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연은 뒤로 한발 물러서면서 조수연의 손을 피했다.그러나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발이 걸리면서 나무 소파로 넘어지며 머리를 부딪쳤다.그녀는 갑작스레 밀려오는 고통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어머니, 그만 하세요!”온승준은 박지연을 때리려고 하는 조수연을 막았다.“승준아, 아직도 저년 편을 드는 거야?”조수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얼마나 거만하게 구는지 너도 봤지? 집안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영화 보러 간 것도 모자라 술까지 마시고 온다는 게 말이 돼? 게다가 돌아오자마자 내 화를 돋우잖아! 이러다가 나중에 널 짓밟으려 할지도 모른다니까!”“어머니, 먼저 돌아가세요. 제가 잘 얘기할게요.”온승준이 조수연을 달랬다.그녀는 박지연한테 이런 대우를 받는 건 처음이라 화가 많이 났지만 내일 출근하는 아들을 보아서라도 참고 먼저 돌아갈 생각이었다.“내일 승준이가 출근하자마자 우리 집으로 와서 오늘 있었던 일을 잘 설명하도록 해.”조수연이 박지연을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말했다.박지연은 헛웃음을 치면서 일어나 말했다.“그냥 오늘에 모든 걸 다 끝내죠. 저 이젠 그쪽 며느리 노릇 못하겠어요. 그리고 당신 아들도 이젠 더는 못 모시겠어요.”“너!”조수연은 박지연의 태도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이내 그녀를 향해 비아냥거렸다.“우리가 너한테 온씨 집안 며느리로 들어오라고 빈 것처럼 말하지 마! 우리 승준이처럼 우수한 애한테 시집오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승준이랑 결혼하게 된 걸 영광으로 생각해야지!”“어머니! 늦었으니 얼른 돌아가세요. 제가 아파트 밖까지 모셔다드릴게요.”온승준이 조수연을 막으면서 그녀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그만 재촉해! 쟤 지금 내 머리 위로 기어오르려고 하잖아...”조수연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더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박지연의 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심지어 점점 더 세게 들끓어 올랐다.억울함과 분노가 함께 뒤섞이면서 집 안 곳곳을 잿더미로 만들고 싶을 정도로 곧 한계에
박지연은 몸도 마음도 다 지쳐갔다.내고 싶던 화도 다 냈고 순간 몸에 힘이 풀렸다.“온승준, 우리 이혼하자. 내일 마침 출근인데 시간 되는 대로 수속 밟으러 가자.”온승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전화 안 받고 늦게까지 술 마시고 또 집안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건 없었던 일로 해줄게. 내일 어머니한테 사과하러 다녀와. 그러면 좋게 넘어가 줄게.”그의 말을 들은 박지연은 냉소를 흘렸다.‘사과하면 없었던 일로 해준다고? 끝까지 다 내 탓이라고만 생각하는 거네.’“그렇게 총명한 사람이 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당신은 날 탓할 자격이 없어. 그리고 내가 왜 사과해야 하는 거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당신이랑 이혼할 거야.”인내심이 바닥난 온승준은 더는 이런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그는 평소에 조수연과 자신의 말이라면 고분고분 다 들어주던 박지연이 왜 갑자기 며칠째 난동을 부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지연아, 고집을 부린다고 일이 해결되는 건 아니야. 월급카드 외에 또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이번 기회에 다 말해.”박지연도 온승준의 인내심이 바닥났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녀 또한 더는 그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딱 한 가지야. 도대체 내일 이혼하러 갈 시간이 되는 거야 안 되는 거야?”온승준은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어루만지며 답했다.“내일 수술만 두 개야. 너...”“그럼 모레 구청에서 만나.”박지연은 온승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파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걸어 들어가서는 방문을 쾅하고 닫아버렸다.박지연에게서 방금전에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고은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온승준과 조수연을 때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귀부인처럼 오만하게 굴더니 하는 행동이라고는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시비 거는 것도 모자라서 이젠 너한테 손대려고까지 한단 말이야?”고은서는 씩씩거리며 말했다.“당장 이혼하고 나와. 그까짓 온씨 집안 며느리
“이혼 수속 끝내자마자 전에 온승준을 위해 샀던 물건들까지 다 가지고 나와. 아무튼 네 시어머니라는 사람도 네가 산 물건들이 싸구려라면서 눈여겨보지도 않았잖아. 하나도 남김없이 다 가지고 나와.”그러나 고은서와 달리 박지연은 아주 덤덤해 보였다.“됐어. 이혼만 하면 되는데 굳이 원수 사이로 남을 필요는 없잖아.”고은서는 박지연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혼만 순리롭게 할 수만 있다면 그까짓 옷쯤이야 버리는 셈 쳐도 되지.’“지연아, 우리 쇼핑하러 가자.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다 사. 내 카드 줄 테니까 원하는 대로 마음껏 긁어.”박지연은 망설임 없이 카드를 내미는 고은서를 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설마 오래전부터 나한테 관심 있었던 건 아니지? 마치 내가 이혼하길 학수고대한 구애자처럼 말하는 거 같은데.”고은서는 아주 당당하게 인정했다.“맞아. 오래전부터 네가 이혼하길 기다렸어.”박지연이 빨리 이혼해야만 그 집안에서 더 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이번 생에 타지으로 가게 되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박지연의 물건을 새집으로 옮긴 후 고은서는 집안을 한 바퀴 삥 돌면서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뒤돌아 박지연의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얼른 쇼핑하러 가자. 일상용품들도 꽤 사야 할 것 같아.”박지연은 더는 거절하지 않고 그녀와 함께 나섰다.고은서는 쇼핑하는 내내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그릇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가정용 전자 제품들도 구매했다. 그리고 이혼을 축하한다면서 박지연에게 옷과 신발까지 사줬다.온종일 쇼핑하면서 출출해진 두 사람은 매장 직원들에게 물건을 집까지 배송해 달라고 부탁한 뒤 밥 먹으러 가려고 했다.박지연이 워낙 매운 음식을 좋아했는데 마침 쇼핑몰 안에 훠궈집 하나가 있어 그곳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훠궈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면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두 사람은 웨이터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무슨 음식을 주문할지 토론했다.“은서야, 저기 저 두 사람 곽승재
곽승재는 차가운 얼굴빛을 하고 있는 고은서를 힐끔 보더니 백유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백유미도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은서 씨, 지연 씨, 먼저 가볼게요.”미안해하는 말투와 달리 백유미는 자랑이라도 하는 듯 비꼬는 듯한 눈빛으로 고은서를 쏘아보았다.유산한 고은서를 바라보던 눈빛과 똑같은 눈빛이었다. 고은서는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박지연은 황급히 그녀를 달랬다.“그냥 무시해. 지금 곽승재 앞에서 일부러 너한테 시비 거는 거야.”그러나 박지연의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고은서는 테이블 위에 있던 찻잔을 들고 백유미를 향해 물싸대기를 날렸다.“아악!”백유미는 이내 비명을 질렀다.그녀는 얼굴과 머리카락이 온통 찻잎 찌꺼기 투성이가 되었고 갈색 찻물이 그녀의 얼굴을 따라 옷에까지 흘러내리면서 짙은 자국을 남겼다.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 되었다.백유미의 비명소리 때문에 모든 시선들이 그들 쪽으로 쏠렸고 곽승재도 다시 뒤돌아 걸어왔다.“은서 씨,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백유미가 억울하다는 듯 물었다.고은서는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덤덤하게 답했다.“당신 같은 악독한 여자한테 물싸대기 하나 날리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백유미는 물 범벅이 된 얼굴을 쳐들고 아련한 눈빛으로 곽승재를 바라보았다.“승재야...”“곽 대표님, 시비를 먼저 건 사람은 백유미 씨에요. 우리 은서는 아무 잘못 없어요.”박지연이 고은서 앞에 막아서면서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지연 씨, 편견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니에요? 저 방금전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요.”백유미는 끝까지 억울한 척했다.이를 본 고은서는 콧방귀를 뀌면서 가려고 했다. 그러나 곽승재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뭐하려는 거야?”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차가운 눈빛으로 곽승재를 바라보았다.“백유미 편들어주게? 나 일부러 그런 거야. 부글부글 끓고 있는 찻물이었다면
‘난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었는데...’박지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주차장.기사는 운전석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곽승재는 뒷좌석에 앉아 조수석에 앉아있는 백유미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그녀는 티슈로 물을 닦고 있었는데 매우 낭패해 보였다.“이후로 고은서 건들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야.”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백유미는 흠칫하더니 이내 눈시울이 붉히면서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승재야, 너도 지금 이게 다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야?”곽승재는 덤덤한 표정으로 되물었다.“할 말이 있다며?”백유미는 마음속의 쓸쓸함을 애써 억누르면서 말했다.“우리 아빠가 누굴 건드렸는지 요즘 집안 회사가 거의 벼랑 끝에 서 있게 되었어. 혹시 우리 집 회사 좀 도와주면 안 될까?”“버티지 못하겠거든 그냥 제때 포기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하는데. 아저씨도 연세가 있으신데 이젠 쉴 때도 되지 않았어?”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집 회사가 네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는 하지만 우리 아빠도 많은 심혈을 기울였어. 진짜 이대로 파산하게 내버려 두면서 우리 아빠가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거야?”백유미가 아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러나 곽승재는 여전히 별다른 감정이 없어 보였다.“진짜 파산할 경지에 이른 거 맞아?”백유미는 순간 흠칫했다.“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다는 거야? 이번엔 진짜 쉬운 상대가 아니어서 이러는 거야. 계속 우리 집 회사만 타깃으로 삶고 있다니까.”백유미가 곽승재를 향해 애원했다.“승재야, 나도 더는 어쩔 수가 없어서 널 찾아온 거야. 우리 아빠가 어릴 적부터 널 친아들로 생각하면서 챙겨준 걸 보아서라도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될까?”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거절했다.“아저씨 은혜는 이미 오래전에 다 갚은 거로 알고 있어. 이후로도 더는 너희 집 회사를 도와주는 일이 없을 거야.”백유미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눈물을 흘렸다.“그럼 우리 사이도 내가 실수로
박지연의 말을 들은 온승준은 순간 멈칫했다.“지연아, 나 오늘 야근 안 해도 되니까 저녁에 만나서 잘 얘기해보자.”온승준이 이렇게 차근차근 그녀를 달래려고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에는 항상 바쁘다는 이유로 용건만 간단하게 말하는 게 일쑤였다.지금 먼저 얘기를 나누자고 한 것만으로 그에게 있어서는 아주 크게 양보한 것과 마찬가지였다.그러나 박지연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래된 친구로서 고은서는 이내 박지연이 망설이고 있다는 걸 알고 그녀의 폰을 빼앗아 전화 너머에 있는 온승준을 향해 소리쳤다.“더는 그쪽이랑 할 말이 없거든요. 그리고 지연이 이미 저랑 살기로 했으니까 그쪽 집으로 돌아가는 일도 없을 거예요.”고은서는 씩씩거리며 온승준이 입을 열기도 전에 전화를 뚝 끊어버리고는 박지연을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지연아,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돼. 전에 네 시어머니가 너한테 했던 말들을 생각해봐. 그리고 네가 괴롭힐 당할 때 온승준이 뭐 하고 있었는지도 잘 돌이켜봐.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평생 그 집 사람들 괴롭힘을 받으며 살 생각이야?”“아니.”박지연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럼 더는 망설일 필요도 없잖아. 네가 아직도 온승준을 사랑하고 있다는 거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말로만 이혼하지 않겠다는 사람을 어떻게 믿어. 적어도 그 집안에서 마땅한 태도를 표해야 다시 고려해볼 거 아니야. 절대 온승준의 말에 쉽게 넘어가서는 안 돼.”고은서가 말을 보태었다.사실 박지연은 자신을 대하는 시댁의 태도가 변할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을 친부모님처럼 모시는 박지연과 달리 그들은 항상 그녀를 하녀 취급을 했다. 이번 일로 그들의 생각을 바꾼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온승준의 마음속에는 항상 일이 먼저였고 집안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기뻐하든 슬퍼하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유혜린이 아니었더라도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을 것이다.‘그냥 빨리 이혼하는 게 더 나아. 더 끌 필요
“알겠어, 알겠어. 명심할 테니까 걱정하지마. 나 먼저 일하러 갈게.”박지연이 말했다.고은서도 아침을 챙겨 먹고 ZY 그룹으로 갔다.송민아는 그녀가 출근하자마자 그녀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어제는 왜 출근하지 않았어요?”“볼 일이 좀 있어서요. 저한테 할 말이라도 있으세요?”송민아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머뭇머뭇 말했다.“어제 데이터 분석하는 거 가르쳐준다고 했잖아요.”‘아, 그 일 때문에 온 거였구나. 송민준이랑 비기면 완전 애네.’송민준이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속마음을 들키지 않을 정도로 위험한 존재와 같았다.반면 송민아는 오만하기는 하나 도움이 필요할 때면 제때 꼬리를 내리는 본성은 착한 사람이었다.“전에는 회사에 나보다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 많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분들 찾아가면 되잖아요.”송민아는 콧방귀를 뀌면서 고집부렸다.“그분들한테 민폐 끼치기 싫어서 그래요. 난 딱 은서 씨만 못살게 굴 거예요. 그러니까 누가 시후 오빠 마음을 함부로 빼앗으라고 했어요?”“진짜 제가 민시후의 마음을 빼앗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고은서가 되물었다.송민아는 고은서가 그러지 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속마음을 들킨 그녀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일에 몰두하라면서요. 그래서 지금 배워달라고 직접 찾아까지 왔는데 왜 거절할 것처럼 그래요? 설마 일부러 날 놀리려고 이러는 거예요?”“아니요, 그럴 리가요. 일하겠다는데 전면적으로 지지해줘야죠. 나중에 자신의 사업을 가꿔나가는 게 남자한테 구애하는 것보다 더 소중하다는 걸 깨닫게 될 거예요.”고은서가 웃으면서 말했다.“어제 준 서류들은 다 봤어요? 투자할만한 프로젝트가 있던가요?”“모르겠어요. 저는 다 괜찮아 보이던데요.”송민아의 얼굴이 점점 더 빨개졌다.계획서에는 다 프로젝트의 우점과 프로젝트를 칭찬하는 말들만 있었기에 누가 좋고 누가 나쁜지를 구분하기 어려웠다.고은서도 이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를 비웃는 대신 간단한 데이터 분석법을 알려주면서 연관된 전공 책들까지 추천해
갑자기 만나자고 하는 성아연의 제안에 고은서는 꽤나 당황스러웠다.지난번 경찰서에서 성아연은 고은서를 지독히 미워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민아야, 너는 먼저 회사로 돌아가. 나는 잠시 볼일 있어.”고은서가 송민아에게 말했다.송민아가 물었다.“급한 일이야? 같이 가줄까?”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니야. 개인적인 일이라서 그래. 맞아. 이제 친구로 지내기로 했으니 하나만 물어봐도 돼?”송민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뭔데?”“당시 넌 어떻게 그렇게 빨리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안 거야?”고은서는 조금 의아했다.병원에서 임신 사실을 확인하고 호텔로 돌아오기까지 기껏해야 두 시간 남짓이었다.하지만 송민아가 어떻게 그 소식을 알게 된 것인지 너무 궁금했다.그 말을 듣고 송민아는 약간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누가 나한테 문자로 네가 병원 산부인과에 갔다고 알려줬어. 반신반의하면서 사람을 시켜 알아봤는데 정말 병원에 간 게 맞더라고. 임신 3주라는 사실까지 확인돼서 화도 나고 무서워서 호텔로 찾아가서 아이를 지우라고 협박했지.”말을 끝낼 무렵 송민아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다.“비록 진숙희가 너를 해친 게 내 의도는 아니었지만 내 책임도 있다고 생각해. 집에 가서 큰 소리를 지르며 화냈는데 아주머니가 내 편을 들어줫어. 하지만 난 절대로 아주머니가 너를 직접 해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고은서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고 물었다.“누가 너한테 그 문자를 보냈는지 알아봤어? 번호는 있어?”송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번호는 있는데 전화를 걸었을 때는 이미 없는 번호라고 되어있더라고.”“그 문자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무슨 목적으로 그 문자를 보냈는지는 의심해 보지 않았어?”“시후 오빠를 좋아하는 어떤 여자가 산부인과에서 너를 보고 나한테 알린 것 같아. 시후 오빠를 좋아하는 여자가 워낙 많아서 그들 중 몇몇은 다른 여자들을 몰아내려고 나를 이용하거든.”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너 말고는 나랑 민시후 사이를 오해한 사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