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들은 온권승의 얼굴이 순식간에 음침하게 굳었다.온자월은 주먹을 들어 벽을 힘껏 쥐여박고는 증오에 찬 눈으로 온사를 노려보며 말했다.“방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표정도 똑 같은 부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온사는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역시 핏줄이라는 건가?’그녀는 이런 역겨운 혈통이 자신에게도 있다고 생각하니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그녀는 담담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진국공께서 연세가 드셔서 귀가 잘 안 들리신다면 다시 말씀해 드리죠.”온사는 온자월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바로 온권승에게 공격적으로 말했다.마치 무시당한 느낌에 온자월은 분노에 사무쳤다.“온사! 너 죽고 싶어?”온자월이 비수를 꺼내려던 순간, 강렬한 살기가 상공에서 풍겨왔다.온권승 부자가 고개를 들자 언제 나타난 건지, 지붕 위에 검은 인영이 서 있었다.추월은 장검을 들고 매서운 눈빛으로 그들에게 무언의 경고를 날리고 있었다.이미 추월의 실력을 알고 있는 온권승과 온자월의 얼굴에는 경계가 서렸다.온권승은 시선을 거두고 온자월을 조용히 시킨 후, 무표정한 얼굴로 온사에게 말했다.“내 나이가 든 건 맞지만 귀가 먹진 않았어. 하지만 네 입에서 그토록 매정한 말이 나오는 걸 듣고 있기가 힘든 건 사실이구나. 차라리 못 들었으면 좋았을 것을.”온사는 피식 웃고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상한아가 다가와 그녀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온권승은 온사를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출가한 이후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우리 부녀 사이에 조용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는 것이냐?”“조용히 마주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요?”온사는 그의 말을 낮게 되뇌이며 비웃음을 지었다.“그 말… 참 우습게 들리지 않으십니까? 아버지?”“제가 진국공부의 사람들과 이 지경이 된 건 모두 아버지의 방관 때문이었죠. 조정의 권력을 쥐고 계신 진국공께서 설마 자식들 사이에 생긴 사소한 문제 정도 해결하지 못할 리 없잖아요.”“당신은 일부러 방관을 택하셨겠죠. 당
온사는 그쪽에서 적반하장으로 나올 것을 대비해 사태들에게 부탁하지 않았다.귀족 아씨의 사람이 바깥으로 나간 이후, 그녀는 주방에 깨진 그릇을 정리하고 가마솥에 든 탕을 버려버렸다.그 모습을 본 양 부인과 총독가 며느리가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말렸다.“아니, 성녀 전하! 왜 그걸 버리려 하시나요? 아직 절반이나 남았는데… 너무 아깝지 않나요?”온사는 그 말을 듣고 순진무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이건 설련화 미용탕이 아닌걸요.”“예?”양 부인과 이 부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게 설련화 미용탕이 아니라니요? 방금 전하께선 분명….”이 부인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그러고 보니 성녀는 이 솥에 든 것이 설련화 미용탕이라고 직접 말한 적이 없었다.다만 뜰에서 주방 안에 그것이 있다고 말했을 뿐이었다.두 부인은 황망한 눈으로 온사를 바라보았다.온사는 구석진 곳으로 가 눈에 잘 띄지도 않는 평범한 가마솥을 열었다. 안에서 농후한 향이 풍겨 나왔다.온사는 웃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이게 설련화 미용탕이랍니다. 저 솥에 건 평범한 야채탕인데 양조절에 실패해서 큰 솥에 끓인 것뿐이에요.”양 부인과 이 부인은 할 말을 잃었다.그러니까 충용 후작 부인이 기를 쓰고 들어와서 훔쳐먹은 게 평범한 야채탕이란 말이 아닌가!한심하고도 우스운 경우였다.온사는 설련화 미용탕이 든 가마를 밖으로 가지고 나갔다.이 부인은 옆에서 거들어 주려다가 온사가 홀로 가마를 번쩍 드는 모습을 보고 아연실색했다.그녀는 예전에 귀하게 자란 진국공부의 아씨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두 사람은 온사의 괴력에 놀라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를 도와 탕약을 그릇에 담고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사람들은 각자 한 그릇씩 마신 후에 약속이나 한 듯이 자리에 남았다.진국공부에서 사람을 보내오자 그들은 온사를 대신해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에 돌아갔다.온사는 그들의 호의를 알기에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사람들이 다 돌아간 후, 온사는 정원에 앉아 불청객의 도
그녀는 이렇게 하면 양 부인 일당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그걸 가만히 지켜볼 온사가 아니었다.온사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충용 후작 부인께서는 나이가 많이 드셔서 기억력이 안 좋아진 것 같군요. 저는 진국공부와 진작에 연을 끊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충용 후작 부인이 제 고모는 아니지요. 그리고 당신은 허락도 없이 제 처소에 발을 들이셨습니다.”“들었죠? 성녀 전하는 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시잖아요.”총독가 며느리는 비웃음을 가득 머금고 말했다.“그래서 말인데요. 이걸 두고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성녀의 거처에 몰래 잠입하여 도둑질을 시도한 겁니다!”“닥쳐!”온아려는 화가 나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녀는 사발을 바닥에 던지고는 고함을 질렀다.“누가 도둑질을 했다고 그래! 누가! 너 말 똑바로 해! 내가 그까짓 탕약 몇 그릇 마셨다고 침입이라니! 도둑질이라니!”“그게 왜 도둑질이 아니죠? 당신은 몰래 남의 처소에 들어왔어요. 그런 걸 침입이라고 하죠! 그리고 허락도 구하지 않고 밖에서 선착순도 기다리지 않고 사사로이 안으로 들어와서 탕약을 마셨는데 그런 걸 두고 도둑질이라고 해요!”“게다가 그것은 폐하께서 하사하신 설련화 아닌가요? 어찌 감히 그걸 몰래 훔쳐 먹을 생각을 했죠? 이건 폐하에 대한 불경입니다!”총독가의 며느리가 언성을 높이자 양 부인은 물론이고 온사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온아려는 치미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씩씩거리더니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쳇. 몰래 훔쳐 먹기까지 한 사람이 몇 마디 꾸지람 좀 들었다고 기절을 해?”총독가의 며느리는 바닥에 쓰러진 사람을 보고 혐오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그 뒤에 있는 다른 귀족 가의 아씨들은 감히 목소리도 내지 못했지만 흥미로운 표정으로 분쟁을 지켜보고 있었다.양 부인은 못 말린다는 듯이 말했다.“그만해요, 이 부인. 폐하에 대한 불경 얘기까지 꺼냈으니 겁에 질려서 쓰러진 거겠죠.”총독가 며느리는 콧방귀를 뀌고는 말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온아려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그녀는 주저없이 주방에서 사발과 국자를 찾았다.그리고 자신을 위해 한 사발 가득 담은 후, 그대로 마셔 버렸다.안에 뭘 넣은 것인지 맛은 아주 좋았다.온아려는 한 사발로 부족해서 자꾸 마시다 보니 어느새 다섯 사발을 마셔 버렸다. 배가 터질 지경이 되어서야 그녀는 드디어 사발을 내려놓았다.그리고 이때,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여러분, 잠시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설련화 미용탕은 이곳 제 주방에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가져다드리죠.”“에이, 어찌 성녀 전하께서 그런 시중까지 들게 하겠어요. 저희가 하겠습니다.”“예, 저희가 직접 떠다 먹을게요.”말을 마친 사람들은 주방 안으로 들어서다가 자리를 뜨지 못하고 손에 사발을 든 온아려를 발견했다.그 모습을 본 온사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역시 이 사람은 참 날 실망시키지 않는단 말이지.’그녀는 짐짓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한 듯 물었다.“충용 후작 부인, 지금 여기서… 뭐 하세요?”현장을 들킨 온아려도 당황했다.양 부인 일행은 경악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충용 후작 부인. 방금 왜 그렇게 빨리 달리나 했더니… 탕을 훔쳐 먹으려고 들어왔어요?”온아려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누가 훔쳐 마셨다고! 난 그저 집을 떠난 조카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와본 거라고요!”양 부인은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그런데 사발은 왜 들고 계신가요? 훔쳐 먹은 게 아니면 여기서 뭘 하고 있었죠?”오늘 이곳에 온 사람들은 모두 경성 사람이고 예전에 온아려가 어떤 식으로 온사를 도둑으로 몰아갔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나중에 섭정왕께서 충용 후작부로 찾아가서야 겨우 사건의 진실이 드러난 것도 알고 있었다.그때 성녀는 진국공부를 나간지 얼마 안 됐을 때인데 친고모에게 도둑 취급을 당한 것이다.이 일로 성녀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도 아주 많았다.성녀를 대하는 온아
“가서 네가 할 일을 해. 여긴 내가 있을 터이니.”막수도 최근 온사가 뭘 계획하고 있는지 알기에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고는 저 멀리서 이쪽을 지켜보는 한 사람을 보고 차갑게 코웃음 쳤다.“받을 수 있을 때 많이 받으렴. 예전에 란씨 가문은 아주 부유한 집안이었어.”온사는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알겠어요. 감사해요, 사부님.”곧이어 온사는 온아려한테 가려다가 막수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막수는 재미난 얘기나 들은 듯, 굳었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나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그래. 그건 나에게 맡기렴.”한편, 수월관으로 들어온 온아려는 날렵하게 자신을 가로막는 사태들을 따돌리고 수월관 주방을 찾았다.주방에 도착하니 가마솥에서 팔진 보신탕이 끓고 있었다.“거기 서. 그 성녀가 직접 끓인다는 설련화 미용탕은? 그거 재료는 어딨어? 빨리 말해!”질문을 받은 어린 사태는 온아려의 흉악한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라더니 이상한 표정으로 답했다.“무우… 아니 성녀 전하께서는 진작에 설련화 미용탕을 만드셨지요. 그건 성녀 전하의 처소에서 만들었고 여기 주방엔 없어요.”그 말을 들은 온아려는 세상이 다 무너진 기분이었다.“뭐? 이미 다 끓였다고?”‘망할 년이 뭐 이렇게 빨라?’온아려는 다급한 마음에 곧장 물었다.“온사의 처소가 어디지? 당장 말해!”“남쪽에 있어요. 여기서 나가서 왼쪽으로 돌다가 쭉 걷다 보면 보일 거예요.”위치를 확인한 온아려는 재빨리 그쪽으로 향했다.설련화는 이미 가마솥에 끓여졌지만 국물이라도 가져가서 조카에게 마시게 한다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아미타불.”그녀가 나간 후, 어린 사태는 두 손을 합장하며 뒤쪽을 향해 물었다.“사숙, 제가 무우의 처소를 저 사람한테 알려줬는데 별 문제 없는 거겠죠?”등 뒤에서 불조절을 하고 있던 사태가 말했다.“걱정할 것 없어. 무우가 어련히 알아서 잘 처리하겠지.”어린 사태가 얘기한 대로 따라간 온아려는 잠시 후 온사의 처소에
어느 사태가 나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온사였다.맨 앞에 있던 양 부인과 온아려도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 부인은 먼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반짝이며 온사에게 예를 행했다.“소인, 성녀 전하를 뵈옵니다.”양 부인의 목소리가 울려퍼지자 뒤에 있던 부인과 아씨들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예를 행했다.“성녀 전하를 뵈옵니다!”순식간에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잠잠해졌다.온사는 면사포로 얼굴은 가리고 있지만 무척 긴장하고 있는 온아려를 바라보고는 양 부인 일행에게 말했다.“일어나세요, 여러분. 자애로우신 폐하께서 저에게 설련화를 선물해 주셨고 여러분이 이렇게나 저를 믿어 주시고 찾아와 주셨으니 선착순으로 50명에게 설련화 미용탕을 대접해 드리겠습니다.”“뒤에 계신 분들도 너무 서운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 사부께서 여려분을 위해 팔진 보신탕과 인삼, 그리고 기혈과 혈액순환에 좋은 보약을 준비해 주셨으니까요.”뒤에 있는 부인과 아씨들의 표정이 밝아졌다.설련화 미용탕도 좋지만 백년 인삼을 넣고 끓인 팔진 보신탕도 여인에게 좋은 보약이었다.둘을 놓고 비교했을 때 설련화 미용탕이 비교적 효과가 좋을 뿐이었다.하물며 그것은 성녀가 직접 끓인 것이 아닌가.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래도 50명 안에 들기를 원했다.“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가서….”“온사!”맨 앞에 있던 온아려는 등을 꿰뚫을 것 같은 따가운 시선에 온사가 간다는 말을 듣자마자 다급히 그녀를 불렀다.온사는 계단에 서서 담담한 시선으로 온아려를 바라보았다.그녀에게서 풍기는 압박감은 온권승과 매우 흡사했다.온아려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했지만 결국 압박에 못 이겨 말을 꺼냈다.“온사… 아니, 성녀 전하, 제가 단독으로 드릴 말씀이 있으니 같이 들어가서 얘기 좀 나눌까요?”“싫습니다.”온사는 주저없이 거절하고는 뒤돌아섰다.“잠깐만요!”온아려는 다급히 그녀를 불러세웠다.“아니 정말 급한 일이라서 그래요. 저랑 같이 들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