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불행을 너에게

나의 불행을 너에게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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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던 꽃으로 피어났던 여자를 짓밟은 남편, 하지만 꺽인 꽃은 죽지 않았다. 더 아름답고 강하게 피어나 그에게 가장 처절한 후회를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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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화

차갑고 하얀 침대 위, 설아는 떨리는 손을 억지로 뻗어 머리맡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간신히 집어 들었다.

언제부터 흘렸는지도 모를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며 시트를 적셨고, 열기로 달아오른 얼굴은 숨을 쉴 때마다 타는 듯이 뜨거웠다. 눈앞이 흐릿하게 흔들렸다. 손끝에 감각이 없었다. 휴대폰 화면에 뜬 이름 석 자조차 초점을 맞추기 힘들었지만, 손가락은 습관처럼 아니, 어쩌면 마지막 본능처럼 그 이름을 눌렀다.

서진 오빠.

통화 버튼을 누르자 텅 빈 신호음만 허공에 울려 퍼졌다. 한 번, 두 번. 설아는 바짝 마른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제발.

속으로 되뇌었지만 입 밖으로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그에게 제발 이라는 말조차 꺼내기 두려워진 게.

다시 한 번 버튼을 눌렀을 때, 기다렸던 목소리 대신 수화기 너머로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어딘가 떠들썩한 곳.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전화를 건 건 그래도 혹시, 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말해."

짧고 건조한 한마디. 반가움도, 걱정도, 심지어 형식적인 안부조차 담기지 않은 목소리였다. 술자리 소음 속에서도 그 냉랭함은 선명하게 전해졌다.

설아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꾹 눌러 삼키며, 몸 어딘가 마지막으로 남아 있을 힘을 끌어모아 간신히 입을 열었다.

"오빠… 저 몸이 너무 안 좋아요. 지금 와줄 수 있어요?“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와줘요.'

말하지 못한 말들이 목 안에서 뭉쳤다.

잠깐의 침묵.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침묵은 설아에게 이미 답이었다. 기대하지 말았어야 했다. 알면서도 전화를 건 자신이 어리석었다.

"지금은 좀 바빠. 사람 보낼게.“

한숨조차 섞이지 않은, 깔끔하게 잘라낸 말투였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툭, 아무렇지 않게, 너무나 익숙하게 전화가 끊겼다.

설아는 멍하니 어두워진 화면을 바라보았다. 뭔가를 더 말하려 했는지, 입이 아직 반쯤 열려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나올 말도, 흘릴 눈물도, 남은 힘도 없었다.

사람을 보낸다고.

3년 전이었다면 울었을 것이다. 2년 전이었다면 화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설아는 그저 공허했다. 가슴 한가운데가 텅 빈 것처럼, 아프지도 않았다. 이미 너무 많이 익숙해진 탓이었다.

손가락에 힘이 천천히 풀리며 휴대폰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둔탁한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울렸다. 그리고 설아도, 그 작은 소리를 끝으로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3년 전.

설아는 누가 봐도 빛나는 사람이었다.

경영학과 새내기였던 그때, 설아는 캠퍼스 안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 전공 수업 첫날부터 교수의 질문에 막힘없이 답했고, 시험마다 최상위권을 놓치지 않았다.

처음 캠퍼스를 걷던 날, 설아를 본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하얗고 작은 얼굴에 또렷한 이목구비, 별다른 꾸밈이 없어도 눈길을 붙잡는 얼굴이었다. 지나가던 선배들이 괜히 말을 걸었고, 동기들은 먼저 번호를 물어왔다. 누군가는 그녀를 보며 감탄했고, 누군가는 괜스레 긴장했다.

하지만 정작 설아 본인은 몰랐다.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이 캠퍼스를 걷고 있는지 거울 앞에서도 크게 들여다보지 않았고, 예쁘다는 말에도 그냥 웃어 넘겼다.

그 시절의 설아에겐 꿈이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가고 싶은 길이 있었다.

그 길이 어긋나기 시작한 건 그를 만나면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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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푸드리푸드리
푸드리푸드리
너무 재밌어요 ㅎㅎ
2026-06-18 15:19:54
1
0
11 챕터
1화
차갑고 하얀 침대 위, 설아는 떨리는 손을 억지로 뻗어 머리맡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간신히 집어 들었다.언제부터 흘렸는지도 모를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며 시트를 적셨고, 열기로 달아오른 얼굴은 숨을 쉴 때마다 타는 듯이 뜨거웠다. 눈앞이 흐릿하게 흔들렸다. 손끝에 감각이 없었다. 휴대폰 화면에 뜬 이름 석 자조차 초점을 맞추기 힘들었지만, 손가락은 습관처럼 아니, 어쩌면 마지막 본능처럼 그 이름을 눌렀다.서진 오빠.통화 버튼을 누르자 텅 빈 신호음만 허공에 울려 퍼졌다. 한 번, 두 번. 설아는 바짝 마른 입술을 꾹 깨물었다.제발.속으로 되뇌었지만 입 밖으로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그에게 제발 이라는 말조차 꺼내기 두려워진 게.다시 한 번 버튼을 눌렀을 때, 기다렸던 목소리 대신 수화기 너머로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어딘가 떠들썩한 곳.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전화를 건 건 그래도 혹시, 라는 마음 때문이었다."말해."짧고 건조한 한마디. 반가움도, 걱정도, 심지어 형식적인 안부조차 담기지 않은 목소리였다. 술자리 소음 속에서도 그 냉랭함은 선명하게 전해졌다.설아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꾹 눌러 삼키며, 몸 어딘가 마지막으로 남아 있을 힘을 끌어모아 간신히 입을 열었다."오빠… 저 몸이 너무 안 좋아요. 지금 와줄 수 있어요?“'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와줘요.'말하지 못한 말들이 목 안에서 뭉쳤다.잠깐의 침묵.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침묵은 설아에게 이미 답이었다. 기대하지 말았어야 했다. 알면서도 전화를 건 자신이 어리석었다."지금은 좀 바빠. 사람 보낼게.“한숨조차 섞이지 않은, 깔끔하게 잘라낸 말투였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툭, 아무렇지 않게, 너무나 익숙하게 전화가 끊겼다.설아는 멍하니 어두워진 화면을 바라보았다. 뭔가를 더 말하려 했는지, 입이 아직 반쯤 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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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어느 봄날 오후봄 햇살이 유리창을 가득 채운 학교 앞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두꺼운 전공서적을 펼쳐 놓은 설아는 주변 소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형광펜을 움직이고 있었다. 식어가는 아메리카노 옆으로 빼곡히 필기된 노트가 쌓여 있었다. 그 모습이, 봄날 카페 안에서 유독 선명하게 빛났다.그 앞을 지나치던 두 남자 중 한 명이 발걸음을 멈췄다.유서진.졸업을 목전에 둔 4학년. 국내 손꼽히는 그룹사 회장의 외동아들. 훤칠한 키에 날카롭고 차가운 이목구비 어딜 가든 시선이 쏠리고, 어딜 가든 먼저 자리가 만들어지는 남자였다. 웬만한 것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그가, 지금 카페 유리 너머 한 여자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옆에 있던 친구 민혁이 그 시선을 따라가다 피식 웃으며 서진의 어깨를 툭 쳤다."야, 유서진. 너도 반했냐?"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을 거두지도 않았다.민혁이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이번에 들어온 새내기래. 경영학과. 얼굴이야 뭐 보면 알겠고 근데 그것만이 아니라 머리도 엄청 잘 돌아간다더라고. 교수들한테도 벌써 이름 알려졌다던데? 저런 애랑 사귀는 남자는 진짜 무슨 복이냐. 부럽다, 진짜."잠시 침묵이 흘렀다.서진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올라갔다."새내기.“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엔 묘한 온도가 실려 있었다. 차갑지도, 그렇다고 따뜻하지도 않은 무언가 갖고 싶은 걸 발견했을 때의 그 눈빛.민혁이 그 눈빛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야, 설마 번호라도 물어보게 천하에 유서진이?서진은 대답 대신 카페 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천천히, 마치 이미 결정을 내린 사람처럼."갖고 싶은게 있으면 가져야지."그것이 시작이었다.서진은 자연스럽게 설아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마치 원래 거기 앉으려 했던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그리고 잠시 후 툭."아, 미안."일부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서진의 커피가 설아의 소매 위로 흘러내렸다."옷 괜찮아요? 정말 미안하게 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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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어색하게 시작된 사이는 생각보다 빠르게 가까워졌다. 서진은 자주 설아 앞에 나타났고, 부담스럽지 않은 선을 지키면서도 조금씩, 조금씩 거리를 좁혀왔다. 다른 여자들에게는 한결같이 차갑고 무뚝뚝하다는 소문이 자자한 유서진이, 설아 앞에서만큼은 달랐다. 먼저 말을 걸었고, 소소한 것들을 챙겼고, 무심한 듯 곁에 있었다.친구들이 먼저 눈치챘다."야, 설아야. 유서진 선배 너 좋아하는 거 아니야?""에이, 설마.""설마가 사람 잡는다."설아는 웃어 넘겼다. 하지만 그 말이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던 건 설아도 인정하기 싫었지만, 사실이었다.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설아의 생일이었다.같은 과 친구들이 학교 앞 술집에 모였다. 조용히 밥이나 먹을 줄 알았는데, 친구들은 처음부터 작정한 듯 설아 앞에 잔을 들이밀었다."생일이잖아, 오늘만큼은 마셔!""설아 주량이 얼마야, 우리 오늘 알아보자~"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설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머리가 무거웠다. 테이블 위에 팔을 올리고 버텼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그 시각, 술집 안쪽 룸에서는 서진이 친구들과 자리를 잡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냥 그 자리에서 끝날 저녁이었다. 그런데 잠깐 자리를 비우고 나오던 길이었다. 복도를 지나치다 홀 쪽 테이블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고, 무심코 시선이 갔다.그리고 설아를 발견했다.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테이블에 기대어 있는 설아를. 서진은 잠깐 멈칫했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친구들이 있으니까.그런데."야, 이설아 완전 취했다. 내가 기숙사 데려다 주고 올게.“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 하나가 일어서며 설아의 팔을 잡아 부축했다. 괜찮은 척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 눈빛은 달랐다. 음흉하게 일그러진 표정이 서진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서진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남자가 설아를 이끌고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서진의 손이 그 손목을 잡았다.차갑고, 단호하게."놔."한 마디였다. 하지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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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다음날설아의 눈이 힘겹게 떠졌다. 낯선 천장이었다.설아는 한동안 그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온몸을 짓누르는 묵직한 통증에 그대로 굳어버렸다.‘여기가… 어디지.’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낯선 공간이었다. 넓고 정돈된 방. 고급스러운 가구들. 자신이 덮고 있는 이불조차 낯설었다.그리고 구겨진 침대 시트 위에서 눈이 멈췄다.설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아니야. 아닐 거야.’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끌어올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갔다. 어젯밤 기억이 없었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다 취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다음은.... 아무것도 없었다.그때 방문이 열렸다.서진이었다. 샤워를 마쳤는지 젖은 머리칼을 한 채 서진이 들어서다 설아와 눈이 마주쳤다.잠깐의 침묵."일어났어?"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 태연함이 설아의 가슴을 더 세게 내리눌렀다."…오빠, 어젯밤에....."목소리가 떨렸다.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어떤 말보다 더 선명한 대답이었다.설아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울지 않으려 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어젯밤 술에 취해 실수를 범한 자신에게 화가 난 건지, 서진에게 화가 난 건지 설아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손이 떨렸다. 벗어던져진 옷을 주워 입으면서도, 눈물이 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가볼게요.“설아가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서진의 손이 설아의 손목을 잡았다."기다려. 데려다 줄게.“"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설아가 서진의 손목을 조용히 빼냈다. 그 눈빛을 본 서진은 그런 설아를 더 잡지 않았다.그날 이후, 설아는 서진을 피했다.마주칠 것 같으면 돌아갔고, 연락이 와도 읽지 않았다. 없었던 일처럼 지내고 싶었다. 그냥 흘려보내면 된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몸이 이상했다.생리가 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잠이 쏟아졌고, 냄새에 민감해졌다. 설마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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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결혼식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화려하지 않았다. 서진의 부모는 끝까지 탐탁지 않은 표정을 감추지 않았고, 설아의 부모는 딸의 손을 잡고 눈물을 삼켰다. 그래도 서진은 설아의 곁에 있었다. 식이 끝나고 설아의 손을 잡으며 작게 말했다."잘 부탁해. 이설아“그 한마디가 설아에게는 충분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신혼 초, 서진은 누구보다 다정한 남편이었다.바쁜 와중에도 설아를 챙겼고, 서툴지만 함께 밥을 지어먹었고, 설아가 웃으면 따라 웃었다. 설아는 그 시간들이 영원할 거라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설아는 하혈을 시작했다. 병원에서 들은 말은 차가웠다.유산이었다.텅 빈 초음파 화면을 바라보며 설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진은 병원에 오지 못했다. 중요한 자리가 있다고 했다. 설아는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없이 울었다.그리고 시어머니의 전화가 왔다.”애도 못 지키는 게 무슨 며느리냐.“설아는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서진의 부모는 처음부터 설아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아들이 원하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유산 이후, 그 태도는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설아를 며느리 자리에 앉혀두고도 며느리 취급은 하지 않았다. 시어머니의 크고 작은 가시 돋힌 말들이 설아의 하루 하루 속에 깊숙히 스며들었다.설아는 다니던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설아의 꿈과 그 모든 것이 결혼이라는 이름 아래 조용히 지워졌다.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설아는 서진의 뒷바라지를 했다. 좋은 아내이고 싶었다.그것만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했다.그러던 어느 날, 서진이 말했다."나 유학 갈 것 같아."설아는 잠시 멈췄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가는 거예요?"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답이었다.박수현.서진과 같은 과였던 그녀. 집안도 좋고, 학벌도 좋고, 무엇보다 서진의 부모가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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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설아는 매일 서진이 좋아하는 음식을 차렸다. 다림질한 셔츠를 옷장에 걸어두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간혹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면, 서진은 설아를 찾았다. 하지만 그건 설아를 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다정함도, 온기도 없었다. 그저 거칠고 무심한 손길이 지나가고 나면, 서진은 돌아누워 잠들었다. 설아는 천장을 바라보았다.‘이게 결혼인가.’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울면 더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일도 밥을 차리고, 셔츠를 다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루를 버텼다.설아는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시들어가고 있었다.이후 서진과 수현의 회사가 같은 프로젝트를 맡게 된 건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처음엔 일이었다. 회의가 잦아졌고, 저녁 자리가 생겼고, 출장이 겹쳤다. 서진은 설아에게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바쁘다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고, 설아도 더 묻지 않았다.그런데 우연히 보게된 수현의 SNS는 설아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수현의 생일 파티 사진. 고급 레스토랑의 테이블, 샴페인 잔, 웃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안에 서진이 있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설아는 그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언제 저런 표정을 지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출장 중 올라오는 사진에도 서진은 늘 수현 곁에 있었다. 같은 도시, 같은 풍경, 같은 시간. 우연치고는 너무 많이 겹쳐있었다.설아는 조용히 날짜를 떠올렸다.자신의 생일. 서진은 늦게 들어왔다. 미역국은 식어 있었고, 케이크는 혼자 잘랐다.서진이 미안하다고 했는지조차 기억이 흐릿했다.결혼기념일. 서진은 출장 중이었다.그는 나보다 수현과 더 잘 어울리는구나.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설아는 스스로 놀랐다. 슬프지 않았다.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구나, 싶었다. 이미 너무 많은 것에 무뎌진 탓인지, 아니면 어딘가에서 이미 알고 있었던 탓인지.창밖엔 불빛이 가득했다. 저 불빛들 속에서 서진은 지금쯤 웃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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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기운을 차린 설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을 내려다보다가조용히 뽑아냈다.작은 통증이 왔지만 설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침대 옆에 개어두었던 자신의 옷을 집어 들고 환자복을 벗었다.손이 떨려 단추를 잠그는 것조차 생각보다 힘들었다.겨우 옷을 갈아입고 일어서는 순간,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 어지러움이 물밀듯 밀려오며 몸이 휘청였다. 설아는 침대 모서리를 붙잡고 잠시 버텼다. 숨을 고르고, 다시 섰다.그때 병실 문이 열렸다."이설아씨, 잠깐만요!"담당 간호사였다. 링거 알람이 울렸는지, 빠르게 들어온 간호사가 설아의 모습을 보고 당황한 얼굴로 다가왔다."지금 이러시면 안 돼요. 링거는 왜 빼셨어요?""괜찮아요.""괜찮지 않으세요.지금!“간호사가 설아의 앞을 막아섰다. 단호한 목소리였다."이설아씨, 지금 빈혈 수치가 심각하게 높아요. 면역력도 많이 떨어진 상태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 이 상태로 나가시다가 복도에서 쓰러지셔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몸이에요. 보호자분께도 연락을 드려야 할 것 같은데""보호자 연락은 안 하셔도 돼요."설아는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말했다.간호사가 잠시 설아를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눈치챈 것 같았다.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설아는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퇴원 수속은 제가 할게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손끝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설아는 그 손을 꼭 쥐었다. 들키지 않으려고.병실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복도의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설아는 잠깐 눈을 감았다.이대로 돌아가면 또 똑같겠지.아픈 몸으로 빈 집에 돌아가고,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누워 있고, 그래도 아무도 오지 않는.설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그리고 걸었다. 어지럽고, 몸이 무거웠지만 그래도 걸었다.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았다.이대로는 안 된다...퇴원 수속을 마치고 설아가 병원 정문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로비 자동문이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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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불도 켜지 않은 채였다. 소파에 팔짱을 낀 자세로, 굳은 얼굴로 설아를 바라보고 있었다."어디 다녀와?"낮고 날이 선 목소리였다.설아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짧게 대답했다."그냥 바람 좀 쐬고 왔어요.""병원에서 왜 퇴원했어?""아무 이상 없다길래요.“서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간호사에게 들은 말이 떠올랐다. 빈혈 수치, 면역력,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몸. 그런데 설아는 지금 아무 이상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아무 이상 없다고?""네. 걱정 안 하셔도 돼요."평소와 달랐다. 목소리에 온기가 없었다. 기대도, 서운함도 담기지 않은 그냥 건조한 말투. 서진은 그게 묘하게 불편했다.설아는 더 말을 잇지 않고 방으로 향했다. 빨리 눕고 싶었다. 눈앞이 계속 흔들렸다.그때 서진이 설아의 손목을 잡아 돌려세웠다."내가 말하는 중이잖아.“설아는 잡힌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진을 바라보았다.화가 난 얼굴이었다. 평소라면 그 얼굴에 움츠러들었을 것이다.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먼저 말했을 것이다.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았다."할 말이 있어요?""….""없으면 저 좀 쉬어도 될까요. 좀 쉬고 싶어요....“설아의 차갑지도, 슬프지도 않은 눈빛을 보던 서진은 손에서 힘이 빠졌다.문을 닫고 들어가는 설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던 서진이, 결국 참지 못하고 방문을 거칠게 밀치고 들어갔다.방문이 거칠게 열렸다.설아는 침대에 누운 채 고개를 돌렸다. 서진이었다. 문틀에 손을 짚고 서서 설아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진이 설아의 앞에 멈춰 서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낮게 입을 열었다."왜 전화 안 받았어.“"오빠....미안한데... 오늘은 쉬고 싶어요....“"나한테 화난 거야?"설아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화가 난 건지도 잘 몰랐다. 그냥 지쳐 있었다. 화를 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그 순간 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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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거칠었던 움직임이 멈추고 서진이 일어나 신경질적으로 방문을 닫고 나갔다.설아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니, 너무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와 오히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일어나려던 그 순간 허리와 아랫배에 통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설아는 그대로 주저앉았다.자신도 모르게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병원에서도 참았고, 공원에서도 참았고, 오늘 하루 내내 참았는데.그래도 눈물은 남아 있었다.‘나는 그 사람한테 뭐지.’서진에게 설아는 아내도 아니었다.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 필요할 때 쓰고, 필요 없으면 나가버리는.설아는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묻었다.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울음소리조차 내고 싶지 않았다.이혼하고 싶다...아까 자신이 내뱉었던 그 말이 확신으로 느껴졌다. 두렵지 않았다. 아니, 두려움보다 이대로 계속 살아가는 것이 더 무서웠다.서진과 엮어 있는 끈을 끊어 내야 자신이 살수 있을 것 만 같았다.다음 날 아침, 설아는 일찍 눈을 떴다.방문을 열고 나가니 집 안이 조용했다. 서진은 이미 출근한 듯 흔적도 없었다. 설아는 물 한 컵을 마시고 탁자 앞에 앉았다.서랍에서 꺼낸 이혼 신고서. 손이 떨렸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한 칸 한 칸 천천히 채워나갔다.다 작성한 서류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 바람을 쐴 겸 외출을 나갔다.설아는 걸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하늘...언제부터 고개를 숙이고 다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3년이라는 시간 동안 친구들과의 연락도 끊겼다. 지금 이 도시에서 설아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커피숍에 들러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사고 집으로 돌아온 설아는 현관에서 멈췄다.불이 켜져 있었다. 서진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외투도 벗지 않은 채, 탁자를 바라보며..설아의 시선이 탁자로 향했다. 올려두었던 서류가 없었다.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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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명령조의 말에 설아는 어떤 반항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영혼이 탈탈 털려나간 몸을 움직여 드레스룸에서 손에 잡히는 하얀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거울 앞에 섰지만, 흐릿한 거울 속 여자는 자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저 주인이 입으라는 대로 입은 인형에 불과했다.거실로 나오자, 소파에 앉아 있던 서진의 시선이 설아에게 닿았다. 순백의 원피스를 입은 설아를 본 서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확장되며 숨을 삼켰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아무 말 없이, 불쾌한 감정을 숨기듯 휙 돌아서며 먼저 현관을 나섰다.차 안을 채운 건 숨이 막힐 듯한 침묵뿐이었다.모임 장소인 고급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서진의 동기들이 두 사람을 요란하게 맞이했다."오, 제수씨는 올 때마다 더 예뻐지네.""서진이 이 자식,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설아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당겨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짓는 웃음이라는 걸, 이 활기찬 테이블 위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그때, 레스토랑의 문이 열리며 세련된 단발 오피스룩 차림의 박수현이 들어왔다."애들아 미안! 프로젝트 마무리가 늦어져서 이제야 왔네."시원시원하게 웃으며 인사를 나누던 수현의 시선이, 서진의 옆자리에 앉은 설아에게 머물렀다. 그 순간 수현의 완벽했던 포커페이스가 찰나의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0.1초 만에 다시 싱그러운 미소로 포장했지만, 신경이 곤두서 있던 설아는 그 균열을 놓치지 않았다."안녕하세요, 설아 씨. 여전히 고우시네요.""네, 안녕하세요, 수현 씨.“수현은 자연스럽게 서진의 비어 있는 옆자리에 앉으며 가방을 내려놓았다.그리고 서진을 힐끗 보며 뼈 있는 말을 던졌다."야, 유서진. 설아 씨 데려올 거면 단톡방에 미리 말을 했어야지. 이런 칙칙한 동기 모임까지 재미없게 끌고 다니냐? 설아 씨 불편하게."배려를 가장한, 명백한 배척이었다. ‘너는 우리와 섞일 수 없는 이방인’이라는 날이 숨겨져 있었다.눈치 없는 친구 하나가 껄껄 웃으며 받아쳤다."야, 수현이 너 분위기 파악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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