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천신이 아니라 누가 되었든 간에 이 상황에서는 끝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역천신의 눈에는 오직 넘치는 분노와 살기가 가득할 뿐, 더 이상 긴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지금 역천신의 목표는 단 하나, 바로 자기 분수를 모르는 개미 같은 놈들을 반드시 모조리 죽이겠다는 것이었다.역천신의 유일한 손바닥 위로 날카로운 풍날들이 떠올랐다.이 풍날이 지나가는 곳이라면 그게 건물이든 가장 강력한 장갑차든 전부 갈기갈기 찢겨나갈 것이다.진서준은 평온한 눈빛으로 역천신을 바라보며 손에 들고 있던 참선검을 서서히 거두었다.“검을 거두다니... 왜 저러는 거지?”이 광경을 본 모두가 이해하지 못하자 진서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봉호전에서 이 녀석이 말했었어. 자기는 검도를 그다지 능숙하게 다루지 못한다고...”검도를 잘하지 못한다니,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졌다.본인이 능숙하지 못한 방식으로 불과 몇 분 만에 아홉 명의 해외 강자를 처치했다고?이건 참 놀라운 일이었다.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는 사이, 갑자기 진서준의 등 뒤에서 거대한 용 두 마리가 나타났다.이 두 마리의 용은 얼핏 보면 진서준의 몸속에서 자라난 것 같았다.우렁찬 용의 포효가 울려 퍼지자 하늘의 구름과 안개가 흩어져버렸다.곧이어 두 마리의 용은 다시 진서준의 몸속으로 사라졌고 그의 두 팔에 나타났다.진서준의 두 팔은 푸른 용과 붉은 용이 휘감고 있었고 그 빛은 이 어두운 밤을 대낮처럼 밝히고 있었다.“죽어!”역천신은 진서준의 두 마리 용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손에 모은 풍날을 내리쳤다.순간, 폭풍 같은 강풍이 만군의 힘을 담아 압도적인 기세로 진서준을 향해 돌진했다.“흩어져!”진서준의 목소리가 떨어지자 그는 전력을 다해 주먹을 내질렀다.쿵!풍날이 완전히 흩어진 순간, 진서준은 거대한 산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반면, 역천신은 뒤로 크게 한 걸음 물러났다.“이, 이럴 수가!”지선인 역천신이 한 걸음 물러난 모습을 본 모두가 눈알이 튀어나올 듯한 충격
만룡파천이라 불리는 이 기술은 장청결에 포함된 것이 아니었다.이 기술은 진서준이 자기 혈해를 각성시킨 후, 자연스럽게 진서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었다.그 느낌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몸에 새겨져 있었던 것 같았다.진서준은 이 사실을 깨달은 후, 거울을 들여다본 적이 있었다.그러자 거울 속에 진서준의 등에 하나의 붉은 빛이 나는 거대한 용이 새겨져 있는 듯한 모습이 비쳤다.혈해의 힘을 발동하면 그 거대한 용이 나타났고 그렇지 않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현재 진서준의 힘으로는 최대 여섯 마리의 혈용을 응집할 수 있었다.그것도 천용 반지의 힘을 빌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천용 반지가 없었다면 네 마리 혈용을 모으는 것만으로도 기력이 완전히 소진되어 기절해 버렸을 것이다.하늘에 떠오른 그 생동감 넘치는 여섯 마리 혈용을 바라보며 역천신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역천신뿐 아니라 진서훈과 다른 이들 역시 숨이 턱 막혔다.“진용 혈맥이라니...”이 혈맥은 전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전해지는 얘기로는 2천 년 전 대한민국 대륙을 통일한 초대 황제가 바로 진용 혈맥을 지녔다고 했다.그 후 2천 년 동안, 진용 혈맥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진서준의 아버지인 진요한조차도 이 기술을 사용한 적은 없었다.“이 주먹에 죽는 것은 네게도 영광일 거야...”이 말과 함께 진서준의 모습은 사라졌다.여섯 마리 혈용이 압도적인 기세로 몰려오자 역천신의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 찼다.역천신은 지금 태어나 처음으로 이런 절망적인 곤경에 빠지게 됐다.심지어 25년 전, 대한민국의 지선과 맞섰을 때도 이런 무력함은 없었다.‘말도 안 돼. 내가 이런 애송이에게 죽을 리 없어. 이 몸은 지선이란 말이야!’“애송이야, 누가 살고 죽을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야!”말은 그렇게 했지만 역천신은 저도 모르게 마음속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역천신은 스스로 세상에 본인의 생명을 위협할 자는 없다고 믿었으나 진서준의 이 주먹 앞에서 처음으로 패배를
호국사들은 신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진서준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진서준은 바람에 흩어진 역천신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이제 돌아갑시다.”진서준이 모두를 모시고 돌아가겠다고 했으면 무조건 약속을 지킬 것이다.진서준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한 일을 책임지고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었다.“좋아, 우리 다 함께 돌아가자.”진서훈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진서훈이 막 몸을 돌리려는 순간,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진서준이 그대로 바다 위로 쓰러졌다.“진 마스터!”“서준아!”“진 청년!”진서준이 쓰러지는 모습을 본 진서훈 일행은 긴장한 기색으로 곧장 그에게 달려갔다.진서훈은 서둘러 진서준의 맥을 짚어보고는 한참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야. 단지 기력이 소진돼 기절했을 뿐, 큰 문제는 없어.”그 말에 다른 이들 역시 조마조마했던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진서준을 성도로 데려간 뒤, 진서훈 일행은 곧바로 진서준을 병원에 보냈다.그리고 진서훈 일행도 치료를 받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언니, 지금 한밤중인데도 진서준이 아직 안 돌아왔어. 설마...”허윤진 자매는 여전히 해변 별장에서 진서준이 무사하게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제발 그런 불길한 말 좀 하지 마.”허사연이 눈을 흘기며 나무랐다.“나도 그러고 싶어. 근데 벌써 거의 네 시간이 지났는데도 진서준이 안 돌아왔잖아. 난 혹시라도 진서준이...”허윤진은 말을 점점 흐리더니 이내 눈가가 붉어졌다.만약 진서준이 정말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허윤진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진서준을 따라가는 것이 답일까?허윤진도 모든 걸 끝내고 싶었지만 아직 그녀에게는 허성태가 남아 있었다.아버지를 두고 떠난다면 아버지는 과연 어떻게 될까?허사연은 비록 겉으로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몹시 불안했다.하지만 언니로서 허사연은 반드시 침착함을 유지해야 했다.“전화 한번 해볼게.”허윤진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며 진서준에게 전
성도시 병원.창문에 걸린 별무늬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잘게 쪼개져 진서준의 생기가 도는 얼굴 위에 점점이 내려앉았다.어젯밤 창백했던 모습과 비교하면 지금의 진서준은 평범한 사람처럼 건강을 되찾아 이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의사 선생님, 상태가 어떻습니까?”검은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얼굴엔 주름이 깊게 팬 진서훈이 우려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렇게 신체가 강인한 환자는 처음 봅니다.”진서준의 상태를 확인한 의사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어젯밤 환자를 데려오셨을 때는 상태가 아주 악화한 상태였습니다. 환자의 장기가 거의 한계에 이르렀기에 저는 솔직히 오늘 밤을 버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단 하룻밤 만에 정상인처럼 회복되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진서준이 정상적인 상태로 완전히 회복됐다는 말을 듣고 진서훈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어젯밤 진서준을 병원에 데려온 뒤, 진서훈도 서둘러 상처를 치료하느라 여념이 없었다.몸 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되자마자 진서훈은 바로 진서준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것이다.“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가 깨어날 겁니다.”의사가 진서준의 상태를 확인하며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진서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그렇다면 참 다행이군요.”의사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상에 누워 있던 진서준이 천천히 눈을 떴다.진서준은 놀랍게도 어젯밤 몸이 산산이 찢어질 것 같던 고통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고 대신 몸이 거의 회복된 것 같은 안정감을 느꼈다.어제 만용파천으로 역천신을 죽일 때, 진서준은 천용 반지의 힘 중 10분의 1을 사용했다.비록 10분의 1에 불과했지만 그 막대한 힘은 진서준의 몸을 자칫 산산조각 낼 뻔했다.그 순간, 진서준은 천용 반지의 엄청난 위력을 뼈저리게 깨달았다.10분의 1만으로도 이렇게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일 수 있는데 그 힘을 전부 다 사용할 수 있다면 어떤 결과가 발생할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서준아, 깨어났구나.
“그때가 되면, 신농은 전력을 다해 널 잡으려 들 거야.”진서훈이 무거운 말투로 말했다.진서준이 죽인 건 비록 중상을 입은 지선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진서준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었다.이 일은 너무 충격적인 일이기에 절대로 외부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됐다.일단 외부에 퍼진다면 진서준은 평생을 쫓기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알겠습니다.”진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다.“그래서 우리 네 늙다리가 염치없게도 네 공을 빌려다 쓰려고 해.”진서훈은 미안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했다.“할아버지, 제 안전을 위해 그러시는 거라는 걸 잘 압니다.”진서준은 담담히 받아들이며 미소를 지었다.“게다가 저는 명예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사실 할아버지들 네 분이 먼저 역천신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않으셨다면 제가 어떻게 역천신을 처치할 수 있었겠습니까?”진서준의 말은 사실이었다.역천신이 중상을 입지 않았다면 진서준이 천용 반지의 힘을 빌린다고 해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진서준과 지선 사이의 격차는 단순한 재능이나 선법으로 메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어젯밤 역천신과의 전투를 통해 진서준도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바로 이른바 지선이라는 인물은 전부 장청결에서 언급된 금단 수사라는 점이다.다만 이들은 진정한 선법을 익힌 수사와 비교하면 그 실력이 엄청나게 부족해 그저 가짜 금단 수사에 불과했다.“그럼 다행이야.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구나.”진서훈은 자기 턱수염을 만지며 흐뭇하게 웃었다.“좋아, 여기서 좀 더 쉬어. 난 이만 가볼게.”“잠깐만요, 할아버지. 혹시 휴대폰 좀 구해 주실 수 있을까요?”진서준은 집에서 자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허사연과 허윤진 자매를 잊은 적이 없었다.하룻밤 동안 연락 없이 사라진 자기 때문에 허사연 자매가 분명 걱정했을 것이다.혹여 허사연 자매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라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알겠어. 잠시만 기다려.”진서훈은 병실에서
“우리가 도와줄게.”허사연은 진서준을 화장실에 데려가는 일이 누워서 떡 먹기처럼 간단한 일인 듯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그건... 좀 불편하지 않을까?”진서준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성인 남자가 화장실에 가는데 두 여자가 도와준다는 게 너무 창피한 일인 것 같았다.이게 소문이라도 나면 앞으로 얼굴 들고 다니기 힘들 것 같았다.“뭐가 어때서? 난 네 여자친구잖아. 네가 지금 혼자 화장실도 못 가는데 내가 못 도와줄 이유가 있나?”허사연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럼 너 혼자 도와주면 돼. 윤진은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진서준이 허윤진의 호의를 거절했다.진서준과 허사연은 이미 특별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허사연 앞에서는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하지만 허윤진은 달랐다. 허윤진은 허사연의 여동생일 뿐, 진서준과 특별한 관계는 아니었다.“진서준, 혹시 날 싫어하는 거야?”허윤진은 눈을 부릅뜨며 진서준을 노려봤다.“아니야, 내가 왜 싫겠어? 그냥 이건 네가 돕기엔 좀 부적절하잖아.”진서준이 급히 해명했다.“넌 남자잖아, 뭐 그런 걸 갖고 쑥스러워해?”허사연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근데 윤진까지 따라오면 좀 그렇긴 하네. 윤진아, 넌 여기서 기다려.”허윤진은 입술을 삐죽이며 마지못해 소파에 앉았다.“가자.”허사연은 진서준을 부축해 천천히 화장실로 데려가 문을 잠갔다.“왜 문까지 잠그는 거야?”문을 잠그는 소리를 들은 허윤진은 얼굴이 굳었다.단순히 화장실 가는 건데 굳이 문까지 잠글 필요가 있나?혹시... 화장실에서 뭔가 하려는 건 아닌지 허윤진은 의심이 들었다.허윤진은 이런 부부 사이의 일을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어느 정도 상상은 할 수 있었다.순식간에 허윤진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었고 잠잠하던 심장이 쿵쾅쿵쾅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허윤진은 심호흡을 하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몰래 화장실 문 앞으로 갔다.그러고는 귀를 문에 대고 안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래 듣기 시작했다.그 순간, 허윤진의 얼굴은 잘 익은
“응... 그래...”허윤진은 어딘가 집중하지 못한 모습이었다.허윤진의 눈길은 자꾸만 어떤 특정한 곳으로 향했다.진서준은 허윤진의 시선이 몹시 불편했다.‘설마 이 아이가 방금 뭔가 들은 건 아니겠지?'방에 진서준과 허윤진만 남자 분위기가 더 어색하고 묘해졌다.진서준은 숨 막히는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윤진아, 며칠 동안 할 일이 별로 없는데 이제 우리 셋이 해변 구경하러 가자.”“응... 좋아.”허윤진은 대화에 집중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너 왜 그래? 뭔가 마음이 딴 데로 가 있는 것 같은데.”진서준이 질문에 허윤진은 얼굴이 빨개진 채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앞으로 내가 있을 때 언니랑 좀 자제해줄래?”진서준은 그 말에 얼굴이 화끈해졌다.아무래도 화장실 안의 소리가 밖에 들렸던 것 같았다.“저기... 나 목이 좀 말라, 물 좀 떠줄래?”이 화제를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든 진서준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더 이상 얘기했다가는 앞으로 처제 얼굴을 제대로 볼 자신이 없었다.허윤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떠 왔다.“조금 뜨거운데, 내가 불어서 식혀줄게.”허윤진은 물컵을 들고 침대 옆으로 왔다.“아냐, 내가 알아서 할게.”진서준은 서둘러 손을 뻗어 물컵을 받으려 했다.“내가 해줄게...”허윤진과 진서준이 물컵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던 중, 그만 뜨거운 물이 허윤진의 가슴 쪽으로 쏟아졌다.“아야!”뜨거운 물이 닿자 허윤진은 놀라서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윤진아, 괜찮아?”진서준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괜찮아, 괜찮아...”허윤진은 서둘러 젖은 겉옷을 벗어 던졌다.하지만 물이 너무 많이 쏟아진 탓에 겉옷뿐만 아니라 안쪽의 하얀 셔츠에도 물 자국이 생겼다.“여기 드라이기가 있어. 드라이기로 말리는 게 어때?”진서준이 서둘러 물었다.진서준이 머무는 곳은 고급 병실로 무려 17평 정도 크기였다.최첨단 의료 장비만 없다면 누가 봐도 이곳은 고급 스위트룸처럼 보였을 것이다.허윤진은 고개
허사연의 장난기 어린 시선을 보자 허윤진은 언니가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을 직감했다.언니는 자기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허윤진과 진서준 사이는 아무런 특별한 것도 없이 깔끔했다.넘지 말아야 할 선을 허윤진은 단 한 번도 넘은 적이 없었다.지난번 온천 사건도 그저 우연일 뿐이었다.허사연은 흥미로운 미소를 띤 채 아침 식사를 들고 진서준 쪽으로 걸어갔다.“아까 어땠어? 기분 좋았어?”허사연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뭐가 좋았다는 거야?”진서준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모르는 척은. 윤진이 셔츠를 빨러 갔던데 너희 둘이 아까 화장실에서 뭐 했던 거 아니야?”허사연의 눈에서 야릇한 빛이 반짝였다.진서준은 그 말에 피를 토할 뻔했다.“그게 아니야. 내가 목이 말라서 윤진에게 물을 부탁했는데, 그 애가 가져오다가 실수로 자기 몸에 쏟은 거야.”진서준은 급히 해명했다.만약 무슨 일을 정말로 저질렀다면 허사연의 말을 반박하지 않았겠지만 문제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이었다.“윤진은 지금 마스터 급인데 그런 애가 물 한 잔도 제대로 들지 못할 것 같아?”허사연은 진서준을 째려보며 말했다.“거짓말을 하더라도 좀 더 그럴듯한 이유를 대야지?”“정말 거짓말이 아니야...”진서준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됐어, 나도 내 친동생한테 질투하진 않을 거니까.”허사연은 두유와 삶은 달걀을 꺼내며 말했다.“단백질 보충 좀 해. 아까 그렇게 많이 소모했잖아.”허사연의 말이 점점 더 이상해지자 진서준은 황급히 외쳤다.“그만, 그만하라고!”“푸흡...”허사연은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넌 왜 자꾸 날 여자 변태로 만드는 거야?”진서준은 속으로 투덜댔다.‘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물론 이 말을 입 밖에 내진 않았다.만약 말했다간 한 달 동안 허사연과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게 뻔할 것이다....대한민국에서는 해가 막 떠오른 시간이었지만 서반구에 있는 초아국에서는 밝은 달이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깊은
“뭐라고? 불법적인 일이 우리 가게에서 일어난다고? 말도 안 돼.”성현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넌 전신전 소속이잖아. 그런데 네 오빠인 내가 어떻게 법률을 어기는 일을 하겠어?”“그럼 이 사람들은 왜 부른 거야? 집단 폭력도 불법이거든.”성미영은 차가운 시선을 보이며 성현도와 따졌다.“미영아, 이건 내가 싸우려던 게 아니야. 저 녀석이 일부러 시비 걸러 온 거라고.”성현도는 진서준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이놈이 일부러 우리 찻집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고 상철을 두들겨 패서 머리에 혹이 다 나버렸어. 난 단순히 정당방위를 위해 부른 거라고.”성미영이 등장하자 성현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솔직히 실력만 놓고 보면 성현도는 성미영보다 한참 부족했다.게다가 성미영은 전신전 소속인지라 저 남녀가 군부 조직인 전신전을 적으로 돌릴 리 없었다.군대를 건드리는 순간, 무조건 좋은 결과는 있을 수 없었다.“진서준, 도대체 무슨 일이야?”성미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라? 너희 둘이 아는 사이야?”성현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방금 내려놨던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난 사람을 찾으러 왔어. 하씨 가문 하경범이 이 위층에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진서준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그리고 또 하나, 저 위에서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도 하더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이 말에 성현도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해졌고 즉시 반박에 나섰다.“헛소리 마. 우리 가게는 단순한 찻집이야. 불법적인 일 따윈 없어. 근거없는 소문을 왜 털어놓고 난리야?”“미영아, 저 녀석한테 속지 마. 난 네 사촌 오빠야. 내가 그런 불법적인 짓을 할 사람이겠어?”성미영이 곧바로 진서준에게 물었다.“진서준, 너 증거 있어?”“직접 올라가 보면 다 알게 될 거잖아?”진서준이 가볍게 말했다.“오빠, 위층으로 가자.”성미영이 단호하게 말했다.“그, 그건 좀 곤란해. 위층엔 귀
순간, 장내는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모든 시선이 진서준에게 쏠렸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다들 진서준을 그냥 얼굴만 반반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 고수였다.성현도의 부하 중 최고 실력자조차 상대가 되지 않았다.성현도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고 상철을 향해서 욕설을 날렸다.“쓰레기 자식, 이런 애송이 하나도 못 이겨?”부하가 지면 망신당하는 건 결국 성현도 자신이었다.이대로 체면을 구긴 채 끝낼 수는 없었다.이대로 넘어가면 앞으로 르벨 재벌 2세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될 게 뻔했다.“이봐, 네 실력이 괜찮은 건 인정할게.”성현도가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근데 너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수 있어? 천 명은? 잘 들어. 내 부하는 수도 없이 많아. 너 같은 놈 하나 처리하는 데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해.”진서준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그냥 하경범을 찾으러 온 거야. 그 녀석만 넘기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해주지.”“없던 걸로 한다고?”성현도가 그 말에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너 지금 누굴 상대로 협상하려 드는 거야? 난 성씨 가문의 직계야. 날 건드리면 상대해야 할 건 나 하나가 아니라 우리 가문 전체라고.”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이 남자들은 전부 성씨 가문의 경호원이었고 실력도 만만하지 않았다.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무려 50명 이상이었다.한순간에 텅 비어 있던 로비가 사람들로 꽉 찼다.“저 자식 끝났네. 이 정도 성씨 가문 인원이라면 아무리 강해도 버틸 수가 없지.”“그러게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잖아.”“왜 쓸데없이 성현도를 건드린 거지? 스스로 무덤을 판 거잖아.”구경꾼들은 이 광경에 각자 다른 감정을 보였다.누군가는 동정을, 누군가는 아쉬움을, 또 누군가는 짙은 흥미를 보였다.“사연아, 넌 좀 쉬어. 이놈들은 내가 처리할게.”진서준이 앞으로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가 찻집 안으로 들어왔다.남자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상철아, 저놈 다리 하나 부러뜨려서 내던져.”성현도가 진서준을 가리키며 명령했다.“알겠습니다.”상철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진서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서준아, 내가 할게.”허사연의 눈에는 불꽃 같은 전투욕이 타올랐다.“조심해. 저 녀석은 횡련 종사야.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진서준이 조용히 귀띔했다.“알았어. 설령 못 이긴다고 해도 어차피 네가 있잖아?”허사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진서준이 곁에 있는 한, 허사연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이봐, 사내자식이 여자 뒤에 숨는 게 말이 돼?”상철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이봐, 껑충이. 여자를 얕보지 마. 일단 이기고 나서 말해.”허사연이 상철을 도발했다.“아가씨, 그런 기생오라비 말고 날 따르지 그래? 밤마다 널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데?”상철이 음흉하게 웃었다.“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얼굴이 싸늘해진 허사연이 주먹을 날렸다.강렬한 펀치가 공기를 가르며 폭발음을 일으켰고 그 위력은 철판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상철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가만히 서 있어도 넌 날 어쩔 수 없어.”“닥쳐!”허사연이 분노에 차 주먹을 그대로 상철의 얼굴로 내리꽂았다.상철은 일부러 머리를 숙이며 대머리 정수리로 받아냈다.쿵!둔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주먹이 상철의 머리를 강타했으나 대머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사연이 몇 걸음 물러섰다.순간 손에 뜨거운 통증이 밀려왔고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손을 확인하자 하얀 피부였던 손등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상철은 자기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더니 빙그레 웃었다.“아가씨, 이제 내 실력을 알겠지?”그 모습에 허사연의 승부욕이 다시 불타올랐고 콧방귀를 뀌며 다시 달려들었다.이번에는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상철의 머리를 내려찍었다.‘머리가 단단하다고 자랑하
이렇게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싸움 실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완전 여성판 이소룡이었다.“너, 너희들 정말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여기가 어디인지 알기나 해? 어디서 대놓고 싸움질이야?”종업원은 순간 놀란 뒤 분노에 찬 얼굴로 진서준와 허사연을 가리켰다.찻집이 문을 연 이후로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진서준과 허사연이 첫 사례였다.주변의 구경꾼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싸움 좀 하면 뭐해? 여긴 성씨 가문의 구역이야. 성씨 가문에서 한마디만 하면 저 남녀는 오늘 밤중으로 사라지겠지.”“어휴, 저 여자 너무 아까워. 저렇게 예쁜데 왜 죽지 못해서 안달이지?”“여자는 살 수도 있겠지만 남자는 무조건 죽을걸.”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며 이미 진서준과 허사연의 결말을 예상하는 듯했다.“그럼 네 말대로라면 내가 널 때린다 해도 얌전히 맞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허사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종업원에게 다가갔다.“오지 마!”종업원은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다.“어떤 미친놈이 내 구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야?”그 순간, 2층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을 확인하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성현도가 오늘 여기 있었네?”누군가 그 청년을 알아보았다.“저 둘 끝장났네. 성현도는 악명 높은 냉혈한이야.”그 청년은 바로 찻집의 사장인 성현도였다.성현도는 르벨 재벌 2세 사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친구에게는 무조건 의리를 지키지만 적에게는 무자비했다.성현도의 고문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고 게다가 무인으로서 무공 실력도 상당했다.“사장님, 저 남녀가 와서 난동을 부렸어요.”종업원은 성현도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장이 나온 걸 확인한 허사연은 주먹 한 방에 종업원을 기절시켜 버렸다.“뭐야?”성현도의 눈이 가늘어졌고 표정이 험악해졌다.자기 앞에서 대놓고 부하를 때리다니, 이건 너무나도 명백한 도발이었다.“아가씨, 우리 처음 보는 사이 맞지? 우리
그리고 오후 2시가 되자 진서준은 허사연을 데리고 조호가 말한 천국찻집으로 향했다.겉모습만 보면 이 찻집은 진짜 전통찻집 같았고 규모도 꽤 컸다.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1층과 2층까지는 정말 평범한 찻집처럼 꾸며져 있었고 누가 봐도 이상한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하지만 3층으로 올라가려면 회원권이 있어야 하거나 사장이 직접 허락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손님, 아가씨,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진서준과 허사연이 차를 마시러 온 줄 안 종업원이 빠르게 달려와 안내하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 난 하경범을 찾으러 왔거든.”진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종업원이 순간 얼어붙었다.“혹시 하씨 가문의 하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맞아.”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손님은 누구신지...”종업원이 신중하게 물었다.진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냥 복수하러 왔다고 전해.”그놈 아버지라고 하는 건 자기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고 친구라고 하기도 기분이 더러웠다.그 말에 종업원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손님, 여기서 장난치지 마세요.”하경범은 르벨에서 유명한 재벌 2세였다.이 찻집의 사장과도 막역한 사이였고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왜? 못 믿겠어?”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손님, 하 도련님에게 복수하려던 사람은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종업원이 경고하듯 말했다.“그런 농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그 말을 듣자 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이렇게 전해. 그 하경범이 두들겨 맞고 나자빠지게 했던 진서준이 왔으니 당장 기어 나오라고 말이야.”진서준의 뻔뻔한 태도에 종업원은 어이가 없었다.“좋습니다. 손님이 그렇게 죽고 싶다면 제가 기꺼이 도와드리죠.”종업원은 바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문제 발생했습니다. 난동자가 있습니다.”쿵! 쿵!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건장한 남자 스무 명이 들이닥쳤다.전부 검은
진서준과 허사연은 차를 타고 조호의 회사로 향했다.이 회사는 그냥 겉치레일 뿐, 진짜 돈이 들어오는 곳은 유흥업소들이었다.유흥업소를 얕잡아보면 안 된다.운 좋게 돈 많은 도련님들이라도 걸리면 하룻밤에 수억 원이 순식간에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진서준 씨!”진서준이 들어서자 조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조호는 진서준 옆에 있는 허사연을 힐끗 쳐다본 뒤 고개를 숙이고 감히 더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잡담은 그만하고 하경범을 잡아가는 제일 좋은 타이밍만 말해.”진서준이 직설적으로 물었다.이 말에 조호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매일 오후마다 하경범은 천국찻집이라는 곳에 갑니다.”조호는 재빨리 대답했다.“보통은 경호원 몇 명만 데리고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얼씨구? 저런 인간이 매일 차나 마시러 간다고?”진서준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그게... 진서준 씨, 사실 그곳은 이름만 찻집이지 실제로는...”조호는 옆에 여성이 있다는 걸 의식해서 말을 흐렸지만 진서준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아챘다.“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그냥 인기 많은 인터넷 셀럽이 가득한 고급 유흥업소일 것이다.“진서준 씨, 듣자 하니 그 찻집의 주인은 성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짜로 움직이실 거라면 하경범이 이동 중일 때를 노리는 게 좋을 겁니다.”조호가 조심스럽게 조언했다.“응? 성씨 가문이 이런 사업도 해?”진서준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진서준은 오영수에게서 성미영에 대한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정의로운 성격의 성미영이 자기 가문에서 이런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네, 듣기로는 성씨 가문의 한 직계 후손이 운영한다고 합니다. 여자에 미쳐 있는 놈이라 르벨의 돈 많은 도련님들과 꽤 친분이 깊다고 하더군요.”조호는 본인이 아는 정보를 전부 쏟아냈다.“좋아, 대충 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조호의 회사를 나온
진서준이 허사연의 캐리어를 들어주며 옆방으로 걸어갔다.그 뒷모습을 보며 도지아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인간은 원래 모여서 사는 걸 선호하는 동물이다.사회를 벗어나서 혼자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가족도 친구도 없이 너무 오래 지내다 보면 결국 감정 없는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그렇게 되면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없어질 것이다.“어제 전화할 때 그랬었지? 이번에 너 자기 출신을 찾으러 온 거라고.”호텔 방으로 돌아온 후, 허사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너 원래 경성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예전에 말해주셨어. 사실 우리 아버지는 어릴 때 길에서 주워 온 아이였다고.”진서준은 허사연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허사연은 진서준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허사연이라면 이 비밀을 절대 밖으로 흘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뭐라고? 아버님이 주워 온 아이라고?”허사연이 깜짝 놀랐다.“그래.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건 나뿐이야. 가족 중에서도 할아버지가 나한테만 알려주셨지.”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 오영수가 내 등에 있는 용을 보고는 내가 용맥의 일족이라고 했어. 그래서 오영수를 따라 여기 와서 오영수 셋째 삼촌에게 내 출신에 관해 알아보려 했던 거야.”“네 등에 용이 있다고?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허사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둘이 알몸으로 함께한 시간도 적지 않은데 허사연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내가 체내 혈기를 모을 때만 그 용이 나타나거든.”진서준이 설명을 이어갔다.“그런데 오영수 삼촌이 아직 돌아오질 않아서 일단은 여기서 며칠 기다려야 해.”“아니, 그럼 오씨 가문에서 널 안 재워줬어?”허사연이 의아해했다.명문대가인 오씨 가문에 빈방이 없을 리가 없었다.“그날 오영수를 찾아갔는데 마침 오영수 할아버지가 위중했어. 그리고 그 집안엔 그 어르신을 그냥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지.”진서준이 담담하게
“진짜 예쁜 새색시 숨겨놓고 있었네?”허사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누구라도 자기 남자 방에 예쁘고 몸매가 완벽한 여자 하나가 같이 있는 걸 보면 의심 안 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지금은 아침이었다.설마 이 여자가 아침에 막 찾아온 건 아니겠지?“사연아, 오해야. 내가 제대로 설명할게.”진서준은 머리가 띵해졌고 뇌가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아가씨, 오해하지 마세요. 어제 저랑 진서준이 같은 방에서 잔 건 맞지만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 밤새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도지아가 황급히 해명에 나섰다.“네? 밤새 안 자고도 아무 일 없었다고요?”허사연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설마 밤새 불태우느라 못 잔 건 아니겠죠?”허사연의 농담과 진담이 뒤섞인 말에 진서준은 헛웃음만 나왔다.“사연아, 이쪽은 도지아야. 우리 진짜 그냥 친구야. 일단 들어와. 천천히 설명할게.”허사연이 방에 들어오자 진서준은 서로에게 소개했다.그러고는 이 방에서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다.“도지아는 황예은이 소개해 준 환자야. 다리 치료를 부탁받았거든. 종아리를 봐봐. 이틀 전에 내가 직접 발라준 연고가 있어.”허사연이 내려다보자 확실히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그리고 도지아가 밤새 안 잔 건 원기를 수련하느라 그랬던 거야. 너도 예전에 수련한다고 며칠씩 안 잔 적 있잖아?”허사연은 오해가 풀리자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내가 뭐 어쨌다고 그렇게 호들갑이야?”“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그러는 거잖아.”진서준이 빠르게 대답했다.“뭐야? 내가 그렇게 의심 많고 질투 많은 여자로 보여?”허사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아, 아니지. 우리 사연은 누구보다 속이 넓은 부드러운 여자지.”진서준이 급히 정정했다.“됐어, 너 겁먹은 거 너무 귀엽다.”허사연이 피식 웃었다.“넌 여기 좀 쉬고 있어. 내가 방 하나 잡고 올게.”진서준은 더 머뭇거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진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허사연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도지아 씨, 진서준이
“내가 가면 안 돼?”사실 진서준은 거절하려 했었다.르벨은 안개가 짙게 깔린 늪지대 같은 곳이라 진서준조차도 어디에 함정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그러니 허사연이 온다면 다칠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거절하면 허사연이 상처받을 게 뻔했다.“당연히 되지. 지금 위치 보낼게.”진서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위치를 보냈다.자기 여자를 지킬 자신도 없으면서 강자들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기야, 잘 자.”허사연이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일찍 자.”진서준이 다정하게 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진서준의 졸음이 싹 가셨다.진서준은 창가로 다가가 이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봤다.“오씨 가문, 안씨 가문, 하씨 가문... 너희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난 전부 박살 낼 거야. 이번엔 반드시 나와 아버지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겠어.”진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진서준이 막 눈을 뜨자마자 도지아의 흥분한 외침이 들려왔다.“진서준, 됐어. 나 생겼어!”도지아는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는데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게 분명했다.진서준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너 아직 처녀 아니었어? 대체 어떻게 임신한 거야?”“미친놈아, 임신은 개뿔, 무슨 헛소리야?”도지아는 얼굴이 빨개지며 진서준을 노려봤다.“그럼 왜 아침부터 난리야?”진서준이 되물었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침부터 흥분해 날뛰지 않을 것이다.“어제 네가 준 수련법 기억나지? 나 벌써 원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됐어.”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긴 도지아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고작 하룻밤 만에 원기를 형성한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뭐? 그렇게 빠르다고? 너 타고난 천재 맞네?”진서준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보통 무인은 원기를 익히는 데만 최소 1년이 걸리는데 그것도 매일 꾸준히 수련할 경우에만 발생하는 일이었다.심지어 재능 있는 자들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린다.그런데 도지아는 단 하룻밤에 이 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