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유미의 이름이 나오자 고은서는 분노로 얼굴이 굳었다. “그냥 모두 다 잘못했어!” “어떻게? 구체적으로 말해봐.” 곽승재는 집요하게 물었다. 고은서는 전생에 겪은 일들을 떠올렸다. 정신병원에 가게 만든 것도, 사람을 시켜 자신을 고문해 위암까지 걸리게 한 것도, 고씨 집안을 무너뜨리고 외할아버지를 휠체어에 앉힌 것도 전부 백유미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일들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다만 하나 확실한 건 성아연이었다. 그녀는 백유미에게 매수당했고, 이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성아연과 백유미가 한패야. 내가 조사하라고 했잖아. 넌 조사했어?” 고은서가 차갑게 묻자 곽승재는 잠시 망설였다. “요즘 바빠서 아직 못 했어.” “바쁘다고? 그건 핑계야! 넌 애초에 내 말을 믿지 않았잖아. 네 머릿속엔 내가 백유미를 모함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없지!” 고은서는 곽승재를 밀어냈지만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결국 발로 그를 차자, 곽승재는 그녀가 발목을 삔 것을 고려해 마침내 그녀를 풀어주었다. “곽승재, 너는 백유미와 관련된 일만 생기면 항상 백유미를 믿고 날 믿지 않지. 그렇다면 왜 나랑 이렇게 애매하게 굴어? 이혼하면 서로에게 이득이잖아!” 고은서는 그렇게 말하며 홱 돌아서서 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날 밤을 제외하고, 그 후 며칠 동안 곽승재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거실 소파에서 잤다. 이제 서로 마주치지 않고 지내는 듯했다. 곽승재는 굳게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마음속의 불편함을 억누르고 결국 육현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만간 누구 자료 하나 보낼 테니 백유미와 어떤 관계인지 조사해 줘.” 육현석은 기꺼이 승낙했다. “형, 대체 무슨 일이야? 나한테 부탁할 정도라니. 형 휘하에 능력자들이 부족한 거야?” 곽승재는 짧게 대답했다. “그만 물어보고 조사나 해.” “알겠어. 반드시 임무 완수할게!” 육현석은 다시 물었다. “형, 형수님이랑 M국에 갔다고 들었는데
육현석의 말은 듣는 순간부터 허무맹랑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문제가 뭔지 알았더라면 굳이 이렇게 물어볼 필요가 있었겠는가? 곽승재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할 말 있으면 그냥 해.” 육현석은 귀를 비비며 말했다. “형, 지난번 일이 정말 형수님이 저지른 일이라고 믿어?” 곽승재는 직접 대답하지 않고 그날의 상황을 다시 설명했다. 약국에 가기 전, 고은서는 백유미 때문에 매우 기분이 나빠 보였다. 약국에서는 그녀가 직접 약을 고르고 계산까지 한 후 갑자기 태도가 누그러지더니 단팥빵을 먹겠다고 말했다. 이후 그녀는 차에 혼자 남았고 곽승재가 빵을 사러 갔을 때 고은서가 약 봉투를 건드렸다고 했다. “그래서 형수님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해?” 육현석이 물었다. 곽승재는 이 결론을 꺼리며 대답했다. “난 그저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야.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나는 은서랑 관련됐다고 한 적 없어.” 육현석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형, 내가 듣기엔 형은 이미 형수님을 의심하고 있어. 그러니까 형수님이 화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형이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거야.” 그 말을 들은 곽승재는 방에 들어가기 전 고은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백유미와 관련된 일이면 언제나 백유미를 믿고 나를 믿지 않잖아.” 곽승재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고은서가 결백하다는 증거가 있다면 당연히 믿겠지. 하지만 그 약봉투는 고은서 말고는 누구도 손댄 적이 없어. 어떻게 사실을 무시하고 고은서 편만 들 수 있겠어?” “어떻게 형수님밖에 없겠어? 백유미는?” 육현석은 가볍게 반문했다. 곽승재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건 고은서도 했던 말이었다. “유미가 거의 쇼크 상태까지 갔는데 정말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해?” “백유미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차치하고, 왜 형은 형수님을 좀 더 편들어주지 않는 거야?” 육현석은 답답한 듯 말했다. “형수님은 분명히 억울하다고 했잖아. 왜 형은 믿지 않
“자? 우리 얘기 좀 할까?”곽승재의 낮고 짙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조금 전, 두 사람은 크게 다툰 상태였다. 고은서는 더 남은 힘도 없는 상태에 곽승재에게 끌려가 한 번 더 그 짓을 해야 할 판이었다.“나 너무 피곤하고 졸려. 말 있으면 내일 해.”고은서는 차가운 음성으로 곽승재를 거절했다.고은서는 자신이 곽승재를 거절한 순간, 그가 당장 문을 열라고 강요하거나 협박이라도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런 예상과는 다르게 곽승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알겠어. 푹 쉬어.”대화가 끝나자 문밖은 다시 조용해졌다.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침묵에 고은서가 놀란 기색을 보였다. 곽승재가 이렇게 쉽게 포기한다고?게다가 그의 차분하고 평온한 목소리는 화를 억누르는 것 같지도 않았다.왜 갑자기 태도가 바뀐 걸까?됐다, 어차피 그녀와는 무관한 일이다.더 이상 깊게 생각할 기력조차 없을 정도로 지쳐버린 고은서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잠에 빠졌다.그렇게 잠이 든 고은서는 다음 날, 날이 밝고 나서야 잠에서 깼다.어제 너무 긴장했던 탓인지, 아니면 너무 빨리 달린 탓인지 힘을 너무 많이 쓴 다음의 피로감이 몸에 축적되어 있었다.몸이 너무 나른했고, 움직이기도 싫었다.잠시 더 누워 있던 고은서는 간단히 먹을 것을 챙겨 짐 정리를 마친 후, 오늘 밤이나 내일 돌아갈 생각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간단히 외투를 걸치고 바닥에 발을 디뎠다. 어제보다는 많이 나아진 것 같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않기로 했다.문을 열고 방을 나선 그녀는 천천히 주방으로 향했다.몇 걸음 떼지 않아 반 오픈형으로 되어있던 주방 안에 곽승재가 있는 것이 보였다.아직도 나가지 않은 건가?곽승재는 캐주얼한 옷차림으로 간이 조리대 앞에 서 있었다. 전기밥솥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향긋한 죽 냄새가 풍기고 있었고 곽승재는 숟가락으로 음식의 간을 보고 있었다.투명한 유리창을 뚫고 사선으로 들어온 햇볕은 곽승재의 몸을 비추며 그의 수려한 얼굴 반쪽을 비추고 반쪽 얼굴에
결국, 그 프라이팬이 모든 것을 다 짊어져 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곽승재는 또 한 번 헛기침하더니 재촉하듯 말했다.“얼른 먹어, 식기 전에.”고은서는 식탁 앞에 자리를 잡았다. 죽은 그럴싸하니 맛있는 냄새가 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숟가락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혹시 모를 정체불명의 맛에 두려움이 앞섰던 탓이다.고은서는 숟가락으로 죽을 조금 묻혔다. 그녀는 곽승재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혀를 내밀어 죽을 살짝 핥았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가 한눈을 판 사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았다.“너무 뜨거운 것 같아서 달걀부터 먹을게.”그래도 삶은 달걀이면 죽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맛없어봤자 그 정도가 있는 법이다.하지만 곽승재가 그런 고은서의 속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독 안 탔어!”말을 마친 그는 고은서가 보는 앞에서 자신이 만든 죽을 한 숟가락 크게 떠 입으로 넣었다.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고은서는 마음 놓고 껍질을 다 깐 달걀을 죽 안에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죽을 몇 번 휘젓다가 조심스레 한 입 떠먹어 보았다.다행히 먹을만했다.물을 조금 많이 넣은 탓에 죽의 걸쭉함이 조금 부족했고, 소금도 생각보다 많이 넣은 것 같긴 했지만 다른 건 다 괜찮은 것 같았다.고은서가 계속 죽에 신경을 쓰고 있던 그때, 곽승재가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너랑 민시후가 서로 아무 감정 없는 사이라는 건 나도 알아, 내 말은 민시후네 집이 재혼녀를 받아줄 것 같지 않다는 뜻이었어. 널 무시하려고 했던 건 아니야.”곽승재의 목소리는 평온했다.“어젯밤은 내가 말이 너무 심했어.”고은서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곽승재를 쳐다보았다. 약이라도 잘못 먹은 건가?왜 갑자기 이런 걸 해명하고 있지?“나랑 민시후 사이가 안 좋은 건 맞아, 하지만 민시후도 정말 쉬운 인간이 아니야.”곽승재는 달걀 껍데기를 까주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난 네가 단지 내가 싫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민시후랑 가깝게 지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고은서는 곽승재를 빤히 쳐다보았다.곽승재의 표정은 꽤 진지했고 눈빛에는 왠지 모를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곽승재는 이때까지 단 한 번도 고은서에게 먼저 자세를 낮춘 적도 없었고 사과의 말을 꺼낸 적도 없었다.고은서의 마음속에서는 이유 모를 씁쓸한 감정이 피어올랐다.그녀는 자신이 이제 곽승재가 어떤 말을 하든 아무 감흥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왔다.곽승재가 진심 어린 사죄를 건네며 후회를 해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하지만 지금 고은서는 여전히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마치 자신의 상처를 알아봐 주고 어루만져주길 원하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그리고 성인이 다 된 지금에 와서야 누군가에게 그 상처를 들켜버린 듯한 애틋하고도 씁쓸한 감정이었다.마음속으로는 어느 정도의 동요가 있을지 몰라도 오랜 시간 동안 치유하지 못한 상처는 이미 딱지가 않고 떨어져 지울 수 없는 흉터로 남아버렸다.“곽승재,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고은서가 물었다.“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데?”곽승재가 대답했다.“난 이 결혼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어. 하지만 우린 이미 1년 넘도록 결혼생활을 했고 나는 너한테 익숙해져 버렸어. 양가 가족들도 우리의 결혼생활을 응원해주고 있잖아. 이런 상황이라면 난 굳이 이혼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물론 네가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지 얘기해도 좋아. 사랑 감정 같은 건, 우리가 천천히 키워가면 되는 거고.”곽승재는 미래를 얘기하며 앞으로 잘살아 보려는 의지를 보였지만 고은서는 더 이상 그런 주제에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 곽승재. 이렇게 말해 줘서. 하지만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을 거야. 한때 나는 사랑이 가장 중요했던 사람이었어.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을 겪고 나서 사랑이라는 게 그 정도로 중요한 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어. 놓아버리면 그만이었던 거야. 그리고 난 그렇게 마음이 가벼워졌고 지금 너무 행복하거든. 드디어 나를 되
해성으로 가는 동안 곽승재는 주민기와 함께 일 얘기만 나눴다. 비행기에 탑승해서도 곽승재는 계속 업무 처리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고은서와 곽승재는 나란히 옆자리에 앉아있었지만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는 없었다.자연스레 자신만의 자유시간을 얻게 된 고은서는 편하게 비행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기내식으로 나온 식사를 마친 그녀는 좌석 등받이를 내려 편히 잠을 청했다.얼마나 잤을까. 갑자기 만난 난기류에 비행기가 흔들리자 고은서가 잠에서 깼다.왜인지 모르게 계속해서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너무 오래 앉아있어서 멀미라도 하는 건가?하지만 고은서는 지금껏 비행기를 타며 멀미를 한 적이 없었다.“왜 그래? 어디 불편해?”옆 좌석에서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가 눈을 떠보자 곽승재는 그녀가 잠들기 전과 같은 자세로 서류를 들고 있었다.“괜찮아.”고은서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아침에 금방 일어났을 때 느꼈던 피로와 무기력함이 한꺼번에 몰려와 다시 자리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여기 따뜻한 물 좀 갖다 주세요.”곽승재가 승무원에게 부탁했다.곧이어 승무원이 따뜻한 물이 담긴 컵을 들고 오더니 예의 바르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손님, 여기 따뜻한 물 나왔습니다.”곽승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물을 건네받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승무원은 테이블에 컵을 살며시 올려놓았다.“손님, 비행기 탑승 이후로 계속 서류만 보고 계시던데 흔들리는 기내에서 서류만 보시면 눈에도 안 좋거든요. 적당한 휴식도 취하시는 걸 권장드립니다.”승무원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초승달 같은 눈매에는 미소가 담겨 있었다. 곽승재에게 물을 건네줄 때는 매끈한 곡선의 몸매도 더욱 부각되었다.고은서는 빠르게 승무원의 의도를 알아차렸다.곽승재는 겉모습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남자였고, 그 특유의 냉정하고도 절제된 분위기는 여러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예전에 많은 여자들이 협업을 빌미로 곽승재에게 접근하려 했었다는 얘기를
고은서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곽승재가 승무원의 유혹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곽승재가 고개를 돌려 고은서의 표정을 확인하더니 곧바로 표정을 굳혔다.그는 손을 뻗어 고은서의 목을 끌어안더니 차가운 눈길로 승무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날 꼬시고 싶으면, 먼저 우리 와이프 허락부터 받으시죠.”승무원은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비행기 탑승 이후로 한 마디도 나누지 않던 두 사람이 부부일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도 못했다.“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무례하게 해? 그냥 전화번호를 남기려고 했을 뿐인데 뭘 꼬셔…”고은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곽승재는 기침이 나올 지경으로 그녀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팔에 힘을 조금 푼 곽승재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사무장님 불러오세요.”곽승재의 말에 승무원은 곧바로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복숭아꽃처럼 발갛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죄송합니다, 손님. 정말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제발 사무장님께는 알리지 말아주세요!”퍼스트 클래스에 탑승했던 승객을 건드렸던 탓일까, 그 소란은 금방 사무장을 불러들였고 상황파악을 마친 사무장은 곽승재와 고은서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전했다.그녀는 두 사람에게 이 사안을 엄중히 처리할 것이라는 약속까지 했다.“따뜻한 물 한 잔 더 갖다 주세요.”곽승재는 여전히 험악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사무장은 곧바로 승무원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다시 그들에게 따뜻한 물을 갖고 온 승무원은 두 사람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조심스레 테이블 위에 컵을 내려놓았다.“맛있게 드십시오, 손님.”말을 마친 승무원은 재빨리 그들에게서 거리를 두었다.곽승재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승무원이 건네준 따뜻한 물을 고은서에게 건네주었다.고은서는 의아한 눈빛으로 곽승재를 쳐다보며 말했다.“난 물 마시고 싶다고 한 적 없는데.”곽승재의 표정은 여전히 좋아 보이지 않았고, 말투 역시 딱딱했다.“몸 안 좋다며. 물
고은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곽승재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이렇게 늦은 시간에 너 혼자 움직이는 건 너무 위험해.”곽승재는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밖에 운전기사 대기 시켜놨어. 같이 차 타고 가자.”고은서는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아직 8시밖에 아 됐어.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니고, 우리나라가 치안 안 좋은 나라도 아닌데 위험할 게 뭐가 있어?”곽승재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네가 M국에서 며칠 동안이나 날 돌봐줬는데, 이렇게 귀국하자마자 널 공항에 버려두고 갈 수는 없어. 할머니께서 아시면 분명 난리 치실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할머니한테 혼나는 게 대체 자신과 무슨 상관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곽승재는 여전히 고은서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그들을 힐끗거리기 시작했고, 주민기는 창피한지 고개를 푹 숙인 채 투명인간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고은서 역시 이런 곳에서 창피를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그래, 같이 가자, 같이 가. 하지만 난 호텔로 갈 거야.”곽승재는 얇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말없이 고은서의 손을 잡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탓에 고은서는 자신의 짐도 챙기지 못했다.“내 캐리어!”고은서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외치며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짐을 챙기려 하던 그때였다. 주민기가 곧장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사모님, 짐은 제가 챙기겠습니다.”고은서는 여전히 곽승재에게 투덜거리며 말했다.“나 발 아픈데, 좀 천천히 걸어줄 수 없…”고은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곽승재는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집중되자 고은서는 밀려오는 수치심에 화가 났다.“곽승재, 너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나 좀 내려줘!”하지만 곽승재는 그런 고은서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잔뜩 화 난 듯한 발걸음으로 그녀를 들쳐 안고 성큼성큼 공항을 빠져나갔다.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눈을 질끈 감고 이 강제적인 “공주 대접”을 받아들여야 했다.다행히도 두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