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허윤진이 진서준의 말을 잘 듣고 진서준 옆에 있었더라면 교회 주교의 아들을 건드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진서준은 그런 허윤진을 보며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어. 잘못을 인정하고 앞으로 다시 그렇게 충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돼.”“앞으로 절대 그렇게 충동적이지 않을 거야. 다시는 도박도 하지 않겠어.”허윤진이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말을 마친 순간, 허윤진의 발걸음이 조금 느려졌고 진서준이 실수로 허윤진의 발을 밟았다.“앗!”허윤진이 가볍게 외쳤고 제대로 평형을 잡지 못하고 몸이 뒤로 넘어갔다.진서준은 그 상황을 보고 즉시 허윤진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쌌다.허윤진의 허리는 뼈가 없는 듯 부드러웠고 안을 때 부드러운 솜사탕을 안고 있는 느낌이었다.“괜찮아?”진서준은 허윤진의 허리를 잡고 그녀를 일으켰다.허윤진은 진서준의 힘을 빌려 머리를 진서준의 가슴에 묻었다.두 사람의 자세는 애매했다.진서준에서 나는 진한 남성의 향기가 바로 허윤진의 코끝에 닿았다.허윤진의 얼굴은 순간 술에 취한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괜찮아...”허윤진은 진서준이 자신의 이 부끄러운 모습을 볼까 봐 두려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계속 춤을 출 거야?”진서준은 허윤진이 허리를 삐끗해서 자기에게 기대고 있는 줄 알았다.“아니야, 춤추지 않을 거야. 그냥 잠깐 이렇게 조용히 있을게.”허윤진은 진서준이 떠날까 봐 두려워 그의 팔을 더 단단히 붙잡았다.무도장에 몰려오는 사람은 점점 더 많아졌지만 아무도 진서준을 방해하려고 하지 않았다.진서준이 천의방 강자를 처치하는 모습을 모두 목격했기 때문이다.다들 그렇게 강력한 인물이 이렇게 부드러운 면모를 보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이야, 시누이와 형부 사이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정말 헛소리가 아니었군요.”이세아는 무도장에서 두 사람의 애매한 모습을 보며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서지은 씨, 당신과 진서준도 그런 관계인가요?”이세아가 서지은에게 물었다.“아니에요...”서지은은 거
새벽이 다가오자 천하 유람선은 명주시 항구에 도착했다.“너희는 먼저 돌아가서 날 기다려. 난 이 두 여자와 함께 국안부에 잠깐 들를 거야.”“얼른 돌아와.”허윤진과 서지은은 차를 타고 떠났다.“가자.”진서준은 황예은과 바이올렛을 데리고 명주시 국안부로 향했다.가는 길에 바이올렛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진서준이 차 안에서 덤덤하게 말문을 열었다.“국안부에 도착하면 너희는 있는 그대로 진실만 말하면 돼. 난 너희가 죄를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줄 거야.”차는 가다가 멈추기를 반복했고 약 한 시간을 달려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두 층 건물의 작은 저택 앞마당에는 꽃과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한 노인이 마당의 풀밭에 앉아 두 눈을 꽉 감고 명상 중이었다.진서준은 이 노인이 수련 중인 것 같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문을 열고 들어갔다.“거기 서.”예상외로 명상 중이던 그 노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제 이름은 진서준입니다. 국안부 상경이고요. 진천진군을 찾으러 왔습니다.”진서준이 본인의 신분과 목적을 밝히자 풀밭에 앉아 있던 노인은 갑자기 눈을 뜨고 일어섰다.“네가 진서준이야?”노인이 다가와 진서준의 속내까지 꿰뚫어 보려고 하듯 유심히 살펴보았다.“네.”진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노인을 힐끗 쳐다보았다.노인은 칠급 대종사였고 실력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국안부 내에서도 명망 있는 인물임이 틀림없었다.“난 국안부 상경 한창순이야.”노인이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했다.“한 어르신, 안녕하세요.”진서준은 공손하면서도 너무 자세를 낮추지 않고 인사를 건넸다.“넌 이 여자들을 데리고 뭘 하러 왔어?”한창순이 황예은과 바이올렛을 가리키며 물었다.“볼 일이 좀 있습니다.”진서준의 대답에 한창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한창순은 물론 진서준 일행이 볼일을 보러 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무슨 일인데?”이들이 여기 온 목적이 뭔지 그것이 궁금했다.한창순은 황예은을 알고 있었다.지난번 명주시 거리에서 일어난 총격 사건에서
그러자 한창순이 한술 더 떴다.“귀로 들은 건 믿을 수 없고 눈으로 본 것만이 진짜야.”이때, 하문천이 두 사람의 대화를 끊고 진서준을 바라보며 물었다.“바로 이 두 여자인가?”“네, 황예은은 자기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서 벌인 거였습니다.”진서준이 간단하게 설명하자 황예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하문천에게 말했다.“모든 책임을 저에게 있어요. 부탁이 하나 있다면 제 동생을 살려주는 거예요.”하문천은 눈살을 찌푸렸다.“외적과 내통해 국가를 배반하는 건 중죄야.”그때, 옆에 있던 한창순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진서준이 맡은 이번 임무에 대해 한창순은 전혀 알지 못했다.대한민국 일인자 갑부의 딸이 외적과 내통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한창순의 첫 반응도 역시 당혹감과 경악이었다.진서준이 황예은을 두둔하기 시작했다.“하문천 어르신, 황예은은 죄를 씻고 공을 세울 기회가 있습니다. 멸용 조직 조직 사람들은 원하는 데이터를 손에 넣지 못했으니 이후에도 황예은에게 다시 연락할 겁니다. 그때 우리가 역으로 이용해서 멸용 조직을 단숨에 처치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말도 안 돼!”한창순이 탁자를 쾅 치며 일어나며 단호한 말투로 진서준의 말을 반박했다.“다음에 이 여자가 외부 세력과 결탁했을 때 우리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보장해?”한창순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이 세상 모든 일은 한 번도 하지 않은 것과 여러 번 한 걸로 나눌 수 있다.황예은이 외적과 한 번 내통했으니 두 번째, 세 번째로 배신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한창순의 말대로 다음에 황예은이 외적과 손잡고 그들을 엿 먹인다면 수습하기 어려울 것이다.진서준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황예은은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겁니다.”“내가 왜 이 여자를 믿어야 해?”한창순은 물러서지 않고 말을 이었다.“너 이 자식이 이 여자 미모에 빠져서 이 여자를 감싸는 거겠지.”한창순은 심지어 진서준을 꾸짖기 시작했다.“넌 네 신분을 잊지 말아야 해. 항상 자기가 국안
“왜? 너무 부끄러워서 화가 나?”진서준의 분노 어린 눈빛을 보며 한창순은 자기가 얼마나 큰 문제를 일으켰는지 아직 깨닫지 못했다.“내 말이 네 아픈 곳을 찔렀구나. 네가 진서훈이 깔끔한 퇴직 생활을 원한다면 스스로 국안부에서 물러나는 게 좋을 거야.”진서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순식간에 자리에서 일어나 활처럼 몸을 구부린 채 한창순을 향해 돌진했다.한창순은 진서준이 대화를 포기하고 손찌검을 하려는 모습을 보고 경멸이 가득한 눈빛으로 비웃었다.“나랑 한 판 붙을 거야? 네가 어떤 처참한 결말을 맞이할지 생각해 봤어? 내가 널 폐인으로 망가뜨려도 진서훈은 아무 말도 못 할 거야.”한창순은 솔직한 생각을 그대로 내뱉고 있었다.진서준을 폐인으로 만든다면 아무리 진서훈이 진서준의 편을 들려고 해도 진서준은 국안부에 남을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진서준의 모습이 한창순 앞에 나타났을 때 그의 표정은 돌연 변했다.한창순 앞에 사람이 서 있는 게 아니라 백 길이나 되는 거대한 산이 한창순을 압박하고 있는 것처럼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선천강기가 한창순 앞에 모이고 맨눈으로 보일 수 있는 보호막이 나타났다.한창순이 국안부 상경이라는 신분이 있는 이상 그의 실력은 약할 수 없었다.한창순의 상운수는 기묘하고 예측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고수가 넘쳐나는 명주시에서 같은 경지에서는 아무도 한창순을 이길 수 없었다.심지어 팔급 대종사도 한창순을 단시간에 죽일 수는 없었다.진서준의 손바닥이 한창순 앞의 강기 보호막에 떨어졌고 잇따라 둔탁한 소리가 나며 그 보호막이 종이처럼 찢어졌다.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한창순은 끔찍한 힘이 자기에게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한창순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진서준의 힘이 순식간에 그를 벽으로 날려버렸다.순간 한창순은 내장이 전부 뒤틀린 것처럼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한창순의 몸은 벽에 강하게 부딪히며 벽에는 거미줄처럼 균열이 가며 곧 무너질 것처럼 위험해졌다.바닥에 엎드린 한창순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한창
그러자 하문천은 돌아서며 말했다.“넌 일단 날 따라와.”진서준은 바로 하문천을 따라갔고 두 사람은 뒷마당에 도착했다.“앉아.”하문천이 자기 맞은편의 의자를 가리키자 진서준도 사양하지 않고 바로 자리에 앉았다.“네가 설표 특전대 교관 신분도 있다고 들었는데 맞아?”하문천의 질문에 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반쯤 교관이라고 볼 수 있죠. 전에 그 병사들을 가르쳤습니다.”“만약 일반인을 상대로 무도를 가르친다면 어떨 것 같아?”하문천이 갑자기 화제를 돌리자 진서준은 순간 멈칫했다.진서준이 이전에 가르친 설표 특전대는 대한민국 8대 특전대 중 하나였고 그곳 병사들은 전부 각 전구의 병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비록 종사급 고수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일반인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들이었다.진서준이 설표 특전대를 가르친 것도 사실 체질 강화 약재를 제공하고 몇 가지 필살기를 전수했을 뿐, 다른 특별한 가르침은 없었다.이 두 가지 일은 쉬운 일인 것 같았지만 일반인이 배운다면 적어도 1년은 열심히 해야 겨우 성과를 볼 수 있을 터였다.“사실 이 일은 우리 호국장군이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거야.”하문천이 천천히 설명했다.“우리는 대한민국에 무도 학원을 세워 무도에 재능 있는 사람들을 대거 모집하려 해. 지금의 대한민국은 무도가 쇠락하고 있어. 게다가 이전 대재난 때문에 재능이 뛰어난 무인을 대거 잃어버린 상태야. 몇십 년만 더 지나면, 대한민국 무도는 완전히 붕괴할지도 몰라. 그때가 되면 해외 강자들을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야.”이는 하문천이 괜히 기우를 떠는 것이 아니었다.하문천이 젊었을 적에는 대한민국 무인 수량이 지금의 두 배나 되는 숫자였다.그러나 불과 백 년이 채 되지 않아 무인이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이런 상태로 또 백 년이 지나면 대한민국에서 무인 존재 자체가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었다.“윗선에서도 우리 계획을 승인했어.”하문천의 말에 진서준이 다소 놀랐다.“뭐라고요? 이미 승낙하셨다고요?”“맞아. 다만, 학원에 입학
하문천이 숭산 소림을 언급하자 진서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소림에 진서준의 지인 한 명 있었다.몇 달 동안 못 만났는데 그녀는 과연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4대 은둔 종문에서 장로 한 명이 팀을 이끌고 참여할 거야.”하문천은 말을 이어갔다.“넌 진서훈이 준 인피면구를 착용하고 몰래 들어가 관전만 하면 돼.”진서준은 살짝 실망한 듯 물었다.“장로 한 명만 오나요?”“왜? 이 기회에 신농산에 가서 사람을 구하려는 생각이라도 하는 거야?”하문천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충고하건대 그런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아. 그렇게 무모한 짓을 했다가는 시체조차 남기지 못할 거야.”신농산 장로는 천의방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장로의 실력이 천의방에 오를 정도가 아닌 게 아니라 장로의 실력은 애초에 천의방 인정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신농의 내공은 수천 년에 달했다.심지어 전설에 따르면 그곳에는 완전한 반선 수련법이 존재한다고 했다.역대 종주는 전부 반선 수련법을 터득했다고 한다.“알겠습니다.”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4대 은둔 종문 회전은 사실 진서준도 한번 구경하고 싶었다.임배 일행이 신농에 들어간 지 벌써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다.반년 동안, 신농이 그들을 어떤 모습으로 변화시켰을지 진서준은 매우 궁금했다.작은 건물을 나설 때, 한창순이 문 앞에 서 있었다.진서준이 나오는 것을 보자 한창순은 살기를 띤 눈빛으로 진서준을 노려보았다.“진서준, 용기가 있다면 오늘 밤 동호에서 한번 붙어보자. 거기서 널 기다릴게.”한창순이 먼저 진서준에게 결투를 제안했다.아까 진서준이 한창순을 기습했던 굴욕을 갚으려는 것이었다.하지만 진서준은 한창순을 흘끗 보며 냉랭하게 말했다.“시간 없어.”말을 마친 진서준은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녀석이 쫄기는? 시간 없는 게 아니라 나와 싸울 용기가 없는 거겠지.”한창순이 비웃으며 도발했다.“나와 결투하려는 용기도 없으면 국안부에서 얼른 꺼져. 우리 국안부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한창순의 도발에
그러고는 진서준은 서울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잠깐만.”황예은이 갑자기 말하자 진서준이 눈썹을 추켜세웠다.“무슨 일이야?”“우리 다음에 언제 만날 수 있어?”황예은이 진서준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묻자 진서준은 깊이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멸용 조직이 네게 만남을 제안할 때야. 그 조직이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보이면 바로 나한테 전화해.”황예은이 대답하지 않자 진서준은 다시 물었다.“또 다른 일 있어?”황예은은 빨간 입술을 살짝 깨물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니야, 없어.”“그럼 다음에 또 보자.”진서준은 몸을 돌렸다.막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향긋한 향기가 불현듯 코끝을 스쳤고 곧이어 두 팔이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그리고 옷 너머로도 느껴지는 부드러움이 진서준의 등 뒤에 바짝 밀착되었다.진서준은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져 그 자리에 멈춰 섰다.다행히 황예은은 더 이상의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잠시 후, 황예은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고마워.”“고맙긴, 몸조심해.”황예은이 팔을 풀고 난 뒤에야 진서준은 발걸음을 옮겼다.진서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황예은은 그제야 뒤돌아섰다.“이제부터는... 로봇이라는 소리는 안 듣겠지?”황씨 가문을 떠난 뒤, 진서준은 바이올렛과 함께 동호 근처에 있는 별장으로 돌아왔다.별장 안에는 허윤진과 서지은이 진서준을 기다리고 있었다.“진서준, 우리 내일 가는 게 어때? 오늘 밤 비행기는 이미 만석이야.”“그러자.”집에 돌아가는 게 급한 일이 아니니 내일 아침에 떠나도 문제는 없었다.하지만 진서준은 그날 밤, 평생 후회할 뻔한 일이 일어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평온했던 서울시는 그날 오후가 되자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모든 명문대가 권력자가 초대장을 받았기 때문이다.“서북 유씨 가문 아가씨? 그게 누구야?”“유씨 가문은 서북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가문이잖아. 재산과 권력을 겸비한 대가문이지.”“그런 거물이 왜 갑자기 우리 서울시 같은 작은 도시에 오는 거지
“유연비 씨?”두 사람 앞을 가로막은 건 유연비였다.한쪽 팔만 남은 유연비를 보며 허사연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유연비가 이렇게 된 것도 자업자득이었기 때문이다.유연비가 진서준을 먼저 건드리지 않았다면 진서준이 굳이 여자를 상대로 이렇게 잔인하게 손을 댈 수 없었을 것이다.“허사연 씨, 오랜만이에요.”유연비가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오랜만이에요.”허사연이 가볍게 인사했다.“유연비 씨, 오늘 만찬의 주인공이신데 왜 여기 계시죠?”허사연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허사연의 신분과 지위로 봤을 때 유연비가 굳이 그녀를 맞으러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었다.물론 진서준은 예외였다.하지만 진서준은 서울시에 없다는 사실을 유연비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저는 오늘 만찬의 주인공이 아니에요.”유연비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허사연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주인공이 아니라고요? 유씨 가문 아가씨는 유연비 씨 혼자잖아요.”“누가 그런 말을 했죠?”유연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유연비의 표정에 허사연은 소름이 돋았다.유씨 가문의 여자는 사실 유연비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유연비에게는 또 다른 언니가 있었는데 그 언니는 바로 진서준의 전 여자친구 유지수였다.그러나 유연비는 지난해 유희연이 그녀의 친부에게 살해당했다고 말한 바 있었다.그 이유도 단순했다. 유지수가 유씨 가문 명예를 더럽혔기 때문에 죽어도 마땅했기 때문이다.진서준과 허사연은 유지수의 시체를 본 적은 없지만 두 사람은 유연비가 그들을 속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었다.하지만 지금 유연비의 말은 허사연에게 극도의 불안감을 안겼다.“그 여자 아직 살아있어요?”허사연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곧 알게 될 거예요.”유연비가 차갑게 웃자 허사연의 발끝에서부터 차가운 기운이 밀려왔다.“허사연 씨, 일단 들어오세요.”유연비는 허사연을 잡아끌며 떠날 틈을 주지 않았다.그때 허사연은 호텔 입구의 경호원이 전부 무인이란 걸 비로소 깨달았다.경호원들은 지금 허사연과 그녀
“뭐라고? 불법적인 일이 우리 가게에서 일어난다고? 말도 안 돼.”성현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넌 전신전 소속이잖아. 그런데 네 오빠인 내가 어떻게 법률을 어기는 일을 하겠어?”“그럼 이 사람들은 왜 부른 거야? 집단 폭력도 불법이거든.”성미영은 차가운 시선을 보이며 성현도와 따졌다.“미영아, 이건 내가 싸우려던 게 아니야. 저 녀석이 일부러 시비 걸러 온 거라고.”성현도는 진서준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이놈이 일부러 우리 찻집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고 상철을 두들겨 패서 머리에 혹이 다 나버렸어. 난 단순히 정당방위를 위해 부른 거라고.”성미영이 등장하자 성현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솔직히 실력만 놓고 보면 성현도는 성미영보다 한참 부족했다.게다가 성미영은 전신전 소속인지라 저 남녀가 군부 조직인 전신전을 적으로 돌릴 리 없었다.군대를 건드리는 순간, 무조건 좋은 결과는 있을 수 없었다.“진서준, 도대체 무슨 일이야?”성미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라? 너희 둘이 아는 사이야?”성현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방금 내려놨던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난 사람을 찾으러 왔어. 하씨 가문 하경범이 이 위층에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진서준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그리고 또 하나, 저 위에서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도 하더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이 말에 성현도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해졌고 즉시 반박에 나섰다.“헛소리 마. 우리 가게는 단순한 찻집이야. 불법적인 일 따윈 없어. 근거없는 소문을 왜 털어놓고 난리야?”“미영아, 저 녀석한테 속지 마. 난 네 사촌 오빠야. 내가 그런 불법적인 짓을 할 사람이겠어?”성미영이 곧바로 진서준에게 물었다.“진서준, 너 증거 있어?”“직접 올라가 보면 다 알게 될 거잖아?”진서준이 가볍게 말했다.“오빠, 위층으로 가자.”성미영이 단호하게 말했다.“그, 그건 좀 곤란해. 위층엔 귀
순간, 장내는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모든 시선이 진서준에게 쏠렸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다들 진서준을 그냥 얼굴만 반반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 고수였다.성현도의 부하 중 최고 실력자조차 상대가 되지 않았다.성현도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고 상철을 향해서 욕설을 날렸다.“쓰레기 자식, 이런 애송이 하나도 못 이겨?”부하가 지면 망신당하는 건 결국 성현도 자신이었다.이대로 체면을 구긴 채 끝낼 수는 없었다.이대로 넘어가면 앞으로 르벨 재벌 2세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될 게 뻔했다.“이봐, 네 실력이 괜찮은 건 인정할게.”성현도가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근데 너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수 있어? 천 명은? 잘 들어. 내 부하는 수도 없이 많아. 너 같은 놈 하나 처리하는 데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해.”진서준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그냥 하경범을 찾으러 온 거야. 그 녀석만 넘기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해주지.”“없던 걸로 한다고?”성현도가 그 말에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너 지금 누굴 상대로 협상하려 드는 거야? 난 성씨 가문의 직계야. 날 건드리면 상대해야 할 건 나 하나가 아니라 우리 가문 전체라고.”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이 남자들은 전부 성씨 가문의 경호원이었고 실력도 만만하지 않았다.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무려 50명 이상이었다.한순간에 텅 비어 있던 로비가 사람들로 꽉 찼다.“저 자식 끝났네. 이 정도 성씨 가문 인원이라면 아무리 강해도 버틸 수가 없지.”“그러게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잖아.”“왜 쓸데없이 성현도를 건드린 거지? 스스로 무덤을 판 거잖아.”구경꾼들은 이 광경에 각자 다른 감정을 보였다.누군가는 동정을, 누군가는 아쉬움을, 또 누군가는 짙은 흥미를 보였다.“사연아, 넌 좀 쉬어. 이놈들은 내가 처리할게.”진서준이 앞으로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가 찻집 안으로 들어왔다.남자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상철아, 저놈 다리 하나 부러뜨려서 내던져.”성현도가 진서준을 가리키며 명령했다.“알겠습니다.”상철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진서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서준아, 내가 할게.”허사연의 눈에는 불꽃 같은 전투욕이 타올랐다.“조심해. 저 녀석은 횡련 종사야.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진서준이 조용히 귀띔했다.“알았어. 설령 못 이긴다고 해도 어차피 네가 있잖아?”허사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진서준이 곁에 있는 한, 허사연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이봐, 사내자식이 여자 뒤에 숨는 게 말이 돼?”상철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이봐, 껑충이. 여자를 얕보지 마. 일단 이기고 나서 말해.”허사연이 상철을 도발했다.“아가씨, 그런 기생오라비 말고 날 따르지 그래? 밤마다 널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데?”상철이 음흉하게 웃었다.“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얼굴이 싸늘해진 허사연이 주먹을 날렸다.강렬한 펀치가 공기를 가르며 폭발음을 일으켰고 그 위력은 철판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상철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가만히 서 있어도 넌 날 어쩔 수 없어.”“닥쳐!”허사연이 분노에 차 주먹을 그대로 상철의 얼굴로 내리꽂았다.상철은 일부러 머리를 숙이며 대머리 정수리로 받아냈다.쿵!둔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주먹이 상철의 머리를 강타했으나 대머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사연이 몇 걸음 물러섰다.순간 손에 뜨거운 통증이 밀려왔고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손을 확인하자 하얀 피부였던 손등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상철은 자기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더니 빙그레 웃었다.“아가씨, 이제 내 실력을 알겠지?”그 모습에 허사연의 승부욕이 다시 불타올랐고 콧방귀를 뀌며 다시 달려들었다.이번에는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상철의 머리를 내려찍었다.‘머리가 단단하다고 자랑하
이렇게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싸움 실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완전 여성판 이소룡이었다.“너, 너희들 정말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여기가 어디인지 알기나 해? 어디서 대놓고 싸움질이야?”종업원은 순간 놀란 뒤 분노에 찬 얼굴로 진서준와 허사연을 가리켰다.찻집이 문을 연 이후로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진서준과 허사연이 첫 사례였다.주변의 구경꾼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싸움 좀 하면 뭐해? 여긴 성씨 가문의 구역이야. 성씨 가문에서 한마디만 하면 저 남녀는 오늘 밤중으로 사라지겠지.”“어휴, 저 여자 너무 아까워. 저렇게 예쁜데 왜 죽지 못해서 안달이지?”“여자는 살 수도 있겠지만 남자는 무조건 죽을걸.”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며 이미 진서준과 허사연의 결말을 예상하는 듯했다.“그럼 네 말대로라면 내가 널 때린다 해도 얌전히 맞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허사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종업원에게 다가갔다.“오지 마!”종업원은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다.“어떤 미친놈이 내 구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야?”그 순간, 2층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을 확인하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성현도가 오늘 여기 있었네?”누군가 그 청년을 알아보았다.“저 둘 끝장났네. 성현도는 악명 높은 냉혈한이야.”그 청년은 바로 찻집의 사장인 성현도였다.성현도는 르벨 재벌 2세 사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친구에게는 무조건 의리를 지키지만 적에게는 무자비했다.성현도의 고문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고 게다가 무인으로서 무공 실력도 상당했다.“사장님, 저 남녀가 와서 난동을 부렸어요.”종업원은 성현도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장이 나온 걸 확인한 허사연은 주먹 한 방에 종업원을 기절시켜 버렸다.“뭐야?”성현도의 눈이 가늘어졌고 표정이 험악해졌다.자기 앞에서 대놓고 부하를 때리다니, 이건 너무나도 명백한 도발이었다.“아가씨, 우리 처음 보는 사이 맞지? 우리
그리고 오후 2시가 되자 진서준은 허사연을 데리고 조호가 말한 천국찻집으로 향했다.겉모습만 보면 이 찻집은 진짜 전통찻집 같았고 규모도 꽤 컸다.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1층과 2층까지는 정말 평범한 찻집처럼 꾸며져 있었고 누가 봐도 이상한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하지만 3층으로 올라가려면 회원권이 있어야 하거나 사장이 직접 허락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손님, 아가씨,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진서준과 허사연이 차를 마시러 온 줄 안 종업원이 빠르게 달려와 안내하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 난 하경범을 찾으러 왔거든.”진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종업원이 순간 얼어붙었다.“혹시 하씨 가문의 하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맞아.”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손님은 누구신지...”종업원이 신중하게 물었다.진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냥 복수하러 왔다고 전해.”그놈 아버지라고 하는 건 자기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고 친구라고 하기도 기분이 더러웠다.그 말에 종업원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손님, 여기서 장난치지 마세요.”하경범은 르벨에서 유명한 재벌 2세였다.이 찻집의 사장과도 막역한 사이였고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왜? 못 믿겠어?”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손님, 하 도련님에게 복수하려던 사람은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종업원이 경고하듯 말했다.“그런 농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그 말을 듣자 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이렇게 전해. 그 하경범이 두들겨 맞고 나자빠지게 했던 진서준이 왔으니 당장 기어 나오라고 말이야.”진서준의 뻔뻔한 태도에 종업원은 어이가 없었다.“좋습니다. 손님이 그렇게 죽고 싶다면 제가 기꺼이 도와드리죠.”종업원은 바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문제 발생했습니다. 난동자가 있습니다.”쿵! 쿵!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건장한 남자 스무 명이 들이닥쳤다.전부 검은
진서준과 허사연은 차를 타고 조호의 회사로 향했다.이 회사는 그냥 겉치레일 뿐, 진짜 돈이 들어오는 곳은 유흥업소들이었다.유흥업소를 얕잡아보면 안 된다.운 좋게 돈 많은 도련님들이라도 걸리면 하룻밤에 수억 원이 순식간에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진서준 씨!”진서준이 들어서자 조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조호는 진서준 옆에 있는 허사연을 힐끗 쳐다본 뒤 고개를 숙이고 감히 더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잡담은 그만하고 하경범을 잡아가는 제일 좋은 타이밍만 말해.”진서준이 직설적으로 물었다.이 말에 조호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매일 오후마다 하경범은 천국찻집이라는 곳에 갑니다.”조호는 재빨리 대답했다.“보통은 경호원 몇 명만 데리고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얼씨구? 저런 인간이 매일 차나 마시러 간다고?”진서준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그게... 진서준 씨, 사실 그곳은 이름만 찻집이지 실제로는...”조호는 옆에 여성이 있다는 걸 의식해서 말을 흐렸지만 진서준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아챘다.“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그냥 인기 많은 인터넷 셀럽이 가득한 고급 유흥업소일 것이다.“진서준 씨, 듣자 하니 그 찻집의 주인은 성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짜로 움직이실 거라면 하경범이 이동 중일 때를 노리는 게 좋을 겁니다.”조호가 조심스럽게 조언했다.“응? 성씨 가문이 이런 사업도 해?”진서준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진서준은 오영수에게서 성미영에 대한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정의로운 성격의 성미영이 자기 가문에서 이런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네, 듣기로는 성씨 가문의 한 직계 후손이 운영한다고 합니다. 여자에 미쳐 있는 놈이라 르벨의 돈 많은 도련님들과 꽤 친분이 깊다고 하더군요.”조호는 본인이 아는 정보를 전부 쏟아냈다.“좋아, 대충 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조호의 회사를 나온
진서준이 허사연의 캐리어를 들어주며 옆방으로 걸어갔다.그 뒷모습을 보며 도지아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인간은 원래 모여서 사는 걸 선호하는 동물이다.사회를 벗어나서 혼자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가족도 친구도 없이 너무 오래 지내다 보면 결국 감정 없는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그렇게 되면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없어질 것이다.“어제 전화할 때 그랬었지? 이번에 너 자기 출신을 찾으러 온 거라고.”호텔 방으로 돌아온 후, 허사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너 원래 경성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예전에 말해주셨어. 사실 우리 아버지는 어릴 때 길에서 주워 온 아이였다고.”진서준은 허사연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허사연은 진서준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허사연이라면 이 비밀을 절대 밖으로 흘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뭐라고? 아버님이 주워 온 아이라고?”허사연이 깜짝 놀랐다.“그래.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건 나뿐이야. 가족 중에서도 할아버지가 나한테만 알려주셨지.”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 오영수가 내 등에 있는 용을 보고는 내가 용맥의 일족이라고 했어. 그래서 오영수를 따라 여기 와서 오영수 셋째 삼촌에게 내 출신에 관해 알아보려 했던 거야.”“네 등에 용이 있다고?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허사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둘이 알몸으로 함께한 시간도 적지 않은데 허사연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내가 체내 혈기를 모을 때만 그 용이 나타나거든.”진서준이 설명을 이어갔다.“그런데 오영수 삼촌이 아직 돌아오질 않아서 일단은 여기서 며칠 기다려야 해.”“아니, 그럼 오씨 가문에서 널 안 재워줬어?”허사연이 의아해했다.명문대가인 오씨 가문에 빈방이 없을 리가 없었다.“그날 오영수를 찾아갔는데 마침 오영수 할아버지가 위중했어. 그리고 그 집안엔 그 어르신을 그냥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지.”진서준이 담담하게
“진짜 예쁜 새색시 숨겨놓고 있었네?”허사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누구라도 자기 남자 방에 예쁘고 몸매가 완벽한 여자 하나가 같이 있는 걸 보면 의심 안 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지금은 아침이었다.설마 이 여자가 아침에 막 찾아온 건 아니겠지?“사연아, 오해야. 내가 제대로 설명할게.”진서준은 머리가 띵해졌고 뇌가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아가씨, 오해하지 마세요. 어제 저랑 진서준이 같은 방에서 잔 건 맞지만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 밤새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도지아가 황급히 해명에 나섰다.“네? 밤새 안 자고도 아무 일 없었다고요?”허사연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설마 밤새 불태우느라 못 잔 건 아니겠죠?”허사연의 농담과 진담이 뒤섞인 말에 진서준은 헛웃음만 나왔다.“사연아, 이쪽은 도지아야. 우리 진짜 그냥 친구야. 일단 들어와. 천천히 설명할게.”허사연이 방에 들어오자 진서준은 서로에게 소개했다.그러고는 이 방에서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다.“도지아는 황예은이 소개해 준 환자야. 다리 치료를 부탁받았거든. 종아리를 봐봐. 이틀 전에 내가 직접 발라준 연고가 있어.”허사연이 내려다보자 확실히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그리고 도지아가 밤새 안 잔 건 원기를 수련하느라 그랬던 거야. 너도 예전에 수련한다고 며칠씩 안 잔 적 있잖아?”허사연은 오해가 풀리자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내가 뭐 어쨌다고 그렇게 호들갑이야?”“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그러는 거잖아.”진서준이 빠르게 대답했다.“뭐야? 내가 그렇게 의심 많고 질투 많은 여자로 보여?”허사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아, 아니지. 우리 사연은 누구보다 속이 넓은 부드러운 여자지.”진서준이 급히 정정했다.“됐어, 너 겁먹은 거 너무 귀엽다.”허사연이 피식 웃었다.“넌 여기 좀 쉬고 있어. 내가 방 하나 잡고 올게.”진서준은 더 머뭇거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진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허사연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도지아 씨, 진서준이
“내가 가면 안 돼?”사실 진서준은 거절하려 했었다.르벨은 안개가 짙게 깔린 늪지대 같은 곳이라 진서준조차도 어디에 함정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그러니 허사연이 온다면 다칠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거절하면 허사연이 상처받을 게 뻔했다.“당연히 되지. 지금 위치 보낼게.”진서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위치를 보냈다.자기 여자를 지킬 자신도 없으면서 강자들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기야, 잘 자.”허사연이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일찍 자.”진서준이 다정하게 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진서준의 졸음이 싹 가셨다.진서준은 창가로 다가가 이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봤다.“오씨 가문, 안씨 가문, 하씨 가문... 너희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난 전부 박살 낼 거야. 이번엔 반드시 나와 아버지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겠어.”진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진서준이 막 눈을 뜨자마자 도지아의 흥분한 외침이 들려왔다.“진서준, 됐어. 나 생겼어!”도지아는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는데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게 분명했다.진서준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너 아직 처녀 아니었어? 대체 어떻게 임신한 거야?”“미친놈아, 임신은 개뿔, 무슨 헛소리야?”도지아는 얼굴이 빨개지며 진서준을 노려봤다.“그럼 왜 아침부터 난리야?”진서준이 되물었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침부터 흥분해 날뛰지 않을 것이다.“어제 네가 준 수련법 기억나지? 나 벌써 원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됐어.”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긴 도지아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고작 하룻밤 만에 원기를 형성한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뭐? 그렇게 빠르다고? 너 타고난 천재 맞네?”진서준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보통 무인은 원기를 익히는 데만 최소 1년이 걸리는데 그것도 매일 꾸준히 수련할 경우에만 발생하는 일이었다.심지어 재능 있는 자들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린다.그런데 도지아는 단 하룻밤에 이 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