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은 다름 아닌 유혜린이었다. 조수연도 그녀와 함께 있었다.박지연은 전의 일로 약간 불쾌하긴 했지만 그래도 애써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어머니, 유혜린 씨.”“지연 씨, 제가 아줌마를 너무 오래 못 뵈어서요. 마침 오늘 휴일이라서 아줌마랑 데이트 중이었어요. 저녁 시간이 다 돼서 간단히 요기하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유혜린이 먼저 입을 열고 설명했다.“승준이는 병원에서 힘들게 일하면서 따뜻한 밥 하나 챙겨 먹기도 힘든데 넌 혼자 부귀영화를 아주 잘 누리며 다닌다.”조수연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시비를 거는 듯한 그녀의 말투에 박지연은 더는 다투고 싶지 않았다.“우리 다른 곳으로 가자.”육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박지연, 너 지금 무슨 태도야! 이젠 내 말은 듣기 싫다는 거야? 내가 틀린 말을 했어? 요즘 승준이가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알아? 넌 네가 남편 있는 몸이라는 건 기억이나 하고 다니니?”조수연이 호통쳤다.“아줌마, 화내지 마세요. 지연 씨도 일이 바빠서 그러는 거겠죠.”유혜린이 옆에서 조수연을 달랬다.“바쁘긴 뭐가 바쁘다는 거야! 그까짓 간호사밖에 안 되어서는 월급도 얼마 받지 못하면서 고집 하나는 세 가지고. 승준이를 챙겨주지 않는 건 둘째 치고 이 시어머니 전화도 받지 않는다니까. 교양 없는 년.”조수연이 씩씩거리며 말했다.“저기요, 여기 공공장소예요. 교양 있는 분이시라면 큰소리로 소란 피워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계실 텐데요.”육현석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넌 누구야!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조수연은 육현석의 말을 듣자마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내가 내 며느리를 교육하는 게 뭐가 어때서. 내 아들은 아직도 힘들게 일하고 있는데 저년은 기생오라비 같은 너하고 바람이나 피우려 하고. 내가 몇 마디 교육한 게 뭐가 어때서!”“어머니, 말이 지나치신 것 같은데요. 그냥 친구랑 밥 먹으러 나왔을 뿐인데 제가 언제 바람을 피웠다고 그러세요!”
박지연은 고은서를 보자마자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녀는 괜찮다고 고개를 저으면서 물었다.“네가 여긴 어떻게 왔어?”“육현석이 나한테 연락 왔어.”고은서가 말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집 안에는 조수연뿐만 아니라 온승준의 아버지 온범준도 소파에 앉아있었다. 두 사람은 일그러진 표정을 한 채 마음먹고 박지연의 죄를 물으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자연스럽게 박지연 앞에 막아섰다.온승준도 따라 들어오면서 말했다.“어머니,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지연이한테 호되게 굴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가족끼리 좋게 얘기하면 될 것을 왜 말도 없이 지연을 강제로 끌고 오면서 난리세요!”박지연 때문에 이미 기가 막힐 정도로 화났던 조수연은 그녀의 조력자들과 자신을 비난하는 아들을 보자 화가 점점 더 치밀어올랐다.분노가 극치에 달한 그녀는 휘청거리면서 하마터면 뒤로 고꾸라질 뻔했다.온범준이 황급히 소파에서 일어나 조수연을 부축하면서 자기 아들을 향해 호통쳤다.“온승준, 너 지금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우리가 며느리한테 물어볼 게 있으니까 여기로 데려왔겠지. 뭐가 잘못됐다고 그러는 거야!”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온승준 씨, 그쪽 부모님께서 지연이한테 물어볼 일이 있는 게 아니라 지연이를 거의 범인처럼 심문하는 것 같은데요?”고은서는 애써 예절을 지키며 온승준 부모님을 드러내고 비난하지 않았다. 그녀는 온승준을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면서 말을 이어갔다.“지연이는 당신 아내예요. 이 집안 도우미나 하인이 아니라고요.”온범준은 명성이 꽤 높은 교수였고 또 고은서가 집안사람도 아닌 데다가 문 쪽에 그녀가 데려온 범상하지 않은 남자까지 서 있어서 내뱉고 싶은 욕을 꾹 참았다.“승준아, 이 사람들 누구야? 우리 집안일을 처리하는데 끼어들지 말고 얼른 나가라고 해!”온범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집안일은 무슨. 우릴 다 쫓아내고 며느리 한 명만 잡고 괴롭히려고 그러는 거잖아요.”민시후가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다.“넌 또
온범준은 박지연이 해성에서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는 곽씨 가문의 장손이자 GS그룹의 대표인 곽승재와 아는 사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곽 대표님, 우린 그 누구도 모욕할 의도가 없었어요. 그저 집안일을 처리하는 것뿐인데 갑작스레 찾아와서 우리가 며느리를 괴롭힌다고 몰아붙이는 게 예의에 맞다고 생각하시나요?”“피해자인 것처럼 말을 바꾸지 마세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괴롭혔는지 안 괴롭혔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거든요.”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면서 반박했다.“우리가 언제 쟤를 괴롭혔다고 그래? 지금 그쪽한테 괴롭힘당하는 건 우리야. 레스토랑에서 만난 남자로 모자라서 또 두 명이나 불러와?”조수연이 씩씩거리면서 말했다.“어머니, 그만 하세요.”온승준이 미간을 어루만지며 조수연을 말렸다. 그리고 이내 뒤돌아 곽승재와 민시후에게 말했다.“두 분도 이만 가보시죠.”“지연아, 너도 은서 씨랑 먼저 돌아가 봐.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지금 이 상황에 말을 더 해봤자 조수연과 온범준 귀에는 변명으로 들릴 것이다. 박지연도 더는 자신을 모욕하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는지라 고은서와 함께 라이트문으로 돌아가려고 했다.“가자.”곽승재와 민시후가 먼저 나가고 박지연과 고은서가 두 사람 뒤를 따라 나가려고 했는데 뒤에서 조수연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자기가 진짜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봐. 그때 당시 승준이가 혜린이 새 남자친구를 보고 자극받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너랑 왜 결혼했겠어.”박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녀가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분쟁을 그치고 결혼 생활을 이어나가려고 노력한 이유가 온승준한테 그나마 미련이 남아서였다.그녀는 온승준과 결혼하게 된 게 하늘이 준 계시라고 생각하면서 그와 남남이 되기 싫었다.그러나 조수연의 말을 듣는 순간 모든 환상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나랑 결혼한 게 내가 마음에 들어서도 아니고 하늘이 준 계시도 아니었어. 그저 새 남자가 생긴 첫사랑을 약 올리기 위함이었어.’“지연아.”박지연과 함께 걷고 있던 고
“흥, 꼬락서니 하고는.”온승준이 입을 열기도 전에 조수연이 먼저 말했다.“정리하려거든 너부터 설명해. 오늘 너랑 같이 저녁 먹던 남자 누구야? 전에 비싼 외제차로 널 데려다준 사람도 그 남자지?”박지연은 헛웃음을 치면서 답했다.“맞아요.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나요? 이젠 하다 하다 제가 누구랑 밥 먹고 누구 차에 오는 것까지 관여할 생각이세요? 제가 이 집에 몸이라도 팔았어요?”“너너너! 승준아, 쟤 지금 무슨 태도인지 너도 봤지? 암만 봐도 오래전부터 이미 너랑 헤어지려고 결심한 게 분명해.”조수연은 화난 나머지 박지연의 진면목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 온승준을 향해 소리쳤다.온승준은 오늘 일이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어머니, 그만 좀 하세요.”온승준을 한숨을 내쉬며 조수연을 달래고는 이내 뒤돌아 박지연에게 말했다.“지연아, 나 하루종일 일해서 피곤해. 우리 내일 다시 얘기하는 거로 하자.”“그럴 필요 없어. 난 통보하러 온 것뿐이니까. 내일 구청 출근 시간이 되자마자 이혼 수속 밟으러 가자.”박지연이 덤덤하게 말했다.“지연아...”“누가 이혼 못 할 것 같아서 그래?”온승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수연이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이혼해. 대신 집이랑 차, 그리고 주식 다 승준이가 결혼하기 전에 혼자 산 거니까 넌 한 푼도 가질 생각하지 마.”박지연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면서 답했다.“걱정 마세요. 처음부터 온승준 재산 가질 생각도 없었어요. 그런데 이 년 동안 저를 하인 취급하면서 온갖 궂은일을 다 시키고 또 선물도 시도 때도 없이 사드렸는데 어떻게 갚으실 건가요?”“박지연, 입은 삐뚤어도 말은 바르게 해야지. 우리가 언제 널 하인 취급했어? 우리가 널 학대한 것처럼 말하지 마!”조수연이 씩씩거리며 말했다.“매달마다 생활비도 꼬박꼬박 주고 얼마 전에 금목걸이도 줬잖아. 벌써 잊은 거야?”“그럴 리가요. 그것도 다 포함해서 계산해드릴게요.”박지연은 폰을 꺼내 지출 내역을 보여주며 말을 이어갔다.“
“네. 그쪽 아드님이 우수해서 좋으시겠어요. 주제넘게 그쪽 아드님이랑 결혼한 제가 죄인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이 하인 취급 받는 기회를 다른 사람한테 넘겨주겠다잖아요. 다른 여자 보고 이 기회를 맘껏 누리라고 하세요!”박지연이 갑자기 조수연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왜 소리치고 난리야!”조수연도 따라 언성을 높였다.“내가 널 결혼하라고 강요했어? 네가 승준이랑 결혼하지 못해 안달이나 했잖아. 너만 아니었으면 승준이는 더 좋은 여자랑 결혼했을 거야! 너처럼 얼굴 빼고 볼 곳 하나 없는 여자랑 결혼할 리가 없었을 거라고!”“제가 차마 볼 곳이 없어서 저를 하인 취급하셨어요?”박지연이 눈시울을 붉히며 조수연을 바라보았다.“조수연 씨, 이 년 동안 계속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군요. 편찮으시다고 할 때 곁에 간호해준 사람이 누군데. 당신 세수시켜주고 발 씻겨주고 몸 닦아준 사람이 누군데! 저녁에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을 때 안마해준 사람이 누군데! 평소에 체조하겠다면 옆에서 같이 체조해주고 영화 보겠다면 같이 영화 봐주고 그리고 친척 만나러 갈 때마다 공들여서 꾸미고 같이 가준 사람이 나에요.“어디서나 당신 체면을 위해 당신 말이라면 거역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들었다고! 내가 이렇게 많이 노력했는데 내가 얼굴 빼고 볼 곳이 없다고?”조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비아냥거리는 듯한 눈빛으로 박지연을 쏘아봤다.“지연아, 그만해...”옆에서 듣고 있던 온승준은 마음이 아파오면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이혼은 하지 말자. 이후에 이렇게 힘들게 살지 않아도 돼. 내가 약속할게.”“아니. 이혼할 거야. 너도 지금 내가 불쌍하니? 지금 날 동정하는 거야?”박지연이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온승준, 사실 제일 나쁜 건 너야.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나한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잖아. 네 부모님이 날 싫어하는 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말이 돼? 내가 하인 취급 받으면서 매일 분주하게 보내는데 그걸 모르고 있었다고?”온승준은 가슴이
온승준은 어릴 적부터 좌절이란 걸 느껴보지 못하며 자랐다. 뭇사람이 계속 말하는 다른 집 안의 우수한 아이였다.취업해서도 많은 사람의 부러움과 아첨을 받고 다니는 상대였고 지금까지 칭찬만 받으며 살아온 사람이었다.이런 비난을 받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심지어 자신을 비난하는 상대가 자신이 직접 선택한 아내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결연한 표정으로 화를 억누르기 위해 이를 악물고 빨간 눈시울을 한 채 자신을 쏘아보는 박지연을 보면서 온승준은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그는 이혼하기 싫었다. 그는 자신과 박지연이 이혼할 정도로 사이가 나빠진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그러나 박지연의 태도를 보아서는 이혼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듯했다. 그녀는 내일 다시 얘기하자는 그의 말도 단칼에 거절해버렸다.온승준은 순간 무기력해졌다.그러나 그와 달리 박지연은 자신의 이 년간의 지출을 계산하기 시작했다.“해성 물가로 따지면 집안 도우미 월급이 이백만 원 정도가 되는데 난 이 집에서 이십오 개월 동안 도우미 일을 했으니까 오천만 원 주면 돼. 그리고 네 엄마가 편찮다고 드러누웠을 때 내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간호해줬잖아. 간호해준 인건비랑 식사비를 합하면 총 천만 원이야. 이외에 설날, 네 생일, 네 부모님 생일 선물, 그리고 친척들 만날 때마다 내가 준비한 선물값에 널 위해 사준 옷과 양말, 신발값을 합하면 육천만 원 정도야. 이것도 내가 적당하게 할인해서 계산한 금액이야. 못 믿겠으면 나중에 리스트 하나 짜줄게.”박지연이 차가운 목소리로 온승준의 마음에 못을 박았다.“아까 말한 금액을 다 합하면 총 일억 오천만이야. 지금 당장 계좌 이체해. 그리고 내일 이혼 수속 하자마자 우리 사이는 끝이야.”머리가 아파온 온승준은 미간을 어루만지며 박지연을 달래려고 했다.“지연아, 이러지 마. 우리 다시 잘 얘기해보자.”“난 이미 할 얘기 다 했다고 생각하는데. 더 끌어봤자 시간 낭비야. 설마 돈 주기 싫어서 그러는 거야?”박지연이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날 지금까지
조수연의 말을 듣자마자 온승준은 이혼하지 않고서 이 상황이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아니나 다를까, 박지연이 헛웃음을 치면서 맞장구를 쳤다.“그래. 당신 집 조건으로 공주한테 장가가도 충분한데 얼른 돈이나 줘. 그리고 내일 당장 이혼 증명서 받으러 가게 얼른 이혼 서류에 사인이나 해.”“승준아,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니? 애초에 박지연이랑 결혼할 때부터 우린 반대했어.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계속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야? 대체 뭘 망설이는 거야?”온범준이 입을 열었다.온승준 부모님과 박지연은 서로를 극도로 원망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태도도 엄청 결연했다. 온승준은 그 누구도 설득할 수 없었다.박지연과 그의 결혼생활도 이젠 정말 끝을 맺게 되었다.온승준은 부득이하게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돈은 내 계좌로 이체해주면 돼. 내일 오전 아홉 시에 구청 앞에서 만나.”“온 교수님, 조수연 씨. 온승준이랑 이혼한 후 입 함부로 놀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바람피운다니 온승준한테 잘못했다니 하면서 저한테 같잖은 누명을 씌울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이 년 동안 이 집 며느리로 살면서 겪은 수모를 하나도 빠짐없이 인터넷에 폭로해버릴 거예요. 온씨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다 까발려버릴 테니까 주의하세요.”“아무튼 저는 일개 간호사밖에 안 되는데 창피를 당해도 손해 볼 건 없어요. 이 일로 사람들 동정심이나 일으켜서 인플루언서로 살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그쪽은 교수인 데다가 아들은 또 병원에서 잘 나가는 의사지, 이런 스캔들이 폭로되면 손해가 어마어마할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헛소리한다고 얼버무릴 생각하지 마세요. 방금전 다시 돌아설 때부터 당신들이 한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녹음하고 있었으니까요. 어떻게 할지는 알아서들 결정하세요.”“너너!”박지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곧 실신할 것 같은 조수연과 얼굴이 일그러진 온범준을 뒤로 한 채 저벅저벅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예상 밖으로 고은서가 밖에
비록 박지연한테 하는 말이었지만 민시후의 시선은 고은서를 향했다.“저의 매력에 빠져 저를 좋아하게끔 말이에요.”고은서는 옆에서 민시후를 쏘아보았다. 반면 박지연은 웃음을 터뜨렸다.“알겠어요. 노력해볼게요.”“차는 내가 가져갈게. 내일 출근 시간 맞춰서 데리러 올게.”민시후는 고은서가 거절하기도 전에 쌩하고 가버렸다.“왠지 모르게 곽승재보다 더 끈질기게 널 따라다닐 것 같은데.”박지연이 웃으면서 말했다.“장난칠 기분이 있는 거 봐서는 괜찮나 봐? 왜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거야?”고은서가 박지연을 끌어안으며 물었다.박지연은 이내 턱을 치켜올리며 말했다.“내가 그렇게 쉽게 무너질 사람이야? 날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를 피곤하게 붙잡고 있을 필요도 없잖아. 버리면 되는 거지. 그렇다고 내가 그런 남자한테 목매면서 마음 아파해야 해?”진심인지는 몰라도 고은서는 그나마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전생에 상처투성이가 된 몸과 마음을 이끌고 먼 곳으로 떠난 것보다 훨씬 나은 결과였다.“지연아, 꼭 새로운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거야.”고은서가 진지하게 말했다.“이러지 마. 사람 오글거리게 왜 이래. 그 정도 위안까지 받을 정도 아니니까 그냥 평소처럼 해.”“...”고은서는 감성이 바사삭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이튿날.고은서는 평소와 달리 일찍 일어났다.박지연도 이미 일어나 있었는데 기분이 꽤 괜찮아 보였다.“오늘 할 일도 없고 한 데 구청까지 같이 가줄게. 얼마 전에 금방 갔다 와서 구청에 대해 좀 익숙하거든.”고은서가 일부러 장난치며 말했다.“그런 걱정스러운 눈길로 날 보지 않으면 아마 그 말을 믿었을 거야.”박지연은 그녀를 힐끗 보면서 답했다.“걱정하지마. 나 진짜 괜찮아. 온승준이랑 이미 다 얘기해 놓았으니까 별문제 없을 거야. 어제저녁에 나한테 2억 원 계좌 이체 해주면서 집 한 채랑 차 한 대 주겠다고 하는데 돈만 받고 집이랑 차는 사양했어. 내가 일부러 고집부리는 게 아니라 온씨 집안 사람들이랑 더는 엮이고 싶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