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흉한 진왕의 덫에 걸리다

음흉한 진왕의 덫에 걸리다

By:  일비당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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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그는 숨을 헐떡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살려주면… 그대에게… 모든 것을 주겠다.” 이튿날, 그녀는 계약서를 내밀었다. “여기에 서명하면, 오늘부터 내 수하가 되는 거예요.” 집안의 혼인 강요에 그녀는 황숙의 청혼을 승낙했고, 혼인 직전, 새로 거둔 수하를 데리고 외지로 도망쳐 유유자적하게 지낸다. 이후, 뜬소문이 나돌았고, 풍문이 돌기 시작했다. “유 가문의 적녀가 정혼자를 버리고 웬 사내와 도주했답니다!” 얼마 후, 수하라는 자는 그녀를 끌어안고 사람들 앞에서 선언했다. “그 사내가 바로 이 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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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성 밖, 순화사.

이른 아침, 새벽종이 울림과 동시에, 막 밖에서 돌아온 유경서는 승방 안에서 황급히 야행복을 소복으로 갈아입은 후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고 하품을 하며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열두 살 정도 보이는 어린 몸종이 서 있었는데, 문이 열리자 그녀에게 문안을 올리고 세면도구와 아침 식사를 방 안으로 들여놓았다.

유경서는 차가운 눈빛으로 몸종이 물러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밤새 바삐 움직였던 그녀는 세수를 하자, 정신이 한결 맑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그녀는 오늘의 일과인 불경 필사를 시작했다.

그녀의 본명은 유솔, 21세기에서 갑자기 옥연국으로 차원 이동을 했다. 지금은 진국장군부의 적녀인 유경서로 살고 있다.

그녀가 순화사에 머물게 된 사연은 참으로 우스웠다.

태자에게 청혼을 받았지만, 대장군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극구 반대하며, 중병에 걸려 요양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그녀를 이곳에 보내버렸다.

가문에게 큰 도움이 될 혼사를 대장군이 탐탁지 않게 여긴 속사정을 이야기하자면 길어진다.

본처였던 유경서의 어머니가 세상을 뜬 지 반년 만에, 대장군은 사생아를 데려왔다. 이복동생이 어릴 때부터 밖에서 고생을 했으니, 언니로서 동생부터 보살피는 것이 마땅하기에 태자와의 혼사를 양보하라는 것이야말로 도리라고 했다.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떴고, 문밖에서 몸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 아가씨, 둘째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유경서는 고개를 들어 창밖의 하늘을 한번 쳐다보고는, 책상 위에 필사해 둔 불경을 정리했다.

“안으로 들이거라.”

방문이 열렸고, 화려하고 귀티 나게 차려입은 소녀가 들어왔다.

열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청순하고 아름다운 소녀는 막 피어나는 꽃 같았다. 하지만 아름다운 자태와 달리,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사람을 얕보는 시선으로 오만하게 들어왔다.

“어머, 언니, 불경은 다 베끼셨어요?”

소녀는 비꼬듯이 물었다.

유경서는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할 말이나 해. 입으로 똥을 쌀 거면 그만 나가.”

이 소녀는 유은진, 바로 유경서의 이복동생이었다.

유솔이 차원 이동을 하게 된 것도, 눈앞의 이복동생 때문이었다.

유은진은 유 가문의 유일한 자식이 되기 위해, 서슴지 않고 이 몸의 원주인이었던 유경서를 독살했다.

“제가 왜 여기에 왔는지 알고 있을 텐데요.”

밖으로 내쫓긴 신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고한 유경서의 모습을 유은진은 혐오스럽게 쳐다보았다.

“여기서 머리를 밀고 비구니가 되든가, 태자 전하의 청혼을 거절하세요. 안 그러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유경서는 광대놀음을 구경하듯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그리 대단하면, 직접 태자 전하께 널 태자비로 맞아달라고 말하는 것이 어때?”

유경서는 짐작이 간다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태자비는 존귀한 자리구나. 장차 국모가 되실 몸인데, 사생아 따위가 그 자리를 꿰찬다면 태자부의 다른 측비들이 가만있지 않겠구나. 소문으론, 측비께선 명문가의 적녀라지? 그런데 네가 그분 머리 위에 앉으면, 그분 체면은 고사하고, 그 댁의 체면도 말이 아니겠구나.”

“어디서 그런 모욕적인 말을!”

유은진은 날카로운 검에 찔린 것처럼, 얼굴이 분노로 잔뜩 일그러졌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들어 찢어발길 기세였다.

“모욕이라니? 내가 틀린 말 했니?”

유경서는 입꼬리를 올려 비웃었다.

그녀는 누군가의 씨받이가 되기 위해 시집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이복동생은 그 꼴을 당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오늘 경고하러 온 거예요. 사흘 안에 혼사를 거절했다는 소식이 들려야 할 거예요. 안 그러면 집으로 돌아올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유은진은 이를 갈며 모진 말을 내뱉더니, 분을 못 이겨 몸을 홱 돌려 나갔다.

“허!”

유경서는 헛웃음이 나왔다.

설령 그녀가 태자비가 되지 않는다 해도, 태자비 자리가 유은진에게 돌아갈 리는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 유정우는 병권을 쥐고 있고 공훈이 수없이 많아 조정과 민간에 명성이 자자하며, 옥연국에서 절대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으니, 태자가 그를 포섭하려는 것은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태자가 적녀인 그녀를 포기하고 사생아인 유은진을 부인으로 맞이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설사 태자가 동의한다 해도 황제와 황후가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점심 식사 후, 유경서는 낮잠에 들었다.

한숨 푹 자고 나니, 날이 어두워진 뒤였고, 그녀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저녁을 먹은 그녀는 침상 밑에서 야행복을 꺼내 갈아입었다.

오늘과 내일 밤만 잘 처리하면, 반년 동안 번 돈을 챙겨 사흘 안으로 경성(京城)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막 어둠 속으로 사라지려던 그때, 검은 그림자가 예고도 없이 공중에서 떨어졌다.

정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검은 그림자는 그녀를 덮쳐버렸다.

쿵!

엉덩방아를 찧으며 바닥에 나뒹굴고 나서야, 자신을 덮친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사내였다!

“살려주면… 그대에게… 모든 것을 주겠다.”

사원 밖.

그림자 몇 개가 숲속을 빠르게 누비며 지나갔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살기가 있었다.

누군가 분통을 터뜨렸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분명 이리로 숨어드는 걸 봤는데, 어찌 감쪽같이 사라졌답니까!”

다른 한 명이 초조하게 말했다.

“그분께서 진왕이 경성으로 돌아가기 전에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번에 놓치면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누군가 산꼭대기의 절을 가리켰다.

“저기로 숨은 거 아닐까요? 가서 확인해 봅시다!”

그가 발을 떼려는 순간 동료가 막아섰다.

“저 위에는 장군부 사람들이 있어, 경거망동하다간 들킬 수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일단 돌아가서 그분께 보고하고,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강구하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의 제안이 타당하다고 여겼다. 그들은 논의 끝에, 한 명은 숲을 빠져나가 산 아래로 향했고, 나머지 동료들은 흩어져 절로 통하는 길목들을 은밀히 감시하기로 했다.

승방 안.

유경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인사불성이 된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사람을 밖으로 내던지면 분명 자객으로 오인당할 테고, 그리되면 이 순화사의 평화는 깨질 것이다.

귀찮음을 감수하는 것은 두렵지 않았으나, 장군인 아버지가 이 일로 그녀를 다른 곳에 연금할까 봐, 걱정이었다.

장군부를 벗어날 기회가 눈앞에 다다랐는데, 이 일로 거처를 옮기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게 뻔했다.

하지만 이 덩치 큰 사내를 소리 소문 없이 처리하는 것도 일이었다.

몸에서 풍기는 피비린내를 맡으며, 그녀는 눈살을 찌푸린 채 침상 쪽으로 가 밑에 숨겨둔 물건들을 꺼냈다.

‘이번 한 번만 선행을 베풀어 보자.’

촛불도 켜지 않은 채, 그녀는 남자를 창가로 옮겨 창밖에서 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맥을 짚어보니 내력 손상이 극심했으나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고, 얼마간 요양하면 회복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수상태의 원인은 외상으로 인한 과다 출혈이었다.

유경서는 생전에 장군 집안에서 칼부림을 자주 접했기에 간한 치료법 정도는 알고 있었다. 유솔은 유경서의 생전의 습관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비상시에 대비해 치료 도구와 약재를 챙겨두었다. 하여 사람을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남자는 옆구리와 허벅지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상처 난 곳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은 뒤,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드디어 남자를 찬찬히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아까는 치료하느라 정신이 없어 그가 남자인 것도 잊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꽤 잘생겼다.

창백한 안색을 제외하면, 조각 같은 얼굴, 날카롭고 차가운 짙은 눈썹, 우뚝 솟은 콧날, 말라붙은 얇은 입술조차 관능적이고 아름다웠다. 어디 하나 빠지는 곳 없이 정교하여 그림 속 인물이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리고 남자의 체격은 황홀할 정도로 훌륭했다. 눈대중으로 봐도 키는 180이 넘을 것 같고, 넓은 어깨, 탄탄한 근육은 늠름했고, 다리의 털조차 남자의 양기를 뿜어냈다.

특히 그….

흠흠!

그녀는 색을 탐하지 않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황급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요물 같으니라고!’

다음 날 아침.

새벽종이 울리고, 몸종이 어김없이 문밖에 나타났다.

유경서는 문을 열고 몸종이 가져온 물과 음식을 받은 뒤 차갑게 말했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잠만 잘 것이니, 별일 없으면 깨우지 마라.”

“네, 큰 아가씨.”

몸종은 순순히 물러갔다.

몸종이 물러간 것을 확인한 후, 유경서는 문을 닫고, 음식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곧장 방구석의 병풍 뒤로 향했다.

남자는 병풍 뒤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그녀가 병풍 뒤로 들어서자마자 차가운 눈빛과 시선이 마주쳤다.

부인할 수 없었다. 그 가늘고 긴 눈매는 지극히 아름다웠으나, 지금은 날카로워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

“정신이 들어요?”

남자는 깨끗한 야행복으로 갈아입었으나, 치수가 작아, 그의 건장한 체격을 감당하지 못해 앞섶이 닫히지 않아 매끈한 가슴 근육이 훤히 드러났고, 양쪽 어깨와 팔 부분은 당장 터질 듯 위태로웠다. 다행히 바지는 끈으로 묶는 방식이라 짧긴 해도 중요한 부위는 가릴 수 있었다.

“그대가 날 구한 건가?”

남자는 대답 대신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고, 그 안에는 약간의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유경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마찬가지로 대답 대신 물었다.

“혹 약속을 잊은 겁니까?”

남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눈동자를 굴려 기억을 더듬었다.

유경서는 차가운 얼굴로 소매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모든 걸 주겠다고 했던 말은 잠시 접어두고, 일단 이 청구서부터 보시지요.”

남자의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이 그녀의 얼굴에서 그녀가 내민 종이로 옮겨졌다.

남자는 손을 들어 그것을 받아들었다.

종이에 적힌 내용을 훑어본 순간, 잘생겼던 얼굴은 순식간에 싸늘해졌고, 온몸에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건 약탈이 아니오?”

“약탈이라니요?”

유경서는 입꼬리를 쓱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은자가 아니었다면 제가 그쪽을 구해줄 이유는 없어요. 당신 목숨값이 8만 냥이나 될까 싶겠지만, 제가 들인 인력, 물자, 그리고 낭비된 시간 손해는 8만 냥으로도 살 수 없는걸요.”

그녀의 미소는 태양처럼 찬란하여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으나, 연기준의 눈에는 그 환한 미소 뒤에 검은 속셈이 가득해 보였다.

“만일… 내게 이 정도의 돈이 없다면?”

“그럼 내 밑에서 일해서 갚으세요.”

그가 오리발 내밀 것을 예상했다는 듯, 유경서는 소매에서 종이 한 장을 더 꺼냈다.

“일해서 갚으라니?”

연기준은 종이를 확 낚아챘다.

앞서 본 종이에는 온갖 명목의 비용이 적혀 있었다. 진료비, 약값, 청소비, 인력 손실비, 업무 지연 손상비, 심신 피해보상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는 23년간 이렇게 교묘한 명목으로 빚을 지게 하는 수법은 듣도 보도 못했다.

황당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그녀가 새로 건넨 종이는 청구서가 아니라 계약서였다.

‘본인 ( )은/는 금일 유경서에게 8만 냥을 빚졌으며, 상환할 능력이 없으므로 유경서 곁에 머물며 모든 명령에 복종하고, 유경서를 도와 8만 냥을 벌 때까지 자유를 유보한다. 유경서를 위해 일하는 동안 다음 사항을 준수한다. 1. 아무에게도 유경서의 신분을 누설할 수 없다. 2. 유경서가 하는 모든 일을 누구에게도 누설하지 않는다. (본 계약의 최종 해석 권한은 유경서에게 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한 그의 눈빛이 복잡했다.

“그대는, 진국장군 유정우의 여식인가?”

유경서는 팔짱을 끼고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그렇습니다.”

낯선 이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게 놀랍지 않았다.

유정우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유명했고, 옥연국은 물론이고 주변국들의 거물들 사이에서도 유정우는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유 가문의 적녀인 그녀를 모른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남자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발견한 그녀는 자신이 제시한 조건에 불만인 줄 알고 계약서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이건 단순한 고용 계약서일 뿐 노비 문서가 아니니 안심하세요. 아버지인 진국장군의 이름을 걸고, 절대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하지요.”

연기준은 여인의 경국지색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진국장군의 여식이 어찌 이리 궁색하게 사는 것인가?”

궁색하다는 말은 점잖은 표현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구해준 은인이 아니었다면, 당장 죄를 물어 목을 베어버렸을 것이다!

유경서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짜증이 났다.

“진국장군의 여식이라서 아무나 구하지 않는 것이니, 몸값이 당연히 비쌀 수밖에 없지요!”

연기준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남의 돈을 갈취하는 그녀의 행태가 못마땅했지만, 지금 은혜를 입고 남의 집에 얹혀있는 처지라 8만 냥 빚을 갚을 수밖에 없었다.

연기준은 몸에 걸친 옷을 내려다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쪽 옷인가?”

“네.”

“내 몸을 봤겠군?”

유경서는 눈을 흘기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심신 피해보상이 나온 겁니다. 여인의 몸으로 눈병 날 위험을 무릅쓰고 피를 닦고 상처를 치료한 제 기분은 생각해 봤습니까?”

연기준은 다시 얇은 입술을 꽉 다물었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말속에서 억울함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혐오감 또한 느껴졌다.

결국 연기준은 손가락 끝을 깨물어 먹 대신 피로 종이에 서명하고 지장을 찍은 뒤, 종이를 그녀에게 던졌다.

유경서는 손을 뻗어 종이를 받아 들고는 확인했다.

“이름이 기준입니까?”

연기준은 얼굴을 굳힌 채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유경서는 입을 삐죽거리며 계약서를 잘 접어 품속에 넣고는 몸을 돌려 병풍 밖으로 나가 탁자에서 세수하고 아침을 먹었다.

아침 식사는 매우 소박하게 나왔다. 아침마다 쌀죽 한 그릇과 채소 만두 하나가 나왔다.

그녀는 병풍을 한 번 쳐다보면서 쌀죽 반 그릇을 마시고 채소 만두 반 개를 먹은 뒤, 다시 병풍 안으로 들어가 남은 쌀죽 반 그릇과 만두를 그에게 건넸다.

그녀가 건넨 음식을 확인한 남자의 얼굴이 검게 변했다.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먹다가 남은 걸 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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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부인할 수 없었다. 이 황자 또한 눈을 즐겁게 하는 미남이었다. 맑은 눈, 하얀 피부, 무엇보다 귀한 것은 소탈한 행동거지였다. 차갑고 화려한 태자와 비교하면, 이 황자는 부드러운 햇살처럼 친근함을 느끼게 했다.“언니, 이 황자께서 언니를 얼마나 아끼시는지 보세요!” 옆에 있던 유은진이 유경서의 팔짱을 끼며 친근하게 말했다. “이 황자께서 성 밖에서 돌아오시자마자 언니가 순화사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오셨어요. 마침, 언니한테 먹을 거 가져다주러 가는 길에 만나서 같이 올라온 거예요.”유경서는 무표정하게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너무 가까이 붙지 마. 너한테 병이라도 옮기면 난 죄인이 돼.”장님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그녀가 유은진을 싫어한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유은진의 안색이 좋지 않게 변했다. 하지만 연용태가 보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금세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연용태에게 말했다. “황자 전하, 곧 점심때인데 오늘은 절에서 식사하시는 것이 어떠세요? 마침, 먹을 걸 좀 가져왔으니, 절에 부탁해 채식 반찬 몇 가지 더해서 드시는 게 어떨까요?”“나는.”“네가 모시고 식사하거라. 난 약 때문에 다른 건 못 먹어.” 유경서는 차갑게 거절하며 연용태의 말을 끊었다.하지만 연용태는 화내기는커녕 오히려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경서야, 네 모습이 참으로 마음 아프구나. 이대로는 안 되겠다. 나와 함께 경성으로 돌아가자. 어의에게 제대로 진찰받게 해주겠다.”그 말에 유경서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짐짓 괴로운 척 기침을 했다.“쿨럭, 쿨럭. 호의는 마음만 받겠습니다. 제 병은 워낙 희귀하여 어떤 약으로도 고치기 힘들 것입니다. 별일 없으시다면 일찍 돌아가 주십시오.”그녀는 꿈에도 몰랐다. 태자 말고도 이 황자도 그녀에게 마음이 있을 줄은.원래 인기 있는 건 자랑스러워할 일이었다. 21세기 사회에서도 그녀는 인기를 즐겼다. 하지만 그때도 연애할 생각은 없었고, 하물며 이 낯선 세상에서는 더더욱 아니었다.그녀는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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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순화사.유경서의 제안을 연기준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날 밤 장주와 우휘는 멀리서 온 향객으로 위장해 꽤 많은 은자를 내고 당당히 절 안에 머물게 되었다.그들이 머무는 승방은 그녀의 경방에서 작은 정원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그들이 여기서 지내니 그녀도 한결 편해졌다.유은진이 다시 찾아와 행패 부릴 것에 대비하고 있었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조용했고, 유은진은 다시 오지 않았다.대신 옆 승방에서 아침을 먹던 연기준이 밥상을 엎으며 성질을 부렸다.“이 황자도 유 가문에 청혼했다고? 유정우가 자기 여식을 그에게 주기로 했단 말이냐?”“전하, 노여움 푸십시오.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유 장군이 누구의 혼사를 정한 것인지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우휘가 급히 그를 위로했다.“네 생각엔 누굴 시집 보낼 것 같으냐?” 연기준은 얼굴을 붉히며 되물었다.“그,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우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모르는 척했고, 옆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장주는 참지 못하게 한마디 했다. “아가씨께서 전하의 은인이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좋아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것이 여인입니다. 그분 때문에 흙탕물에 발을 담그실 생각입니까?”연기준은 자기 무릎을 내려다보며 한동안 침묵했다. ‘좋아한다고? 겨우 며칠 만에, 어떻게 좋아하게 될 수 있는가!’그는 그저 자신이 희롱당했다고 느꼈을 뿐이다.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오히려 협박하고 노예처럼 부리려 했으니, 억울하고 분해서 이러는 것이다! 다 나으면 반드시 본때를 보여줄 것이다! 복수하기 전까지 시집가면 안 되지! 시집가서 뒷배라도 생기면, 내가 당한 굴욕을 어떻게 갚겠는가?’장주와 우휘는 은밀히 눈빛을 교환했다.그를 잘 타일렀다고 생각한 순간, 연기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너희는 부로 돌아가 예물을 준비해라. 즉시 유 가문에 청혼하러 가야겠다!”“네?” 두 호위무사는 동시에 소리쳤다.“내일 내가 청혼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거든, 내 앞에 나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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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이마의 잔머리를 쓸어 올리고 고개를 들어, 지붕을 경멸하듯 쳐다보며 거만한 투로 말했다. “듣자 하니 진왕께선 처와 자식을 죽이는 운명이라더구나. 하지만 나는 신세대 재녀로서, 지덕체를 골고루 갖춘 인재이지. 천문을 알고, 지리를 알며, 문무를 겸비하여 스스로 설 수 있는, 하늘에 올라 태양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절세풍화의 여인이다. 사내는 그저 내 지능을 방해하고 돈 버는 속도를 저해할 뿐이야. 그런 내게 한 남자에게 목을 매라니?” 그녀는 장주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속이 터져서 말이 안 나온다.”장주는 멍하니 그녀를 쳐다봤다.‘저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그뿐만이 아니었다. 우휘와 연기준도 그녀를, 괴물을 보듯 쳐다보았다. 특히나 무릎 위에 놓인 두 손을 꽉 움켜쥔 연기준의 잘생긴 얼굴은 먹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새까맣게 변했다.‘나와의 혼인을 속 터지는 일이라고 하다니. 게다가 절세풍화의 여인? 결국 나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폐물이라고 욕하는 것이 아닌가!’그는 살면서 이처럼 뻔뻔하게 자신을 하늘 끝까지 치켜세우는 여인은 처음 본다.살기를 느낀 그녀는 살기의 근원지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눈을 감고 있던 사내의 표정이 극도로 험악하다는 것을 발견했다.“혹 중독이라도 된 거예요?”“커헉! 커헉!” 정신을 차린 장주는 자기 침에 사레들릴 뻔했다. 진왕께서 사람을 죽일듯한 분노로 보이자, 그는 기침을 진정시키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아가씨, 아마, 아마 아까 드신 약이 너무 써서, 지금 속이 메스꺼우신 것 같습니다.”그녀는 소매 속에서 청자두 두 알을 꺼내 연기준에게 내밀었다. “이걸로 쓴맛을 가라앉혀요.”연기준은 두 주먹을 꽉 쥐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장주는 황급히 청자두를 받아 들고는, 은근슬쩍 연기준 앞에 가로막으며 싱긋 웃었다.“아가씨, 이리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희 주인님께서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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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해가 지기 전, 유경서는 장주를 데리고 학당 주변을 한 바퀴 돌며 지형을 익히게 했다.밤이 되자, 그녀는 홀로 진왕부로 향했다.진왕부는 경계가 삼엄할 것이 분명했다. 불행히 잡힐 시, 핑계까지 미리 생각해 두었다. 그때가 되면 진왕 전하가 궁금해서, 얼굴도 볼겨, 진왕부를 겸사겸사 구경할 겸 왔다고 말하고, 구경하는 틈을 타 물건을 훔칠 계획이었다.진왕부에 도착한 높은 담장 위에 앉아, 눈을 가늘게 뜨고 집 안의 상황을 열심히 살폈다. 하지만 한동안 발을 내디딜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저택 안은 칠흑 같았고, 불꽃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버려진 고택에 온 것 같았고,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어두컴컴했다.이것이 다가 아니었다.그녀를 더 놀라게 한 것은, 저택 안에 사람의 그림자가 없는 것은 둘째로 치고,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심지어 호위병조차 없었다!‘칠흑 같은 밤에, 도둑이 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인가? 아니, 오늘 내가 도둑질을 하러 왔구나!’ 캄캄하고 사방에서 기이한 고요함이 스며 나오는 저택을 보고 있으니, 겁이 나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녀가 모르는 사이, 어둠 속에서 수많은 눈이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고, 그녀의 다음 행동을 놓칠세라 숨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참을성이 바닥난 우휘가 연기준 옆에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전하, 아가씨께서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요? 장주가 훔치러 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찌 움직이지 않는 걸까요?”집사 경승이 그들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전하, 아가씨께서 의심을 품은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 사람들을 모두 철수시키셨으니, 누구라도 의심할 것입니다.”연기준은 미간을 찌푸렸다.‘사람들을 철수시킨 것이 잘못되었단 말인가?’그는 그녀가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방해받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었다!우휘가 맞장구쳤다. “전하, 경승의 말이 맞습니다. 전하께서 사람들을 모두 철수시키시니, 오히려 귀신 들린 집 같습니다.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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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총이야!” 그녀는 그의 손에 들린 아이를 걱정하며, 가장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녀보다 더 빠른 사람이 있었다. 주삼이 땅에 쓰러지기 전에 총이를 낚아챈 사람이 있었다.장주인 것을 확인한 그녀는 순간 안도하며, 곧장 앞으로 가서 겁에 질린 총이를 품에 안았다.“총이야, 괜찮아. 나쁜 사람은 이미 쓰러졌단다!” 그녀는 아이를 토닥이며 고개를 숙여 풀밭을 내려다봤다.주삼의 목에서는 피가 계속 솟구쳐 나왔고, 눈은 튀어나올 듯 부릅뜨고 있었다. 이미 숨을 거둔 것 같았다.그녀는 총이가 겁먹을까 봐, 재빨리 아이를 안고 대나무 오두막으로 돌아갔다.오두막 안의 안이와 해우도 이미 풀려나 있었다.방 안에 새로 나타난 사내를 보고, 그녀는 문 앞에서 잠시 멈칫하다가 총이를 땅에 내려놓고 앞으로 나서서 진심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두 분께 감사드립니다.”“그래.” 연기준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그녀의 인사를 받아들였다.유경서는 몸을 일으키더니, 갑자기 겉옷을 들어 올렸다.그녀의 허리에는 끈이 둘리어 있었고, 그 끈에는 여러 개의 천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다. 각 주머니는 손바닥만 한 크기였다. 그녀 스스로 옷을 들추지 않았다면, 누구도 그녀의 옷 안의 것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연기준의 눈가가 무의식적으로 떨렸다.그녀는 그중 한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바로 그들이 서명한 계약서였다.“더 이상 내게 빚진 것은 없어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계약서를 내밀었고, 그는 잠시 멍해졌다. 이 시점에 그들의 계약을 해지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단지 이 몇몇 아이들 때문인가?’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땅바닥에서 여전히 눈물을 훔치고 있는 세 꼬마를 훑어보다가, 시선을 거두고 그녀의 손목을 밀어냈다. 그는 차가운 얼굴로 대나무 오두막 밖으로 걸어 나갔다.“군자는 한마디 말로 천하를 이끄는 법! 8만 냥의 은자를 벌어주기로 했으니, 절대 그 약속을 어기지 않을 것이오!”유경서는 말없이 길쭉한 그의 뒷모습을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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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그녀는 말없이 아이들이 공부하는 교실로 갔다.뜻밖에도 교실에는 등불이 켜져 있었는데, 연기준 등불 옆에 앉아 책상 위의 책들을 읽고 있었다.그녀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대방지가 들어왔다.그가 책들에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을 보고, 대방지는 서둘러 앞으로 나아가 설명했다.“이 시가들은 모두 아가씨께서 직접 편찬하신 것입니다. 아가씨께서는 정말 세상에서 보기 드문 재녀입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할 뻔했다. 솔직히 말해, 좀 민망했다. 왜냐하면 이 시가들은 그녀가 지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운반자였을 뿐이다, 미래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연기준은 고개를 들어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광선으로 그녀의 살을 꿰뚫고 오장육부를 샅샅이 보려는 것처럼 집요하게 쳐다보았다.“그대가 지은 것이오?”“큼!” 유경서는 마른기침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졸렬한 시일 뿐이에요. 재미 삼아 쓴 것이에요.”‘졸렬한 시?’연기준은 눈썹을 찌푸렸다. ‘이토록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구절 하나하나가 명구라 칭할 만한데, 이것이 졸렬한 시라고? 유정우에게 언제 이렇게 지혜로운 여식이 있었단 말인가? 어찌하여 이런 인재가 한 번도 알려지지 않았을까?’“그게, 시간이 늦었으니, 쉴 곳을 찾아봐야겠어요. 객잔이 문을 닫았는지, 한번 찾아보겠어요.” 유경서는 서둘러 화제를 돌리며 대방지에게 말했다. “하루 종일 가슴 졸였을 텐데, 내일은 하루 쉬세요. 모두 잘 쉬어야지요.”“아가씨, 염려하지 마십시오. 학당은 저희가 잘 지키겠습니다. 절대로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대방지는 그녀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그럼, 저희는 가볼게요. 내일은 다른 볼일이 있어, 저녁에 찾아올게요.” 유경서는 말을 마치고, 등불 옆으로 가서 불을 껐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손에 들린 책을 낚아채 대방지에게 돌려주었다.그 사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녀는 그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어둠 속에서 연기준은 입술을 꽉 다물고,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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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연기준은 그녀를 흘겨보았다. 가슴에 피가 끓어오르는 듯했지만, 차마 토로할 수 없었다.장주와 우휘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두 사람은 서둘러 대답하고 자리를 떴다. “아가씨, 지금 바로 처리하고 오겠습니다!”그들이 떠나자, 유경서는 다시 옆에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상처는 괜찮아요?”“거의 나았소.”“다행이네요.” 그의 차가운 목소리를 들으며, 유경서는 코를 문질렀다. 괜한 말을 한 것 같았다. 계속 어색한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 “복래 객잔에 방을 잡았다고 했지요? 거기로 가요!”막상 말을 마치고 나니, 조금 민망해졌다. 두 사람이 함께 방을 잡으러 가는 것처럼 들렸다.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의 차가운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았고, 입꼬리도 살짝 올라갔다.그녀는 전형적인 올빼미족이었고, 하물며 오늘 밤의 일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이상, 더 잠들 수 없었다.복래 객잔에 도착하자, 그녀는 점원에게 먹을 것을 방으로 가져오게 했다.연기준도 사양하지 않고, 곧장 그녀의 방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서로를 알게 된 이래, 처음으로 한 상에서 식사를 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분위기가 즐거워야 했지만, 고개를 들어 남자의 냉정한 얼굴을 보자, 목까지 올라왔던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아예 먹는 데 집중했다. 오른손으로는 젓가락을, 왼손으로는 닭 다리를 들고, 쩝쩝 거리며 반찬과 닭 다리를 번갈아 먹었다. 연기준은 오랫동안 젓가락을 들지 않고, 그저 그녀의 과장된 모습을 지켜보았다.혐오하는 기색은 없었지만, 괴물을 보는 듯한 느낌이 약간 있었다.“정말 진왕에게 시집가고 싶지 않은 것인가?”“음.”그녀는 고개를 들고, 입안의 닭 다리 살을 삼킨 후, 해맑게 웃었다. “시집에 관해 생각을 안 해봤어요.”“만약 진왕이 보기 드문 좋은 사람이라면?”“어휴!” 유경서는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 그들이 자신의 혼사에 대해 매우 궁금해한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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