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연이 서둘러 고은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곽승재가 막을 시간도 없이 너 찾으러 위로 올라갔어!”박지연이 불안한 마음에 덧붙였다.“은서야, 곽승재 씨 표정이 너무 안 좋았어. 제발 무리하지 마. 그 사람이랑 맞서지도 말고. 곧 올라갈게!”전화를 끊은 박지연은 엘리베이터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계단을 뛰어올랐다.병실에 있던 고은서가 핸드폰을 내려놓기도 전에 싸늘한 표정을 한 곽승재를 마주했다.“뭘 하려는 거야?”고은서는 경계심을 가지고 뒤로 물러나면서 침대 머리맡의 호출 버튼을 눌렀다.그 사이 곽승재가 긴 다리를 내뻗으며 그녀의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곽승재의 검은 눈동자는 차가운 빛을 내뿜었고 온몸에는 얼어붙을 듯한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모습이 여실히 느껴졌다.지난번 곽승재가 술에 취해서 인사불성이 된 이후 고은서는 처음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난 곽승재의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었다.고은서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VIP 병실이라 그런지 아니면 이미 소문이 돌고 있어서 그런지 곧바로 한 간호사가 달려왔다.고은서는 구세주를 보듯 간호사를 바라보며 말했다.“간호사님, 부탁이...”곽승재를 내보내달라고 말하기도 전에 곽승재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링거 빼주세요.”간호사는 차가운 기세에 눌려 잠시 멈칫하며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한 번 더 얘기해야 하나요?”곽승재의 싸늘한 시선이 간호사에게 닿자 간호사는 그제야 한기를 느끼며 병상 옆으로 다가가 고은서의 주삿바늘을 뽑기 시작했다.고은서의 불안감은 더 커졌다.그녀는 애써 불안한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곽승재,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아직 약도 다 들어가지 않았어.”곽승재는 별다른 말 없이 싸늘한 분위기를 내풍겼다.“너 진짜... 아!”고은서가 솜으로 바늘이 꽂혀있던 자리를 누르며 의도를 물으려고 한순간 몸이 가벼워졌다. 곽승재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린 것이다.간호사 역시 이 상황에 놀랐지만 곽승재의 강렬한 시선에 겁을 먹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안 그래도 박지연은 시부모님께 환영받지 못하는 처지였다. 만약 곽승재가 정말로 그녀의 시부모님을 끌어들인다면 그녀의 상황은 더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곽승재가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오는 이상 박지연도 더 이상 그를 막을 수 없었다.고은서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난 이 사람이랑 갈게. 넌 돌아가.”박지연이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먼저 말을 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는 괜찮아. 할머니를 봐서라도 날 어떻게 하진 않을 거야.”박지연은 그 말에 조금 근심을 덜었다.“알았어. 그럼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응.”그녀가 대답을 끝내자 곽승재는 곧바로 엘리베이터 문을 닫았다.고은서는 더 이상 저항하거나 소란 피우지 않고 차가운 눈으로 곽승재를 바라보며 물었다.“대체 날 어디로 데려가려고 그래?”곽승재는 그녀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도 그의 태도에 체념하며 눈을 감았다.병동 아래에 도착하자 기사가 준비하고 있었다.곽승재는 은서를 뒷자리에 앉힌 후 자신도 차에 올랐다.차 안에서 곽승재는 전화로 업무를 이어나가며 매우 바빠 보였다.고은서는 답답하고 화가 나 귀를 막고 구석에 웅크리며 불만을 드러냈다.곽승재는 그녀를 한 번 흘깃 쳐다보고는 통화를 멈추고 문자로 업무를 이어나갔다.약 30분 후, 차가 멈춰 섰다.눈을 뜬 고은서는 다른 병원에 도착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들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예원 별장이었다.“사모님, 드디어 돌아오셨네요.”인기척을 느낀 이미숙이 재빨리 달려 나와 문을 열어 주었다.“사모님, 왜 이렇게 살도 빠지고 안색도 나빠지셨어요? 식사 잘 못 하신 거예요?”고은서는 이미숙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곽승재를 노려보았다.“이게 당신이 말한 조용히 쉴 수 있는 좋은 곳이야?”곽승재가 차에서 내려 그녀 곁으로 다가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는 차분히 답했다.“전문 의사와 간호사는 미리 대기시켜 뒀어. 여기보다 안전하고 조용한 곳은 없을 거야.”고은서가
곽승재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다시 고은서를 안아 위층으로 향했다.고은서를 침대에 내려놓자 의사가 다가와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이미 그녀의 병력을 확인한 듯 간호사는 차분하게 그녀에게 수액을 놓았다.고은서가 수액을 맞는 동안 의사와 간호사는 약을 정리하러 갔고 곽승재는 여전히 바쁜지 밖에서 통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고은서가 침실을 둘러보자 침구류가 추가된 것을 제외하고는 그녀가 떠나기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그녀가 두고 간 몇 개의 쿠션, 얇은 담요, 털 슬리퍼 등 잡동사니들은 그대로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사모님, 시장하시죠? 죽이랑 반찬, 국 준비했는데 조금 드셔보세요.”그때 쟁반을 든 이미숙이 다가왔다.조심스러워하는 이미숙이었지만 고은서는 그녀의 말투에서 자신의 복귀를 무척 반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은서는 화가 났지만 그 화를 이미숙에게 풀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아줌마. 하지만 아직 별로 입맛이 없네요. 그냥 놔두세요.”“사모님, 입맛이 없으시더라도 조금은 드셔야죠.”이미숙이 안타까워하며 거듭 권했다.“안 그래도 날씬하셨는데 지금은 더 마르셨어요.”이미숙의 호의에 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죽만 조금 먹을게요.”“네! 사모님!”이미숙이 곧 따뜻한 죽 한 그릇을 가져와 그녀에게 떠먹여 주었다.“사모님, 손이 불편하시니 제가 먹여드릴게요.”이미숙의 정성을 마다할 수 없었던 고은서는 거부하지 않고 그녀가 하려는 대로 내버려두었다.죽 한 그릇을 다 먹자 이미숙은 다시 한번 반찬을 권하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사모님, 식사를 잘하셔야 빨리 회복하시죠.”곽승재가 이미숙에게 그녀의 일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은서는 물어볼 기분도 아니었다.“아줌마. 나중에 제 핸드폰 어디 있는지 물어봐 주세요. 통화 좀 하고 싶네요.”민시후의 번호는 핸드폰에만 저장되어 있었다. 곽승재에게 억지로 안겨 끌려온 고은서는 제때 핸드폰을 챙길 수 없었다.‘사람
고은서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곽승재에게 던지며 말했다.“내가 누구를 찾든 무슨 상관이야! 내 핸드폰이나 돌려줘.”핸드폰은 곽승재의 몸을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곽승재가 떨어진 핸드폰을 잠시 바라보고 주워들었다.그는 고은서를 내려다보며 비웃듯 말했다.“왜? 민시후한테 연락하려고? 꿈도 꾸지 마. 새 핸드폰이 필요 없다면 여기서 조용히 몸이나 회복해. 밖에 나가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손해 보는 건 너뿐일 테니까.”싸늘하게 말을 마친 곽승재가 더 이상 고은서를 신경 쓰지 않고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곽승재! 미쳤으면 의사한테 진단이나 받아! 미쳐서 날 괴롭히지 말고!”고은서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문 닫히는 소리뿐이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고은서는 그대로 뒤로 넘어갈 것만 같았다.‘빌어먹을 곽승재! 민시후를 만나지 못하게 하려고 날 여기로 데려왔지! 난 이혼하고 싶었을 뿐인데 일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그 후 이틀간, 고은서는 예원 별장에서 요양했다.의사의 세심한 관리와 이미숙의 보양식 덕분에 그녀의 몸은 많이 회복되었다.비록 아직 기력이 부족해서 격렬한 운동은 할 수 없었지만 기본적인 활동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그녀는 더 이상 수액할 필요도 없이 약만 복용하면 되었다.몸은 차츰 회복되었지만 고은서의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하고 초조해졌다.이틀 동안 그녀는 방향을 잃은 나침판처럼 외부와의 연락이 모두 차단된 채 답답하게 방에만 갇혀 있었다.그녀는 바깥 상황이 궁금했다.또한 서연정의 귀국 여부로 궁금했다.하지만 그녀에게는 핸드폰이 없었고 빌려줄 사람도 없었다.곽승재는 그날 문을 닫고 나간 뒤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별장에 사람들을 배치해 그녀가 밖에 나가지 못하게 단속했다.고은서는 그날 곽승재가 차에서 내리며 너무 이른 시기에 욕했다는 말을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다.‘곽승재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야! 나쁜 놈보다 더해! 정말 미친놈이야!’“사모님, 화내지 마세
더 이상 이미숙의 말을 듣기 싫었던 고은서가 그녀의 말을 끊으려고 한 순간, 이미숙의 핸드폰이 울렸다. 밖에 있는 경호원에게서 온 연락이었다.“지금 밖에 박지연 아가씨께서 사모님을 찾아오셨는데 아무리 말씀드려도 돌아가려고 하지 않으셔서 연락드렸습니다.”경호원이 말했다.“들여보내세요!”박지연이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고은서는 이미숙의 핸드폰을 집어 들어 경호원에게 외쳤다.하지만 경호원은 망설였다.“그럼 제가 나갈게요!”말을 마친 고은서가 밖으로 나가려 하자 이미숙은 그녀의 앞을 막아서지는 못하고 조바심을 내며 뒤를 따라갔다.“사모님, 천천히 가세요. 너무 빠르세요!”고은서가 서둘러 별장 문 앞까지 나가자 정말 박지연이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은서야!”박지연이 고은서를 보자마자 들어오려 했지만 이준이 앞을 막아섰다.“누가 감히 지연이를 막으라고 했어요!”고은서가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지연이를 못 들어오게 한다면 제가 나가겠어요. 알아서 하세요!”곽승재가 고은서는 신경 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이준이 한참을 망설이다 박지연의 앞에서 물러섰다.별장 안으로 들어온 박지연이 고은서의 손을 잡고 그녀를 위아래로 살폈다.“괜찮아? 전화는 왜 안 받아?”고은서는 이미숙을 집 안으로 들여보내고 박지연과 함께 온실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곽승재 그 미친놈이 내 핸드폰을 빼앗고 나가지도 못하게 했어.”고은서는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어쩐지... 며칠 동안 네 상황을 물으려고 곽승재한테 연락했는데 항상 비서가 받더라고. 네 상황을 알리기 싫었던 거네.”“병원에서 나온 날 너한테 연락했는데 핸드폰이 꺼져있더라?”고은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박지연이 답했다.“그날 병원에서 한 사람이랑 부딪히는 바람에 핸드폰이 망가져서 어제저녁에 새로 샀어.”비록 너무 공교로운 상황이었는지만 고은서는 더 이상 따질 겨를이 없었다.“민시후는 어때? 또 곽승재를 찾아가 시비 걸지는 않았겠지?”“그러진 않았을 거야.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영상 있어? 보여줘!”고은서가 다급히 물었다.박지연이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을 재생했다.영상에는 고국성이 제복을 입은 몇 명의 직원들에게 연행되는 장면이 찍혀있었다.그 뒤에는 울부짖고 있는 단은숙과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유성준이 서 있었다.“세금 관련 심각한 문제가 터졌대. 세무 쪽에서도 이미 상당한 증거를 확보했다고 하더라.”박지연이 말했다.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지난 생에 비록 MQ가 점차 쇠퇴했다고 해도 세금 문제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MQ에 정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면 백유미가 그걸 가만히 놔뒀을 리가 없는데...’이번 일은 십중팔구 곽승재가 개입한 것이 틀림없었다.“은서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박지연이 걱정스레 물었다.“곽승재와 관련 없다고 해도 네 삼촌 쪽 문제는 빨리 해결해야 해. 미룰수록 안 좋은 소문이 퍼지며 고씨 가문 명성에도 크게 피해줄 거야.”고은서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조씨 가문의 사업은 불안정한 상태였는데 누군가가 이 일을 빌미로 MQ를 공격한다면 큰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컸다.“차라리 곽승재한테 사실을 얘기하고 도움을 청하는 게 어때? 이대로 서로 상처를 주다가는 끝도 없어. 두 사람 모두 만신창이가 될 거야.”박지연이 제안했지만 고은서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지금 곽승재에게 그의 아이였다고 말한다고 해도 믿지 않을 거야. 오히려 고씨 가문과 민시후를 위해 거짓말한다고 생각하겠지.’고은서가 원하는 건 이혼해서 곽승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지 화해가 아니었다.잠시 생각을 하던 고은서가 결단을 내렸다.“지연아. 부탁 좀 해도 될까? 곽씨 가문 본가로 가서 할머니 좀 모셔 와줘.”박지연이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좋은 방법인 것 같네. 할머니는 항상 널 아끼셨으니 네 일을 모르는 체하시지 않을 거야. 곽승재도 할머니 말은 듣겠지.”고은서가 덧붙였다.“그리고 민시후에게도 연락해서 곽승재와 대립하지 말라고 전해줘.”“민시후 걱정까지 하
이미숙은 황급히 설명했다.“제가 사모님 개인적인 일을 캐묻는 게 아니라 도련님께서 물어보실까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예요.”고은서는 리클라이너에 다시 누우면서 말했다.“괜찮아요. 제가 지금 행패 부린다고 빨리 돌아오라고 전하세요.”“하지만...”이미숙은 편히 누워있는 고은서를 보며 약간 망설여졌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는 고은서가 행패 부린다고 거짓말을 했다가 곽승재에게 꾸지람이라도 받을까 봐 걱정되었다.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고은서가 말했다.“곽승재가 믿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진짜 행패 부릴 수 있는데, 한 번 해볼까요?”“...”이미숙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곽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전화를 끊고 뒤돌아봤을 때 고은서는 리클라이너에 누워 졸고 있었다.“사모님, 아무리 햇볕이 쨍쨍하다고 해도 여기서 주무시면 안 돼요. 감기 걸려요.”이미숙이 그녀를 걱정했다.고은서는 몸을 옆으로 돌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담요 하나 가져다주세요.”“네, 금방 가져다드릴게요.”그러나 이미숙이 담요를 가지고 다시 돌아왔을 때 고은서는 누워있는 대신 테라스에 있는 유리 가드 옆에 서 있었다.“사모님, 방금전까지 주무시려고 하셨잖아요. 볼 일이라도 생겼나요?”이미숙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아니에요.”고은서는 다시 리클라이너에 누웠다.십 분쯤 지났을 때, 밖에서 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이미숙은 내려다보며 확인하고는 고은서에게 알렸다.“도련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지금 돌아온 걸 보아서는 아마 전화를 받자마자 돌아오신 것 같습니다.”그러나 이미숙과 달리 고은서는 아주 담담했다.“아주머니, 내려가서 곽승재 혼자 올라오라고 전하세요. 제가 따로 할 말이 있어서요.”이미숙은 전혀 의심하지 않고 내려갔다.별장으로 들어온 곽승재는 위층에서 내려오는 이미숙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고은서는 괜찮아요?”“사모님께선 별일 없으세요. 지금 테라스에서 햇볕 쪼임을 하고 계시는데 도련님께 따로 하실 말씀이 있다고 도련님보고 올라
분노와 한기로 가득 찬 곽승재의 눈빛을 보며 고은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이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박지연은 아이에 관한 사실을 곽승재에게 알려주면 모든 일이 좋게 끝날 것이라고 믿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곽승재, 우리 그냥 이혼하자. 더는 끌지 말고.”고은서는 다리 하나를 가드 밖으로 내밀면서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뛰어내릴 거야.”“고은서, 지금 또 뛰어내리겠다면서 날 협박하는 거야?”이를 악물고 말하는 곽승재의 얼굴빛은 섬뜩할 정도로 어두웠다. 심지어 그로부터 차가운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네가 뛰어내리면 민시후도 마찬가지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내렸다.“스읍!”그러나 뛰어내리는 순간 고은서는 팔로부터 오는 고통을 느꼈다. 다름이 아니라 곽승재가 뛰어와 그녀를 잡았던 것이다.하지만 관성 때문에 고은서는 여전히 밑으로 떨어지려고 했다. 곽승재는 허리 굽혀 그녀의 다른 한쪽 손까지 잡고 화를 내며 말했다.“손 놓지 말고 꽉 잡아!”반쯤 거의 떨어지려고 하는 고은서의 귓가에는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자신을 잡고 있는 곽승재를 보며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전에 그의 사랑과 관심을 얻으려고 이 층에서 뛰어내린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또다시 테라스에서 뛰어내리게 될 줄은 그녀 자신도 생각 못 했다.‘이 결혼을 강구한 대가를 치르는 셈이네.’“널 끌어올릴 테니까 내 손 꽉 잡아!”곽승재의 목소리를 들은 고은서는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는데 아마 거꾸로 봐서였을까, 고은서는 그의 눈빛으로부터 분노뿐만이 아니라 조급함도 보아낼 수 있었다.그녀가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걱정하는 듯했다.그러나 고은서는 중력 때문에 팔이 점점 더 아파왔고 눈도 깔깔해져 곽승재의 모습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곽승재의 손을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여시은은 여전히 여재훈의 다리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아빠가 생각하시는 해결 방법은 뭐예요?”여재훈은 여시은에게 홍보팀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개인적으로 고은서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한 뒤 집에서 2주 동안 자숙하라고 말했다.“제 회사는 아직 개업식도 제대로 안 했는데 공개 사과를 하라뇨? 그럼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에요!”여시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애원했다.“아빠, 저 은서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이끌기 힘든데,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앞으로 누가 저를 믿고 따르겠어요?”“안 된다.” 여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이미 파장이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시은아, 잘못을 저지른 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사과하면 은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 거다.”여재훈은 계속해서 말했다.“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덮어주면 그건 너를 망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된 거다!”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고은서를 그저 연못에 좀 빠지게 했을 뿐인데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단 말인가?’‘공개 사과라니, 이제 예전처럼 모두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던 모습은 끝이라는 거잖아.비록 인터넷의 영상은 지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오늘 밤 그렇게 많은 부유층과 정재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해성에서 쌓아온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진 셈이다.예전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여재훈은 안쓰러워하며 뭐든지 다 용서해 줬었다.‘지금은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아빠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벌하려 한다니, 정말 나를 딸로 생각하긴 하는 걸까?’
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눈이 시뻘게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고은서가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왜 저를 믿지 않으세요!”“시은아!”여재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생처음으로 이토록 차가운 눈빛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됐니!”“내가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어. 연회장 CCTV 꺼놓은 거, 그거 네가 시킨 거더라.”여재훈은 딸을 억울하게 만들까 걱정돼 CCTV 관련 내용을 직접 조사했다.그런데 정말로 여시은이 꺼놓았던 것이었다.“네가 정말 은서 씨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왜 CCTV를 미리 꺼놓은 거냐?”여재훈은 냉정한 태도로 물었다.여시은은 자신이 고은서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은서는 일부러 도발적인 눈빛으로 여시은을 자극했고 곧바로 테라스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모두 여시은한테 엿 먹이려는 행동이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쿠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동적으로 행동해 자신을 밀칠 거라 확신했었다.왜냐하면 고은서는 지난번엔 쿠아를 다치게 한 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반전이 생겼다.고은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반격했고 지난번 농장에서의 ‘물에 빠진 사건’ 증거까지 들고나왔다.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여시은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여재훈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저 고은서가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왜 아빠는 맨날 걔만 칭찬하세요? 이러니깐 제가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은서한테 꼽 주고 싶었어요!”“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후회도 안 해요!”“너!”여재훈은 손을 번쩍 들어 여시은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시은아, 아빠가 평소에 너를 어떻게 가르쳤니? 사람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질투심에 눈이
이미숙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여시은이 고은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연못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그 영상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올린 것 같았고 화질이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전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영상의 끝에는 고은서와 여시은의 얼굴을 비춘 장면도 담겨 있었다.다소 초라해진 고은서는 곽승재의 부축을 받으며 옆에 서 있었다. 여시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그 와중에 영상의 제목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재벌가 아가씨, 두 얼굴의 진실!]“사모님, 저 여자는 어쩜 저리 독하대요.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폭로해 줘서 다행이지! 이제 세상 사람들 다 그 여자 피해서 다니겠어요!”이미숙은 화가 난 듯 말했다.고은서는 이번 일이 오래 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시은 뒤에는 여재훈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 일로 여시은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했고, 여재훈 역시 자신의 딸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이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휴대전화 영상에 대뜸 ‘좋아요'를 눌렀다.한편, 여씨 가문에서.여시은 역시 유튜브 영상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그녀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밖에 서 있는 박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시은 아가씨,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서재로 오시래요. 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이번이 박미화가 세 번째로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여시은은 곧바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와 짜증을 숨기고는 일부러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박미화는 방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때마침 여시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여시은은 박미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에 분노로 인해 물어뜯은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여시은은 울먹이는 말투로 물었다.“미화 언니, 아빠가 나한테 화 많이 나신 거야? 나 어떻게 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곽승재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녀는 친구에게 부탁해 적절한 시기에 감시 카메라를 끊어놓도록 준비해두었다.하지만 여시은이 먼저 참지 못하고 로비의 카메라를 꺼버린 것이다.고은서가 감히 감시 카메라의 확인을 제안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준비를 했을 뿐만 아니라 여시은 역시 감시 카메라를 조작할 것이라는 점까지 예측했다.“만약 여시은이 참고 끝까지 널 찾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어?”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개업식이 끝난 후 대형 스크린에 공개할 계획이었어.”곽승재가 눈썹을 추켜세웠다.“네가 앞서 백스테이지 주위를 둘러본 것도 동영상을 공개할 준비를 했던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여시은이 일부러 나를 물에 빠뜨리고 향수로 나를 함정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쿠아까지 학대했어. 내가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리고 시은이가 인내심을 가졌다고 해도 난 개업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을 거야.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지. 시은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테라스에서 쿠아의 죽음을 언급하며 나를 자극했고 다시 같은 수법을 쓸 참이었던 거지. 나는 그저 시은이가 파려던 함정을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야.”곽승재는 고은서가 준비를 해왔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런 고육지계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펼칠 줄은 몰랐다.게다가 그녀의 연기는 너무나도 실감 났다.고은서가 바닥에 넘어져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순간 곽승재는 정말로 여시은의 소행일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생각을 읽었는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가여운 척 한 거 아니야. 백유미와 여시은이라는 고수들 덕분에 나도 한 수 배웠을 뿐이지.”백유미의 과거 행동을 떠올린 곽승재는 가슴을 죄는 듯한 자책감이 밀려왔다.곽승재는 진지하게 사과했다.“은서야, 미안해.”무심코 흘린 말에 곽승재가 사과하는 모습을 본 고은서는 잠시 당황했다.“사과할 필요는 없어. 당신도 백유미 씨에게 속았을 뿐이잖아. 어쨌든 ‘목숨의 은인'
“시은아!”영상 속 장면에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재훈은 걱정된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그리고 뒤이어 멀리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어서 따라가서 시은이를 보호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해서는 안 돼!”부하들이 여시은의 뒤를 쫓아 나간 뒤 여재훈은 스크린을 힐끗 바라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은서에게 사과했다.“제가 딸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이 일은 제가 시은에게 직접 확인한 뒤 여은서 씨께 해명해 드리겠습니다.”고은서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는 그곳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이유로 자리를 떠나려 했다.“여 대표님, 제가 은서 씨를 모셔다드리겠습니다.”곽승재가 말했다.송민준 역시 함께 가겠다고 전했다.여재훈은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개업식에서 이런 소동을 일으킨 이상 누구라도 축하할 마음이 없을 터였다.고은서 일행이 떠나자 여재훈은 참석자들에게 직접 사과하며 홍보팀에 현장 수습을 지시했다.호텔 앞 광장에서 곽승재와 송민준의 운전기사들이 각각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송민준은 고은서를 배웅하려는 태도를 보였으나 곽승재가 고은서를 부축하면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번거로울 텐데 제가 은서 씨를 모시고 가겠습니다.”송민준은 자기가 고은서의 파트너로 왔기 때문에 그녀를 집까지 모셔다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설득했다.곽승재는 송민준의 이런 친근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고은서를 안아 들어 자신의 차에 태우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화를 낼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입을 오므리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택권을 고은서에게 넘겼다.고은서는 당연히 송민준과 함께 갈 생각이 없었다.“오빠, 오늘은 고마웠어. 오늘 승재 오빠의 차를 타고 갈게. 어차피 길도 같으니까. 내일 다시 연락할게.”고은서의 반응에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알겠어.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곽승재는 고은서를 차에 태운 뒤 트렁크에서 깨끗한 외투를 꺼냈다.차 안에 앉자 곽승재는 고은서의 어깨
여시은은 고은서의 말에 더욱 어리둥절해졌다.‘갑자기 왜 또 농장 일을 다시 꺼내는 거지?’여시은은 속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생각할수록 점점 더 억울하고 분했다.“은서야, 왜 나를 이렇게 모함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너를 물에 빠뜨렸다고 그래? 네가 나를 밀었잖아! 내가 우리 아빠를 생각해서 참고 넘어갔는데 이제 와서 또 나에게 뒤집어씌우다니!”여시은은 여재훈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아빠, 저는 항상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는 것 같아요... 은서가 이런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너무 속상해요...”여시은의 슬프고 안쓰러운 모습에 여재훈은 점차 진지해졌고 고은서를 보며 물었다.“고은서 씨, 시은이가 은서 씨를 물에 빠뜨렸다는 증거라도 있어요?”“물론 있죠.”고은서는 이미 곽승재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상태였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송민준이 보낸 영상을 찾았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 다가가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은서가 진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더니 그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이때 곽승재가 제안했다.“여 대표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영상을 공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직접 보면 진실이 명백해질 테니 나중에 왜곡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여시은은 고은서가 미리 준비한 듯한 태도를 보이자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고은서가 이렇게 계획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증거를 손에 넣었을지도 모른다.여시은이 고은서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여시은은 붉어진 눈으로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에요! 이미 개업식 시간이 다 됐는데 계속 이러쿵저러쿵하며 일을 벌이다니! 고의로 우리 개업식을 방해하는 거 아니에요?”“아빠, 오늘 이분들은 분명히 좋은 의도로 온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쫓아내는 게 낫겠어요!”“여시은 씨, 말씀이 참 지나치군요. 우리는 단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송민준이 여재훈보다 먼저 입을 열
구경하는 사람들도 송민준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도대체 왜 그의 여자 파트너가 곽승재의 품에 안겨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송민준은 사람들의 의문스러운 시선을 받고 있었지만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여시은 씨, 저는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은서와 여시은 씨의 사이에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은서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아빠,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저 사람들은 같은 편이라서 일부러 저를 괴롭히려는 거예요!”여시은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여재훈은 눈물 글썽이는 딸을 바라보더니 온몸이 흐트러진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 씨, 사실대로 말해보세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고은서는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렸지만 이런 일을 당하면 당연히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여 대표님, 제가 뭘 말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시은이와 저는 각자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도 판단하기 어려울 겁니다.”고은서는 로비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여기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요. 직원들을 시켜 감시 카메라를 확인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진실도 드러나겠죠.”이 말을 듣자 여시은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고은서가 여시은보다 먼저 바닥에 넘어졌는데 감시 카메라의 확인까지 제안하다니!‘설마 은서가 이 시간대에 감시 카메라를 꺼뒀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시은아, 너의 생각은 어때?”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여시은에게 물었다.여시은은 분노를 꾹 참고는 여전히 억울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좋아! 하지만 개업식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감시 카메라는 확인하는 동안 내가 먼저 개업식을 진행하고 나중에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게 어때?”“안 돼.”고은서의 작은 얼굴에는 단호한 표정이 담겨있었다.“이 사건은 반드시 바로 조사되어야 한다고 봐.”고은서는 다시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여 대표님,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제가 시은이 만큼 귀하지는 않지만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