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민준은 연미혜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고 경다솜의 콧등을 가볍게 쓸어내렸다.“아빠는 일이 있어서 못 가니까 엄마 말 잘 들어. 알았지?”“네.”경다솜은 결국 삐죽 튀어나온 입으로 대답했다. 고개를 돌려 연미혜를 보더니 곁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어 손잡아달라고 했다. 먼저 화해하자는 의미기도 했다.아이의 손을 잡은 연미혜는 집사와 인사를 한 후 집을 나섰다. 연씨 가문으로 도착했을 때 노현숙은 이미 한참 전에 와 있었다. 두 사람을 본 노현숙은 경민준이 보이지 않자 바로 표정이 굳어졌다.“민준이는? 또 바쁘다고 하든?”“네.
연미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통화가 끝나고 나니 그녀는 또 재채기하게 되었다.그녀의 외숙모 하여진은 그녀가 감기에 걸린 것은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던지라 주방으로 들어가 생강차를 끓여주었지만 한 모금 마시고 나니 더 머리가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잠들고 말았다.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이마는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고열에 시달리게 된 그녀는 머리가 너무도 어지럽고 무거웠다. 경다솜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조금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엄마, 아파요?”“응.”노현숙도 그녀가 걱정되었는지 그녀에게
이혼서류에 연미혜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작성했다. 이혼 위자료는 물론이고 경다솜의 양육권 문제도 깔끔하게 포기하면 이혼이 빠르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혼서류를 남겨놓고 귀국한 지 3개월 정도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연미혜는 고개를 들어 그에게 물어보려던 순간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와 경준혁의 목소리가 들렸다.“형수님, 아프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좀 괜찮아요?”연미혜가 대답하기도 전에 경민준이 대답했다.“들어와.”조금 전 방에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렸던지라 문을 닫지 않았었다. 경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경준혁은
연미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경준혁의 문제집을 손에 들었다. 경준혁의 성적은 꽤나 좋은 축이었다. 기본도 탄탄해 연미혜가 문제집을 들고 경준혁에게 살짝 방법을 알려주자 바로 문제를 풀어나갔다.“와, 형수님. 진짜 대단하세요! 고마워요, 형수님!”문제를 풀게 된 경준혁은 더는 자기 이미지에 신경 쓰지 않고 테이블에서 문제를 계속 풀어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문제를 다 풀었는지 문제집과 펜을 치우며 말했다.“와. 드디어 핸드폰을 마음껏 놀 수 있겠어!”그런 그의 모습에 연미혜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대충 내용을 전부
경다솜이 방에서 나간 후 연미혜는 자신이 두고 간 책을 찾았지만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저 책을 들고 2층 거실 창가에 앉았다. 반 시간 후 노현숙이 금방 끓인 것인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한약을 들고 올라왔다.“미혜야, 여기 있었구나.”연미혜는 책을 내려놓고 일어나 받아들었다.“할머니께서 왜 직접 가져오셨어요? 그냥 저를 부르시지.”“넌 몸이 약하니 조금이라도 덜 움직이는 게 낫단다.”노현숙은 옆에 있던 소파에 앉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원래는 민준이한테 시키려고 했는데 서재에서 또 그놈의 컴퓨터를 보고 있더구
그 말인즉슨 경민준의 전화를 받은 사람이 임지유라는 소리였다. 경다솜은 연미혜를 보며 부자연스러운 거짓말을 해댔다.“엄마, 그냥 다음에 데려다주세요.”“그래.”연미혜는 경준혁과 같은 길이었기에 같은 차를 타고 이동했다. 경준혁은 아침 자습 시간을 놓치긴 했지만 차에서 열심히 책을 보며 내용을 외우고 있었다. 자꾸만 기억을 더듬는 경준혁의 모습에 듣고 있던 연미혜가 단어 몇 개 알려주었다. 그러자 경준혁은 그녀를 향해 엄지를 척 들었다.“형수님 기억력이 완전 컴퓨터 급이네요!”차는 먼저 경준혁의 학교 앞에 도착했다. 연미혜도
그러던 전현재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다른 건 몰라도 임지유 씨는 정말로 운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전현재는 연미혜와 김태훈이 말할 시간도 주지 않고 갑자기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조심스럽게 말했다.“참, 임지유 씨 팀원들이 주말 내내 야근했는데도 프로젝트에 아무런 진전도 없었잖아요? 어제 경 대표님이 그런 임지유 씨가 안쓰러웠는지 저녁 7시 넘어서 회사로 오셨다고 하더라고요. 와서 임지유 씨 대신 중요한 자료를 정리해준 덕분에 겨우 진전이 생겼대요. 그리고,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어젯밤에 경 대표님과 임지유
전현재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이사님.”임지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김태훈과 그를 향해 말했다.“민준이가 우리 팀원들 밥 사준다고 하는데 두 분도 합석하실래요?”물론 연미혜는 쏙 빼놓았다.전현재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이내 김태훈과 연미혜를 바라보았다.김태훈이 잽싸게 말했다.“호의는 감사하다만 이미 선약이 있어서...”임지유가 눈살을 찌푸렸다.“대표님?”지금껏 온갖 수단을 동원했지만 김태훈이 끄떡도 하지 않을 줄이야.그녀는 옆에 앉아 물을 마시는 연미혜를 힐끗 쳐다보았다.
연미혜도 같은 생각이었다.그녀는 짧고 단호하게 메시지를 보냈다.[바빠. 그리고 약속 지켜. 다솜이 외할머니댁엔 절대 못 가게 해.]잠시 뒤, 경민준에게서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알겠어.]이후로 그는 더 이상 아무 연락도 해 오지 않았다.어린이날 연휴 다음 주말은 마침 주말이었다.그날 오후, 연미혜는 가족들과 함께 관광지에서 래프팅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때 차예련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는데, 사진 속 인물은 임지유였다.차예련은 지금 쿠바나에 머무르며 패션쇼 준비로 한창이었다.사진을 본 연미혜는 메시지를 보냈다.[
‘넥스 그룹이랑 세인티가 해지한 건 알고 계신가요? 교수님의 제자인 김태훈 대표가 요즘 하는 짓을 보면 재능을 믿고 우쭐대는 것도 모자라, 사사건건 여자한테 휘둘려서 점점 판단력도 흐려지고 있던데요. 혹시 그 사실도 알고 계십니까?’염성민은 막 입을 열려다 말았다.곁눈질로 경민준이 있는 걸 본 순간,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이 쑥 들어가 버렸다.사실 이 얘기는 전부 임지유와 관련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임지유의 옆에 경민준이 있었다.염성민의 입장에서 굳이 나서서 이런 말을 할 명분이 없었다.괜히 앞장서서 이런
임지유는 곧바로 해약서에 서명했다.배상금은 계약서에 명시된 기한 내에 전액 납부하겠다고 약속했다.이 소식을 들은 김태훈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생각보다 행동이 빠릿빠릿해서 좋은걸?”해약 이후의 처리 절차는 변호사가 맡았고, 임지유가 서명한 뒤로는 김태훈과 연미혜 모두 더 이상 그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이삼일 뒤, 유명욱이 휴가를 맞아 오랜만에 두 사람을 불러 모았다. 한동안 얼굴을 못 본 터라, 사제지간에 오붓하게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던 것이었다.연미혜와 김태훈은 회사를 나와 약속 장소인 식당에 도착했는데, 식당 입
임지유는 계약 해지를 결정한 뒤, 곧바로 경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경매 날에 김태훈 어머님이랑 얘기하다가, 내가 말을 좀 잘못했어. 그걸 사모님이 딱 집어냈고... 게다가 김태훈 쪽은 아예 세인티랑 엮일 생각이 없어 보여. 만약 소송으로 가서 이긴다고 해도 나중에 또 딴지를 걸어 협력 관계가 틀어지게 만들 가능성이 높아.”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담담히 결론을 내렸다.“그쪽이 처음부터 협력 의지가 없었다면, 괜히 시간 끌기보다 지금 깨고 다른 파트너 찾는 게 낫다고 봐.”경민준은 그녀가 무슨 말을 실수했는지 구체적으로 묻
‘김태훈 어머니가 연미혜를 좋아한다고? 그게 말이 돼? 진짜라면... 어제 김태훈 어머니한테 했던 말들은 대체...’임지유는 갑자기 이미연이 대화 도중 갑자기 통화하러 다녀온 일이 떠올랐다.머릿속에 전화를 받는다며 자리를 비운 장면이 스치자, 묘한 불안감이 다시 가슴을 짓눌렀다.그녀의 낯빛이 안 좋아진 것을 본 경민준이 곁에서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그 말에 임지유는 정신을 가다듬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나 괜찮아.”그날 저녁, 임지유는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다.이미연이 연미혜를 마음에 들어 하고
다음 날 아침, 경민준은 임지유, 경다솜과 함께 일찍부터 경기장에 도착해 있었다.잠시 후, 하승태와 수연도 도착했다.경다솜이 그들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승태 삼촌, 안녕하세요!”“수연아, 와줘서 고마워!”수연이 경다솜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이제 곧 경기 시작되잖아. 다솜아, 많이 긴장돼?”경다솜은 고개를 저으며 또렷하게 말했다.“긴장되긴, 당연히 긴장 안 되지!”하승태는 다른 일정이 있어 경기엔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그는 수연이를 데려다주러 잠깐 들른 것이었다.경민준이 그의 사정을 알고 먼저 말했다.
김태훈의 부모님이 자리를 뜬 뒤, 경민준이 물었다.“사모님이랑 얘긴 잘했어?”임지유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그런 것 같아. 고마워.”임지유는 속으론 생각했다.‘방금 사모님 얼굴 보니까 연미혜에 대한 불만이 점점 커지는 것 같던데....’사실 세인티와 넥스 그룹 사이에서 벌어진 일은 이미연도 이미 알고 있었다. 김태훈이 미리 설명을 해뒀기 때문이었다.조금 전 임지유와 이야기를 나눌 때 울린 전화는 사실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대화를 미리 녹음해 두고, 자리를 비켜선 후 멀리서 경민준과 임지유 쪽을 슬쩍
임지유는 며칠은 기다려야 소식이 올 줄 알았다. 그런데 그날 오후, 경민준에게서 먼저 전화가 걸려 왔다.“김 회장님이랑 사모님께서 내일 경매 행사에 참석하신대. 우리도 같이 가보자.”그 말에 임지유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좋아.”다음 날 저녁, 경매장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민준은 임지유를 데리고 곧장 김태훈의 부모님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직접 임지유를 두 사람에게 소개했다.김태훈의 부모는 이미 경민준과 연미혜의 관계를 알고 있었고, 연미혜와 임지유 사이에 있었던 일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은
지현승이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염성민이 다시 물었다.“성민아, 철호 아저씨나 아버지 말고, 네가 아는 사람 중에 유명욱 교수님 연락처 아는 사람 또 없어?”“없는 것 같아.”지현승이 대답했다.그렇게 말한 뒤,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말을 이었다.“근데, 너 전에 임지유 씨가 유명욱 교수님을 만난 적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마 지유 씨는 교수님이 연락처를 갖고 있을 것 같은데? 교수님한테 직접 연락해서 해결될 일이라면, 임지유 씨가 알아서 연락하지 않았을까?”염성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