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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머뭇거리는 김현욱의 모습에 남지유는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김 대표님, 잘 생각해 보세요. KP 컨소시엄의 관리 감독은 매우 엄격한 것으로 소문나 있죠. 어딜 가나 필요한 일환이기에 대표님이 걱정되는 부분이 있는 만큼 저희도 마찬가지이죠. 정 안 되면 이쯤에서 투자 철회해도 돼요.”

김현욱은 오만 가지 고민 끝에 결국 사인하기로 했다.

이 천억은 그에게 너무 소중했다. 게다가 이렇게 거대한 컨소시엄에서 코딱지만 한 그의 그룹을 탐낼 일은 없을 테니까.

“할게요!”

김현욱은 결국 순순히 서명했다.

남지유는 의자에 기대어 흔들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남지유도 사인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김현욱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귀사에 투자금이 곧 입금될 테니까 나중에 확인해보세요.”

김현욱은 잽싸게 남지유와 악수하며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

이내 남지유는 손을 빼내고 싱긋 웃었다.

“그럼 배웅은 따로 하지 않을게요.”

김현욱은 연신 굽신거리며 뒤돌아서 사무실을 나와 나머지 일을 처리하기 위해 회사로 돌아갔다.

남지유는 다시 의자에 앉아 냉소를 지었다.

“멍청한 놈.”

...

저녁.

명상을 마친 이민혁은 외식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을 지나쳤을 때 유민상과 김옥란, 유소희, 김현욱이 소파에 앉아 웃고 떠들고 있었다.

이민혁은 그들을 흘긋 쳐다보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때, 유소희가 그를 불렀다.

“이민혁.”

“왜?”

이민혁이 돌아섰다.

유소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현욱 씨가 KP 컨소시엄한테서 천억을 투자받기로 했어.”

“나랑 무슨 상관인데?”

이민혁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유소희가 활짝 웃었다.

“HT 그룹은 곧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서 서경시 일류 기업이 될 거야.”

“축하해.”

이민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유소희는 발끈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자식!

“현욱 씨가 오늘 밤 우리 집에 머문다고 하니까 나랑 한방 쓸 거야. 할 일 없으면 괜히 싸돌아다니지 마. 혹시 못 볼 거라도 볼지 모르잖아?”

유소희는 김현욱의 팔짱을 끼면서 빈정거리기 바빴다.

이민혁은 굳은 표정으로 한 명씩 얼굴을 훑었다.

장인어른, 장모님이라는 사람은 태연하기 짝이 없고 유소희는 꽃보다 환한 미소를, 김현욱은 우쭐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도 지금 이 상황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한마음 한뜻으로 그를 조롱하기 위해 작정한 듯싶었다.

잠시 후 이민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내일 이혼하러 가자.”

유소희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며 비명을 질렀다.

“약속 지켜? 번복하면 죽는다?”

이민혁의 눈빛에 살의가 일렁거렸지만, 말투만큼은 무덤덤했다.

“난 말한 대로 하는 사람이야.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마.”

“후회?”

유소희는 폭소를 터뜨렸다.

“내가 제일 후회하는 일이 뭔지 알아? 바로 너랑 결혼했다는 거야, 이 쓰레기야.”

유민상도 말을 보탰다.

“약속한 거다? 내일 아침 일찍 이혼하러 가.”

“그리고 빈손으로 나가.”

김옥란이 맞장구를 쳤다.

이민혁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해요.”

셋은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기세였고, 김현욱도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이제 KP 컨소시엄의 투자금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유씨 가문도 곧 수중에 넣게 생겼다.

이때, 집에 돌아온 유소영이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대뜸 물었다.

“다들 뭐 하는 거예요?”

“네 형부가 나랑 이혼하기로 약속했어.”

유소희가 웃으며 말했다.

유소영은 경악한 얼굴로 이민혁을 바라보았다.

“저랑 이미 약속했잖아요.”

“바보야, 이런 일은 강요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될 대로 되겠지.”

이민혁이 웃으면서 말했다.

유소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엄마 아빠도 동의하셨어요?”

“응, 허구한 날 빈둥거리기만 하는 녀석을 집에 둬봤자 네 언니랑 유씨 가문의 앞길만 방해할 뿐, 차라리 한시라도 빨리 쫓아내는 게 낫지.”

유민상이 말했다.

“엄마?”

유소영이 김옥란을 바라보자, 그녀는 애틋한 표정으로 설득했다.

“김 대표님과 힘을 합쳐야 우리한테 더 밝은 미래가 있지 않겠어? 이게 다 네 언니의 행복과 유씨 가문의 앞날을 위해서야. 소영아, 이제 철 좀 들어야지?”

“다들 어떻게 이럴 수 있죠?”

유소영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이내 떨리는 손으로 부모님과 유소희를 가리키며 눈물을 흘렸다.

“형부가 없었더라면 유씨 가문이 과연 오늘날의 성과를 이뤘을까요? 정녕 양심 따위 개나 줘버린 거예요? 어찌 형부를 쫓아낼 수 있죠?”

“그게 무슨 헛소리야!”

유민상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앞으로 다가가 작은딸의 뺨을 내리쳤다.

‘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유소영은 얼굴을 가린 채 그 자리에서 넋을 잃고 말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정신을 차렸고, 눈물이 멈춘 그녀의 두 눈에 오로지 슬픔만 가득했다.

이내 부모님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 이런 집에 더는 못 있겠어요. 이제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말을 마친 유소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유민상은 후회가 밀려왔지만, 김옥란이 설득했다.

“신경 쓰지 마. 나중에 생각이 바뀌면 알아서 집에 돌아올 거야.”

이민혁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느긋하게 말했다.

“먼저 가볼게요. 내일 아침 구청에서 봅시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김옥란은 코웃음을 쳤다.

“내일 안 나타나기만 해 봐. 다리 몽둥이를 문질러버릴 테니까.”

“김 대표님.”

유민상이 히죽 웃으면 말했다.

“저랑 제 아내는 먼저 쉬러 갈 테니까 소희랑 얘기 나눠요. 늙은이들은 방해하지 않고 이만 빠져줄게요.”

곧이어 유민상은 김옥란을 끌고 재빨리 안방으로 돌아갔다.

김현욱은 싱글벙글 웃으며 유소희를 껴안고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옷을 벗기기 급급했는데, 유소희에게 제지당했다.

“아직은 안 돼요. 결혼식 올리고 나면 꼭 허락해줄게요.”

이에 김현욱도 강요하는 대신 한발 물러났다.

“너만 좋다면 내가 괴로워도 좀 참을게.”

“아잉.”

유소희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언젠가 현욱 씨 사람이 될 텐데 뭐가 그리 급해요? 그럼 결혼식은 언제 올릴까요?”

“요 며칠 준비하자. 네가 그 쓰레기랑 이혼하면 당장 결혼식 준비 돌입할 테니까.”

김현욱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이를 들은 유소희는 김현욱의 가슴에 기대며 나지막이 말했다.

“사랑해요, 현욱 씨.”

“나도.”

유소희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피어올랐고, 김현욱의 두 눈에는 욕심으로 가득했다.

유씨 가문에서 나온 이민혁은 거리를 거닐면서 유소영에게 일단 발붙일 곳을 찾아 생각을 정리하고 괜히 돌아다니지 말라고 문자 보냈다.

유소영은 비록 능력이 조금 부족하지만, 아직 나이가 어려서 충분히 성장 가능성이 있다.

그녀의 뚜렷한 가치관과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이야말로 이민혁이 높이 사는 부분이다. 이런 사람은 앞으로 중용 받기 마련이다.

이민혁은 거리를 천천히 걸으며 미래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한 시간 넘게 걸었다.

이때, 길가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이민혁이 고개를 돌리자 네다섯 살짜리 아이가 무슨 이유인지 길 한복판에 나타났는데 맞은 편에서 달려오는 자동차와 곧 부딪칠 것 같았다.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거리에서는 아이의 생명에 위협을 주기 충분했다.

이를 본 순간 이민혁은 이미 무의식중에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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