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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배현수는 한 번도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놀랍도록 잘생긴 그 얼굴은 잔잔하면서도 차가운 호수 같았다. 마치 어떤 일에도 파도를 일으키지 않을 것 같았다.

배현수를 따라 손님을 만나러 온 강이찬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말을 꺼냈다.

“그런 즐겁지 않은 옛일은 꺼내지 맙시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유진아, 노래 두 곡 불러 봐.”

유승태는 손가락을 튕겼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조유진 씨가 대제주시 방송과 여신이었다면서요? 얼굴도 예쁘고 목소리도 듣기 좋다고 하던데. 노래로 여기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겠어요. 만약 오늘 유진 씨 노래에 배 대표님이 기뻐서 계약서에 동의한다면 우리 둘 사이의 일은 깨끗하게 끝난 걸로 하죠.”

유승태도 시원시원한 사람이었다.

조유진이 당당하게 물었다.

“그럼 여러분 어떤 노래 듣고 싶으세요?”

유승태가 말했다.

“오늘 배 대표님이 갑이니까, 배 대표님, 먼저 말씀하시죠.”

“전 아무거나요.”

배현수는 관심이 없어 그들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

강이찬이 곧바로 설명했다.

“제 기억에 유진이가 대학교 축제 때 영어 노래 ‘You-and-I’를 불렀었는데 엄청 잘 불렀던 기억이 있어요. 그럼 이 곡으로 하죠?”

You-and-I...

조유진은 심장이 쿵쾅 뛰었다.

유승태는 벌써 기다리지 못하고 재촉했다.

“유진 씨, 얼른 불러요!”

조유진은 한편에 있는 작은 무대에 서서 바이올린을 어깨에 놓고 줄을 당겼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전주가 울려 퍼졌고 마치 달빛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

무대에는 부드러운 불빛이 그녀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조유진은 흰색의 퍼프 소매가 달린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마치 예전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아가씨로 돌아간 듯 자태가 단아하고 우아했다.

배현수는 조유진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녀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

그러나 그때 그녀는 조씨 가문의 별장 마당에 앉아 있었고, 조범은 그녀를 이름난 아가씨로 키우기 위해 가장 실력 좋은 성악 선생님을 데리고 왔다.

조유진이 음정을 틀릴 때마다 조범은 그녀를 때렸고 요구가 엄청 엄격했다.

당시 배현수의 아버지 배희봉은 조씨 가문의 운전기사였다.

배희봉은 대제주대학교에 붙은 배현수를 데리고 와서 잠시 조씨 저택에서 머물렀었는데, 별장에 들어서자마자 배현수는 매를 맞고 있는 조유진을 보았다.

그때 조유진은 나이가 어렸고 12살밖에 안 되었다. 조유진은 바이올린을 잘 다루지 못한 탓에 조범에게 욕을 먹고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 그녀는 배현수를 따라다니며 현수 오빠라고 불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조범은 조유진이 기사의 아들과 너무 가깝게 지내는 것을 발견하고 배현수를 내쫓았다. 그리고 조유진에게 다시는 그런 날라리와 만나지 말라고 명령했다.

배현수를 만나기 전까지 조유진은 조범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다.

그러나 그때 만큼은 조유진은 조범의 말을 듣지 않았다. 배현수는 조유진의 학창 시절 유일한 반항 이유였다.

“All of those times, You were here with me, My eyes weren’t shut, But I didn’t see, How was I blind to your touch.

Your smile, your cares.

All my feelings, Were just not meant to be.

Now here I am,

All at once, alone...”

우아하고 부드러운 바이올린 소리와 함께 유창하고 멋진 영어가 느리게 흘러갔다.

사실 조유진의 목소리는 달콤한 편은 아니었다. 시원하고 화려한 편이라 영어 노래를 부를 때 일부 영어 단어를 의도적으로 더 부드럽게 발성한다. 때문에 노래가 맑고 조용히 깊게 흐르는 물소리 같이 들렸다.

조유진은 노래하는 동안 무의식속에 곁눈질로 몰래 배현수의 표정을 관찰했다.

강이찬은 왜 하필 이 노래를 말했을까.

이 노래의 뜻은 민감했다.

대충 이런 뜻이었다--

“지난 시간 동안

너는 늘 내 곁에 있었어

난 눈을 감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았지

난 어떻게 너의 손길을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무감각했던 걸까

너의 미소, 너의 관심

하지만 결국 내 모든 감정은 하늘이 허락하지 않았어

이제 나는 이곳에서 왜 혼자 나 자신을 마주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궁금해...

너와 나, 우린 서로 운명인 것처럼 보이네

너와 나, 우린 항상 방황하고 맴돌았어

너와 나, 어떻게 이 길의 끝에 왔을까?”

이 노래의 가사는 마치 조유진의 소리 없는 내레이션 같았다.

그녀는 배현수를 화나게 할까 봐 걱정되었다.

하지만 노래를 부르다 보니 노래에 점점 빠지게 되고 기분도 음악에 따라 모든 이성을 통제하게 되었다...

조유진의 눈물이 반짝이면서 흘러내려 바이올린 줄에 떨어져 부서졌다.

너무 많은 옛 추억이 떠올랐다. 아름답던 추억과 가슴 아픈 추억들은 전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에 연이어 나타났다.

“그만해!”

배현수는 갑자기 소리쳤다!

조유진의 속눈썹이 흔들렸고 음악이 멈췄다.

배현수는 일어나서 얼음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 일이 있어서 이만 가겠습니다. 유 사장은 만약 SY 그룹과 계약을 체결하고 싶으면 바로 강 대표에게 연락하면 됩니다.”

말을 마치고 배현수는 큰 걸음으로 곧장 걸어가 룸에서 나갔다.

유승태는 이번 계약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란 걸 알아챘다. 화용 기업은 서주시의 선도 기업이기 때문에 유승태는 배현수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유승태도 천천히 일어나서 배현수의 뒷모습을 보고 갑자기 웃으며 조롱했다.

“배 대표님, 전 여자친구를 데리고 나가서 이야기 좀 나누시지 그래요?”

배현수와 계약을 체결하러 오기 전에 유승태는 배현수에 대해 조사를 했었다.

배현수는 완전히 자수성가한 사람으로서 확실히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유승태의 관심을 끈 것은 배현수의 첫사랑이 유승태의 전 약혼녀라는 것이었다!

배현수는 조유진을 등지고 서서 말했다.

“저는 저 여자와 나눌 이야기가 없습니다.”

“조유진 씨는 제 약혼녀였던 사람이라... 배 대표님에게 숨기고 싶진 않아요. 저도 유진 씨에게 할 말이 좀 있는데... 배 대표님... 괜찮으시죠?”

사실 유승태는 조유진에게 관심이 없다.

하지만 그는 배현수와 잤던 여자에게는 관심이 많다.

그 말의 의미는 너무 명백했다.

배현수의 목소리에서 그의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몇 글자만으로도 배현수의 태도가 얼마나 무심한지 알 수 있었다.

무대에 서 있는 조유진의 아름다운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녀는 마치 마음대로 다뤄도 되는 물건처럼 유승태에게 넘겨졌다.

배현수의 뒷모습은 조유진의 희미한 시선 속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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