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재가 대답하기도 전에 단은숙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은서야, 승재한테 무슨 사인을 받는 거야?”조은서는 아무 핑계나 찾아서 둘러댔다.“이 사람 차에 보험을 하나 들어줬어요. 본인이 사인해야 한대요.”“그래?”단은숙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했다.“지금에 와서 무슨 보험을 든다는 거야, 전에 안 했어?”“자동차 상해 보험을 하나 더 하는 거예요. 저번에 차를 타고 가다가 작은 사고가 있었는데 그때 보니까 빼먹은 보험이 있더라고요. 보험회사에서 전액 보상을 해주지 않아서 이번 기회에 더 들었어요.”고은서는 표정 변화 없이 술술 말했고 단은숙은 친절한 말투로 곽승재에게 물었다.“조카사위, 얘 말이 맞아?”고은서는 외숙모가 이런 일까지 곽승재에게 확인하려 할 줄 몰랐다. 박지연의 말이 문득 생각 난 그녀는 긴장된 얼굴로 곽승재를 쳐다보았다. 곽승재의 검은 눈동자가 쌀쌀하게 그녀를 흘겨보았지만,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네.”고은서는 마음속으로 안도했다. 역시 박지연이 넘겨짚은 것이었다. 곽승재는 말한 대로 하는 사람이었다.“조카사위, 차를 운전할 때는 조심해야 해. 보험을 여러 가지 드는 것도 필요하지.”단은숙은 관심 어린 말투로 말하며 웃었다. 외숙모가 완전히 믿는 것을 본 고은서는 마음 놓고 물었다.“사인한 보험서류는 어디 있어?”곽승재는 아무 표정 없이 사무실 책상 쪽으로 눈짓했다. 조은서는 얼른 그쪽으로 다가갔고 책상 위에는 정말 서류 폴더가 놓여있었다. 펼쳐보니 이혼합의서라고 쓴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고은서의 마음속에는 감격의 물결이 요동쳤고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정말 쉽지 않았던 과정이었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 드디어 이혼합의서를 손에 넣었다. 고은서는 서류를 품 안에 꼭 안았다.“삼촌, 외숙모, 얘기 계속하세요. 저는 더 시간 뺏지 않을게요.”이렇게 말하고 바로 떠나려던 고은서는 곽승석의 담담한 목소리를 듣고 멈춰 섰다.“삼촌, 외숙모님, 정말 죄송한데 제가 오전에 회
단은숙은 파일을 등 뒤로 숨기고 말했다.“우리 집 차도 보험 더 들어야 하는데, 네 것도 좀 보게 줘봐."“그러지 말고 제가 좀 있다 차 보험 하시는 분 소개해드릴 테니까 그분이랑 연락해봐요. 외숙모,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고은서가 말도 채 끝내지 못했는데 단은숙은 단번에 그녀를 밀치더니 파일을 열어보았다.고은서는 바로 파일을 빼앗으려 했지만 50킬로도 채 되지 않는 몸으로 외숙모를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단은숙은 그 틈을 타 단단한 등으로 고은서를 막아내며 빠르게 파일을 열어보았다.그리고 그 문서를 제대로 보고 난 단은숙은 바로 고은서를 향해 소리쳤다.“고은서, 이게 뭐야!”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비서와 비서실 다른 직원들도 그들 쪽으로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그러니 당연히 고국성도 이상함을 느끼고 파일을 채갔다.문서를 읽던 고국성은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며 고은서의 얼굴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손바닥에 고은서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는데 한참이 지나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으니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그때 언제 왔는지도 모를 곽승재가 고국성의 손을 막아내고 단호하게 말했다.“삼촌, 말로 해요, 손대지 말고.”곽승재의 등장에 고국성은 마지못해 손을 거두고 눈을 번뜩이며 열이 올라 빨개진 얼굴로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승재 사무실로 가있어!”고은서가 삼촌과 외숙모에게 이끌려 곽승재 사무실로 가자 곽승재는 나지막하게 옆에 있던 비서한테 분부했다.“회의는 부대표님한테 먼저 진행하라고 해요, 난 좀 있다 갈게요.”“네, 대표님.”비서가 나가자 곽승재도 앞서간 고은서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곽승재는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어른답게 엄숙한 표정을 짓고 고은서와 곽승재를 향해 묻고 있었다.“이 이혼서류는 무슨 뜻이야, 누가 이혼하자고 한 거야!”말이 없는 곽승재에 고은서가 담담히 인정했다.“제가 말했어요.”“너!”순간 열 받은 고국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들어 올리려 하자 단은숙이 그를 끌어앉혔다.“은서야,
남편까지 동의하자 단은숙은 단호하게 고은서를 끌고 나갔다.“승재야, 이혼은 생각도 하지 마. 은서가 충동적으로 한 말일 거야, 우리가 가서 잘 타이를게.”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고국성이 한마디 더 덧붙이자 곽승재는 짜증만 부리는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삼촌, 억지로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저도 할머니 아니었으면 이혼 고민할 이유도 없었을 거예요.”“절대 억지 아니지, 억지일 리가 없잖아.”고국성이 다급하게 부정을 했다.“고 여사님이 우리 은서를 얼마나 예뻐하시는데, 여사님을 봐서라도 우리 은서 한 번만 봐줘.”말을 마친 고국성도 발버둥 치는 고은서를 같이 밀며 방을 나섰고 곽승재는 쓰레기통에 던져진 종이 쪼가리를 한번 보더니 주름 하나 없는 정장을 쓸어내리고는 회의실로 들어갔다....차 안의 분위기는 엄숙하기 그지없었다.화를 눌러 참는듯한 얼굴의 고국성과 단은숙은 고은서가 도망가는 걸 막으려고 표정을 굳히고 그녀의 양옆을 지키고 앉았다.한편 고은서는 이혼합의서까지 다 받아냈었는데 반응할 시간도 없이 벌어진 뜻밖의 상황에 모든 일이 수포가 되자 우울해져 있었다.지금 상황을 보니 삼촌과 외숙모는 절대 그녀의 이혼을 허락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고은서는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 엄마와 함께 살았고 삼촌은 도시에 따로 살았기에 가끔 만나 밥을 먹을 때도 어른들끼리 일 얘기를 하느라 고국성도 고은서에게 큰 관심을 주지 않아서 둘 사이가 그리 가깝진 못했다.하지만 고국성은 어쨌든 할아버지의 아들이고 또 고 씨 집안의 사업을 책임지고 있었기에 고은서는 그에게 모르는 사람한테 대하는 것처럼 아무 상관 말라고 할 수는 없었다.일단은 할아버지도 곧 이혼 사실을 알게 되실 테니 그 관문부터 넘어야 했다.이혼합의서는 어쩔 수 없이 곽승재에게 다시 한번 사인을 받아내야 할 것 같았다.생각 정리를 마친 고은서는 창문에 기대어 잠든 척을 했다.그렇게 한 시간을 넘게 달려 차는 할아버지 댁에 도착했고 고은서는 바로 할아버지에게로 달려가려 했지만 단은숙에 의해 팔
“이혼?”이혼이란 두 글자에 고준석도 놀라긴 한 건지 손에 든 찻잔마저 미끄러질 뻔했다.“할아버지, 조심해요!”그때 고은서 얼른 그 찻잔을 받아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손으로 할아버지의 가슴을 쓸어주어 제대로 숨을 쉴 수 있게 도와줬다.“뭐 인제 와서 효도하는 척이야. 정말 할아버지 화나게 하고 싶지 않으면 이런 바보 같은 짓 좀 그만해!”“조용히 해.”화가 나서 씩씩대는 단은숙의 말을 막은 고국성이 고준석을 향해 말했다.“아버지도 이제 더는 은서 봐주시면 안 돼요.”“오늘 저희들이 마침 승재 찾아갔다가 이 사람이 이혼합의서를 빨리 봤으니까 망정이지 하마터면 이혼하는 것도 모를 뻔했다니까요.”“은서야, 네 삼촌이랑 외숙모 말이 다 사실이냐?”고준석이 표정을 굳히고 묻자 고은서는 서러웠는지 코를 먹으며 대답했다.“할아버지, 사실 할아버지가 걱정하실까 봐 계속 못 했던 말이었어요...”“왜 이혼을 하고 싶은 거냐?”전에 고은서가 장난스레 이혼 얘기를 꺼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승재와 싸우고 나서 그런 줄로만 알고 그냥 넘겼는데 이혼합의서까지 받아낸 걸 보니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닌 것 같아 고준석은 다시 고은서를 보며 물었다.다들 왜 이혼을 하고 싶냐 물어대는 탓에 대답하는 것도 귀찮기만 했던 고은서지만 존경하는 할아버지께는 그 이유를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았다.“할아버지, 저랑 승재 오빠는 결혼 초기부터 행복하지 않았어요. 우리 둘 다 서로를 사랑하지 않아요. 그냥 결혼에 묶여있는 건 둘에게 다 좋지 않은 것 같아서 이만 끝내고 싶은 거예요.”“세상에 천생연분이 어딨어?! 옛날 사람들은 얼굴 한 번 못 봐도 잘만 살잖아!”그때 단은숙이 화를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그리고 결혼할 때도 네가 울며불며 그 사람 아니면 안 된다고 한 거잖아. 그래놓고 인제 와서 힘들다고 이혼한다는 게 말이 돼? 결혼이 애들 장난이야?”“그래요, 제가 결혼하자고 한 거 맞아요. 그래서 저는 이 결혼이 불행해도 참고 살아야 하나요? 삼촌이랑 숙모는 잘
곽승재는 차 유리의 파편도 직접 막아주고 운전도 가르쳐주며 민시후에게 납치당할 뻔했을 때도 바로 나타나 고은서를 구해주었다.고은서가 온갖 짜증을 부려댈 때도 곽승재는 참아왔었고 오히려 정상적인 부부처럼 같은 방을 써보자고 제안하기도 했었다.예전의 곽승재라면 전혀 하지 않을 행동들이었다.“은서야, 할아버지가 보기엔 승재가 너를 많이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아.”“그날도 승재는 회의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지만 누가 봐도 네가 전날 밤에 집에 들어가지 않아서 널 걱정하느라 온 거였어.”“나에게 옛날 벼루를 선물한 것도 네가 기뻐했으면 해서 그랬던 거잖아. 너뿐만 아니라 너의 가족들도 신경 쓴다는 걸 보여주려고.”고준석이 한 이 말들을 예전의 고은서가 들었다면 당연히 감동하고 기뻐했겠지만 지금은 그냥 처량하게만 느껴졌다.고은서가 온 마음을 다해 곽승재를 사랑할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이제 지쳐서 이혼하려고 하니 또 아쉽다는 듯이 잘해주는 게 달갑지 않았다.“할아버지, 그 정도로 이 결혼을 지속할 수는 없어요. 저는 그냥 그 사람에게도 자유를 주고 싶어요. 그리고 더 이상 그 사람과 관련된 일에는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아요. 나랑은 아무 상관없는 일이 됐으면 좋겠어요. 저도 이제 승재 오빠한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을 거예요.”고은서의 대답에 고준석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꼭 같이 살라는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야. 그냥 내가 아는 너는 사람이든 뭐든 네가 확신하는 건 절대 바꾸지 않는 성격이라 하는 말이야.”“어릴 때 갖고 놀던 토끼 인형도 네가 맨날 안고 돌아다니니까 다 해져서 내가 다른 인형들 많이 사줬잖아. 그런데도 넌 그 인형만 고집했지. 그게 낡아서 더는 돌이킬 수 없을 때가 돼서야 버렸잖아. 하지만 그 뒤로 너는 다른 인형은 원하지 않았지.”“네가 결혼할 때도 나는 둘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너희들의 결혼을 허락했어. 네가 승재가 아닌 다른 사람은 다시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서.”“은서야, 할아버지는 네가 네 마음에
“삼촌 회사의 계약이 하나 성사 안 된 게 있어서 오빠한테 도와달라고 온 거래.”박지연은 고은서가 말한 이유도 그럴 가능성이 있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곽승재와 관련된 것 같았다.“아무튼 이혼 못 했으니까 내 말이 맞는 거야!”“상상력이 그렇게 풍부하면 간호사 말고 소설가를 하지 그래?”“그것도 괜찮은 것 같아. 이라는 소설 쓸까 하는데 어때?”“그런 노골적인 글 쓸 거면 그냥 계속 간호사 해.”박지연과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시내까지 들어와 있었다.어둠이 깃든 시내를 보던 고은서는 주인혁에게 오늘 헬스장을 가겠다고 약속한 일이 떠올랐다.그래서 고은서는 기사더러 헬스장 근처의 식당에 차를 세우게 하고 간단히 배를 채우고는 바로 헬스장으로 갔다.헬스장 대표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바로 전에 운동을 도와줬던 피티쌤을 끌어다 그녀에게 사과했다.이미 다 지난 일이라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던 고은서가 그들을 보며 손사래를 쳤다.“괜찮아요. 앞으로 주인혁 씨 난처하게 만들지만 않으면 돼요.”“주인혁 씨는 당분간 우리 헬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게 됐어요. 사모님이 원하시면 담당 직원을 바꾸던지 환불을 하던지 전부 가능합니다.”“왜 아르바이트를 못하는데요?”어제 밥을 같이 먹을 때도 못 들은 말이었기에 고은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곽승재가 그 정도로 속이 좁은 사람은 아닐 텐데.“본인이 오늘 저한테 직접 한 말입니다. 오디션에 나가야 한다고 하더군요.”대표의 말을 듣고 보니 미래에 있을 오디션이 떠올랐다.고은서는 그 오디션에서 주인혁이 많은 주목을 받는다는 건 알고 있지만 오디션이 정확히 언제 시작하는지는 몰랐었다.“은서 씨.”저 앞에서 주인혁의 목소리가 들리자 고은서는 바로 그를 향해 걸어갔다.“오늘은 일찍 왔네요.”주인혁은 고은서와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대화를 시작했다.“운동 끝나면 같이 나가서 뭐라도 마실래요? 저 할 말 있어요.”그에 고은서는 웃으며 대답했다.“대표
고은서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주인혁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귀 끝까지 빨개진 주인혁은 다급하게 부인했다.“저기요! 그런 게 아니라 여자가 호신술 많이 배워두면 좋으니까 하는 말이거든요. 위험할 때 본인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어야죠.”주인혁의 반응을 본 고은서는 예상대로라는 듯 웃고는 말했다.“장난인데 뭘 그렇게 긴장해요.”주인혁은 여전히 빨개진 귓볼을 하고 물었다.“제가 혹시 은서 씨 귀찮게 했어요?”“귀찮게 한 건 아니고요.”고은서는 이참에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그냥 내가 저번에 도와준 일로 나를 너무 좋게 볼까 봐요. 내 모든 게 다 좋아 보여서 생겨서는 안 될 생각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그것 때문에 그래요.”“그런 건 걱정 마세요. 저도 제 신분을 아는데 어떻게 감히 은서 씨 같은 사람을 넘봐요.”“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절대 아니에요.”고은서는 진지하게 말했다.“지금 상황은 그냥 잠시뿐이에요. 곧 엄청난 성공을 이룰 거고 많은 사람들이 주인혁 씨한테 관심 가져주고 주인혁 씨를 좋아할 거에요.”“그리고 나를 넘본다는 단어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요. 나는 인혁 씨보다 나이도 많고 이미 결혼도 했잖아요. 인혁 씨는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이 어울려요.”고은서의 말에 긴장이 조금 풀린 주인혁은 고은서를 향해 웃어 보였다.“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그러니까 컨디션 조절 잘해서 하고 싶은 일만 잘해요, 힘내요!”그렇게 응원을 마친 고은서는 헬스장을 나와서 택시를 부르려고 하는데 마침 원지훈에게서 온 문자 두 개를 보게 되었다.[누나, 시간 좀 있어요? 은혜 씨 일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누나 시간 괜찮나 해서요.][미안해요, 귀찮게 해서. 은혜 씨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7시에 첫 번째 문자를 보내고 한 시간 뒤에 온 두 번째 문자였다.고은서가 답장하지 않으니 귀찮은 거로 여긴 것 같았다.고은서는 조금 고민하다 답장을 보냈다.[아까는 운동 중이어서 핸드폰 보관함에 넣어뒀었어. 물어볼
원지훈은 “낚시”하는 법을 잘 알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말 대신 사리에 맞는 말을 먼저 꺼냈다. “사촌누나, 저한테 보내주세요. 제가 다른 보통의 헬스장과 비교 해볼게요.” 그의 말에 고은서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전화를 끊고 그녀는 복싱관의 이름을 그에게 보내주었다. 그와 조은혜 사이가 어느 정도로 진전이 있는지는 그와 많이 접촉해야봐야만 알 수 있다. ‘꼬투리 하나라도 잡는다면 더 좋을 텐데.’ [감사합니다. 사촌누나.] 원지훈이 고은서에게 감사의 말을 담은 문자를 보내왔다. [괜찮아. 너랑 은혜 사이가 아직 확실하지 않다면 사촌누나라고 부르지 말아줘. 그냥 은서 씨라고 해.] [네. 은서 씨 일찍 쉬세요.] ... 어느 한 병원 안, 백유미는 이마와 팔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어두운 안색으로 병실 침대에 누워있었다. “유미야, 병실이 너무 좋은데? 곽씨 일가의 도련님께서 꽤나 잘해 주나봐?” 범가온은 그녀의 병실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말했다. 백유미는 그의 말을 못들은 척 무시하며 냉랭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왜 나를 찾아온 거예요?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달라고 말했었는데 잊었나요?” “네가 다쳤다기에 얼른 와서 너 괜찮은지 보려고 했지.” 범가온은 냉랭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그녀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유미 너는 왜 그렇게 조심성이 없어? 다행히 그 등이 살짝 빗나가서 망정이지, 제대로 떨어져 네 머리에 부딪혔다면 큰 구멍 정도는 남았겠다.” 백유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요? 왜 통화할 때 안 말하고 꼭 나한테 직접 온 거죠?” 범가온은 두 손을 비비적거리며 이곳에 온 목적에 대해 말을 했다. “요즘 원지훈 그 놈이 조 씨 그 여자를 쫓아다니는 바람에 이것저것 다 사재기 하고 있어. 하루는 밥을 산다고 나가고 다른 하루는 같이 놀러간다고 나가고해서 돈을 거의 다 썼지 뭐야.” 백유미는 범가온에 손목에 있는 금팔찌를 발견하고는 물었다.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여시은은 여전히 여재훈의 다리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아빠가 생각하시는 해결 방법은 뭐예요?”여재훈은 여시은에게 홍보팀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개인적으로 고은서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한 뒤 집에서 2주 동안 자숙하라고 말했다.“제 회사는 아직 개업식도 제대로 안 했는데 공개 사과를 하라뇨? 그럼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에요!”여시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애원했다.“아빠, 저 은서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이끌기 힘든데,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앞으로 누가 저를 믿고 따르겠어요?”“안 된다.” 여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이미 파장이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시은아, 잘못을 저지른 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사과하면 은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 거다.”여재훈은 계속해서 말했다.“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덮어주면 그건 너를 망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된 거다!”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고은서를 그저 연못에 좀 빠지게 했을 뿐인데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단 말인가?’‘공개 사과라니, 이제 예전처럼 모두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던 모습은 끝이라는 거잖아.비록 인터넷의 영상은 지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오늘 밤 그렇게 많은 부유층과 정재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해성에서 쌓아온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진 셈이다.예전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여재훈은 안쓰러워하며 뭐든지 다 용서해 줬었다.‘지금은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아빠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벌하려 한다니, 정말 나를 딸로 생각하긴 하는 걸까?’
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눈이 시뻘게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고은서가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왜 저를 믿지 않으세요!”“시은아!”여재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생처음으로 이토록 차가운 눈빛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됐니!”“내가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어. 연회장 CCTV 꺼놓은 거, 그거 네가 시킨 거더라.”여재훈은 딸을 억울하게 만들까 걱정돼 CCTV 관련 내용을 직접 조사했다.그런데 정말로 여시은이 꺼놓았던 것이었다.“네가 정말 은서 씨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왜 CCTV를 미리 꺼놓은 거냐?”여재훈은 냉정한 태도로 물었다.여시은은 자신이 고은서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은서는 일부러 도발적인 눈빛으로 여시은을 자극했고 곧바로 테라스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모두 여시은한테 엿 먹이려는 행동이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쿠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동적으로 행동해 자신을 밀칠 거라 확신했었다.왜냐하면 고은서는 지난번엔 쿠아를 다치게 한 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반전이 생겼다.고은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반격했고 지난번 농장에서의 ‘물에 빠진 사건’ 증거까지 들고나왔다.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여시은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여재훈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저 고은서가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왜 아빠는 맨날 걔만 칭찬하세요? 이러니깐 제가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은서한테 꼽 주고 싶었어요!”“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후회도 안 해요!”“너!”여재훈은 손을 번쩍 들어 여시은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시은아, 아빠가 평소에 너를 어떻게 가르쳤니? 사람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질투심에 눈이
이미숙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여시은이 고은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연못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그 영상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올린 것 같았고 화질이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전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영상의 끝에는 고은서와 여시은의 얼굴을 비춘 장면도 담겨 있었다.다소 초라해진 고은서는 곽승재의 부축을 받으며 옆에 서 있었다. 여시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그 와중에 영상의 제목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재벌가 아가씨, 두 얼굴의 진실!]“사모님, 저 여자는 어쩜 저리 독하대요.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폭로해 줘서 다행이지! 이제 세상 사람들 다 그 여자 피해서 다니겠어요!”이미숙은 화가 난 듯 말했다.고은서는 이번 일이 오래 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시은 뒤에는 여재훈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 일로 여시은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했고, 여재훈 역시 자신의 딸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이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휴대전화 영상에 대뜸 ‘좋아요'를 눌렀다.한편, 여씨 가문에서.여시은 역시 유튜브 영상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그녀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밖에 서 있는 박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시은 아가씨,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서재로 오시래요. 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이번이 박미화가 세 번째로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여시은은 곧바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와 짜증을 숨기고는 일부러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박미화는 방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때마침 여시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여시은은 박미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에 분노로 인해 물어뜯은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여시은은 울먹이는 말투로 물었다.“미화 언니, 아빠가 나한테 화 많이 나신 거야? 나 어떻게 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