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놈이었어?”들어온 사람을 본 순간, 리앙의 눈에서는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대놓고 당당하게 방에 들어온 남자는 바로 어젯밤 자기를 흠씬 두들겨 팬 진서준이었다.진서준을 본 박지호의 눈꺼풀이 미친 듯이 떨렸고 속으로 다급하게 외쳤다.‘큰일이야, 진짜 저놈이었네. 이거 골치 아파졌는데?’“진서준, 날 좀 구해줘.”진서준을 보자 김혜민은 마침내 숨을 돌릴 수 있었다.“구해 달라고? 이 자식이 지금 자기 목숨도 지킬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인데 널 어떻게 구해? 웃기고 자빠졌네.”리앙은 피식 웃으며 쌀쌀하게 한마디 하고는 바로 손을 휙 내저었다.“이놈 당장 포위해.”그러자 경호원들이 살기를 내뿜으며 진서준을 겹겹이 에워쌌다.“셋째 도련님, 박 사장님. 이젠 문제를 일으킨 놈도 왔으니 저희는 이만 가봐도 되겠죠?”장주완은 재빨리 눈치를 보며 물었다.지금 이 틈을 타 도망치지 않으면 진짜 못 나갈 수도 있을 판이었다.“가긴 뭘 가? 이 자식 하나 들어왔다고 살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해? 꿈 깨.”중년 남자가 장주완을 발로 걷어찼다.일촉즉발의 상황, 박지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리앙 씨, 제 체면 좀 봐서라도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어떨까요?”“네?”리앙은 순간 멍해졌고 방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어리둥절해졌다.아까까지만 해도 진서준을 박살 내겠다고 그 난리를 쳐놓고 이제 장본인이 오니 대충 마무리하겠다고?대체 이게 무슨 개소리야?“박 사장님, 제 얼굴 상처는 바로 이놈이 때린 겁니다. 제가 이걸 어떻게 그냥 넘어가나요?”리앙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박지호를 바라봤다.그냥 맞은 걸로 끝나면 사실 행운이었다.이 자식을 잘못 건드렸다가 목숨까지 날아갈 수도 있었다.“다른 사람 권고를 들으면 밥을 굶진 않는다는 말 못 들어봤어?”진서준이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잘 들어, 오늘은 누가 와도 널 구할 수 없을 거야.”리앙은 흉측한 표정을 지으며 위협했다.이렇게 치욕적인 굴욕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리앙 씨, 부탁인데 제 말 좀 들
리앙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김혜민의 뺨을 후려쳤다.아까 맞은 따귀까지 포함하면 이게 두 번째 따귀였다.김혜민은 순간 머리가 핑 돌면서 온몸이 휘청거렸다.그 모습을 본 진서준의 눈에서 서늘한 기운이 번져나갔다.눈앞에 있는 건 전장에서 사람을 죽여본 경험이 있는 베테랑 병왕이었지만 진서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먼저 움직였다.진서준의 손끝이 살짝 떨리더니 옷소매에서 은침이 순식간에 날아갔다.슉! 슉!스무 개가 넘는 은침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용병들의 미간에 박혔다.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경호원들은 단 한 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쓰러졌다.“뭐, 뭐야?”조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으스대던 리앙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이 장면을 바라보았다.그 눈빛에는 이전에 느껴본 적 없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이 경호원들은 리앙이 직접 고르고 훈련한 정예였는데 그동안 수도 없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자기를 구해낸 최고의 경호원이었다.그런데 지금 한순간에 진서준의 손에 전부 죽었다.‘이 녀석은 도대체 사람이야, 귀신이야? 실력이 왜 이렇게 대단한 거지?’장주완 일행도 똑같이 제자리에 얼어붙었다.분명 진서준이 죽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진서준은 무사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리앙의 부하들을 순식간에 쓸어버렸다.게다가 아무도 진서준의 손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지 못했다.사람들 중에서 오직 박지호만이 차분한 얼굴이었다.박지호는 진서준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이따위 경호원들은 진서준 앞에서 그야말로 하찮은 개미와 다를 바가 없었다.용존이라는 칭호는 절대 헛되이 불리는 게 아니었다.항상 기고만장하던 리앙이 이번엔 상대를 잘못 골랐다.“이봐, 방금 도대체 뭘 한 거야?”리앙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목소리를 떨며 물었다.“직접 지옥에 내려가서 물어보지 그래? 저 개미들이 잘 설명해 줄 거야.”진서준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한 걸음씩 다가갔다.“감히 날 죽이려고 해? 난 차이더리스 가문 셋째 도련님이
거대한 산처럼 엄청난 무게가 리앙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리앙의 두 다리는 저항할 틈도 없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고 무릎뼈가 바닥과 부딪치며 둔탁한 충격음이 울려 퍼졌다.진서준이 진짜 리앙을 무릎 꿇게 하자 그 장면을 본 장주완 일행은 멍하니 굳어버렸다.리앙이 누구인데?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한낱 청년인 진서준 앞에 무릎을 꿇다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의 모욕이었다.“날 진짜 무릎 꿇게 하는 거야?”리앙은 치솟는 고통을 참아내며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진서준을 노려보았다.리앙의 눈에는 분노, 굴욕, 그리고 두려움이 얽혀 있었다.리앙은 오랫동안 초아국에서 거침없이 날뛰며 살아왔고 이토록 치욕적인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심지어 자기 아버지를 봐도 무릎을 꿇은 적이 없었다.그런데 지금, 한낱 대한민국의 애송이 앞에 무릎을 꿇다니, 믿기지 않는 순간이었다.“무릎 꿇게 못 할 것 같아?”진서준의 표정에는 미세한 변화조차 없었다.진서준에게 있어 해외 이족들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존재였다.그도 그럴 것이 과거에 이 자들이 진서준의 가족을 산산이 조각냈다.그로 인해 진서준의 아버지는 행방불명이 되었기에 진서준은 해외 이족을 증오할 수밖에 없었다.“머리 열 번 박아. 안 하면 바로 죽여버릴 거야.”진서준의 목소리는 한겨울보다 더 차가웠다.장난이 아니라는 건 이미 진서준이 리앙을 강제로 무릎 꿇린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네가 감히 날 죽여?”리앙은 입으로는 소리쳤지만 속으로는 이미 두려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하지만 하늘까지 치솟은 리앙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내가 진짜 널 죽일지 아닐지 한번 시험해 볼까?” 진서준이 다섯 손가락을 내밀었다.“내가 하나라고 셀 때까지 무릎 꿇지 않으면 네 뇌가 어떻게 생겼는지 직접 보게 해주지.”리앙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이 대한민국 청년이 농담하는 게 아니라는 걸 리앙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진서준에게 머리를 조아리라니, 그건
보라색 드레스 여자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중년 남자도 입을 떡 벌린 채 굳어버렸다.자기 사장이 진서준에게 이렇게까지 깍듯이 대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중년 남자는 자기가 대체 내가 어떤 존재를 건드린 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진서준 씨, 정말 죄송합니다. 이분들이 진서준 씨 친구인 줄 몰랐습니다.”박지호가 진심으로 사과했다.“오해하지 마. 이 사람들은 내 친구가 아니야.”진서준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네?”박지호는 그 말에 순간 멈칫했다.“이 사람들은 김혜민이랑 같은 학교 다닌 동창일 뿐이야. 난 그냥 밥 한 끼 같이 먹으러 왔던 거고.”그러면서 진서준이 중년 남자를 가리켰다.“이놈이 김혜민까지 끌고 가려고 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너희 일에 신경도 안 썼을 거야.”중년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핏기 없이 창백해졌다.“제기랄, 이 눈먼 놈아! 네가 감히 진서준 씨를 건드려?”박지호가 분노하며 중년 남자를 거칠게 두들겨 팼다.“죄송합니다, 사장님. 사장님과 이분이 친구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중년 남자는 필사적으로 잘못을 뉘우치기 시작했다.“친구라고?”박지호는 그 말에 급히 부인했다.“진서준 씨는 우리 박씨 가문에서 가장 귀한 손님이야. 말조심해.”“네?”중년 남자는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두 사람이 친구 정도일 거라고만 예상했지 진서준이 박씨 가문에서 가장 귀한 손님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진서준 씨에게 직접 사과해. 진서준 씨가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넌 오늘 바다에 내던져져 물고기 밥이 될 거야.”박지호의 차가운 목소리가 방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진서준 씨. 정말 죄송합니다. 제 눈이 멀어서 미친 짓을 했습니다. 감히 진서준 씨를 건드리려 한 무지한 저를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중년 남자는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연신 사죄했다.“꺼져.”진서준은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진서준 씨.”중년 남자는 바닥을 기어가듯 허겁지겁 방에서 도망쳤다
박서명조차도 차를 따르고 담배를 권해야 하는 거물이라고?진서준의 신분이 이토록 대단하다는 걸 알게 된 뒤, 장주완 일행은 땅을 치며 후회했다.밥 먹을 때 괜히 진서준을 비웃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진서준이라는 거대한 다리에 매달려 인생 역전을 꿈꿀 수도 있었을 터였다.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 삶이 바로 코앞이었을 것이다.하지만 세상에 후회약이 있을 리 없었다.진서준과 김혜민이 돌아가는 길에서 김혜민이 드물게 주동적으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오늘 신세 졌어.”진서준은 순간 어리둥절했다.“너 지금 나한테 감사하는 거야?”“당연하지. 너 설마 내가 감사 인사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야?”진서준의 표정을 본 김혜민은 어이없어 눈살을 찌푸렸다.어쨌든 김혜민은 제대로 된 가정에서 자란 규수였다.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지 않은 이상, 김혜민도 굳이 화를 버럭 내며 트집을 부리지는 않았다.진서준은 더 이상 김혜민을 조롱하며 비꼬지 않고 조용히 운전했다.차 안은 다시금 정적에 휩싸였다.잠시 후, 김혜민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진서준, 오늘 네가 리앙의 양팔을 부러뜨리고 사람들 앞에서 무릎 꿇게 했잖아. 저 사람 절대 가만히 안 있을 거야.”“알고 있어.”진서준이 무심하게 대답했다.“그 인간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복수하려 들 거야. 너도 꼭 조심해.”김혜민이 진심으로 진서준에게 경고했다.이번 일의 시작이 결국 김혜민이었기 때문에 진서준이 복수 당하면 김혜민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다.“그 녀석을 죽이지 않고 살려둔 이상, 그 녀석의 보복도 감수할 준비가 돼 있어.”진서준이 담담하게 한마디 보탰다.“하지만 복수할 기회는 단 한 번뿐이야.”진씨 가문에 도착한 후, 진서준은 대략적인 상황을 김연아에게 설명했다.“이제 곧 김태영이 네가 강남에 왔다는 걸 알게 될 거야. 그러면 더 이상 그 녀석도 함부로 움직이긴 어려울 거야.”김연아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본래 뱀을 구덩이에서 꺼내듯, 김태영을 유인해 증거를 잡고 깔끔하게 진씨
“하지만 실력만큼은 인정해야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진서준과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손에 꼽힐 정도니까요.”올해 들어 진서준의 명성은 더욱 드높아졌다.강남에서 검을 휘둘러 단 일격으로 대종사 두 명을 참살하고 동북에서는 두 명문대가를 무릎 꿇게 했다.김태영은 진서준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고작 그런 애송이가 무슨 고수라는 거야. 그 개자식은 내가 반드시 죽여버릴 거야.”리앙이 이를 갈며 분노를 터뜨렸다.“그냥 죽이는 게 아니라 아주 처참하게 죽여버릴 거야. 내가 받은 이 치욕을 백 배로 되갚아 줄 거야.”김태영은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리앙 씨, 솔직히 절세 고수를 데려오지 않는 이상, 그 사람 절대 못 이겨요.”“흥. 너희 대한민국 놈들은 괜히 겁먹고 호들갑 떠는 게 문제야.”그때, 한쪽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금발의 중년 남성이 코웃음을 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고작 20대짜리 풋내기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다고 그래?”김태영은 그 남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이분은 누구죠?”“우리 차이더리스 가문의 4대 고수 중 한 명인 아담이야.”리앙은 자랑스럽게 말을 이었다.“너희 대한민국 국안부에서 정한 천의방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기도 하지.”“네? 천의방 고수라고요?”김태영은 순간 얼어붙었다.이런 평범해 보이는 중년 남자가 천의방에 이름을 올릴 강자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아담이 젊어 보인다고 얕보지 마. 올해로 무려 99세야.”리앙이 한마디 덧붙였다.“아담이 직접 나선다면 그 자식은 반드시 처참하게 죽을 거야.”리앙의 소개를 듣자 김태영도 덩달아 자신감을 얻었다.천의방 강자라면 전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절대 고수였다.아무리 진서준이 하늘을 찌르는 재능을 가졌다 해도 상대가 될 리 없었다.“난 그 자식을 죽이는 걸로 끝내지 않을 거야. 끔찍한 치욕도 치르게 할 거야.”리앙의 표정이 음침하게 변하자 김태영은 눈을 굴리더니 제안을 내놓았다.“리앙 씨, 그냥 그 녀석을 공개적
“성미영, 그리고 오영수?”진서준은 순간 멈춰 섰다.두 사람은 검은 마스크를 쓴 열댓 명의 무리에게 포위당해 있었다.상대의 실력은 그렇게 강하지 않았지만 공격이 맹렬했는데 마치 목숨을 내던진 돌격대 같았다.“빌어먹을, 이놈들은 대체 왜 죽질 않는 거야?”성미영이 눈살을 찌푸렸다.“오 대장, 저놈들 약점이 뭔지 알아요?”아까부터 성미영은 여러 명의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의 심장을 단검으로 찔렀고 상대의 몸에서 피가 줄줄 흘렀지만 전혀 쓰러질 기미가 없었다.정말 골치 아픈 놈들이었다.“나도 이런 놈들은 처음 봐.”오영수가 고개를 저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머리를 가격하거나 아니면 아예 머리와 몸을 분리해.”진서준이 입을 열었다.“뭐야? 네가 왜 거기서 나와?”두 사람은 진서준을 발견하고는 순간 당황했다.“오영수 대장, 저 녀석을 아세요?”성미영이 물었다.“전에 동북에서 만난 적 있어. 별 대단한 놈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마.”둘이 대화하는 사이, 검은 옷의 돌격대들이 또다시 몰려들었다.오영수와 성미영은 이미 체력이 바닥나기 일보 직전이었다.아무리 강한 실력자라도 이런 죽지 않는 사람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순식간에 두 사람의 몸에는 새로운 상처가 여러 군데 생겨났다.이 모습을 본 진서준은 슬슬 나설 준비를 했다.“야, 너 빨리 여기서 도망쳐.”오영수가 소리치자 진서준은 고개를 저었다.“내가 도망치면 너희는 살아남을 수 없어.”“오 대장, 저 녀석 말대로 저놈들 목을 쳐보는 게 어때요?”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자 성미영이 제안했다.“그렇게 해보는 수밖에 없겠구나.”두 사람은 곧바로 공격 방식을 바꿨다.콰직!머리 하나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고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머리가 떨어진 검은 옷 남자는 두 번 비틀거리더니 이내 바닥에 쓰러졌다.“효과 있어. 그냥 저놈들 목을 쳐버려.”오영수의 눈빛이 번쩍였다.정말 신기하게도 진서준이 제안한 이 방법이 통했다.그러자 검은 옷의 남자 중 한 사
셋은 함께 산에서 내려와 차를 타고 떠났다.“진씨 가문이라고 했어? 너 지금 진씨 가문에서 지낸다고?”성미영의 얼굴이 불쾌함으로 일그러졌다.성미영은 서지은과 베프였고 서지은이 진서준을 좋아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런데 지금 진서준이 당당하게 진씨 가문에서 머물고 있다고 했다.“뭐, 문제 있어?”진서준이 담담하게 되물었다.“당연히 문제 있지. 지은이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잖아?”성미영이 굳은 얼굴로 쏘아붙였다.“넌 남자로서 어떻게 그렇게 줏대 없이 굴 수가 있어?”이 말을 듣자 진서준은 더 이상 성미영과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진서준과 서지은, 그리고 다른 여자들과의 관계는 확실히 좀 복잡했다.하지만 정작 서지은을 포함한 여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런 관계를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역시 남자란 놈들은 하나같이 다 똑같다니까.”성미영이 콧방귀를 뀌었다.옆에 있던 오영수는 애꿎게 총 맞은 표정을 지었다.“미영아, 편견이 심하구나. 모든 남자를 한꺼번에 매도하면 안 되지.”오영수가 억울한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대다수 남자가 저 녀석처럼 오는 여자 막지 않는 바람둥이잖아요?”성미영이 진서준을 가리켰다.“이 녀석은 철저한 기생오라비 유형이잖아요. 별 능력은 없으면서 여자 꼬시는 재주만 타고난 놈이죠.”성미영은 속으로 반드시 서지은을 설득해서 진서준과 갈라놓게 하겠다고 다짐했다.가장 친한 친구를 이 끝없는 나락에 빠지게 둘 순 없었다.집에 도착하자 김연아가 마중 나왔다.“어라? 벌써 돌아왔어?”“아버지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어. 대신 길에서 이 둘을 만났어.”진서준이 뒤쪽에 서 있는 두 사람을 가리켰다.“김연아 씨, 이분은 저희 전신전 대장 오영수예요.”성미영이 오영수를 소개했다.“김연아 씨, 실례를 끼쳤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오영수가 정중하게 말했다.“괜찮아요. 그런데 다들 부상 입은 것 같은데요? 우리 집 뒤쪽에 병원이 있어요. 가서 치료부터 하세요.”김연아가 미소 지었다.“감사합니
“뭐라고? 불법적인 일이 우리 가게에서 일어난다고? 말도 안 돼.”성현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넌 전신전 소속이잖아. 그런데 네 오빠인 내가 어떻게 법률을 어기는 일을 하겠어?”“그럼 이 사람들은 왜 부른 거야? 집단 폭력도 불법이거든.”성미영은 차가운 시선을 보이며 성현도와 따졌다.“미영아, 이건 내가 싸우려던 게 아니야. 저 녀석이 일부러 시비 걸러 온 거라고.”성현도는 진서준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이놈이 일부러 우리 찻집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고 상철을 두들겨 패서 머리에 혹이 다 나버렸어. 난 단순히 정당방위를 위해 부른 거라고.”성미영이 등장하자 성현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솔직히 실력만 놓고 보면 성현도는 성미영보다 한참 부족했다.게다가 성미영은 전신전 소속인지라 저 남녀가 군부 조직인 전신전을 적으로 돌릴 리 없었다.군대를 건드리는 순간, 무조건 좋은 결과는 있을 수 없었다.“진서준, 도대체 무슨 일이야?”성미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라? 너희 둘이 아는 사이야?”성현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방금 내려놨던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난 사람을 찾으러 왔어. 하씨 가문 하경범이 이 위층에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진서준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그리고 또 하나, 저 위에서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도 하더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이 말에 성현도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해졌고 즉시 반박에 나섰다.“헛소리 마. 우리 가게는 단순한 찻집이야. 불법적인 일 따윈 없어. 근거없는 소문을 왜 털어놓고 난리야?”“미영아, 저 녀석한테 속지 마. 난 네 사촌 오빠야. 내가 그런 불법적인 짓을 할 사람이겠어?”성미영이 곧바로 진서준에게 물었다.“진서준, 너 증거 있어?”“직접 올라가 보면 다 알게 될 거잖아?”진서준이 가볍게 말했다.“오빠, 위층으로 가자.”성미영이 단호하게 말했다.“그, 그건 좀 곤란해. 위층엔 귀
순간, 장내는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모든 시선이 진서준에게 쏠렸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다들 진서준을 그냥 얼굴만 반반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 고수였다.성현도의 부하 중 최고 실력자조차 상대가 되지 않았다.성현도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고 상철을 향해서 욕설을 날렸다.“쓰레기 자식, 이런 애송이 하나도 못 이겨?”부하가 지면 망신당하는 건 결국 성현도 자신이었다.이대로 체면을 구긴 채 끝낼 수는 없었다.이대로 넘어가면 앞으로 르벨 재벌 2세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될 게 뻔했다.“이봐, 네 실력이 괜찮은 건 인정할게.”성현도가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근데 너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수 있어? 천 명은? 잘 들어. 내 부하는 수도 없이 많아. 너 같은 놈 하나 처리하는 데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해.”진서준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그냥 하경범을 찾으러 온 거야. 그 녀석만 넘기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해주지.”“없던 걸로 한다고?”성현도가 그 말에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너 지금 누굴 상대로 협상하려 드는 거야? 난 성씨 가문의 직계야. 날 건드리면 상대해야 할 건 나 하나가 아니라 우리 가문 전체라고.”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이 남자들은 전부 성씨 가문의 경호원이었고 실력도 만만하지 않았다.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무려 50명 이상이었다.한순간에 텅 비어 있던 로비가 사람들로 꽉 찼다.“저 자식 끝났네. 이 정도 성씨 가문 인원이라면 아무리 강해도 버틸 수가 없지.”“그러게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잖아.”“왜 쓸데없이 성현도를 건드린 거지? 스스로 무덤을 판 거잖아.”구경꾼들은 이 광경에 각자 다른 감정을 보였다.누군가는 동정을, 누군가는 아쉬움을, 또 누군가는 짙은 흥미를 보였다.“사연아, 넌 좀 쉬어. 이놈들은 내가 처리할게.”진서준이 앞으로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가 찻집 안으로 들어왔다.남자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상철아, 저놈 다리 하나 부러뜨려서 내던져.”성현도가 진서준을 가리키며 명령했다.“알겠습니다.”상철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진서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서준아, 내가 할게.”허사연의 눈에는 불꽃 같은 전투욕이 타올랐다.“조심해. 저 녀석은 횡련 종사야.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진서준이 조용히 귀띔했다.“알았어. 설령 못 이긴다고 해도 어차피 네가 있잖아?”허사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진서준이 곁에 있는 한, 허사연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이봐, 사내자식이 여자 뒤에 숨는 게 말이 돼?”상철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이봐, 껑충이. 여자를 얕보지 마. 일단 이기고 나서 말해.”허사연이 상철을 도발했다.“아가씨, 그런 기생오라비 말고 날 따르지 그래? 밤마다 널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데?”상철이 음흉하게 웃었다.“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얼굴이 싸늘해진 허사연이 주먹을 날렸다.강렬한 펀치가 공기를 가르며 폭발음을 일으켰고 그 위력은 철판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상철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가만히 서 있어도 넌 날 어쩔 수 없어.”“닥쳐!”허사연이 분노에 차 주먹을 그대로 상철의 얼굴로 내리꽂았다.상철은 일부러 머리를 숙이며 대머리 정수리로 받아냈다.쿵!둔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주먹이 상철의 머리를 강타했으나 대머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사연이 몇 걸음 물러섰다.순간 손에 뜨거운 통증이 밀려왔고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손을 확인하자 하얀 피부였던 손등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상철은 자기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더니 빙그레 웃었다.“아가씨, 이제 내 실력을 알겠지?”그 모습에 허사연의 승부욕이 다시 불타올랐고 콧방귀를 뀌며 다시 달려들었다.이번에는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상철의 머리를 내려찍었다.‘머리가 단단하다고 자랑하
이렇게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싸움 실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완전 여성판 이소룡이었다.“너, 너희들 정말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여기가 어디인지 알기나 해? 어디서 대놓고 싸움질이야?”종업원은 순간 놀란 뒤 분노에 찬 얼굴로 진서준와 허사연을 가리켰다.찻집이 문을 연 이후로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진서준과 허사연이 첫 사례였다.주변의 구경꾼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싸움 좀 하면 뭐해? 여긴 성씨 가문의 구역이야. 성씨 가문에서 한마디만 하면 저 남녀는 오늘 밤중으로 사라지겠지.”“어휴, 저 여자 너무 아까워. 저렇게 예쁜데 왜 죽지 못해서 안달이지?”“여자는 살 수도 있겠지만 남자는 무조건 죽을걸.”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며 이미 진서준과 허사연의 결말을 예상하는 듯했다.“그럼 네 말대로라면 내가 널 때린다 해도 얌전히 맞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허사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종업원에게 다가갔다.“오지 마!”종업원은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다.“어떤 미친놈이 내 구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야?”그 순간, 2층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을 확인하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성현도가 오늘 여기 있었네?”누군가 그 청년을 알아보았다.“저 둘 끝장났네. 성현도는 악명 높은 냉혈한이야.”그 청년은 바로 찻집의 사장인 성현도였다.성현도는 르벨 재벌 2세 사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친구에게는 무조건 의리를 지키지만 적에게는 무자비했다.성현도의 고문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고 게다가 무인으로서 무공 실력도 상당했다.“사장님, 저 남녀가 와서 난동을 부렸어요.”종업원은 성현도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장이 나온 걸 확인한 허사연은 주먹 한 방에 종업원을 기절시켜 버렸다.“뭐야?”성현도의 눈이 가늘어졌고 표정이 험악해졌다.자기 앞에서 대놓고 부하를 때리다니, 이건 너무나도 명백한 도발이었다.“아가씨, 우리 처음 보는 사이 맞지? 우리
그리고 오후 2시가 되자 진서준은 허사연을 데리고 조호가 말한 천국찻집으로 향했다.겉모습만 보면 이 찻집은 진짜 전통찻집 같았고 규모도 꽤 컸다.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1층과 2층까지는 정말 평범한 찻집처럼 꾸며져 있었고 누가 봐도 이상한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하지만 3층으로 올라가려면 회원권이 있어야 하거나 사장이 직접 허락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손님, 아가씨,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진서준과 허사연이 차를 마시러 온 줄 안 종업원이 빠르게 달려와 안내하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 난 하경범을 찾으러 왔거든.”진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종업원이 순간 얼어붙었다.“혹시 하씨 가문의 하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맞아.”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손님은 누구신지...”종업원이 신중하게 물었다.진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냥 복수하러 왔다고 전해.”그놈 아버지라고 하는 건 자기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고 친구라고 하기도 기분이 더러웠다.그 말에 종업원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손님, 여기서 장난치지 마세요.”하경범은 르벨에서 유명한 재벌 2세였다.이 찻집의 사장과도 막역한 사이였고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왜? 못 믿겠어?”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손님, 하 도련님에게 복수하려던 사람은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종업원이 경고하듯 말했다.“그런 농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그 말을 듣자 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이렇게 전해. 그 하경범이 두들겨 맞고 나자빠지게 했던 진서준이 왔으니 당장 기어 나오라고 말이야.”진서준의 뻔뻔한 태도에 종업원은 어이가 없었다.“좋습니다. 손님이 그렇게 죽고 싶다면 제가 기꺼이 도와드리죠.”종업원은 바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문제 발생했습니다. 난동자가 있습니다.”쿵! 쿵!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건장한 남자 스무 명이 들이닥쳤다.전부 검은
진서준과 허사연은 차를 타고 조호의 회사로 향했다.이 회사는 그냥 겉치레일 뿐, 진짜 돈이 들어오는 곳은 유흥업소들이었다.유흥업소를 얕잡아보면 안 된다.운 좋게 돈 많은 도련님들이라도 걸리면 하룻밤에 수억 원이 순식간에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진서준 씨!”진서준이 들어서자 조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조호는 진서준 옆에 있는 허사연을 힐끗 쳐다본 뒤 고개를 숙이고 감히 더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잡담은 그만하고 하경범을 잡아가는 제일 좋은 타이밍만 말해.”진서준이 직설적으로 물었다.이 말에 조호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매일 오후마다 하경범은 천국찻집이라는 곳에 갑니다.”조호는 재빨리 대답했다.“보통은 경호원 몇 명만 데리고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얼씨구? 저런 인간이 매일 차나 마시러 간다고?”진서준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그게... 진서준 씨, 사실 그곳은 이름만 찻집이지 실제로는...”조호는 옆에 여성이 있다는 걸 의식해서 말을 흐렸지만 진서준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아챘다.“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그냥 인기 많은 인터넷 셀럽이 가득한 고급 유흥업소일 것이다.“진서준 씨, 듣자 하니 그 찻집의 주인은 성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짜로 움직이실 거라면 하경범이 이동 중일 때를 노리는 게 좋을 겁니다.”조호가 조심스럽게 조언했다.“응? 성씨 가문이 이런 사업도 해?”진서준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진서준은 오영수에게서 성미영에 대한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정의로운 성격의 성미영이 자기 가문에서 이런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네, 듣기로는 성씨 가문의 한 직계 후손이 운영한다고 합니다. 여자에 미쳐 있는 놈이라 르벨의 돈 많은 도련님들과 꽤 친분이 깊다고 하더군요.”조호는 본인이 아는 정보를 전부 쏟아냈다.“좋아, 대충 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조호의 회사를 나온
진서준이 허사연의 캐리어를 들어주며 옆방으로 걸어갔다.그 뒷모습을 보며 도지아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인간은 원래 모여서 사는 걸 선호하는 동물이다.사회를 벗어나서 혼자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가족도 친구도 없이 너무 오래 지내다 보면 결국 감정 없는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그렇게 되면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없어질 것이다.“어제 전화할 때 그랬었지? 이번에 너 자기 출신을 찾으러 온 거라고.”호텔 방으로 돌아온 후, 허사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너 원래 경성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예전에 말해주셨어. 사실 우리 아버지는 어릴 때 길에서 주워 온 아이였다고.”진서준은 허사연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허사연은 진서준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허사연이라면 이 비밀을 절대 밖으로 흘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뭐라고? 아버님이 주워 온 아이라고?”허사연이 깜짝 놀랐다.“그래.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건 나뿐이야. 가족 중에서도 할아버지가 나한테만 알려주셨지.”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 오영수가 내 등에 있는 용을 보고는 내가 용맥의 일족이라고 했어. 그래서 오영수를 따라 여기 와서 오영수 셋째 삼촌에게 내 출신에 관해 알아보려 했던 거야.”“네 등에 용이 있다고?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허사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둘이 알몸으로 함께한 시간도 적지 않은데 허사연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내가 체내 혈기를 모을 때만 그 용이 나타나거든.”진서준이 설명을 이어갔다.“그런데 오영수 삼촌이 아직 돌아오질 않아서 일단은 여기서 며칠 기다려야 해.”“아니, 그럼 오씨 가문에서 널 안 재워줬어?”허사연이 의아해했다.명문대가인 오씨 가문에 빈방이 없을 리가 없었다.“그날 오영수를 찾아갔는데 마침 오영수 할아버지가 위중했어. 그리고 그 집안엔 그 어르신을 그냥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지.”진서준이 담담하게
“진짜 예쁜 새색시 숨겨놓고 있었네?”허사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누구라도 자기 남자 방에 예쁘고 몸매가 완벽한 여자 하나가 같이 있는 걸 보면 의심 안 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지금은 아침이었다.설마 이 여자가 아침에 막 찾아온 건 아니겠지?“사연아, 오해야. 내가 제대로 설명할게.”진서준은 머리가 띵해졌고 뇌가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아가씨, 오해하지 마세요. 어제 저랑 진서준이 같은 방에서 잔 건 맞지만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 밤새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도지아가 황급히 해명에 나섰다.“네? 밤새 안 자고도 아무 일 없었다고요?”허사연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설마 밤새 불태우느라 못 잔 건 아니겠죠?”허사연의 농담과 진담이 뒤섞인 말에 진서준은 헛웃음만 나왔다.“사연아, 이쪽은 도지아야. 우리 진짜 그냥 친구야. 일단 들어와. 천천히 설명할게.”허사연이 방에 들어오자 진서준은 서로에게 소개했다.그러고는 이 방에서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다.“도지아는 황예은이 소개해 준 환자야. 다리 치료를 부탁받았거든. 종아리를 봐봐. 이틀 전에 내가 직접 발라준 연고가 있어.”허사연이 내려다보자 확실히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그리고 도지아가 밤새 안 잔 건 원기를 수련하느라 그랬던 거야. 너도 예전에 수련한다고 며칠씩 안 잔 적 있잖아?”허사연은 오해가 풀리자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내가 뭐 어쨌다고 그렇게 호들갑이야?”“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그러는 거잖아.”진서준이 빠르게 대답했다.“뭐야? 내가 그렇게 의심 많고 질투 많은 여자로 보여?”허사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아, 아니지. 우리 사연은 누구보다 속이 넓은 부드러운 여자지.”진서준이 급히 정정했다.“됐어, 너 겁먹은 거 너무 귀엽다.”허사연이 피식 웃었다.“넌 여기 좀 쉬고 있어. 내가 방 하나 잡고 올게.”진서준은 더 머뭇거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진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허사연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도지아 씨, 진서준이
“내가 가면 안 돼?”사실 진서준은 거절하려 했었다.르벨은 안개가 짙게 깔린 늪지대 같은 곳이라 진서준조차도 어디에 함정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그러니 허사연이 온다면 다칠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거절하면 허사연이 상처받을 게 뻔했다.“당연히 되지. 지금 위치 보낼게.”진서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위치를 보냈다.자기 여자를 지킬 자신도 없으면서 강자들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기야, 잘 자.”허사연이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일찍 자.”진서준이 다정하게 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진서준의 졸음이 싹 가셨다.진서준은 창가로 다가가 이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봤다.“오씨 가문, 안씨 가문, 하씨 가문... 너희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난 전부 박살 낼 거야. 이번엔 반드시 나와 아버지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겠어.”진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진서준이 막 눈을 뜨자마자 도지아의 흥분한 외침이 들려왔다.“진서준, 됐어. 나 생겼어!”도지아는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는데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게 분명했다.진서준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너 아직 처녀 아니었어? 대체 어떻게 임신한 거야?”“미친놈아, 임신은 개뿔, 무슨 헛소리야?”도지아는 얼굴이 빨개지며 진서준을 노려봤다.“그럼 왜 아침부터 난리야?”진서준이 되물었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침부터 흥분해 날뛰지 않을 것이다.“어제 네가 준 수련법 기억나지? 나 벌써 원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됐어.”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긴 도지아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고작 하룻밤 만에 원기를 형성한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뭐? 그렇게 빠르다고? 너 타고난 천재 맞네?”진서준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보통 무인은 원기를 익히는 데만 최소 1년이 걸리는데 그것도 매일 꾸준히 수련할 경우에만 발생하는 일이었다.심지어 재능 있는 자들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린다.그런데 도지아는 단 하룻밤에 이 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