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소영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아뇨. 시간이 너무 짧았어요. 해성에서 별문제도 없었고… 그래서 해외 시장 확장을 이유로 외국에서 싸우다가 헤어지는 걸로 합의했죠.”“그럼 민시후도 지금 F국에 있어요?”고은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지금쯤 해외 시장 확장 중이라 엄청 바쁠걸요. 난 그런 거에 관심 없으니까 이쪽으로 남자 친구 불러서 같이 지내고 있어요, 일도 하고.”은소영이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무릎을 탁, 쳤다.“아! 시후 씨가 왜 굳이 이 먼 F국까지 오려는 건가 했더니… 고은서 씨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있어서 그랬나 보네요?”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해성에서 그날 밤, 그녀가 민시후에게 전화를 건 이후로 둘 사이에는 아무 연락도 없었다.그녀는 민시후가 F국에 왔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으니까.고은서의 표정을 살핀 은소영이 말을 이었다.“면목이 없어서 그랬을 거예요. 위험한 일을 두 번이나 겪었는데 그때마다 제때 구해주지 못했으니까.”“난… 한 번도 그를 원망한 적 없어요. 날 구할 의무도 없는걸요. 게다가… 민 도련님이 또 무슨 일을 당하게 되는 건 싫어요.”고은서의 말은 진심이었다.민시후는 그녀를 위해 충분히 많은 걸 감수해 주었고, 고은서도 더 이상 그에게 빚지고 싶지 않았다.은소영이 한숨을 쉬었다.“시후 씨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그냥 고은서 씨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너무 커서, 좋아한다는 말도 감히 꺼내지 못하는 거죠.”마침 음식이 나왔다.은소영이 고은서의 앞으로 그것을 밀어주며 먹으라 권했다.그러면서 민시후의 일을 덧붙였다.“그때 고은서 씨가 폐촌에 감금됐을 때, 시후 씨 진짜 미쳐 날뛰면서 당신을 구하러 가려고 했어요. 근데 민시현도 고은서 씨 일로 해성으로 내려왔거든요. 일부러 며칠 머물면서 상황을 지켜봤죠.”은소영의 말에 따르면, 민시후가 기억을 되찾은 사실은 민씨 가문 사람들에게 비밀이었고, 민시현도 철저하게 민시후를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따로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F국에 도착한 고은서는 먼저 맹가연과 여재훈이 처음 만난 꽃밭 근처에서 며칠간 머물렀다.이후 F국의 유명한 관광지를 하나씩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다.풍경은 아름다웠지만 고은서는 마치 감정을 잃은 사람처럼, 어디를 가든 그저 앉을 자리를 찾아 그곳에 조용히 몇 시간 동안 앉아 있곤 했다.감정이 전부 증발해 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녀를 바쁘게 만들기 위해 여재훈이 운영하는 여진 그룹의 해외 지사에 들어가 업무를 인수받았다.낯선 환경인 만큼 배워야 할 것도, 만나야 할 사람도 많았다.그래서 하루하루가 바쁘고 정신없었고, 덕분에 쓸데없는 생각에 빠질 시간도 거의 없었다.또 한 달이 지나고.고은서는 휴일을 맞아 근처의 중식당을 찾았다.허기를 채우기 위해 간단히 뭔가를 먹으려던 참이었다.막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그곳에서 익숙한 사람의 뒷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은소영이었다.그녀는 콧대가 오뚝하고 피부가 하얀 잘생긴 외국 남자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고, 둘은 웃으며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고은서는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은소영은 지금쯤 민시후와 북성에 함께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왜 여기 있는 거지? 민시후는 어쩌고?’고은서의 강렬한 시선을 느낀 은소영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고은서를 발견한 은소영의 얼굴에 놀라움과 반가움의 빛이 어려 있었다.“고은서 씨! 여기서 뵙다니 정말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이리로 와서 같이 먹어요!”‘타지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니 반갑긴 하지만…’은소영의 곁에 앉은 남자를 힐끔 쳐다본 고은서가 정중히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다음에 따로 뵙죠.”“괜찮아요, 괜찮아!”곁의 남자에게 무어라 말한 은소영은 결국 남자를 다른 테이블로 보내 버렸다.“자, 이제 됐죠?”“...”고은서가 마지못해 은소영의 앞에 앉았다.은소영은 무척이나 반가워하며 고은서에게 여러 메뉴를 추천해 주었다.이 식당에 몇 번 와봤는데 맛이 꽤 괜찮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고은서는 음식을 주문한 뒤에도 자
송민준을 송씨 가문으로 돌려보내기 전,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기억해, 민준아. 넌 이제 송 씨야. 네 엄마도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날 모른 척해야 하고, 인사도 하면 안 돼. 다른 사람이 물어봐도 절대 인정하지 말고, 알겠어? 새집으로 가면 너도 낯설고, 불편할 거라는 거, 엄마도 알아. 하지만 엄마가 그동안 고생한 건 전부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많은 고통을 감수해 왔다고. 그러니 엄마를 원망하면 안 돼, 알겠니?”어린 송민준은 울지도, 떼를 쓰지도 않았다.그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숙였다.“…”그 이야기를 들은 고은서는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그건 오빠 잘못이 아니야.”송민준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엄마는 나 때문에 교환학생 기회도, 해외 파견 기회도 잃었어. 날 찾으러 갔다가 교통사고로 두 달 동안 치료를 받았고… 그 후유증은 아직도 남아 있어. 그리고 전씨 가문 사람들도 나 때문에 엄마를 못살게 굴었고.”고은서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어려서부터 그런 식으로 세뇌당해서인지 송민준의 죄책감은 이미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어릴 적 병원에서 너희 엄마를 본 적이 있어. 아주 예쁘셨고 내게 장난감도 많이 사 주셨었지. 하지만 난 그분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어.”송민준은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그분이 엄마의 F국 파견을 추천했다고 들었거든. 그리고 난… 엄마가 날 데리고 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고은서는 순간 과거 송민준을 처음 만났을 때 남자의 차가운 눈빛을 떠올렸다.“그래서 예전부터 날 그렇게 싫어했던 거야? 우리 엄마 때문에?”송민준은 부정하지 않았다.“네 엄마가 우리 엄마의 친구가 아니었다면, 그녀가 엄마의 F국 파견을 추천하지만 않았다면 엄마는 날 버리지 않았을 거라고 수도 없이 생각했어. 물론… 말이 안 되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었어. 당시의 난 원망의 대상이 필요했거든.”잠시 침묵하던 고은서가 물었다.“오빤 그걸 알면서도 전혜라 씨를 도
병실로 들어선 고은서는 조용히 병상에 누워 있는 송민준을 발견할 수 있었다.남자의 몸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붕대가 남아 있었고, 표정은 다소 냉담했으며 전반적으로 많이 수척해 보였다.“상처는 좀 어때?”고은서가 물었다.그녀를 발견한 송민준의 눈빛이 미세하게 일렁였다.그가 대답 대신 물었다.“네가 여긴 어떻게…”고은서가 의자에 앉으며 솔직하게 대답했다.“오빠 어머님이 오빠가 조사에 협조를 안 한다고, 나더러 설득하라고 하셨거든.”“그래?”송민준의 눈에 순간 실망감이 스쳤다.그는 고은서가 왜 전혜라의 말대로 움직이는지에 대해 묻지 않았다.“오빠 어머님 말씀으로는, 모든 일은 자기가 주도한 거고 오빠는 그저 그걸 도운 것뿐이래. 그러니 그 사실을 경찰에게 솔직하게 말하라고 하셨어.”그 말을 들은 송민준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미세한 감정 표현조차 없었다.송민준의 대답을 기다리던 고은서가 말을 이었다.“오빠 어머니랑은 어제 만났어. 엄마랑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물어봤고… 우리 엄마가 자기 행복을 빼앗아 갔대. 그래서 미워하는 거래. 민준 오빠는 그게 우리 엄마 잘못이라고 생각해?”송민준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오빠도 알고 있잖아. 그건 우리 엄마 잘못이 아니야. 우리 엄마는 오빠네 엄마 때문에 오히려 자기 행복을 포기했어. 그래서 난 아빠 없이 태어났고, 엄마는 우울증에 시달리다 결국 세상을 떠났지. 그런데 오빠는 왜 그 여자 편에서 우리 가족을 해치려고 했던 거야? 오빠의 존재가 그 여자한테 짐이 된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무조건 그 말을 따랐던 거야?”고은서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송민준은 더 이상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목소리에서도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릴 때 자다가 깨는 일이 잦았어. 그때마다 엄마는 창밖을 보며 울고 있었지. 너무 걱정돼서 왜 그러냐고 물으면 버티기 힘들다는 말만 반복하셨어. 하지만 또 그냥 포기할 순 없다고, 사랑을 좇았을 뿐인
여씨 가문은 탄탄한 재력과 함께, 윗세대에는 정계까지 꽉 잡고 있는 집안이었다.그런 가문에서 재산을 빼앗아 오려면 정면 승부로는 절대 불가능했다.전혜라는 그녀와 송민준의 사이를 들키고 싶지 않아 했다.그 사실이 밝혀지면 여재훈에게 의심을 살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그녀는 송민준과 여시은의 혼인 계획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그리고 손문호라는 사람도 있었다.전혜라가 그를 찾아갔을 때, 여진 그룹을 손에 넣은 뒤 남자가 회사를 맡아 경영하기로 약속했다.두 사람이 원하는 건 재산과 지분뿐이었으니 대화가 쉬웠다.전혜라는 송민준에게 아무도 의심하지 못할, 치밀하고 정교한 계획을 세우도록 했다…“다 민준이가 당신한테 홀려서… 계획이 틀어지지만 않았어도 우린 성공했을 텐데!!!”전혜라가 이를 갈며 말했다.“X국에서 당신을 납치할 때도, 민준이는 꼭 당신과 같이 납치당해야겠다며 계획을 틀어버렸어요. 당신은 다친 데 없이 멀쩡하게 빠져나왔지만 그 애는 보름이나 병원에 누워 있어야 했죠. 그날 음식점에서 약에 취했을 때… 금방이라도 당신의 치부를 세상에 퍼뜨릴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 애는 굳이 사진이니 영상이니를 남기려고 하다가 당신과 결혼할 기회까지 놓쳐버렸죠… 그리고 당신 외할아버지, 내가 사람을 보내 수소문하겠다고 할 때마다 자기가 찾아보겠다고 하더니… 그것도 결국 다 거짓말이었어요!!! 민준이는 그 늙은이가 당신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었어요. 애초에 손댈 생각조차 없었죠!”전혜라가 고은서와 시선을 마주하며 말을 덧붙였다.“예전에 시은이에게서 민준이가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나도 믿지 않았어요. 그 애는 연애 같은 데 시간을 낭비할 애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내가 그 애를 과대평가한 거였죠. 난 민준이를 믿었어요. 그 애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결국 또 날 배신했죠. 당신과 맹가연은 왜 그렇게 남자들 마음을 홀리고 다니는지!!!”마지막은 거의 고함에 가까웠다.옆에 있던 경찰이 주의를 줄 정도였다.고은서
그 뒤의 일을 여재훈에게서 전해 들은 고은서는 사건의 전말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상태였다.“그럼 예전에 나한테 아빠 약혼녀라고 했던 여자는... 그것도 당신이 시킨 거였어요?”고은서가 문득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물었다.“그럴 리가요. 그 여자가 먼저 맹가연을 찾아간 거예요. 좀 불편한 얘기긴 하지만… 내가 시키지 않아도 가연이라면 충분히 그 상황을 각오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만약 가연이가 정말 여재훈이랑 결혼했다면 더한 일도 많이 겪었을 거예요.”전혜라의 말이 아니꼬웠던 고은서가 비아냥거렸다.“하. 우리 엄마는 피해자일 뿐이에요. 아빠도 맺고 끊음이 확실한 분이시고요. 그리고 우리 엄마는 절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전혜라 씨를 믿었기 때문에, 당신을 친구로 생각했기 때문에 아빠랑 헤어진 거라고요.”전혜라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과거, 맹가연은 떠나지 말라는 여재훈의 애원에 흔들린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때, 전혜라가 그녀에게 여재훈이 북성 지사를 방문했을 때, 그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여재훈이 취한 틈을 타 그의 침실에 몰래 들어갔다고 말했다.맹가연이 충격에 빠진 순간, 전혜라는 여재훈의 허벅지 안쪽에 있던 점의 모양까지 자세히 설명해 그녀더러 두 사람 사이에 발생한 잠자리를 믿게 만들었다.전혜라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오열하며 맹가연더러 여재훈을 자신에게 넘겨 달라고 부탁했다.사실 전혜라는 정말로 여재훈의 방에 들어간 적이 있긴 했다.핑계 덕분이긴 했지만 들어간 적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그리고 그녀가 알고 있는 점의 위치는 과거 여재훈을 돌보던 유모에게서 우연히 들은 것이었다.당시의 맹가연은 전혜라의 말이 거짓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결국 친구와 같은 남자를 공유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던 그녀는 여재훈과의 이별을 결심했다.“엄마는 아빠를 벗어나기 위해 첫사랑을 끌어들인 건 물론이고, 죽음까지 연기해야 했어요! 그렇게까지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엄마의 가족에게까지 상처를 줄 수 있는 거죠?”분노를 참지 못한 고은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