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문채연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입술을 깨물더니 다급하게 물었다.“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민여진 씨 괜찮아요? 어떻게 그런 일로 뛰어내리려고...”“구했어.”“다행이네요...”문채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가 뭔가 생각난 듯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박진성을 바라보았다.“진성 씨, 그런데 왜 저한테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제가 어제 어디에 갔었는지까지 묻고... 설마 제가 민여진 씨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줬다고 의심하는 거예요?”박진성은 침묵하자 문채연의 눈이 순식간에 붉어졌다.“민여진 씨가 그랬어요? 제가 말했다고요?”“아니야.”박진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스럽게 말했다.“그냥 물어본 것뿐이야.”문채연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민여진 편들지 마세요. 민여진이 먼저 말하지 않았으면 저를 의심했겠어요? 그리고 진성 씨, 저 정말 서운해요. 어떻게 제가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 강아지 때문인가요?”“맞아요! 인정해요! 그 가정부가 한 짓, 반은 내가 시킨 거예요. 하지만 그 개가 그렇게 죽을 줄은 몰랐어요. 그리고 설사 내가 시켰다고 해도 그게 잘못된 거예요? 민여진이 날 모함해서 죽을 뻔하게 만들었고 내 다리도 망가뜨렸어요. 그런데 이제 당신까지 뺏어가려고 하는데! 내가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돼요? 당신을 그 여자한테 순순히 넘겨야 하냐고요!”문채연은 흐느끼며 서럽게 울었다.억울하게 우는 그녀를 보며 박진성의 눈살이 찌푸려졌다.“채연아...”“아란아, 어제 내가 쓴 영수증들 다 가져와!”문채연은 눈물을 닦으며 지시했다. 가정부가 영수증을 가져오자 문채연은 그것을 박진성에게 건넸다.“이게 어제 오전부터 오후까지 쓴 영수증들이에요. 시간이 다 나와 있으니까 확인해 보세요. 내가 있던 곳에서 당신 별장까지는 차로 왕복 두 시간이 걸려요. 내가 별장에 갔었는지 이 영수증들이 증명해 줄 거예요.”박진성은 영수증을 들고 있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문채연은 더 이상 그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 위층으
그런데도 민여진은 악랄한 본성을 버리지 못했다. 자신도 바보 같았다. 그 말을 듣고 문채연을 의심하다니.박진성은 차가운 얼굴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때 옆으로 한 여자가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걸었다.“저기, 혼자예요?”“꺼져.”박진성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잘생기면 다야...”그 말에 여자는 머쓱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자리를 떴다.시간이 늦어지자 상우가 다가와 물었다.“대표님, 이제 그만 가시죠?”“어딜 가?”박진성은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와서 같이 마셔.”상우는 박진성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챘다. 이렇게 술을 마시는 날이면 항상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상우는 정중하게 거절했다.“저는 운전해야 합니다.”박진성은 억지로 권하지 않고 술을 더욱 맹렬하게 마셨다. 몇 병을 비우자 그의 얼굴색이 변하고 눈빛이 흐려졌다.상우는 재빨리 계산하고 박진성을 부축해 차에 태웠다.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그는 박진성을 거실 소파에 앉히고 물었다.“대표님, 물 좀 드릴까요?”박진성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를 바라보다가 숨을 몰아쉬고는 2층에 있는 민여진의 방을 바라보았다.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그는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예전에는 그가 술에 취하면 그녀는 누구보다 먼저 걱정하며 자신을 돌봐 주었는데 이제는 얼굴조차 비추지 않다니.“민여진, 당장 내려오라고 해!”상우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2층으로 올라가 민여진의 방문을 두드렸다.한참 후, 안에서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들리더니 민여진이 헝클어진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피곤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무슨 일이에요?”상우가 대답했다.“대표님이 오늘 좀 많이 취하셨습니다.”민여진은 술 냄새를 맡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우가 왜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상우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대표님께서 민여진 씨가 내려와서 돌봐 드리길 바라십니다.”민여진은 놀란 눈으로 상우를 바라보았다. 상우 역시 어이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박진성은 차가운 눈으로 민여진을 쏘아보며 말했다.“이제 남이 시켜야 움직인다 이거야? 민여진, 넌 나한테 부탁할 일이 있잖아. 내 비위를 맞추는 게 네가 지금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아니겠어?”그의 원망 섞인 말에 민여진은 잠시 말을 멈췄다.“뭘 어떻게 하라는 건데?”“나한테 묻는 거야? 내가 술 마셨을 때 네가 어떻게 했었는지 기억 안 나?”민여진은 그제야 그의 의도를 파악했다. 심호흡을 한 뒤 손을 뻗어 박진성의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그리고 그의 턱선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 넥타이를 풀었다.셔츠 단추를 몇 개 푸니 박진성의 숨소리가 조금은 편안해졌다. 민여진은 더 가까이 다가가 그의 관자놀이를 살살 눌러 주었다. 술 마셔서 머리 아플 테니 조금이라도 풀어주려는 마음이었다.그러나 박진성은 평소처럼 눈을 감지 않았다. 그는 눈을 뜨고 무표정한 민여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 “얼굴에 마음이 드러난다는 말, 예전엔 안 믿었는데 이젠 네 얼굴을 보면 딱 알겠어.”민여진의 손길이 멈칫했다. 박진성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네 말을 믿고 채연이를 의심했지. 직접 찾아가서 물어보고 조사까지 했어. 넌 입만 열면 거짓말인데 내가 또 속아 넘어가다니, 내가 미친놈이지.”그는 민여진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의 손을 잡고 거칠게 물었다. “대체 뭘 믿고 그러는 거야?”아마도 너무 아파서였을까. 민여진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한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무슨 소리야? 조사 다 했어?”“그날 채연이가 백화점에 있었던 CCTV 영상까지 확인했어. 그래도 부족해?”박진성이 손에 힘을 주는 순간, 민여진은 그대로 무너져 그의 품에 떨어졌다. 그는 그녀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고 핏발 선 눈으로 쏘아붙였다.“채연이는 그렇게 멀리에 있었는데도 넌 누명을 뒤집어씌웠잖아! 네 마음이 얼마나 악독하면 그래? 채연이가 얼마나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날 봤는지 알아?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군. 내가 널 믿고 채
“난 할 말 없어.”민여진은 입술 끝을 억지로 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할 말이 없는 거야, 아니면 들통나서 더 이상 거짓말을 못 하겠는 거야?”박진성은 다시 물었다.“말해. 그날 누가 민영미가 죽었다고 말했어?”문채연이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CCTV를 피해서 민여진을 만났다는 건, 분명 그녀의 마음을 흔들려는 의도였다...박진성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민여진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방현수지? 그 자식이 돌아왔어? 일부러 문제를 일으키려고!”“무슨 소리야?”민여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현수 씨랑 무슨 상관인데?”“방현수가 아니라면 네가 왜 그렇게 숨기려 들었겠어? 채연을 모함하면서도 그 사람의 행방은 끝까지 감추려 했겠냐고!”박진성은 점점 더 확신했다. 다른 도시에 있다고 해도 방현수가 몰래 돌아왔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는 민여진이 절망에 빠지고 우리 사이가 망가지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래야 자신이 다시 민여진을 차지할 수 있을 테니까.“방현수가 널 만나러 왔지? 너희 둘이 무슨 짓을 했어?”박진성은 술김에 탁자 위에 민여진을 밀어붙이고 그 나름의 처벌을 가했다.다음 날 아침, 민여진은 소파에서 눈을 떴다. 몸에는 담요가 덮여 있었지만 온몸이 차가웠다.어젯밤 일을 떠올리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박진성은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모든 것을 방현수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민여진 씨, 일어나셨어요? 아침 식사가 다 식었는데 데워 드릴까요?”서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아침부터 거실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민여진은 몸에 덮인 담요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이거 서원 씨가 덮어 준 거예요?”“네.”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별말씀을요. 신경 쓰지 마세요.”서원은 주방으로 향했다. 민여진은 자신의 옷을 만지작거렸다. 그나마 박진성에게 고마워해야 했다. 적어도 옷매무새는 단정하게 해 줘서 서원 앞에서 망신당하지는 않았으니까.물론 이미 숱하게 망신을 당했지만
민여진은 초점 없는 눈으로 경찰을 바라보았다. 놀라움과 기쁨이 교차했다. 경찰이 직접 찾아와서 어머니의 이름을 언급하다니. 설마 박진성이 보낸 사람들인가? 드디어 어머니를 만나게 해 주려는 걸까? 민여진의 얼굴에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며 물었다.“경찰이시라고요? 우리 어머니도 온 거예요? 어디 계세요?”“민여진 씨!”서원의 얼굴빛이 변했고 민여진의 어깨를 움켜쥔 손이 무의식적으로 떨렸다. 그는 힘을 주어 그녀를 뒤로 밀어내며 말했다.“들어가세요!”민여진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반쯤 굳어지더니 고집스럽게 자리를 지키며 말했다.“왜 그래요? 서원 씨, 간만에 엄마 소식을 들었는데... 이렇게 좋은 일인데 왜 절 들어가라는 거예요?”서원도 왜 그런지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왠지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특히 민영미 사건 때문이었다. 민여진이 그녀 때문에 투신한 지 사흘도 안 돼서 갑자기 경찰이 찾아왔으니 말이다.그는 불안한 목소리를 감추려는 듯 작게 말했다.“민여진 씨, 이상하지 않아요? 경찰이 어떻게 여길 알고 왔을까요? 당신 주소도 모를 텐데. 혹시 가짜 경찰일 수도 있어요.”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경찰은 그 말을 똑똑히 듣고는 미간을 찌푸렸다.“친구,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 난 경찰증도 있고 내 경찰 번호 조회해 봐도 돼. 유품 전달하러 온 건데 굳이 가짜 경찰 행세를 할 이유가 없잖아.”민여진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머릿속이 텅 비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는 멍하니 입을 열었다.“유품이요? 무슨 유품인가요?”경찰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모르고 계셨어요? 당연히 민영미의 유품이죠.”순간 민여진은 마치 목이 조여 오는 것처럼 숨이 막혔고 온몸이 점점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마치 지하실로 떨어지는 듯한 한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뭐라고요?”민여진은 목소리를 떨며 현관문으로 달려갔다.“뭐라고 했어요! 누구 유품이라고요!”서원의 얼굴도 순식간에 하
서원은 바닥에 떨어진 편지를 주웠다. 인장 아래 적힌 ‘민영미'라는 이름에 그의 숨이 턱 막혔다.편지는 오래된 것처럼 보였고 위조된 것 같지도 않았다. 정말 민영미가 살아생전에 남긴 편지인 것 같았다.그는 앞쪽에 서 있는 민여진을 바라보았다. 경찰이 떠난 후, 그녀는 철문에 매달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벗겨진 외투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앙상하게 마른 등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민여진 씨...”서원은 불안한 마음에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그러자 민여진은 철문에서 미끄러지듯 주저앉아 초점을 잃은 붉은 눈으로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거짓말... 분명 거짓말이야! 우리 엄마는 아직 살아 있잖아. 나를 보고 싶어 하는 녹음도 들었는데... 그런 사람이 일 년 전에 투신자살했다니 말도 안 돼. 이건 분명 문채연의 음모야!”서원은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민여진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생각하기도 전에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이미 답을 내렸다.“분명해. 그 경찰은 가짜였어! 나랑 박진성을 이간질하려는 거야. 난 그의 수작에 넘어갈 순 없지. 내가 정말 박진성을 화나게 하면 어머니를 못 만나게 할지도 모르잖아. 서원 씨, 내 말 맞죠?”서원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붉어진 민여진의 눈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민여진은 이미 마음속으로 답을 정해놓은 게 아닐까?’그녀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그것 말고는 다른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편지...”민여진은 갑자기 바닥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편지 어디 있어요?”서원은 민여진의 행동을 제지하고 직접 편지를 건넸다. 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어디 봐봐요. 이 편지 위조된 건지 아닌지...”그녀는 편지를 들고 방으로 돌아갔다. 방에 들어가 먼지 묻은 손을 수건으로 닦고 나서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만졌다. 편지에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아니,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오랫동안 햇빛도 못 보는 곳에 다른 물건들과 함께 쌓여
박진성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말하려는데 민여진이 다시 말했다.“근데 난 그 사람이 가짜 경찰이라는 걸 알아. 오늘 갑자기 뜬금없이 이 별장으로 찾아온 것도 그렇고 하는 말도 그저께 그 사람과 똑같았거든.”“뭐라고?”박진성의 목소리에 경계심이 가득했다.“무슨 말을 했는데?”“어머니가 1년 전에 투신자살로 돌아가셨다고 했어.”민여진의 말에 박진성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그놈들은 다 헛소리하는 거야!”“어. 알아.”민여진이 말했다.“난 믿어. 당신이 날 속이지 않을 거라는 걸.”박진성은 다시 오랫동안 침묵에 잠겼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그가 물었다.“탁자 위에 있는 편지는 뭐지?”그는 급히 오느라 서원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민여진은 잠시 멈칫하더니 대답했다. “편지인데 별거 아니야.”난데없이 나타난 편지를 두고 민여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박진성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그는 다가가 편지를 집어 들었다. 겉면을 훑어보는 순간 민영미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이게 뭐지? 왜 민영미 씨 이름이 적혀 있는 거야?”민여진의 표정이 굳어졌다.“그 가짜 경찰이 만든 가짜 편지예요. 어머니가 투신자살한 후에 남겨진 유품이라고 했어요. 아무도 가져가지 않은 거라고.”“무슨 유품! 다 미친놈들이야!”박진성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그는 이 일을 벌인 놈들을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문득 그는 편지를 갈기갈기 찢으며 소리쳤다.“가짜야! 다 가짜라고!”민여진은 편지가 찢어지는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곧 정신을 차리고 박진성에게 달려들었다.“찢지 마! 박진성! 제발, 찢지 마!”박진성은 냉정한 표정으로 편지 봉투를 허공에 흩뿌리며 조각냈다.“뭘 그렇게 안달이야? 다 가짜인데. 그런 거 원하면 얼마든지 만들어 줄 수 있어. 그런 걸 갖고 있어 봐야 의심만 더 깊어질 뿐이야.”그는 민영미의 유품이나 편지에 대한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그런 것들은 모두 민영미의 옛 지인들이 가져갔다.민여
편지에는 민여진을 향한 축복의 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간략하게 언급했는데 마지막 편지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박진성은 가슴이 꽉 막히는 듯했다. 이렇게 의미 있는 편지를 자신의 손으로 찢어버리다니. 민여진이 알게 된다면 미쳐버릴지도 몰랐다.그는 복원 전문가에게 연락해 편지를 원래대로 복구해 달라고 부탁했다.민여진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닥에 엎드려 종이 조각들을 찾았다. 하지만 허공에 흩뿌려졌던 종이 조각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절망감이 밀려왔다.“민여진 씨, 뭘 찾아요?”서원이 묻자 민여진은 다급하게 말했다.“서원 씨, 바닥에 종이 조각 있는지 좀 봐주세요.”“없어요.”서원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뭐 잃어버렸어요? 찾아드릴까요?”민여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괜찮아요. 중요한 거 아니니까.”서원은 이상하게 여겼지만 민여진이 더 이상 묻지 않자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 후 며칠 동안 박진성은 오로지 편지 복원에만 몰두했다.똑같은 복사본을 만드는 건 쉬웠지만 완전히 똑같이 만들려면 시간이 걸렸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박 대표님, 찾았습니다. 지금 회사 아래에 있습니다. 올려보낼까요?”박진성의 눈에 파문이 일었고 턱에 힘이 들어갔다. 순간 서류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당장 올려보내!”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함께 사무실 문이 열렸다. 상우가 수수한 옷차림의 중년 여성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전혀 본 적 없는 낯선 사람이었다.상우가 말했다.“대표님께서 말씀하신 조건에 모두 부합하는 사람입니다.”박진성은 여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외모는 특별할 것 없었다. 중요한 건 목소리였다. 그는 말했다.“말해 보세요.”중년 여성은 잔뜩 긴장한 채, 앞에 선 남자의 강렬한 기세에 눌려 겨우 입을 열었다.“박... 박 대표님 안녕하세요...”그 어투와 목소리가 어우러지는 순간, 박진성의 잘생긴 얼굴에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망설이던 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현준 오빠, 임재윤은 좋은 사람이에요. 저는 그를 한번 믿어보고 싶어요. 임재윤이 저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진짜 신분이 뭐든 상관없어요.”조현준은 할 말을 잃은 듯 한참 후에야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여진아,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길 바란다.”‘이 결정을 왜 후회할 거로 생각하는 거지?’민여진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혔지만, 조현준은 이미 전화를 끊은 후였다.그녀는 이 복잡한 감정이 조현준의 배려를 거절한 데서 오는 미안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침대에 앉아 멍하니 있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민여진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누구세요?”“민여진 씨, 저예요!”‘진시우?’흥분한 그의 목소리에 민여진은 당황하며 문을 열었다.“무슨 일이에요?”“임재윤한테 문제가 생겼대요. 지금 수술실로 들어갔다니까 우리 빨리 병원으로 가요.”민여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앞을 볼 수 있는 상황이었어도 눈앞이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허둥지둥 탁자 위에 걸쳐둔 코트를 더듬어 입으며 물었다.“우리가 병원에서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잖아요. 갑자기 어떻게 된 거예요?”평소 유머러스하던 진시우의 목소리에도 긴장감에 섞여 있었다.“저도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임재윤의 병은 원래 갑작스러운 상황이 올 수도 있는 병이었어요. 병원에서는 지금 수술 중이라고만 알려줘서 일단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요.”걸어서 갈 여유가 없던 두 사람은 즉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 복도에 도착하자, 임재윤은 아직 수술 중이었다.진시우는 민여진을 자리에 앉히고 의사를 찾아갔다. 막막함과 불안함에 민여진은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수술실 앞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민여진은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 이상 없어 보이던 사람이 왜 갑자기 위중한 상태로 수술실까지 들어간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순간 손끝에서 차가움이 느껴지더니
민여진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배가 조금 고파서 호텔 레스토랑에서 뭐라도 먹어야겠어요.”진시우는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여진이 문 앞까지 걸어갔을 때, 뒤에서 휴대전화 소리가 전해졌다.“여진아, 얘기 좀 할까?”민여진은 깜짝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무슨 얘기?”임재윤은 눈썹을 찌푸리며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네가 알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알고 싶은 게 없는데?”민여진은 자기 말이 너무 차갑게 들릴 것 같아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재윤아, 뭐 좀 먹으러 가는 거야. 곧 돌아올게. 그때 다시 얘기하자. 알았지?”임재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실을 나섰다.진시우는 무슨 재미있는 장면이라도 본 듯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없는 사이에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네요.”“별일 아니었어요. 그냥 대화를 조금 나눈 것뿐이에요.”민여진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말했다.“어서 가죠.”호텔 방으로 돌아오자, 서비스로 음식이 직접 배달되어 민여진은 레스토랑까지 내려갈 필요도 없었다. 진시우가 미리 말해둔 모양이었다.그녀는 조금씩 음식을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화벨이 여러 번 울린 후였다. 급히 받아 들자, 조현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바빠?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아니요. 휴대전화를 멀리 두고 다른 테이블에서 밥을 먹고 있었어요.”“그랬구나.”조현준은 잠시 침묵하더니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여진아, 그 일은 확인했어?”“무슨 일이요?”잠시 멈칫하던 민여진은 이내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고 말을 이었다. 임재윤의 신분에 관한 이야기였다.“네. 확인했어요. 임재윤은 원래 진씨 가문 운전기사의 아들이었대요. 선천성 심장병에 말도 못 하니까 자주 외출하지 못했던 거고, 나중에 치료를 위해 아버지와 함께 독엔에 갔대요. 아마 그래서 현준 오빠가 못 찾았나 봐요.”조현준은 긴 침묵 끝에 다시 물었다.“너는 그 말을 얼마나 믿어?”모든 걸
임재윤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민여진은 느낄 수 있었다. 평소 감정 기복이 거의 없던 임재윤이 여자 친구라는 말이 나오기 바쁘게 마치 다른 사람처럼 분위가 달라졌다.그 여자는 임재윤의 기분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마음속에 중요한 존재인 것 같았다.민여진이 화제를 바꾸려는데 임재윤이 다시 물었다.“정말 궁금해?”“아니.”민여진은 얼른 부인했다. 처음엔 그냥 할 말이 없어서 꺼냈던 말이었고 더불어 임재윤이 왜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에 민여진은 자신이 선을 넘었음을 알아차렸다.임재윤은 민여진한테 다가가려다 멈춰서더니 고개를 숙이고 타자를 했다.“미안해. 많이 놀랐어? 나는 그냥 과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괜찮아.”민여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남이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함부로 꺼내는 걸 싫어하는 건 당연한 거야. 오히려 선은 내가 넘었으니까 사과해도 내가 해야지.”임재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더니, 오랜 침묵 끝에 타자했다.“넌 남이 아니야.”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그래. 알았어. 너무 신경 쓰지 마. 누구나 털어놓기 싫은 비밀과 건드리면 안 되는 선이 있는 법이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네 선을 알았으니까 두 번 다시 넘지 않을게.”그녀는 급히 소파에서 일어났다.“배 안고파? 간호사에게 음식을 언제 가져오는지 물어볼게. 금방 돌아올 테니까 잠깐만 있어.”병실 문을 나서는 민여진의 표정은 왠지 어두워 보였다. 정확한 이유가 뭔지도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고 복잡했다.어쩌면 처음 느껴보는 임재윤의 냉담함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여자가 임재윤의 아픔이었다는 진시우의 말 때문일 수도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여자는 임재윤의 마음속에 중요한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그럼... 나는 뭐지?’난데없이 튀어나온 생각에 민여진은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더니 마음을 다잡으며 중얼
임재윤은 민여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냥 내가 아프기 때문이야? 만약 너 때문에 아픈 게 아니었다면, 아예 나를 보러 오지도 않았을 거야?”민여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조용히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여진아, 인제 그만 돌아가. 진시우더러 돌아갈 차를 준비해달라고 할게. 지금쯤이면 안진 마을까지 가는 길도 뚫렸을 거야. 이모 집에서 편하게 지내. 병원에는 그만 오고.”“싫어.”민여진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임재윤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민여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혼자 병실에 있으면 심심할 거 아니야. 게다가 수술 후 회복 기간도 긴데, 내가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주면 좋잖아.”민여진의 말에 임재윤은 천천히 타자했다.“괜찮아. 나는 늘 혼자였어. 이젠 익숙해.”늘 혼자였다는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문득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감옥에서, 박진성의 별장에서, 도망치던 차 안에서조차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고독을 즐기려고 노력했지만 항상 두려웠고, 언제라도 사라질지 모를 관심에 더욱 불안해했다.‘임재윤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고백할 때 우리가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고 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수술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지금 돌아가도 신경 쓰여서 편하게 못 있어. 어쨌든 네가 아픈 건 나와 연관되어 있잖아. 무엇보다 지금은 네 곁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민여진을 빤히 응시하던 임재윤은 그녀의 걱정과 고집에 표정이 차츰 누그러졌다.“여진아, 너 이렇게 착하면 누군가한테 이용만 당할 거야.”민여진이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넌 나를 이용할 거야?”임재윤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답했다.“그럴 수도 있지.”예상치 못한 대답에 멈칫하던 민여진은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때 휴대전화의 기계음이 다시 울려 퍼졌다.“나는 지금도 널 이용하고 있잖아. 내가 아픈 건 순전히 내 문제인데도 네 착한 마음을
‘마음속에 아직도 박진성이 있냐고?’민여진은 단지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박진성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고 싶었다.진시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비로소 웃으며 말을 꺼냈다.“다행이네요. 난 임재윤이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는 여자와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여진 씨가 박진성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임재윤과 잘 시작해 봐요.”다시 임재윤의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은 표정이 달라졌다.“저와 임재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어떤 사이인지 여진 씨가 저보다 더 잘 알겠죠.”진시우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여진 씨가 임재윤의 신분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도 알아요. 이해해요. 박진성 일 이후로 경계심을 갖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여진 씨도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임재윤은 절대 여진 씨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임재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민여진 씨가 아직도 경계를 못 풀겠다면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인데.”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뒤, 민여진을 위해 마스크와 모자를 사러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은 진시우의 말이 계속 맴돌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박진성은 차갑고 독단적이며,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타인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임재윤은 부드럽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민여진을 먼저 배려해 줬고, 아픈 몸으로도 민여진이 추울까 옷까지 벗어주는 사람이었다.성향이 이렇게나 상반된 두 사람인데, 왜 민여진은 자꾸만 임재윤이 박진성이라는 착각을 하고 의심하는 건지 본인조차 이해되지 않았다.‘나 왜 이러지? 박진성이 같은 병원에 있다는 말만 듣고 이렇게 의심하다니.’민여진은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 물건을 사
진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민여진 씨를 위해 싫어하는 걸 참고 먹다니,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양이네요.”예전이었다면 진시우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민여진은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제를 돌렸다.“진시우 씨, 임재윤하고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죠?”“네?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요.”진시우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재윤이가 한동안 독엔에 가 있어서 떨어져 지내다가 나중에야 다시 연락이 닿은 거예요. 왜요?”“궁금해서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별로 없었나요? 아니면...”아니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진시우는 웃으며 말했다.“오해하고 있네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임재윤을 좋아하는 여자도 적지 않았어요. 요즘 여자들은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남자를 좋아하잖아요. 임재윤은 말이 없으니까 딱 그런 이미지였고 성격도 세심하기까지 해서 더 인기가 많았죠.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진시우는 이 주제가 적절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 급하게 화제를 바꾸었다.“어쨌든 외로워서 민여진 씨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에요. 임재윤은 진심으로 민여진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하지만 민여진은 다른 말이 더 궁금했다.“임재윤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요.”“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어요?”진시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진 씨, 제가 이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요? 궁금하면 임재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친구의 아픈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요.”‘아픈 기억? 임재윤의 전 여자 친구는 그에게 아픔으로 남은 건가?’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민여진은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식사를 마치고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길을 가던 중, 민여진은 어제 박진성을 우연히 마주친 일이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진시우 씨, 돈을 좀 빌려주실래요? 모자랑 마스크를 사려고요.
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지만, 임재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너를 좋아해. 첫눈에 반했어.”임재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사실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면 엊그제쯤에 이미 말했을 거야. 그때 너랑 만나자고 약속했던 이유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할 생각이었거든.”“나를 왜?”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임재윤이 나를 좋아한다고? 어떻게? 이게 말이 돼?’“왜라니?”임재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여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건 지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야. 아마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겠지?”민여진은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는 심장에 호흡이 거칠어졌다.‘임재윤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잖아.’“이런 내 모습에 반했다고? 너 같은 조건이면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외모만으로 첫눈에 반했다면, 그건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모욕하는 거야.”임재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타자를 이었다.“널 처음 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어. 어쩌면 우린 같은 종류의 사람이겠구나. 교회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너를 지켜봤거든.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네 모습이 좋았고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네가 예뻐 보였어.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시선은 온통 너한테 가 있더라. 여진아, 만약 네가 앞이 안 보이고 내가 말을 못하는 게 하늘이 정해준 거라면, 하늘은 아마도 나를 네 눈이 되게 하고 너를 내 목소리가 되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우린 아마 천생연분일지도 몰라.”차가운 기계음이 내뱉은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뜨겁게 전해져 민여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임재윤, 농담하지 마.”임재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민여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 앞에 다가갔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넌 안 피곤해?”“아까 푹 쉬어서 괜찮아.”임재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고는 간단히 알겠다고 답한 뒤 침대에 누웠다.이어서 민여진은 불을 껐고 깊은 밤이 되자,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민여진은 임재윤의 호흡이 평온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방 안은 캄캄했지만, 그녀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지라 호흡소리만으로도 임재윤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은 민여진은 임재윤한테 다가가 조용히 손을 뻗어 손끝으로 천천히 그의 눈썹과 눈을 쓰다듬었다.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만져봤다. 넓은 이마, 높고 곧은 코.민여진이 눈을 뜬 채 손가락을 입술 근처까지 가져가려던 찰나 임재윤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어둠 속에서 민여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재윤의 시선이 느껴졌다.손에 힘을 주던 임재윤은 민여진임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힘을 풀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뭐 하는 거야?]민여진은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임재윤, 너 도대체 누구야?”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임재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물었다.“여진아,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민여진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마음을 다잡으며 차분하게 말했다.“현준 오빠가 지금 동진에 있어. 오빠한테 너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었거든. 그런데 동진에는 임재윤이라는 사람이 없대. 그러니까 너 대체 누구냐고.”임재윤은 한참 침묵하다 다시 타자를 했다.“조현준의 말은 믿으면서 나는 안 믿는구나.”“너를 어떻게 믿어?”민여진은 혼란스러웠다.“임재윤,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신분이 뭔지, 집은 어디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나 같은 여자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