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바빠지면 다시 갈 시간도 없을 것 같으니 집에서 주인혁이 가르쳐준 호신술만 많이 연습하면 된다.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고, 고은서가 훈련관에 도착하기도 전에 주인혁으로부터 음성메시지를 받았다.[누나, 우린 1차 대회를 무사히 통과했고, 또 2차 선발을 진행하여 이미 50위 안에 들었어요.]주인혁의 즐거운 목소리를 들은 그녀도 기뻐했다.[진도를 앞당기길 위해 우린 아직 돌아갈 수 없어요. 곧 50대 30 시합을 진행하게 돼요. 잘 되면 감독님이 우리에게 CF 촬영기회를 주신다고 하셨어요.]주인혁은 계속하여 자신의 기쁨을 그녀와 공유했다.[비록 돈은 안 주지만, 노출 기회만 있다면 다른 광고를 받을 걱정은 안 해도 될 겁니다. 그때 가서 누나의 돈을 갚을 수 있어요.]주인혁의 말에 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한테 전화를 걸었다.“그러니깐 민혁 씨는 내 빚을 빨리 갚기 위해 이렇게 열심히 돈 벌고 있다는 거예요?”“당연히 아니지요!”주인혁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난 단지...”말을 얼버무린 주인혁은 아예 화제를 돌려버렸다.“누나, 제작진의 말에 의하면 30강에 오르면 술자리가 마련되는데 친구들을 초대할 수 있다고 해요. 만일 내가 순조롭게 통과되면 누나가 와줄 수 있나요?”“당근 문제없지요.”고은서가 호호 웃으면서 대답했다.평범한 사람이 서서히 스타로 변하는 것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도 특별한 체험인 것 같았다....다음 날 아침, 고은서가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나 앉아 휴대폰을 보니 부재중 전화 두 통이 들어와 있었는데, 장순이 아줌마와 할머니의 전화였다.엊저녁 자기 전에 마나모드를 눌러서 전화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었다.그녀는 이내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할머니, 절 찾으셨어요?”할머니는 약간 조급한 어투로 그녀더러 옛 주택으로 다녀오라고 했다.무슨 급한 일이 있나 싶어서 고은서는 바삐 달려갔다.할머니는 그녀를 보자마자 다급히 손을 잡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은서야, 아침에 승재의 비서가 나
10여 시간 후, 고은서는 드디어 M 국의 공항에 도착했다.주민기는 할머니한테서 소식을 들었는지 그녀가 짐을 들고 나갔을 때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사모님,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주민기가 예절 바르게 인사했다.“대표님이 호텔에서 쉬고 있는데, 사모님의 스케쥴이 바뀔까 봐 걱정되어 오신다는 얘기를 아직 해드리지 않았습니다.”‘스케쥴은 개뿔, 내가 후회해서 안 올까 봐 걱정되는 거겠지.'“승재씨 지금 어때요? 의사 선생은 만나봤나요?”“아직 열도 나고 기침도 합니다. 약만 드시고 의사는 아직 안 봤습니다.”주민기가 계속해서 말했다.“주요하게 이쪽 날씨는 추운데 대표님께서 옷을 너무 얇게 입은 탓에 감기 걸리셨습니다. 그런데도 쉬지도 않고 일만 하셨어요. 게다가 식사도 한 끼 제대로 하신 적 없지 해서 이렇게 심각해졌습니다.” 자신의 몸이 불편한 걸 알면서도 일밖에 모르니 참말로 모범적이라고 고은서는 속으로 비꼬았다.“대표님은 제 말을 안 들으셔요, 의사 만나러도 안 가시지. 제가 대표님 신체가 견뎌내지 못할까 봐 어쩔 수 없이 어르신님께 전화했습니다.”주민기가 다급히 해석했다.고은서는 웃으면서 아무 말도 안 했다.주민기는 그녀와 곽승재가 곧 이혼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그녀한테 직접 전화하기는 좀 그렇고 해서 할머니를 찾은 것이다. 손자를 아끼는 할머니가 반드시 그녀를 찾아올 테니까 말이다. 역시 곽승재의 유력한 조수답게 모든 방면을 면밀하게 안배했다.기사가 운전했고 주민기는 그녀를 대신하여 트렁크를 뒷좌석에 놓았고, 그는 조수석에 앉았다.길에서 주민기가 업무 전화를 몇 통 받았는데, 아마도 곽승재가 병이 나서 일부 업무가 그에게로 돌려진 것 같았다.이 순간, 그녀는 주민기를 이해했다. 그는 지금 곽승재 대신 업무도 처리해야 하고, 시중들기 어려운 상사까지 챙겨야 하니 분신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상황이었으니깐 말이다.몇십 분 후에 드디어 그들은 곽승재가 묵고 있는 호텔에 도착했다.주민기가 그녀의 짐을 들고 함께 엘리베
허약하고 무기력한 그의 상태를 지켜보던 그녀는 더는 붙는 불에 키질하지 않았다.“불편하면 뭘 하러 일어나, 그냥 누워 있어.”“이리 와서 부축 좀 해주지.”곽승재는 불편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핑계를 대지 않고 다가가서 곽승재를 부축하여 다시 침대로 돌아가 눕게 했다.침대 옆에 놓여있는 컴퓨터가 켜져 있는 것으로 봐서는 그가 틈틈이 일을 처리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목말라.”곽승재가 입을 열었다.고은서는 그가 환자라는 점을 봐서 더운물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한데 냉장고에 있는 생수를 제외하곤 뜨거운 물은커녕, 상온의 물도 없었다.그녀는 하는 수 없이 주전자에 물을 받아 끓이러 주방으로 갔다.스위트룸에는 간이 부엌이 딸려 있었지만, 새것처럼 깨끗하여 한눈에 봐도 아무도 건드린 흔적조차 없었다.그러니깐 곽승재가 전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죽 끓이는 방법을 물었지만, 전혀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뜨거운 물이 다 끓어 오르자 고은서는 곽승재에게 주려고 주전자를 기울여 컵에 따라 놓았다.그녀가 물을 받쳐 들고 방으로 들어가 보니 곽승재가 한창 컴퓨터 앞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이에 그녀는 한소리 했다.“일이란 한꺼번에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좀 제대로 쉬면 안 돼?”곽승재는 그녀를 힐끗 보고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고은서는 귀찮아 더는 말리지 않고 휴대폰으로 주위의 맛집을 찾아보기 시작했다.‘이왕 온 김에 현지 맛있는 음식은 먹어줘야지.'곽승재는 이것저것 가리는 음식이 많지만, 그녀는 뭐든지 잘 먹는다.“이쪽 음식은 다 맛이 없어 못 먹어, 당신이 직접 만들어 줘.”한창 음식집을 찾고 있는데 곽승재가 그녀에게 요구해왔다.“난 죽이 당겨.”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 그는 컴퓨터를 접고 손에 물컵을 든 채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피식 웃고 말았다.“여봐요, 곽 도련님! 곽 대표님! 저는 할머니께 당신의 상황을 보러 오겠다고 약속했을 뿐, 당신을 시중들러 온 것은 아니거든. 먹고
워낙 아세아인은 본토인보다 몸체가 작은 데다가 고은서는 또한 동안이어서 금방 제법 잘생기고 자신감이 넘치는 사나이가 다가와서 그녀의 전화번호를 얻으려고 하면서 이쪽에서 학교 다니냐고 물었다.“죄송하지만, 이쪽은 제 아내라서 연락처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고은서가 대답하기도 전에 곽승재는 유창하고 정통한 영어로 그 남자가 걸어오는 작업을 막아버렸다.외국인 총각의 이목구비가 입체적이면서 멋있어도 훤칠하고 우뚝한 몸매를 가진 곽승재 앞에서는 오히려 평범해 보이기만 했다.특히 곽승재의 태고 난 귀티는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쉽게 주눅이 들게 한다.상대방도 더는 집적거리지 않고 ‘sorry’라는 말만 한마디 남기고 가버렸다.곽승재는 긴 팔을 내밀어 거절할 나위도 없이 고은서의 허리를 감쌌다.고은서가 몸부림치려고 하자, 곽승재가 검은 눈동자로 그녀를 지켜보면서 말했다.“당신 또 외간남자한테 작업 걸리고 싶어?”“승재 씨, 당신은 방에서 푹 쉬면 안 되겠어? 왜 계속 날 따라 다니려고 해?” 그녀는 화가 나서 투덜거렸다.그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그녀를 무지막지하게 감싸안고 밖에 있는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프렌치 레스토랑의 분위기는 아주 좋았고, 음식의 맛도 정통이지만, 음식을 만드는 데부터 식탁에 올릴 때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그들이 식사를 끝내고 나니 이미 몇 시간이 지났고 밖은 이미 어두워졌다.고은서는 비행기를 오래 탔고, 또 이렇게 몇 시간 동안 실랑이를 벌이다가 호텔로 들어가는 차에 오르니, 배불리 먹고 마신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잠들었다.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잠결에 자신의 뒤에서 따스한 것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포근하고 따뜻한 이불이 그녀를 감싸주고 있어, 그녀는 차마 눈을 뜨기 아까울 정도로 편안했다.이어 그녀의 목덜미는 촉촉한 무엇인가에 덮인 듯한 약간 불편한 느낌이 들어 본능적으로 목을 움츠렸다.상대방이 멈추자 목덜미의 불편감이 사라지면서 그녀의 몸은 옮겨져 넓은 품으로 안기였고, 머리는 약간
아픔이 온몸으로 전해지자 고은서는 화가 상투 밑까지 올라왔다.비록 지금 곽승재가 병에 걸렸지만, 그의 힘은 고은서가 감당할 수 없었다.게다가 곽승재는 지금 무슨 충격을 받은 듯 점점 더 거치게 그녀에게 몰두했다. 그녀의 몸은 그에게 꽉 안겨서 뼈마저 부서질 것 같았고, 입술도 그에게 빨려서 얼얼해 나기 시작했다.고은서는 더이상 몸부림을 쳐봤자, 그 어떤 좋은 수도 없을 것 같아 아예 반항을 포기하고 곽승재가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바로 놓아주리라 생각했지만, 곽승재는 일부러 혼내주려는 듯 그녀의 입술은 물론 혀끝까지 거칠게 빨아당기었다. “음!”그녀는 아파서 못 견디는 소리를 내었고, 눈물도 생리통으로 인해 눈가로 흘러내렸다.견디기 힘든 그녀가 두 손을 내밀어 곽승재의 가슴팍을 두드리자, 그는 끝내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었다.고은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예쁜 눈을 동그랗게 치뜨고 그를 노려보았다.곽승재도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뜨겁게 달아오르는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면서 쉰 목소리로 물었다.“왜? 아파?”그가 다시 덮치기라도 할까 봐 그녀는 솟구치는 분노를 간신히 참으며 감히 욕도 비난도 못 하고 눈시울을 붉힌 채 쌕쌕 숨을 몰아쉬면서 되물었다.“그럼 안 아파?”“아파하라고 그런 거야.”곽승재는 손가락으로 그녀 눈가의 눈물 자국을 닦아 주면서 쉰 목소리로 말했다.“그러게 왜 고슴도치처럼 사람을 마구 찔러대?”말하면서 그의 손가락은 또다시 감각을 잃은 입술로 옮겨졌고 까만 눈동자는 마치 죽어가는 어린 짐승을 쳐다보듯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감히 반항하기라도 하면 당장 그녀를 다시 덮칠 것 같았다.고은서는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고 말았다.‘도대체 누가 누굴 막 찌른 건데?’자기가 그녀를 침대로 안고 가서 제멋대로 재미를 보았으면서, 그녀가 경찰에 신고 안 한 거만해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에 도리어 그녀를 탓하다니.고은서는 곽승재를 한 발로 차서 침대 밑으로 떨어뜨리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고 얼굴을 한쪽으로 홱
“그럼 어떻게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데?”고은서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그를 쳐다보면서 물었다.곽승재는 그녀의 등을 감싸 안은 손바닥에 한층 더 힘을 주어 조르고, 그녀의 턱에 멎은 손을 그녀의 얼굴로 옮겨서 가볍게 어루만졌다.“한 여자가 남자를 가장 즐겁게 하는 방식은 무엇이라고 생각해?”고은서는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라 잽싸게 곽승재의 손을 뿌리치면서 소리쳤다.“생각도 하지 마!”지난번에는 그녀가 약에 중독되어 제정신을 잃어서 그런 일이 생긴 거지,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는 곽승재와 그런 친밀한 관계를 맺을 리 없었다.그들 사이의 갈등이 깊어질수록 이혼의 어려움은 커질 수밖에 없으니깐.“곽승재, 당신은 그냥 잠시 우리 사이의 일을 처리할 시간상 여유가 없을 뿐이니, 품격 없는 사람처럼 이런 기회조차 이용하여 나한테서 재미 보려고는 하지 마!”곽승재는 그녀의 쌀쌀맞고 거부하는 얼굴을 바라보더니 찬웃음을 지으면서 그녀를 놀려댔다.“난 그냥 당신이 M 국에 머물러 있는 동안, 나한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몇 끼 만들어 달라는 것뿐인데... 그러면 내 몸도 빨리 좋아지고 기분도 좋아질 거 아니야? 그런 당신은 뭘 바라고 있었는데? ”“...”고은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렇다면 직접 밥 챙겨달라고 말하면 되지, 왜 그런 애매한 행동을 해서 오해하게 하는 말을 하게 만드냐 말이야.’“내가 널 안고 올라오느라 진땀을 뺐는데, 혹시 그런 일까지 바라는 건 아니겠지?”곽승재는 그녀를 곁눈질하며 약 올렸다.“당신은 내가 환자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 있어?” 곽승재는 보라는 듯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숨을 헐떡이며 불편함과 허약함을 드러냈다.고은서는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럼 당신이 방금 내가 잠든 사이에 나한테 한 짓은 뭔데!”“그건 아까 네가 계속 내 품속으로 파고드는데, 난들 어떻게 너의 의도를 알 수 있겠어.”곽승재가 쉰 목소리로 그럴 듯 둘러댔다.어쨌든 아까는 그녀가 잠들었으니 그가 제멋대로 꾸며대도 된다.고은서는 그의
보아하니 박지연이 잘못 짚은 것이 아니었다. 망할 곽승재가 여태껏 그녀에게서 이득을 취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그녀는 두 번씩이나 소파에서 자던 도중에 다시 침대로 이동되어 잔 적이 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십중팔구 그의 작품이 분명했다.역시 남자의 몸과 정신은 분리할 수 있다. 분명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을 탐할 수 있으니 말이다.샤워를 끝내고 스킨케어까지 마친 그녀는 미지근한 물과 해열제 두 알을 받쳐 들고 침실로 들어갔다.곽승재는 여전히 조금 전의 자세를 유지한 채 잠들어 있었고 미간은 약간 찌푸려져 있었으며 살짝 마른 입술에는 그녀의 립스틱이 묻어있었다.방금 그에게 협박을 받고 강제로 키스 당한 기억을 떠올린 그녀는 컵 안의 물을 그 얼굴에 확 뿌리고 싶었지만, 꾹 참고 곽승재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어서 일어나 약 먹어.”곽승재는 마지못해 눈을 떴는데 아마도 잠에서 덜 깨어난 것인지, 그녀를 보자 다짜고짜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고은서, 너 나 보러 온 거니?”고은서는 하마터면 손에 든 물을 떨어뜨릴 뻔했다.“당신 왜 이래, 물 쏟을 뻔했잖아!”곽승재는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흐리멍덩한 말투로 고민했다. “고은서, 넌 왜 자꾸 나만 보면 얼굴이 차가워져? 언제 나한테 한번 웃어 줄래, 응?”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저녁 프랑스 요리에는 소량의 술이 곁들여지는 몇 가지 메뉴가 있지만 취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설마 이 정도 열이 나서 사람을 헷갈리게 할 수도 있단 말이야?“은서야, 혹시 그날 밤 내가 너를 아프게 했다고 여태 나를 미워하고 있는 거니? 내가 그렇게 미워? 집을 나갈 만큼?”곽승재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평소 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고, 감정을 읽을 수 없던 검은 눈동자가 지금은 더없이 부드러웠다.“나도 자제하려고 노력할 만큼 했어. 하지만 그때 당신은 너무나도 유연했고 또 고양이처럼 울부짖었어. 그래서...”곽승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당황한 그녀는 한
고은서의 화가 난 것 같은 말투에 곽승재의 안색이 변했다. 뭔가를 경계하는 듯한 표정이었다.그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너, 남편을 죽일 셈이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정말로 모르는 건지 아니면 멍청한 척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어떻게 열이 나는데도 생각이 이렇게 또렷할 수 있는 거지?’“그래, 맞아. 널 죽이면 내가 네 재산을 상속받아서 부자로 될 수 있으니까 말이야!”고은서는 짜증을 내며 물컵을 그의 입에 갖다 댔다.“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약이나 삼켜.”고은서의 말투가 너무 강했는지 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더니 물을 두어 모금 마셨다.고은서는 물컵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좋아, 이제 가서... 아!”그녀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손목에서 갑자기 통증이 느껴졌다. 곽승재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눕혀버린 것이었다.“곽... 읍.”고은서는 화를 내려고 했지만 곽승재가 입술로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녀가 입을 열자마자 무언가를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씁쓸한 약이 그녀의 입안으로 넘어가고 나서야 고은서는 그 정체가 방금 자신이 곽승재에게 먹인 해열제라는 것을 깨달았다.‘곽승재, 이 변태 같은 놈! 약을 삼키는 게 아니라 나한테 다시 먹이려고 하다니!’그녀는 필사적으로 약을 입 밖으로 밀어내려고 애썼다. 고은서는 이를 꽉 물고 있었지만 곽승재가 그녀의 양 볼을 잡고 그녀로 하여금 다시 입을 열 수밖에 없게 했다.곽승재는 약을 고은서의 혀끝까지 밀어 넣었고 그녀의 입안에 씁쓸한 맛이 퍼졌다.“너무 써!”고은서는 견딜 수 없어서 온 힘을 다해 곽승재를 옆으로 밀어냈다.곽승재는 그녀에게 밀려서 옆으로 물러섰고 다시 덤비지 않았다.고은서는 그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급하게 약을 뱉어내고 침대 옆에 있는 물로 입을 여러 번 헹궜다.‘변태 같은 놈! 자기 입에 넣었던 약을 다시 내 입에 집어넣다니!’그러고 나서 고은서는 또 침실에 있는 화장실로 달려가 입을 열심히 헹궜다.입안에 맴돌던 쓴맛이 사라지고 곽승재도 멀어진 다음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