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사랑받던 꽃으로 피어났던 여자를 짓밟은 남편, 하지만 꺽인 꽃은 죽지 않았다. 더 아름답고 강하게 피어나 그에게 가장 처절한 후회를 안겨준다.
View More차갑고 하얀 침대 위, 설아는 떨리는 손을 억지로 뻗어 머리맡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간신히 집어 들었다.
언제부터 흘렸는지도 모를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며 시트를 적셨고, 열기로 달아오른 얼굴은 숨을 쉴 때마다 타는 듯이 뜨거웠다. 눈앞이 흐릿하게 흔들렸다. 손끝에 감각이 없었다. 휴대폰 화면에 뜬 이름 석 자조차 초점을 맞추기 힘들었지만, 손가락은 습관처럼 아니, 어쩌면 마지막 본능처럼 그 이름을 눌렀다.
서진 오빠.
통화 버튼을 누르자 텅 빈 신호음만 허공에 울려 퍼졌다. 한 번, 두 번. 설아는 바짝 마른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제발.
속으로 되뇌었지만 입 밖으로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그에게 제발 이라는 말조차 꺼내기 두려워진 게.
다시 한 번 버튼을 눌렀을 때, 기다렸던 목소리 대신 수화기 너머로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어딘가 떠들썩한 곳.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전화를 건 건 그래도 혹시, 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말해."
짧고 건조한 한마디. 반가움도, 걱정도, 심지어 형식적인 안부조차 담기지 않은 목소리였다. 술자리 소음 속에서도 그 냉랭함은 선명하게 전해졌다.
설아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꾹 눌러 삼키며, 몸 어딘가 마지막으로 남아 있을 힘을 끌어모아 간신히 입을 열었다.
"오빠… 저 몸이 너무 안 좋아요. 지금 와줄 수 있어요?“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와줘요.'
말하지 못한 말들이 목 안에서 뭉쳤다.
잠깐의 침묵.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침묵은 설아에게 이미 답이었다. 기대하지 말았어야 했다. 알면서도 전화를 건 자신이 어리석었다.
"지금은 좀 바빠. 사람 보낼게.“
한숨조차 섞이지 않은, 깔끔하게 잘라낸 말투였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툭, 아무렇지 않게, 너무나 익숙하게 전화가 끊겼다.
설아는 멍하니 어두워진 화면을 바라보았다. 뭔가를 더 말하려 했는지, 입이 아직 반쯤 열려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나올 말도, 흘릴 눈물도, 남은 힘도 없었다.
사람을 보낸다고.
3년 전이었다면 울었을 것이다. 2년 전이었다면 화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설아는 그저 공허했다. 가슴 한가운데가 텅 빈 것처럼, 아프지도 않았다. 이미 너무 많이 익숙해진 탓이었다.
손가락에 힘이 천천히 풀리며 휴대폰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둔탁한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울렸다. 그리고 설아도, 그 작은 소리를 끝으로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3년 전.
설아는 누가 봐도 빛나는 사람이었다.
경영학과 새내기였던 그때, 설아는 캠퍼스 안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 전공 수업 첫날부터 교수의 질문에 막힘없이 답했고, 시험마다 최상위권을 놓치지 않았다.
처음 캠퍼스를 걷던 날, 설아를 본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하얗고 작은 얼굴에 또렷한 이목구비, 별다른 꾸밈이 없어도 눈길을 붙잡는 얼굴이었다. 지나가던 선배들이 괜히 말을 걸었고, 동기들은 먼저 번호를 물어왔다. 누군가는 그녀를 보며 감탄했고, 누군가는 괜스레 긴장했다.
하지만 정작 설아 본인은 몰랐다.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이 캠퍼스를 걷고 있는지 거울 앞에서도 크게 들여다보지 않았고, 예쁘다는 말에도 그냥 웃어 넘겼다.
그 시절의 설아에겐 꿈이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가고 싶은 길이 있었다.
그 길이 어긋나기 시작한 건 그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뭐가 그리 급해 이설아? 그리고 내가 분명 그 새끼랑 같이 찾아오라고 했을 텐데, 왜 혼자야? 설마 지고 너 혼자 가래?“"그런 거 아니에요……오빠.. 그 사람은 정말 아무 잘못 없잖아요…….“설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한 발짝 다가서며 애원하듯 말했다."내가…… 내가 전부 다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제발, 거래처 압박하는 것 좀 풀어줘요, 부탁이에요…….“서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강렬한 위압감을 풍기며 설아에게 다가왔다."그러게, 이설아. 왜 그까짓 되도 않는 놈을 만나서 건방지게 물이 들었어?“다가오는 서진의 기세에 설아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지만, 이내 벽에 가로막혀 갈 곳을 잃고 말았다."자…… 잘못했어요.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봐요......그러니까 제발 거래처 압박만 풀어 줘요. 시키는 거 다 할게요, 제발…….“설아의 어깨가 겁에 질려 잘게 떨리고 있었다.서진은 그런 설아를 차가운 눈빛으로 담아내더니,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거칠게 움켜잡아 제 얼굴 가까이 끌어당겼다. 수치심과 공포로 볼이 붉게 달아오른 설아에게서 아슬아슬하고 매혹적인 아우라가 피어올랐다.서진의 입술이 숨결이 닿을 듯 바짝 다가오자, 설아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피하려 했다. 하지만 서진은 목덜미를 쥐고 있던 손에 악력을 더해 고개를 고정시킨 뒤, 그대로 매섭고 거칠게
멍하니 수화기를 내리던 설아의 머릿속에 유서진이 자신에게 협박처럼 말하던 말들이 스쳐 지나갔다.'유서진…….'“이런 쥐구멍만한 회사 하나쯤은 내 손가락 하나로도 업계에서 매장시킬 수 있어.”귓가를 찌르듯 울리는 서진의 차가운 협박의 음성들과, 어제 관리 숍에서 마주쳤던 서진의 어머니 그리고 수현과의 마찰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자신한테 굴복하지 않은 대가, 그리고 박수현과 자신의 어머니를 감히 거스른 대가를 이렇게 치르게 만들겠다는 건가…….‘설아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비상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묵직한 철문을 열고 들어선 조용한 비상구 계단, 설아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다시는 누를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유서진의 전화번호를 찾아 클릭했다.신호음이 불과 몇 번 울리지도 않아, 수화기 너머로 기다렸다는 듯 서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이설아. 생각보다 반응이 빠르네?]"……설마, 지금 벌어진 이 일들…… 전부 오빠가 한 짓이에요?“[내가 분명 경고했었지, 그딴 작고 보잘것없는 회사 하나쯤 날려 버리는 건 나한테 일도 아니라고.]"도대체……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에요, 대체 왜!.....“결국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온 설아는 울먹거림이 섞인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을 이어갔다."내가 전부 다 그만둘게요…… 내가 회사 나갈 테니까, 제발 '이음'은 건들지 말아 줘요. 제발…….“수화기 너머로 낮고 차가운 서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그러게 왜 둘 다 내 앞에서 건방을 떨어? 이설아 넌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조용히 살았으면 아무 일도 없었잖아. 누구 마음대로 감히 다른 놈을 만나?]"내가 다 잘못했어요…… 전부 내 잘못이니까 제발 회사는 건들지 말아 줘요, 부탁 할게요…….“설아는 자존심도 모두 내려놓은 채 서진에게 빌다시피 애원했다.[그 회사를 어떻게든 살려보고 싶다면, 오늘 저녁에 강윤 그 새끼랑 같이 내 회사로 찾아와. 둘이 내 눈앞에서 무릎이라도 꿇고 제대로 빌면, 거래처 건은 생각은 해볼 테니까
강윤의 문자를 확인한 설아는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대표실로 향했다."대표님, 무슨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설아가 묻자, 강윤은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아뇨, 설아 씨가 쉬지도 않고 일만 하는 것 같아서요. 좀 쉬엄쉬엄해요. 그나저나…… 어제 받았던 관리는 어땠어요?"강윤의 물음에, 어제는 하도 경황이 없어 미처 물어보지 못했던 사실이 떠오른 설아가 살짝 투정 어린 투로 말을 이어갔다."맞다…… 대표님, 왜 저한테 거짓말하셨어요? 저한테는 선물 받았다고 하셨으면서 그 관리숍 대표님이 강윤 씨 사촌 누나라면서요?“강윤은 난감하다는 듯 긁적이며 픽 웃음을 터뜨렸다."아, 참…… 누나한테 절대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했는데 그새 다 말해버렸어요?“이내 강윤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번졌다. 그는 한 걸음 다가서며 말을 이어갔다."근데 이왕 이렇게 알게 된 거 잘됐네요. 사실 그 누나가 평소에 저를 얼마나 부려 먹는지, 저한테 신세 진 게 아주 산더미거든요. 이번에 저도 '누나 찬스' 한번 제대로 쓴 것뿐이니까 설아 씨는 전혀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앞으로도 그냥 편하게 이용하면 돼요.“장난스레 눈을 맞추던 강윤이 설아에게 가볍게 눈을 찡긋 거렸다."혹시라도 누나가 나중에 딴소리하거나 안 잘해주면 바로 저한테 말해요. 제가 제대로 혼내 줄 테니까.“자신을 배려해 선의의 거짓말까지 해가며 마음을 써 준 그의 진심이 온전히 전해져 왔다.설아는 강윤을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고마워요, 강윤 씨. 덕분에 그렇게 좋은 관리도 다 받아보고…… 늘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하고 또 고마워요.“설아의 담백한 감사 인사에 강윤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번졌다.하지만 그 따스하고 기분 좋은 감정도 오래가지 못했다. 대표실 문이 예고도 없이 노크 소리와 함께 급하게 열렸다.벌컥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온 사람은 장서인 팀장이었다."대표님!“하얗게 질린 얼굴에 거친 숨을 헐떡이는 서인의
서진은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비서를 불러 이음의 거래처 목록을 샅샅이 파악해 오라고 지시했다.강윤의 회사가 아무리 유망하다고 한들, 이제 막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곳이었다. 거래처 명단을 알아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서진은 비서가 올린 보고서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거래처 목록을 하나씩 훑어 내려갔다.그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서진은 당장 거래가 중단되었을 때 이음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핵심 업체들부터 우선순위를 매기기 시작했다.마침 목록 중에는 서진의 회사와도 오랫동안 거래를 이어오던 대형 업체들이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판이 아주 쉽게 짜이는데?.'서진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업계에서 서진의 회사가 가진 영향력과 규모는 강윤의 이음과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거대한 체급 차이를 이용해 압박을 넣는다면, 저 작은 회사 하나쯤 말려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자신에게 건방지게 굴면 어떤 꼴이 되는지, 그리고 감히 내 여자를 욕심낸 대가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알려주지.”서진은 보고서를 툭 던져 놓으며 차갑게 중얼거렸다.서진은 곧바로 자리에 앉아 인터폰을 눌러 구매담당 이사를 자신의 방으로 호출했다."대표님, 부르셨습니까?"묵직한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온 이사를 향해, 서진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이음의 거래처 내역서를 툭 던지듯 내밀었다."당장 여기 적힌 거래처들에 연락해서 이음과의 거래를 전면 중단하라고 해요."서진의 지시에 이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서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늘하게 말을 이었다."중단 사유는 입단속 확실하게 시키고, 만약 우리 요구대로 거래를 끊지 않으면 유씨그룹과의 거래도 오늘부로 끝이라고 정확하게 전하세요. 오늘 안으로 전부 연락 돌린 뒤 나한테 직접 보고하도록."갑작스러운 강경책에 이사는 난감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하지만 대표님, 아무리 그래도 업계에서 저희 유씨그룹이 특정 중소업체를 매장시키려 한다는 소문이 돌면 기업 이미지에 상당한 타격이
불도 켜지 않은 채였다. 소파에 팔짱을 낀 자세로, 굳은 얼굴로 설아를 바라보고 있었다."어디 다녀와?"낮고 날이 선 목소리였다.설아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짧게 대답했다."그냥 바람 좀 쐬고 왔어요.""병원에서 왜 퇴원했어?""아무 이상 없다길래요.“서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간호사에게 들은 말이 떠올랐다. 빈혈 수치, 면역력,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몸. 그런데 설아는 지금 아무 이상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아무 이상 없다고?""네. 걱정 안 하셔도 돼요."평소와 달랐다. 목소리에 온기가 없었다. 기대도,
기운을 차린 설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을 내려다보다가조용히 뽑아냈다.작은 통증이 왔지만 설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침대 옆에 개어두었던 자신의 옷을 집어 들고 환자복을 벗었다.손이 떨려 단추를 잠그는 것조차 생각보다 힘들었다.겨우 옷을 갈아입고 일어서는 순간,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 어지러움이 물밀듯 밀려오며 몸이 휘청였다. 설아는 침대 모서리를 붙잡고 잠시 버텼다. 숨을 고르고, 다시 섰다.그때 병실 문이 열렸다."이설아씨, 잠깐만요!"담당 간호사였다. 링거 알람이 울렸는지, 빠르게 들어온
설아는 매일 서진이 좋아하는 음식을 차렸다. 다림질한 셔츠를 옷장에 걸어두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간혹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면, 서진은 설아를 찾았다. 하지만 그건 설아를 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다정함도, 온기도 없었다. 그저 거칠고 무심한 손길이 지나가고 나면, 서진은 돌아누워 잠들었다. 설아는 천장을 바라보았다.‘이게 결혼인가.’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울면 더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일도 밥을 차리고, 셔츠를 다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루를 버텼
결혼식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화려하지 않았다. 서진의 부모는 끝까지 탐탁지 않은 표정을 감추지 않았고, 설아의 부모는 딸의 손을 잡고 눈물을 삼켰다. 그래도 서진은 설아의 곁에 있었다. 식이 끝나고 설아의 손을 잡으며 작게 말했다."잘 부탁해. 이설아“그 한마디가 설아에게는 충분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신혼 초, 서진은 누구보다 다정한 남편이었다.바쁜 와중에도 설아를 챙겼고, 서툴지만 함께 밥을 지어먹었고, 설아가 웃으면 따라 웃었다. 설아는 그 시간들이 영원할 거라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하지만 행복은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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