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호는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수군거림을 듣고서야, 더는 강재민을 괴롭히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다.그는 강재민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지난번 일은 그냥 없던 걸로 하자. 앞으로 사람 상대할 땐 눈치 좀 챙기고, 이번 일은 제대로 교훈 삼아.”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피 묻은 깨진 술병을 바닥에 내던졌다.더 머물 수 없겠다고 판단한 박민호는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누군가가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사람을 때려놓고 그냥 가려고요?”맑고 단단한 목소리가 그의 정면에서 울려 퍼졌다. 그제야 박민호는 자신 앞에 유주아가 서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주아...?”그러자 유주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박민호 씨, 절 유주아 씨라고 부르셔야죠. 우리 그렇게 친한 사이 아니잖아요.”예전엔 박민호가 자신에게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던 유주아였다.하지만 지금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박민호가 강재민을 폭행한 건 지난번 일을 망쳤기 때문이었다.박민호는 설마 유주아가 이 장면을 직접 보게 될 줄은, 그리고 강재민 편을 들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주아... 아니, 주아 씨. 이건 그냥 오해예요. 전부 다 오해라고요.”“오해라고요?”유주아가 되물었다.“그렇게 사람을 때릴 만큼의 오해가 세상에 어딨죠?”박민호는 진짜 이유를 도저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주아 씨, 이건 제 개인적인 문제니까 굳이 관여하실 필요는 없어요.”그 말을 들은 유주아는 한 걸음 더 나아가며 단호히 말했다.“당신 일은 나랑 상관없어요. 하지만 그 일이 제 친구한테 피해를 줬다면 얘기가 다르죠.”‘친구?’그 말을 들은 강재민은 유주아의 뒤에 서서 순간 얼어붙었다. 그러고는 믿기지 않는 듯,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유주아는 이어서 또렷이 말했다.“강재민 씨는 제 친구예요. 그리고 방금 당신은 제 눈앞에서 제 친구를 때렸죠. 제가 참견 안 할 이유가 있을까요?”박민호는 도무지 납득이 안 된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지금 이 사람이
유주아는 강재민을 여러 번 마주친 뒤로, 그 흥미로운 사람을 기억하게 되었다.강재민은 그녀에게 아첨하거나 눈치를 보지 않는 드문 직원이었고 외모도 제법 준수했다.유주아는 사람을 시켜 그의 신상을 알아보기도 했다. 알고 보니, 강재민에게는 부유한 여자들의 관심이 몇 번이나 쏠린 적이 있었다.그 여자들 역시 각자 매력을 갖춘 인물들이었지만, 그는 그 모든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만약 그중 단 하나라도 받아들였더라면, 이렇게 고된 일을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그 무렵, 제우스 클럽에서 강재민은 한창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그는 문가에 낯익은 실루엣이 서 있는 걸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인물은 다름 아닌 박민호였다.지금이야 그는 최민아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새로운 시작을 결심했지만, 여전히 그날 강재민이 자신의 일을 망쳐놓은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박민호는 원한을 반드시 갚는 성미였다.그는 안으로 들어서며 곁의 직원을 불러 강재민을 가리켰다.“저 직원 불러 와요.”지시를 받은 직원은 곧장 강재민에게 다가왔다.“재민아, 조심해. 저 싸가지 없는 인간 또 왔어. 이번엔 너한테 시비 걸려고 작정하고 온 것 같아.”그는 조용히 귀띔했다.강재민은 동료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잔을 든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박민호가 서 있었다.강재민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그러자 동료가 다시 속삭였다.“그냥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도망치는 건 어때?”“잘못한 게 없는데 왜 도망쳐.”강재민은 그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박민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박민호는 그가 정말로 다가오는 걸 보고 조금 의외라는 듯했지만, 눈빛에는 여전히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손님,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강재민은 그의 앞에 멈춰 서서 공손히 물었다.박민호는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잔을 흔들며 남은 술을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손목에 힘을 주더니 잔 안의 술을 강재민의 얼굴에 들이부었다.강재민은 피할 틈도 없이 얼굴에 술을 뒤집어썼고, 박민호는 비웃듯 입꼬리
증손자 얘기가 나오자마자 노부인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의 무뚝뚝함을 싹 지우고 연신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래! 아들은 많을수록 좋은 거야. 아들을 많이 낳아야 집안의 미래가 밝은 거거든. 너희 두 외삼촌을 좀 봐라. 전부 딸만 잔뜩 낳더니 결국은 딸들이 시집에서 쫓겨나 우리 집으로 돌아왔지 뭐니. 참, 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러다 노부인은 화제를 돌려 다시 박민호에게 물었다.“그나저나, 지금 이 아이와 사귀고 있으면 유주아는 어떻게 된 거냐?”노부인은 아직도 그 부잣집 외동딸을 잊지 못했다.사실 박민호 역시 유주아와 결혼하면 앞으로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현실은 생각만큼 녹록하지 않았다. 유주아는 물론이고 그녀의 부모조차도 자신을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그 아가씨는 성격이 너무 까다로워서 도저히 못 맞춰줘요. 우리 민아가 훨씬 낫죠.”그러자 노부인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부잣집 애들은 원래 다루기 어려워. 차라리 말 잘 듣고 순순히 애나 낳아줄 평범한 여자가 좋지.”그러고는 아쉬운 듯 말을 이었다.“그런데 좀 아쉽긴 하다. 너 유주아네 부모가 얼마나 통 크게 돈을 쓰는지 모르지?”노부인은 그가 떠난 후, 자신이 직접 유주아의 집에 가서 돈을 뜯어낸 일을 자랑스럽게 털어놓았다.“정말로 돈을 받아내셨어요?”박민호가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당연하지. 내가 가서 난리를 쳤는데 감히 안 줄 수 있겠냐?”노부인은 득의양양하게 말했다.박민호 역시 딱히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노부인의 능력에 감탄할 뿐이었다.“외할머니는 정말 대단하세요.”둘은 열띤 대화를 나누다가, 최민아가 방에서 나오자 곧바로 말을 멈췄다. 자신들이 한 행동이 외부인에게 떳떳하게 드러낼 만한 것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는 듯했다.최민아와 박민호는 본래 가진 돈이 많지 않은 데다 일도 해야 했기 때문에, 진주시에서 간단히 두 테이블 정도만 차려놓고 결혼식을 올린 뒤 부모님께 결혼했다고 알리기로 했다.박민호는 이내
방 안에는 숨 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다.박민호는 최민아가 화를 낼까 봐 급히 말을 꺼냈다.“민아 씨, 과거의 일은 다 지난 일이잖아요. 지금 나는 완전히 달라졌어요. 절대 민아 씨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고 예전처럼 그런 망나니 같은 짓도 절대 다시 하지 않을 거예요.”최민아는 그의 말을 듣고 무심코 대답했다.“내가 민호 씨랑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민호 씨 과거는 신경 안 써요.”하지만 이내 그녀의 눈빛이 단단해졌다.“내가 화난 건 민호 씨 아까 한 행동 때문이에요.”“내가 뭐 잘못했는데요?”박민호는 이해하지 못한 듯 물었다.“어떻게 누나한테 집을 양보해 달라고 부탁할 수가 있어요? 그곳은 민호 씨 누나와 형부가 사는 집이잖아요.”“겨우 그 일 때문이에요?”박민호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누나는 내 가족이에요. 이런 작은 부탁 정도야 뭐 어때요?”그의 무심한 태도에 최민아는 더욱 화가 났다.“이런 식으로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요. 앞으로 우리는 무조건 우리 힘으로 살아가야 해요. 모든 걸 누나한테 기대지 말고요.”박민호는 그 말에 공감되지 않았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앞으로는 민아 씨 말을 따를게요.”“네.”그 문제는 그렇게 넘어갔지만 최민아는 다시 다른 걱정거리를 떠올렸다.“참, 민호 씨 외할머니랑 다른 친척들이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어떡하죠?”“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외할머니는 내 말을 제일 잘 들으시거든요. 내가 민아 씨를 좋아한다고 하면 분명히 싫어하지 않으실 거예요.”박민호는 노인들을 대하는 데 꽤 능숙했다.그리고 다음 날, 둘은 바로 김말숙을 만나러 갔다.김말숙은 처음에는 박민호가 자기 아들의 돈을 가지고 도망갔던 일 때문에 약간 화가 나 있었지만 손자가 선물을 잔뜩 들고 찾아오자 금세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집에 있던 한서진은 두 사람을 위아래로 흘끗 훑어본 후 그들이 가져온 선물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이거 다 합쳐도 십만 원도 채 안 되겠는데?”김말숙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최민아가 박민호의 손을 살짝 잡으며 말했다.“민호 씨, 우리 그냥 간단히 두어 테이블만 준비하면 돼요.”말을 마친 그녀가 박민정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언니, 민호 씨 말 듣지 마세요. 저희 결혼식 같은 건 하지 않고 간단히 식사 정도만 하려고요. 민호 씨 말하길 언니가 지금 자기의 유일한 가족이라면서 꼭 언니가 와서 축하해 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최민아는 자존심이 강한 여자였다. 누구에게도 기대고 싶지 않았고 특히 더 이상 박민정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 박민정이 저택을 결혼식 장소로 내주는 걸 꺼리는 눈치였기 때문에 그녀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그러나 박민호는 여전히 마음이 내키지 않은 듯 뭐라고 더 말하려 했으나 최민아의 매서운 눈초리에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박민정도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다가 간단히 몇 마디를 더 나누고는 그들을 떠나보냈다.둘이 떠나자마자 진서연이 서류를 들고 나타났다.“보스, 동생분이 그 최민아라는 여자분을 꽤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박민정이 웃음을 터뜨렸다.“진 비서도 봤구나?”서류를 가져오며 우연히 그 모습을 본 진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최민아 씨가 눈빛 한 번만 줘도 동생분 아무 말을 못 하던데요.”“그러게 말이야. 민호를 이렇게 꽉 잡을 수 있는 사람을 다 보게 될 줄이야.”한때 박민호는 어머니를 따라 윤씨 가문에 들어갔을 때, 윤석후나 윤소현에게 형식적으로만 공손할 뿐 실제론 반항적이고 제멋대로인 본성을 숨기지 않았었다. 그런 그가 이제 한 여자 앞에서 꼼짝없이 순종하는 모습은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박민정은 동생이 앞으로도 이 마음이 변치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녀가 보기에도 최민아는 참 괜찮은 여자였고 분명 동생을 바른길로 이끌 수 있을 것이었다.“그러게요. 두 사람 서로를 좋아하는 마음이 변치 않고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맞아, 나도 그러길 바라.”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서연에게 물었다.“아, 참. 민기 씨랑은 요즘 어떻게 지내
시간이 흘러 박민정이 여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박민호는 최민아를 데리고 집을 찾아왔다.박민정은 눈앞에 수수한 차림으로 잔뜩 긴장한 채 서 있는 소녀를 보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부드럽게 말했다.“어서 와요. 여기 편하게 앉아요.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요.”박민정의 다정한 목소리에 최민아는 살짝 놀랐다. 사실 최민아는 박민정을 뉴스에서 보던, 중년의 부유한 사업가 정도로 막연히 상상했었다. 그러나 눈앞의 그녀는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젊고 아름다웠으며 무엇보다도 자연스러운 친절함이 온화하게 배어 나오는 사람이었다.“감, 감사합니다...”최민아의 목소리는 긴장한 탓에 살짝 떨렸다.그 모습을 본 박민호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의자 쪽으로 안내했다.“긴장하지 말아요. 우리 누나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최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고 온 선물을 박민정에게 조심스럽게 건넸다. 백만 원을 훌쩍 넘는 고급 화장품 세트였다.“언니께 뭘 드려야 좋을지 몰라서요. 작은 성의니까 받아주세요. 저희 부모님을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최민아도 자신의 선물이 박민정에게는 별것 아닐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둘러 덧붙였다.“그리고 이 안에 제가 직접 뜬 목도리도 하나 넣었어요. 날씨가 추워서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고마워요.”거절하면 최민아가 상처받을 것을 알기에 박민정은 선뜻 선물을 받았다.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다정한 말투로 덧붙였다.“하지만 앞으로는 이렇게 비싼 화장품까지는 사지 않아도 돼요. 민아 씨가 직접 떠준 목도리만으로도 충분해요. 목도리 정말 마음에 들어요.”박민정은 최민아의 형편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값비싼 선물을 받으니 오히려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 박민정의 배려 깊은 말에 최민아는 마음의 위안을 얻은 동시에 그녀는 내심 궁금해졌다. 박민호와 눈앞에 있는 여자는 정말 많이 달랐다.박민호가 웃으며 덧붙였다.“봐요, 내가 말했죠? 우리 누나는 절대 그런 속물적인 사람이 아니라니까요.”최민아는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