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1292화 시윤의 방

임신한 지 한 달이 지난 데다 봄이 되자 시윤은 시도 때도 없이 졸았고, 매일 눈을 뜰 때면 오후가 훌쩍 넘곤 했다.

오늘도 잠에서 깬 시윤은 기지개를 켜려고 고개를 들다가 저를 안고 있는 도준을 발견했다.

요즘 들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고 저녁 늦게 잠자던 도준은 오늘 보기 드물게 시윤과 함께 낮잠을 잤다.

시윤은 도준을 배려하느라 깨어났음에도 움직이지 않고 얌전하게 도준의 품에 안겨 있었다.

햇빛을 적당하게 막아준 커튼에서 눈을 뗀 시윤은 벽에 붙은 빛바랜 포스터, 유백색 옷장, 그리고 어릴 때 숙제를 하던 책상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시윤의 방은 아직도 어릴 적에 사용하던 그대로 소녀소녀한 핑크빛 감성이 묻어 있었다. 흰색과 연분홍색이 어우러져 있는 데다 카펫까지 폭신폭신했다.

그 때문인지 침대에 멀대 같은 남자가 누워있자 위화감이 들었다

학창 시절 잠 못 드는 밤마다 침대에 누워 미래에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훌륭한 발레리노가 될 수 있을지 상상하곤 했었는데.

게다가 앞으로 어떤 남자를 만날지도 가끔 상상했다.

키 크고 잘생긴 남자? 유머러스하고 매력적인 남자? 아니면 평범하고 착해 함께 고난을 이겨내고 평범한 행복을 좇을 수 있는 남자?

학창 시절에는 가장 큰 적이 숙제와 쌤이라서 몇 년 뒤에 제 삶에 이렇게 큰 변화가 올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데 그동안 본적 없는 어두운 나날을 보냈고, 평생 상상한 적도 없는 남자를 만났다.

시윤은 고개를 들어 어둠 속에서 날렵한 턱선과 조각 같은 이목구비를 자랑하는 남자를 바라봤다. 깊은 아이홀에 그림자가 드리워 처음 봤을 때처럼 매혹적이었다.

처음 몸을 섞었을 때 그토록 무섭던 남자가 지금 제가 어릴 때부터 자라온 곳에 누어 있고, 배 속에 그 남자의 아이까지 품고 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시윤은 말없이 제 배를 어루만졌다. 아이가 생겼다는 것이 기대되는 한편 조금 미묘한 느낌도 들었다. 마치 이제야 인생의 종점에 다다른 것처럼.

아버지의 일을 겪은 뒤로 시윤은 줄곧 떠돌아다녔다. 아무리 고
잠긴 챕터
앱에서 이 책을 계속 읽으세요.

관련 챕터

최신 챕터

DMCA.com Protection Status