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고개를 들어봤지만 끌려나가느라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쏟아지는 햇살 아래 훤칠한 남자가 서 있었다. 짙은 남색 더블 쟈켓을 입은 남자는 사뭇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또렷한 콧날에 깊은 두 눈, 날렵한 눈썹에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최하준⋯.이렇게 빨리 다시 그 남자를 만나게 될 줄 몰랐던 여름은 멍해졌다.게다가 이런 처참한 꼴로⋯.망했다. 이대로 끌려가 이혼을 당할 지도 모른다.옆에 있던 이지훈이 다가와 여름의 몰골을 가만히 보더니 바로 분위기를 파악했다.이전에 파티에서 본 적이 있었고, 여름이라면 동성 명문가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우수 인재였다.그런 여름이 이런 낭패한 꼴이라니 드문 광경이었다.이지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분은 혹시 자네의⋯.”최하준이 이지훈에게 경고의 눈짓을 보냈다.이지훈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여름아, 괜찮아?”이때 윤서가 종업원을 확 밀쳐내고 여름을 부축했다.“괜찮아.”여름이 괴로운 듯 최하준을 흘끗 보더니 대답했다.윤서는 그제야 최하준을 알아보았다. 잘생긴 것은 알았지만 대낮에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누구라도 마음을 빼앗길만한 미모였다.윤서뿐 아니라 진가은, 강여경, 채시아 세 사람의 시선도 그에게 향해 있었다. 이런 미모와 아우라는 처음이었다.대체 누구람?최하준은 꼼짝도 않고 서서 눈썹을 찌푸렸다. 검은 눈동자가 류 실장에게로 향했다.“여기선 고객을 이렇게 대접합니까?”류 실장은 심장이 벌렁거렸다. 최하준을 알지는 못했지만, 좌중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게다가 그 옆에는 동성 최고의 명문가 자제인 이지훈이 함께 있었다.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상대였다.류 실장이 어쩔 줄 몰라하는 와중에 진가은이 생긋 웃으며 나섰다.“지훈 씨, 친구분이신가 봐요? 두 분이 잘 몰라서 그러시는데, 내가 오늘 친구들이랑 밥을 먹으려고 예약을 했거든요. 그런데 임윤서랑 강여름이 나타나서 다짜고짜 룸을 내놓으라는 거야⋯.”“진짜 뻔뻔하네, 우리가 예약한 걸 너희가 협박해서 빼앗은 거잖아?”윤서
최하준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가시는 건 자유입니다만, 방금 이 분들처럼 나가시게 될 겁니다.”여름은 깜짝 놀랐다. 최하준을 보는 여름의 눈에 복잡한 심경이 스쳐 갔다.이렇게까지 편을 들어줄 줄 몰랐다. 갑자기 상대가 너무나 잘생겨 보이기까지 했다. 이쯤 되니 강여경과 친구들은 더 이상 침착할 수 없었다.진가은이 버럭 화를 냈다.“당신이 뭔데? 우리가 누군지 알아?”최하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진가은을 똑바로 쳐다봤다.이지훈은 웃음을 띠고 근처에 있던 종업원들을 둘러봤다.“이거 내가 직접 사장님께 전화를 해야 하나? 이분들 보내드리는데 힘들 좀 쓰시죠?”월인의 사장도 이지훈에게는 굽신거리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직원들은 즉시 달려들어 강여경과 친구들을 와락 끌고 나갔다.정성스럽게 차려 입은 세 사람은 곧 봉두난발이 되었다. 신발이 벗겨지기도 하고, 강여경은 스커트 자락이 찢어지기까지 했다.여름과 윤서는 입을 떡 벌리고 서 있었다.류 실장은 두 사람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제가 잘못했습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여름은 최하준을 흘끗 보았다. 최하준이 아무 말이 없자 여름이 입을 열었다.“저 두 분이 오지 않으셨으면 아마 쫓겨난 건 저희였겠지요. 용서 못 합니다. 직접 사장님께 말씀드리겠어요.”이지훈이 웃었다.“직접 찾아가실 것 없습니다. 제가 사장님에게 전화하겠습니다.”류 실장은 비참함에 힘이 쭉 빠졌다.윤서는 그저 통쾌할 뿐이었다. 이때 여름이 최하준의 곁에 서 있는 걸 보더니 가만히 기회를 노리다가 어깨로 툭 쳐버렸다.정신을 팔고 있던 여름은 졸지에 균형을 잃고 그대로 최하준의 품으로 쓰러졌다.여름이 이렇게 가까이에 붙은 건 처음이었다. 은은하고 상쾌한 향이 느껴졌다.하준의 몸에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날 줄은 몰랐다. 성격과는 전혀 달랐다.그러나 최하준의 시선이 느껴지자 여름은 흠칫해서 빠져나오려고 허둥거렸다.“죄송합니다. 고의가 아니었어요.”“됐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최
“아니,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요즘 스트레스를 받아서 매운 걸 못 먹거든요.”“알지, 알지. 말 안 해도 내가 다 알지.”윤서가 깔깔거리며 여름의 손등을 도닥였다.친구까지 이렇게 놀리려 드니 여름은 울고 싶었다.내내 조용히 있던 최하준이 눈을 들어 맞은 편에 앉은 여자를 훑어봤다.오늘 여름은 핑크색 니트를 입고 나왔는데 네크라인까지는 우윳빛 피부였지만 목 위부터는 새빨갰다. 자그마한 귀도 끝까지 새빨개져 있었다.최하준의 눈에 알 수 없는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 얼른 차를 한 모금 마셨다.윤서는 어이없어 하더니 스마트 폰을 들고 친구랑 통화하는 시늉을 했다.“월세 들어간다고? 그 아파트 괜찮은 것 같더라. 한 달에 15만 원이면 된대.”이지훈이 말했다.“15만원에 무슨 괜찮은 집을 구합니까? 왜요? 누가 집을 구합니까?”윤서가 한숨을 쉬었다.“우리 여름이요. 어쩌겠어요? 집에서 쫓겨나서 갈 데도 없는데, 돈도 없어서 어젯밤에는 모텔에서 잤다니까요. 창문도 없고, 시트는 세탁도 안 했지, 위험하게스리 보안도 엉망이더라고요.”여름은 가만히 차만 마셨다. ‘잘 한다, 내 친구. MSG 잔뜩 뿌려서 상황을 잘도 만들어내는구나.’최하준이 거의 다른 사람은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살짝 인상을 썼다.이지훈이 원망하는 말투로 말을 건넸다.“어쩌자고 이렇게 연약한 와이프를 그런 데 재웠어? 너무 하는 거 아닌가?”여름이 MSG를 더 했다.“다 제 탓이에요. 지오에게 소시지를 먹여서 밤에 토했거든요. 쫓겨날 짓을 했어요. 아 참, 지오는 좀 어때요? 괘, 괜찮나요?”이지훈이 웃었다.“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지오는⋯.”“안 좋습니다.”최하준이 얼른 말끝을 잘랐다. “말로는 백날 사과해 봐야 아무 소용 없습니다.”이지훈의 표정이 미묘했다. ‘히야, 이 친구 너무 하네. 제수씨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곧 여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지오가 좋아져서 최하준의 분노가 가라앉아 자기편을 들어준 줄 알았던 것이
한선우의 입술은 우아하게 벙긋거렸다.한선우의 그 아름다운 입에서 흘러나오는 가슴 두근거리는 말을 얼마나 들었던가. 그러나 지금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가슴을 아리게만 했다.“그래, 내가 좀 못됐지. 그래서 약혼녀를 위해서 복수라도 하시게?”“아직도 이해를 못 하는구나.”한선우는 화가 나서 말했다.“안 그래도 아버님하고 어머님이 너에게 불만이 많으신데 왜 좀 얌전히 있질 못해? 지금 다들 네가 속 좁은 애라고 손가락질한다고.”“그래, 나 속 좁아.”여름은 시원하게 인정했다.“내가 마더 테레사는 아니잖아?”“강여름!”한선우가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차를 쾅 내리쳤다.“정말 실망이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난 꾹 참아 가며 어떻게 하면 하루라도 더 빨리 한주그룹을 장악할까 하는 생각뿐인데, 넌⋯.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TH에서도 뛰쳐나가고, 명예도 다 잃고⋯. 제발 너도 같이 노력해 주면 안 되겠어?”“나 열심히 하고 있는데.”‘네 외숙모가 되려고 열심히 하고 있다고, 이 자식아!’한선우는 어이없어 픽 웃었다.“열심히 한다는 게 여경이 괴롭히는 거냐? 계속 이러다가는 걔가 너보다 잘나갈 거야. 그래, 걔가 배운 것이 좀 없긴 하지. 하지만 걔는 똑똑하고 열심히 한다고. 매일 밤늦게까지⋯.”“아, 벌써 강여경의 장점을 아주 많이 찾아냈네?”여름이 조롱하듯 웃었다.그 말을 들은 한선우는 여름이 질투한다고 생각했다.“여름아, 지금 질투할 때가 아니라니까.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누가 질투를 해? 날 버리고 강여경이랑 약혼을 해 놓고 날 더러 누굴 위해 노력하라는 거야! 내가 노력을 안 하면 날 포기할 거야? 오빠가 원하는 게 좋아하는 여자야, 아니면 오빠의 신분에 어울리는, 오빠를 빛내줄 사람이야?“널 좋아하지도 않는데 여기서 내가 이러고 시간을 낭비하겠어? 말 좀 들어. 가서 어머님, 아버님하고 여경이에게 사과해. 어서 회사 복귀하고.”한선우가 짜증스럽게 말했다.“TH로 내가 왜 돌아가? 노력하면 뭐해? 강여경이
사과라⋯.여름은 억울했다.“그쪽에서 먼저 저한테 어떻게 했는지는 안 물어보세요?”“넌 가은이를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난리지만, JJ그룹도 명문가다. 여경이는 그 집안이랑 친해지려고 일부러 가은이도 만나고 다니는 거야. 너 같은 줄 아니?온갖 나쁜 짓만 하고 다니면서 언니까지 그렇게 가만 두질 않으니. 내가 어쩌다가 너 같은 걸 길렀는지 모르겠다.”“전 안 돌아가요.”여름은 이를 악물었다.이정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그러면 평생 들어올 생각 마라. 너 같은 애 없는 셈 치면 된다!”여름은 심호흡을 했다.“날 딸 대접해주신 적이 있긴 한가요? 강여경이 돌아오기 전에도 엄마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늘 다른 사람하고 비교했어요. 강여경이 돌아오고 나서는 나를 나무라는 말뿐이셨죠. 내가 친자식이긴 한가요?”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나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집에는 이제 마음이 완전히 식어버렸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잠시 후 여름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펫샵에 가서 고양이가 잘 소화하는 음식에는 무엇이 있는지 물었다.펫샵 주인은 고양이 소화력을 높이는 좋은 음식을 생각하다가 결국 이라는 책을 건넸다.“어쨌든 소화하기 좋은 식단은 영양가 있는 것일 테니까요. 여기 있는 대로 해 먹이면 문제없을 거예요.”나름대로 일리가 있어 보여 여름은 그 책을 들고 마트에 식재료를 사러 갔다.******오후 4시.여름은 컨피티움으로 돌아왔다.지오는 여름이 돌아온 것을 보고 힘없이 한 번 ‘야옹’ 할 뿐, 집에 웅크리고 앉아서 꼼짝하지 않았다.그걸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파서 열심히 지오를 잘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간을 하지 않고 여름은 연어에 당근과 청경채를 조금 넣고 완자를 만들어 쪘다.그리고 간식으로 고양이 푸딩을 만들었다.저녁 시간.최하준이 퇴근했다.주방 유리문을 통해 요리하는 여름의 모습이 보였다. 채소 썰랴, 볶으랴 정신 없이 바빠 보였다.고소한 음식 냄새가 문틈으로 흘러나와 식욕을 자극했다.흘끗 보
여름의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어째서 아까 이 책을 보고 고양이 푸딩을 만들었다는 걸 깜빡했을까?“어, 그, 그게⋯.”“특별히 나를 위해 만들었다면서요.”고양이 먹이를 먹었다니 속이 뒤집혀 토할 지경이었다.여름은 울 것 같았다.“사실은 지오 푸딩이었어요. 그런데 맛있다고 하니까, 사실대로 말하기 힘들더라고요.”“강여름 씨.”30년 동안 살면서 이렇게 화가 난 것은 처음이었다.여름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그래도 굉장히 영양가 있는 거예요.”“그렇게 영양가 있는 건데 직접 먹어 보시죠.”“저, 맛은 없을 것 같아요.”“이런 식으로 나오시겠다?”최하준은 맛이 있다고 말까지 했던 걸 생각하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여름이 뭔가 말하려는데 상대가 서재로 홱 들어가 버렸다.‘망했어. 진짜 화났잖아.’여름은 울고 싶었다.이번에는 들어와서 잘 지내보려 했는데 1시간도 안 돼서 그만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외숙모로 눌러 앉으려던 목표는 점점 멀어져 갔다.잠시 후 여름이 서재 문을 두드렸다.“저리 가시죠.”분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름은 절망적으로 눈을 감았다. ‘머리 끝까지 화가 났구나. 이따 다시 오자.’여름은 샤워를 하고 귀여운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머리를 어깨 위로 늘어뜨렸다.여름은 윙크를 하고 이리저리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았다. 꽤 만족스러웠다.‘하얀 피부에 커다란 눈, 얼마나 청순하냐.’최하준도 보면 반할 게 틀림없었다. “뭐 합니까?”옆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부들부들 떨며 돌아보니 최하준이 머그잔을 들고 비웃고 있었다.‘소리도 없이 언제부터 저기 있었대?’“그게, 저, 내가⋯.”‘당신 유혹하는 연습 하고 있었다, 왜!’“거울을 보니까 내가 너무 예뻐서 그만⋯.”여름이 수줍게 더듬거리며 말했다.‘후안무치가 새로운 경지를 돌파했군.’그러나 솔직히 자신도 여름이 상큼해서 좋았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매력을 내뿜는 사람은 보기 드물었다.“뭐 하나 보고 있었더니⋯.”최하준이 비웃으며 물을
조깅을 마치고 돌아온 최하준은 여름이 차려 놓은 푸짐한 아침 식사를 보고 어리둥절했다.“이게⋯.”“쭌, 어제 고양이 푸딩을 먹게 해서 미안해요. 사과의 의미로 아침 식사는 제대로 했어요.” 여름은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국을 떠 주었다.“흠⋯⋯ 됐습니다. 어제 저녁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웠습니다.”최하준의 표정이 살짝 경직되었다.“고, 고양이 사료를 먹어보니 공감이 되더라고요.”여름은 캑캑거리며 말을 더듬었다.여름의 반응에 상대는 대꾸하지 않았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현관을 나설 때였다.“출근합니까? 역까지 태워줄까요?”최하준이 먼저 말을 걸었다.여름은 움찔했다. “저 잘렸어요.”고개를 저으며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최하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기 집안 회사에 근무하는 거 아니었나? 가족과 갈등이 심한가 보군.’“그렇군요. 그럼 지오를 잘 부탁합니다.”‘흥, 나도 나름 고급 인력인데 집에서 고양이 밥만 해줄 수는 없지.’“구직활동해야죠. 지오는 걱정 마세요. 먹이는 제때 줄 테니까.”“그러십시오.” 최하준은 무심하게 나가버렸다.******그 후 이틀 동안 여름은 직장을 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인테리어나 건축 설계에 관련된 일자리는 차고 넘쳤지만, 배경을 드러낼 수는 없어 화려한 경력을 숨겨야 했다. 게다가 나이까지 어리다 보니 어지간한 회사에서는 단순 보조 사원으로만 채용하려고 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신주인테리어’라는 작은 중소기업을 선택했다. 워낙 작은 회사인 데다 디자이너가 둘 뿐이라 디자인을 하다가도 일손이 부족하면 회사 밖에서 전단을 돌려야 했다. 여름은 이런 일이 난생 처음이라 너무 부끄러웠지만, 하다 보니 어느새 익숙해졌다. 전단지를 잘 받아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귀찮아서 무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 시간 넘게 길바닥에 서 있었더니 얼굴은 땀 범벅이 되고 피부는 붉게 달아올랐다. 가을인데도 한낮의 태양은 뜨거웠다. 또 한 사람이 여름의 전단지를 무시하고 지나가는데 검은 스포츠카가 여름
여름이 난처한 듯 얼굴을 붉혔다.“동성대극장이랑 국제공항까지 설계하고 프로젝트 책임자까지 맡았던 경력자인데 나이가 어리다고 다들 믿어주질 않아요. TH그룹 딸이라는 것도 밝혀지면 안 되고. 신분이 드러나면 사람들은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할 거예요. 대기업에서 보조직을 하거나 중소기업에서 디자이너를 하거나 둘 중 선택해야 했어요.”여름은 전단지를 주우면서 말했다.“보조가 되긴 싫어요. 잡일이나 하게 되고 좋은 디자인 컨셉이 있으면 다른 메인 디자이너가 가져가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요. 작은 회사지만 여기에서 일하면 전부 내 경력이 되고 프로젝트에 대한 보람도 있고요. 돈 좀 모으면 회사를 차릴 거예요. 지금은 고생이지만, 곧 좋아지겠죠.”“TH로 돌아갈 생각은 안 해봤습니까?”여름은 침울한 듯 고개를 저었다. “TH그룹은 제 것이 아니에요. 내 손으로 이루어 내야 진짜 내 것이죠.”열심히 전단지를 줍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최하준은 여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줍지 말아요.”“안 돼요.” 여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렇게 전단지가 많이 없어진 걸 알면 대표님이 난리 칠 거예요.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아서 게으름 피우면 안 돼요. 게다가 환경미화원들이 이걸 언제 다 치워요?”기다란 손이 여름의 앞에 떨어진 전단지를 잡았다.“같이 하죠.” 최하준이 몸을 굽히고 손을 뻗을 때 보니 소매 안으로 보이는 시계는 여름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브랜드였다. 브라운 컬러의 가죽 밴드에 사파이어 베젤이 있는 심플한 디자인의 손목시계다. 최하준이 하고 있으니 잡지 속 모델들이 차고 나오는 어떤 시계보다도 우아하게 빛났다. 여름의 시선이 하준의 다리로 옮겨갔다. 꿇어앉아 있어 짙은 네이비 슬랙스 속 근육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목욕 타월이 떨어진 날 기억이 순간 떠오르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으아아아, 내 머리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멈춰!’“왜 그럽니까? 얼굴이 너무 빨간데!” 최하준이 여름을 쳐다보았다. “그, 그게,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