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시은은 고급 맞춤 제작인 샤넬 원피스를 입고 귀여운 클러치 백을 든 채, 얼굴엔 여전히 달콤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다가왔다.그녀가 무표정으로 쿠아를 찌르던 장면이 떠오르자 고은서의 가슴속에서 다시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아빠.”여시은이 여재훈을 부르고 나서 이내 고은서를 바라보았다. “은서 씨도 계셨네요.”전날의 일로 마음이 편치 않은 듯 그녀의 말투엔 평소의 친근함이 사라지고 호칭도 서먹한 ‘은서 씨’로 돌아왔다.가식적인 친절을 가장하는 여시은보다 이렇게 냉정한 모습이 오히려 고은서에겐 더 나았다. 적어도 속이 덜 뒤집혔으니까.“시은아, 지금 은서 씨와 다 설명했어. 네가 쿠아를 정말로 아껴서 절대 일부러 다치게 한 게 아니라고.”여재훈이 말을 이었다. “너희가 다툰 건 분명 네 탓이 더 많을 테니 네가 은서 씨에게 사과해.”여시은은 입술을 삐죽이며 반박했다. “아빠, 제가 팔꿈치도 다쳤는데 그래도 제 잘못이 더 커요?”여재훈이 꾸짖듯 말했다. “은서 씨가 얼마나 차분하고 예의 바른 분인데, 네가 화나게 만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있을 리가 없잖니?”“시은아, 네가 해성에서 친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어. 네가 항상 아빠한테 은서 씨를 좋아한다고 말했잖아. 그래서 오늘 이 자리도 특별히 마련한 거야.”여재훈이 달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소한 일로 불편한 관계가 되면 안 되지. 사과만 하면 이 일은 지나가.”여시은은 마치 설득당한 듯 고은서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말했다. “은서야, 미안해. 화 풀어줄 수 있겠니?”고은서는 여시은과 연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전날 사건에 곽 회장이 개입했다는 게 확인됐다. 본인은 상관없었지만 곽 회장이 다시 고씨 집안을 겨냥할까 봐 그게 두려웠다. 게다가 여재훈이 직접 만나 중재를 시도한 것만 해도 이미 양보한 거나 다름없었다. 설사 지금 여시은과 대립해도 여시은은 전혀 피해 볼게 없었다.겉보기에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적어도 여재훈에게는 좋은 인상을 남길
여시은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물론이지!”카페를 나온 고은서는 마음속 답답함을 털어내려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여시은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거부감을 느꼈다. 하지만 여시은의 배경이 워낙 큰지라 당장 대항하기 어려웠다.고민 끝에 고은서는 KK에게 전화를 걸어 여시은의 요 며칠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달라고 부탁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차로 향하던 그녀는 앞쪽에서 곽승재가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발견했다.여재훈이 전날 곽승재도 경찰서에 갔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불러들인 걸까?딸의 일에 여재훈은 여간 신경 쓰는 게 아니었다. 고은서가 멍때릴 때 곽승재도 그녀를 발견했다.한 걸음 머뭇거리던 곽승재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그녀의 냉담함을 떠올리고는 아무 말 없이 카페로 향했다.운전기사가 대기 중이었던 차에 몸을 실은 고은서는 카페 창문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의젓한 자태의 곽승재가 예의 바르게 여재훈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고, 그 옆에서 여시은이 달콤하게 속삭이는 모습이 보였다. 각도로 인해 곽승재의 표정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여재훈의 만족스러운 미소는 선명하게 보였다.여재훈은 자신의 미래 사윗감에 대해 아주 만족해하고 있었다....박지연은 고은서와 여시은이 경찰서까지 갔다는 소식을 듣고 유일로 직접 찾아왔다.“이런 큰일을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 박지연이 물었다. “어떻게 현석이에서 듣게 해.”고은서가 대답했다. “크게 문제 되지 않았고 이미 해결됐어.”“경찰서까지 간 게 큰 문제가 아니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빨리 말해봐!”고은서는 공원에서 있었던 일을 사실 그대로 박지연에게 설명했다.박지연은 듣자마자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시은 씨가 진짜 네 앞에서 고양이를 학대했어?”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뿐만이 아니야. 지난번 쿠아가 건물에서 떨어진 것도 그녀가 한 짓이야. 그래서 쿠아가 볼 때마다 여시은을 두려워하는 눈치더라고.”“그 여자 정말 변태야!”박지연이 분노를 표출하며 말했다. “여씨 가문도 대
고은서는 박지연이 깜짝 놀라는 소리에 덩달아 소스라치게 놀랐다.“뭘 알아냈는데 이렇게 놀라는 거야?”박지연이 다급히 대답했다.“여시은이 대놓고 너를 겨냥하는 건 어쩌면 곽승재 때문만이 아니라 여 대표님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고은서는 잔뜩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는 박지연을 쳐다봤다.“잘 생각해봐. 여시은은 자기보다 뛰어나고 능력 있는 네가 여 대표님 관심까지 한 몸에 받으니까 못마땅한 거야.”박지연은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말을 이어갔다.“여시은은 너한테 불리한 일들을 계속 꾸며서 네 이미지를 망치고 싶은 거야. 그러면 여 대표님도 너를 싫어하게 되겠지. 여시은이 제일 바라는 건 아마 여 대표님 앞에서 네 이름을 거론만 해도 대표님이 질색하는 거일 거야!”고은서는 여시은이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여 대표님은 여시은의 아버지야. 여시은을 끔찍이 사랑하고 여시은이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해주는 그런 사람이란 말이야. 여 대표님은 그냥 날 아끼는 후배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을 테고 그런 마음에서 나한테 더 잘해주는 거라고 해도 어떻게 딸을 대하는 태도랑 비교하겠어. 여시은이 고작 이런 거로 날 못살게 군다는 건 좀 억지 아닌가?”박지연은 머리를 긁적이며 고은서의 말도 도리가 있다고 생각했다.“그럼 설마 네가 자기보다 예뻐서?”“... 특별한 게 떠오르지 않으면 억지로 생각해내지 않아도 돼.”“억지로 생각해내다니! 여자의 질투심만큼 무서운 게 또 어디 있다고 그래. 곽승재랑 여 대표님은 모두 너한테 친절하고 게다가 자기보다 예쁜데 질투가 안 나는 게 더 어렵지. 아마 생각하면 할수록 분해서 널 제대로 밟아버리고 싶을 거란 말이야!”“...”고은서는 어이가 없어 잠깐 말을 잃었다.“너 현석 씨랑 같이 있더니 쓸데없는 상상만 늘어난 것 같아.”“이게 왜 쓸데없는 상상이야. 여시은이 여태 널 물고 질척거리면서 놓아주지 않는 이유는 딱 두 가지야. 네가 의도치 않게 여시은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너한테 복수를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늘 규칙적이던 생리가 이번 달은 불규칙해졌다. 일주일이나 늦춰진 건 둘째치고 여태 한 번도 아픈 적 없었던 아랫배가 아프기 시작했다.몸에 이상이 있는 걸 눈치챈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고은서는 죽다 살아난 경험을 한 뒤로 자연스레 건강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결국 고은서는 가방을 챙겨 나와 차에 타서 기사에게 근처의 산부인과로 가달라고 말했다.아랫배가 자꾸 은근하게 아파 고은서는 가는 내내 손으로 아랫배를 어루만졌다.차에서 내렸을 때 코를 쿡 찌르는 과일 썩은 냄새에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고은서는 병원에 들어가서 재빨리 진료 접수를 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산부인과 층이라 그런지 역시 여성들이 줄을 길게 서 있었다.진료 접수도 했겠다, 고은서는 그저 복도에 앉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생각처럼 빠르지 않은 진료 속도에 조금 답답해진 고은서는 사람이 적은 앞쪽으로 가서야 조금이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서는 복도에 소음이 아까보다 커진 것을 느꼈고 그 속에서 여자들의 “잘생겼다”, “키 엄청 크네”와 같은 감탄 소리도 들었다.산부인과에도 남자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같이 온 가족들이었다.‘남자도 같이 온 가족이 있을 텐데 저렇게 대놓고 감상을 해도 되는 거야?’고은서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대체 남자가 얼마나 잘생겼길래 산부인과에서 여자들의 환호 소리가 들려오는지 보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고은서가 금방 몸을 돌렸을 때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가 고은서의 앞에 나타났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곽승재였다.곽승재의 뒤를 따른 건 사복을 입은 체격이 우람한 남자 두 명이었다.고은서는 잠깐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잔뜩 어리둥절해 있었다. 고은서의 환각이 아니라면 곽승재가 정말 산부인과에 나타난 것이다.“따라와!”곽승재는 고은서가 반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 많은 사람의 시선 속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고은서를 비상계단으로 데려갔다.“왜 이러는 거야, 곽승재. 왜 또 멋대로
그날 밤의 기억을 떠올린 고은서는 부끄러움과 짜증이 동시에 밀려와 이를 꽉 깨물고 곽승재에게 말했다.“곽승재, 넌 진짜 나쁜 놈이야!”고은서는 곽승재 몰래 계략을 꾸민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지만 곽승재는 애초에 고은서가 놓은 덫에 걸린 적이 없었다.곽승재가 찾아간 방은 고은서의 방이었기 때문이다.사실 고은서는 깼을 때 곽승재이진 않았을까에 대해 의심을 했었다.하지만 곽승재가 고은서가 놓은 덫에 걸려 잔뜩 분해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모자라 가시 돋친 말을 퍼붓고 그대로 돌아섰기에 고은서도 더는 의심을 하지 않았었다.그 이후에도 마음속에 이 일을 더 담아두지 않았고 굳이 곽승재를 찾아가 사실확인을 하지도 않았다.그렇게 고은서는 그저 꿈이라고 여겼다.반면 곽승재는 고은서의 태도에서 부끄러움과 짜증만 보아냈을 뿐, 아이를 지우는 것에 대한 슬픈 기색은 눈곱만큼도 보아내지 못했다.곽승재는 여전히 의심이 채 가시지 않은 말투로 고은서에게 물었다.“아이를 지우러 병원에 온 게 아니야?”고은서는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치다가 막 곽승재에게 말하려던 참에 밖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드디어 고은서의 진료 순서가 온 것이었다.고은서는 곽승재를 무시하고 비상계단 출입구의 문을 열었다.곽승재를 따라온 남자들이 문을 지키고 있었고 잔뜩 진지한 태도로 궁금해서 기웃대는 사람들을 제지하고 있었다.그리고 고은서를 발견하자 재빨리 그중 한 사람이 곽승재와 눈빛을 주고받는 걸로 보아 곽승재의 지시를 받은 것 같았다. 지시를 확인한 남자는 공손하게 고은서에게 길을 내주었다.고은서는 본의 아니게 모든 사람의 추측과 호기심으로 가득 찬 시선을 한몸에 받았지만 아무런 표정의 동요도 없이 진료실로 들어갔다.의사가 고은서의 개인 정보를 확인하는 동안 곽승재도 따라 들어왔다.워낙 별 상황을 다 겪어본 의사는 갑자기 문을 박차고 들어온 곽승재에도 딱히 곽승재의 외모에 감탄하는 기색은 없었고 그저 한번 흘기고 말았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고은서에게 물었다.“가
고은서는 곽승재를 힐끔 보고는 의사에게 물었다.“이 사람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이 사람은 제가 약을 먹었는지 모르거든요.”의사는 환자의 태도에 화가 나 다시 고은서를 꾸짖으려고 했으나 곽승재에 의해 제지당했다.“모두 제 잘못이니까 이 사람에게 뭐라고 하지 말아주세요.”“두 분 다 잘못이 있어요!”곽승재가 잘못을 승인한 것을 들은 의사는 여태 고은서가 곽승재를 감싸주고 있었던 거로 오해해 더 화가 났다.“아직 젊은 사람들이 오직 한순간의 쾌락을 위해서 아무런 조치도 없이 자기 몸을 함부로 굴린다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요? 원래도 몸이 허약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그렇게 멋도 모르고 무작정 약을 먹었다간 언제 몸이 망가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요!”고은서도 자신이 너무 무지했다는 생각이 들어 재차 의사에게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는 그런 무모한 일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말했다.고은서의 현재 상황에 맞는 약효가 빠른 약이 없었기에 오로지 몸조리를 통해 천천히 컨디션을 회복하는 방법밖에 없었다.의사는 고은서에게 약을 처방해주었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거듭 강조하고 나서야 진료가 끝났다.고은서는 의사에게 인사를 하고 의자에서 일어나는 순간 아랫배가 다시 아파져 왔지만 감히 티를 낼 수 없었다.고은서는 아픔을 참고 걸어 나갈 생각이었지만 곽승재가 그런 고은서를 순식간에 번쩍 안아 올렸다.“함부로 움직이지 마.”고은서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곽승재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문밖에는 아직 기웃거리며 상황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와 병원에서 다툴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싫어서 아예 가방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고 곽승재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진료실에서부터 엘리베이터까지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기에 곽승재는 고은서를 안고 곧바로 엘리베이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은서는 엘리베이터에 타서 내려달라고 하려고 했으나 곽승재는 여전히 고은서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고 덤으로 작게 경고까지 했다.“엘리베이터
말을 마친 고은서는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고은서가 도아름과 박지연을 요가원에서 만났을 때도, 레스토랑에서 송민준과 밥을 먹고 있을 때도, 팔에 화상을 입어서 주인혁이 함께 병원에 가줬을 때도, 지인들과 농장에 갔을 때도... 고은서는 모두 우연히 곽승재와 마재경을 만났었다.결국 그 모든 우연은 진짜 우연이 아니었고 곽승재가 고은서의 뒤를 밟아 우연으로 위장한 계획된 만남에 불과했다.고은서의 질문에도 경호원은 그저 침묵을 유지하며 운전에만 몰두했다. 그 와중에도 눈치가 빨라서 재빨리 뒷좌석의 칸막이 버튼을 눌러 둘만의 대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차갑기 그지없는 고은서의 얼굴을 발견한 곽승재는 팔을 뻗어 고은서를 자신의 다리 위에 앉혔다.“은서야, 난 일부러 사람을 시켜서 너의 뒤를 밟게 한 게 아니라 네 안전이 걱정돼서 그런 거야.”곽승재의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의 걱정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곽승재는 더는 억누르고 있기 싫었던 모양인지 고은서에게 이마를 맞대고는 작게 속삭였다.“네가 뒤풀이를 하던 날 밤, 내가 출장을 간 바람에 부하더러 널 지켜주라고 했는데 그것마저 제대로 못 해줘서 하마터면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날 뻔했잖아. 난 지금까지도 계속 그걸 후회하고 있어.”고은서는 그날 밤 송민준이 자신을 집에 데려다준 후에 이미숙에게서 곽승재가 자신에게 연락이 닿지 않아 미치기 일보 직전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곽승재는 그날 밤 고은서에게 예상치 못할 사고가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고은서는 피부로 느껴지는 곽승재의 체온과 자신을 감싸 안은 단단한 팔이 묘하게 불편했다.결국 고은서는 고개를 옆으로 빼며 말했다.“이거 좀 놔줘. 할 말이 있으면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니야.”곽승재는 고은서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한참 동안 고은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결국에는 고은서를 놓아주었다.다시 좌석에 앉은 고은서가 말했다.“내 안전이 걱정돼서 그랬다고 했지. 그럼 내가 안전하지 못할 건 또 뭐가 있는데?”곽승재는 고
“그동안 마재경과의 스캔들은 내가 의도적으로 유포한 거고 다 거짓이야.”곽승재가 이어서 말했다.일부러 짜고 친 판일 것이라는 예측은 박지연도 진작에 했었다.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코웃음을 쳤다.“모두 다 거짓이라고 하기는 힘들 것 같던데. 마재경이 네 손을 잡고 너한테 애교를 부리는 모습을 봐서는 너에 대한 감정이 거짓이 아닌 것 같았거든.”고은서의 말을 들은 곽승재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안광이 돌았다.“은서야 너 지금 마재경이 신경 쓰이는 거야?”고은서가 반문했다.“네 생각엔 내가 신경 쓸 것 같아?”곽승재의 안광이 다시 어두워지더니 일부 행동들은 마재경에게 일부러 시킨 것이라고 털어놓았다.비록 곽승재는 눈치를 못 챘겠지만 고은서는 마재경이 곽승재에게 진짜로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마재경이 곽승재에게 애교를 부리고 살갑게 굴었던 것이 얼마나 진실한 것인지를 따지기 전에 마재경이 고은서를 볼 때마다 얼굴에 다 드러나던 질투와 원망만은 절대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곽승재 너 솔직히 말해봐. 마재경을 이 큰 판에 끌어들여서 연기하게 만든 게 오로지 나한테 당한 걸 갚아주기 위해서야?”고은서가 곽승재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곽승재는 잠깐 난처해하더니 이내 대답했다.“네가 질투를 하고 화를 내길 바란 건 사실이야.”곽승재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라이트문 아파트에 집을 산 건 단지 고은서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지내고 싶어서 그런 것이었고 처음부터 마재경을 그 집에 들일 생각은 없었다고 말이다.곽승재는 그날 밤 마재경이 라이트문 아파트에 가서 자신을 기다린 것도 자기가 시킨 것이라고 했다.왜냐하면 곽승재는 고은서가 주인혁의 일 때문에 송민준을 찾아간 것을 알고 기분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그 한마디를 입 밖으로 뱉어버렸다.“유치하긴.”“유치하고 웃긴 건 나도 인정해.”곽승재는 민망한 듯 자신의 유치함을 인정해버렸다.곽승재는 온갖 방법을 다 써가며 고은서의 마음속에 아직도 자신이 남아 있다는
고은서가 누가 사주했는지 밝히면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마재경은 아직 경찰서를 떠날 수 없었다.경찰 조사에 협조해야 했고, 명확한 결론이 나온 후에야 책임 감경 가능성을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곽승재는 변호사를 불러 진전 상황을 체크하도록 했다. 나머지 일은 경찰에 맡기고 그들은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한바탕 분주히 보낸 후, 곽승재가 변호사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고은서가 먼저 밖으로 나왔다.정문에 도착한 고은서는 마침 경찰서에 온 여시은과 마주쳤다.그녀는 이전과 같은 실내복 차림에 창백한 얼굴로, 집사처럼 보이는 중년 남성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그녀는 고은서를 발견한 순간 분노를 쏟아냈다.“고은서, 아빠를 다치게 한 것도 책임을 묻지 않았는데, 오히려 나를 모함해?”“허튼소리로 아빠를 현혹시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만들다니!”고은서는 살짝 놀랐다. 물론 여시은의 발악이 아니라 여재훈의 처사 때문이었다.그녀가 마재경의 말을 녹음해 여재훈에게 보내긴 했지만, 여재훈이 직접 여시은을 경찰서에 보낼 만큼 정의로운 선택을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약간의 존경심이 생겼다.외할아버지라면 이런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고은서, 이번 이간질은 너무 지나쳤어.”여시은이 억울하다는 듯 울분을 토했다.“지난번 리셉션에서도 일부러 나를 모함하고. 대체 무슨 심보야?”이 순간까지도 억울한 척하는 여시은, 그녀를 바라보던 고은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없이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잠깐만.”여시은은 곁에 있던 중년 남자에게 뭐라고 말한 뒤, 헐떡이며 고은서를 쫓아왔다.“똑바로 말해봐. 나한테 왜 이러는지?”여시은은 병이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라 가슴을 움켜잡고 있는 모습이 더 연약하고 무력해 보였다.고은서는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매일 이러면 지치지도 않아? 머리에 문제가 있으면 정신과에 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아. 여기서 미친 사람처럼 사실을 왜곡하지 말고.”여시은은 여전히 가슴을
이전에는 여시은이 이렇게 억울해하고 화를 내면 쫓아가서 좋은 말로 달랬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치 온몸의 기운이 빠진 듯 소파에 지친 몸을 던졌다.팔뚝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말을 잘 듣고 사랑스럽던 딸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순진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던 아이가, 먹고 노는 것이 가장 큰 취미였던 아이가 어쩌다 이렇게 잔인한 일을 벌였을까?잠시 후, 여시은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어디 가려고?”여재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여시은은 서운하고 답답하고 슬픈 표정이었다.“남의 말 한두 마디로 저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는데, 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을 의미가 없잖아요. 전혜라 아줌마를 찾아갈 거예요.”여재훈은 여전히 실망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어디도 갈 수 없어. 내가 널 경찰서로 보낼 거니까.”“아빠, 그게...”여시은은 또 한 번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심지어 몸도 휘청였다.“남의 이간질에 넘어가 저를 의심하는 것도 모자라 직접 경찰서로 보내시겠다고요?”갈라진 목소리, 붉어진 눈시울, 떨리는 입술, 누가 봐도 연약하고 불쌍해 보이는 모습이었다.여재훈은 마음이 약해질까 봐 눈을 감았다.“시은아,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는 게 마땅해.”여시은은 캐리어 손잡이를 꽉 잡고 서 있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쓰러지기라도 할 것처럼.“아빠, 저는 고은서를 습격하라고 사주한 적 없어요. 정말 제가 한 일이 아니라고요. 제발 믿어주시면 안 돼요?”여재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여시은을 외면했다.“나는 증거를 믿어. 네가 아니라면 경찰은 죄 없는 사람을 잡아두지 않을 거야.”“그냥 저를 겁주는 거죠? 사실은 저를 믿는 거 맞죠?”여시은은 그 자리에 선 채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아니에요. 요 며칠 집에만 있었고 어디도 가지 않았어요.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증인이 될 수 있어요...”여재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
음성 파일을 여니 울먹이는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말할게. 다 말할게... 여시은 측 사람들이 너를 습격하라고 시켰어... 그쪽에서 연락이 와서 큰돈을 주겠다며 너를 따끔하게 혼내주라고 했어. 피를 보면 더 높은 보수를 주겠다고...][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해주겠다고도 했어... 그들은 내게 ‘이미 인플루언서로는 살 수 없으니 이 돈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라’고 설득햇어...][내가 돈에 눈이 멀어서 그만... 평생 벌어도 손에 쥘 수 없는 금액이었어...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봐. 한 번만 용서해 줘...]음성은 여기서 끊겼다.여재훈이 직접 스피커폰 모드로 음성을 틀었기 때문에 옆에 있던 여시은도 모든 내용을 똑똑히 들었다.음성이 끝나자, 워낙 얼어붙은 모습이던 여시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눈이 동그래졌다.“아빠, 이건...”찰싹!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얼굴에 짜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여재훈이 사정없이 따귀를 때린 것이다.“시은아, 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악랄한 아이가 됐어?”여재훈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친 손에 너무 힘을 줘서인지 그녀를 가리키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아빠, 손에...”여시은도 여재훈의 팔에 피가 스며 나온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서러움을 잊은 채 여재훈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다가가자, 여재훈은 몸을 뒤로 피하며 호통쳤다.“고은서 씨를 모함하고 고양이를 학대하고 도우미를 괴롭힌 것도 모자라 이제는 살인 청부까지 해? 너 정말 무법천지구나.”여시은의 한쪽 뺨은 빨갛게 부어올랐고, 눈빛은 놀라움에서 두려움으로 갔다가 다시 걱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여재훈은 그녀에게 화를 내는 일이 거의 없었고, 엄하게 꾸짖는 경우조차 드물었다. 손찌검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고, 이번이 처음이었다.실망으로 싸늘해진 여재훈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시은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아빠,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을 거죠? 다 거짓말로만 들리겠죠?”여시은은
도우미가 여재훈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여시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그러네. 미화언니, 손이 왜 그래?”박미화는 손을 살짝 움츠리더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원에서 일하다가 부주의로 나뭇가지에 긁혔습니다.”“어제는 누군가가 할퀸 거라고 했잖아?”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박미화는 고개를 숙인 채 동료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고, 이내 눈치를 알아챈 그 도우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감지한 여재훈이 엄숙하게 물었다.“집사는? 직원이 다른 사람과 싸워서 상처를 입은 것도 모르고 있단 말이야?”“집사님과 상관없는 일입니다.”집사에게 혼날까 봐 겁에 질린 박미화는 더 이상 거짓말하지 못했다.“사실 누구랑 싸운 것도, 할큄 당한 것도 아닙니다. 며칠 전, 아가씨를 부르러 올라갔을 때, 부주의로 아가씨 손톱에 긁힌 것입니다.”“아, 미화언니 손등을 그렇게 만든 게 나였어요?”여시은은 급히 일어나 박미화의 상처를 확인하더니 손등을 호호 불어주기까지 했다.“아팠겠다. 정말 내가 그랬어? 나는 왜 기억나지 않지?”박미화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그때 아가씨는 감정이 많이 격해져 있었어요. 무슨 억울한 일이 있는지 줄곧 울고 있었죠. 제가 아가씨의 손을 잡고 달래던 중에 아가씨의 손톱에 긁힌 거예요. 사소한 일이라 아가씨가 걱정할까 봐 말씀드리지 않았어요.”“그랬구나.”여시은은 머리를 탁 치며 후회스럽게 말했다.“난 정말 몰랐어.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 이제야 알게 되니 너무 미안하잖아.”박미화는 고개를 저었다.“아가씨가 요즘 기분이 안 좋고 아프기도 하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여재훈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다친 지 2~3일이나 지났는데 약을 바르지 않았어?”박미화는 약을 발랐지만 자꾸 일을 하니 상처가 빨리 낫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하지만 여재훈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의심 어린 눈빛으로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