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실력이 좀 있다고 해서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지. 자기가 천하무적인 줄 알아.”탁현수는 아주 작게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귓가에 똑똑히 들렸다.탁현수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엄청난 대종사의 위세가 그의 몸에서 뿜어졌다.탁현수의 발밑에 있던 호숫물이 끓기 시작했다.파문이 점차 주변으로 퍼져나갔다.겨우 몇 초 사이 반경 50m 내외의 호숫물이 전부 끓기 시작했고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호숫가에 서 있던 사람들 역시 열기를 느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세상에, 저게 바로 대종사의 실력인가? 강기를 이용해 이렇게 많은 물을 끓어오르게 한다니.”“탁현수 종사의 강기는 불과 관련이 있다고 들었어...”“저것 봐. 호숫물이 불타오르고 있어!”호수 위에 불로 만들어진 벽이 진서준과 탁현수를 에워싸고 있었다.그 화염은 탁현수 체내의 선천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강기로 다른 뭔가를 만들어내다니.’진서준은 그 광경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이 화염은 비록 진서준이 영기로 만든 영화보다 못했지만 위력은 약하지 않았다.대성 종사라고 해도 감히 그 벽을 뚫을 수는 없을 것이다.조금 골치 아파다.“이 명인 호수가 네 무덤이 될 것이다.”말을 마친 뒤 탁현수의 손에 불이 타올랐다.다음 순간, 탁현수가 손바닥을 펴 보였다.화염이 뿜어지면서 허공에 뱀 한 마리가 나타났다. 뱀은 아가리를 쩍 벌린 채 진서준을 향해 덤벼들었다.뱀이 지난 곳마다 아래 호숫물이 지글거리면서 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호숫가에 서 있던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 진서준이 탁현수의 공격을 막지 못할 거로 생각했다.“수십 미터 떨어진 곳인데도 델 듯한 온도가 느껴져. 종사의 강기로는 절대 저 뱀을 막지 못할 거야!”“진 마스터가 탁현수 어르신 손에 단숨에 죽는 건 아니겠지?”“그렇진 않을 거야. 진 마스터는 조금 전에 조천무를 단번에 죽였잖아. 실력자라고.”허사연과 김연아 등은 그 광경을 보고 바짝 긴장했다. 그들은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내가 눈이 잘못됐나? 조금 전에 진 마스터 앞에 용 한 마리가 나타나지 않았어?”누군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맞아, 잘못 본 게 아니야. 확실히 용이 있었어!”“하지만 강기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건 대종사만 할 수 있는 일이잖아? 설마 진 마스터도 대종사인가?”강기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대종사의 상징이었다.조금 전 진서준이 보여준 용 때문에 많은 이들이 진서준을 대종사라고 착각했다.성씨 일가의 성진형이 차갑게 말했다.“저 자식은 대종사가 아니에요. 저 자식은 종사일 뿐만 아니라 술법 마스터예요.”술법 마스터?현장은 발칵 뒤집혔다.화진에서 수련은 세 가지로 나뉠 수 있었다.무도, 술법, 그리고 횡련까지.동시에 무도와 술법을 수련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았지만, 무도와 술법 모두 높은 수준까지 수련하는 천재들은 극히 드물었다.특히 대성 종사와 술법 마스터가 되는 경우는 손에 꼽힐 정도로 드물었다.그리고 그런 대단한 천재들은 대부분 50세 이상이었고 큰 가문의 실력자들이었다.하지만 진서준은 겨우 20대였다.진서준을 조사해 본 사람들이라면 그에게 배후 세력이 없다는 걸 다 알고 있었다.그래서 진서준이 술법 마스터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경악했다.“진 마스터님은 술법 마스터가 아니라 술법 천사예요.”권해철은 경외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진 마스터의 술법 실력은 저보다 훨씬 뛰어납니다.”권해철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또 한 번 안색이 달라졌다.술법 천사이자 무도 종사라니, 화진에 대단한 인재가 나타난 것이 틀림없었다.만약 진서준이 오늘 죽지 않는다면 그는 앞으로 분명 천의방 20위 안에 들 수 있을 것이다.이때 호수 위에서 갑자기 폭발음이 들려왔고 곧 물보라가 전부 사라졌다.호수 위는 거친 기세로 불타오르는 불길 외에 모든 것이 고요했다.하지만 자세히 관찰해 보면 명인 호수 수위가 3cm 정도 내려간 것을 알 수 있었다.명인 호수는 그 크기가 거의 200만 평에 달했다.200만 평인 호수의 수위가 3cm 하강한 것을 보면
“목숨 아까운 줄 모르네.”탁현수의 눈동자에 경멸이 스쳐 지나갔다.그의 주먹에는 선천의 힘이 8할 이상 포함되어 있었기에 종사의 강기로는 전혀 막을 수 없었다.주먹을 채 뻗기도 전에 용은 이미 진서준의 손에 닿았다.쿵...호수는 마치 미사일의 폭격을 당한 것처럼 30m 높이의 물기둥이 생겼다.활활 불타오르던 불길조차 그 기세가 한풀 꺾였다.사람들은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두 사람의 전투로 인한 여파로 다치게 될까 봐 걱정되었다.물기둥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서둘러 전투 상황을 살폈다.탁현수의 눈동자에는 경악이 가득했다. 청색 빛이 반짝이는 손이 그의 공격을 막았다.그의 선천의 힘은 진서준의 영기에 완전히 둘러싸여 앞으로 조금도 나아갈 수 없었다.마치 공격이 아주 거대한 산에 가로막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진 마스터가 막아냈어. 진 마스터, 정말 대성 종사가 맞는 걸까?”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입을 떡 벌린 채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그들이 이 주먹을 막았더라면 이미 가루가 되어 사라졌을 것이다.이때 탁현수가 다시 움직였다.그는 다른 손을 뻗어 진서준의 머리를 노렸다.쫘악.공기가 찢기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진서준은 당황하지 않고 체내의 영기를 곧바로 다른 손에 집중시켜 덤덤히 다시 한번 그의 공격을 막았다.탁현수는 화가 났다.사람이 개미를 죽이려면 보통 한 번 밟으면 끝난다. 그러나 몇 번이나 밟아도 개미가 죽지 않는다면 화가 날 것이다.탁현수가 보기에 진서준이 바로 그 개미였다.“몇 번이나 막을 수 있는지 어디 한번 지켜보겠어!”탁현수는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그는 불타오르는 주먹을 끊임없이 내뻗었고 용들이 울음소리를 내면서 한꺼번에 달려들었다.현장에 있던 종사 강자들은 탁현수가 대체 몇 번이나 공격을 퍼부었는지 보지 못했다.심지어 민영신 같은 3품 대종사도 미간을 찌푸린 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진서준의 공격은 마치 바람 같았고, 그의 손바닥은 마치 청색의 장
호수 위에서 불길이 치솟았다.조금 전보다 불길이 더욱 거세졌다. 호숫가의 온도는 이미 40도에 달했다. 종사들은 자신의 강기를 이용해 고온을 막아냈다.진서준은 그 광경을 보자 눈빛이 살짝 달라졌다.“탁현수 어르신은 장도로 종사가 되셨지만 종사가 된 이후로는 장도를 쓴 적이 없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탁현수 어르신이 다시 장도를 든 걸 보니 아마도 전력을 다하려는 것 같네요.”우소영은 차갑게 웃었다.“제 사부님은 오랫동안 장도를 쓰지 않으셨지만 사부님의 도법은 전혀 퇴보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대종사가 되면서 도법이 더욱 발전했죠. 도강의 위력으로 산과 강을 벨 수 있는 정도예요.”우소영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헛숨을 들이켰다.허사연은 무척 긴장했다. 그녀는 주먹을 너무 꽉 쥐어서 손가락 관절이 희게 변했다.“이 자식, 내 장도에 죽는 걸 영광으로 생각해.”탁현수가 말했다.“난 지금까지 내 장도로 사람을 딱 한 명 죽였어. 그 사람은 내 원수였지. 그도 종사였어. 난 내 내력이 정점에 달했을 때 그를 죽였어.”내력 무인이 종사를 죽이다니!그때 탁현수는 이미 자기보다 더 높은 경지의 사람과 싸울 수 있었다.말을 마친 뒤 탁현수는 곧바로 움직였다.그의 장도와 발밑의 호숫물이 만나는 순간, 흰 김이 모락모락 나서 탁현수의 몸을 전부 가릴 듯했다.“열염분천!”치직!공기가 찢기고 안개가 갈라졌다. 하늘가의 노을 같기도 한 붉은 도강은 호수를 갈라서 10m 정도 깊이의 길을 만들었다.탁현수는 온몸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의 선천의 힘은 거의 극치에 달했다.기세가 어마어마했다.탁현수는 자신의 모든 선천의 힘을 그 일격에 쏟아부었다.일생의 수행이 전부 그 일격에 담긴 것이다.그것은 탁현수의 일생에서 가장 강력한 공격이었다.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조금 전 진서준이 보여준 실력은 이미 탁현수의 예상을 벗어났다.그래서 그는 반드시 진서준을 일격에 참살해야 했다.다들 탁현수의 일격에 매우 놀랐다.3품
부서진 도강은 천천히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앞에 있던 용은 서서히 사라지면서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아래 호수는 미친 듯이 사방으로 헤쳐지고 있었다.하늘의 구름 또한 사방으로 흩어져서 감쪽같이 사라졌다.“죽어!”탁현수의 호통 한 번에 용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진서준의 몸은 완전히 도강 앞에 드러나게 되었다.진서준은 물러나지 않고 두 손으로 도강을 꽉 쥐었다.강철마저 녹일 수 있는 온도가 자신의 두 손을 태우게 놔둔 것이다.피가 두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이 순간, 두 사람은 모든 힘을 다 썼다.“내 여동생, 내 어머니, 내 친구들, 내 애인이 날 기다리고 있어. 난 절대 죽을 수 없어!”진서준의 옷이 갑자기 찢겼고 그의 등에 용의 문양이 은은히 나타났다.다음 순간, 빛이 번쩍이면서 파괴력 넘치는 힘이 진서준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뿜어졌다.탁현수는 순간 동공이 떨렸다.“이럴 수가! 용의 핏줄이라니, 넌...”탁현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무시무시한 힘이 그를 집어삼켰다.쿠구궁...엄청난 물보라로 인해 진서준과 탁현수 두 사람이 물에 잠겼다.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바짝 긴장했다.이 일격으로 진서준과 탁현수의 승부가 갈릴 것이다.종사가 과연 대종사를 죽일 수 있을까?잠시 뒤, 호수는 다시 고요해졌다.오직 진서준만이 산처럼 꿈쩍하지 않고 호수 위에 서 있었다.그 순간, 사람들은 숨 쉬는 법마저 잊었고 생각 또한 할 수 없었다.민영신은 어느샌가 호숫가에 서 있었다. 표정 변화가 적은 그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허사연은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을 보이며 입이 귀에 걸린 채 진서준을 바라보고 있었다.다들 진서준에게 엄청난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진서준을 과소평가했다.우소영은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호숫물이 끊임없이 끓고 있었다.호숫가.엄재욱과 다른 호국사, 성진형 일행, 황씨 일가의 두 종사까지, 총 8명의 종사가 살기등등하게 진서준을 바라보고 있었다.“진서준, 난
천문검이 모습을 드러냈다.검 소리가 들리자 3품 대종사인 민영신마저 살짝 눈빛이 달라졌다.“아직 자기 패를 다 보여주지 않았네!”이때 민영신은 더 이상 약자를 보는 눈빛으로 진서준을 보지 않았다.동일한 경지였다면 민영신은 심지어 자신이 진서준의 상대가 되지 않았을 거로 생각했을 것이다.무도와 술법을 동시에 수련했을 뿐만 아니라 보검까지 소유하고 있으니, 진서준은 참으로 대담했다.그 광경을 본 조해영은 눈에 핏발이 섰다. 그녀는 진서준이 이곳에서 죽기를 바랐다.‘진서준, 죽어. 이곳에서 죽으라고!’진서준이 죽지 않는다면 조해영은 자신이 평생 노력해도 복수를 할 수 없을 거로 생각했다.허사연은 화를 내며 호통을 쳤다.“정말 도덕이라고는 없네요. 같이 손을 잡고 진서준 씨 한 명을 괴롭히려고 해요?”“승리하는 자가 정의로운 법이지.”엄재욱은 차갑게 말했다.권해철은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다들 날 잊은 것 같군!”“우리도 있어요!”한씨 일가의 세 종사도 나섰다.“우리 한씨 일가는 진 마스터님과 생사를 함께할 겁니다!”한서강은 자기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엄재욱과 성진형은 순간 고민이 됐다.그들은 진서준이 기진맥진한 상태라 종사 9명이 연합하면 진서준을 죽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그러나 지금 상황을 보니 꼭 이길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구경하던 사람들은 들떴다.정말로 우여곡절이 많은 전투였다.처음에는 다들 진서준이 틀림없이 죽을 거로 생각했지만 진서준은 탁현수의 공격을 막았다.그리고 탁현수가 전력을 공격했건만 진서준은 그의 공격을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탁현수를 죽였다.그런데 이젠 9명의 종사가 나섰다. 그중 세 명은 심지어 인의방에 이름을 올린 자들이었다.그러나 진서준 쪽에도 도우려는 자가 있었다.세 명의 종사와 혼자서 두 명을 상대할 수 있는 술법 천사 권해철.어느 쪽이 이길 지 짐작할 수 없었다.엄재욱은 안색이 한없이 어두웠다. 그는 권해철 등 사람들을 노려보았다.“권해철 씨, 이건 국안부를 적으로 돌리는
“우리 사부님을 죽인 놈, 너도 죽어!”우소영은 표정이 일그러졌고 눈빛은 원망으로 가득했다.진서준이 고개를 돌려 우소영을 바라봤을 때 우소영은 이미 진서준의 앞에 서 있었다.퍽...진서준은 우소영의 손바닥에 맞았다.허사연은 심장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서준 씨!”다른 사람들도 매우 긴장했다.우소영은 엄청난 분노를 품고 있었으니 분명 사력을 다했을 것이다.우소영은 원래도 약한 편이 아니었으니 진서준은 틀림없이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진서준의 눈빛이 살짝 달라졌다. 그는 우소영의 위력을 확실히 느꼈다.조금 아프긴 했지만 내상을 입지는 않았다.전에 보운산에서 용혈과로 몸을 단련한 덕분이었다.그러지 않았더라면 우소영의 공격에 크게 다쳤을 것이다.“이럴 수가. 왜 멀쩡한 거야?”우소영은 경악한 표정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진서준의 몸에서 혈기가 들끓고 있었다.붉은색의 혈기가 진서준의 몸을 뒤덮고 있었다.진서준은 천문검을 휘둘렀다.천문검은 마치 횃불처럼 공기를 베었다.검기로 인해 발아래 호수에 수 미터 깊이의 좁은 골짜기가 생겼다.우소영은 서둘러 피했다. 그녀는 뒤로 수십 미터 물러났다.“진 마스터 멀쩡한데?”“아냐, 멀쩡할 리가 없어. 분명 억지로 버티는 걸 거야.”“혹시 저 진 마스터 횡련 종사인 건 아닐까?”그 말에 사람들은 또다시 의논이 분분해졌다.“뭔 소리를 하는 거야? 횡련 종사라면 수련 난도가 술법이랑 비슷하다고!”“우리 화진에서 술법을 수련하는 사람은 횡련을 수련하는 사람보다 훨씬 많아!”가장 중요한 건 진서준이 이미 무도와 술법을 모두 익혔다는 것이다.만약 그가 횡련 종사라면 아마도 역사상 첫 인물일 것이다.사람들이 얘기를 나누는 사이 엄재욱 등 8인이 진서준에게로 돌진했다.8명의 종사가 함께 공격하니 그 힘이 금방 대종사 경지에 이른 사람의 힘과 엇비슷했다.엄청난 공세를 마주하게 된 진서준은 체내의 마지막 남은 영기를 천문검에 모으기 시작했다.“난 검 하나만 있으면
사방이 고요했다.사람들은 진서준과 허사연을 바라보았다.두려워하는 이들도 있고, 분노하는 이들도 있었으며 기뻐하는 이들도 있고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다.김연아는 너무 기쁜 나머지 눈시울마저 붉어진 채 진서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살아있으면 됐어. 살아있으면 됐어...”모든 걱정이 그 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졌다.25살에 선천 대종사를 죽이고, 종사 9명을 죽였다.한씨 일가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 그들 모두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들처럼 기뻐했다.이번에 남주성에서 한씨 일가는 그 위상이 단번에 높아질 것이다.조씨 일가는 멸문되었고 황씨 일가의 두 종사도 진서준에게 살해당했다.이제 황씨 일가는 바람 앞의 등불과 다름없는 처지였다.한씨 일가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다른 가문들이 황씨 일가를 처단할 것이다.황영산과 황시훈은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다.두 사람은 황씨 일가가 망했다는 걸 직감했다.조해영의 눈빛은 어두웠다. 진서준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서 끝없는 원망과 분노가 보였다.그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도 왜 진서준을 죽이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쓸모없는 놈들!’진서준은 황영산의 곁으로 다가가서 차갑게 그를 노려보았다.“조천무가 납치한 사람들은?”“얘기하면 우리 가족을 살려줄 거야?”황영산은 기대 어린 눈빛으로 진서준을 바라보았다.“남주성에서 꺼져.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진서준은 차갑게 말했다.“그래, 그래!”황영산은 곧바로 한씨 일가 사람들을 데리고 유정과 고한영 두 사람을 구하러 갔다.진서준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허사연과 함께 차에 오른 뒤 한씨 일가도 돌아갔다.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누워 잠을 잤다.너무 피곤했다.이번 전투로 진서준 체내에 있는 영해와 혈해 모두 바닥났다.진서준의 의지가 굳건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명인 호수를 나서자마자 쓰러졌을 것이다.허사연은 진서준이 아주 크게 다쳤다고 생각해 황급히 권해철에게 살펴달라고 했다.권해철은 맥을 짚은 뒤 허사연에게 말했다
“뭐라고? 불법적인 일이 우리 가게에서 일어난다고? 말도 안 돼.”성현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넌 전신전 소속이잖아. 그런데 네 오빠인 내가 어떻게 법률을 어기는 일을 하겠어?”“그럼 이 사람들은 왜 부른 거야? 집단 폭력도 불법이거든.”성미영은 차가운 시선을 보이며 성현도와 따졌다.“미영아, 이건 내가 싸우려던 게 아니야. 저 녀석이 일부러 시비 걸러 온 거라고.”성현도는 진서준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이놈이 일부러 우리 찻집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고 상철을 두들겨 패서 머리에 혹이 다 나버렸어. 난 단순히 정당방위를 위해 부른 거라고.”성미영이 등장하자 성현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솔직히 실력만 놓고 보면 성현도는 성미영보다 한참 부족했다.게다가 성미영은 전신전 소속인지라 저 남녀가 군부 조직인 전신전을 적으로 돌릴 리 없었다.군대를 건드리는 순간, 무조건 좋은 결과는 있을 수 없었다.“진서준, 도대체 무슨 일이야?”성미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라? 너희 둘이 아는 사이야?”성현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방금 내려놨던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난 사람을 찾으러 왔어. 하씨 가문 하경범이 이 위층에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진서준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그리고 또 하나, 저 위에서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도 하더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이 말에 성현도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해졌고 즉시 반박에 나섰다.“헛소리 마. 우리 가게는 단순한 찻집이야. 불법적인 일 따윈 없어. 근거없는 소문을 왜 털어놓고 난리야?”“미영아, 저 녀석한테 속지 마. 난 네 사촌 오빠야. 내가 그런 불법적인 짓을 할 사람이겠어?”성미영이 곧바로 진서준에게 물었다.“진서준, 너 증거 있어?”“직접 올라가 보면 다 알게 될 거잖아?”진서준이 가볍게 말했다.“오빠, 위층으로 가자.”성미영이 단호하게 말했다.“그, 그건 좀 곤란해. 위층엔 귀
순간, 장내는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모든 시선이 진서준에게 쏠렸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다들 진서준을 그냥 얼굴만 반반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 고수였다.성현도의 부하 중 최고 실력자조차 상대가 되지 않았다.성현도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고 상철을 향해서 욕설을 날렸다.“쓰레기 자식, 이런 애송이 하나도 못 이겨?”부하가 지면 망신당하는 건 결국 성현도 자신이었다.이대로 체면을 구긴 채 끝낼 수는 없었다.이대로 넘어가면 앞으로 르벨 재벌 2세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될 게 뻔했다.“이봐, 네 실력이 괜찮은 건 인정할게.”성현도가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근데 너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수 있어? 천 명은? 잘 들어. 내 부하는 수도 없이 많아. 너 같은 놈 하나 처리하는 데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해.”진서준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그냥 하경범을 찾으러 온 거야. 그 녀석만 넘기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해주지.”“없던 걸로 한다고?”성현도가 그 말에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너 지금 누굴 상대로 협상하려 드는 거야? 난 성씨 가문의 직계야. 날 건드리면 상대해야 할 건 나 하나가 아니라 우리 가문 전체라고.”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이 남자들은 전부 성씨 가문의 경호원이었고 실력도 만만하지 않았다.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무려 50명 이상이었다.한순간에 텅 비어 있던 로비가 사람들로 꽉 찼다.“저 자식 끝났네. 이 정도 성씨 가문 인원이라면 아무리 강해도 버틸 수가 없지.”“그러게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잖아.”“왜 쓸데없이 성현도를 건드린 거지? 스스로 무덤을 판 거잖아.”구경꾼들은 이 광경에 각자 다른 감정을 보였다.누군가는 동정을, 누군가는 아쉬움을, 또 누군가는 짙은 흥미를 보였다.“사연아, 넌 좀 쉬어. 이놈들은 내가 처리할게.”진서준이 앞으로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가 찻집 안으로 들어왔다.남자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상철아, 저놈 다리 하나 부러뜨려서 내던져.”성현도가 진서준을 가리키며 명령했다.“알겠습니다.”상철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진서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서준아, 내가 할게.”허사연의 눈에는 불꽃 같은 전투욕이 타올랐다.“조심해. 저 녀석은 횡련 종사야.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진서준이 조용히 귀띔했다.“알았어. 설령 못 이긴다고 해도 어차피 네가 있잖아?”허사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진서준이 곁에 있는 한, 허사연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이봐, 사내자식이 여자 뒤에 숨는 게 말이 돼?”상철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이봐, 껑충이. 여자를 얕보지 마. 일단 이기고 나서 말해.”허사연이 상철을 도발했다.“아가씨, 그런 기생오라비 말고 날 따르지 그래? 밤마다 널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데?”상철이 음흉하게 웃었다.“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얼굴이 싸늘해진 허사연이 주먹을 날렸다.강렬한 펀치가 공기를 가르며 폭발음을 일으켰고 그 위력은 철판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상철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가만히 서 있어도 넌 날 어쩔 수 없어.”“닥쳐!”허사연이 분노에 차 주먹을 그대로 상철의 얼굴로 내리꽂았다.상철은 일부러 머리를 숙이며 대머리 정수리로 받아냈다.쿵!둔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주먹이 상철의 머리를 강타했으나 대머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사연이 몇 걸음 물러섰다.순간 손에 뜨거운 통증이 밀려왔고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손을 확인하자 하얀 피부였던 손등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상철은 자기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더니 빙그레 웃었다.“아가씨, 이제 내 실력을 알겠지?”그 모습에 허사연의 승부욕이 다시 불타올랐고 콧방귀를 뀌며 다시 달려들었다.이번에는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상철의 머리를 내려찍었다.‘머리가 단단하다고 자랑하
이렇게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싸움 실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완전 여성판 이소룡이었다.“너, 너희들 정말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여기가 어디인지 알기나 해? 어디서 대놓고 싸움질이야?”종업원은 순간 놀란 뒤 분노에 찬 얼굴로 진서준와 허사연을 가리켰다.찻집이 문을 연 이후로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진서준과 허사연이 첫 사례였다.주변의 구경꾼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싸움 좀 하면 뭐해? 여긴 성씨 가문의 구역이야. 성씨 가문에서 한마디만 하면 저 남녀는 오늘 밤중으로 사라지겠지.”“어휴, 저 여자 너무 아까워. 저렇게 예쁜데 왜 죽지 못해서 안달이지?”“여자는 살 수도 있겠지만 남자는 무조건 죽을걸.”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며 이미 진서준과 허사연의 결말을 예상하는 듯했다.“그럼 네 말대로라면 내가 널 때린다 해도 얌전히 맞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허사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종업원에게 다가갔다.“오지 마!”종업원은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다.“어떤 미친놈이 내 구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야?”그 순간, 2층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을 확인하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성현도가 오늘 여기 있었네?”누군가 그 청년을 알아보았다.“저 둘 끝장났네. 성현도는 악명 높은 냉혈한이야.”그 청년은 바로 찻집의 사장인 성현도였다.성현도는 르벨 재벌 2세 사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친구에게는 무조건 의리를 지키지만 적에게는 무자비했다.성현도의 고문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고 게다가 무인으로서 무공 실력도 상당했다.“사장님, 저 남녀가 와서 난동을 부렸어요.”종업원은 성현도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장이 나온 걸 확인한 허사연은 주먹 한 방에 종업원을 기절시켜 버렸다.“뭐야?”성현도의 눈이 가늘어졌고 표정이 험악해졌다.자기 앞에서 대놓고 부하를 때리다니, 이건 너무나도 명백한 도발이었다.“아가씨, 우리 처음 보는 사이 맞지? 우리
그리고 오후 2시가 되자 진서준은 허사연을 데리고 조호가 말한 천국찻집으로 향했다.겉모습만 보면 이 찻집은 진짜 전통찻집 같았고 규모도 꽤 컸다.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1층과 2층까지는 정말 평범한 찻집처럼 꾸며져 있었고 누가 봐도 이상한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하지만 3층으로 올라가려면 회원권이 있어야 하거나 사장이 직접 허락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손님, 아가씨,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진서준과 허사연이 차를 마시러 온 줄 안 종업원이 빠르게 달려와 안내하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 난 하경범을 찾으러 왔거든.”진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종업원이 순간 얼어붙었다.“혹시 하씨 가문의 하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맞아.”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손님은 누구신지...”종업원이 신중하게 물었다.진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냥 복수하러 왔다고 전해.”그놈 아버지라고 하는 건 자기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고 친구라고 하기도 기분이 더러웠다.그 말에 종업원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손님, 여기서 장난치지 마세요.”하경범은 르벨에서 유명한 재벌 2세였다.이 찻집의 사장과도 막역한 사이였고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왜? 못 믿겠어?”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손님, 하 도련님에게 복수하려던 사람은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종업원이 경고하듯 말했다.“그런 농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그 말을 듣자 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이렇게 전해. 그 하경범이 두들겨 맞고 나자빠지게 했던 진서준이 왔으니 당장 기어 나오라고 말이야.”진서준의 뻔뻔한 태도에 종업원은 어이가 없었다.“좋습니다. 손님이 그렇게 죽고 싶다면 제가 기꺼이 도와드리죠.”종업원은 바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문제 발생했습니다. 난동자가 있습니다.”쿵! 쿵!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건장한 남자 스무 명이 들이닥쳤다.전부 검은
진서준과 허사연은 차를 타고 조호의 회사로 향했다.이 회사는 그냥 겉치레일 뿐, 진짜 돈이 들어오는 곳은 유흥업소들이었다.유흥업소를 얕잡아보면 안 된다.운 좋게 돈 많은 도련님들이라도 걸리면 하룻밤에 수억 원이 순식간에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진서준 씨!”진서준이 들어서자 조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조호는 진서준 옆에 있는 허사연을 힐끗 쳐다본 뒤 고개를 숙이고 감히 더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잡담은 그만하고 하경범을 잡아가는 제일 좋은 타이밍만 말해.”진서준이 직설적으로 물었다.이 말에 조호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매일 오후마다 하경범은 천국찻집이라는 곳에 갑니다.”조호는 재빨리 대답했다.“보통은 경호원 몇 명만 데리고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얼씨구? 저런 인간이 매일 차나 마시러 간다고?”진서준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그게... 진서준 씨, 사실 그곳은 이름만 찻집이지 실제로는...”조호는 옆에 여성이 있다는 걸 의식해서 말을 흐렸지만 진서준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아챘다.“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그냥 인기 많은 인터넷 셀럽이 가득한 고급 유흥업소일 것이다.“진서준 씨, 듣자 하니 그 찻집의 주인은 성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짜로 움직이실 거라면 하경범이 이동 중일 때를 노리는 게 좋을 겁니다.”조호가 조심스럽게 조언했다.“응? 성씨 가문이 이런 사업도 해?”진서준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진서준은 오영수에게서 성미영에 대한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정의로운 성격의 성미영이 자기 가문에서 이런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네, 듣기로는 성씨 가문의 한 직계 후손이 운영한다고 합니다. 여자에 미쳐 있는 놈이라 르벨의 돈 많은 도련님들과 꽤 친분이 깊다고 하더군요.”조호는 본인이 아는 정보를 전부 쏟아냈다.“좋아, 대충 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조호의 회사를 나온
진서준이 허사연의 캐리어를 들어주며 옆방으로 걸어갔다.그 뒷모습을 보며 도지아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인간은 원래 모여서 사는 걸 선호하는 동물이다.사회를 벗어나서 혼자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가족도 친구도 없이 너무 오래 지내다 보면 결국 감정 없는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그렇게 되면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없어질 것이다.“어제 전화할 때 그랬었지? 이번에 너 자기 출신을 찾으러 온 거라고.”호텔 방으로 돌아온 후, 허사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너 원래 경성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예전에 말해주셨어. 사실 우리 아버지는 어릴 때 길에서 주워 온 아이였다고.”진서준은 허사연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허사연은 진서준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허사연이라면 이 비밀을 절대 밖으로 흘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뭐라고? 아버님이 주워 온 아이라고?”허사연이 깜짝 놀랐다.“그래.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건 나뿐이야. 가족 중에서도 할아버지가 나한테만 알려주셨지.”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 오영수가 내 등에 있는 용을 보고는 내가 용맥의 일족이라고 했어. 그래서 오영수를 따라 여기 와서 오영수 셋째 삼촌에게 내 출신에 관해 알아보려 했던 거야.”“네 등에 용이 있다고?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허사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둘이 알몸으로 함께한 시간도 적지 않은데 허사연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내가 체내 혈기를 모을 때만 그 용이 나타나거든.”진서준이 설명을 이어갔다.“그런데 오영수 삼촌이 아직 돌아오질 않아서 일단은 여기서 며칠 기다려야 해.”“아니, 그럼 오씨 가문에서 널 안 재워줬어?”허사연이 의아해했다.명문대가인 오씨 가문에 빈방이 없을 리가 없었다.“그날 오영수를 찾아갔는데 마침 오영수 할아버지가 위중했어. 그리고 그 집안엔 그 어르신을 그냥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지.”진서준이 담담하게
“진짜 예쁜 새색시 숨겨놓고 있었네?”허사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누구라도 자기 남자 방에 예쁘고 몸매가 완벽한 여자 하나가 같이 있는 걸 보면 의심 안 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지금은 아침이었다.설마 이 여자가 아침에 막 찾아온 건 아니겠지?“사연아, 오해야. 내가 제대로 설명할게.”진서준은 머리가 띵해졌고 뇌가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아가씨, 오해하지 마세요. 어제 저랑 진서준이 같은 방에서 잔 건 맞지만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 밤새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도지아가 황급히 해명에 나섰다.“네? 밤새 안 자고도 아무 일 없었다고요?”허사연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설마 밤새 불태우느라 못 잔 건 아니겠죠?”허사연의 농담과 진담이 뒤섞인 말에 진서준은 헛웃음만 나왔다.“사연아, 이쪽은 도지아야. 우리 진짜 그냥 친구야. 일단 들어와. 천천히 설명할게.”허사연이 방에 들어오자 진서준은 서로에게 소개했다.그러고는 이 방에서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다.“도지아는 황예은이 소개해 준 환자야. 다리 치료를 부탁받았거든. 종아리를 봐봐. 이틀 전에 내가 직접 발라준 연고가 있어.”허사연이 내려다보자 확실히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그리고 도지아가 밤새 안 잔 건 원기를 수련하느라 그랬던 거야. 너도 예전에 수련한다고 며칠씩 안 잔 적 있잖아?”허사연은 오해가 풀리자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내가 뭐 어쨌다고 그렇게 호들갑이야?”“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그러는 거잖아.”진서준이 빠르게 대답했다.“뭐야? 내가 그렇게 의심 많고 질투 많은 여자로 보여?”허사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아, 아니지. 우리 사연은 누구보다 속이 넓은 부드러운 여자지.”진서준이 급히 정정했다.“됐어, 너 겁먹은 거 너무 귀엽다.”허사연이 피식 웃었다.“넌 여기 좀 쉬고 있어. 내가 방 하나 잡고 올게.”진서준은 더 머뭇거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진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허사연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도지아 씨, 진서준이
“내가 가면 안 돼?”사실 진서준은 거절하려 했었다.르벨은 안개가 짙게 깔린 늪지대 같은 곳이라 진서준조차도 어디에 함정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그러니 허사연이 온다면 다칠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거절하면 허사연이 상처받을 게 뻔했다.“당연히 되지. 지금 위치 보낼게.”진서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위치를 보냈다.자기 여자를 지킬 자신도 없으면서 강자들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기야, 잘 자.”허사연이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일찍 자.”진서준이 다정하게 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진서준의 졸음이 싹 가셨다.진서준은 창가로 다가가 이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봤다.“오씨 가문, 안씨 가문, 하씨 가문... 너희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난 전부 박살 낼 거야. 이번엔 반드시 나와 아버지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겠어.”진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진서준이 막 눈을 뜨자마자 도지아의 흥분한 외침이 들려왔다.“진서준, 됐어. 나 생겼어!”도지아는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는데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게 분명했다.진서준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너 아직 처녀 아니었어? 대체 어떻게 임신한 거야?”“미친놈아, 임신은 개뿔, 무슨 헛소리야?”도지아는 얼굴이 빨개지며 진서준을 노려봤다.“그럼 왜 아침부터 난리야?”진서준이 되물었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침부터 흥분해 날뛰지 않을 것이다.“어제 네가 준 수련법 기억나지? 나 벌써 원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됐어.”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긴 도지아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고작 하룻밤 만에 원기를 형성한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뭐? 그렇게 빠르다고? 너 타고난 천재 맞네?”진서준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보통 무인은 원기를 익히는 데만 최소 1년이 걸리는데 그것도 매일 꾸준히 수련할 경우에만 발생하는 일이었다.심지어 재능 있는 자들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린다.그런데 도지아는 단 하룻밤에 이 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