상적인 부부 관계였더라도 친구를 사귀는 것을 간섭할 수는 없기에 고은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예원 별장에 도착했다.

고은서는 곽승재를 신경 쓰지 않고 혼자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갔다.

이미숙은 그녀를 보자마자 안도한 듯 말했다.

“사모님,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대표님께서 나가실 때 얼굴이 너무 안 좋아서 저는 말도 못 걸겠더라고요.”

고은서는 말의 핵심을 잡아챘다.

“그 사람이 집에 다녀갔었어요?”

“네. 한 6시쯤에... 대표님.”

이미숙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곽승재가 집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급히 인사했다.

고은서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당신 모임에 가야 하지 않아?”

‘주 비서님께서 분명히 레스토랑에서 기다리고 계실 텐데.’

하지만 곽승재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기는커녕 긴 다리를 뻗어 계단을 올라갔다.

분명히 고은서의 의견을 무시하고 억지로 그녀를 집에 데려온 건 곽승재였는데 이제는 마치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 같았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대표님과 함께 오셨나요?”

이미숙이 물었다.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친구들이랑 밥 먹고 나오다가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이미숙은 중얼거렸다.

“대표님께서 아까 집에 오셨을 때 제가 모임이 있으시냐 물었거든요? 그때는 없다고 하셨는데.”

“아마도 급한 일이 생겼겠죠.”

고은서는 대답했다.

“아줌마, 볼일 보세요. 저는 방으로 가서 쉴게요.”

고은서가 침실로 돌아왔을 때, 귀비 의자에 앉아있는 곽승재는 마치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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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서도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큰일은 아니고. 만약 리셉션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면 오빠가 내 편을 들어줄 수 있을까 해서. 나 혼자 싸우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까 봐 좀 두렵거든.”송민준은 다시 한번 고은서를 안심시켰다.“은서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그렇게 큰 심리적인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고. 그냥 평범한 연회처럼 생각하면 돼.”“알았어.”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오늘은 결코 평범한 파티가 아닐 것으로 추측했다.얼마 후, 차가 여씨 가문에서 예약한 호텔에 도착했다.이곳은 해성에서 오랫동안 명성을 떨친 5성급 호텔로 환경과 서비스 모두 매우 훌륭했다. 평소에도 연예인과 부자들이 기자회견이나 연회를 열 때 가장 선호하는 장소 중 하나였다.운전기사가 차를 현관문 앞에 멈추자 곧바로 웨이터가 와서 문을 열어주었다.운전기사에게 주차를 부탁한 송민준은 고은서에게 신사답게 팔을 내밀었다.고은서가 송민준을 바라보자 그의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마치 예의를 갖추는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고은서는 송민준과 실랑이를 벌이지 않고 가볍게 그의 팔에 손을 얹고 함께 호텔 로비로 들어갔다.현장에는 축하 화분들이 가득해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었다.그중에는 유일 투자은행의 화분도 있었는데 이는 고은서가 특별히 보내도록 지시한 것이었다.고은서는 여시은에게서 한 수 배웠다. 그것은 바로 누군가에게 불만이 있으면 있을수록 예의를 더 잘 지켜야 하며 상대방에게 어떤 흠도 잡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나중에 관계가 틀어져도 사람들이 그녀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두 사람은 출석 체크를 마친 후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입구 근처에서 여재훈과 여시은이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여재훈은 멋진 양복을 입었는데 전체적으로 성숙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여시은은 옅은 푸른 색의 맞춤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 세련된 스타일은 그녀를 마치 상류층 귀부인처럼 우아해 보이게 했다.여시은은 고은서와 송민준을

  • 어게인, 비긴   제1090화

    어깨를 움츠린 송민아의 모습은 불쌍하고 유약해 보였다.“오빠가 너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는 건 사실이잖아. 둘이 진전이 없더라도 내가 마음속으로 생각할 수는 있잖아?”고은서는 송민아를 노려보았다.“안 돼. 듣기 불편해.”“알았어. 앞으로는 두 사람을 연관 짓지 않을게. 이거 좀 놓을래? 무서워.”“...”고은서는 그제야 송민아를 놓아주었다.송민아는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독단적 행동에 적응하지 못한 듯 팔을 문지르며 말했다.“대표님, 다음부터는 말로 해주세요. 갑자기 이러니까 적응이 안 돼요.”고은서는 눈을 흘기며 받아쳤다.“네가 자꾸 나와 민준 씨를 엮으니까 그렇지. 민준 씨가 어떤 성격인지 몰라?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좋아할 리 없잖아.”송민아는 고은서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송민준은 감정이 없는 기계가 아니라 정상적인 남자야. 이렇게 예쁘고 능력 있는 너를 좋아하는 게 당연하잖아?”“그리고 내가 오빠를 잘 아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거야. 다른 여자에게는 이런 인내심을 보인 적이 없거든.”송민아는 고은서의 옆에 바짝 다가앉으며 말을 이었다.“네가 싫다면 더 이상 억지로 연결하지 않을게. 오빠가 정말 너를 좋아해도 중간에서 도와주지 않을 거야. 능력이 있으면 스스로 네 마음을 얻을 수 있겠지.”고은서가 진심으로 화낸 것은 아니었다. 여동생으로서 오빠의 연애를 응원하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다만 송민준이 적인지 친구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남녀 감정으로 엮이고 싶지 않았다. 만약 송민준이 C선생이라면 그녀는 너무 구역질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어느새 여시은의 예흥 투자은행 개업식 날이 됐다.현장에서 간소하게 개업식을 치렀던 고은서와 달리 여시은은 5성급 호텔의 컨벤션홀을 빌려 리셉션 형식으로 개업식을 치른다고 한다. 리셉션은 오후에 시작돼 만찬회까지 이어진다.고은서는 만찬회 예절에 맞춰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블랙 정장 드레스를 차려입었다. 소재와 핏 모두 흠잡을 데 없이 고급스러웠다.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올리고 분위기에

  • 어게인, 비긴   제1089화

    그날 저녁, 라이트문 아파트에 돌아온 고은서는 주차장에서 곽승재와 마주쳤다.두 사람은 묵묵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엘리베이터를 탈 때, 고은서는 곽승재의 코트에서 익숙한 향수 냄새가 나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여시은을 위해 직접 조합한 향이었다.이는 곽승재가 오후에 여시은과 함께 있었다는 증거였다.“오후에 여시은 씨 회사에서 미팅이 있었어. 퇴근할 때까지 줄곧 바빠서 전화를 못 했어. 그래서 끝나는 대로 라이트문 아파트로 온 거야.”곽승재는 지나가는 말처럼 설명했고, 고은서는 그냥 웃었다.여시은은 곽승재가 자리를 비웠을 때 일부러 코트에 향수를 뿌린 게 분명했다.‘이따위 유치한 장난질로 도발하는 건가?’...며칠 후, 고은서는 여시은이 보낸 개업 리셉션 초대장을 받았다.초대장은 송민아가 직접 사무실로 가져왔다.“여시은이 이번에 유명 기업인과 업계 엘리트를 대거 초대하고 언론사도 여러 군데 초청했나 봐. 우리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 때보다 훨씬 화려하고 이목이 쏠릴 것 같아.”고은서는 그저 웃었다.‘나한테 본때를 보여주려면 규모에서 압도해야 했겠지.’“은서야, 그날 나랑 같이 가자.”여시은이 고은서에게 나쁜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그녀는 여시은을 유난히 경계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정형외과 프로젝트가 마무리 단계이니 너는 거기에 집중해. 그냥 리셉션 참석하는 거니까 별일 없을 거야.”하지만 송민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여시은이 너를 물에 빠뜨리기까지 했었잖아. 그렇게 싫어하면서 왜 초대했을까? 분명 꿍꿍이가 있을 거야.”고은서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심리학 공부를 그렇게 많이 하고도 모르겠어? 여시은이 리셉션 주최자잖아. 문제가 생기면 체면을 구기는 건 그 여자야. 그렇게 멍청하게 자기 무대를 망칠 리가 없잖아?”“여시은이 나를 초대한 건 아버지 앞에서 겉으로는 친구인 척하며 친분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동시에, 내가 자기랑은 급이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겠지.”도리는

  • 어게인, 비긴   제1088화

    “곽 대표님은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병뚜껑 열어주는 것조차 꺼릴 만큼?”여시은의 말투에는 약간의 유감과 억지로 짜낸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곽승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시은 씨가 원하는 건 물을 마시는 결과가 아닌가요? 물을 마실 수 있으면 되지, 누가 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잖아요.”“왜 중요하지 않아요?”여시은은 눈을 깜박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저는 곽 대표님이 열어준 병의 물만 마시고 싶은데요.”노골적인 애정 공세에 곽승재는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여시은은 전혀 민망한 기색이 없이 여전히 공세를 이어갔다.“솔직히 말할게요.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두 집안 어른의 뜻대로 조금씩 알아가면 안 될까요?”곽승재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우리 집안에서 할머니와 어머니는 정략결혼을 반대하세요. 아버지의 일방적인 희망 사항일 뿐이죠.”“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재혼 계획이 없습니다.”여시은은 여전히 달콤한 미소를 유지했다.“당장 결혼하자는 뜻은 아니에요. 어쩌면 만나다가 전혀 안 맞는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잖아요?”“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시은 씨와 맞지 않아요.”곽승재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고은서는 원래 활발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저와 결혼한 후 시들어버렸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방법을 다해 저한테서 도망쳤어요. 이혼한 후 그 여자는 다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됐죠. 그러니 저는 남편으로 자격 미달이에요.”“시은 씨는 여 회장님께서 애지중지하는 따님이고 조건이 우월하니 더 나은 남자를 만나셔야죠.”여시은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저는 고은서와 달라요. 고은서는 완전한 사랑을 원했지만 저는 조건이 맞는 파트너면 돼요.”“사랑이 있으면 금상첨화이고 없어도 상관없어요.”그녀는 돌직구를 날렸다.“제가 고은서보다 승재 씨에게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고은서 만큼 똑똑하거나 유능하지는 않지만, 이게 남자들에게는 장

  • 어게인, 비긴   제1087화

    “아니,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여재훈 씨가 테이프 커팅에 참석했었잖아. 그때 외할아버지와 삼촌도 있었는데 서로 아는 눈치가 아니었어.”고은서는 말을 이어갔다.“당신도 우리 삼촌을 알잖아. 조금이라도 연줄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지. 여재훈 씨와 단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었다면 당장 달려가서 인사하고 관계를 맺으려고 했을 거야.”사실 그날 삼촌은 여재훈과 안면을 트려고 했지만, 여재훈 주변에 중요 인물들이 너무 많아 접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외할아버지가 말리는 바람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여시은이 오직 당신 때문에 나를 저격하는 거라고 생각해.”“당신들 둘이 Y국에서 만난 적 있잖아. 여시은은 그때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을 거야.”고은서의 분석이 정확할 수도 있다.곽승재는 이전에 곽현수에게 왜 백유미를 귀국시켜 그와 고은서의 결혼 생활을 망쳤냐고 따진 적이 있었다.그때 곽현수는 고씨 가문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여시은이 적합한 상대라고 말했었다.곽현수는 단지 할머니 때문에, 그리고 여씨 가문이 입방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아서 이혼을 강요하지 않았을 뿐이다.여시은도 Y국의 파티에서 만난 두 집안 어른들이 둘을 만나게 하려 했고, 그녀도 그와의 정략결혼에 긍정적인 태도였다고 인정한 바 있다.고은서의 분석이 맞았지만 곽승재는 마음이 전혀 홀가분하지 않았다.그녀의 말투가 너무나 차분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말하는 것처럼.곽승재는 고은서의 태도에서 자신을 향한 감정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가슴 속에서 둔탁한 통증이 밀려왔다.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입을 열려는 순간, 회의실 방향에서 여시은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곽승재는 일이 있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그 사이 눈앞까지 다가온 여시은이 배려심 있게 말했다.“곽 대표님, 일이 있으면 먼저 처리하세요. 10분 쉬고 회의를 계속한다고 전할게요.”여시은은 말하면서 생수 한 병을 곽승재에게 건넸다.곽승재는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저

  • 어게인, 비긴   제1086화

    “외할아버지, 숙모 말로는 엄마가 북성에 있을 때 가슴 아픈 연애사가 있었던 것 같대요. 제 생부는 아닐 거라고 하는데, 외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고은서는 돌직구를 날렸다.“그럴 리 없어. 네 엄마는 활발하고 낭만적인 성격이었지만 고집스러운 면도 있었어. 쉽게 마음을 주지 않지만 한번 주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어.”고준석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점에서는 네가 엄마를 똑 닮았어. 그래서 그때 곽승재와의 결혼을 허락했던 건데...”‘왜 갑자기 내 얘기로 넘어간 거지?’“북성에 연인이 없었거나, 있었다면 제 생부란 말씀인가요?”고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생부일 가능성이 낮아. 북성에서 돌아왔을 때 다른 곳에서 돌아왔을 때와 별다른 정서 변화가 없었거든.”고준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엄마가 유부남과 엮였을 리 없어. 송민준 부모의 이혼이 엄마와 상관없을 거야.’“오히려 해외에 머물던 어느 날 전화가 와서 깜짝선물을 준비했다며 신난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어.”말을 이어가던 고준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연애하는 줄 알고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될 줄은...”“은서야, 네 엄마가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네 생부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알아.”고준석은 외손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때 네 엄마는 치료가 안 되는 불치병을 앓은 것도 아니었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너무 지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지...”목이 멘 듯한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은서도 코끝이 찡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노인의 아픔을 다시 건드린 자신이 미웠다.고은서는 고준석의 손을 꼭 잡았다.“외할아버지,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엄마는 외할아버지같이 이해심이 넘치는 분을 아버지로 두어 너무 행복했을 거예요.”하지만 고준석은 더 슬퍼 보였다.“가끔은 내가 너무 자유를 준 것은 아닌지 생각할 때도 있어. 조금 구속했으면 사랑 때문에 큰 상처를 받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 어게인, 비긴   제1085화

    고은서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엄마가 미혼모 신분으로 나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북성에 첫사랑까지 있었다고? 이렇게 복잡한 연애사가 있었다니.’“내가 그냥 제멋대로 추측한 거야. 연인 관계가 아니라 형님 마음을 아프게 한 친구일 수도 있지.”단은숙은 가방을 손에 들고 고은서에게 주의를 주었다.“이 얘기를 외할아버지나 삼촌한테 절대 하지 마. 내가 또 쓸데없는 소리 했다고 나무랄 거야.”외할아버지는 고은서의 엄마를 각별히 아꼈다. 미혼모가 됐어도 한 마디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 아파하며 그녀의 과거를 캐묻지 않았다.외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집은 따뜻한 피난처였고, 엄마는 그 안에서 조용히 상처를 치유했다. 말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털어놓을 것이고, 입을 다물고 있다면 아픈 기억일 테니 가족들이 상처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고은서의 엄마는 조향사로서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MQ의 베스트셀러 향수가 바로 그녀의 작품이었고, 이는 MQ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래서 삼촌 부부도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가족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니 주변 사람들도 무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은서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없는 것이 큰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씨 가문을 노리는 세력이 나타나서 진상을 파헤쳐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았다면, 평생 엄마의 과거를 캐지 않았을 것이다.단은숙은 가방을 부인들 단톡방에서 자랑하기 위해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고은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엄마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엄마는 북성에서 무슨 일을 겪었을까? 정말 첫사랑이 있을까? 혹시 송씨 집안 사람?’문득 송민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송민준과 송민아는 이복남매였다.‘그렇다면 송민준의 친모가 아버지와 이혼하셨다는 건데, 설마 엄마가 두 분 사이에 끼어든 건 아니겠지?’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고은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만약 송민준이 정말 C선생이라면, 그가 고씨 가문을 증오하는 이유는 충분하다.하지만 고은서는 엄마

  • 어게인, 비긴   제1084화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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