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무대에서 내려온 소예지는 샴페인빛 장미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 윤하준과 나란히 백스테이지로 걸음을 옮겼다.뒤편에서 대기하던 이서연과 오수진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1열에 앉아 있는 고이한의 얼굴을 살폈다.고이한은 긴 손가락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지만 그의 단정한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윤 대표님이랑 소예지 씨, 이건 거의 공개 연애 아니야? 저 정도면 누가 봐도 사귀는 사이라고 생각하겠어.”오수진이 들뜬 목소리로 속삭였다.예전에 지유선 실험실에서 함께 일하며 윤하준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던 그녀는 두 사람이 잘되기를 은근히 응원하고 있던 참이었다.이서연도 낮은 목소리로 동조했다.“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애초에 두 사람, 이미 오래전부터 사귀고 있었던 거 아닐까? 소예지라면 재혼으로 재벌가에 들어가는 것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고.”“맞아, 나도 둘이 잘 어울려서 괜히 응원하게 되더라고요.”오수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한편, 백스테이지에 도착한 소예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 컵 하나를 조심스레 들어 윤하준에게 건넸다.“아까 스태프가 준 커피예요. 피곤할 텐데 마셔요.”윤하준은 커피를 받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오늘 그녀의 메이크업은 담백하면서도 고급스러웠고 자연스러운 곡선을 살린 스타일은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마다 은은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적인 분위기 속에 섬세한 여성스러움이 겹쳐 고전적인 우아함과 청순한 매혹이 절묘하게 공존하고 있었다.그때, 소예지의 휴대폰에서 알림음이 울렸다.화면을 확인하자 양정화가 보낸 메시지였다.회의 종료 후 식사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는 내용과 함께 주경호 군의대 총장을 비롯한 의학계 원로 인사들이 함께할 예정이라는 말이 덧붙어 있었다.윤하준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발표, 정말 인상 깊었어요. 언젠가 세계 의학 정상회의에서 발표하는 예지 씨를 꼭 보고 싶어요.”소예지는 조용히 웃으며 답했다.“저도 그날이 오길 바
소예지는 짧은 메시지로 답장을 보냈다.“고마워요. 준비됐어요.”무대가 그녀에게 낯선 건 아니었지만 국내 의학 정상회담에서 연구실을 대표해 주제 발표자로 나서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사회자의 안내가 이어지자 소예지는 침착한 걸음으로 무대 위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첫 번째 VIP석에는 짙은 회색 정장을 입은 고이한이 앉아 있었고 그의 깊은 눈빛은 시작부터 끝까지 오롯이 그녀에게만 머물러 있었다.그보다 한 줄 뒤쪽, 두 번째 줄에 자리한 윤하준 역시 무대 위에 등장한 소예지를 보자마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오늘 그녀가 선택한 의상은 늘씬한 몸매를 한층 돋보이게 했고 은색 테 안경은 그녀의 지성과 우아함을 배가시켰으며 동시에 묘한 관능미까지 자아냈다.이번만큼은, 심유빈이 고이한의 곁에 없었다. 그녀는 세 번째 줄에 앉아 안채린과 나란히 있었다. 이번 행사에서 앞줄은 국내 의학계를 대표하는 원로 교수, 대학 총장, 의협 회장 같은 특별 초청 인사들에게만 허락된 자리였기에 그녀는 예외 대상이 아니었다.“이어서, A시 의과대학 연구센터의 특별 연구원이신 소예지 박사님을 모시겠습니다. 오늘은 백혈병 치료 관련 최근 연구 성과에 대해 발표해 주실 예정입니다.”사회자의 소개와 함께 박수가 터졌고 소예지는 차분하게 연단 위로 올라섰다.스포트라이트가 그녀를 비추는 순간, 무대 위의 소예지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침착하고 집중된 얼굴로 마이크 앞에 섰다. 그 눈빛은 학자 특유의 맑고도 날카로운 지성을 품고 있었고 그 안에는 확신과 열정 그리고 수많은 날들을 버텨낸 신념이 함께 담겨 있었다.관중석 한편, 심유빈은 무의식중에 헝클어진 긴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빨갛게 칠한 입술을 꾹 눌렀다.이유 없는 불편함이 가슴 깊숙이 치밀어 올랐고 어쩐지 오늘 소예지가 일부러 자신의 매력을 무기로 내세운 것만 같았다.안채린 역시 그리 유쾌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당당히 연단에 선 소예지의 모습은 얼마 전 자신이 무대에 섰을 때 느꼈던 불안함과 대비되어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는 언젠가 자신이 그녀의 아버지 곁에 당당히 설 날이 올 거라고 믿고 있었다. 안영수의 오른팔이 되는 순간, 단지 발끝만 살짝 들어 올리면 안채린의 마음쯤은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아, 별건 아니야. 내 말은 앞으로 너희 아버지 밑에서 열심히 일해 보겠다는 거지. 채린아, 너는 네 일 보러 가봐.”슬쩍 말을 돌리며 얼버무린 도윤재는 문득 다시금 궁금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너, 요즘도 소예지랑 신경전 벌이고 있어?”발걸음을 돌리던 안채린이 그 말에 멈춰 서더니 냉정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왜? 내가 걔보다 못해 보여?”도윤재는 당황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그럴 리가 있나. 너도 연구 실력은 정말 뛰어나잖아.”그러나 안채린은 더는 대답할 마음이 없다는 듯 입을 다물고 단호한 발걸음으로 MD 빌딩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도윤재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한번 눈앞에 우뚝 선 미래지향적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엔 짙은 후회의 감정이 스며 있었다.다른 연구팀에 합류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과거의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기라도 한다면 그는 이 분야에서 그저 그런 연구원 이상의 위치로는 결코 올라설 수 없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성양 그룹에 들어가는 것이 지금으로선 최선이었다. 게다가 들리는 말에 따르면 고이한이 직접 투자자로 참여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가 주주로 있는 기업이라면 향후 성장 가능성은 말할 것도 없었다.그 시각, 안채린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창가에 다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도윤재가 건물을 나서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는 조용히 긴 숨을 내쉬었다.그의 눈빛은 마치 아직도 둘 사이에 어떤 미래가 존재할 것이라 믿고 있는 듯했다.“한심하지.”자신의 위치도 모르고 그녀에게 기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남자에게 안채린이 마음을 줄 리 없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미래의 남편감은 오직 한 사람, 강준석뿐이었다.
그날 밤, 그 비서에게 해고 통지서가 도착했다. 다음 날부터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었다.그녀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간신히 비서실에 들어왔고 자신의 외모를 무기로 삼아 고이한의 관심을 끈 뒤 결국 그의 침대로 올라가 ‘사무실 애인’ 자리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하지만 세상일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마침내 고이한에게 접근할 기회를 잡았다고 여겼지만 그는 단호하게 그녀를 해고해 버렸다.해고 통보를 받는 순간, 그녀의 머릿속은 하얘졌고 한동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총무실에서 마주쳤을 때 고이한의 눈빛에서 분명 약간의 욕망이 비쳤다고 생각했기에 자신도 모르게 기대를 품었던 것이다.그러나 그 기대는 허무하게 무너졌고 결국 그녀는 자신이 고이한의 기준에 미치지 못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7월 말, 아침 햇살 아래의 MD 빌딩은 여전히 웅장하고 위엄 있었다.고성능의 벤틀리 스포츠카 한 대가 주차장에 멈춰 섰고 곧이어 고급 롱드레스를 입은 안채린이 차에서 내렸다.차 문을 잠그고 자리를 뜨려던 찰나, 등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채린아.”그 순간 안채린의 몸이 굳고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천천히 돌아보자, 도윤재가 양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그의 눈빛 어딘가에는 감탄과 욕심이 스쳐 지나갔다.“도윤재?”안채린은 일부러 놀란 척하며 물었다.“여긴 어떻게 온 거야?”도윤재의 시선이 그녀의 차선을 따라 미끄러지듯 흘러내렸다.“정말 멋진 차야. 너랑 잘 어울려.”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기분이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도윤재의 말은 안채린을 불쾌하게 만들었고, 온몸이 긴장되었다.그는 분명 무언가 바라는 게 있어서 나타난 것이었다.“도윤재, 네가 4S 매장에 취직했다는 얘기 들었어. 일은 잘 돼?”안채린은 일부러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췄다.도윤재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내 영업 능력이 별로라 돈을 잘 못 벌고 있어.”그의 푸념은 안채린에게 동정심은커녕 오히려 거부감만 불
보고서 정리를 마치고 막 자리를 정리하려던 찰나, 소예지의 휴대폰이 울렸다.업무 연락인 줄 알고 화면을 확인한 그녀는 뜻밖의 발신자에 눈을 조금 동그랗게 떴다.임현욱이었다.[소예지 씨, 오늘쯤 택배 하나 도착할 거예요. 꼭 받아주세요.]소예지는 의아했다.‘무슨 선물이라도 보낸 걸까?’[뭐 보낸 거예요?]호기심에 물었더니 돌아온 답장은 짧고 장난기 가득했다.[비밀이에요.]그 답장에 소예지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살짝만 힌트 줘요. 안 그러면 안 받을 거예요.]장난기 섞인 메시지에 곧바로 답장이 왔다. [[사실 소예지 씨한테 보낸 건 아니에요.]그 말에 소예지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하슬이한테 보내는 거예요.]이번엔 진심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임현욱이 보낸 선물이 다름 아닌 그녀의 딸을 위한 것이었다니.[말 안 해주면 진짜 안 받을 거예요.][반딧불이에요. 너무 오래 갇혀 있으면 안 되니까 빨리 받아야 해요.]그 순간, 소예지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마음속 깊숙한 곳에 잔잔한 따뜻함이 조용히 퍼져나갔다.[고마워요. 하슬이, 분명 엄청 좋아할 거예요.][생태 유리통에 넣어 보냈어요. 한 달 정도는 잘 살 거예요.]그의 선물은 값비싼 것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만큼 더 진심이 느껴졌다.고하슬이가 이 반딧불이를 보면 얼마나 좋아할지 소예지는 이미 눈앞에 그려졌다.[진짜 고마워요. 나중에 오시면 제가 밥 살게요.][좋아요. 10월 초쯤 휴가예요.][그럼 그때 만나요.][네, 얼른 일 마무리하세요.]전화를 끊고 난 뒤, 소예지는 문득 며칠 전 하슬이가 반딧불이를 보고 싶다고 몇 번이고 이야기했던 기억을 떠올렸고 그걸 기억하고 직접 준비해 준 임현욱이 새삼 고마웠다.오후가 저물 무렵, 택배가 도착했다.커다란 상자 안에는 정성스럽게 포장된 생태 유리통이 들어 있었고 그 안에서는 열댓 마리의 반딧불이들이 작은 빛을 깜박이며 날고 있었다.거실 한편에 조심스레 놓인 유리통은 마치 동화 속 작은 세계 같았다.
윤리위원회의 최종 승인이 떨어진 후, 첫 번째 임상 참여자들의 자료가 소예지에게 전달되었다.그 목록을 하나하나 확인하던 중, 그녀는 익숙한 이름 하나에 시선이 멈췄다.정연수.절망에 가득 찬 얼굴로 그녀를 찾아왔던, 두 아이의 어머니였다.소예지는 문서를 내려다보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 어머니가 얼마나 절박했는지 기억하고 있었기에 이번 임상에 참여한 사실이 더 가슴을 짓눌렀다.이들 모두는 그녀가 만든 약을 마지막 희망으로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조금만 더 자료를 보려 했지만 그간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는지 소예지는 결국 소파에 기대 눈을 감았다.월요일 아침.소예지는 실험실에 도착하자마자 회의 준비에 나섰다.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어 서류를 급히 품에 안고 회의실로 향하던 중, 복도 모퉁이에서 누군가와 거의 부딪칠 뻔했다.어깨가 상대의 팔에 스쳤고 그녀는 반사적으로 말했다.“죄송합니다.”“괜찮아요.”얼굴을 확인한 순간, 소예지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고이한에게만은 절대 사과 같은 말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죄송합니다’란 말이 억울할 만큼 아까웠다.그녀는 시선을 떨군 채 곧장 회의실로 들어갔고, 잠시 후 고이한도 그곳에 들어섰다.양정화가 상석을 양보하려 하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자연스럽게 소예지 옆자리에 앉았다.“좋습니다. 이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신약 임상 1상 시험의 총괄은 제가 맡겠습니다.”에어컨 바람이 회의실을 가로지르며 지나갔고 그 순간 고이한은 소예지의 머릿결에서 희미하게 재스민 향을 느꼈다.그녀가 오랜 세월 동안, 여섯 해 넘게 사용해 오던 바로 그 샴푸 향이었다.“고 대표님, 의견 있으신가요?”양정화의 질문에 고이한은 짧게 고개를 들고 말했다.“없습니다.”그러곤 말을 이었다.“다만 피험자 안전 대책은 보다 세분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약물이 유발할 수 있는 특수 반응에 대비해 응급조치 계획도 반드시 마련해야 합니다.”그의 말에 소예지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고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